지금 한국 개신교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한국 개신교를 '미움과 배타성을 설파하는 종교' '분노의 종교'라 여깁니다. 또 '너무 상업적이다' '욕망을 제어하기는커녕 부추긴다' '욕망을 성찰하지 않는 종교다'라는 목소리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되면 수동적이게 된다'는 거예요. 아까 말씀하신 나쁜 성직주의를 관용하는 것은 사실 수동적인 신앙인과 관계가 있잖아요. 이 세 가지가 한국 개신교의 현재 문제인 것 같아요. 증오의 종교, 수용의 종교, 욕망의 종교라는 것말이에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6/196
권력 3부작의 마지막. 김진호의 <권력과 교회>에서는 한국 개신교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다룬다. 우리나라 종교인구의 약 20%를 차지하지만, 엘리트 집단의 개신교비율은 40%를 훌쩍 넘는 수준으로, 한국사회에서 개신교회가 미치는 영향을 절대적이다. 이러한 영향력을 가진 종교가 가지는 문제를 <권력과 교회>의 저자는 증오, 수용, 욕망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서북청년단 가운데는 교육받은 사람이 많았어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있었기에 테러를 해도 처벌받지 않았고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와 북한을 해방해야 한다는 정치적, 종교적 사명감까지 갖고 있었죠... 서북지역 내에서의 기독교는 융통성도 있고 다채로웠지만, 남한에 내려온 이들의 특정한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 서북주의 신앙은 굉장히 공격적이고 극우 반공주의적이며 분노가 중심이 되는 행동주의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죠.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15/196
미움이라는 마음작용이 적대적 테러 행위로 이어지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가 필요한데, 남한의 경찰기구나 미군정 정보기관이 그 장치를 마련해준 거죠. 이렇게 해서 테러 행위에 참여하게 되면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지고요. 그런 점에서 이는 '수행적 적대'라고 할 수 있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13/196
한국 개신교회가 증오의 종교가 된 것은 서북청년단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서북지역에서 탄압받고 남하한 이들은 공산주의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가졌으며, 이들 중 일부는 제주로 들어가 제주양민을 학살하는 4.3사건을 일으켰고, 일부는 18연대(백골부대) 창설의 주역이 되는 등 해방 후 한국사회 여러 곳에 영향력을 미치는데, 이들의 공통분모는 '철저한 반공(反共)주의'에 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남한으로 쫒겨내려온 이들에게 떠나온 고향땅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믿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구약 중심으로 보는 권위주의적 성서 해석이 아닐까요. 구약에서 권력과 건물숭상주의에 관한 부분만 부분절취(切取)해온 거죠. 성경에서 다윗 정권을 만드는 배경에 선지자 나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정권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목사들이 중세 이전의 세계관에 머물러 나단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거에요(p150)... '정복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바시(kabash)'는 착취하고 파괴하라는 뜻이 아니라 풍요롭게 되도록 돌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를 오독해 4대강 사업을 벌이는 등 폭력적이고 그릇된 복의 개념이 이 사회를 지배해왔어요. 이런 복을 받으려면 '우리 교회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말해요. 밖에는 적뿐이니까.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63/196
'증오'로 시작된 남한의 개신교회에게 외부는 '정복되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고, 지금의 어려움과 시련은 창대한 나중을 위한 미약한 시작이었다. 자연히 이웃사랑의 <신약>보다 계약의 <구약>이 강조되었으며, 구약시대의 판관(判官)들인 기드온이나 삼손처럼 목사들은 성도를 이끌고 외부와의 전쟁에 나서면서 개신교회는 위계의 종교 그리고 이러한 질서 수용의 종교가 되버렸다.
보스적 목회자는 영적 리더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 같아요. 보스와 성도의 관계는 시간일 갈수록 더욱 종속화되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증오가 쌓여요. 또 이런 보스적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들을 양산해야 하죠. 신도들을 단독자로서의 자유인이 아니라, 적들과 싸워야 하는 '분노의 전사'로 만들어내기 위해 교회 밖으로 적을 계속 만들어내요. 교회 안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도록, 분노를 교회 밖으로 향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반공, 반동성애 프로파간다가 이루어지고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0/196
교회 공동체의 배타성은 오히려 더 강화된 측면이 있어요. 저는 그들끼리 나누는 문화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배타성을 우려합니다. 그 배타성은 전형적인 '부드러운 야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외부에서도 노골적인 배타성으로 보이지 않고 집단 구성원들도 스스로 배타적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상 배타성이 작동하는 문화가 있죠. 그 구성원들은 모임에 소속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편견을 은연중 갖게 되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91/196
수용의 종교로서 개신교회는 외부적으로는 배타성을, 내부적으로는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같은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형제애'는 주중에는 사회에서 연계되어 하나의 계층구조를 형성하고 네트워크로 작용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교회에서 맺어진 이러한 연결망이 하느님의 축복이며, 이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과 이어진다.
굉장히 많은 집회에 참여하면서 '미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미팅은 대개 끼리끼리 이루어져요. 특정 지역에 속한 사람들, 자산 상태도 양호하고 교육 수준과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은 사람들은 교회에서도 그들끼리 사적 모임을 만들죠. 문화도 비슷하고 교류할 때 비용 분담도 용이하고, 이질적인 사람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없고요. 이렇게 계층화 현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 교회가 되어버렸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인 듯합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83/196
어느 교회에 속함으로써 갖게 되는 연줄망을 특혜가 아니라 신앙의 열매라고 보는 거예요. 신앙이 주는 '복'이라고 믿는 거죠. 그것이 오랜 기간 수많은 모임을 통해 몸에 각인돼버려요. 이런 신앙은 특권에 안주하고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무감각하게 하죠. 그러면서 개개인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삶을 살곤 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68/196
<권력과 교회>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구조안에서 영육(靈肉)간의 건강, well-being을 추구하는 욕망에 대해 지적한다. 이러한 욕망에 편승하여 개신교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참혹함 대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승에서도 영적으로, 물질적으로도 풍족함을 추구하는 종교로 점차 벗어나며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천국에 가기 위해서 천주교로 개종한다고도 하니 씁쓸한 웃음과 함께 이러한 문제가 개신교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서북주의자들이 '파괴적 증오의 정치'를 통해 부상했다면, 조용기로 표상되는 부흥사들은 '생산적 증오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적에 대한 증오를 성공에 대한 욕구의 자양분으로 전환한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증오의 전략에서 유용한 도구가 혼합주의였어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종교심을 활용하고 그것을 기독교적 종교성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25/196
교회를 만들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이끌었던 나운몽과는 달리 조용기는 자기 부흥운동의 센터를 구축했고, 그곳을 거점 삼아 팽창을 거듭함으로써 권력화된 종교성을 발전시켰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합한 혼합주의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운몽이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영혼의 구원에, 몸의 구원(건강)과 물질의 구원(풍요)을 결합한 '1+2'의 복음, 그것이 조용기의 저 유명한 '3박자 구원론'이에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동시에 결합한 기복적 신앙 양식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은 1970~80년대 한국 개신교 신앙의 한 전형으로 발전했어요.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24/196
정확히 말하면 '분노와 복의 목회'라고 할 수 있어요. 바깥으로는 적을 만들어 분노하게 하고, 안으로는 복이라는 개념을 왜곡해 신자들이 목사의 종이 되게 하는 구조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50/196
<권력과 교회>에서는 이처럼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점을 증오, 수용, 욕망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개선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방향 제시가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증오, 수용, 욕망을 막무가내로 추구하는 이보다 신앙의 본질에 가까이가려고 노력하려는 다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닐까.
<권력과 검찰>, <권력과 언론>, <권력과 교회>의 권력 3부작은 한국사회의 권력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덕적으로 교회에 의해 낙인 찍히고, 법적으로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의해 세상 끝까지 보도된다면 어느 누가 긴밀한 이들의 카르텔에 대항할 수 있을까. 책이 출판된 2017년에는 이들 기득권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으나, 5년이 지나 실패한 개혁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는 시점에 다시 읽은 권력 3부작은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성과가 있다면, 이들의 실체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까. 이제는 더 어려워진 시점에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지 보다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개신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잖아요. 대표적인 것이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기독교민주화 운동이죠. 또 노동운동 쪽에서도 상당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학생운동에서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을 보면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계열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상당히 거세게 올라오고 있을 때 최태민을 내세워서 반공과 친유신적 힘을 끄집어낸 것이죠... 거기서 놀라운 부분은 최태민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을 텐데도 한국의 개신교가 그를 내세워 구국선교단이나 봉사단으로 세를 떨쳤다는 점이에요. 그 부분이 한국 개신교의 약함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31/196
교회 바깥으로 분노의 정치를 실행할 투사를 키우고, 이들을 가짜 뉴스에 속아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명 한명의 신자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예수가 말하는 '바실레이아(basileia), 즉 하나님의 나라이자 진정한 교회의 할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회는 영혼의 안식을 주는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체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p177)... 예수는 옆사람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에게 간장이 찢어지듯이 아픔을 느끼는 것, 그것이 이웃이라고 했어요.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시스템에 대해 말한 것 같아요. 저는 교회 자체의 구제와 기부를 완전히 시스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_ 김진호, <권력과 교회> , p182/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