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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근대사의 핵심 문제는 어떻게 해서 ‘주‘ 단위를 넘어 국왕통치하의 영토국가를 형성하고 그 단위로서 강력한 힘을 모으는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경제적인 힘을 이 단위에서 형성하는가. 또 그  양자가  어떤 관계를 맺는가가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의 상황을 한탄하고 프랑스 국왕의 업적을  칭송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 보면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 P65

부르주아 자본가의 등장과 엄청난 빈민의 증가, 16세기 이후 유럽 사회에서는 이런 극단적인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장기적으로 도시 및 산업 부문, 다시 말해서  자본의 영역은 갈수록 힘을 더해갈 것이며, 그와 동시에 귀족은 완고한 힘으로 버티면서 자신의 몫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 변화의 와중에서 농민들은  분화되어갔고 그 중 일부는 빈민으로 전락했다.
근대 경제는 역동성을 띠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위기도 내포하고있었다. - P75

하지만 그를 불멸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사랑하던 여인 라우라를노래한 토스카나어 시집 『칸초니에레(Canzoniere)』였다. 1327년 그녀를처음 만난 순간부터 1348 년 그녀가 죽은 뒤까지 그녀에 대한 애모의 감정을 표현한 이 시집에서 그는 지상과 천상의 삶 사이를 방황하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묘사했다. 언뜻 보기에  페트라르카의 칸초니에레」는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근본적이 차이가 있다. 사랑하던 여인 베아트리체를 이상화시켜 천상에서의구원과 지상에서의 행복을 양립시킨 단테가 신학이 사상과 문학의 세계를 지배했던 중세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페트라르카에게서 인간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은 끝없는 갈등을 벌인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신뢰를 상실한 당대인들의 내면적 위기는 그의 제자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에서 신랄하게 묘사되었다. - P96

이전의 개혁가들과 달리 루터의 주장과 행보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확산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면벌부에대한 맹신과 순례자들의 돈을 긁어내기 위한 가짜 성물, 기적으로 꾸며진 순례지를 비판하며 성서 읽기를 호소한 루터의 글과 연설이 수많은젊은 신학자들과 세속 식자층의 공감을 얻으며 널리 퍼져나갔음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인쇄술이 크게 공헌했다. 타협에 굴하지않는 루터의 공격적인 태도 역시 사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성공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일의 정치 지배자들이다. 영방정부를 억압하거나 간섭하는 신성 로마 제국이나 대주교, 수도원장에게 분개한 그들은 비록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했지만 교회에 맞서 루터를  적극 지지하고 보호함으로써 루터 신학이 뿌리를 내리는데 기여했다. - P126

칼뱅 신학의 핵심은 운명예정설과 선민의식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현세에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신의 선택에 부응하는 것이다.
근검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 역시 신의 은총에 보답하는 길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루터가 이자 수입을 죄악시했던 중세 신학을 답습한 것과는 달리 칼뱅은 자본을 증대시켜 공동체의부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생산적인 대부를 고리대금과 차별화하고 인정해주었다.  - P133

이처럼 근대 초 유럽에서 군주와 귀족의 관계는 대체로 군주가 정치적, 법적 강제권을 독점하는 대신 귀족의 사회경제적 특권을 강화시켜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귀족은 면세권과 영주재판권 등 전통적인 특권외에도 상석권과 교수형을 면할 권리, 문장과 무기를 착용할 수 있는 권리 등 다양한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다양한 사회계층은 이처럼 사회적지위와 부가 보장되는 귀족을 동경하며 귀족사회에 침투하기 위해서 온갓 수단을 동원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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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world economy)는 지구 전역에 걸쳐 있다. 시스몽디가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전지구적인 시장" 또는 "함께 교역을 하여 오늘날에는 일종의 단일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인류 전체, 또는 인류의 어느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 세계-경제(world-economy)는 우선  전지구의 일부분에만 관련된 말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 독자적이며, 핵심적인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고, 내부적인 연결과 교역이유기적인 통일성을 이루는 단위를 말한다.  - P18

세계-경제에는 일정한 경계가 있는데, 그 경계선은  마치 해안선이 육지로부터 바다를 구획하듯이 그 세계-경제를 규정한다. 세계-경제는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도시와 하나의 지배적인  자본주의가 맡고 있다. 여러 개의 중심들이형성된다면 그것은 이 세계-경제가 아직 젊거나 아니면 반대로  퇴화해가거나 격변을겪고 있다는 표시이다. 이 공간  내에서는 각각의 개별 경제들이 계서제를 이루고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가난하고 어떤 것들은 소박한 수준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중심에 위치한 하나의 경제만이 상대적으로 부유한다. 이로부터 불평등, 전압차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이 전체를 작동시키는 힘이 된다. - P24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계서제를 내포하며, 그 계서제의 최상층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이 계서제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자본주의가 제일 마지막에 개입하는 곳에서는 하나의 중개점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것은 이질적이면서도 적극 협조를 아끼지 않을 사회계서제로서 이것은 자본주의의 활동을 확장하고 활성화시키는일을 한다.  - P82

금방 알아볼 수는 없지만 늘 한 방향으로 자신의 진로를 따라가고 있는 장기추세는 누적적인 과정, 즉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더해지는 과정이다.  이것은 물가과 경제활동들의 덩어리를 조금씩 조금씩 쌓아가는 듯이 움직이다가 어느 시점 이후에는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반대방향으로 하강을 계속한다. 이 움직임은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느린 속도로 아주 장기적으로 계속된다. 1년 단위로는 거의 아무런 계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세기 별로 보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동인이다. - P100

유럽 위에 건설된 경제적 복합체가 일련의 정기시 도시들로 귀결되는 것, 더구나 내륙지방의 정기시 도시들로 귀결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또한 프랑스 내에 서유럽 경제의 중심이 건설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던  사람들이 의식하지도 못한 새에 쥐고 있다가 놓쳐버린 보물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잇는 남북간 도로, 지중해와 북해 사이의 해상 연결로 등은 13세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특권적 유통로를 만들어놓았다. 이 유통로는 프랑스를 건드리지도 않은 채 먼 거리를 두고 돌아가고 있었다. 대교역과 그 대교역이  실어나르는  자본주의는 프랑스 영역의 거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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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차이퉁》 지는 자사 기자들에게 일어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알려지자 상당히 유별난 태도를 취했다. 광적인 흥분! 대서 특필. 1면 기사. 호외 발행. 통례를 벗어난 크기의 부고. 어차피 피살 사건이란 늘상 일어나는 것인데도, 마치 저널리스트 살인 사건은 뭔가 특별한 것인 양, 은행장이나 은행원 혹은 은행 강도 살인 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언론의 과잉 반응에 대하여 언급해야겠다. 《차이퉁》 지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들까지도 실제로 한 저널리스트의 피살 사건을 특별히 더 나쁜, 특히 경악스럽고, 거의 장엄하기까지 한, 그러니까 종교 의식적인 살해와 같은 수준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자 《차이퉁》만은 카타리나가 보지 못하게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엘제 볼터스하임은 잠들고 콘라트 바이터스는 욕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 잠깐 동안에 카타리나가 살짝 밖으로 빠져나가 어스름 새벽녘에 처음 눈에 띈 가장 좋은 《차이퉁》 무인 판매함을 부수고 열었다. 일종의 성물 절도 같은 짓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돈을 내지 않고 《차이퉁》을 빼냄으로써, 《차이퉁》의 신뢰를 악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역류 정체 현상은 일단 끝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이 바로 블로르나 부부가 의기소침하고 신경이 곤두선 채 우울한 기분으로 야간 열차에서 내린 후 나중에 집에서 보려고 같은 판 《차이퉁》을 손에 넣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대략 마흔 살쯤 돼 보이는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몹시 비탄에 젖은 듯, 거의 쇠락한 모습으로 그들이 살았던 게멜스브로이히의 남루한 오두막 앞에 서 있는 사진, 마지막으로 카타리나의 어머니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사망한 병원 사진도 실렸다. 기사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여전히 자유의 몸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카타리나 블룸의 입증 가능한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행실에 대한 충격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어머니는 죽어 가고 있는데 그 딸은 강도이자 살인자인 한 남자와 다정하게 춤추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기이한 일이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극도의 변태에 가깝다. 이 여자는 정말 ‘얼음처럼 차갑고 타산적’일까?

얼마 전에 어느 유명한 정보학 교수가 이 소문을 계속 퍼뜨렸는데 그도 직접 정보를 구하는 것이 꺼림칙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정보학자는 어떻게 정보를 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풍문’으로, 즉 제2, 제3의 입을 거쳐, 아니, 심지어 여섯 사람의 입을 거쳐 전해진 소문으로 정보를 구하는가?

10년만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차이퉁》이 숱한 비방과 혐의를 퍼뜨리던 그 시절을 회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이퉁》은 아직 살인자로 입증되지도 않은 많은 사람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했다.

주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놓여 있고,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그런 정보 교환 시, 우스울 정도로 사소한 것이 혐의점이 되곤 한다.)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거기서는 어떠한 장미도 꽃을 피우지 못하며, 그사이 이 ‘소박한 소녀’는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가도록 도와줌으로써 정말로 벌 받을 만한 행동을 했고, 명예와 품위를 잃는다.

이것은 범죄 소설의 아주 낡은 모티프 중 하나이다. 이제 《차이퉁》은 무엇 앞에서도 두려워 물러나지 않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을 이 《차이퉁》의 탓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기자는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렇게 화가 나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에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뿐만 아니라,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도 있다는 것이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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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선사 예술 이야기
장 클로트 지음, 류재화 옮김 / 열화당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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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면미술(岩面美術, art rupestre)의 주요한 세 가지 주제(기하하적 부호, 인간, 동물)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기하학적 부호이고, 시야를 사로잡는 것은 몸집 큰 동물들이다. 작은 크기의 종들(새, 토기/산토끼, 물고기)은 좀 덜 그려졌다. 후기 구석기시대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동물은 말, 들소, 오로크스, 매머드, 순록, 사슴, 야생 염소 등이다. 털코뿔소나 곰, 동굴 사자들은 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그림들은 사냥꾼의 주제로, 그들이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냥감, 포식동물, 여타의 큰 짐승 등을 그렸을 것이다. 반대로 식물이나 채소 그림은 부재한다. 마찬가지로 어린이, 아기, 출산이나 가사장면, 그리고 우선적으로 여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도 없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66/243


 프랑스 고고학자 장 클로트(Jean Clottes, 1933 ~ )는 <선사 예술 이야기 Pourquoi l'art prehistorique?>에서 선사 시대 미술 작품 안에서 신화(神話)를, 신화 아래에서 자연(自然)과 인간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이들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 샤먼(Shaman)에 대해 말한다. 언어가 없었던 시대의 미술 작품은 공동체의 의사전달 수단으로 기능했다.


 신화에는 다양한 역할이 있다. 그 다양성과 복잡성 중에서 우리는 주요한 세 가지 특징을 구분해 볼 것이다. 물론 다 연결되어 있지만, 설명의 용이성을 위해 분리해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역할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주요한 역할은 설명적이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자연 현상에 직면하면 인간은 늘 그것을 해석해 보려는 경향이 있다(p150)... 신화의 두 번째 주요한 요소는 집단 내부의 사회적 역할이다. 신화는 한 집단이 겪은 여러 이야기를 통해 그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구전 문화를 통해 전승함으로써 집단적 정체성을 만든다(p151)...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요 역할은, 신화와 그 신화를 구체화하는 그림이 그 자체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이라는 재현물은, 또 그에 걸맞은 의식은 어떤 세계나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52/243


 선사 시대의 예술 작품 중 남아있는 것은 미술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어두운 깊은 곳에 의미를 가진 부호들이 바위에 새겨질 때, 시각적인 의미만 주어졌을까? 후각을 통해 동굴 안의 위험을 파악하는 것도, 작업 도중에 일종의 주문(呪文)처럼 청각 역시 예술의 일부였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선사 시대 당시에는 미술의 일부였던 어느 부분처럼 암면에 새겨진 동물들의 의미 역시 단순히 사냥감 이상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안내원들이 퓨마가 있는지 없는지 흔적이라도 살펴봐 주길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안내원은 이쪽저쪽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공기를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제히 퓨마는 지금 거기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니 무서워하지 말고 한번 가 보자고 했다. 우리 문명권에서는 후각을 지식과 방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59/243


 <선사 예술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신(神)' 이전에 '자연의 중심으로서 동물'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때 샤먼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들어낸 조물주에게 많은 사냥감을 달라고 기원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조화를 기원했음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석기 시대의 수많은 신화들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으로 소멸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어떤 신앙, 특히 샤머니즘의 근본에는 인간종과 동물종을 포함한 여러 종들 간의 깊은 상호 연대에 대한 믿음이 자리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른바 의인화된 신은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다." 구석기 예술에서 동물들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나타나는 것이 비로소 이해된다. 우주의 힘을 지배하는 정령을 구현한 것은 동물들이었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48/243


 땅과 물, 바람과 불의 신은 넷째 층에 산다. 사람마다 자기 안에 이 네 개의 신을 균형적으로 가지고 있다. 샤먼의 역할은 이 네 가지 요소의 균형이 깨졌을 때 다시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다섯째 층에는 사방위 신들이 산다. 이건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신들이다. 샤먼들이 사방위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새삼 다시 알게 되는 대목이다. 우주의 기본 원칙은 조화와 균형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높은 것과 낮은 것 간의 균형이 있다. 그것이 깨지면 반향을 일으키는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샤먼이 개입해야 한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샤머니즘은 인간이 자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는 개념을 갖는다. 샤머니즘에서 정령은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모든 것이며 신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서로 다 관련되어 있고 상호연결되어 있다. 샤먼 의식은 인간 집단과 돌, 동물,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과 우주와 정령들이 하나되도록 하는 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44/243


 <선사 예술 이야기>는 선사 시대 예술을 현대인의 관점이 아닌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석기 시대 이후 세계관에서는 암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식량에 불과하지만, 최소한 구석기 시대 인간들에게 이들은 함께 세상을 이루는 또다른 동료였다. 자연을 개발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는 구석기 시대 인간들의 세계관이 표현된 깊은 동굴의 암면화. 선사 시대의 예술을 만든 이의 시각에서 온전하게 받아들였을 때, 오늘날 기후변화와 같은 현대 문명의 과제를 바르게 풀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샤머니즘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은 세계(또는 세계들)의 투과성과 유동성이다. 샤먼적 요소들(환영이나 환각)이 대부분 모든 종교에 존재한다할지라도, 이런 개념들이 신앙 및 의례에서 상당히 오래 지속되는 틀을 가질 정도로 충분히 강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샤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결론은, 이만여 년 동안 충분히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기본 개념을 갖춘 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전역에 이 종교를 토대로 한 동일한 행동이 있었을 것이므로, 그 토대를 탐색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그 토대를 통해 사고의 틀, 세계에 대한 특정한 개념 등을 갖추어 갔을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_ 장 클로트, <선사 예술 이야기> , p172/243



우리는 동물들이 놀라운 힘과 특질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도 보는데, 동물을 신성하게 간주하는 문화의 이런저런 양태들을 보면 그 문화가 그 동물을 그렇게 상상하고 해석하는 측면이 있다. _ p96/243

인간 정신성의 위대함이 만일 이 죽은 자들이 가있는 세계를 어떻게든 찾고 그 세계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에서 일어났다면, 연속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그 실현이라는 희열(실제 체험이든 환각이든)만이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는 근본적 원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환치 가능한 등가어인 이유는 흔히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선사인과 현대인은 죽음 앞의 이 무력함에서만큼은 진정한 동시대인이다. _ p222/243

선사인들이 동굴 내벽 너머 다른 세계와 닿기 위한 간절함으로 암각화를 새겼듯 현대의 예술가는 선과 색채를 통해, 즉 ‘언어‘를 통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세계와 닿으려고 몸부림친다. 예술이 선과 색채, 언어 자체에 있지만은 않음은 이쯤 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회화든 문학이든 한 작품에 씌여진 ‘언어‘를 읽으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 언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언어 너머로 흘러드는 것이다. 독서의 순간이다. 무아지경의 순간이다. _ p22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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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라 2022-06-10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술이야기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거였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역사, 종교, 철학까지 풀어질 수 있는 것이 예술이었네요.
깊이 있는 분야들을 독서하는 분들의 내면의 깊이를 따라 배우려면 리뷰를 통해 접한 장르들에 조심조심 따라 들어가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2-06-10 22:21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말씀처럼 예술에는 역사, 종교, 철학 등 당대의 사회상이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역사, 종교 등 다른 분야도 모두 서로의 모습을 담고 영향을 미치고 있겠지요. 어느 한 분야를 제대로 알려면 종합적으로 알아야 하는데 참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책을 읽을수록 알아가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 뿐인 듯 합니다. ㅜㅜ 이 점이 안타깝습니다만, 미력하나마 꾸준하게 채워가야겠지요... 이하라님 좋은 금요일 밤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보살핌(affection)과 물질노동으로 구성되며 종종 임금도 지급되지 않는 이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 노동 없이는 문화도 경제도 정치구조도 있을 수 없다"
1)고 단언한다

돌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매개로 그동안 간과되어온 ‘사회적인 것’들을 다양하게 재발견하고 합당한 자리로 복원시키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사회적 질서를 상상하고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라 하겠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자신의 주변과 관계적 지평을 생성하는 구체적 행위가 돌봄이라면, 돌봄을 정치화하는 저 엄마들의 묵념에는 삶과 죽음의 구분을 무화시킴으로써 ‘살아 있음’의 지평을 한번 더 열어내는 힘, 나아가 ‘진정한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힘이 내재하고 있다.

기후위기와 문학이라는 주제에서도 결국 핵심은 무엇보다 각자의 삶이 먼저 달라지고 생각이 깊어지고 말이 담백해지는 일이라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어떤 경우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상상하고 설계하지 않는 한 에너지대전환의 시대도 가능할 법하지 않다. 대전환에 도달하기까지의 이행기는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대다수 민중들에게 ‘안빈’이나 ‘청빈’도 사치에 불과한 이상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의 소용돌이’를 초래한 모든 근대주의 관념들에서 탈피하는 작업이야말로 극복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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