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극장 2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2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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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형이상학에서는 결국 존재자가 존재의 척도이자 목표이고 실현이 된다. 존재자가 존재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를 전제하고서 이 존재자의 공통 성격으로 존재를 도출하거나, 아니면 그 존재자 전체의 근거이자 원인으로 최고 존재자를 찾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가 존재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에 입각해 존재자 정체를 사유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 시대 이래로 니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모든 사유는 형이상학적 사유다." 이것이 이 강의를 해나가는 하이데거의 근본 원칙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95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의 주제가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라면, <하이데거 극장 2>의 주제는 <니체 Nietzsche>다. 영원회귀를 통한 생성으로부터 어떤 고정된 상태로의 수렴, 권력의지라는 무한동력을 통한 변화로부터 정지상태로의 회귀는 예술과 진리에 대한 의지 양 방향으로 나타나고 이들은 서로 대립한다. 초감성적이며 보편적인 세계와 감성적이며 개별적인 세계. 니체에게 진리와 예술, 진(眞)과 미(美)는 대립한다.


 무한한 생성, 무한히 반복되는 권력의지로서 세계 곧 존재자 전체는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흐름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상, 동일한 상태도 단 한 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다. 세계 곧 존재자 전체가 권력의지이므로, 다시 말해 무한한 생성으로서 힘들의 바다이므로 그 무한한 생성은 '동일한 것의 영원한 회귀'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무한한 생성은 최종 결과만 보면 결국 동일한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무한한 생성은 무한한 생성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어떤 '고정된 상태'에 귀착하게 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52


 니체에게 플라톤-기독교적 진리는 가상이고, 예술은 생 자체를 긍정하는 참된 진리다. 그렇지만, 니체에게 진리는 그 자체로 오류이기 때문에 생의 욕구를 통한 새로운 지평에서 참된 세게와 가상 세계 모두 소멸되고 남는 것은 무(無)가 된다. 니체의 인식은 여기에서 머무르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 지점에서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로 비판한다.


  니체에게 '진리를 향한 의지'는 플라톤과 기독교가 말하는 '참된 세계', 초감성적인 것을 향한 의지다.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에서는 그 초감성적인 세계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그래서 그 '참된 세계'를 향한 의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세계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러나 예술은 바로 이 세계, 이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세계, 늘 바뀌고 변하는 이 현실의 세계를 고향으로 삼는다. 니체에게는 바로 이 세계가 본래적이며 유일하게 참된 세계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264


 참된 세계가 제거됨과 동시에 참된 세계를 척도로 하는 가상 세계도 제거되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세계는 '가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세계'다. 그러므로 세계 곧 존재자 전체와 대립하는 것은 '참된 세계'가 아니라 '무'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가상 세계와 참된 세계의 대립은 '세계'와 '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극한의 지점에서 니체가 '호모이오시스 곧 일치로서 정초된 진리'의 최후의 형이상학적 변화 앞에 선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19


 어떤 이유로 하이데거는 니체를 '최초의 근대인' 페트라르카가 아닌 '최후의 중세인' 단테와 같은 위치에 놓았을까. 하이데거는 니체의 '무'에 '없음'과 함께 '없음'이라는 존재, '무존재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플라톤 이후 니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논의는 존재자를 존재로 정의하는 순간, 또다른 존재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잡힐 듯 빠져나가는 존재의 의미. 니체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비판지점이다. 프로이트의 구도로는 형이상학에서 정의하는 것은 의식으로 드러나는 부분이지, 무의식으로 감춰져 있는 영역을 넘어설 수 없고, 이것이 근대 형이상학의 한계가 된다. 마치,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에 만리장성 넘어 침입해왔다가 유유히 사라진 유목민족처럼, 라인강 건너 슈바르츠발트의 검은 숲속에서 로마 제국의 변경을 위협한 게르만 민족처럼 존재자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고대 중국과 로마 제국의 오랜 고민이었던 것처럼, 형이상학의 오랜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하이데거는 무라는 것이 존재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무가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곧 '단적인 무'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의 무에는 '존재'도 들어있다. 다시 말해 무는 '존재'가 현성하는 방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여기에 니체의 형이상학이 '완성된' 니힐리즘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40


 그렇다면, 존재를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실존 - 자기를 앞질러 있음-을 통해 새롭게 정의할 수 없는 은폐된 존재의 비밀, 알레테이아가 드러날 수 있음을 말한다. 실수의 범위 내에서 정의할 수 없는 식에 대해 복소수의 범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숨겨진 허수의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이처럼 알레테이아는 실존적 상황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그 전모가 나타난다.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의 비은폐성 안으로 존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비은폐성이야말로 존재 자체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존재 자체의 에포케(epoche)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에포케는 '억제/자제'라는 뜻과 함께 '시대/시기'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는 말이다. 하이데거는 이 말을 존재가 자신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 '역사적 국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존재의 에포케는 은닉된 방식으로 형이상학의 국면 국면을 형성한다. 그 형이상학의 마지막 국면이 바로 니힐리즘이 극한에 이르는 시기다. 이 마지막 시기에 주체성의 형이상학은 완성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395


 <하이데거 극장 2>에는 이외에도 하이데거이 후반시기의 삶이 그려진다. 나치와 관련된 이야기 등 여러 흥미있는 이야기들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후반기 주저 <니체>의 큰 흐름을 대강 살피는 리뷰는 이상으로 갈무리하자...


 하이데거는 '존재 사유'를 이야기한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사유하는 형이상학에 대립한다. 존재 사유를 통해 인간은 무곤궁성의 곤궁을 '존재 자체가 밖에 머물러 있음'의 운명으로 경험할 수 잇다. 존재 사유는 존재자만을 뒤쫓는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립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존재 사유는 이 형이상학적 사유를 지팡이로 삼아 자신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 존재의 진리가 환히 열리는 그 열린 터에 설 때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향해 해방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2>, p400



메모들에서 니체 자신이 논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이 ‘권력의지‘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사상이 ‘존재자 전체의 존재‘를 부르는 두 가지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자가 존재자 전체의 존재 성격이라면 영원회귀는 존재자 전체의 존재 방식이라고 해석한다. 존재자 전체를 니체는 ‘세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 곧 세계의 본질이 권력의지이며, 그 세계의 존재 방식이 영원회귀라는 것이다. - P246

이 세계 전체, 다시 말해 우주 만물을 포함하는 존재자 전체는 힘들의 바다다. 그 바다는 크기가 한정돼 있고 시간은 무한히 흐른다. 그 바다 안에서 힘들이 바닷물처럼 출렁거리고 요동치고 흘러 다닌다. 그런데 그렇게 끝없는 흐름과 요동은 그것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과거에 있었던 동일한 상태에 언젠가는 이르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많은 시간과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번은 동일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니체의 근본 발상이다. - P252

본질로서 진리는 하나뿐이다. 하나뿐이라는 것은 이 본질로서 진리가 모든 참된 것들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진리는 개별적인 참된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것들의 보편적인 본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보편적 본질로서 진리는 모든 참된 것들에 적용되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는 명제가 생기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진리의 본질은 불변하며 영원한가? 하이데거는 본질을 개별적인 것들에 두루 일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본질은 변할 수 없다‘는 명제가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질이 변한다고 해서 그 본질이 두루 타당하다는 사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276

알레테이아 곧 그리스적 의미의 진리는 ‘비은폐성‘ 곧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다. 존재자의 드러나 있음이 곧 진리다. 그러므로 인식이란 그렇게 드러난 존재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가 이미 드러나 있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다. 진리의 본질은 알레테이아이고, 그 알레테이아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시원적인 진리 개념 곧 ‘비은폐성으로서 알레테이아‘는 곧 망각됐고, 플라톤 이래로 점차로 인식이 진리를 규정하는 척도가 돼 근대에 들어와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이 되고 말았다. - P308

니체의 ‘가치 사상‘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니체에게 모든 것의 근원은 권력의지다. 그러므로 가치도 권력의지가 설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권력의지는 가치를 설정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원근법적 전망‘ 곧 ‘관점‘(Perspektive)에 있다. 권력의지는 자신을 유지하고 고양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정립한다. 다시 말해 권력의지는 자기 유지와 자기 고양이라는 두 시점에 따라 전망하고 내다보면서 가치를 정립한다... 이 차기와 관련된 것 가운데 하나가 ‘도덕‘이다. 니체에게 도덕은 초감성적인 세계를 척도로 정립하는 가치 평가의 체계, 존재자의 생존 조건과 관련된 가치 평가의 체계를 의미한다. 이 도덕에서 초감성적인 것을 정립하는 모든 형이상학이 발원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 P352

니힐리즘을 본질적으로 사유하려면 형이상학을 떠나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니힐리즘을 존재 역사의 시야에서 사유해야 한다. 존재 자체가 역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니힐리즘이라는 형태로 탈은폐한 것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힐리즘의 본질은 인간의 사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사태임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존재 자체의 사태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인간 본질의 사태이자 그 본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인간의 사태가 된다. 이것이 니힐리즘의 존재사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 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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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스에 필요한 건 분명 구조조정과 재정규율, 그리고 경제성장이었다. 그렇지만 현재 위기에 처한 건 바로 유로존의 금융안정성이었다. 그리스의 공공 부문 채무는 유럽 전체의 금융시스템 안에서 보면 일부분에 불과했다.

당시 그리스 위기에 대한 처리를 놓고 이어졌던 미국과 유럽간의 팽팽한 입장 차이, 이것이 바로 그리스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을 최초로 선택하게 된 상황이다. 유럽이 비상사태 체제로 빠져든 것은 단일한 주권 창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할 당국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고 그리스 문제를 논의하면서도 유로존 전체를 위한 포괄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럽중앙은행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유럽 국가들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는 지금 어떻게 유럽의 중앙은행이 저렇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의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재조정하는 대신에 모든 공공 부문과 비틀거리는 경제 분야 전체를 구조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 개선이라는 대담한 제안은 IMF가 실제로 그리스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원계획에 포함한 내용들이다.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금융위기가 과도한 채무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경기회복을 위해 세계가 독일에 기대하는 역할은 자금을 푸는 것이 아니라 긴축경제의 모범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 각국 정부는 지출과 채무를 반드시 적절하게 통제해야 했다. 유럽의 인구 문제는 상황을 더 급박하게 만들었다. 노동시장과 실업 문제에 대해서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하르츠 IV 개혁 정책의 교훈을 배워야 했다. 케인스학파가 국내수요를 염려하고 있을 때 독일이 내놓은 해답은 바로 수출이었다. 노령인구가 늘고 있는 유럽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출을 늘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시장국가들에 대해 채권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해야 했다.

201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유럽 은행들에 대한 CDS 스프레드, 즉 은행 채권의 부도 위험에 대한 보험금이 두 차례 뛰어올라 미국 은행들에 대한 보험비용을 웃돌았다. 그 첫 번째 시발점은 그리스였고 두 번째는 아일랜드였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너무나 규모가 크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해당 국가들이 각자 해결할 수 없었다.

양적완화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금융시장을 통해서 전해진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다량 매입하면 채권 시장금리가 떨어지고 자산관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수익률 높은 다른 자산을 찾는다. 그렇게 채권에서 주식으로 관심을 돌리면 주식시장이 호황을 누리며 포트폴리오의 자산가치가 증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나선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경제를 자극하는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방법은 되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의회에서 재정정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미연준이 채택하는 긴급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지만 연준 자체 역시 미국 정계의 갈등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정치가들은 결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금융위기는 정치위기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2011년 봄에 터져 나왔던 국민들의 저항은 현 정부를 바꿔놓지 못했다. 정부의 정책을 바꾼 건 열정과 상상력만 있는 저항이 아니라 2010년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이라는 전략, 그리고 대충 꿰맞춘 "해결책"이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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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극장 1 - 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 하이데거 극장 1
고명섭 지음 / 한길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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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올바른 물음은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das Gefrgte),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 다시 말해 물을 때 겨냥하는 것(das Befragte), 셋째, 물음이 밝히려 하는 것(das Erfragte)을 지니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물음의 형식적 구조'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첫째, 물어지고 있는 것은 물음의 대상 곧 '존재'다. 둘째,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은 그 존재를 해명할 때 본보기가 되는 존재자를 가리킨다. 그것이 바로 인간, 하이데거가 쓰는 용어로 하면 '현존재'다. 셋째, 물음이 밝히려는 것은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존재 물음의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요컨대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2


 고명섭의 <하이데거 극장 1>에는 전기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 ~ 1976) 사상과 이 시기 그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와의 사랑도, 카시러(Ernst Cassirer, 1874 ~ 1945)와 치룬 다보스 결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하이데거 극장 1>에서 하이라이트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먼저 존재, 존재자,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며 <존재와 시간>의 큰 틀을 설명한다.


 존재는 존재자를 떠나 따로 있지 않고, 존재자도 존재를 떠나 따로 있지 않다. 인간이라는 존재자는 인간의 존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은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존재 물음이 밝히려는 것이 바로 '존재의 의미'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의미란 '존재가 가리키는 바'를 뜻한다. 하이데거의 논의를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자면, 존재의 의미는 '시간'이다. 인간을 예로 들면, 인간의 존재는 곧 시간을 사는 것을 뜻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3


 존재자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 존재자의 존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인간은 현존재로 지칭된다. 존재가 드러나는 곳이 인간이라는 현존재라면,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존재자에 의해 드러나게 된다. 


 진정한 현상 곧 현상학적 현상은 칸트의 선험철학 지평 안에서 보면 '공간과 시간' 같은 직관의 형식을 가리킨다. 공간과 시간이 드러나 있어야 거기에서 존재자들이 존재자로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자들을 직관하는 이 감성적 형식은 곧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상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공간과 시간이 바로 현상학적 현상 곧 존재자의 존재인 셈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1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가리켜 현존재(Dasein)라고 부른다(p314)... 하이데거가 다자인을 인간을 규정하는 말로 가져다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자가 바로 '존재(Sein)의 거기(Da)'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존재의 장소라는 뜻이다. 인간이란 정신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고 주관도 아니고, 존재가 드러나는 자리 곧 현-존재(Da Sein)인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15 


 은폐되어 있던 존재는 존재자의 말을 통해 비로소 드러나게 되고, 현존재의 독특한 있음 - '실존'(Existenz) - 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게 되지만, 각기 다른 현존재가 모두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디서나 각자 자기로 있다. 각기 다른 현존재는 다른 어떤 인간으로도 대체될 수 없지만, 이러한 실존은 세인에 의해 은폐되고, 비실존적인 삶 속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가? 하이데거는 '공동존재에 몰입'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의 삶이 모두 실존적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가 존재를 통해 온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는 존재자로서의 현존재가 독립된 모나드와 같이 폐쇄된 개체가 아니라 세인(世人, das Man)과의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다.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로고스는 사태를 밝히는 말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로써 드러냄이기 때문에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여기서 참, 진실, 진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알레테이아(aletheia)다. 알레테이아의 본래적 의미는 '사태 자체의 드러나 있음'이다. 동사형인 알레테우에인(aletheuein)은 '참말로써 사태를 드러냄'을 뜻한다. 그러므로 알레테우에인으로서 로고스는 '말을 통해 존재자를 은닉돼 있는 것을 말함을 통해 드러냄이다. 알레테이아는 '사태 자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남'을 가리킨다. 그것이 진리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발언함 곧 판단함'에서 입증되는 진리는 이차적인 진리일 뿐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33


 현존재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 공동존재에 몰입해 있는데, 그렇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사태다. 각각의 현존재는 공동존재 안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자기 자신이 아닌 자'를 하이데거는 세인(das Man)이라고 부른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361


 세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현존재. 비실존적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문제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해서다. 존재자에게 근원적인 불안을 안겨주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세인은 '모호한 확실성'을 통해 진리를 은폐하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며 살아가고 있다. 알레테이아는 은폐되었다. 세인은 존재자의 유한성을 은폐하고, 존재자에게 비실존적 삶을 강요한다.


 세인은 말한다. "죽음은 확실히 온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이 '하지만'이라는 말로써 세인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빼버린다. '당장은 아니다'라는 이 해석을 통해 세인은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죽음은 '나중에 언젠가'로 미루어진다. 이렇게 죽음이 들이닥치는 그 '언제'를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의 '무규정성'을 자기 편할 대로 해석함으로써 세인은 죽음의 확실성을 은폐하고 만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10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존재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여기에서 현존재의 결단을 말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죽음을 피하지 않고 직면했을 때, 존재자를 유한하게 만드는 시간의 한계성은 극복되고, 존재자를 통해 존재의 진리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단성이란 양심의 부름에 따라 살겠다는 결의/결심을 뜻함과 동시에 그런 결단 속에 현존재 자신과 세계가 새롭게 개시됨, 새롭게 열려 밝혀짐을 뜻한다. 이 새로운 개시성(Erschlossenheit, 개시돼 있음, 열려 밝혀져 있음)이 바로 결단성이다. 개시성이라는 말이 닫힌 것을 열어 밝힌다는 뜻을 품고 있듯이, 결단성이라는 말도 닫힌 것을 열어젖힘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개시성(열려 밝혀져 잇음)을 바로 '근원적인 진리'라고 부른다. 개시성이 근원적인 진리인 것은 진리 곧 알레테이아가 비은폐성 곧 '은폐에서 벗어나 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29


 결단이 진정으로 본래적인 결단이 되려면, 죽음으로 앞질러 달려가봄이라는 시험과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봄은 모든 우연적이고 비본래적인 것들을 모조리 떨쳐내버리는 극한의 시험이고 시련이다. 이 시련과 시험을 통과한 결단성만이 진정한 결단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결단을 통해서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33


 현존재는 회피하는 방식으로든 마주보는 방식으로든 자신의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 죽음과 언제나 대결하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현존재의 전체성을 확보할 가능성도 생겨난다. _ 고명섭, <하이데거 극장 1>, p407


 <하이데거 극장 1>에서 언급된 <존재와 시간>의 내용을 거칠게 정리했지만, 사실 많은 부분이 빠져 있어 리뷰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논리적 비약이 있는 듯한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한계점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뼈대 위에 <존재와 시간>에 대한 다른 해설서로 살을 입히면서 이해를 깊게 한다면, <존재와 시간>의 어려움도 조금은 해소되지 않을까...


 글을 마치기 전에, 어제 있었던 이태원 할로윈 참사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154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한 이 참사를 접하면서 우리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주변의 지인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죽음이 당장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의 일처럼 방관해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세인이 우리에게 죽음에 대해 침묵하고, 애도할 때라고 강요할 때라도 우리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죽음을 당할 수 있었음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유한성을 넘어 공동존재로서 그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직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실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월호 사건을 통해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방송에 수많은 승객들이 죽음을 당했고, 애도할 때라는 말에 애도만 하다가 불과 몇 년만에 '지겹다'와 '시체팔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이 우리에게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면,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에 대한 직면을 하고자 하는 마음 또한 현존재의 실존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다...

현존재의 존재를 실존으로 이해할 때, 그 실존을 규정하는 범주들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특별히 ‘실존범주‘(Existenzialien)이라고 부른다. 실존범주는 일반 범주(Kategorie)에 맞서 현존재의 실존적 특성을 규정하는 개념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 양상을 규정하는 범주를 따로 적시해 실존범주라고 지칭한다. 또 이런 실존범주에 따라 인간의 실존을 분석해 들어가는 것을 ‘실존론적 분석‘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존재의 의미‘는 결국 ‘시간성‘(Zeitlichkeit)으로 드러나게 된다. 시간성이란 ‘장래를 향해 자신의 가능성을 기투하고 이 가능성의 빛 아래서 과거를 반복하고 재해석하면서 현재를 열어 밝힌다‘는 현존재의 시간적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 P322

현존재는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어 밝히고 그 세계 안에 세계 내부 존재자들을 품고 있다. 현존재가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은 현존재와 분리된 세계가 따로 있고, 인간이 그 세계라는 공간 안에 주관이나 의식으로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함과 동시에 세계를 열면서 세계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재의 ‘세계 안에 있음‘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 이전의 사태다. 인간이 세계 안에 있다는 이 원초적 사태에 근거를 두고서 그 위에서 주관과 객관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있다‘는 말로 요약한다. - P345

‘세인‘은 ‘일상적인 현존재‘는 누구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제시되는 사람이지만, 그 세인은 아무도 아닌 자다. 그렇게 아무도 아닌 자에게 모든 현존재가 자기를 내맡겨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아닌 자인 세인이 일상성의 실질적인 주체로, 주인으로 드러난다. 세인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현존재는 비자립적이고 비본래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다. 현존재가 본래적인 자기를 찾으려면 이 세인-자기를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본래적인 세인-자기를 극복해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것, 이것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현존재의 과제다. - P365

‘실존‘이 ‘자기를 앞질러 있음‘ 곧 ‘자기의 가능성을 기투함‘을 가리킨다면, ‘현사실성‘은 ‘이미 안에 있음‘ 곧 ‘던져져 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 내부 존재자에 몰입해 있음‘에서는 ‘퇴락‘이 표현돼 있다. 하이데거는 이 세 가지 구조 계기를 죽음의 현상에서 그려본다. - P407

하이데거는 선택의 ‘비성‘에서 인간의 ‘자유‘를 찾아낸다. 자유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들을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자유란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신의 몫으로 짋어짐을 뜻한다. "자유는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것을 견뎌내는 데 있다." - P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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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온 광풍을 몰고 왔던 음이온 공기청정기는 사실 공기를 통해서 흐르는 전류의 코로나 방전을 이용한 오존발생기ozonizer였다. 공기 중에서 번개가 칠 때 공기 중의 산소가 깨지면서 오존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당 발생량이 아니라 실내에 누적되는 오존의 농도다. 시간당 발생량이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좁은 실내에서 음이온 기능을 장시간 작동시키면 오존의 농도는 위험 수준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으므로 우주에서 우리의 위치는 특별하지 않다. 이는 ‘코페르니쿠스 원리Copernican principle’ 또는 ‘평범의 원리principle of mediocrity’라 불린다. 여기서 평범이란 특별할 것이 없다는 의미다.

도덕률이 신의 명령이라는 주장은 정말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다. 명확한 이유가 없다면 신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겠는가? 그러할 이유가 정말 있다면 우리의 행동을 옳고 그르게 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신은 도덕의 창조자가 아니라 그저 도덕의 중개인이나 집행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개인은 건너뛰어도 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 그 판단의 근거들을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위와 같은 과정에 인간의 이해가 개입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많은 사람이 도덕은 결국 주관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분명 상기의 서술에 따르면 도덕 규칙은 주관적인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적 계약이나 사회적 관습이 관련된다는 것도 물론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도덕 규칙이 근본적으로 임의성을 띌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선과 악은 사회적 맥락에서만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도덕 규칙은 우리가 서로 어떻게 대하고, 우리가 개인, 가족, 종족으로서 어떻게 번영하고,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떻게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도덕적 직관은 종종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장악되곤 한다. 종교적 이념뿐 아니라 세속적 이념은 일촉즉발의 도덕적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이념은 잔인함을 거부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직관을 무장해제 시켜 평소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린치를 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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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표현.이해 고전의세계 리커버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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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세계의 연관(聯關, Zusammenhang)은 주관(主觀, Subjekt)에서 시작되며, 개개의 논리적인 과정들을 서로 연결하고 있는 정신적 세계의 의의연관(意義聯關, Bedeutungs-zusammenhang)에 대한 규정에까지 이르는 정신의 운동이다. 그래서 이 정신적 세계는 파악하는 주관의 산물인데, 한편으로 정신의 운동은 그 세계 안에 있는 객관적 지식의 획득을 지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주관에서 정신적 세계의 구성이 어떻게 정신적 현실〔혹은 실재〕에 대한 앎을 가능하게 해주는가’라는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5/210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 ~ 1911)의 <체험, 표현, 이해>는 빌헬름 딜타이의 《전집》 제7권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 구축》 가운데 <제3부-제1장 체험·표현·이해>를 옮긴 것으로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의 책이지만, 딜타이가 생각하는 해석학의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에서의 논의를 외부세계의 물자체를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딜타이의 관심은 외부가 아닌 인간 내부를 지향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에서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가 체험 Erlebni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작은 통일성이다. 왜냐하면 그 흐름은 하나의 통일적인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나아가 생애에 대한 공동의 의의를 통해 서로 연결되는 삶의 부분들의 모든 포괄적인 통일성을 ‘체험‘이라고 부른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31/210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인간의 육체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체험은 유한함과 특수성을 함께 갖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언어-술어‘가 나타나는데, 개인의 특수화된 술어는 정신적 세계의 운동을 통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삶의 표출 - 표현이다.

체험에서는 체험연관의 일반적 술어들이 특정한 개인에게서 생겨난다. 그 술어들이, 이해하려는 삶의 객관화와 정신과학적인 진술의 모든 주관들에 적용됨으로써, 그 술어들의 타당성 범위는 정신적 삶이 영위되는 곳이라면 어디서건 작용연관, 힘, 가치 등이 드러날 때까지 확장된다. 그래서 이런 일반적인 술어들은 정신 세계의 범주들이 지니는 존엄성을 갖게 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28/210

<체험, 표현, 이해>에서 딜타이는 삶의 표출을 세 종류로 나눈다. 첫 번째 종류는 개념, 판단, 추리, 두 번째 종류는 행위, 세 번째 종류는 체험표현으로, 이러한 다양한 다양한 표출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주관적인 개별 체험으로부터 객관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한 인간은 문학과 진리 속에서 자신의 실존과 보편적/역사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는 문학 운동과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시대를 꿰뚫어본다. 그는 그 시대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담담하게 자부심을 갖고 바라본다. 그래서 삶을 회고하는 고령의 작가에게 그의 삶의 모든 순간은 이중적 의미로 해석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0/210

정신과학에서 결정적인 개념! 정신과학이 도달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전체, 연관과 연결시킨다. 언제나 그 안에는 자명한 것과 같은 상태들의 존립이 포함된다. 그러나 역사학은 변화들을 이해하고 표현하려 하기 때문에 에너지, 운동 방향, 역사적 힘의 전환 등을 표현해주는 개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역사학의 개념들은 이런 성격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 대상의 본성을 잘 표현하게 된다. 삶과 역사의 이 모든 범주들은, 체험 가능한 것에 대한 진술에서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과학적인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진술의 형식들이다. 이것들은 체험 자체에서 나온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48/210

딜타이는 <체험, 표현, 이해>에서 이해는 실천적인 삶 속에서 서로간의 대립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대상이 외부에 있는 자연과학의 물(物)이 아니기 때문에, 정신과학에서 대상은 원인-결과의 법칙에 따른 참-거짓의 판단 대신 진실한가와 그렇지 않은가의 판별대상이 된다. 딜타이는 본문을 통해, 엄격한 판별의 기준을 통해 우리는 문학작품으로부터 인류역사의 법칙을 도출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체험, 표현, 이해>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집 중 극히 일부 파트만을 옮겨왔기에, 깊이 있는 내용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다만, 자연과학에서 출발한 <순수이성비판>과는 다른 출발점에서 정신과학을 바라봐야한다는 딜타이의 관점과 현실안에서 실존, 그리고 실존으로부터 출발한 정신과학의 체험-표현-이해의 순환 구조 속에서 주관성이 객관성을 획득한다는 큰 흐름을 이해하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이해는 항상 자신의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더 고차적인 형태들에서 이해는 이제 하나의 작품이나 삶에 함꼐 주어진 것의 귀납적인 총괄에서부터 하나의 작품이나 인격체 또는 삶의 관계에 있는 연관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제 우리 자신의 체험과 이해에 대한 분석에서 정신적 세계에서의 개체는 자기 가치, 즉 우리가 확실하게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기 가치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3/210

이제 우리가 이해의 작용에서 두 가지, 즉 정신적 삶과 그 상황을 개별화의 외적인 원리로서의 환경을 통해 변화시키는 것과, 구조의 계기들의 상이한 강조를 통해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작동시킬 수 있다면, 인간의 이해, 즉 문학 작품들에 대한 이해는 삶의 거대한 비밀에 이르는 통로가 될 것이다. _ 빌헬름 딜타이, <체험, 표현, 이해> , p6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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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0-28 1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게 완역이 아니라 챕터 일부만 번역한 것이지만 딜타이 사상을 맛보기에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주더들이 깔끔한 번역을 빨리 번역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10-28 18:22   좋아요 1 | URL
네, yanoo님 말씀처럼 딜타이 사상의 큰 흐름을 잡기에 좋은 요약서라 생각합니다. 하이데거를 보다 깊이 읽기 위해서라도 딜타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독서였습니다. yamoo님,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