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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트가 말했듯이, 연주란 ‘일부는 과거고, 일부는 미래이며, 일부는 막 완성된 신작으로 볼 수 있다.’* 바흐가 악보에 포함시킨 엄청난 분량의 디테일한 장식음은 그의 실제 연주 경험과 관련된 것으로, 그가 즉흥적으로 작곡하고, 다듬고, 그리고 최초의 단순한 첫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했던 다양한 전략들이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압축되어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일부 해설자들은 1729~1730년경 바흐가 의무적으로 교회 칸타타 작곡하는 데 환멸을 느껴서 다른 작품들을 작곡하며 창조적인 시간을 보냈으며 심지어는 신앙의 위기까지 맞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1950년대 알프레드 뒤르와 게오르크 폰 다델젠이 수행했던 법의학 연구에 대해 반응하는 (혹은 과잉 반응) 한 유형이었다.

전통적인 바흐의 이미지 중 그가 수정한 부분에 따르면 ‘그는 보다 세상물정에 밝고, 더욱 인간적이며… 온몸으로
동시대와 엮여 있던 사람이다. 그는 전도유망한 미래의 트렌드를 환영했지만, 칸토르라는 전통적인 직업에 귀속된 뒤에는 온 힘을 다해 충실하게 일했다. 그는 두 시대 사이의 경계에 서서 사실을 직시하는 사람이었다.’ 이를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가 주장한 ‘점차 깊어지던 교회의 편협함에 대한 칸토르의 저항’*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칸타타 작곡이 위축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것 말고도 다른 설명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바흐는 1729~1730년 즈음에는 라이프치히 주요 교회에서 연주할 칸타타들을 충분히 작곡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라이프치히 지식층에 막 유입되기 시작하던 계몽주의부터 살펴봐야 한다. 이 사상은 훗날 도시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던 정통 루터교와 순식간에 결합했다. 헤겔은 아마도
독일식 계몽주의가 ‘신학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 같다. 이는 공연 예술에도 확실하게 적용됐다.* 바흐와 동시대 사람들은 예술에서도 도덕적, 종교적 혹은 합리적 의미를 분명하게 찾고자 했다. ‘아름다움’과 ‘숭고함’과 같은 미학적 개념이 예술적 개념과 과학 및 도덕적 개념으로부터 분리된 것은 이 세기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였다.

라이프치히에 정착하면서 바흐의 가치관은 프리드리히 에르하르트 니트*와 같은 음악가들의 ‘계몽된’ 표현 쪽으로 더욱 기울어졌다. 이들의 음악은 헌신과 교화뿐 아니라 미적 즐거움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요한 리스트의
찬송가는 신도들에게 매우 익숙한 선율이었지만, 바흐는 그 선율을 참신하고도 충격적으로 다룬다. BWV 21이 이전 해 신앙의 힘으로 영원을 열망하는 비전을 보여줬다면, BWV 20은 평안보다는 공포, 고문과 고통의 영원의 가망성을 냉담하게 메시지로 담고 있다. 이는 인간에게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촉구다. 구원을 향한 유일한 길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바흐의 자필 악보에 남아 있는 수정 흔적에서는 서로 연결고리가 없는 구조와 그들을 어떻게든 화해시켜보고자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선순위가 충돌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모든 일들은 촌각을 다투는 가운데 발생했다. 이처럼 곤란한 문제가 생긴 까닭은 음악이 이전 해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난해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능력의 절정에 오른 위대한 작곡가를 만나게 된다. 그는 매주 스스로 선택한 도전을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형식과
접근, 각 테마의 근간이 되는 음색, 자기 앞에 놓인 가사에서 떠오르는 각각의 상징과 은유를 적용시켰다. 작업의 규모와 속도도 그의 기교를 발전시키는 데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바흐는 루터의 찬송가가 오랜 전통의 프리기아 선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선율은 다른 방식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구식 모테트 스타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우주 전체가 신의 풍요로운 창조를 기념한다는 아이디어는 구상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 바흐에게 선물로 다가왔다. 이 아이디어로 그는 무한성의 의미를 숙고해서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에는 대체로 거론되지 않았던 이 무한성이란 개념은 우주를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자연과 은총이 인류 전체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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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바흐는 개별적인 성서적 사건을 생생한 드라마가 주입된 방식으로 다루며 더
큰 화폭으로 확장시키는데, 이는 슐츠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대순으로 다뤄지는 이 사건들은 최고로 생생한 음악적 비유를 동반하는데, 그러면서도 훗날 에마누엘이 언급했듯이 ‘조화는 가장 순수한 그대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뒤에 그의 칸타타와 수난곡들을 논하면서 살펴보겠지만, 그는 항상 책에서 발견한 뻔한 관능적 이미지를 가사로 선택해서 교회 예배에 우의적으로 사용했다. 이 전통은 오리게네스(기원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의 저술에서는 교회가 남녀 간의 사랑을 예수와 개인의 기독교 영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황홀경에 빠져 쓰러질 것 같은 새색시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을 절실히 갈망하는 영혼을 나타낸다.

크리스토프의 음악은 폴리포니와 화성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는지, 음악적 단락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그리고 우선권을 다투는 가사와 음악 사이에서 어떻게 신중하게 접근할 것인지 바흐에게 표본을 제시했다. 이는 풍성한 재능의 씨앗들을
비옥하게 발아시켜 하나로 합치는, 본성과 양육의 완벽한 사례로 보인다.

루터교가 잔뜩 스며든 인생관부터 기본적인 음악 교육에 이르기까지 헨델은 동갑내기 바흐와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그가 이 단계에서 지닌 더욱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은 바흐보다 한 수 위였다.

이 시점에 바흐가 받은 아주 특별한 훈련은 루터교가 강조하는 바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전망과 집착, 기대는 동시대 작곡가들과 어긋나 있었으며, 그는 가는 길마다 엄청난 괴리와 마주쳤을 것이다.

1600년 분열된 교회 양쪽 모두는 세속적인 연극의 옷을 빌려 종교에 입히는 데 불안감을 느꼈다. 이 불안감의 근원은 그 성직자들이 자신들이 느끼던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서로 충돌함을 무의식중에 눈치챈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과 예배 안으로 ‘오페라’ 테크닉이 침입해오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당대 음악가들은 늘 그래왔듯 이처럼 고지식하고 기능적인 카테고리를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틀과 디자인, 표현 양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적절하다 싶을 만큼 얄팍하고 형식적인 겉치레만 유지한 채 마음에 드는
것들만 까마귀처럼 골라서 취했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으로 향하는 길목을 제공하는 모차르트
오페라는 바흐 칸타타나 수난곡보다 확실히 더 부드럽고 골치 아픈 문제가 덜하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볼만한 장면, 희극과 드라마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비록 도덕적으로 모호한 일부 등장인물들은 즐거운 딜레마를 제기하긴 하지만). 이 모든 요소는 마찬가지로 바흐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은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의 대본은 부드럽게 통합된 극적 양식을 구현하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피날레 장면처럼 늘 하나로 통합되지만은 않는다. 후기 칸타타
중 상당수는 나병에 걸린 죄인과 고름, 종기와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잔뜩 싣고 있다. 복잡하게 신학과 함께 뭉쳐 있는 이 이미지들은 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바흐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바로 그 지점에서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남는다.

바흐 교회음악의 인간적인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복음주의 루터 신자들은 20세기 내내 음악을 (푹신한 극장 의자 대신 차가운 교회의 신도석을 선택하며) 고유의 전례적 맥락에서만 접근해왔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견해다. 다만 예배 중 그 음악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와 그 음악을 위촉한 교회 성직자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그 둘의 목적이 늘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바흐가 음악과 가사 사이에 구축한 독특한 변증법적 관계(이 점은 12장에서 심도 있게 논할 것이다)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루터가 정의하였듯이 음악의 구체적 의무는 성경 텍스트를 표현하고 거기에 감동을 더하는 것이었다. 음표는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다(Die Noten machen den Text lebendig).*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선물인 언어와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분의 힘을 구축하며, 텍스트가 주로 지성(뿐 아니라 열정)에 호소하는 반면 음악은 주로 열정(뿐
아니라 지력)에 말을 건다.)* 루터는 음악이 없다면 사람은 돌덩어리와 다름없지만, 음악이 있다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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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진정 ‘중심에 위치한 태양으로 음악의 모든 지혜는 그로부터 나왔다.’

작곡가로서 바흐의 순수한 위상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정상인이 성취할 수 있는 스케일을 넘어서 있다. 그를 신격화하거나 초인(超人)으로 추앙하는 경향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나 천재를 흠모하고 싶어 한다.

바흐의 인간성은 그의 음악 사상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전되고 다듬어져 왔다. 그의 실제 행동 패턴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어떤 경우는 음악가로서의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해석됐다. 바흐 음악의 작곡 및 연주 과정을 이중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작곡가 자신의 인간다운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인상은
오늘날 재창조와 재연의 경험을 통해서만 농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인간에게서만 탄생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음악은 우리에게 영감과 행복을 주겠지만, 그렇다고 그 작곡가가 반드시
영감을 주는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런 경우도 때로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굳이 전제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보다 훨씬 빈약하거나 매력이 부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많은 작곡가도 그렇지만 특히 바흐의 경우는 창의적인 표현 핵심을 처음부터 정의하거나 관통하기보다는 장인처럼 음악 재료를 시간을 들여 다듬고 변형시키는 절차를 추적하는 편이 훨씬 더
용이하다.

연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할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온전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견해와 해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그 느낌은 음악을 움직이는 모터와 춤곡 리듬에 연결되어 있고, 일련의 화성과 복잡한 대위법 소리망에, 그들의 공간 관계에,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기악과 성악(함께 연주되어 서로 충돌할 뿐 아니라 제각기 연주될 때)의 변화에 휘말려 있다.

바흐의 모든 선율이 성악가에게 친절하지만은 않고, 퍼셀이나 슈베르트처럼 듣기 좋은 것도 아니다. 종종 모가 나 있고, 프레이즈는 불편할 정도로 길며, 작은 소용돌이와 장식음을 계속 퍼붓고, 노래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요구하는 바가 많으며, 이 요구들은 강철 같은 호흡 조절을 필요로 한다. 이는 비단 성악뿐 아니라 기악 파트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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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이기숙 옮김, 나주리 해제 / 마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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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칸타타는 그의 여타 장르의 작품들, 특히 기악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력하게 당대에 속해 있다. 300여 년 전 독일 루터파 교회의 예배와 전통, 바로크 궁정의 음악문화에 깊이 발을 딛고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양적, 질적으로 중요한 영역을 이루는 교회 칸타타는 수년 동안 중단되기를 반복하면서 세 시기에 중점적으로 작곡되었다. 성실한 직업음악가이자 교회음악가의 교회 칸타타는 그의 창작전체에서 어느 모로 보나 특별하고 월등한 위상을 점한다. 바흐 작품 번호(Bach-Werke-Verzeichnis : BWV)가 교회 칸타타로 시작하는 이유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55


 이기숙, 나주리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J.S. Bach Die Kantaten>은 제목 그대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의 교회 칸타타 작품 전반에 대한 설명과 곡들의 가사를 번역한 책이다. 기독교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성탄절, 사순절 등 교회 전례력에 맞춰 정리된 목차를 통해 개별 작품들이 1년의 교회력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곡의 분위기와 흐름을 어느정도 짐작하게 도움을 준다. 


 개인적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를 통해서 개신교 교회 음악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많아 큰 도움이 되었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가톨릭의 미사곡이라 여겨지는데, 개신교 예배와 가톨릭 미사 전례 특성이 곡의 형식과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칸타타 해설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가톨릭 미사의 특징은 재현((Mimesis)이라 생각다.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로 이어지는 예식의 큰 흐름은 과거 사실의 반복이며, 반복을 통한 확인, 성찰과 다짐의 방향으로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제의, 제기 등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며 예식을 하나의 극(劇)으로 만든다. 마치 오페라(opera)와 같이 진행되는 시각, 청각적인 효과 속에서 미사곡들은 큰 흐름을 진행하기 위한 것으로 자비송(Kyrie), 대영광송(Gloria) 등의 곡들은 전례라는 전체에 대해 부분으로 기능한다. 반면, 바흐의 칸타타는 이와는 다른 곡이 표현하는 세계가 있다.


바흐의 칸타타들이 내재하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이다. 바흐의 칸타타들이 울리며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할 때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우리에게 낯선 세상에 속해 있다. 그 낯선 세상이란 300여 년 전 독일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이고 전통이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9

 

 가톨릭 전례에 익숙한 이들에게 바흐의 칸타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를 떠올리게 하는 코랄(Choral), 아리아(Aria), 레치타티보(Recitativo)는 가톨릭 미사 전례의 주제를 하나의 곡(曲)안에 담아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미사는 사제에 의해 주도되는 현재 안에서 반복되는 과거 사실이라면, 칸타타의 세계는 관념적이고 텍스트적이면서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의 역할처럼, 신도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전례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해설 속에서 이런 느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오페라와 달리 칸타타는 흔히 관조적이거나 성찰적인 주제를 취하므로, 칸타타의 레치타티보는 특정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 감정에 대해 설명하는 가사로 확대되곤 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나 문제, 감정은 일반적으로 레치타티보의 뒤를 잇는 아리아에 의해 해석되거나 심화된다. 아리오소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중간 즈음에 놓인 것으로 아리아보다 레치타티보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는 (루터교 '찬송가'인) 코랄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잦은데, 코랄은 흔히 신도들을 상징한다. 그렇게 신도들은 코랄을 통해 가사의 상황에 동참하게 된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8


 해설을 통해 신교 분리 이후 성경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방침은 전례에도 반영되었고, 설교를 보완하기 위한 음악적 도구로서 칸타타는 그 형식이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흐는 이러한 교회의 방침에 맞는 곡을 만들면서도, 전례가 지나치게 엄숙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칸타타의 형식 내에서 보다 풍부한 음악적 효과를 담아내기 위해 종합예술인 오페라적인 요소를 가져왔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칸타타를 듣는다면 단순한 찬송가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의 의의를 여기서 찾고 싶다.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을 공포하는 설교였다. 설교를 가장 위대한 예비(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설교는 한 시간가량 행해졌고, 칸타타는 설교 전에, 그러니까 복음서 봉독과 신앙고백 사이에서 연주되며 설교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칸타타는 다채로운 음악적 표현을 통해 봉독된 성경 구절을 풀이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이 경건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또 무엇보다 설교를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렇게 일요일 예배와 축일 예배에서 칸타타는 확고한 자리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9


 이처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는 바흐의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보다 친숙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풍부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 청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본문에는 모든 칸타타 곡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를 감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이 중에서 한 곡의 영상과 해석을 소개하는 것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BWV 111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내 하나님의 뜻대로 늘 이루어지기 원하네


1. Coro 합창(코랄)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Sein Will, der ist der beste;

Zu helfen den'n er ist bereit,

Die an ihn glauben feste.

Er hilft aus Not, der fromme Gott,

Und zuchtiget mit Maßen:

Wer Gott vertraut, fest auf ihn baut,

Den will er nicht verlassen.


내 하나님의 뜻대로 늘 이루어지기 원하네

그의 뜻이 최선이라네.

굳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그는 늘 도우시려 하네.

거룩한 하나님, 그는 고통에 처한 우리를 도우시고

온화하게 우리를 꾸짖으시네.

하나님을 믿고 굳게 의지하는 사람을

그는 버리지 않으시네.


 2. Aria B 아리아 : 베이스


Entsetze dich, mein Herze, nicht,

Gott ist dein Trost und Zuversicht

Und deiner Seele Leben.

    Ja, was sein weiser Rat bedacht,

    Dem kann die Welt und Menschenmacht

    Unmoglich widerstreben.


놀라지 마라, 내 마음이여

하나님은 너의 위로요 확신이고

네 영혼의 생명이로다.

   그의 지혜로운 충고가 결정하는 것에

   세상과 인간의 힘은

   맞서지 못하리라.


3. Recitativo A 레치타티보 : 알토


O Torichter! der sich von Gott entzieht

Und wie ein Jonas dort

Vor Gottes Angesichte flieht;

Auch unser Denken ist ihm offenbar,

Und unsers Hauptes Haar

Hat er gezahlet.

Wohl dem, der diesen Schutz erwahlet

Im glaubigen Vertrauen,

Auf dessen Schluss und Wort

Mit Hoffnung und Geduld zu schauen.


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

그 옛날 요나처럼

하나님의 면전에서 달아나는 자.

그분은 우리의 생각도 훤히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셨도다.

행복하여라, 그의 보호하심을 택한 자

희망과 인내로 

그의 뜻과 말씀을 우러러보려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자.


4. Aria (Duetto) A T 아리아(이중창) : 알토, 테너


So geh ich mit beherzten Schritten,

Auch wenn mich Gott zum Grabe fuhrt.

    Gott hat die Tage aufgeschrieben,

    So wird, wenn seine Hand mich ruhrt,

    Des Todes Bitterkeit vertrieben.


나는 담대한 발걸음으로 걷네

비록 하나님이 나를 무덤으로 이끌어도,

   그가 나의 모든 날을 세셨으니

   그의 손이 내게 닿을 때

   죽음의 고통은 내쫓기리라.


5. Recitativo S 레치타티보 : 소프라노


Drum wenn der Tod zuletzt den Geist

Noch mit Gewalt aus seinem Korper reißt,

So nimm ihn, Gott, in treue Vaterhande!

Wenn Teufel, Tod und Sunde mich bekriegt

Und meine Sterbekissen

Ein Kampfplatz werden mussen,

So hilf, damit in dir mein Glaube siegt!

O seliges, gewunschtes Ende!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이

내 몸에서 억지로 영혼을 꺼낼 때

하나님, 그것을 아버지 당신의 신실한 손으로 받아주소서!

악마와 죽음과 죄악이 나를 공격하고

내 임종의 베개가

전쟁터가 될 때

나를 도와 내 믿음이 당신 안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오 내가 소망하는 복된 종말이여!


6. Choral 코랄


Noch eins, Herr, will ich bitten dich,

Du wirst mir's nicht versagen:

Wenn mich der bose Geist anficht,

Lass mich doch nicht verzagen.

Hilf, steur und wehr, ach Gott, mein Herr,

Zu Ehren deinem Namen.

Wer das begehrt, dem wird's gewahrt;

Drauf sprech ich frohlich: Amen.


주님, 또 하나 간청하오니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겠지요?

악한 영이 나를 시험할 때

내가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주님, 나를 돕고 이끌고 막아주소서.

당신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이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그대로 주어지리니

내가 기쁘게 말하나이다. 아멘.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251

음악의 측면에서 보자면, 바흐의 바이마르 칸타타들은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 풍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교회 칸타타가 이렇게 세속음악을 좇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예배 형식의 유연성과 시대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는 칸타타에도 유효했으니, 당대의 음악을 주도한 오페라, 그리고 그 오페라의 유행을 따르는 것은 루터교 예배에서 금지될 일이 아니었다. - P27

바흐가 살았던 18세기 전반기, 오페라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이미 한 세기의 발전 과정을 거친 뒤였다. 레치타티보는 이제 사건의 전개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아리아는 사건 진행 중에 야기되는 분노, 증오, 슬픔, 사랑 등의 감정을 섬세하게 음악으로 옮겨 청자의 공감을 얻어내며 오페라에서 견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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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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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법... 어려울 거라는 예감이 드는 이름이에요. 지금은 ‘엄격한 작곡 기법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음과 음이 어울리려면 그 간격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정리한 법칙이에요. 어렵다기보다는 따져야 할 게 많다고 할까요? 대위법에 따라 선율을 만든다는 건 마치 1 더하기 1의 답을 구하는 것처럼 분명한 문제입니다. 맞는 답이 있고 틀린 답이 있죠.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241

바흐를 주제로 한 <난처한 클래식 3>을 본 것은 바흐의 음악에서 표현되는 대위법과 평균율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대위법을 주제로 한 강의나 전문서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배경지식이 없는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기에 찾아든 교양서적이 <난처한 클래식 3 : 바흐>. 본문에서는 바흐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각 시대를 구분하고,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을 소개하며, QR코드를 통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예전에 읽었던 롤랑 마뉘엘의 <음악의 기쁨>을 더 시각적, 청각적 도구를 활용해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느낌을 받는다.

<난처한 클래식 3 : 바흐>에서 내가 궁금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일반인이 음악감상에 지장이 없을 정도에서 살짝 들어간 정도라 아쉽게도 느껴지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해가 된다. 대위법과 관련한 전문서적을 펼쳐보고 바로 덮은 경험이 있기에, 일반독자들이 클래식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도록 난이도 조절을 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쉬운 부분은 다른 책에서 찾아 봐야겠지만.

점차 음악가들 사이에서 그냥 한 옥타브를 똑같이 열두 부분으로 쪼개어 음을 정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이게 바로 평균율이에요. 평균율의 요점은 다른 음정들의 순수성은 포기하고 ˝옥타브의 순수성만 완벽하게 지키자˝는 겁니다. 도는 1, 한 옥타브 높은 도는 1/2로 놓고 그 사이에 있는 음들은 정확하게 똑같은 비율로 높아지게 만들면 조를 옮길 때 문제가 없으니까요.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352

<난처한 클래식 3>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아래 구절이다. 책, 음악, 미술 그 어떤 것이든 우리가 알고 싶고 느끼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면, 그리고 그 무엇을 ‘실체‘라 했을 때, 나는 그 실체를 알기보다는 그 실체를 잘 나타내려는 노력과 노력의 결과물인 지식을 쫓아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이다. 바흐 음악 자체보다 ‘대위법‘과 ‘평균율‘이라는 수학적 질서에 대한 궁금증도 중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바흐 음악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까 하는.

사실 우리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비발디의 <봄>에서 어떤 부분이 새소리를 묘사했다는 지식 같은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런 지식이 음악에 흥미를 갖게 하고 핵심에 빠르게 다가가도록 도움을 줄 수 있지요. 하지만 <봄>이라는 곡의 근본적인 가치가 새소리를 잘 묘사하는 데에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새소리를 듣고 싶으면 새소리를 들으면 되고, 시를 감상하고 싶으면 시를 읽으면 되겠죠. 물론 음악으로 시나 새소리를 모방하는 걸 듣는 재미가 없다는 이야긴 아니에요. 저는 이 곡이 시 없이도 사람들에게 환희와 즐거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만큼 사랑받고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건 바로 음악의 그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241

<난처한 클래식>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제시된 문장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순정률의 틀에서 벗어나 평균율의 지평선을 연 바흐지만(참, 지평선이 아니라 지평이었지) 하프시코드의 틀에서 벗어나 피아노의 세계를 열지 못했던 한계를 보면서 우리가 갖는 인간적인 한계를 다시 느끼게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바흐와도 친분이 있었던 악기 제작자 질버만이 만든 피아노 포르테를 몇 대 소장하고 있었는데요, 먼 길을 온 바흐에게 그 피아노포르테의 소리가 괜찮은지 한번 쳐보라고 했대요. 이때 바흐가 피아노포르테를 쳐보고 ˝이 정도 음량으로는 하프시코드랑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하죠. 피아노의 역사에서 꼭 등장하는 에피소드입니다. _ 민은기,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3 : 바흐, 세상을 품은 예술의 수도사>,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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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4 09: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기타 치던 친구가
피아노 전공한 친구에게
대위법 배웠다는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음악하는 이들도 공부를 해
야 하는구나 싶었답니다.

겨울호랑이 2022-10-15 14:40   좋아요 4 | URL
서양학문의 어느 분야이든 조금만 깊이 들어가다 보면 수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참 많이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지금도 그렇지만) 수학, 영어 비중이 그렇게 높았구나 싶습니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고, 전공을 깊이 있게 파기 위해서는 수학을 안 할 수 없는.... 그런 면에서 유럽 문명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어, 수학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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