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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 천상의 음악
존 엘리엇 가디너 지음, 노승림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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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칸타타, 모테트, 오라토리오 및 미사곡과 수난곡을 통해서 바흐가 자신의 폭넓은 세계관뿐 아니라 자신의 사고방식과 선호하는 기질(하필 그 가사를 선택한 이유로 들 수 있는)을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7/518


 존 엘리엇 가디너 (John Eliot Gardiner, 1943 ~ )는 <바흐 : 천상의 음악 Bach: Music in the Castle of Heaven>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지휘자인 저자가 바라본 바흐의 생애와 작품들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칸타타와 수난곡에 음악에 담긴 서사와 곡의 감상포인트 등 자칫 놓치기 쉬운 핵심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곡이 연주되는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청각만으로 작곡가가 만든 세계를 시각적으로 떠올린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분명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지만, 해당 곡과 함께 작가의 해설을 들으면 어렴풋하게나마 마치 샌드아트(Sand Art)처럼 바흐의 의도가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여전히 뚜렷하진 않지만...)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 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이 같은 통일된 페이스는 <마태 수난곡>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45/518


 작가는 바흐의 음악세계를 소개하면서 결론적으로 바흐의 음악세계를 '변용(變容)'으로 표현한다. 저자 뿐 아니라 바흐의 곡을 가장 독창적으로 잘 소화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 ~ 1982) 역시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제의식을 바흐음악의 특성으로 꼽는 것을 보면 바흐의 음악특성은 '변화(變化)' 또는 '음악표현의 다양성'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바흐 음악의 대가(大家)들이 말하는 음악표현의 다양성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그 어느 것도 바흐 음악이 지닌 압도적인 변용의 힘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할 수 없다. 그의 칸타타가 기독교인과 비신도에게 똑같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힘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음악에 담긴 생각과 감정을 다른 경우보다 훨씬 솔직하고 명료하며 깊이 있게 표현한다면, 이 음악은 커다란 위안을 안겨준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84/518


 글렌 굴드가 말했듯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위법의 전제조건은 선율적 정체성을 선험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으로, 이 정체성은 일부 전적으로 새롭지만 완전히 조화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순서를 뒤바꾸거나 도치시키거나, 역행하거나, 혹은 리듬적으로 변형이 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지널 주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80/518


 저자는 바흐 음악에 담긴 변용안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64)의 정신과 음악론을 발견한다. 루터에 따르면 <성경> 텍스트에 담긴 이성(logos)과 음악이 표현하는 열정(passion)은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두 선물이다. 바흐는 이러한 루터의 교리에 따라 교회 칸타타를 교회 전례력에 맞춰 로고스를 담고, 다양한 기악과 성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열정을 그의 곡에 담아냈다. 글렌 굴드가 말한 다양한 변화 속의 오리지널한 주제는 바로 곡에 담긴 로고스이며, 이것은 수학적이며 절제된 열정으로 음악이 재현되는 순간 청중과 연주자에 의해 매번 다르게 변주될 것이다. 


 루터가 정의하였듯이 음악의 구체적 의무는 성경 텍스트를 표현하고 거기에 감동을 더하는 것이었다. 음표는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다(Die Noten Machen den Text lebendig).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선물인 언어와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분의 힘을 구축하며, 텍스트가 주로 지성(뿐만 아니라 열정)에 호소하는 반면 음악은 주로 열정(뿐 아니라 지력)에 말을 건다. 루터는 음악이 없다면 사람은 돌덩어리와 다름없지만, 음악이 있다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26/518


 의도적으로 절제된 표현들 속에는 음악 기호가 암시하는 해석상의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은 악보에 직접 적어 넣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 음악이 곧 터지기 일보직전의 화성적 잠재력으로 치장되어 있음을, 이러한 표현들의 본질적 뼈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잠재력으로 인해 청중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즉 어떤 화음이 숨어 있는지 몰라서 애태우게 된다. 바흐의 화성적 움직임을 파악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주자와 청중 양쪽 모두가 참여해서 그러한 창조적 행위를 완성시킬 필요가 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99/518


 물론, 모든 음악이 재현되는 순간마다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바흐의 음악이 보다 특별하다면, 로고스의 패션의 결합, 언어와 음악의 결합이 다른 음악작품들 보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의 예술을 통한 영원한 작품 세계의 구현, 바흐 작품 목록(BWV; Bach Werke Verzeichnis)으로 이름지어진 개별 곡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전례력과 시간의 순환을 통한 영원한 신의 시간을 만들어낸 바흐의  세계. 그것은 작품 내에서는 대위법(對位法)을 통해 자연스러운 질서로서 표현되면서 청중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흐 : 천상의 음악>을 통해 독자들에게 바흐 음악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정신과 전반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 ~ 1759)과는 또 다른 면에서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흐의 음악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바흐의 음악은 내러티브와 해설, 성서 연대기와 신학적으로 형상화된 시적 텍스트가 서로 맞물려 있었으며, 이처럼 정교하게 음악적 깊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05/518


 무언(無言)의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언어'가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획기적이고도 새로운 전략이었다. 이것은 바흐가 기악 '언어' 안에 더욱 정확한 로고스(logos)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직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내재된 기악 언어는 성서나 종교적 언어와 관련된 음악만큼 강력하게 신을 찬미하고 신의 세계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35/518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한다. 바흐의 음악 중 사실상 가사에 순응하는 소위 '타협'의 영역과, 가사에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충돌'의 영역 사이에는, 유사한 맥락에서 발터 베냐민이 언급한 '소리와 대본의 이분법'과 비슷한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는 가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논하고, 확장하고, 사색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시에 대해 음악은 물감을 한 겹 더 덧칠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의 물리적 실재를 더 두껍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음악은 메타포에 상응한다. 음악은 말의 흐름과 암송된 시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서로 다르게 구성된 리듬과 템포 속에 시를 배치한다. 작곡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언어에 청중이 함께 참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72/518

지금까지 보아왔듯 바흐는 음악과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음악이나 언어를 따로따로 다루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음악이 때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음악의 힘은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의 편견과 유해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원죄와 구원, 악이나 회개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여전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에 의지할 수 있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모든 추잡함과 공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금언에 더 집중하게 된다. - P400

바흐 성악곡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그가 루터교 종말신학의 본질을 표현하며 이룩한 특별한 성취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확신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전통적인 종교나 정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바흐 서재를 채우고 있던 17세기 루터 신학자들이 구상한 ‘영원한 미래‘라는 중심 교리다. - P400

여기에 실험적으로 사용되는 새롭고 오래된 음악적 테크닉은 바흐의 경우 성서적 사건에 생기를 주며, 헨델의 경우는 시편 텍스트 수면 바로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정한 힘을 묘사한다. 두 작품 모두 작센의 젋은이들이 돌연변이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심오하고도 혁신적인 역할을 이어갈 것인지 시음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점에서 헨델은 사랑, 분노, 충성과 권력에, 바흐는 삶과 죽음, 신과 영원성에 매달릴 것을 암시하며 장래 이 두 거인의 집착이 어떻게 갈라질 것인지 보여준다. - P133

무엇보다 바흐는 헨델처럼 상습적인 모방꾼은 아니었다. 헨델이야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점화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싯돌로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문학과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바흐의 방식은 늘 고전적이었다. 우선 모델이 될 만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그들을 베낀 뒤, 거기에 서문이나 주석을 추가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에 정통한 어휘를 일거에 습득했다. 이는 모든 것을 최대한 포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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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모테트가 보여주는 빛나는 자유,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며 보여주는 우아한 기쁨, 그리고 죽음을 명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완벽한 확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응답이다.

이 바흐 성악곡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그가 루터교 종말신학의 본질을 표현하며 이룩한 특별한 성취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확신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전통적인 종교나 정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물론 멘델스존이 1829년 「마태 수난곡」을 리바이벌할 때처럼, 지금보다 이른 시기 바흐 음악에 대한 반응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흐 서재를 채우고 있던 17세기 루터 신학자들이 구상한 ‘영원한 미래’라는 중심 교리다.

지금까지 보아왔듯 바흐는 음악과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음악이나 언어를 따로따로 다루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음악이 때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음악의 힘은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의 편견과 유해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원죄와 구원, 악이나 회개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여전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에 의지할 수 있다. 이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푸는 유일한 해결책을 기독교에서 찾고’ ‘모든 인류 안에 있는
화산 분화구를 열었던’* 도스토옙스키 같은 19세기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모든 추잡함과 공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금언에 더 집중하게 된다.

바흐는 여기서 가사, 혹은 그 이면의 의미들을 투명하게 표현하고자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유리한 시점에 그 자신이 고안한 고도로 개성적인 양식으로 청중에게 들려온다. 그는 동시대 오페라 레치타티보에서 들을 수 있는 기계적인 재잘거림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중요하게 고조된 순간에 아리오소를 노래하고, 언어의 이미지를 피웠다 지울 수 있을 만큼 유연하게 음악적 표현을 전개한다.

글렌 굴드가 말했듯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위법의 전제조건은 선율적 정체성을 선험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으로, 이 정체성은 일부 전적으로 새롭지만 완전히 조화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순서를 뒤바꾸거나 도치시키거나, 역행하거나, 혹은 리듬적으로 변형이 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지널 주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바흐를 신학자로만 보고 이 대부분의 칸타타들을 신학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신학은 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반면, 바흐가 표현한 자연스러운
양식과 음악적 전개는 고유의 논리를 가진다.

아놀드 토인비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죽음이 가하는 고통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뉜다. 그리고 고통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바흐는 선량한 루터 신자답게 양쪽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죽은 자는 축복의 잠에 빠지고 그 유족들은 끝없는 죽음의 결실 속에 영적인 평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죽음에 대한 진실을 날것 그대로 알리는 렘브란트의 〈검은 웃음의 광풍 속에〉*보다도 공감이 간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늘 한결같지만은 않은데, 그 이유는 칸타타처럼 시인이나 작사가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절충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모테트들은 코랄?(우리가 아는 한) 남의 간섭 없이 작곡가 본인이 직접 선택하고 수정한?과 결합한 압축된 경구 위주의 성경 문장에 의지한다. 덕분에 그는 화성을 만족스러울 만큼 통일성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성은 다양한 텍스트와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형식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에서는 성취하기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지닌 비전의 범위 안에서, 바흐는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우주적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고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하던 시점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사회 통합이 와해되고 종교라는 낡은 산물이 빠르게 붕괴되던 때였다.

침울한 참회의 장면 위로 막은 내려오자마자 다시 올라간다. 우리는 천상에서 천사들이 양치기들 앞에 내려오는 장면을 그린 새로운 예술 작품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이 헨델의 「메시아」다. ‘주께 영광’에서 한 무리의 천사들은 저 멀리에서 내려와 메시지를 전달한 뒤 하늘로 다시 날아간다. 그 모습은 순진무구하고 극적이며 고도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흐의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 바흐의 천사 합창단은 대위법에 완전히 통달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세속 춤곡으로 이루어진 「글로리아」를 외치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루터 달력은 단식일에 못지않게 많은 축제일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는 절기와 기독교 달력에 포함된 이교도 축제를 위한 칸타타를 여러 차례 작곡한 바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 즉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기념일을 위한 곡도 있었는데, 세례요한축일(6월 24일-옮긴이)이 그날이다. 이날은 카니발 스타일로 기념하는데 ‘그 방종함은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거의 전(前)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16)* 이 마지막 마디에서 바흐가 만들어내는 대위법적 묘미?그로 인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는 어마어마하다. 그 마법 중 일부는, 한 마디에 있는 12개의 16분음표를 나눈 교차 리듬 패턴과 당김음을 포함한 다양한 연주 방식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바흐는 헨델처럼 상습적인 모방꾼은 아니었다.
헨델이야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점화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싯돌로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문학 및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바흐의 방식은 늘 고전적이었다. 우선 모델이 될 만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그들을 베낀 뒤, 거기에 서문이나 주석을 추가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에 정통한 어휘를 일거에 습득했다. 이는
모든 것을 최대한 포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헤르더는 인간의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이 개인의 삶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이른다는 중요한 생각을 깨달았다. 이는 공감적 통찰에 의해서만 이해가 가능한데, 타인의 염원과 관심에 ‘스스로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다. 그는 바흐 성악곡들이 지닌 가장 고결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대상이나 예술품으로써가 아니라 한 개인의 비전으로서,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소통하는 귀중한 형식으로서 말이다. 바흐가 남긴 유산이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작곡가들의 그것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월한 가문과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바흐의 압도적인 인상은 자기 안으로만 몰입하고, 부모를 잃은 후 처음에는 학업에, 그 다음에는 음악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지극히 사적인 개인이다. 그의 삶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죽음?부모, 형제, 그의 첫 번째 아내, 그 이후 여러 자식들?은 감정적인 은둔 내지 경계심으로 이어졌다. 이는 지극한 애정은 상실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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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1-22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덜덜...... ^^;;;

겨울호랑이 2022-11-22 20:0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바흐의 음악은 정말 깊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골드문트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
 

「마태 수난곡」은 특히 그러하다. 「요한 수난곡」에 대한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에 접근하다가는 길을 잃거나 당황하기 십상이며 심지어 그 작품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진다. 듣는 입장에서 우선 관심을 끄는 점은 이야기의 진행이다. 사건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는 확장된 묵상 악장들이 끼어들며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전달과 응답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쌍둥이 시간대가 번갈아 등장한다

바흐의 스트럭처를 풀어내는 실마리 중 하나가 바로 그처럼 변화하는 속도감이 주는 효과다. 그 효과는 「요한 수난곡」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장중하고 신중하다. 이런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는지 여부는 연주 중 극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도감에 부응하는 ?또는 되풀이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 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이 같은 통일된 페이스는 「마태 수난곡」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앞서 작곡한 수난곡에서 작품에 신빙성과 날카로운 통렬함을 선사했던 것은 요한이라는 특정한 목격자의 설명이었다. 여기에 불규칙하게 등장하던 아리아와 코랄은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돋우었다. 이러한 효과가 마태오의 버전에서는 더 많은 출연진과 ‘한 인간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예수의 인간적인 파토스가 추가되며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원초적 소재를
가지고 만든 끝없는 투쟁과 도전, 배신과 용서, 사랑과 희생, 동정과 연민의 휴먼 드라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다. 바흐의 음악은 때때로 이야기의 뼈와 피에 거의 물리적으로 직접 관여하면서 마태오의 이야기와 상상 속의 관망자들의 충격적인 반응 양쪽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전율하고, 냉담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박동하고,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강렬한 휴먼 드라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처럼 설득력 있고 애틋한 방식으로 표현한 도덕적 딜레마라는 점에서, 바흐의 두 편의 수난곡에 필적하는 작품은 내가 연구하거나 지휘해본 당대 오페라 세리아 중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언어와 생각과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다. 언어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감수성이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음악은 연주를 통해 생각과 감수성을 완전히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이 같은 표현 방식을 일상적 교류에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음악으로 표현된 생각들은 언어로 표현된 그것보다 훨씬 분명하고 충만하게 전달된다.

시에 대해 음악은 물감을 한 겹 더 덧칠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의 물리적 실재를 더 두껍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음악은 메타포에 상응한다. 음악은 말의 흐름과 암송된 시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서로 다르게 구성된 리듬과 템포 속에 시를 배치한다. 작곡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언어에 청중이 함께 참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바흐는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용인되던 취향의 범위, 더 많은
형식적·표현적 어휘를 수용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웃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자 했고,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늘 그 이상을 원했다.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한다. 바흐의 음악 중 사실상 가사에 순응하는 소위 ‘타협’의 영역과, 가사에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충돌’의 영역 사이에는, 유사한 맥락에서 발터 베냐민이 언급한 ‘소리와 대본의 이분법’과 비슷한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는 가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논하고, 확장하고, 사색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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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원래 구상했던 핵심 요소들을 제거하고 인간을 위한 예수의 속죄를 사도 요한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것을 포기한 이유, 그리고 새로 대체한 악장들에서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는 데 훨씬 더 비중을 둔 이유에 대해서는 교회의 엄청난 힐책만이 설명 가능하다.

세속화된 우리 시대에 「요한 수난곡」이 왜 그처럼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바흐의 수난곡을 떠받치고 있는 다층적 구조를 청중이, 만약 직접 보거나 들을 수 없다면, 적어도 ‘느낄 수’는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고딕 교회에 입장한 방문객들 눈에 보이지 않는 반 아치형 석조 구조물의 역할과 똑같다. 이 구조물은 건물이 날렵하고 무중력 상태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지고하게 높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바흐의 수난곡들은 더 오래
연구하면 할수록 더 많은 반복과 대칭, 상호 참조하는 기하학적 패턴들을 발견하게 된다.

변이와 상호 참조, 반복도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쉽게 파악되고, 개략적인 패턴이나 대칭적 교차 배열 패턴으로 자유롭게 변형된다. 또한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조성이 대단히 중요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이 안에서 그들은 ‘우주 체계 속에서 다 함께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창조자-신의 말씀으로 섬겼던 고대 그리스도의 사상과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바꾸어 말하면, 바흐는 신의 말씀으로서의 요한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화성 공식의 축소판을 고안해낸 것이었다. 이 공식을 이용해 그는 음악의 외피 아래 감춰둔 나사렛 예수의 초상 안에서 구조적 장치들을 한층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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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칸타타에서 만날 수 있는 바흐의 가장 매력적인 습관 중 하나는 악기의 개성을 한껏 살린다는 점이다. 표정 있는 결말을 위해 그는 각 악기를 독립적으로 사용하거나 다양한 조합을 시도한다. 그의 손길 속에서 악기들은 특별한 효과나 분위기 이상을 만들어낸다.

「이도메네오」나 「돈 조반니」와 가장 유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음악이 바흐의 「요한 수난곡」 오프닝이다. 18세기 전반에 작곡된 오페라 서곡 중 내가 아는 한 이 곡에 필적하는 작품은 없다. 베토벤의 「레노오레」에 삽입된 세 곡의 프렐류드의 직계 조상으로서도
이보다 훌륭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 악에 대항하는 선, 영혼과 육신, 진실과 거짓 등 바흐는 요한이 자주
드러내는 극명한 사상의 양극성을 연결시킬 줄 알았다. 이 악장이 연주되면 우리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신과 같은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 사이가? 극명하게 갈라지는 양극성과, 인류를 위해 ‘영락하며’ 스스로 몸을 낮춘 그리스도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수난곡은 스토리텔링과 명상, 종교와 정치, 음악과 신학의 혼합물로서 당시에는 대단히 대담하고 복잡한 시도였고, 앞서 4장에서 찾아본 ‘음악 드라마의 정신’의 발현이 절정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바흐는 ‘수동적인’ 오페라-연극 청중이
아닌 정신적 자양분을 열망하는 루터교 신도들의 요구에 부응해왔다.

바흐의 음악은 내러티브와 해설, 성서 연대기와 신학적으로 형상화된 시적 텍스트가 서로 맞물려 있었으며, 이처럼 정교하게 음악적 깊이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바흐가 이 경건주의 신학자가 윤곽을 잡은 여러 테마에 동화되어,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자신의 첫 번째 수난곡을 구성했는지는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군중과 투옥된 평온한 예수 사이의 극적인 대립을 기반으로 삼으면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그의 마지막 승리로 표현했다

요한의 수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점은 바흐가 전략적으로 배치한 아리아들이다. 중요한 순간에 이 아리아들은 교리의 근원적 의미를 하나로 모아서 청중과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드라마는 여전히 거침없이 펼쳐진다.

시간은 두 차원, 즉 과거(및 그에 대한 반응까지)를 암시하는 현재와 현재를 조건 짓는 과거 사이를 항상 오간다. 서사의 본질적인 시작과 끝을 알리고 동시에 신학의 근원적 테마를 조율하는 역할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신중하게 선택되고 배치된 코랄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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