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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정서경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평점 :
뒤늦게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사랑이야기지만 마음아프고 슬픈 결말의 영화는 영화 안에 담긴 여러 의미로 여러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영화 감상의 꽃이라 할 미장센(Mise-en-Scene)을 이해하기에는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아 한계가 있었음에도 영화가 던져주는 메세지는 울림이 있었다.
[경고] 이하 글에는 영화와 관련된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관람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세요...
언어를 통한 의식적인 소통의 한계
형사 장해준(박해일)은 기도수의 살인범으로 송서래(탕웨이)를 의심한다. 서래가 내뱉는 ‘마침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에게 해준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이 말을 알고 사용한 것일까? 스스로 한국어가 서툴다고 소개하는 그녀의 말처럼 우연한 단어의 선택이었을까. 서툰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적인 소통은 피의자와 형사의 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럼에도 스치듯이 느껴지는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다.
점차 상대를 이성으로 느끼는 해준과 이를 알게 된 서래. 잠복근무를 통해 상대를 면밀하게 관찰하는 형사의 눈은 어느새 이성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의 눈으로 변해간다. 이들의 감정은 무의식적인 것이지만, 출발은 의식적인 것이었다. 남편과는 달리 품위있는 형사 해준의 배려에 마음에 연 서래. 의식세계에서 이들의 교감은 언어의 장벽으로 제한되기에, 스마트폰의 번역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커져가는 감정을 느낀다. 그렇지만, 서래의 마음을 받아들여 욕망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해준의 ‘의식세계‘ 붕괴를 의미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선 해준과 서래.
불면증에 고통스러워 하는 해준은 잠을 잘 때 입으로만 호흡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평소에는 코로 호흡하는 것이 문제없다는 해준. 무의식적인 호흡은 그에게 평안함을 주지만, 잠을 자기위한 의식적인 호흡은 부자연스러운 고통을 안겨준다. 그런 그에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길일지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무의식의 세계는 욕망의 세계다. 작품 속의 시체의 눈은 욕망의 결과들이다. 서래를 소유하고 자 한 첫째 남편, 서래를 이용해 돈을 벌려던 둘째 남편. 무의식 아래 자리한 욕망의 결과 그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작품 중에서 해준은 끊임없이 안약을 넣는다. 안약을 넣기 전 마치 벌레가 기어다니는 시체의 눈과도 같았던 해준의 눈은 안약을 통해 다시 맑아지고, 해준은 멍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의식의 세계로 돌아온다. 이런 면에서 해준의 안약을 넣는 행위는 죽지 않으려는 의식의 본능일까. 무의식으로의 미끄러짐은 생명과 사랑을 얻는 것일까. 아니면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죽음의 충동일까. 마치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을 위협하는 지진과도 같은.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한다.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지키는 존재인 아내 정안은 후반부에 떠나고 해준은 이후 무의식의 세계로, 서래에게로 미끄러져간다. 아내인 정안은 원자력 발전소의 안정 뿐 아니라 해준을 무의식의 세계로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천왕같은 존재였을까.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
모순적인 상황에 놓인 것은 서래도 마찬가지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서래는 산을 싫어하지만, 산에서 남편과 헤어지려는 자신의 욕망을 이뤘고, 바다(물)을 좋아하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사랑을 얻지 못했고 헤어질 결심을 해야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산을 배경으로 한 전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후반은 여러모로 대칭된다. 높음과 넓음, 서래를 의심하는 해준의 부하 오수완(고경표)과 서래를 감싸는 여연수(김신영). 이러한 대칭적 세계구도에서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사건(event)은 말그대로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en)이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면...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어요. <헤어질 결심> 中
‘마침내‘와 ‘나는 붕괴되었어요‘. 서래의 ‘마침내‘와 해준의 ‘나는 붕괴되었어요‘는 서로를 향해 나아가면서 서래에 의해 완성된다. 해준의 붕괴를 막기 위해 그녀가 처음에 까마귀를 묻어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을 묻는다. 쌓아올린 모래벽은 거센 파도에 붕괴되면서 자신 또한 붕괴되고, 자신의 선택으로 영원히 미제사건으로 해준에게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헤어질 결심>에서 모래사장을 찾아가는 서래의 모습과 그를 쫓는 해준의 모습에서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 ~ 1998) 감독의 <카게무샤>의 를 떠올린 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다케다 신겐과 카게무샤 간의 숨박꼭질처럼 보이는 해준과 서래의 엇갈림.
[사진] 영화 <카게무샤> 中 (출처 : https://www.filmedinether.com/features/kagemusha-40-year-anniversary-kurosawa/)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3일만에 세우겠다는 예수의 말처럼, 필멸의 인생 대신 불멸의 영광을 찾겠노라는 아킬레우스의 선택처럼 서래는 해준에게 불멸의 미제사건이 되는 선택을 한다. 이러한 장엄미(美)가 참된(眞)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선택을 오래 전 <인어공주>에서 본 듯한 기억이 난다.
사실, 어제 본 영화라 다소 두서없이 정리된 감이 많고, 놓친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칠게나마 글을 쓰는 것은 눈 앞의 거대한 향유고래가 사라지기 전 부족하더라도 스케치를 남기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헤어질 결심> 각본은 아직 채 읽지 못했지만, 의식세계의 문자가 하나의 작살이 되어 내 무의식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헤어질 결심>을 다시 만날 약속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