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사소한 과학의 영역이다 집 안을 작동시키는 기기와 전등을 끄며 내일 아침 못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생각을 떨쳐내는 것도……

?

밤을 발명한 과학자는 보이지 않고, 우리를 모두 검은색으로 덮으려고 한다 우리를 잠시 마비시키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어, 모든 사실은 엄격히 기록되어 후세에 길이 남을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매년 매월 매일의 매매 기록이고 그것을 지우거나 수정할 엄두는 감히 그 누구도 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지, 역사는 말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사회가 마주한 복합적인 위기에 대한 윤석열정부의 대응은 우려스럽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이 지속되는 세계적 수준의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윤석열정부는 ‘규제 완화’와 ‘민간·기업·시장 주도의 경제 활성화’를 내세운다. 자산가·기업 대상의 감세와 재정 긴축, 금융 및 부동산에 관한 규제 완화, 민영화,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인상 통제 등의 경제정책은 친자본-반노동, 친부자-반서민 경향을 뚜렷이 드러낸다. 그러나 철 지난 신자유주의의 유행가 같은 이러한 정책 방향이 ‘경제 활성화’나 ‘투자 의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신호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수구세력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탱하는 힘이 ‘뭘 한들 달라지는 게 있겠냐’라는 회의, 다시 말해 사회구성원 사이의 신뢰 저하에서 온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다. 윤석열정부의 만성적 위기가 자동으로 더 나은 사회로의 전환에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이유, 동시에 이 정부가 무수한 ‘적’ 만들기에 몰입하는 이유다. 따라서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일상이 재난이 된 사회에 방치될 수많은 불안하고 위태로운 ‘생존자들’, 우리 시민들의 절망이다. 이 절망은 정권에 대한 회의를 넘어 국가의 공적 기능과 책무 이행에 대한 회의, 사회적 연대를 통한 권리 실현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사실 모든 권력은 분리통치를 옹호한다. 시민과 장애인/노동자/피해자를 대립시키고,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를 갈라치기 하며, 노동자와 노동자 간의 편을 가르고, 피해자들끼리 쌈박질을 하게 한다. 가장 쉽게 표를 얻고 세를 규합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윤석열정부의 가장 큰 해악 중 하나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유와 공정,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시민 상호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회적 약자를 범법화하고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를 해체하고 각자도생하는 사회를 더욱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끄라이나전쟁이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크게 세가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첫번째로 경제논리를 압도하는 안보논리가 등장했고, 두번째로 보호주의의 진영화가 공고해졌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은 그전까지 다소 관망세를 유지하던 유럽이 안보위기에 직면해 미국 측에 기우는 계기가 됐고 보호주의 진영화의 외연을 확장하는 분수령이 됐어요. 세번째로 이 전쟁은 에너지전환, 기후전환을 가속하는 촉진자가 됐습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1980년대부터 진행된 금융화의 최종적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중국이 그림자금융 등 금융산업 문제가 심각해 내부적으로 붕괴될 수도 있다고 여겨졌는데 결국 그러지 않았죠. 당시 공산당이 주도적으로 산업 구조조정을 이끌었고 자국 제품의 해외시장 의존도를 크게 낮췄습니다. 또 2000년대부터 합작투자를 통해 외국 기술을 수입하면서 자체적인 공급생태계를 구성했고요. 이처럼 중국이 여러 산업에 걸쳐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이 되고 자체 공급망까지 구축하자, 2015년 무렵부터 미국은 중국을 본격적으로 ‘전략적 경쟁’ 대상으로서 견제하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이 모든 것이 정말 가치를 무너뜨리고 역사를 되돌리는가? 언론의 자유에 일어난 일만 놓고 보더라도 오늘의 어이없는 상황이 실은 배울 만큼 배웠다 생각한 민주주의를 다시금 심화학습할 기회임을 알게 된다. ‘시장의 자유’가 무자비한 양극화의 다른 이름임을 이미 경험하고도, 또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연설을 통해 극적으로 공허해진 그 위상을 재확인하고도, 자유는 여전히 강한 아우라를 지닌 말이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언론의 자유라는 태도 앞에서 우리는 마침내 허울로서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있으며 진실의 추구가 민주주의의 더 기본적인 요소임을 날카롭게 깨우친다.

그러나 ‘윤석열 퇴진’을 정말 이뤄내고 말겠다는 사람이라면 퇴로를 열어주면서 퇴진시키는 방식이 과연 바람직한지, 다시 말해 촛불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그렇더라도 누가 주도하여 조율하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여러 가능성을 차분하게 연마해볼 일입니다. ‘언제’냐에 따라 ‘어떻게’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2022년의 촛불행동은 그 수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혹한을 만났습니다. 결의에 찬 시민들이 이 고비를 넘겨 시위의 열기를 지켜낸다면 새해 봄쯤 최고조에 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기가 2023년을 넘어 총선국면으로까지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고 자칫 지루한 대치상태가 뒤따를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던 대로 생각하고 살던 대로 살아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분단체제는 힘이 셉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과 민족도 지혜롭고 끈질기며 힘이 셉니다. 조선왕조 몰락기에 동학이라는 새 사상이 나와서 이 땅의 후천개벽운동을 출범시켰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 비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패배했으나 민중의 각성과 헌신을 보여주었으며, 식민지 아래서의 3·1혁명 같은 변혁 노력이 분단시대에도 지속되어 드디어 남한에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만 성취의 역사가 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촛불혁명의 와중에 변칙적으로 대두한 정권과의 대결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목표를 갖게 된 상황입니다. 한반도와 인류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복된 시기를 사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촛불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에 직접 끼어들 틈새는 그 어느 때보다 협소하다. 그러나 내가 거듭 주장했듯이(예컨대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11장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 통일과정에의 시민참여라는 게 북미관계·남북관계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시민참여 중에서 최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남북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정권을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쫓아낸"(같은 책 284~85면) 2016~17년의 촛불대항쟁이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제의 핵심은 영성문화의 이해와 해석을 피하는 왜곡된 근대주의 맹종에 있다. 동학과 굿과 민족종교의 숙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더욱 훼손될 것이다. 정체성과 영성문화 연구를 계속 소홀히 한다면 한국학은 엘리트주의에 더욱더 갇히고 말 것이다. 아시아 문화정체성의 뿌리인 샤먼문화를 통해 생명의 마음과 소통하는 자연과 우주의 공공성으로 영성문화를 이해하고, 개인의 심리적 치유의 방법론으로 굿의례를 재조명할 때가 이제는 되었다.

동학을 유불선의 문헌적 결합으로만 보기보다 한국적 샤머니즘인 굿에서 나온 점도 많음을 이해할 것을 권한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칼의 노래’ 검결(劍訣)과 무당의 공수의례는 같은 문화로 보인다. 검결은 샤먼의 영혼관을 띤 일종의 내림굿으로, 강신무(降神巫) 입무(入巫) 전통과 같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이천식천은 토템문화의 인문적 재해석으로 이해된다.

사회구조라는 개념 속에는 그 사회의 소수자에게 눈길을 돌리고, 그들을 사회의 범주에 포함시켜 사고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경우에 따라 어느 개인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기도 싫을’ 수 있는 존재들이 이 사회에 함께 살고 있음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는 페미니즘이 줄곧 가족에 대해 견지해오던 시각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성의 리얼리티는 문학서사와 게임서사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여겨져왔다. ‘게임 같은 소설’은 다른 소설과 달리 근본적으로 현실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모색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오오쯔까 에이지(大塚英志)였다. 게임은 서사 속 캐릭터의 죽음을 언제나 ‘리셋(reset)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실의 죽음을 그려낼 수 있는 문학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루프적 죽음이 죽음의 리셋 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하는 게임의 일반적인 서사양식이라면, 결말적 죽음은 게임이라는 장르와 무관하게 이야기 내적으로 설계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필연적인 죽음은 따로 놓고 보면 심상해 보이지만, 하나의 서사 안에서 결합되었을 때는 특별한 결과를 산출한다. 여타의 게임에서 루프적 죽음이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승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도움닫기의 역할을 한다면, 아우터 와일즈에서 루프적 죽음은 결말을 예비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패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삶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소설이 말하고 있는 시간성의 리얼리티일지 모른다.

촛불대항쟁을 통해서는 세대를 이어가며 점점 더 진화된 영혼으로 새 비전을 찾아가는 시민운동을 보았다. ‘이게 나라냐’ ‘내가 나라다’ ‘시민이 예술가다’ 등 촛불을 든 시민의 독창적 구호가 나왔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담긴 승리의 서사를 성취하는 열린마당, 비전을 창조하는 예술마당, 수평적 연대의 조직마당으로 남녀노소가 광장에 다 모이는 대동문화적 진화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승리의 힘을 체험한 촛불대항쟁은 더욱 성숙한 촛불혁명으로 자라나는 중이다.

굿은 민중의 집단무의식을 원형문화 형식으로 이어오며 민중의 자기 문화정체성을 유지했으며 더 깊은 영성까지 품는 문화이다. 한국에서 굿은 민속문화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된다. 굿은 일제와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근대 자본국가 권력이 주도세력이 되기까지 비주류문화로 취급되었다. 서양식 근대문명에선 미신, 비문명으로 청산했지만 세계 인류 속에서 엄연히 기층문화로 지금도 살아 있다.

우리 서화 학습은 기본이 몸으로 공부하는 임서모화(臨書摸畵)다. 임서모화란 좋은 글씨는 베끼고 좋은 그림은 모방하는 학습 전통이다. 선생 앞에서 오래전 초화를 받아서 밑그림으로 자기 스스로 습득하는 육화 전승의 필법이다. 바른 자세로 운필력을 얻는 득필이 매우 중요하다.

서양 선은 존재의 ‘있음’ 그 자체를 중시했다면, 동양에서 선은 점에서 시작해서 진행되다가 사라짐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이다. 장지에서 불씨처럼 생성하였다가 물길처럼 소멸한다.

서양의 소묘법은 존재의 실체를 고정시켜 직관한다. 존재 그 자체를 중시해 명암으로 진하게 형상화하니 대체로 어둡다.

인간의 무의식 심층에는 원형문화가 있다. 이를 서양에선 콤플렉스로 보기도 하고 동양에선 귀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 있는 영성을 인정하는 것은 같다. 이 콤플렉스(귀신)를 다스리는 문화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존재하고, 이러한 영성문화를 다 존중하자는 것이 문화다원주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