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돌보는 이와 돌봄을 받는 이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호의존성에 근거한 돌봄은 타자를 위한 돌봄뿐 아니라 자기돌봄(self-care)도 요청한다. 타자를 돌본다는 것은 곧 세계 네트워크에서의 자기 위치와 역량을 질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기돌봄 역시 타자를 위한 돌봄에 연계되거나 그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돌봄의 자원은 어떻게 분배되고, 돌봄을 받을 자격은 누가 결정하며, 그 인프라를 구축하고 유지·관리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끈질기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기업화된 디지털 장치가 돌봄 자원을 사유화하는 문제 외에도, 주지하다시피 돌봄노동은 가족 같은 사적 영역 내에서 여전히 비가시화·저평가되어 여성, 노인, 이주노동자 같은 집단을 착취하거나, 호혜적인 정치적 돌봄의 성격을 잃고 시혜적인(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자선으로 쉽게 대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돌봄은 실존적 돌봄으로서, 죽음이 있으리라는 것을 앞서 보고 유한한 시간 속에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되돌아보고 질문하며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존재는 죽음이라는 비존재 및 시간의 유한성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토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 돌봄들은 위계적이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협업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쿠라, 유피테르, 텔루스를 중재하고 권한을 나누었던 것이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였음을 상기해보자.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으며 여러 돌봄의 시간은 서로 얽히고 의존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봄과 관계에서 핵심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취약성,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감각하고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 고통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으므로 그 아픔이라는 감각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돌보는 것.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

돌봄을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다양한 양상과 다양한 관계로 넓혀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타인의 고통이 너무나도 요란하고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되는 통에 그 고통을 멈추고 싶어지는 충동은 타인의 고통을 끝내 버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달려드는 기세로 발현될 때가 많은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고통이 공감에서 기인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때로는 성가심의 형태로, 때로는 불안의 형태로, 때로는 동정의 형태로?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달 전쯤 미 의회에 진입해 가자지구의 평화를 촉구하는 시민운동이 있었다. ‘우리의 이름으로 학살하지 마라’(Not in Our Name)를 외친 운동의 주체는 유대인들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유대인 대 팔레스타인이라는 전쟁의 구도를 시온주의자 대 팔레스타인의 구도로 전환시키고 시온주의자와 유대인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렸다. 이 행동은 지배세력의 언어가 함몰시킨 진실을 드러내고 평화와 공존이라는 가치지향과 어긋난 세계의 참극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는 태도이다. 이름을 당당하게 거는 것은 그만큼의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공동의 이름은 책임의 고통을 긍정하고 여럿의 꿈을 감당하기 위한 발명품인지도 모른다.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거짓말과 책임회피는 다른 문제다. 그것이 한 개인의 부도덕함을 넘어 공적 세계에 대한 신뢰감 자체를 훼손하기 때문에 그렇다. 훼손된 신뢰감은 냉소주의를 부르고 경제적 손실로도 직결되며 또한 정치의 작동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위기상황이었던 팬데믹 시기, 공적 세계에 대한 신뢰감이 시민적 주체성을 이끄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역량을 담아낼 무형의 공기(公器)라고도 말할 만하다.

구성원들의 삶을 돌보는 일에 소홀한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적 가치 역시 생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생을 살피는 제대로 된 정치가 펼쳐지려면 돌봄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되어야 한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 복지를 살뜰히 돌보고, 그들이 꿈꾸는 가치를 반영할 때 민주주의의 정치는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돌봄의 맥락에서 새롭게 참고해야 할 시민성은 관계에 참여하는 자아 개념이다. 돌봄의 시민성은 취약성과 의존성, 상호의존성을 새롭게 사유하기를 권유하며, 그 실천은 구체적인 일상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좋은 삶’에 대한 적극적 탐색을 가능케 한다.

문학이 그리는 돌봄의 시민성은 인간 존재의 본성이나 유대를 상호의존적으로 보면서도 주체의 역량을 고려하는 실천적인 가능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위기와 재난 속에서 국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공공적 돌봄이 무엇인지, 그리고 가족을 넘어 모든 시민들이 공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돌봄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는 이러한 서사는 취약한 존재의 고통을 서사로 끌어들이면서도 그것을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두지 않는 깊은 책임감을 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고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써낸 결과물이지, 한 인물의 증언만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요즘 4·3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때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이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는지, 어떤 일로 생계를 이었고 무엇을 믿고 받들며 살아왔는지, 그런 일상의 깊이 말이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특징을 정리할 때 ‘현재성’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선생은 역사학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가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재성을 강조한 강만길 역사학의 대표적인 예는 1970, 80년대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제창하여 분단사학과 냉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강만길 역사학’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선생 자신께서 평생 자신의 논지를 끊임없이 고치고 심화해간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학은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넓고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선생이 ‘총체적인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지만 견디는 방법은 있다. 오래 걷고 깊은 잠을 자는 것. 야외에서 동물을 찾아다니면서 오래 걷는 날은 하루 7만보를 걸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걷다보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피곤했고, 기지에 돌아오면 지쳐서 금세 잠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까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노동력의 세계적 이동과 고령화 현상을 막을 수 없고 저출생 문제는 심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 고령자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 노동시장의 규율을 어떻게 구성할지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실행하다가 정말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판단과 사회적 합의가 생길 때 외국인노동자가 들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죽음이 공동체의 경계와 문턱을 설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적·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비국민’이라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통치성이 죽음의 이름으로 신체화된 형상이라면,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쓰기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인간’됨을 재고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특권으로 죽음을 지목했다. 그 자신이 실행하기도 한 이른바 ‘자유죽음’은, 신이 내린 삶이라는 은총을 모독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규범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의 죽음론은 주어진 삶의 고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통찰하기 위해 그는 ‘삶’이라는 연속성을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므로 1인칭일 수 없다. 특히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객관적 인식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3인칭의 속성을 띠며, 이때 죽음은 지식이나 정보의 형태로 "공동의 관념, 공동의 환상"이 된다.4 죽음이 일종의 담론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삶에 작용한다는 점은 죽음이 강한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방기의 제주가 4·3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로 치달아가게 된 원인을 나름대로 탐색하면서 사건을 총체적으로 다뤄보고자 했으나 4·3은 인간의 언어로 그려내기엔 너무나도 압도적인 비참함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북토크 내내 "어두운 방 안에서 코끼리를 더듬은 격"이라는 표현을 반복했다.

그가 찾은 키워드는 제주의 ‘공동체주의’다. 작가는 그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진 제주 공동체를 그리워하면서, 지금의 제주가 대한민국의 일부라 해도 중앙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완전한 독립’과 ‘자치권’을 얻기를 소망했다.

『제주도우다』는 항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제주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갑자기 인구가 6만이나 늘어난 제주는 들떠 있었다. 주인공 안창세가 조천중학원을 다니던 1946년에는 전도의 소학교 학생 수만 2만에서 4만으로 늘었다. 일본이 물러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와 조선말을 쓰고 자치조직을 만들면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들은 보통의 제주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공동체적으로 대응했으니 4·3은 해방공간에서 자주독립국가를 꿈꾸었던 민중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공동체로서 봉기한 것이라고 봐야 해요. 사실 처음 원고에는 ‘아나키즘’이라고 썼는데 교정을 보며 ‘무정부주의’라고 고쳤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