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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11번째 주제는 위기(krisis)다. 한자로 위기(危機)가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합쳐진 의미라면, krisis 역시 이 안에 위험과 기회라는 의미를 포함한다. 다만, 이것은  krisis의 세 가지 해석 중 하나인 신학적 해석에 따른 것이다. 신학적 해석에 따르면 '위기'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위험'을 통해서 얻어진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이 된다.


 다가오는 위기 Krisis가 우주적인 사건으로 남아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삶으로의 해방을 보장하는 은혜의 확신 속에서 선취된다. 신의 심판이 예수의 고지 告知를 통해 이미 저기에 있지만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긴장 속에서 기대 지평이, 즉 다가올 역사적인 순간을 신학적으로 특징짓는 기대지평이 그려진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18


 이러한 신학적 해석 외에도 위기 krisis를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올바름과 통치질서를 조율하는 개념으로 바라보는 법률적 해석, 환자의 완치에 따라 위기 krisis의 성격을 규정하는 의학적 해석등이 역사 안에서 교차하고 있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병의 진행에서 규칙성을 진단하려면, 발병일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위기 Krise가 완치로 귀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사람들은 완전한 위기와 재발을 배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위기를 구분했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19 


 이처럼 '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중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단연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1729 ~ 1797)과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 ~ 1809)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논쟁이다. 각각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과 <상식, 인권 Common Sense, Rights of Man>을 통해 혁명에 대한 논쟁의 전형을 코젤렉은 '위기 crisis'에서 찾는다.


 '위기'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 진단과 예측적 기능은 페인과 버크에 있어서 동일하다. 그러나 진단 내용과 기대와 관련해서 그 둘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버크는 의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페인은 신학적 기원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로, 세계사적인 대안들을 해석 내지 제시할 수 있는 '위기'의 새로운 의미론적 특성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그 개념은 공통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그러나 서로 대립적으로 적용된 투쟁 개념 Kampfbegriff이 된다.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6


 최후의 심판 이후 얻어질 구원에 대한 희망이 '신학적 해석'이라고 했을 때, 혁명(革命) 이후 앙시앙 레짐(Ancien Regime)의 붕괴와 새질서의 도래를 전망한 것이 페인의 예측이라면, 혁명 이후 정립되는 새로운 질서가 안정궤도에 들어선 후 혁명을 평가하는 '의학적 해석'은 버크의 것이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페인은 진보적 입장에, 버크는 보수적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처럼 코젤렉은 '위기'라는 단어를 통해 이들의 사상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토마스 페인 Thomas Paine은 '위기 The Crisis'라는 표현을 자신의 잡지의 제목으로 선택했다. 그는 이 잡지에서 1776년부터 1783년에 일어난 사건들에 도덕을 강제하는 도덕을, 즉 덕과 부덕, 자연법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부패한 전제정치 사이에 필요한 도전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평했다. "이것들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추세들이다."... 식민지의 붕괴는 그에게 있어서 단순히 정치/군사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사적인 심판이 실현된 것이었다. 독재의 몰락, 생지옥에 대한 승리... 위기는 더 이상 혁명의 전조가 아니다. 페인에 있어서 그것은 미국혁명을 통해 실현됐으며, 미국혁명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전무후무한 특징을 획득한다. 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3


 버크 역시 같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페인이 주문 呪文한 동일한 현상들을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데 사용했다... 간단히 말해서 버크는 종교의례처럼 물려받은 모든 사회 조건들과 정치 규칙들을 파괴하는 유럽 내전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_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11 : 위기>, p45


 코젤렉의 개념사에서 '위기'라는 단어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비로소 자리잡혔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12권은 <혁명 Revolution>이다. 코젤렉의 개념사를 읽다보면, 개념어가 의미를 확장하면서 최초의 의미 뿐 아니라 이와 반대되는 의미마저도 흡수하며 의미를 확장시켜 나가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때로는 상충되는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담여 있는 모순된 상황. 마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언어 안에 녹아든 것과 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근대사의 극심한 혼란을 간접적으로 나마 실감하게 된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12권에서 논의되는 '혁명'은 '반혁명'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서, 11권을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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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3-10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위기는 선택 (받는)을 통해 기회이군요
상평형에서 상전이의 그 때로도 볼 수 있고요

겨울호랑이 2021-03-10 00:25   좋아요 1 | URL
이번에 개념어 사전을 통해 crisis를 위기로 번역한 것에 몇 번을 감탄했습니다. 정말 의미를 잘 살린 것 같아요.^^:)

초딩 2021-03-10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한, 신 중심에서 인본으로 가면서 그 선택당함이 선택함으로 태가 바뀌어 해석해서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10 00:26   좋아요 1 | URL
^^:) 초딩님 말씀처럼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질서란 무엇을 뜻하는가? 진보라는 것은 한눈에도 그 뜻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우리가 인간 사회의 부족한 것 중의 하나로 진보를 말할 때 이는 개선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정도면 그 뜻이 어느 정도 분명하다. 그러나 질서라는 말은 경우가 다르다... 질서를 가장 좁게 정의하자면 복종이라는 말과 통한다... 진보만이 가진 독특한 정신 요소, 그 진보를 절정에 이르게 해주는 본질적인 요소는 바로 독창성이나 창의력이다. _존 스튜어트 밀, <대의정부론> 中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 ~ 1873)의 표현 처럼 진보(進步, progess)를  개선(改善, frformation)으로 바라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사전에 나오는 같은 의미를 갖는 독일어 Fortschritt 역시 동일하다고 볼 것인가?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시리즈를 읽으면서 얻은 점은 이에 답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같은 뿌리를 갖는 언어권 내에서도 미묘하지만 분명한 의미 차이를 알게 되면서, 특히 '개념어'에 해당하는 언어 사용과 번역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된다. 일부 개념어(예를 들면, 문화 kultur / 문명 civilisation)들은 다른 유럽어권 언어와 다른 의미를 갖지만, 다행히 '진보'라는 단어에는 심하게 다른 요소는 없어 보인다. '진보'가 문화권의 영향보다는 서구 사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단어이기 때문일까.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von Aquin의 이론은 약간의 차이를 보이긴 해도 진보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비슷한 틀 안에서 움직였다. "자연의 완성은 사실 세상의 시작에 내재해 있었다. 진정한 영광의 완성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광의 완성은 시작과 끝을 매개하는 중간자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의 한 가운데로 온 것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39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 ~ 1274)의 말 속에서 우리는 신에 의한 창조된 세계, 피조물로서 자연과 인간의 법칙이 하나이며 순환적 세계관  -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요한 묵시록 22:13)" - 을 발견한다. 중세의 진보가 신의 절대적/영속적 시간 속에서 이뤄진 발전을 의마한다면, 근대 이후 '이성 理性'을 가진 존재로서 역사의 주체인 인간의 진보는 방향성과 영속성 면에서 차이가 있다.


 진보 개념의 관철에서 척도가 된 것은 이성과 현세적 시간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의 지양이었다. 이성의 사용이나 이성을 통한 발견과 새로운 고안들은 시간과 함께 증가되었다. 결국은 이성 자체가 시간성을 띠게 되었다. 노화가 이전에는 노쇠의 진행 현상에 비유되었다면 이제는 이성의 사용의 확장으로 이해되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52


 신의 시간이 영원(永遠)이라면 그 자체로 완성(完成)을 의미하기에 중세의 진보는 신이 만든 세계 내에서의 순환을 의미하겠지만, 시간의 한계를 갖는 인간에게 진보는 보다 직선적이고 상향(上向)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면에서 '진보'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는 사실과 함께, 순환적인 자연의 법칙과 비순환적인 인간의 법칙의 차이를 발견한다.


 홉스 Thomas Hobbes는 자연과학에서의 진보와 이를 좇지 못하는 도덕 간에 벌어진 괴리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는 도덕론에서 기하학적 정리처럼 규칙성과 예측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학문적 발전과 이에 상응하지 못하는 도덕적 수준의 비대칭에서 생겨난 이러한 요구는 이후에 진보에 대한 논의에서 단골 주제가 되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91


  비순환적인 인간의 법칙에서도 '진보'에 대한 문제는 계속된다. 홉스(Thomas Hobbes,1588 ~ 1679)의 지적처럼 과학으로 대표되는 학문의 진보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윤리의 문제는 일반적인 '진보'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또한, 개별 사건에서 발견되는 역사의 퇴보는 또한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보'를 바라보자는 시각이 새롭게 제시된다. 개별 사건으로는 퇴보가 되었을지라도, 보다 큰 흐름 속에서 개선된다는 역사의 법칙은 여전히 유용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보는 이중의 역사 해석을 필요로 했다. 개별 사건이나 역사적 사실은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일 수 있다. 하지만 진보의 관점에서는 위기와 혁명 자체도 크게 봤을 때 개선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쉽게 얘기 하자면 현재에 나쁜 일로 타격을 받는 운명을 겪더라도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말이다.(p102)... 역사의 이중 해석이 개선과 합리적 발전이라는 가설을 성립하게 했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진보 과정에서 시간 경험의 차이가 또 다른 명제를 이끌어냈다. 가속화의 명제가 그것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103 


 이로써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던 진보의 경험은 이제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어야 했다. 종종 내걸던 진보의 법칙은 경험적으로는 결코 공통분모를 가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보의 행위자나 관련자는 시간상 서로 다른 단계에 있다고 평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개인을 초월한 경험적 명제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될 수 있었고 보편적 증거라는 것도 그때그때 다양한 관점에서 본 것이었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123 


 아마도, 이러한 보편적 역사의 법칙으로서 '진보'는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 ~ 1903)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 Progress : Its Law and Cause>에 잘 나타난 듯하다. 그는 자연법칙의 진화(進化 evolution)를 인간 사회로 가져오면서 보편 법칙으로서 사회적 진화를 말한다.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 증가 속에서도 일어나는 진화, 그리고 진보. 20세기 대부분의 시기를 지배한 사회적 진화론의 논리를 우리는 여기에서 발견한다.

 

 현재의 모든 사건에서 그러한 것처럼 태초로부터 모든 작용력들이 여러 힘으로 분해되어 영속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창출한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복잡성의 증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틀림없다. 진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고, 인간이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유익한 필수과정이다._ 허버트 스펜서, <진보의 법칙과 원인>, p90


 코젤렉은 책의 마지막에서 '진보'라는 개념에는 언제나 정치적인 논리가 들어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A보다 B가 더 나은 상태이니,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진보의 가치판단이라면, 그 근거는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을 테니. 그런 면에서 '진보'라는 단어의 정의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코젤렉이 서두에서 말한 진보의 포괄적 개념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과거에 있었던 진보를 통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새 시대를 향해 질문을 던지게 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답을 얻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관점이든 관계없이 진보의 개념에는 예측의 잠재력이 내재하고 이것은 언제나 정치적 입장을 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p144


ps. 밀은 <대의정부론>에서 '질서 = 복종' 이라고 했는데, 스펜서의 복잡성 증가는 복종하지 않는 사회에서도 끊임없이 진보가 일어난다는 답도 포함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진보는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된 보편적 인류와 관련된 개념이 되었고, 때로는 개별적인 영역 혹은 구체적 행위 일체와 관련되었다... 진보 자체는 주체적 개념으로 가끔 더 나빠지는 것을 표현할 때도 있지만 보통 개선을 향한 움직임을 뜻한다. 또한, 진보는 비순환적 진행을 가리키며, 종종 가속화 Beschleunigung 를 의미한다. 진보의 목표는 유한한 범위 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것과 그 목표를 무한하게 연기하는 사이에서 동요한다.(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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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의 다층성은 회고적으로 '계몽' 개념의 의미 내용을 오직 두 정신사적 뿌리들로부터 연역하려는 시도가 문제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이 정신사적 뿌리들이란 첫째, 데카르트 인식론의 이념 영역, 그리고 이 인식론이 사유의 자기 확실성과 진리 인식 방법을 근거 지음.(p29)... 둘째, 종교적, 형이상학적 빛 이론들의 이념 영역. 이 영역은 "자연적인 빛 lumen naturale"이론의 근대적 변천을 걸쳐 앞에서 언급한 첫 이념 영역과 밀접하게 만난다.(p30)... 대략 1770년부터 '계몽'은 "앎의 수준"이라는 의미 변형과 연계되어 예컨대 공동체 Gemeinwesen나 민족과 같은 도덕적, 문화적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해가 계속 형성되면서 '계몽'은 이후 한 공동체, 민족, 시대 또는 지리적 공간의 전형적인 정신적 능력들과 표현 형식들의 전체를, 그리고 똑같이 그러한 물질적, 기술적 숙련들과 자식들의 전체를 의미할 수 있게 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1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의 6번째 주제는 "계몽 Aufklarung"이다. 근대와 뗄 수 없는 관련있는 이 단어에 대한 의미는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으며, 그 의미가 확장, 변형된 역사를 지녔기에 이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진다.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을 읽다보면, 이 단어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 단어도 별로 없을 듯하다.


 1786년 칸트는 한 시대를 계몽하는 것을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로 본 반면에, 한 개별 인간을 계몽하는 것을 당시로선 비교적 쉬운 일로 여겼다. 실러에겐 이 관계가 정확히 정반대다. 그에게 현 시대의 계몽은 문젯거리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이미 계몽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리가 밝게 비추었는데도  동시대인들에게 진리 수용에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7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계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젤렉의 조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어떤 근거로, 어떤 수단으로, 어디로 이끄는가. 이러한 코젤렉 조언은 '빛을 만들었다 en+light'는 영어 계몽(啓蒙 enlightment)을 잘 풀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추가적으로 계몽의 주체와 계몽의 대상을 넣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대마다 다른 색깔의 빛으로 표현된 '계몽'이라는 현상의 공통인자를 발견할 수 있다. 

 

참된 진리 자체가 빛으로 밝혀주고, 이로 인해 인식할 수 있다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 ~ 430)의 조명설(Illuminatio)의 구조 안에서, 심훈(沈熏, 1901 ~ 1936)의 소설 <상록수>에 나타난 브나로드 운동의 현상을 떠올린다면 계몽의 대강을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계몽'의 의미들에서, 그리고 이 의미들로부터 전개되는 계몽 개념의 그때그때 행해지는 주제 선택과 파급 범위와 평가와 적용 방식은 누가 누구에 의해 무엇에 대해 어떤 근거에서 어떤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계몽되어야"한다는 것인가라는 일반적인 물음에 그때마다 구체적으로 답변하는 것에 의존한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33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에 수록된 여러 단어들 중 다수가 이르면 17세기, 늦어도  18세기 후반 이후에 변형되거나 새롭게 의미를 추가된다. 이는 독일어의 개념을 설명하는 사전의 성격 상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 ~ 1832),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 ~ 1805)라는 독일의 거장들이 출현한 시기라는 점과 영국의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과 프랑스 대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시기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아마도, 이는 개념사들의 전반적인 설명이 되겠지만 적어도 '계몽'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조금 특별한 설명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 ~ 1803)의 '계몽'인식을 살펴본다면, 그가 스파르타에 '애국심'이라는 사상을, 아테네에 '계몽'이라는 사상을 부여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르더는 헬라스의 두 도시국가가 충돌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BC 460 ~ BC 445)은 이들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해석한다고 볼 수 있을까.


 헤르더는 '계몽'을 '인본성'의 본질 인식이자, 그 정신적 영향들로 언급된다. 이 영향에 의해 세계 창조자인 유일신에 관한 이론이 모든 철학과 종교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헤르더)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비교하면서 애국심과 계몽에 있어 인간성의 모든 인륜 문화가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두 개의 극점을... 포착해 스파르타엔 애국심의 극점을, 아테네엔 계몽의 극점을 부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계몽'을 '국가기술'과 연관시키며 이로써 민족에 어울리는 책무에 대해 그 민족의 계몽을 생각하고 있다._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6 : 계몽>, p141


 일반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을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한 스파르타의 견제 때문이라고 해석한 투키티네스(Thucydides, BC 465 ~ BC 400)의 분석이 일반적이지만, 투키티데스와 헤르더의 해설을 결합하여 '경제적 원인으로 발생한 전쟁이 가져온 정치적인 의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스파르타의 '애국심'이 아테네의 '계몽'을 이겼다고 볼 수 있겠다.


 23 (4) 이번 전쟁은 아테나이인들과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에우보이아 섬을 함락하고 맺은 30년 평화조약을 파기함으로써 일어났다. (5) 앞으로 어느 누구도 왜 헬라스인들 사이에 이런 큰 전쟁이 일어났는지 묻지 않도록, 나는 그들이 조약을 파기하게 된 원인과 그들의 쟁점을 먼저 기술하겠다. (6)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아테나이의 세력 신장이 라케다이몬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다._투퀴티네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 p46 

 

 그리스가 문화, 언어, 예술, 학문의 씨앗을 다른 곳으로부터 얻어왔음은 내가 보기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각, 건축, 신화, 문학 등의 몇몇 예에서 이는 명백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모든 것에 완전히 새로운 본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국 남들로부터 얻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는 점,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모든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일이 그리스인들의 과업이었다는 점 - 그리스 문화에 나타난 몇몇 이념의 진보에서 이러한 사실이 분명히 확인된다고 나는 생각한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1


 헤르더는 다른 책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에서는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한 그리스 문화와 뒤를 이어받는 로마 문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다뤄진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의 패권이 스파르나, 테베로 넘어가면서 그리스 문명 자체가 쇠퇴한 것을 생각해 본다면, 구조적으로 전쟁국가이면서 병영국가였던 로마가 계승한 그리스는 스파르타의 '애국심'과 군대사회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러한 기반 위에 수립된 고대 제국 로마. 스파르타의 '애국심'은 로마 제국의 '시민 의식'의 기반이 되었고, 중세 '신앙'의 기반이 된 반면, 아테네의 '계몽'은 르네상스(Renaissance)때까지 겨울잠을 잘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인간의 능력과 노력의 방향은 장년의 나이에 도달했다. 로마인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로마 민족은 그 얼마나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던가! 그리고 이 언덕 위에 그 얼마나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던가! 이들이 건설한 공공건물과 전투기구, 그 계획과 실행수단은 세계 전체의 콜로세움이 되었다! 로마에서 유희가 벌어졌을 때, 세 개의 대륙에 걸쳐 피가 흐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던가? 이 제국의 위대하고 존엄한 국민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힘을 떨쳤던가!(p63)... 로마인들이 주둔했던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수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 폭풍은 모든 민족이 지닌 민족적 사고방식의 가장 깊은 내실까지 휘몰아쳤다._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 철학>, p64


 물론, 이처럼 생각하는 것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닐것이다. 18세기 후반 이후 독일의 계몽주의가 민족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보다 복잡하게 흘러간 19세기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분명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수많은 사상가들의 다양하게 사용한 '계몽'이라는 의미 중 하나를 건져야 한다면, 헤르더의 개념을 가져가고 싶다. 이 정도로 '계몽'의 개념사를 일단 정리하고, 다른 연관 개념사와 관련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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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2-13 1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몽의 여러가지 층으로 나누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하며
모든 사실로 증명하지 않고
추론함으로써
사유하는 정신의
큰 두가지 방법의
근원을 규명하는데
문제가
있다는거죠?

첫줄 읽고 또 읽고 댓글부터 씁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3 12:27   좋아요 3 | URL
초딩님께서는 이미 책을 읽으신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코젤렉의 글의 의미를 잘 짚으셨다 여겨집니다. 조금 부연하자면 근대 이후 여러 의미로 사용된 ‘계몽‘의 뿌리를 앞서 말한 두 영역에서 찾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많은 부분을 설명하지만, 초딩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 또한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만큼, 상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러한 코젤렉의 생각 또한 현상학의 틀을 사용하기에 전부를 설명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봅니다. 초딩님 행복한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초딩 2021-02-13 14:34   좋아요 2 | URL
일제 시대 때의 브나르도 운동도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측면은 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그 타협이 굴종으로 보이기도하고,
너무 오래지속했던 조선의 양반체제의 붕괴를 사회주의 운동으로 그리고 평등을 위한 신분타파 운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현상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고 ㅜㅜ 사실 현재에서는 화자의 색이 입혀질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현재의 우리도 현재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회고한다는 것은 반성과 긍정적인 미래를 위함이라는 관점에서보면
얻을 것을 취한다는 입장이 도움이 될 것 같구요.
그렇다 해도 긍정 또한 편향되면, 진실을 보지 못하니 비판의 냉정한 눈을 유지해야할 것이고요. 또 그러기 위해서는 편협하지 않기 위해 많이 알고 열려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코젤렉 읽어 보고 싶은데 우아 씨리즈가 많네요. 마음을 비우고 언급하신 계몽만 봐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 사유를 자극하는 글 언제나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1-02-13 14:57   좋아요 1 | URL
1919년 3.1 만세항쟁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독립투쟁 방식 중 하나가 교육을 통한 자각운동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투쟁을 생각하면 후손들을 생각했던 선조들의 사랑이 느껴져 뭉클해집니다. 브나로드 운동도 이러한 교육투쟁의 일환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실을 맺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교육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 결실을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초딩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우리는 적어도 인구의 4분의 1이 독일어를 쓰는 국경 도시에 살러 갔다. 우리, 헝가리 사람들에게 독일어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상기시켰으므로 적의 언어였고, 그것은 또한 당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외국 군인들의 언어이기도 했다.(p51) <문맹> 中


 아고타 크리스토프(Agota Kristof, 1935 ~ 2011)의 <문맹 L'Analphabete>은 헝가리 출신이며 프랑스어 작품을 쓰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여기에는 모국어(母國語)가 아닌 외국어로 작품을 쓰는 이의 어려움과 고민이 담겨있다. 


 내가 프랑스어로 말한 지는 30년도 더 되었고, 글을 쓴 지는 20년도 더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언어를 알지 못한다. 나는 프랑스어로 말할 때 실수를 하고, 사전들의 도움을 빈번히 받아야만 프랑스어로 글을 쓸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프랑스어 또한 적의 언어라고 부른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나 더 있는데, 이것이 가장 심각한 이유다. 이 언어가 나의 모국어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p53) <문맹> 中


 크리스토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헝가리어와 프랑스어의 다툼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 ~ 1913)가 <일반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 >에서 말한 언어의 지역절 할거 상태와 중첩현상을 연상시킨다. 


 터키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그리스어, 알바니아어, 루마니아어 등이 지역에 따라 갖가지 방식으로 혼합되어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언어가 언제나 전적으로 뒤섞여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지역 내에 공존한다 할 때,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지역적 할거 상태가 배제되지 않는다. 가령 한 언어는 주로 도시에서 쓰이고, 다른 언어는 시골에서 쓰이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할거 상태가 언제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p272)... 이러한 언어의 중첩 현상은 대부분의 경우 힘센 민족의 침입에 의해 야기되었다. <일반언어학 강의> 中


 크리스토프의 경우에는 언어의 중첩이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어지지 않은 듯하다. 작가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어났던 두 언어 사이의 치열한 투쟁. 그것은 언어가 단순하 의사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가 <지식의 고고학 L'Archeologie du Savoir>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사고는 에피스테메(episteme)의 영향을 받고, 황현산이 말한 바와 같이 언어는 에피스테메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작가의 사고를 지배하고자 하는 두 언어의 헤게모니(Hegemonie) 다툼이라 여겨진다.

 

 그들은 분명 그들의 역사, 그들의 경제, 그들의 사회적 실천, 그들이 말하는 랑그, 그들의 선조들의 신화, 그들의 부모가 어린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우화들까지도 그들의 의식에 전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 규칙들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오는 그리고 그 근원 가까이에 무한히 머무를 파롤의 신선함에 의해 적어도 그들의 <의미 意味>를 바꿀 수 있는 이 부드러운 확실성을 빼앗기기보다는, 언설이 규칙들과 분석가능한 변환들에 복종하는 하나의 복잡한 그리고 분화된 실천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할 것이다.(p290) <지식의 고고학> 中


 에밀 시오랑의 글을 읽다보면, 서구인들이 알고 있는 불교는 우리가 아는 불교보다 훨씬 더 염세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서구어로 번역된 불경과 한역불경의 차이이기도 할 것 같다.(p109)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中


 한편,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기표(記表) - 기의(記意)의 관계를 언어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기표 -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며, 이를 기호로 받아들이는 체계 내에서는 필연화된다는 소쉬르의 주장은 수많은 언어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뒷받침된다.


 언어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한 사물과 한 명칭이 아니라,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이다. 이 청각영상이란 순전히 물리적 사물인 실체적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의 정신적 흔적, 즉 감각이 우리에게 증언해 주는 소리의 재현이다.(p92)... 우리는 개념과 청각영상의 결합을 기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상 용법에서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청각영상 만을 지칭한다.(p93)... 우리는 전체를 지칭하는 데 기호(signe)라는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개념과 청각영상에는 각각 기의(signifie)와 기표(signifiant)를 대체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다. 또 좀 더 간략히 언어기호는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바, 그 이유는 우리가 기호를 기표와 기의의 연합에서 비롯되는 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p94) <일반언어학 강의> 中


 그렇지만, <문맹>에서 어린 시절의 저자는 다양한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헝가리에 정착한 집시들의 언어를 어린시절의 저자는 언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시절의 저자는 언어의 단일성에 사로잡혔지만, 이런 저자는 훗날 외국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면서, 언어의 지역절 할거상태를 받아들인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지만, <일반언어학 강의>에도 헝가리의 집시 언어 사례가 나오는데, 소쉬르는 이를 통해 집시들의 기원(起原)을 찾아낸다.


 처음에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사물들, 어떤 것들, 감정들, 색깔들, 꿈들, 편지들, 책들, 신문들이 이 언어였다. 나는 다른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인간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p49) <문맹> 中


 사람들이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집시들이 다른 언어로 말을 하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나는 그것이 진짜 언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틸라가 우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도록 야노 오빠와 내가 그러는 것처럼 그들끼리만 사용하기 위해 고안한 언어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집시들이 그렇게 언어를 고안해 사용하는 것은 오로지 집시들용으로 표시한 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p50)... 집시들이 오지그릇이나 갈대로 짠 바구니를 팔기 위해서 마을에 올 때면, 그들은 '정상적으로' 우리와 같은 언어를 썼다.(p51) <문맹> 中


 그러나 또한 식민 정치라든가 평화로운 유입의 경우도 있으며, 한편 유목민들의 경우 그 언어도 함께 이동되곤 한다. 특히 헝가리에 밀집 촌락을 형성하고 정착한 집시들이 그러했는데, 그 언어를 연구한 결과 이들이 어느 시대엔가 인도로부터 이주해 왔으리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p273) <일반언어학 강의> 中


 스위스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헝가리 작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른 언어 안의 공통 분모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언어의 원리 안에는 인류 공통의 보편언어가 있다는 촘스키(Avram Noam Chomsky, 1928 ~ )의 <통사구조 Syntactic Structures>의 설명을 옮겨본다.


 나는 단어들을 안다. 읽을 때는 그 단어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글자들은 아무것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헝가리어는 소리 나는 그대로 글을 쓰지만, 프랑스어는 그렇지 않다.(p109)... 2년 후,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나는 읽을 수 있다. 다시 읽을 수 있다.(p111)...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p112) <문맹> 中  


 보편언어가 있다는 촘스키의 주장은 얼핏 생각하면 모순되게 들린다. 이 세상에는 6,000가지 이상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보편언어라는 개념은 현상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자연언어에 공통된 특성들의 집합을 의미한다(p216)... 촘스키는 특성 언어들, 이를테면 한국어, 영어, 스와힐리어 등의 자연언어들에서 문법규칙을 결정하는 일반원리는 상당한 정도로 모든 인간 언어에 공통된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원리들은 매우 특수하고 뚜렷하므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원리들은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p220) <촘스키의 통사구조, 해제> 中


 보편언어 안의 문법 규칙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문법 규칙 뿐 아니라 인간 본성의 공통된 감정, 의식 등도 함께 언어 안에 녹아 있지 않을까. 때문에, 비록 뒤늦게 배운 외국어라 할지라도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충분히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문맹> 안의 언어(言語 language) 이야기는 짧지만, 이처럼 우리에게 언어, 말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언어 안의 기표와 기의, 언어와 사회 그리고 언어의 보편성, 구조주의. 이번 페이퍼는 <문맹>이라는 얇은 한 권의 책을 통해 떠올린 여러 생각을 두서 없이 옮겨본다. 페이퍼에 이름을 올린 책들은 각권의 상세 리뷰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만 줄이자. 따로 또 같이. 페이퍼와 리뷰... 


PS.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를 선물해 주신 이웃님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지나가듯 다루었지만, 리뷰를 쓰기 전 미리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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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4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4 0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20-01-04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겨울호랑이님 글 읽으니 이렇게나 풍성하게 이해될수 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아는 책 나와서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요^^

겨울호랑이 2020-01-04 10:0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서도 「문맹」을 좋아하시는군요! 제가 단발머리님 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초딩 2020-01-04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작가죠? 우아 관심 갑니다~~!

겨울호랑이 2020-01-04 15:25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초딩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2020-01-04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4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5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5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리학(性理學)은 조화로운 국정 운영을 보장할 수 있는 문관 계층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태조의 손자인 세종대왕은 이런 기본 방침을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려,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했다... 문맹을 줄이도록 장려하는 것이 성리학의 중요한 이념이므로 태조는 이미 왕실이 후원하는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시한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국어를 기록하려면 한자를 사용해야 했는데, 한자는 한국어의 음을 정확히 표기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방대한 문자를 일반 백성들 모두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단순화된 문자 체계인 한글을 만들었다. 이 문자의 창제 원리는 1445년에 간행된 책 <훈민정음>에 해설되어 있다... 한글의 도입은 전통주의자인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그들은 한글을 도입하면 다른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과거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제공하여 자신들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다.(p131) <역사의 책> 中


  <역사의 책 The History Book>은 세계사에서 의미있는 주요 사건과 그 의미를 제시한 책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사건 중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은 하나가 실려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세종대왕이 새 문자를 도입하다(1443년)'다. <역사의 책>에서는 우리 역사의 수많은 사건 중 한글 창제를 세계사에 의미있는 유일한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일까. 이번 페이퍼에서는 한글날을 맞아 이를 찾아보려 한다.


 <역사의 책>의 한글 창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며, 백성들 모두가 폭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문자이며, 당시 양반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아 19세기에 한글이 재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차례로 따라가보자.


 먼저, 한글은 우리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자라는 면에서 중요하다. 월터 J.옹(Walter J. Ong, 1912 ~ 2003)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Orality and Literacy>에서 '쓰기'가 자연스러운 '말하기'와는 달리 '의도적'이며, '의식적'인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적인 행위를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손쉽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모 24자로 만들어진 한글은 이 점에서 독창적이고 우수한 문자다.


  '쓰기'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소리를 정지된 공간으로 환원하고, 소리로 된 말 그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재로부터 그 말을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구술로 하는 말하기와는 대조적으로 쓰기는 완전히 인공적이다. '자연스럽게' 쓰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다... 쓰기(writing)나 스크립트(script)는 반드시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하기와는 구분된다... 쓰기는 그 밖의 인공적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니 어떠한 작품 이상으로 두말할 것 없이 가치 있으며 실제로 인간의 내적인 잠재력을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p129)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中 


 자기 생각을 의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쓰기'라고 했을 때, 쓰기에 어떤 언어가 사용되는가는 중요하다. 특히, 몸짓이나 표정 등으로 비언어적 의미가 동반되는 '말하기'와는 달리, 글을 통해 모든 것을 담아내는 쓰기에서 작은 단어의 선택은 전체 뜻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에, 말과 글의 대응은 더욱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De Captivate Babylonica Ecclesiae> 에는 대명사 hoc의 사용을 통해 자신의 교리를 입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말과 글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우리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이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대명사 'hoc'(이것)이 몸을 지시하는 것은 성의 유사성 때문이다. 그러나 중성이 없는 히브리어에서 '이것'은 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는 'hic est corpus meum'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언어의 용법과 상식은 그리스도가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할 때 주어 '이것'은 빵을 가리키는 것이지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준다. 이 말은 "이 빵은 내 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p171) <교회의 바빌론 포로에 대한 마르틴 루터의 서주> 中


 한글 창제는 이처럼 우리 생각을 우리 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글이 표음 문자이며, 이로 인해 우리 문화(文化)는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 역시 한글 창제의 효과라 여겨진다. 이는 마셜 맥루헌(Herbert Marshall McLuhan, 1911 ~ 1980)의 <구턴베르크 은하계 The Gutenberg Galaxy>의 내용으로 뒷받침된다.


 표음 문자 알파벳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효과의 핵심은 과잉 의미를 제거한 것이 아니다. "과잉 의미"란 "내용(content)"적인 개념이고, 그 자체가 알파벳적 기술의 유산이다. 즉, 모든 표음 문자로 된 된 글은 말을 대신한 시각적 기호이다. 말은 표음 문자로 쓰여진 글의 "내용'이다. 이는 어떤 다른 종류의 글의 내용은 아니다. 글이 상형 문자나 표의 문자로 쓰여진 것은 장(Gestals) 혹은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스냅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p97)... 알파벳에 의해 인간은 탈부족화 혹은 개별화되어 "문명"화되었다. 문화는 인간에 의하여 문명 이상으로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다. 단, 표음 문자인 알파벳이 없이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부족적인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p100) <구텐베르크 은하계> 中


 표음문자인 알파벳의 사용에 의해 서양 문명은 탈(脫)부족화를 이룰 수 있었고, 이러한 우수성으로 서양 문명이 다른 문명을 압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맥루헌의 주장이다. 일본도 표음문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표음문자를 사용하는 일본도 부족상태로 남아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소 무리하다라고 비판할 수 있겠만, 실제 일본어가 한자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상태임을 생각해본다면, 자신의 문자만으로 언어 표현이 가능한 알파벳의 우수성을 강조한 저자의 의도가 무리한 것만은 아니라 여겨진다. 

 

 알파벳 정도 또는 알파벳 이상의 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면에서 '한글' 역시 우수한 표음문자임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문화 역시 탈부족화한 독창적인 문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MS-Word가 장악한 word Processor 시장에서 '한글'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 무너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라 여겨진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한글은 우리가 문화제국주의 시대에서 한국문화를 지켜주는 방파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널리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한글은 사상과 정보를 폭넓게 공유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혁명으로 대표되는 시민의식의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 인터넷(Internet)으로 대표되는 IT 인프라가 구축되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 내용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한글'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자처럼 글자를 찾아서 입력을 해야한다면 과연 지금과 같은 독창적인 인터넷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허웅 선생의 국어 운동은 국민의 글자생활은 한글만으로, 언어생활은 쉽고, 바르고, 고운 말로,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말글의 가치를 높이 받드는, 국어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활동이었다. 선생이 주창한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라는 생각은 글자생활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정신이다. 한글만 쓰면 모든 국민들이 모두 편하게 글자생활을 하며 모두가 문화와 정보를 누릴 수 있게 되지만, 한글-한자를 섞어 글자생활을 하면, 일정한 교육을 받은 지식층만이 문화와 정보를 누리게 된다는 점에서 한글만 쓰기를 주창한 것이다.(p16) <우리 옛말본> - 해제 중 -


 한글날을 맞아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한글이 가져다 준 여러 선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손쉽게 표현하고 다른 사람과 오해없이 소통하며 세계의 다른 문화를 우리 것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역사의 책>에서 한글 창제를 세계사적 사건으로 바라본 것은 무리없는 판단이라 생각한다. 


다만, <역사의 책>에서는 '한글 창제'시기를 중세 세계 The Medieval World에 할당했지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근대 초기 The Early Modern Era에 배정하였다. 양반 계층 중심의 관료제 국가,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朝鮮)시대를 봉건시대(封建時代)인 중세(中世)에 해당한다고 본 것은 다른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페이퍼를 마무리하기 전 바른 글쓰기에 대해서 이오덕(李五德, 1925 ~ 2003)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아이들은 이렇게 해서 글을 쓴다. 아이들은 머리로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말을 문법에 맞게 맞추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입으로 늘 하고 있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글은 재미가 있고 감동을 준다. 만약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한 일들을 쓰게 하지 않고 책에 나온 어른들의 글에 따라 쓰게 하거나 책에 나온 낱말을 문법에 맞추어서 쓰게 하는 짓을 글짓기 공부라 해서 시킬 때 아이들은 글을 못 쓰게 된다. 쓰더라도 아주 맛없는 글, 죽은 글밖에 못 쓰게 된다.(p181) <우리글 바로쓰기 5> 中


 아이들처럼 글쓰는 것. 그것은 잃어버린 동심을 찾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래전 내가 어렸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렸을 적 쓴 일기를 펼쳐본다. 


 1982년 2월 18일 수요일 날씨 맑음


 숙제를 하고 있을 때 밤에 쓰는 일기를 생각했다. '게으름뱅이처럼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숙제를 다하고 나면 자유다. 또 거기에 밤에 쓰는 일기도 다 쓰면 자유다. 잠잘 때 쓰는 일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일기는 왜 쓰냐고 묻는다면, 다 크면 어렸을 때 생각을 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국민학생(초등학생)도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쉬운 한글이 주는 멋진 경험이 아닐까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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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10-09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글 날 가장 어울리는 공들인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10-09 18: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 역시 페이퍼를 정리하면서 한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었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10-09 18:17   좋아요 1 | URL
러시아 키릴 문자도 표음 문자인데 다소 복잡하여 소위 카톡 보내는데 어려움을 많이 느끼더라구요. 그래서 소위 카톡을 말로 하고 문자로 전환하던데, 한글의 편리성과 위대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10-09 18:22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요즘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러시아 역사책을 읽으시던데, 러시아 문화와 언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듯합니다. 이미 러시아어 능통자이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님이라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

雨香 2019-10-09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자 문화권임에도 표음문자 한글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축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IT 시대에 걸맞는 문자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듯 하고요.

겨울호랑이 2019-10-09 18:12   좋아요 0 | URL
그러습니다. 한자와 한글을 함께 익혀야 하는 것이 어렸을 때는 부담이 되지만,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만, 말을 어렵게 쓰는 것을 특권처럼 생각하는 인식은 바뀔 필요가 있다 여겨집니다. 저 또한 말을 어렵게 쓰는 편이라 고쳐야 하는데 생각만큼 쉽질 않습니다...ㅜㅜ

2019-10-10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0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2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10-16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버럴리스트 어린 겨울호랑이ㅎㅎ 겨울호랑이 님 어릴적 일기 넘 정감가네요^^ 제 일기는 집 떠나 있는 사이 버려져서 참 아쉬운데 그때 뭐라고 썼나 가끔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부터는 가지고 있는데요. 국가와 사회에 대해 시시때때로 고민을 하는.... 교육의 힘이었다고 봐야 할까요. 지금으로선 매우 저답지 않다고 할(-,-);; 읽으면 오글거려요

겨울호랑이 2019-10-16 01:25   좋아요 1 | URL
^^:) 어릴 때 일기를 보면 가끔 이럴 때가 있었나 싶습니다. 저는 얌전히 지낸 학생인줄 알았는데, 당대 기록을 보니 제가 전투 민족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ㅜㅜ 그래서 인간의 기억은 부정확하다 여겨집니다. 지금 일기장은 일기를 쓰기 싫어하는 작은 호랑이 연의랑 보고 있습니다. 아빠도 어렸을 땐 게으름뱅이였네 하면서 웃다보면 자신도 일기를 쓰고 싶다하니 과거 일기가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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