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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 ~ 2002)는 <텔레비전에 관하여 Sur la television>에서 자신의 이론인 '상징적 폭력'과 '장(場) 이론'을 구체적으로 펼치고 있다. 텔레비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검열은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도구(상징적 폭력)의 방편이며, 텔레비전은 이를 둘러싼 여러 이익집단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장(場)이라는 저자의 주장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부르디외가 말한 텔레비전의 검열과 장의 내용 그리고 미디어의 전망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1. 검열 : 상징적 폭력


 부르디외가 지적한 텔레비전의 부정적 기능 중 하나는 '검열(檢閱)'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있는 그대로가 아닌 텔레비전에 비춰진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의 검열 기능은  뉴스의 전달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기자들에 의해 지각된 것이고, 이것은 곧 기자들에게 '잘 보임'을 뜻합니다. 철학자나 작가가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에 의존할 수 없게 된다면, 가능한 한 자주 방송 화면에 나타나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p21)... 텔레비전에 접근하는 것은 무서운 검열을 반대급부로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율성의 상실로서, 무엇보다도 주체에 강요되는 커뮤니케이션이 조건입니다. (p24) <텔레비전에 대하여> 中


 텔레비전은 상당히 많은 인구의 두뇌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정보전달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다양한 일상사를 강조하면서, 그리고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들을 멀리하게 만듭니다.(p29) <텔레비전에 대하여> 中


 2. 장(場) 이론 


 부르디외는 사회 공간을 '장'으로 인식하는데, 특히, 저널리즘(journalism)이라는 장은 외부성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에서 행해지는 외부성은 광고주, 정치집단과 텔레비전을 소유한 매체, 텔레비전 컨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에 의한 압력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장(場)이란 구조화된 사회 공간입니다. 힘의 장에는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이 있어서, 이 공간 내에서는 항시적인 불평등의 관계들이 있습니다. 힘의 장은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유지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기도 합니다.(p70)... 저널리즘의 장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문화의 장들, 즉 수학의 장, 문학의 장, 법의 장, 학문의 장 등보다 훨씬 더 외부의 힘들에 종속되어 있습니다.(p91) <텔레비전에 대하여> 中


 텔레비전에 압력을 행사하는 힘 중 하나인 미디어 업체는 최근 자본의 집중화, 거대화라는 분위기에 맞춰 소수의 기업에 집중화되고 있다. 반면, 시청자의 관여정도가 높은 텔레비전 매체 특성 상 시청자들의 의견 역시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시청률 조사'를 통해 프로그램의 존폐가 결정되는 미디어의 현실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여겨진다. 


 세계화를 다룬 저서에서 데이비드 헬드 David Heild와 그의 동료들은 세계적 수준의 미디어 질서를 가져온 다섯 가지 핵심 변화(세계적 미디어 소유권의 집중 증가, 사적 소유권으로의 전환, 초국적 기업 구조, 미디어 산물의 다변화, 증가하는 미디어 합병)를 지적했다.(p783) <현대 사회학> 中

 

 텔레비전은 선명도가 낮기 때문에, 시청자의 관여의 정도가 높다. 따라서 가장 효과 있는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어떠한 과정으로 구성된 상황을 제시하는 것이다.(p442)... 사람들이 텔레비전 영상을 통하여 깊은 경험에 몰입하게 된다는 사실은 시각적 공간과 모자이크 공간의 차이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p461)<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에서 시청률은 완전히 특별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긴급성의 압력으로 전환됩니다. 신문들간의 경쟁, 신문과 텔레비전의 경쟁, 텔레비전들간의 경쟁은 일등이 되기 위하여 '속보'를 얻기 위한 일시적 경쟁의 형태를 띱니다.(p46) <텔레비전에 대하여> 中


 <텔레비전에 대하여>를 통해서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을 '상징적 폭력이 행해지는 장'이라고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은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라고 결론짓는다. 부르디외의 이러한 결론은 최근까지 정치권력에 의한 왜곡 보도 등을 통해 텔레비전의 부정적인 영향을 경험한 우리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거부하고 기피할 것인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의견을 통해 살펴보자.


 저는 책임의식이 강한 언론인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진실로 말해서, 텔레비전은 정치적 삶과 민주주의에 큰 위험을 준다고까지 생각합니다.(p11)... 텔레비전은 일부 신문과 같이 가장 광범위한 수용자를 찾아서, 외국인을 싫어하고 인종차별적인 선언과 행동을 인정하거나, 정치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아닌 협소한 자국적 비전을 매일 보여 줍니다.(p12) <텔레비전에 대하여> 中


3. 텔레비전에 대한 같은 생각, 다른 대처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은 1999년 EBS를 통해 <노자와 21세기>라는 주제로 텔레비전 강의를 했었다. 저자는 같은 제목의 책 서문에서 자신이 텔레비전 강의를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해방이후의 우리사회의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변화의 상당부분이 우리 삶의 공간으로 테레비라는 괴물이 진입함으로써 생겨난 사태임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p9)... 사실 테레비는 이미 어떤 "물건"이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로부터 객관화되고 타자화될 수 없는 "사회"다.(p10)... 국민을 교육시킬 수 있는 매체로서 국가정책의 효율성의 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테레비만큼 강력하고 효율적인 매체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현실이다.(p13) <노자와 21세기>(상)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대해 부르디외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도올 김용옥은 가치 중립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두 저자의 글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절대(絶對)'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드물다는 것이 현실이라 여겨진다. 그 중에서 어느 면을 더 크게 보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고, 자신의 철학(phliosophy)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제국주의에 대한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1938 ~ )의 전망을 옮기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치고자 한다. 자본의 집중화에 따라 미디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요즘, 기든스는 미디어 생태계의 자정(自淨)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 역시 어느 면을 더 크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몇몇 미디어 기업의 손에 있는 인터넷의 전망은 불과 몇 년 전 인터넷 개척자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자유롭고 무제한적 전자 세계의 생각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회에는 불가피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보원과 유통 채널을 총체적으로 통제하려는 시도는 거의 성공하기 힘들 터인데, 독점 방지를 목표로 하는 앤티-트러스트(anti-trust)법 때문이거나, 아니면 대안적 정보원을 찾고 있는 미디어 사용자의 집요하고 창조적인 반응을 통해 제동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 형태와 내용이 그 범위와 분량에서 확장을 거듭함에 따라, 개인들은  접하는 메시지와 자료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미숙이 아니라 원숙해지는 것이다.(p786) <현대 사회학>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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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4: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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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4: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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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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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0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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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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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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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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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1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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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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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은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인 고백의 형태이다. 신문은 사건을 이용해서, 또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도 사건들을 채색할 수 있다. 그러나 신문에 복잡한 <인간적 흥미 위주의 기사>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것은 매일 다양한 기사들이 배열되어 대중 앞에 제공되기 때문이다.(p288) <미디어의 이해> 中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 1911 ~ 1980)은 <미디어의 이해 Understanding Media>를 통해서 신문(新問)이 공공의 참여를 제공하는 개인적 고백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신문은 최근 경쟁 매체들의 등장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움베트르 에코(Umberto Eco, 1932 ~ 2016)는 그의 저서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을 통해 신문의 생존법을 제시한다.


 서구와 같은 문화 내에서는, 작용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이 종종 충격으로 여겨진다. (p35) <미디어의 이해> 中


 에코에 따르면 이미 1960년대부터 신문의 기능은 뉴스의 제공이 아니라, 다른 권력 기관과 결탁을 위한 메세지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할은 1990년대까지도 이어지지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제 주도권은 '텔레비전(television)'으로 넘어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있었던 신문의 기능과 성격에 관한 논쟁은 두 개의 테마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습니다. (1) 뉴스와 논평 사이의 차이, 그러니까 객관성에 대한 관심의 환기, 그리고 (2) 신문은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권력의 도구라는 것이었지요. 정당이나 경제적 집단들은 의도적으로 비밀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들의 진짜 기능은 시민들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머리 위를 지나 다른 권력 집단에 암호화된 메세지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p1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예전에는 신문들이 맨 처음 뉴스를 전했는데 나중에 다른 매체들이 개입하여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것, 신문은 <편지가 뒤따름>이라는 말로 끝나는 전보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1962년에는 이미 전송(電送) 뉴스가 저녁 8시에 텔레비전 신문에 의해 전달되고 있었습니다.(p21)...풍자, 격렬한 논쟁, 특종의 제작은 이제 텔레비전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p23)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그렇다면, 신문과 텔레비전은 미디어로서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자. 맥루언에 따르면 신문과 텔레비전 모두 '모자이크 적 형태'로 참여를 요청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다만, 텔레비전이 보다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하도록 만든다는 점이 두 매체의 차이가 된다. 최근 인터넷이 보다 보편화되어 실시간 동영상 서비스 (streaming service)와 시청자의 댓글 참여는 정보 제공과 참여의 주기를 더욱 짧게 만들고 있다.


 신문이란 애초부터 책의 형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 적 형태, 즉 참여를 요하는 형태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쇄와 취재의 가속으로 인해 이러한 모자이크적 형태는 인간 공동 사회의 지배적 양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모자이크적 형태란 <분리된 견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297)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 시대 10년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깊은 관여를 향한 충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문화가 지닌 먼 앞날의 시각화된 목표는 그 충동 때문에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자신들과는 관계 없는 것처럼, 더 나아가 무기력하고 활기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p464)... 텔레비전 어린이는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학습에서든 인생에서든 간에 단편적이고 단순히 시각화되어 있기만 한 목표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p465) <미디어의 이해> 中


  텔레비전은 보다 효과적으로 미디어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기에 신문은 텔레비전의 보조 수단으로 위치가 격하(格下)되었다. 그리고, 에코는 신문들이 보다 지역화(localization)하거나, 보다 객관화된 정보의 제공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 이상의 두 가지 대안을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신문은 이제는 이미 텔레비전의 시녀입니다. 소위 말하듯이 신문의 일정표를 확정하는 것은 바로 텔레비전입니다.(p31)... 신문이 텔레비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앞장서서 텔레비전을 특권적인 정치 공간으로 설정하였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경쟁자를 지나칠 정도로 선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문은 과도할 절도로 공연을 정치화하였습니다.(p35)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이러한 모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신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길은 <피지 Fiji 방식의 길>입니다. 지극히 초라한 신문들은 단지 통신사의 메시지들에 의존하면서도 그 전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들을 단 몇 줄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피지 방식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물론 신문의 경우 판매 부수의 엄청난 격감을 암시합니다.(p50)... 또 다른 길은 제가 <확산된 관심>이라 정의한 길일 것입니다. 즉 일간 신문이 버라이어티 주간지가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 있는 원천이 되는 것이지요.(p51)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에코는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속에서 엄격하고 신빙성 있는 정보 제공자로서의 신문이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신문이 선택한 길을 이와는 달라 보인다. 


 신문이 <주간지화>되었습니다. 일간지는 점점 더 주간지와 비슷하게 되었고, 버라이어티, 풍습, 정치 생활과 관련된 소문들에 대한 논의, 공연 예술계에 대한 관심에 방대한 지면을 할애하였습니다.(p24)... 일간지들은 주간지화 하기 위해 페이지 수를 늘이고, 페이지 수를 늘리기 위해 광고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더 많은 광고를 싣기 위해 페이지 수를 더욱 늘리고 부록들을 고안해 내고... 때로는 뉴스가 아닌 것을 뉴스로 만들기도 합니다.(p27)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中


 생존을 위한 신문들의 노력은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기사의 생산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는 결국 언론이 대기업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는 일반의 인식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진] 4대 재벌의 언론사 광고 지배력(출처 : JTBC)


 사회 내에서 자동화가 지배적일수록, <정보>가 중요한 상품이라는 점과 형태를 갖춘 상품은 정보 이동에 뒤따르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광고주는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시간과 공간을 산다. 광고주들은 독자나 청취자나 시청자의 일부를 사는 것이다. 그들은 그 방법만 안다면 기꺼이 독자, 청취자, 시청자에게 시간과 주의를 기울여준 대가를 직접 지불할 것이다.(p292)... 광고란(그리고 주식 시세란)은 신문의 기초를 지탱하고 있다.(p293) <미디어의 이해> 中


  또한, 뉴스의 반복-확대 재생산의 고리 속에서 확인되지 않는 거짓 뉴스가 전염병처럼 번지는 현실 속에서 점점 신문의 신뢰성은 땅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 현재 신문으로 대표되는 언론이 처한 위기의 단면이다.


[사진] 세월호 오보 사례(출처 : MBC) 

 

 신문이 뉴스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해 비평적으로 말하는 것과, 이미 공개된 뉴스를 마치 새로운 뉴스처럼 사용하는 것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이제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저널리즘의 질병처럼 보인다. 어느 권위있는 사람이 나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문들이 더 잘 팔린다고(그리고 분명 비용은 더 적게 들 것이다.) (p58)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20년 전 1월 14일의 신문이 가장 최근의 1월 14일 자 신문과 동일한 뉴스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문사의 잘못일까? 분명히 아니다. 그들은 당시 일어난 것을 기록했으며, 동시에 현재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이 나라에서는 20년 전부터 많은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언제나 똑같은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p70)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 中


 에코가 20년 전에 지적한 이탈리아 신문과 언론의 문제점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가 말한 신문의 생존 방법이 더 깊이 와닿는다. 


 일단 법이 성문화되면 힘없는 자나 부자나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다네. 그러면 부유한 시민이 나쁜 짓을 할 경우 힘없는 자가 비판을 할 수 있으며, 약자도 옳으면 강자를 이길 수 있다네. 자유란 이런 것일세. "누가 도시에 유익한 안건을 갖고 있어 공론(公論)에 부치기를 원하십니까?" 원하는 자는 이름을 날리고, 원치 않는 자는 침묵하면 된다네. 도시에 이보다 더 한 평등이 어디 있겠는가? (433 ~ 441)  <탄원하는 여인들 > 中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5 ~ BC 406)는 <탄원하는 여인들 Hekabe> 속에서 테세우스(Theseus)의 말을 빌려 민주정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문과 언론이 처음으로 돌아가, 뉴스들의 엄격하고도 신빙성있는 원천이 되어, 민주주의의 자유와 평등에 기여했을 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며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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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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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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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4-19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은 텔레비전의 시녀’라는 에코의 시각이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TV와 언론은 SNS의 시동(侍童)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시녀’라는 표현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일부 기자들은 SNS에 공유되는 게시물을 허락 없이 가져오고, SNS 게시물의 진위 여부를 살피지 않고 기사에 올립니다. 기자라는 명함이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한 아이들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죠.

겨울호랑이 2018-04-19 15:11   좋아요 0 | URL
cyrus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동시에, 에코가 이 글을 쓴 시점이 아직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인 1990년대 중반이라는 점을 감안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18-04-19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1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0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문의 쇠퇴는 우리가 정보를 운용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 있어요. 인터넷 등의 발달로 우리는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방식을 알게 되었고, 지금처럼 신문이 광고주나 그들 사익 추구로 변질되면서 더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죠. 정보의 질도 떨어지는데 경쟁력이 있을 수가 없죠^^;;

겨울호랑이 2018-04-20 11:44   좋아요 1 | URL
^^:) 그렇겠지요. 아마 정보 저장 매체로서 tape나 LP가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라 여겨집니다. 최근 LP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다시 사랑받는 것처럼 신문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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