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급격한 세력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의 견제로 시작된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 ~ BC 404).  이 전쟁이 시작된 2년차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테네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마 전쟁의 계절이 시작될 때 아테네에서 발생한 역병의 위력에 대한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작전을 중단했을 것이다. 투키티데스는 이 병을 앓았고 그 증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병은 폐렴 흑사병, 홍역, 장티푸스, 그리고 여러 다른 병들과 유사한 증상을 보였지만, 정확하게 들어맞는 병명은 알 수 없다. 기원전 427년에 진정될 때까지, 이 병으로 중장 보병 4,400명, 기병 300명, 하층민 다수가 사망했다. 아테네 주민의 약 3분의 1이 휩쓸려나갔다.(p106)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역병의 피해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체 주민의 3분의 1이 쓸려나간 이 병으로 인해 아테네는 전쟁 초기 큰 인력손실과 함께 페리클레스(Perikles, BC 495 ~ BC 429)를 잃어 국정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이러한 큰 피해로 인해 아테네인들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갔다.


 스파르타의 제1차 침공 이후에는 잠잠하던 평화파가 적과의 타협을 다시 촉구하고 나섰다. 더욱 공격적인 전쟁을 주장하던 자들은 아티카가 입은 큰 손실과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공격이 가져올 빈약한 성과를 지적할 수 있었다. 현재의 지출 수준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포티다이아의 포위는 여전히 예산에서 주된 요소였다. 돈을 절약하고 아테네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승리가 필요했다.(p107)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사건은 시칠리아 원정(Battaglia navale in Sicilia, BC 415 ~ BC413)였지만, 이러한 원정의 결정 배경에는 아테네인들의 초조한 심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병 또한 아테네 패배의 주요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자신도 병을 앓았던 투키티데스는 당시 역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평소 건강한 사람들이 별 이유없이 갑자기 감염되었는데, 최초 증상은 머리에 고열이 나고 눈이 빨갛게 충혈되는 것이었다. 입안에서는 목구멍과 혀에서 피가 나기 시작하고, 내쉬는 숨이 부자연스럽고 악취가 났다. 다음에는 재채기가 나며 목이 쉬었다. 얼마 뒤 고통이 가슴으로 내려오며 심한 기기침이 났다. 대부분의 경우 헛구역질과 함께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데, 이런 경련은 어떤 사람들은 구역질을 하고 나면 곧 완화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완화되었다.(p178)... 이 역병의 증상은 실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었다.(p178)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9) 


 당시 아테네의 역병은 원인을 잘 모르는 병이었기에 환자와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함께 쓰러져가는 치명적인 질병이었지만, 투키티데스는 이 병의 무서운 점을 그 증상에서 찾지 않았다. 오히려, 투키티데스는 병으로 인한 고독과 절망과 이로부터 오는 사회적 혼란을 더 치명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이 역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 병에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면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과, 사람들이 서로 간호하다 교차 감염되어 양 떼처럼 죽어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이 사람들이 죽어간 주된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환자 방문하기를 두려워하면서 환자는 방치된 채 혼자 죽어갔기 때문이다. 돌보는 이가 없어 식구가 모두 죽어간 집도 실제로 비일비재했다.(p179)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7 ~ 52)


 절망감과 고독감 속에서 환자들은 죽어갔고, 환자가 아닌 이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게 되면서 아테네는 향락에 빠지게 되었다. 페리클레스의 황금기라 불리던 시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테네의 패권은 이미 몰락하고 있었다.


 아테나이는 이 역병 탓에 무법천지가 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목숨도 재물도 덧없는 것으로 보고 가진 돈을 향락에 재빨리 써버리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 판국에 고상해 보이는 목표를 위해 사서 고생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들에 대한 두려움도 인간의 법도 구속력이 없었다... 이렇듯 아테나이인들은 이중고에 시달렸으니,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죽어갔고 도시 바깥의 영토는 약탈당하고 있었다.(p18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53)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는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전체 인구의 상당수를 잃었지만, 역사가 투키티데스는 역병의 치명적인 결과를 개인의 건강이 아닌 공동체의 붕괴에서 찾고 있다. 아테네는 이러한 역병으로 인해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퇴했다. 그리고, 2020년 2월 코로나19로 인해 전국이 마비된 현실안에서 우리는 아테네의 혼란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구의 3분의 1이 죽어간 질병과 2020년 2월 28일 질병관리본부 기준 사망자 13명의 질병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을까. 코로나 19의 실제 피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보이는 반응은 지나친 것은 아닐까. 질병의 피해보다는 마스크 착용과 사재기 등으로 인한 불안감이 질병보다 더 크게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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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20-02-29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신 글에 크게 동감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전염병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냉정하게 각자 해야할 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즐거운 독서 하시기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0-02-29 14:07   좋아요 2 | URL
blueyonder님 말씀처럼 이제는 전염병때문에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평안함 속에서 자가치유 능력을 믿고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물론 평소 지병있는 환자들은 건강에 유의해야겠지만요.... blueyonder님께서도 건강한 하루, 행복한 하루 되세요!^^:)

북다이제스터 2020-03-01 18:37   좋아요 1 | URL
예전에 이런 바이러스 없지 않았을텐데, 앎이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앎이 항상 좋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20-02-29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캬, 좋은 지적이네요. 지금 읽으면 좋은 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2-29 14: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곰곰발님^^:) 이 페이퍼를 나중에 읽었을 때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 세상이 되길 기원해 봅니다.

AgalmA 2020-03-08 1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국에서는 자비 검사가 400만 원이 넘어가서 염려가 돼도 서민들은 그런 의료 서비스를 선택하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한국은 그나마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16~20만원 가량이지만 몇몇 증상자는 그게 부담돼(확진자에겐 환불되지만 비확진자면 다 자비처리되니까) 검사 안 받다보니 병세가 더 깊어졌더군요.
부유한 사람들이 타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공동관심단지(CID)를 조성해 살고 있듯이 공동체 붕괴는 곳곳에 퍼져 있는데 이 질병 사태는 인종, 계층 갈등도 더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혐오 정서가 현실 공간까지 바꾸는 것도 같고 세상 곳곳이 차단의 장막으로 가득하네요.

겨울호랑이 2020-03-01 14:20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처럼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회 문제가 더 잘 드러났음으 느낍니다. 이러한 문제를 잘 의식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면, 전화위복이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그 자체로 총체적인 설명을 시도한다. 제1부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역사, 곧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역사이다. 그것은 서서히 흐르고 서서히 변화하지만, 흔히 완강하게 원래대로 되돌아가는 역사, 늘 다시 시작하는 순환의 역사이다.(p20)... 이런 움직이지 않는 역사의 층위에 느린 리듬의 역사가 따로 형성된다. 이는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를 그대로 간직한다는 조건에서 사회사(histoire sociale)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집단과 집단화의 역사를 가리킨다. 이 큰 파도가 지중해의 삶 체를 어떻게 들어올리는가, 이것이 내가 이 책의 제2부에서 제기하려는 질문이다... 제3부는 전통적인 역사를 다룬다. 말하자면 인간의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이며, 폴 라콩브와 프랑수아 시미앙이 말하는 사건사(ㅣ'histoire evenmentielle)이다. 비유하자면 조류가 자신의 강력한 움직임 위에 일으키는 파도, 곧 표면의 동요를 가리킨다. 이는 짧고 빠르고 신경질적인 요동의 역사이다.(p2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 ~ 1985)는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에서 한정된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역사층위를 보여주며 이 시대를 역사적 시간 시간의 외부에서 조명한다.


 이렇게 우리는 여러 층위로 이루어진 역사를 해부해보았다. 달리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지리적 시간, 사회적 시간, 개인의 시간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달리 표현하면 인간을 여러 성격으로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p22)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 초판 서문 - > 中


  역사의 시간을 분할하여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역사관이 16세기 말 에스파냐 제국의 흥망을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이후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다른 이야기지만,  브로델의 역사 층위 개념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Jonathan James Nolan, 1970 ~ ) 감독의 영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면 너무 나간 이야기일까?  개인적으로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17년 여름, '다이나모 작전 Operation Dynamo'을 소재로 한 <덩케르크>를 내놓는다... 영화는 수십 만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고립되어 있던 덩케르크 해변을 배경으로 육지 The Mole, 바다 The Sea, 하늘 The air 세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 상황을 보여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 공포의 여러 얼굴을 묘사하기 위해 세 개의 공간을 사용했다. 그런데 항구에서는 일주일, 바다에서는 하루, 하늘에서는 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이라도 공간이 달라지면 그 사건들 사이에 시간차가 발생한다는 의미다... 각 공간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 위기에 집중하다 보면 세 개의 시간차는 점차 줄어들어 결말부에 가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일이 된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조차 영화는 바다와 공중, 해변의 시간이 만날 때까지 각기 다른 시공간을 정밀하게 직조해 나간다. 놀란의 지적인 연출은 이러한 부분에서 발휘된다.(p145) <미국영화감독 1> 中


[그림] 영화 <덩케르크 Dunkirk> 포스터 ( 출처 : https://www.ebay.com/itm/Dunkirk-original-DS-movie-poster-27x40-D-S-2017-Advance-Christopher-Nolan-/312699658008?hash=item48ce5a1f18) 


 덩케르크 해변가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바다, 공중, 해변의 서로 다른 시간 교차. 그리고, 이러한 다른 시간의 교차를 통해 '전쟁' '죽음' 을 바라보며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유사함을 느낀다. 물론, 브로델의 역사 층위는 서로 다른 시간의 기반 위에서 상호 영향을 미치는 반면, 놀란의 작품 안에서 이들은 각각 고립된 시간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들은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종합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브로델의 관점이나 영화 <덩케르크>에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 서로 다른 시간들이 점점에서 만나면서 주제를 부각시키는 구성은 전체적으로 주제를 조망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생각된다. 근거 없는 몇몇 생각으로 <지중해>의 인트로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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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06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9-12-25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학기 영화보는 수업에서 덩케르크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나중에 올리겠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12-26 07:46   좋아요 0 | URL
네 NamGiKim 님의 리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1938년 10월 1일 이전에 체코 침공을 결정한 히틀러는 체임벌린 수상에게 300여명의 수데텐 독일인이 총살당했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수데텐은 합병되어야 한다고 단언하였다.(p763)... 9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양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안을 체코 정부에 보내기로 합의하였다. 즉 독일어 사용자가 주민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은 독일에 할양하며 할양 후 새로운 국경을 체코 정부는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이런 제안은 실로 체코의 독립 자체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만일 체코가 계속 저항한다면 더 이상 지원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을 9월 21일 새벽2시 15분에 체코 정부에 전달하였다. 체코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p764) <세계외교사> 中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1938년 비밀리에 재군비를 완료하고, 빠르게 제국을 확장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야심은 당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수데텐 지역의 할양을 요구하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이러한 독일의 무리한 요구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참혹한 전쟁을 피하고자 수데텐 지방의 할양을 체코 정부에게 압박했고, 이는 세계외교사에서 가장 큰 실패로 일컬어지는 뮌헨 협정로 이어지게 된다.


[사진] 뮌헨협정(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Munich-Agreement)


 뮌헨협정(Munich Agreement 1938년 9월 29일)은 히틀러가 고데스베르크에서 요구한 모든 것을 수용한 것이었다.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이 뮌헨 협정으로 자신들이 체코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의 운명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라고 믿었다.(p768) <세계외교사> 中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는 독일이 수데텐 지방을 가져간 후에는 더이상 침략을 하지 않으리라는 낙관적인 기대를 가졌지만, 이후 독일은 1939년 체코와 폴란드, 1940년 노르웨이를 차례로 침략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영국의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1874 ~ 1965)는 <제2차 세계대전 The Second World War>를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왜곡된 낙관주의의 물결이 1939년 3월 한 달 동안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독일의 강력한 압박에서 비롯된 체코슬로바키아의 긴장이 안팎으로 점점 더 고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뮌헨 협정을 지지하는 내각과 언론은 영국 국민을 끌고 들어간 정책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p218)... 1939년 3월 10일 히틀러는 뮌헨 협정의 결정에 의해서 방어선을 빼앗긴 채 쓰러지기 직전에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프라하에 도착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의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독일 제국에 합병시켰다.(p219) <제2차 세계 대전 上> 中


 15일,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의 무력에 의한 보헤미아 점령은 오늘 아침 6시에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지금 일어난 사태를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유로 우리의 진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염원은 여전히 평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p220) <제2차 세계 대전 上> 中


 수데텐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독일이 침략의사를 포기를 바랐던 영국과 프랑스는 결국 체코까지 잃고 나서야 자신들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침략행위에 대한 규탄이 전부였다. 반면, 그들의 그릇된 판단에 따라 지불한 대가는 컸다.


 체코의 점령은 오스트리아/수데텐의 병합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체코는 독일인이 거주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따라서 그것이 적나라한 침략행위라는 것은 만인에게 분명하였다. 독일인의 거주 지역만을 목적으로 한다는 히틀러의 공언이 허위임이 밝혀진 것이다. 영국은 1939년 3월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추진했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이 오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p771) <세계외교사> 中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81년 전 일어난 역사적 사건(뮌헨협정)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약 2개월 동안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어삼킨 '조 국 법무부 장관 임명'. 대통령의 정당한 지명 후에도 검찰, 언론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공격이 드센 상황이다. 비록 9월 28일 촛불집회 이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선(戰線)이 명확해졌다고 보는 편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현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이들이 조국 사퇴를 주장하는 것은 그렇다고 하겠지만, 자유한국당, 검찰과 언론에 반대한다면서 이들과 같은 주장을 펴는 이들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조 국이 사퇴한다면, 지금의 혼란이 가라앉을 수 있을까. 그런 낙관적인 생각은 수데텐을 히틀러에게 넘겨주면 평화가 온다고 믿은 체임벌린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건으로 공세수위를 높여 내년 4월 총선에서 승기를 잡으려 흠집 내기에 여념이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이번 '조 국 법무부장관'과 관련한 일련의 일들은 박근혜 탄핵 이후 사회모순과 부조리와의 전쟁에서 주력회전(主力會戰)으로 판단된다.

 

 주력회전이란 주력의 싸움이며 부수 목적을 추구하는 중요하지 않은 싸움이 아니다. 주력회전은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순간 조기에 포기하고 마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는 싸움이다.(p203)... 주력회전은 응축된 전쟁으로서 전체 전쟁 또는 전역의 중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 태양광선이 오목거울의 초점에 집중되어 완전한 형상과 최고의 불꽃을 형성하듯이 전쟁의 일체의 힘과 요소들이 주력회전에 집중되어야 통합 효과가 최고도로 발휘된다.(p215) <전쟁론> 中


 클라우제비츠(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 ~ 1831)가 <전쟁론 Vom Kriege>에서 강조한 주력회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본다면, 이제 우리의 활은 시위를 떠났고,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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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0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Putain de Guerre!>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C'etait la guerre des tranchees>는 제1차 세계대전을 병사의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들이다.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 1946 ~ )는 이들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작품 안에서 프랑스군과 독일군 병사들은 증오감에 넘쳐 상대를 죽이는 이들이 아니라, 죽음 앞에선 나약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다.

 

 희생을 강요당한 우리의 머릿속에는 과상망측한 생각이 깃들 수밖에. 이 살육장에서 도망칠 철두철미한 계획을 꾸미기도 했다. 펄펄 끓는 정어리 기름을 마시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면 황달이 와서 며칠 동안 입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자해가 시도되었다. 그것은 팔 하나 혹은 다리 하나를 잃는 대가를 감수해서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p31)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독일 병사들은 '친구'를 외쳤다. 양 진영이 처음부터 그랬다면 윗분들이 계획한 살육을 피할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그들이 우리 손에 쥐여준 총은 써야 했고, 그 결과도 따라왔다.(p73)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쟁터에 끌려가기보다 작은 부상으로 전선을 이탈하는 이들을 부러워하는 병사들, 서로 상대를 죽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리 얼마나 전쟁은 참혹했는가. 참혹한 전쟁과 파괴로 이성(理性 reason)의 시대를 종식시킨 제1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리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태어난 소비에트 연방(소련)도, 멀리 떨어진 연합국 일본도 아니었다. 진정한 승리자는 각국의 대자본(大資本)이었다.

 

 독일군은 크루프사가 루르 공장에서 제조한 포로 공격하고, 우리 군은 프랑스 슈나이더사가 르크뢰조, 생테티엔, 생샤몽 공장에서 제조한 대포로 응수한다.(p8)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이것은 분명 '문명'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당위성'의 전쟁도 아니었다. 슈나이더, 생 샤몽, 피아트, 크루프, 비커스, 르노, AEG, 포커, 호치키스 등 호주머니가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군수업체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다. 거기에는 얼마 전부터 비스코른도 포함되었다.(p69)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 1914 - 1918> 中


 전장은 대자본들이 생산한 신무기들의 테스트장으로 바뀌어갔으며, 병사들은 테스터로 전락해갔다. 그리고,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위해 파괴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들 대기업들은 전쟁 중에는 무기산업으로, 종전 후에는 전쟁복구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이미 예약한 상태였다.


  찬란히 빛나는 제1차 세계대전! 35개국아 직간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전했다. 사망자가 1000만명이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진흙 속에 파묻혔는가. 얼마나 많은 부상자, 과부가 생겨났는가. 순무를 키워야 할 좋은 땅에는 십자가들만 솟아 있다. 사망한 프랑스군인들을 혁명기념일에 4열행대로 행군하게 한다면, 마지막 군인이 지나갈 때까지 5박 6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비용은? 대포, 포탄, 그 밖에 다른 무기들은? 모두 2조 5000억 금본위 프랑이다! 그 돈이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주민들이 방 네 개짜리 집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p112)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그래픽노블 제1차 세계대전>과 <그것은 참호전이었다>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잘 표현한다. 그렇지만, 이처럼 비참한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시선을 돌려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직후의 유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전(開戰) 초기 민족주의에 도취한 유럽인들은 전쟁을 피하기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들인 군중은 비통해하기는커녕 서로를 증오했다. 그들은 기쁨과 증오를 공유했다. 손쉽게 무찌를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증오를.(p36)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한 카페의 악대가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한다. 애국심에 불타오른 손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제창한다. 한 노인만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다... 그 일요일, 나는 카페테라스에서 군중의 살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게 되었다.(p37)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 - 1918> 中


 전쟁 초기 낭만주의에 물든 이들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Ein Bericht von der Banalitat des Bosen>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떠올리게 된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p227)...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p349)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中


 비록, 세계대전의 진정한 수혜자가 전쟁에 나서지 않는 권력자, 지배층, 자본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관하게 만드는 것은 '악의 보편성'이며, 이는 우리들의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로부터 대파멸을 불러올 수 있음을 한나 아렌트는 경고한다. 악(惡)은 결코 악마처럼 기괴한 존재이거나, 하이드씨 처럼 분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을 인정했을 때, 우리는 파멸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정리해보자. 

 

 악의 보편성을 의식하게 되면 악을 또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게 된다. 악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 속 어디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의 모든 장소, 모든 시간, 그리고 모든 분별 있는 개개인의 삶에 간여해왔다. 악이 보편적임을 이해한다.(p19)... 그러므로 악마란 기묘하고 한물간 존재가 아니라 인간 정신 안에, 또는 인간 정신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영원한 힘이 표출된 것이다.(p38) <데블 The Devil> 中


 세계대전의 파멸적 결과와 이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최근 우리 사회의 모습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거의 2달 가까이 벌어진 언론과 검찰의 무도한 모습을 우리 모두를 대파멸로 이끌고 있다. 여기에 올라타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는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된다. 침묵과 방관은 대파멸로 가는 것을 '순전한 무사유'로 암묵적 동의를 표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 아이히만이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제는 우리가 검찰과 언론 그리고 자한당과 바미당을 견제하고 이들이 딴짓을 못하도록 준엄하게 심판하는 것. 이것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PS. 오늘 읽은 <좌우파 사전>에서 재밌게 읽은 퀴즈가 있어 옮겨본다.


 Q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소득에 따른 법칙금 차등화를 주장한 대통령은 누구일까요?(힌트 : 4지선다형에서 모르면 *번을 찍으시오.)


1. 김영삼  2. 김대중  3. 이명박  4. 노무현


 정답 :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1022362341


 같은 주장을 해도 조국이 하면 안되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이와 더불어, 이분이 사회주의자라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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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6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9-27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트 워에서는 그나마 중세
신사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던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없어졌
다고 하더군요.

어떤 이유에서라도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7 10:33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 초기에는 단기에 끝날 것이라는 희망과 자신이 영웅이 되리라는 일종의 허세가 퍼져있어 낭만적인 분위기가 났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토너먼트나 결투에서 멋진 통성명 후 상대와 겨루는 양상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독가스와 기관총알, 철조망에 찢기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후에는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모습이 작품에서는 그려집니다... 전쟁은 참혹하다는 레삭매냐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래서, 평화를 가져오려는 노력은 아무래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나와같다면 2019-11-14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번역이 좀 읽기 불편한가요?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고 싶은 책인데 번역에 실망했다는 글을 많이 봐서..

겨울호랑이 2019-11-14 20:08   좋아요 1 | URL
^^:) 제가 번역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인지는 몰라도 크게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먼저 도서관에서 빌려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책 내용은 훌륭하기에 몇 번 읽어도 좋을 책이라 여겨지에 도서관 맛보기를 추천드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이론에 따르면 다양한 통치 형태는 제각기 장점을 갖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안에서 가장 압제적인 형태로 바뀌다가 급기야 전복된다. 그러므로 군주정은 독재정이 되어 진보적 귀족들에게 전복당하고, 귀족정은 억압적인 과두제로 빠져들다가 민중 민주주의가 과두제 집권층을 타도하며, 민주정은 무정부 상태로의 문을 열어 또다시 상황을 안정시킬 군주정에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다... 로마 정치 체제에서 군주정 요소는 행정을 맡은 집정관들이었다.(p38)... 귀족정 요소는 당연히 원로원이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정 요소는 모든 로마 시민에게 열려 있던 민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p39)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 The storm before the storm>은 로마 공화정이 붕괴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구체적인 시간 배경은 BC 146에 일어난 카르타고의 멸망부터 BC 78의  술라 죽음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작품은 공화정 말기 혼란한 상황에서 공화정의 토대가 흔들리는 과정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 시기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가 <정치학 Politika>에서 말한 혼합정체의 요소를 가진 로마가 체제가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답(答)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구해본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오만을 부리면서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할 때, 시민들은 서로에 맞서, 또 관직을 가진 자들에게 그런 권위를 준 정치체제에 맞서 파당을 형성하기 때문에(정치체제의 변화가 일어난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함, 즉 탐욕(pleonexia)은 어떤 때는 사적인 재산으로부터, 어떤 때는 공공의 재산으로부터 생겨난다. 명예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파당의 원인이 되는지도 또한 분명하다.(1302b 5 ~ 10) <정치학 제5권> 中


 포에니 전쟁(Bella Punica, BC 264 ~ BC 146) 결과 카르타고(Carthago)는 멸망하게 되었고, 넓어진 식민지로부터 제국의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전에 없이 들어오면서 로마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로마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사회규범을 무너뜨리게 된다. 새로운 시대 변화를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라쿠스 형제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 163 ~ BC 132)와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 BC 154 ~ BC 121) - 의 개혁이 시작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이 공화정 초기를 규정짓는 요소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로마 정치는 계급 전쟁이 아니었다. 로마의 여러 가문은 엘리트층 귀족 보호자로부터 다수의 평민층 피호민들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축했다... 그렇지만 진정 로마인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암묵적인 사회/정치 행동규범이었다. 성문화되지 않은 규율, 전통, 상호 기대가 로마인들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선조들의 관습'을 뜻하는 모스 마이오룸 mos maiorum이라 했다.(p32) <폭풍 전의 폭풍> 中


 <폭풍 전의 폭풍>의 시작은 그라쿠스의 개혁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먼저 저자가 이 시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이 책의 저자 마이크 덩컨은 사임의 로마 혁명론을 따르고 있다. 세상에 느닷없이 불쑥 일어나는 혁명은 없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전히 야망의 힘으로 파괴한 정치체계는 분명 출발부터 건전하지 않았다.(p8) <폭풍전의 폭풍> -추천사- 中


 해제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역사가 로널드 사임(Ronald Syme, 1903 ~ 1989)의 역사관을 따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임의 역사관은 무엇일까. 이는 그의 주저 <로마혁명사 The Roman Revolution>을 통해 살펴본다.


 사임은 과두 정치를 로마사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영속적인 주제로 생각했다. "정부의 형태와 명칭이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민주정이든 상관없이 어느 시대에나 그러한 외관의 배후에는 과두 지배층이 숨어 있다. 그리고 공화정이었든 군주정이었든, 로마의 역사는 통치 계급의 역사이다. 혁명기의 대장군들, 외교가들, 금융가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공화정에서 사람은 같지만 다른 옷을 입은 권력의 집행자와 대리인으로 또다시 확인될 수 있다. 그들이 신(新)국가의 정부이다."(p30) <로마혁명사 1> - 해제 - 中


  사임의 역사관에서 로마사는 과두 집단의 의지가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을 통해 나타난 구체적인 결과다. 이러한 이유로 사임은 인물 집단 전기(prosopography) 방식을 통해 <로마 혁명사>를 기술했고, 이 안에서 수많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역사를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와 마리우스(Gaius Marius, BC 157 ~ BC 86),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 138 ~ BC 78) 역시 이러한 인물들 중 하나로 자리매김된다.


 그라쿠스 형제 때문에 제국에나 속하는 모든 결과들이 로마 국가에서 터져나와 혁명의 한 세기를 열었다. 귀족 가문 간의 전통적인 경쟁이 사라지기는커녕, 주로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당파 간의, 심지어는 계급 간의, 그리고 군사 지도자간의 알력으로 복잡해졌다. 이탈리아 전쟁(Bellum Italicum)에 이어서 내전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와 킨나 그리고 카르보가 이끄는 당파가 패배했다. 코르넬리우스 술라(L. Cornelius Sulla)가 승리를 거두었고, 폭력과 유혈 덕분에 로마는 질서를 회복하였다. 술라는 기사들을 많이 죽이고, 호민관의 입을 막고, 콘술들에게는 재갈을 물렸다. 그러나 술루조차 그 자신의 사례가 재현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한 후계자가 그의 지배권을 계승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p85) <로마혁명사 1> 中


 여기서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비슷한 유형의 책 하나를 <폭풍 전의 폭풍>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 3 : 승자의 혼미 ロ-マ人の 物語>가 그것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바라보는 로마의 역사의 중심은 인물(人物)이며, 특히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BC 100 ~ BC 44)다. 로마 이전의 유럽사가 모두 로마라는 지중해로 흘러든다라면, 시오노 나나미의 세계에서 로마사는 카이사르라는 인물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로마인 이야기> 전 15권 중 카이사르에게 할당된 분량이 2권에 이르는 점이 저자의 카이사르 사랑을 뒷받침한다. 이런 시오노 나나미에게 이 시기 역사는 카이사르를 준비하는 시기에 불과하다. 일종의 대림시기(Advent)라 할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p86) <로마인 이야기 3> 中


 다분히 인물 중심의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관(歷史觀)에서 우리는 다른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le, 1795 ~ 1881)이 <영웅숭배론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의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영웅숭배 및 영웅정신은 큰 주제입니다. 그것은 실로 큰 주제이며, 무한대한 주제로서, 세계 역사 그 자체만큼이나 광대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세계 역사, 즉 인간이 이 세계에서 이룩해온 역사는 근본적으로 이 땅에서 활동한 위인들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이룩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정당히 말해서 이 세계에 보내졌던 위인들에게 깃들여 있던 사상의 외적/물질적 결과요, 실질적인 구현이자 체현입니다. 전세계 역사의 본질은 이들의 역사였다고 생각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 그것은 이 자리에서 온당하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p28) <영웅숭배론> 中


 개인적으로 <폭풍 속의 폭풍> 속 인물들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 ~ 1831)의 시대정신(時代精神, Zeitgeist)의 구현이라 여겨지는 반면, <로마인 이야기>  속 인물들은 카이사르 라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예언자들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저자들의 역사관 차이는 두 책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술라가 폰투스 군을 맞아 싸운 카이로네이아 전투를 예로 살펴보자.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마치 열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캐스터의 목소리로 전투를 설명한다. 박진감있게 전투를 설명하는 능력은 시오노 나나미의 장점이기도 한데, 카이사르를 주인공으로 한 <로마인이야기 4> <로마인 이야기 5>에 이르면 거의 국방 TV의 토크멘터리 전쟁사의 대본같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림] Battle of Chaeronea(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01530137522876802/)


 폰투스군과 로마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전투 결과는 폰투스 쪽의 전사자와 포로가 10만 명 이상, 도망친 병사가 1만 명 남짓한 반면, 로마 쪽의 전사자는 12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끝난 뒤 점호에 대답하지 않은 병사는 14명이었지만, 해가 진 뒤에 진영으로 돌아온 병사가 두 명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한니발의 전과를 웃도는 신기록이었다.(p172) <로마인 이야기 3> 中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에 대해 우호적인 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해, <폭풍 속의 폭풍> 속의 카이로네이아 전투 모습은 한결 차분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점을 비교해볼 때 두 책 모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지만, 차분하게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폭풍 속의 폭풍>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폭풍 속의 폭풍>이 다루는 시기는 공화정의 말기 일부를 다루기에 로마 전체 역사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점은 한계다.


 고대 사료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과장법을 맛보기로 살펴보자면, 술라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10만 명 넘는 폰토스 병사가 죽은 반면 그 자신은 단 14명만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지만, 술라가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은 사실이다.(p373) <폭풍 전의 폭풍> 中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폭풍 전의 폭풍> 관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었다. 사임의 말처럼 로마 역사를 움직인 시대정신은 과두정으로 대표되는 지배계층으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례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가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에서 조명한 성산사건(聖山事件, BC 494)을 살펴보자. 평민들이 귀족의 독재에 대항하여 일으킨 성산사건에서 마키아벨리와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 59 ~ AD 17)는 무엇을 보았는가.

 

 로마의 평민들은 비르기니아 사건 때문에 무장을 하고 성산(聖山)으로 몰려갔다. 원로원은 사절을 보내어 그들이 무슨 권위로 사령관을 내팽개치고 제멋대로 성산으로 이탈했느냐고 물어왔다. 원로원의 권위는 높이 존중되었고 또 평민들은 그들 중에 지도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도 감히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리비우스는 그들이 대답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그 대답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고 논평한다. 이것은 지도자가 없는 군중은 위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p215) <로마사론> 中


 성산사건을 통해 평민과 귀족들은 다시 화해하게 되지만, 평민들은 성산사건을 통해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들의 깨달음이 구체적으로 이들을 대표할 인물을 찾게 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라쿠스,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등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평민들의 시대정신은 공화정이 붕괴된 오랜 시간이 지나 군인 황제 시대(軍人皇帝時代, AD 235 ~ 284)에도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하는 추론을 해본다. 이의 근거로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Iulianus, AD 331 ~ 363)가 갈리아 군단에 의해 황제에 옹립된 사건을 기번(Edward Gibbo, 1737 ~ 1794)의 <로마제국 쇠망사 Gibbon's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통해 살펴보자. 


[사진] Flavius Claudius Iulianus (출처 : https://hellenicfaith.com/zeus-helios/)

 

 무장한 병사들의 슬픔은 곧 분노로 바뀌었으며,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불만스러운 웅얼거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담하게 막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과격한 선동이라도 일으킬 듯한 기세로 치달았다. 또한 지휘관들의 묵인 속에서 율리아누스가 받은 치욕, 갈리아 군데애 데한 억압, 아시아 군주의 악덕을 생생하게 묘사한 비방의 글이 비밀스럽게 유포되었다.... 군대는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렇게 갈리아 군단은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p271) <로마제국 쇠망사 2> 中


  페이퍼의 처음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체제의 변동이 탐욕과 명예라는 동기를 통해 파벌의 형성되고 이는 체제의 변동으로 이어졌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로마의 경우 파벌의 형성된 원인이 민중들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를 단순하게 탐욕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개인의견으로 그렇지 않다 생각된다. 


 정리하면, 로마의 정체(政體)가 과두정이었으며, 공화정과 제정 전반에 걸쳐 과두정이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서술한 사임의 역사관, 그리고 이를 반영한 <로마 혁명사> <폭풍 전의 폭풍>이 <영웅숭배론>과 <로마인 이야기>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렇지만, 과두정 이면에 위치한 로마 시민, 병사들의 관점있다는 전제 하에, <로마 혁명사>에서는 이 점이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 부분은 한계라 여겨지며, 대중 역사서인 <폭풍 전의 폭풍> 또한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폭풍 속의 폭풍>안에서 대중 교양서로서 가지는 즐거움과 한계를 동시에 확인하면서 이번 페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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