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4. 나라는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시카리파라는 새로운 강도단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한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인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255. 특히 그들은 축제일에 무리 가운데 섞여 있다가 옷 속에 숨겨둔 칼로 상대방을 찔러 살해했다. 적이 쓰러지면 살인자들은 군중 사이로 숨어들어가 무리의 일부인 것처럼 행세했다. 이런 뻔뻔한 행위가 도처에서 자행되었다.(p228)... 2.408. 이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던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마사다라고 불리는 요새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이곳을 급습하여 차지하고 로마 경비병들을 죽였으며 그곳에 자기편 소속의 군인들을 배치했다... 409.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로 당시 제사를 주관하던 자들을 감독하던 용감한 젊은이 엘르아살은 이방인으로부터 어떠한 예물이나 희생제물도 받지 말라고 명령했다. 로마와의 전쟁 시작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1>, p258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 ~ AD 100 ?)의 <유대 전쟁사 The Wars of the Jews>는  AD 70년 경에 있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IV, BC 215 ~ BC 164)의 예루살렘 침공부터 마사다(Massada)에서의 최후의 저항까지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이다. 처음에는 유대 저항군의 입장에서 서 있다가 이후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 AD 9 ~ AD 79) 장군(후에 황제)에게 투항한 이후 로마군의 입장에서 예루살렘 함락까지를 지켜보게 요세푸스. 그는 유대 전쟁의 시작을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아들 엘르아살의 마사다(Massada) 요새 점령으로부터 잡는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유대 전쟁의 마지막도 바로 이 요새에서 장식하게 된다. 최초이자 최후의 항쟁지 마사다 요새. 그곳은 어떤 곳인가.


 1.252. 플라비우스 실바가 유대지역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모든 유대지역이 로마에 정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요새가 아직도 반역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고, 흩어져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두 집결시켜 이 요새를 치러 갔다. 이 마지막 요새는 바로 마사다였다. 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3

  

[사진] Massada(출처 : https://www.secrettelaviv.com/best/activities/massada)

 

 마사다 요새는 이스라엘의 초급 장교들이 임관 직전에 반드시 방문하는 곳으로 알려져있다. 로마군의 공격으로 예루살렘(Jerusalem) 함락 후 최후의 저항을 한 곳으로 알려진 마사다 요새. 생존자 없이 전원 자결하여 비장함을 풍기는 이곳에서 이스라엘 청년 장교들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고 들었다. 이를 장교 임관 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라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되새기는 프로그램 중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와 같은 의미를 남한산성이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그보다는 한강대교에 가서 한국전쟁 당시 수뇌부의 수많은 피난민과 군인들이 건너고 있는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갔었던 아픈 역사를 되새기는 편이 보다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도 '마사다'는 비장한 장소로 여겨지지만, 당시의 상황을 지켜본 역사가 요세푸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지지 않았나 보다. 그의 눈에 마사다에 모인 이들은 광신도(狂信徒, zealot)에 불과하다.


 253.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시카리파 수장 엘르아살은 매우 큰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유다의 후손으로, 이 유다는 퀴리니우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실시한 인구조사를 거부하라고 많은 유대인을 선동한 자였다. 254. 시카리파 유대인들은 로마에 항복한 자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그들의 재산을 강탕하고 집에 불을 질렀다. 255. 그들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간절히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해온 노력을 불명예스럽게 포기한 채 로마인의 속박 아래로 스스로 몸을 내던진 자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256. 왜냐하면 시카리파는 이들과 더불어 반란에 가담하여 로마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동족 유대인들에게 가장 지독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258. 더욱이 시카리인들은 자신들의 위선을 드러나자 그들의 악행에 대해 정당한 비난을 퍼붓는 동족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었다... 260. 개인적이든 혹은 사회적이든 간에 모든 사람이 마치 전염병에 걸린듯이 범죄에 물들여 있었다... 262. 가장 일선에서 동족에게 불법과 만행을 저지른 자들은 바로 시카리인들이었다. 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3


 처음에는 사두가이파에서 바리사이파로 개종하고, 다시 로마군에게 투항한 요세푸스. 동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요세푸스는 변절자겠지만, 유대 전쟁 전체를 떨어져서 바라본 그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에게 메시아(Messiah)의 재림을 기대하며 전쟁을 주장한 시카리파와 젤롯당들은 예루살렘 파괴의 원인제공자에 지나지 않는다.


 268. 이들은 유대 사회의 모든 질서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온통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이른바 젤롯당으로 불리는 족속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들은 젤롯이라는 이름대로 행위에 열심을 다하는 자들이었다... 270. 그들은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한다는 뜻에서 스스로를 열심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열심'이라는 말의 뜻을 야만스러운 성품으로 간주했던지, 혹은 가장 흉악한 범죄를 선한 일이라고 여겼던지, 사실상 그들은 그 이름을 조롱거리로 삼을 만한 행위를 일삼았다._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2>, p285


 광신도의 열정이 부른 마사다의 비극.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의 마지막 주제다. 이 사건 이후 유대 민족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지기까지 2,0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렇지만, 더 큰 비극은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이 아닐까.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폐해는 어제 오늘날의 문제는 아니지만, 2020년 광화문 집회 이후 이 문제는 더욱 아프게 다가오고, 우리의 삶이 비극(悲劇)으로 가는 듯 하다.

 

훌륭한 플롯은 단일한 결말을 가져야지, 일부 사람들이 말하듯 이중의 결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되고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행 때문이 아니고 중대한 하마르티아(hamartia 과실) 때문이어야 한다. _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제13장 11 ~ 15, p385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5 ~ BC 323)의 <시학 peri Poietikes>에서는 훌륭한 비극의 플롯을 '중대한 과실에서 오는 행복에서 불행으로의  전환'을으로 언급한다. 연일 쏟아지는 확진자 안내 문자를 보면서 얼마전까지 'K방역'의 성공이 또다른 시카리파에 의해 훼손받고 있음을 절감한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현실이 비극의 플롯요소를 잘 갖추고 있지만, 아직 극(劇)은 끝나지 않았기에 조용히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누가 또 알겠는가.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 1828 ~ 1906)의 <인형의 집 Et Dukkehjem >에서처럼 일반 대중들이 강력히 희망하면 작품의 결말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뀔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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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 2020-08-30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익한 글 잘읽고 갑니다...저도 꼭 사봐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20-08-30 14: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하마님 즐거운 독서, 건강한 하루 되세요!^^:)
 

 주말에 만난 동생의 서재에서 몇 권의 책을 발견하고 챙겨 돌아왔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인데, 1권이 2011년에 나왔으니 벌써 10년 전에 나온 책이다. 그 사이 읽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작가인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던 시기라 선뜻 읽을 새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시작했던 때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에 대해 동의하기 어려워지면서, 이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버린 듯하다. 가장 큰 문제는 영웅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인 작가의 역사관이라 여겨지지만, 작가의 다른 장점은 허구와 실제 사건의 경계를 허무는 명쾌한 서술은 무더운 여름날 부담없이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에 빌려와 읽었고 간략을 정리해본다.
























 <십자군 이야기>는 시대적으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소설 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와 전쟁 3부작 <콘스탄티노플 함락> ,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의 사이에 위치한 작품으로,  제4차 십자군 전쟁과 관련하여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도 깊은 관련을 갖는다.


 전체 3권으로 구성된 <십자군 이야기>는 제1권에서 성지 탈환이라는 관점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원정인 제1차 십자군 전쟁의 막전막후를 다룬다. 제2권은 제3권 사자심왕 리처드와 라이벌 살라딘의 대결을 위한 사전 포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제3권에서 두 인물의 역사적 대결애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이후  제7차 십자군 원정까지를 서둘러 마무리한다. 이러한 구성은 과거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중 무려 2권에 해당하는 분량을 카이사르에게 할당한 것을 연상시키는데, <로마인 이야기>의 중심이 카이사르에게 있는 것처럼, <십자군 이야기>에서 중심은 리처드 VS 살라딘이다. 또한, <십자군 이야기>에서 대부분 내용이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제2권 <포에니 전쟁>에서처럼 전사(戰史) 위주로 서술되기에 흥미롭고 빠르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은 <로마인 이야기>는 전체 15권 중 무게중심이 앞에 있어 뒷부분은 늘어진다는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십자군 이야기>가 독자들을 끝까지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된다.(물론, 3권이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도 흡입력에 한 몫한다.)













 다만, 이러한 구성 덕분에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의미와 배경등에 대한 설명은 제한적이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십자군 이야기>에는 유럽의 많은 귀족 자제들이(차남 이하의 아들들) 십자군전쟁에 참여해서 열정적으로 전투에 임한 장면에 엄중함을 더해 참여귀족들의 가문 문장까지 소개하며 웅장하게 서술한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제후와 왕 중심의 내용 전개에는 제1차 십자군 당시의 민중 십자군 운동이나, 십자군 운동 후반기의 소년 십자군 운동에 대한 서술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저자는 <십자군 이야기>의 여러 곳에서 일본사를 끌어다가 설명한다. 주로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 중심의 전국시대 역사관의 연장선상에서 제후들과 왕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이는 흥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를 온전하게 바라보는 것에는 제약이 따른다. 그렇다면, <십자군 이야기>를 보다 깊이있게 보기 위해 어떤 책들을 곁들어 읽으면 좋을까. 생각나는 자료 몇 편을 올려본다.


 먼저,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 시리즈가 다소 방대하지만, 읽을 수 있다면 중세 시대 배경을 이해하는데 훌륭한 조력자가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여력이 된다면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서양의 장원제>까지 읽을 수 있다면, 십자군 전쟁 뿐 아니라 중세 전반을 이해하는데 충분하다 생각된다. 봉건사회와 경제적 기반이 되는 장원제에 성립과 발전, 붕괴 등 전반에 대한 이해는 당시 중세 기사들뿐 아니라 많은 소작인, 부랑인들이 성지탈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를 일깨워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중세인들이 결코 '종교'적인 인간들이 아니었음도 알게 된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십자군 이야기>는 서구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다. 물론, 저자 나름의 노력으로 2권은 이슬람에 조금 더 비중을 두었으나, 이는 살라딘이라는 인물을 설명하기 위한 밑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 쪽 시선은 거의 반영되지 않은 한계를 보완할 필요가 생기는데,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이슬람 진영의 대 십자군 전쟁>, <성찰의 서>등은 새로운 시각을 갖는데 도움을 주는 책으로 여겨진다. 



 물론, 더 좋은 책들이 분명 많겠지만 아는 한도내에서 정리해 본다. 대부분의 역사서가 서구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긴 하지만, 당대 유럽인의 관점에서 성지 탈환의 의미를 찾는다면, <해방된 예루살렘>이라는 작품이 좋을 듯하다. 다만, 밀턴의 <실락원>에 등장하는 신과 사탄이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벌이는 구도로 전개되는 내용은 뚜렷한 선(善) - 악(惡) 구도를 갖추고 있으며, 신의 대리전이라는 양상은 <일리아드>의 재판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관심있다면 좋은 책이다.


이제는 좀 더 생생한 현장에 대해 이해를 도울만한 책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십자군 이야기>의 대부분 사건이 전쟁과 전투와 관련한 내용이다. 그래서,당대 무기와 전쟁에 대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읽힌다. 예를 들면, 회전(會戰)과 공성전(攻城戰)에 쓰이는 무기와 전술은 다르고, 유럽의 중무장 기병 중심 전술과 이슬람의 경무장 궁병을 중심으로 한 전술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정리해 둔다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영화 <킹덤 오브 헤븐 Kingdom of Heaven>은 1187년 하틴(Hattin)전투 이래 예루살렘 공방전까지의 양상을 실감나게 보여주기에 책을 읽기 전 미리 감상하면 책을 보다 입체적으로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십자군 이야기> 2권 후반부를 장식하는 이야기를 영화화했는데, 실제 역사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당대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좋은 영화라 여겨진다. <전쟁의 역사>와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는 십자군 원정의 주요 전투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이 담겨있다.


 이미 10년 전에 나온 책을 뒷북으로 읽고서 요란하게 떠든 감이 없진 않지만, <십자군 이야기>만으로 십자군 역사 전반을 읽었다고 보기엔 깊이가 떨어지는 것 같아 페이퍼를 작성해 본다. 이제 <십자군 이야기> 각권을 간략하게나마 리뷰에서 정리해 보도록 하자...


PS.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도 예전에 읽은 적이 있는데, 당시 이 작품은 십자군 역사를 조명했다기 보다, 미국과 부시의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춰진 작품으로 느껴졌다. 이후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나, 읽질 않아 내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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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10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카넷에서 나온 <해방된 예루살렘>도
절판되기 전에 사야 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시오노 씨의 책은 더 이상
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전에 <로마인
이야기>는 정말 죽어라고 읽었었는데
말이죠.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는 정
말 오래 전에 인터넷 연재로 만나게
되었는데, 역사서술 보다는 지적해
주신 대로 새로운 십자군 전쟁에 대한
비판이 주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8-10 15:30   좋아요 1 | URL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사야할 책도 많지만, 능력과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절판이나 품절되기 전에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출판 즉시 산다면 금방 예산이 거덜나고...ㅜㅜ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책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후에는 아무래도 작가의 세계관이 공감받기 힘들기 때문이겠지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는 당시에는 날카로운 시대비판이 인상적이었지만, 시대가 지난 지금에는 그렇게까지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작품은 강렬하지만 짧은 생명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님 비가 다시 많이 오네요.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앙리 피렌(Henri Pirenne, 1862 ~ 1935)은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Mahomet et Charlemagne>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로마 제국 멸망은 고대 사회의 단절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湖水)'로 만들었던 로마에게 게르만의 침입은 제국의 성격을 바꿀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했다. 반면,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을 이끈 원동력은 이슬람(Islam)의 진출에 있음을 앙리 피렌은 강조한다.

 

고대 전통이 단절된 원인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이슬람의 진출이었다. 이 진출의 결과는 동방과 서방의 최종적 분리였고, 지중해적 통일성의 종말이었다. 이제 이슬람교도의 호수가 된 서지중해는 과거에 늘 그랬던 것 같은 상업과 사상의 교통로가 더 이상 아니었다. 서방은 봉쇄되었고, 닫힌 세계에서 자체의 자원으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변화로 메로빙거 왕조과 쇠퇴했고 그 대신 게르만적인 북방에 기원을 둔 새로운 왕조인 카롤링거 왕조가 등장했다(p334)...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 로마 교회와 봉건제에 의해 지배된 유럽은 새로운 양상을 띠었다. 전통적인 용어를 빌리면 중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동향은 800년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이 건설됨으로써 완성되었다.(p335)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지중해 장악이 가져온 서구 유럽의 봉쇄가 유럽의 변화를 가져왔음을 강조한다.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팽창한 이슬람 세력은 동로마제국과 서유럽의 게르만 왕국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유럽에서 전통의 단절을 가져올 정도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팽창하는 정책을 택했을까? 


 무아위야와 그 부족은 칼로써 칼리프 지위를 획득했다. 그것은 혈연과 수니파 교리에 의해 결합된 전사와 상인의 사회이며 동시에 신정체제였다. 그 체제는 정치에서는 실용주의를, 종교에서는 절제를 강조했다. 칼리프 보위의 찬탈자가 성공하려면 아랍의 호전성을 잘 막아서 다른 곳으로 전환시킬 줄 알아야 하고 또 전쟁을 통해 국가 부흥의 과정을 공고히 할 줄 알아야 했다. 따라서 팽창 정책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새로운 체제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p150) <신의 용광로> 中


 이슬람의 팽창정책은 무아위야(Muawiyah bin Abi-Sufyan, 602 ~ 680)가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Ali ibn Abu Talib, 601 ~ 661)를 제거하고 칼리프의 지위에 오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국내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로 관심을 돌리듯, 무아위야 왕조는 정복전을 통해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음을 입증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슬람은 두 가지 선물을 받게 된다. 하나는 세계사에 유래없이 빠른 기간에 이루어진 광대한 이슬람 제국이며, 다른 하나는 이슬람 내부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과 대립이다.


[그림] 푸아티에 전투(출처 : https://www.britannica.com/event/Battle-of-Tours-732)


 732년 푸아티에(Battle of Tours-Poitiers) 전투는 이와 같이 팽창하는 이슬람의 침입을 막아낸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푸아티에 전투가 없었다면 유럽은 이슬람의 지배 하에 놓였을 것이며, '기독교의 유럽'이 아닌 '이슬람의 유럽'이 되는 위기의 상황을 극복한 성전(聖戰)이었다는 것이 유럽학자들의 인식이다. 그렇지만, <신의 용광로 God's Crucible: Islam and the Making of Europe, 570~1215>의 저자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David Levering Lewis)는 이러한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카롤링거 왕조의 유럽 사람들은 카를 '마르텔(해머)'이 거둔 푸아티에 승리 덕분에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그 반대로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패배가 더 바람직한 게 아니었을까?(p433) <신의 용광로> 中


  그렇다면, 이러한 의문이 제기된 이유는 무엇일까. 에브로 강과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남쪽의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661 ~750)과 북쪽의 프랑크 왕국(Regnum Francorum, 481 ~ 870)은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두 제국이었다.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들 간의 관용과 상호의존을 바탕으로 꽃을 피워낸 이슬람 문명은 개방적인 반면,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서유럽 문명은 폐쇄적이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 문화는 서로 융합하여 그보다 더 오랫동안 800년도 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어났다. 이슬람교는 시칠리아에서처럼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 강력한 상징적 특성을 보여주었는데, 남부 아랍의 힘야르족, 유대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메소포타미아인, 콥트인, 베르베르족, 아프리카인, 페르시아인, 인도인, 터키인, 몽골족, 심지어는 중국인에게 이미 그 점을 보여 주 바 있었다. 이슬람교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도덕적 갈등 없이 결합했다. 알안달루스에서는 이베리아-라틴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다.(p210) <중세 1> 中


 아브드 알-라흐만 1세는 무엇보다도 백성의 사회생활을 코란의 원칙으로 통치해야 했다. "알라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진정으로 증명하라." 예언자는 그렇게 명령했고 아브드 알-라흐만은 그에 순응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부당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하라."... 이 문명화된 정책에서 곧 저 유명한 콘비벤시아 convivencia, 즉 역사적으로 유명한 관용과 상호 의존의 기풍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곳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은 오랫동안 유럽 대륙에 하나의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공존의 문명을 누렸다.(p311) <신의 용광로> 中


 한 중세학자는 샤를마뉴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롤링거 사회는 세 집단으로...... 이루어졌다. 싸우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p434)...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남녀노소의 자유들은 처음에 서서히 그리고 나중에 가속적으로 사라졌고, 노예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농노로 전락했다. 경제와 정치의 피라미드 꼭대기까지 기어올라 권력을 움켜잡은 소수의 사람들은 세속과 교회의 유력자 대열에 합류했고, 그들의 많은 재산은 카롤링거 왕조의 전쟁기계와 영주들의 화려한 생활양식을 지탱했다.(p435) <신의 용광로> 中


 이러한 사회 분위기 차이는 이슬람에서 상업(商業)이 발전하게 되고, 유럽에서는 농업(農業)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방대한 제국에 거주하는 인구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우마이야 왕조에서 상업이 융성했다면, 이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사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은 농업사회로, 이후 중세 봉건 사회로 나아간다. 상업사회인 우마이야 왕조와 농업사회인 프랑크 왕국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재현(再現)이라고 여겨질 만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종교에 따라 경제적 길드로 편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도는 영리하고 활발하게 경쟁하면서 물건을 사고팔고 수입하고 수출했으며 거기에서 나오는 이득을 도시에 쏟아 부었다. 아브드 알-라흐만의 은화는 국제무역 통화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아랍 공동체가 방대한 자원의 은과 구리를 통제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역동적 현상이었다. 대조적으로 피핀 왕조의 프랑크 왕국에는 정금 正金 통화가 거의 없었다.(p317) <신의 용광로> 中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던 시점에, 지중해 북쪽 해안 지대인 셉티마이아와 프로방스에 사는 갈로-로마인들은 경제적 동력이 멈춰선 상태였고 농업과 상업도 고대 로마 초창기 때처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독교권의 문명과 비교해볼 때, 아랍 문명은 유기적 통합, 문화, 테크놀로지, 정치적 조직 등의 측면에서 메츠와 파리에 작용하는 원시적 힘보다 훨씬 우월했다.(p237) <신의 용광로> 中


 안-안달루스에서 중시되는 일은 비즈니스였고, 카롤링거의 유럽과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유럽에서는 전쟁이 비즈니스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전쟁 준비가 곧 전사 계급의 존재 이유였다... 프랑키아에서는 모든 자유인이 마치필드(군사 소집)에 신고했야 했지만, 알-안달루스에서는 세금 거두는 사람에게 성실하게 납부액을 신고하기만 하면 되었다.(p491) <신의 용광로>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3차 산업 중심의 이슬람 제국으로의 편입이 1차 산업 중심의 프랑크 왕국보다 유럽에게 있어 더 나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저자의 질문은 새롭지만, 의미있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질문은 마치, 아테네 중심의 델로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아니면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들어가는 것이 좋았을까 하는 질문으로 느껴지도 한다. 


 서구 역사가들은 푸아티에 전투를 엄청나게 중요한 무슬림의 패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경제적으로 후퇴한, 분열된, 동포를 죽이는 퇴행적 유럽을 형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카를 이후의 유럽은 자신이 이슬람과 정반대되는 문명이라고 자처하면서 종교 박해, 문화 배타주의, 세습 귀족 정치를 미덕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p268) <신의 용광로> 中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와  <신의 용광로> 둘 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각자의 의미가 있다. <마호메트와 샤를마뉴>가 게르만 민족의 침입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관점 대신 이슬람의 부상이 중세를 가져왔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면, <신의 용광로>는 이러한 앙리 피렌의 입장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변화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의미를 달리 갖는다. 즉, 푸아티에 전투가 유럽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인 것은 사실이겠지만, 과연 그 순간이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유럽이 이슬람화되었다면 더 빠른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럴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의 변수는 워낙 많기에, 이처럼  '만약(if...)'이라는 조건을 달고 있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이라는 질문이 우리에게 지나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듯.) 이보다는 무아위야조(朝)의 팽창정책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부로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서 말하는 '마호메트가 없었다면 샤를마뉴도 없었을 것이고, 샤를마뉴가 없었다면 마호메트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내용 속에서 국제관계에서 적대적 공생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한, 폐쇄사회에서의 종교(宗敎)와 권력(權力)의 결탁은 오늘날 분단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는 지점이라 여겨진다...


[사진] 그라나다에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나스르 왕궁(출처 : 이슬람)


[사진] 알람브라 사자들의 안뜰(Patio de los Leones)의 중앙(출처 :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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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02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길에 아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정독했습니다.

역사에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아주 거대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
던데 무슬림 세력이 이겼다면
어땠을 지 궁금하네요.

<신의 용광로> 땡기는데 절판
책이네요...

2020-04-02 1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2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0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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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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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3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6 17: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6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폴 존슨(Paul Johnson, 1928 ~ )의 <모던 타임스 2 : Modern Times: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80년대를 다룬 책이다. 1권과 마찬가지로 주요 인물의 성격과 태도를 상세히 묘사하며, 이들이 세계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서술하는 방식은 마치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서 조운이 유선을 구한 장판전투(長坂戰鬪)나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오관참육(五關斬六)을 그리는 것과 같은 호쾌함을 주기에 전체적인 현대사의 사건을 파악하는데 유용하다. 


[그림] 장판전투(출처 : 위키백과)


 그렇지만, 역사(歷史)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현대에 교훈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매카시즘(McCarthyism)을 다룬 장에 유독 시선이 머무른다. 1950년대 미국 정부의 고위직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체제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고발로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전역에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을 일게 한 이 사건에서 데자 뷰(deja vu)를 느끼게 된다.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 1908 ~ 1957)가 여러 사람의 인생에 피해를 입힐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미국의 명예 훼손에 관한 법률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의 근거 없는 주장을 그대로 발표했다. 사실 그들은 그럴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무책임한 비방을 일대 스캔들로 만든 것은언론, 특히 통신사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마녀 사냥으로 확대되었던 1970년대와 비슷하다. 둘째 일부 사회나 단체, 특히 할리우드와 워싱턴의 도덕적 비겁함 때문이다. 그들은 곳곳에 만연한 불합리와 비이성에 굴복했다.(p176) <모던 타임스2> 中


 21세기에도 빨갱이, 좌파 등의 이야기로 상대를 공격하고 온갖 거짓뉴스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1950년대 미국의 사례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Ike" Eisenhower, 1890 ~ 1969)는 '감추어진 손'이라 할만한 은밀한 통치 스타일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는 재임 기간 내내 이런 통치 스타일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이 밝혀졌다. 아이젠하워는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다.(p178) <모던 타임스2> 中


 폴 존슨은 <모던 타임스 2>정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 invisible hand'을 통해 미국을 번영의 시기로 이끈 아이젠하워가 어떻게 매카시즘을 잠재울 수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 ~ )가 왜 그토록 북한문제에 매달렸는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배울 수 있다. 아직, 문재인과 트럼프 두 대통령이 역사의 평가를 받기에는 이르지만, 적어도 이들이 택한 가치가 무엇인지는 역사가 답해주고 있다...  


 평화는 미국 선거에서 언제나 필승의 카드였다...  공화당 후로보 대통령에 당선된 1952년의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쟁을 불필요한 전쟁이자 반복된 실책으로 여겼다. 그는 교착 상태에 빠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이 전술은 효과를 거두었고, 9개월이 안 되어 불완전하나마 협정을 타결 지을 수 있었다. 그는 반공 히스테리를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시 심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는 문제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매카시즘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한국전쟁 때문이고, 한국전쟁이 끝나면 매카시즘도 곧 시들해질 것임을 알았다. 그는 평화를 위한 노력에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p177) <모던 타임스2>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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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자리도, 도시의 운명도, 주민의 안전도 수시로 위협받고 사라지며 새로운 존재들로 대체되는 것이 가나안에서의 삶이었다. 그런 까닭에 가나안에서 우기와 건기를 지배하는 신의 지위는 더욱 높아갔고 주민의 삶은 더욱더 신에 종속되는 동시에 순간의 안전과 아름다움에 매몰되었다. 순간이 지배하고, 신의 지배력이 절대화되는 땅 가나안에 아람 사람 아브람과 그 일행이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p26)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中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라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책이다. 본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정리되었으며, 여러 그림과 유물의 사진이 이 시대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다른   책의 내용으로 다소 아쉬움을 갖게 된다. 


 역사(歷史 history)란 무엇일까. 역사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대한 기록이다. 때문에, 역사의 주체는 당연히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주체, 야훼가 등장한다. 그리고, 책에 대한 아쉬운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저자들은 가나안에서 신(神)의 존재가 다른 문명보다 특별했다 느꼈을까. 그래서인지, 책에서 전체 사건은 '신과의 계약 - 파기 - 벌 - 용서'의 성서적 해석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역사적 사건은 이러한 해석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여로보암(Jeroboam, BC 998 ? ~ BC 977 ?)에 의한 남유다 - 북이스라엘의 분열계기를 설명한 대목을 살펴보자. 솔로몬(Solomon, BC 971 ? ~ BC 931 ?)의 우상숭배로 인한 파멸적 결과로 이 사건을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서적 해석을 크게 넘지 않은 것으로, 역사적 해석이라 보기 어렵다.


 '다른 신을 좇지 말라'는 야웨의 명령, 두 번에 걸친 권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왕비들과 함께 그들의 신을 좇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의 계승자, 야웨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국의 번영을 가져온 지혜의 왕이라는 자신의 본래 자기에서 떠난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야웨로부터 제국의 분열을 선언받는다.(p198)... 여로보암의 반란은 새 의복을 열두 조각으로 찢고 그 가운데 열 조각을 취하도록 한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에 용기를 얻어 일으킨 것이었다.(p199)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 中


 그렇다면, 역사적 해석이란 무엇일까. 역사를 E.H.카의 유명한 역사에 대한 정의 -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에 따라 역사적 사실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재해석하고, 과거와 현재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라 한다면, 우리는 큰 흐름 속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큰 흐름 속에서 반복, 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 해석이라면 사건에 이러한 의미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p50)


 역사의 반복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때, 과거의 인간과 사례를 불러내어 반복한다는 것. 사람은 여태껏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태에 직면할 때, 그것을 기존 지식으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하며, 그리고 실제로는 다른 일을 해버리는 것에는 어떤 불가피성이 있다. 둘째, 과거의 사태를 부정하고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복되는 것. 이 강박적 반복은 '억압된 것의 회귀'(프로이트)이다. 이것 또한 피할 수 없다.(p45) <역사와 반복> 中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 ~  1992)의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 Asimov's Guide to The Bible: The Old Testament>의 내용은 보다 역사적 해석에 가깝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 속에 내재된성(聖)과 속(俗)의 권력다툼은 중세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으로 재현되었고,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변형 반복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출처 : https://www.conformingtojesus.com/charts-maps/en/israel_and_judah_map.htm)


 솔로몬 왕국의 가장 큰 위험은 내부에 있었다.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의 적대 의식은 결코 소멸되지 않았고 단지 휴면 상태에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한 눈을 뜬 채로 말이다. 그 한 눈은 바로 예언자 집단이었다. 이스라엘의 첫 왕 사울의 시대에도 왕권과 사무엘이 지도하는 예언자들의 권력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p438)... 솔로몬의 관대한 종교정책은 예언자 집단, 특히 (유다 출신보다는) 이스라엘 출신 예언자들을 소외시켰다. 이스라엘인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을 신앙의 중심지로 삼는 것을, 따라서 이스라엘의 여러 성소들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감정은 민족주의와 뗼 수 없는 관계였다. 이스라엘의 예언자 아히야는 에브라임 사람인 여로보암을 주목했다. 여러보암은 예언자 집단과 많은 이스라엘인 불평분자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p439)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 中


 아시모프는 남북국의 분열을 '계약 위반'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성소(聖所)의 위치를 둘러싼 왕과 예언자 집단의 대립. 이것은 정치와 경제의 이권(利權) 다툼이었고, 여로보암은 '단'과 '베델'에 성소를 두면서 자신을 지지한 예언자 집단에게 보답을  하게된다. 아마도 이들 예언자 집단은 두 곳에 성소를 두면서 이스라엘의 종교행사인 파스카(peschach, 유월절) 등에 경제적 이익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예루살렘(Jerusalem) 역시 3대 종교의 성지로 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많은 돈이 이 지역에 뿌려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성소의 의미를 경제적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북쪽 경계가 상업이 발달한 페니키아(Phœnicia)임을 생각한다면, 이를 상업을 기반으로 한 북쪽 집단과 유목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집단의 패권다툼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는 역사 속에서 상업의 카르타고(Carthago)와 농업의 로마(Roma)의 포에니 전쟁으로 재현되었다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소를 둘러싼 갈등은 로마 제국의 5개 대주교(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간의 갈등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이 말한 역사의 반복을 생각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형이상학적인 이념(理念)이나 사상(思想)이 아닌 정치(政治)와 경제(經濟)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안정과 이익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역사의 해석도 여기에 맞추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만약, 여기에 절대적 존재인 신(神)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더 이상 역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간의 선(善)-악(惡)의 대립으로 모든 세계관이 정리되겠지만,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끌어내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 <고대 이스라엘 2000년의 역사>는 역사를 제목에 붙인 성경 입문서로, <아시모프의 바이블 : 오리엔트의 흙으로 빚은 구약>은 성경을 제목에 붙인 고대 근동 역사 입문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PS. 이 짧은 이야기를 하려고 너무 많이 떠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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