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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 1961 ~ )의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 : 중국 인민의 역사 1962 ~ 1976 The Cultural Revolution : A People's History 1962 ~ 1976>으로 마무리된다. 일반에게 홍위병(紅衛兵)으로 대표되는 문화 대혁명(文化大革命)의 시작은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9 ~ 1953) 사후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 1894 ~ 1971)에 의한 스탈린 비판과 이를 지켜본 마오쩌둥의 불안감에서 시작된다.

 

 마오쩌둥의 집중적인 집산화 프로그램은 1956년 거대한 역화에 직면했다.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의 마지막 날인 2월 25일,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하에서 재판도 없이 행해진 무자비한 숙청과 대규모 추방, 처형을 비판했다... 몇 개월 뒤 총리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일단의 인물들이 국영 농장을 비판한 흐루쇼프를 인용하며 집산화 속도를 견제하고 나섰다. 바야흐로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듯 보였다.(p39)  <문화대혁명> 中


 권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마오쩌둥은 자신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겼다. 특히, 그에게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라는 아픈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관심 전환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과 문화, 예술부문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p53)... 대약진 운동 이후로 힘을 얻어 온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려면 탄압만으로 부족했다. 마오 주석은 혁명의 계승자인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p79)  <문화대혁명> 中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그 구성원은 달라지겠지만 문화 대혁명이 지속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계속해서 태풍의 눈으로 남을 터였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p114)...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p115) <문화대혁명> 中


 그렇지만, 마오쩌둥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직접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대신 측근들과 인민을 이용한다. 먼저, 자신의 측근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행사하면서 공작대를 만들어 냈다. 공작대에 의해 일련의 사람들이 반동, 반프롤레타리아로 몰리게 되자, 이번에는 마오쩌둥은 반대편에 서면서 공작대 해산을 지시하게 된다. 마오쩌둥에 의해 혐의를 벗게 된 이들은 마오쩌둥의 열렬한 추종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들이 후에 홍위병의 중추가 된다. 마치 <삼국지 三國志>에서 조조(曹操, AD 155 ~ 220)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게 된 30만 청주병(靑州兵)이 하북(河北) 제패의 기반이 된 것처럼, 이들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마오쩌둥에게 큰 힘이 되었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당이 늘 하던 대로 나아가기로 했다. 요컨대 공작대를 파견해서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석의 동의가 필요했고 그래서 항저우로 날아갔다. 주석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이면서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주석은 편안히 앉아서 중국이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참이었다. (p120) <문화대혁명> 中


 당에 반대하는 중등학교나 대학교의 시위를 그대로 묵인할 경우 반혁명 세력이 미쳐 날뛰도록 방치한다고 마오쩌둥이 자신을 책망할 수 있었다. 반대로 가장 노골적인 비평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경우에도 이번에는 주석이 태도를 바꾸어서 '대중을 억압한다'라고 비난할 수 있었다.(p133) <문화대혁명> 中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공작대는 사과 성명을 내고 해산했다. 반역자로 몰렸던 학생들은 혐의를 벗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오쩌둥을 그들의 해방자로 여겼다. 1966년 7월 29일 인민대회당에서 공식 발표가 이루어졌다. 이제 그곳에는 중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참가한 1만여 명의 학생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p131)...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공작대의 손에 명예가 훼손되고 감금을 당했던 사람들은 한때의 가해자들을 향해 복수에 나섰다.(p135) <문화대혁명> 中


  복수심에 불타는 홍위병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모든 것을 인습(因習)으로 규정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화 대혁명의 수많은 파괴가 이때 발생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 이루어진 파괴였지만, 문화 혁명이 끼친 영향은 컸다. 오랜 역사 전통과 단절된 중국이 죽(竹)의 장막을 걷고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진] 문화 대혁명(출처 : 한계레)


  홍위병이 진정한 조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구(舊) 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p150) <문화대혁명> 中


 낡은 세상을 파괴하려는 폭력 사태는 이삼 주 남짓하게 지속되었지만 그 파장은 오래갔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검소한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파란색이나 회색 면으로 된 군복과 검은색 헝겊신을 주로 선택했다.(p169)... 예술과 공예, 산업 부문이 완전히 전멸했다... 문화 대혁명은 산업 분야 곳곳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장난감이나 원단, 화장품, 가정용품부터 도자기까지 모든 제품은 상표와 포장, 내용에서 봉건적인 과거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있었다.(p170) <문화대혁명> 中


 <문화대혁명>에서는 홍위병에 의한 파괴 이후에도 문화 대혁명 시기의 여러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홍위병의 세력이 위축된 이후 군대의 등장과 소련과의 국경 분쟁, 대오 정화 운동, 상산하향 운동을 통해 문화대혁명이 중국 전체로 퍼져나간 과정과 사회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외국과의 분쟁이 <문화 대혁명>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문화 대혁명>에서 저자는 문화 대혁명 전후 상황에 대해 독자에게 알려 준다. 저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등장으로 스탈린주의자였던 마오저뚱이 느꼈을 불안감과 국면 전환의 필요성, 마오저뚱의 모호한 태도, 인민들의 복수가 한데 얽혀져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문화 대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3부작의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문화 대혁명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비판적임을 책 전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민 3부작은 문화 대혁명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문화 대혁명 말기에 농촌에서 널리 퍼졌던 은밀한 관행들이 이제는 완전히 활성화되었고 농민들은 가족농으로 회귀하거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거나, 개인 소유의 상점을 운영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농촌의 탈집산화는 보다 많은 농촌 인력을 해방시켰고 향진 기업 붐을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p492) <문화대혁명> 中


 현재 중국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는 하급 이주 노동자인 농민공(農民工) 문제가 큰 사회 불안 요인 중 하나이지만, 이들 농민공의 저렴한 노동력 제공이 현대 중국 성장 밑거름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최근 중국 경제 성장 역시 문화 대혁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하고, 문화 대혁명을 절대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볼 것인가하는 의문점을 던지게 된다. (긍정적인 면도 약간 있다는 뜻이지, 문화 대혁명 전체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농민공 실직자 문제(출처 : 아시아 투데이)


 이제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을 마무리 하자. 

 

1부인 <해방의 비극 1945 ~ 1957>에서는 마오쩌둥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후 국민당 정부의 잔재를 지우기 위한 숙청이 주로 다뤄진다. 2부인 <마오의 대기근 1958 ~ 1962>에서는  빠른 시간 내 자본주의 국가를 따라잡기 위한 대약진 운동과 이의 실패가 그려지며, 마지막 3부에서는 <문화 대혁명 1962 ~ 1976>에서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어난 내전(內戰)인 문화 대혁명과 마오쩌둥의 사망을 서술한다. 


 인민 3부작의 특징은 개별 사건의 상세한 제시가 될 것이다. 비교적 최근 공개된 사례를 시기별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책이 진행되기 때문에 독자들은 보다 생생한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인민 3부작에서 다루는 사례를 대부분이 비참하다. 이 때문에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이 무엇이며, 이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절로 던지게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고 여겨진다. 


 오히려 책이 끝난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다시 되짚을 필요가 있다. 인민 3부작에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를 마지막으로 끝나지만, 이후 오늘날 미국과 G2를 이루는 강대국으로 서는 시간까지 연결고리를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책의 행간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무모한 정책 수행 과정에서 많은 희생이 발생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이들은 정치가들이다. 정작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인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현실에 담담히 대응하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오쩌둥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 속에서 우리는 묵묵하게 시대를 살아가는 인민의 모습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그다지 회한을 드러내지 않았다. 윈난 성의 성도 쿤밍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가게마다 술이 매진되었다. 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가 가장 절친한 친구를 초대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던 유일한 포도주를 개봉했다고 회상했다. 다음 날이 되자 그들은 공공 추도식에 참여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너무나 슬프게 통곡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어른들의 표정 변화에 어리둥절했다. 전날 밤 그렇게 행복해했던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p483) <문화 대혁명> 中 


 우리는 인민 3부작을 통해 1945년 ~ 1976년의 비참한 시대를 살았던 중국 민중들의 고통을 확인하게 된다. 동시에 어려웠던 이념과 배고픔의 시기를 살아낸 이들의 축적된 힘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었음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삶 또한 잘 묘사하기 때문에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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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6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8-11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읽어 봤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습니다. 이 책 빠는 수꿜이 있는거 보고 좀 읽기 싫어졌던 기억이.ㅋ 마오와 현대 중국을 알기 위해선 이 책보단 마오쩌둥 평전이 나았던 것 같네요.

겨울호랑이 2018-08-11 20:02   좋아요 2 | URL
말씀하신대로 저자가 중국공산당 통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거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는 이와 관련한 다른 관점의 책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화혁명 역시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겠지요. 다만, 누구에게 장점이었는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한 독자의 기준은 스스로 세워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NamGiKim 2018-08-11 20:06   좋아요 1 | URL
저 또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하는 쪽입니다. 네 여러 책을 보며 해석해야 한다는 호랑이님의 주장에는 동의합니다. 전 개인적으론 이 책 1권의 제목부터 좀 맘에 안들었습니다. ㅎㅎ 많은 사람들에게 읽더라도 좀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에요.ㅎ

겨울호랑이 2018-08-11 20:11   좋아요 1 | URL
인민 3부작의 전체 구성이 저자의 역사 해석과 이를 뒷받침하는 예시로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보다 실감나게 읽히긴 합니다만, 극단적인 사례를 제한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부분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징가 2018-08-27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역사가의 세계관을 반영할수밖에 없다는 E.H.Carr 의 견해를 전제로 읽는다면 별 문제없다고 봅니다 다만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도 같이 읽어본다면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겨울호랑이 2018-08-27 12:04   좋아요 0 | URL
네 민정식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일에는 빛과 어둠의 양 측면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절대적인 ‘역사적 의미‘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겠지요. 민정식님께서 추천해 주신 <중국의 붉은 별>은 제목만 들어봤고,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네요. 다만, 에드가 스노가 <아리랑>의 저자 님 웨일스의 남편이라는 사실은 겨우 알고 있었습니다. 마오쩌둥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관점은 또 다르겠지요. 말씀을 들은 김에 챙겨놓아야겠습니다. 민정식님 좋은 책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은 중국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전래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네스토리우스 파의 생성과 중앙아시아, 중국으로의 진출과 소멸등의 과정 속에서 이들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 본문의 내용을 따라 가보도록 하자.  

 

 안티오키아 태생이고, AD 427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지낸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C 말 ~ 451)가 이끄는 이단은 교회의 분열을 낳았으며,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론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두 개의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이 실재하며, 마리아에게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호칭도, '신의 어머니(Theotokos / Deipara)'란 호칭도 붙일 수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게돈 공의회(AD 451)에서는 단성설을 거부했으며, 네스토리우스의 논문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가 두 가지 본성, 즉 인성과 신성을 가진 유일한 위격 位格이라고 선언했다. 불만을 품은 네스토리우스 추종자들은 자치적인 교회를 설립했으며, 이 교회는 이슬람교가 도래하기 전까지 폭넓게 확산될 운명이었다. 즉 민족 교회가 된 페르시아, 아라비아, 시리아, 인도, 심지어는 수백년 동안 여러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살아남은 중국까지 확산되었다.(p155)' <중세 1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지도]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전파(출처 : http://rolfgross.dreamhosters.com/ManandhisGods/CHRIST/Christianity.html)

 

 동방으로의 전교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갔다. 이것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영내를 빠져나와 파르티아 왕조가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적어도 2세기 말까지는 이란을 거쳐 박트리아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부근- 지방까지 퍼지게 되었다.(p101)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AD 5세기경 칼게돈 공의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로마를 떠나 사산조 페르시아로 전파 되면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지만,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이들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박해를 당한 이들 네스토리우스 일파는 중앙아시아를 건너 중국에까지 진출하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당대(唐代)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샤푸르 2세의 치세(AD 309 ~ 379)에 기독교도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AD 312 년에 기독교로의 개종을 선언하고 이어서 AD 324년에는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제국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AD 318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처음에는 부분적이었지만, AD 339년 이후에는 전면적인 형태로 확대되었다.(p104)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연구자별로 여러 학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이 비(碑)는 네스토리우스파보다 정통 기독교에 근거한 기독교도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중국에서 기존 종교와 타협을 모색하다가 자리잡지 못하고 소멸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의 저자 김호동 교수와 일치된 견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도 소멸한 이들 네스토리우스파는 어디로 갔을까. 


[사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출처 : 위키백과)

 

 [대진경교유행중국비] 비문에 보이는 경교의 기본 교리와 전도상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당대(唐代) 경교는 신관이나 성관, 구원관 등 기본 교리에 입각해 판단하면 정통 기독교에 바탕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일파다. 2) 당대 경교는 비록 페르시아 기독교라는 징검다리를 통하여 어떤 상관성은 찾아볼 수 있으나 이단으로 모함된 네스토리우스파 그 자체이거나 또는 그 동전(東傳) 동문(同門)은 아니다.  3) 당대 경교는 시종일관 외래적 이방 요소를 탈피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타종교와 융화, 타협하고 왕치위본주의적인 전도를 표방함으로써 250여년이란 짧지 않은 생존 기간을 갖고도 토착화하지 못한 채 종당에는 중원 일원에서 멸적하고 말았다.(p97) <문명교류사 연구> 中


 비문의 서두에 천명된 경교 교리의 핵심 내용은 서방의 정통교단에서 주장하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 양성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전교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핵심적인 관념을 불교나 도교의 용어에서 차용하던 것은 불가피했을 것이다.(p127)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네스토리우스 파는 중국에서 벗어나 육로 실크로드 인근 도시를 대상으로 선교를 강화했고,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나갈 수 있었다. 이들의 주된 선교지였던 중앙아시아는 몽골도 포함되는데, 이 지역의 유력부족장 역시 네스토리우스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제왕 요한 전설의 한 갈래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교는 9세기 후반 이래로 중국 본토에서는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서 거의 소멸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실크로드 연변의 도시와 촌락들에서는 오히려 확고한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교세를 넓혀나갔고, 오대십국 시대 이래로 줄곧 이민족의 통치하에 들어간 북중국에서도 그런 대로 명맥을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교가 이처럼 중앙 아시아와 중국 서부, 북부에서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많은 수의 현지주민들을 개종시켜 신도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p170)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사제왕 요한 전설 그리고 소멸


 이슬람 세력에 의해 포위된 중세 유럽인들에게 저 멀리 어디엔가 기독교 왕국이 있다는 전설은 널리 퍼져 있었다. 사제왕 요한 전설 속의 나라는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로 생각되어지기도 했으며, 중앙아시아의 어느 왕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 중에서 중앙아시아의 사제왕 요한은 칭기스칸(Cinggis Qaγan, AD 1155 ~ 1227)과 대립했던 커레이트 족의 옹 칸으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칭기스 칸은 처음에 몽골리아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던 케레이트족의 옹 칸 - 본명은 토그릴- 휘화에 있으면서 그를 도와 여러 차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개띠 해인 AD 1202년에 전투가 벌어져 케레이트측이 패배하고 옹 칸은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케레이트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어왔고, 딸인 소르칵타니 베키 역시 기독교도였다. 따라서 옹 칸은 사제왕 요한으로 불릴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던 셈이었다.(p61)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몽골비사>에 따르면 케레이트의 옹 칸은 칭기스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때부터 깊은 동맹의 관계였으나, 몽골의 세력이 커지면서 결국 케레이트/ 나이만 부족은 몽골 부족으로 병합되고, 옹 칸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사제왕 요한의 전설은 끝나게 된다. 그렇지만, 사제왕 요한의 전설은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AD 1460 ~ 1524)의 항해 목적 중 하나가 기독교 왕국의 발견이라는 점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케레이드의 옹 칸은 선대 예수게이 칸 시절에,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예수게이 칸과 의형제를 맺었다. 의형제를 맺게 된 내력은 옹 칸이 자기 아버지 코르차코스 보이록 칸(소생)의 동생들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 구르 칸과 싸움이 일어났다. 그런데 싸움에 져서 카라온 협곡으로 숨어들었다가 겨우 100명만 데리고 빠져 나와 예수게이 칸에게 오게 되었다. 예수게이 칸은 그를 자기에게 오게 하고, 자기 군대를 출동시켜 구르 칸을 카신 쪽으로 몰아내고 그 백성을 도로 빼앗아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 그 일로 해서 두 사람은 의형제가 된 것이었다.(150) (p118) <몽골비사> 中 

 

 옹칸과 셍굼은 몸만 빼어 달아나다가 옹 칸이 목이 말라 디딕 사칼의 네쿤 오손에 들어갔다가 나이만의 전초 코리 수베치의 지역에 들게 되었다. 코리 수베치가 옹 칸을 체포했다. "나는 옹 칸이다"하고 신분을 밝혔으나 못 알아보고, 안 믿고 거기서 죽였다.(165)(p165) <몽골비사> 中


 옹 칸의 딸인 소르칵타니 벡키는 쿠빌라이 칸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래서, 원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파의 경교는 별다른 탄압을 받지 않고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AD 14세기 중반 흑사병(黑死病, Black Death)에 의해 공동체가 붕괴되며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오아시스나 초원의 교역로를 따라서 소규모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의 경우 흑사병의 엄습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이시크 쿨 호반의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비석들이 AD 1345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은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가 흑사병으로 소멸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p293)<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 中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의 문화 공헌


 이처럼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는 역사속으로 소멸되었지만, 이들이 이슬람과 중국 사회에 남긴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슬람 문명은 이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s, BC 384 ~ 322) 등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습득할 수 있었으며, 중국 문명은 이들로 인해 기독교의 요소들을 불교 안으로 받아들이면서 보다 사상적으로 심화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슬람의 현자들은 두 가지 경로로 그리스의 과학에 대한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은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 도시들에 남아 있던 그리스어 원본이었으며, 다른 방법은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이 그리스의 원본을 시리아로 번역한 2차 사료였다. 네스토리우스 교도들은 6~7세기에 페르시아 동쪽 지방에 위치한 준디스하푸르와 같은 도시에서 활동했고, 이곳은 당시 중요한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했다.(p444) <중세 1 : 야만인,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도의 시대> 中


 우리에게 이단으로 알려진 네스토리우스 파 교회의 존재는 아직 낯설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최근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이들이 일찍이 우리 문화에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 영향은 미미했겠지만. 


[사진] 불국사 돌 십자가(출처 : http://photohs.co.kr/xe/baejae/677)

 

 중국에 전파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景敎)의 이러한 융화와 타협의 일면을 이해하는 것은 인접한 한반도에 유입된 기독교의 실체를 알아내는 데 귀감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유입된 기독교가 경교라고 가정할 때, 불국사 경내에 십자가가 묻혀 있을 수도 있으며, 불교 속에 기독교적 요소가, 기독교 속에 불교적 요소가 섞여 있을 법도 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불교 속의 기독교적 요소는 어디까지나 불교 유입의 수반품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종교로서의 기독교 자체의 직접적인 유입이나 전파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초전에 불과한 것이다.(p599) <고대문명교류사> 中


 네스토리우스 파는 유럽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힌 인정받지 못한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을 통해서 동양과 서양이 교류하고 다양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사회와 역사는 이처럼 기억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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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1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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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6 14: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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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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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7 1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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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화함대가 개척한 해상실크로드(출처 :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5/23/2016052302399.html)

 

 인도양에서 홍해의 남단 병목에 있는 아덴(Aden)을 지나 홍해에 진입한 후 북상하다가 아라비아 반도 서안에서 육로로 연결된다... 이렇게 해로와 육로가 결합된 이 교역로에서 인도 상인들이 화물을 아덴까지 해로로 운송하면 거기에서 아랍인이나 그리스인들이 화물을 넘겨받아 지중해 연안 일대에 육로로 운송한다.(p148) <씰크로드 학> 中 

 

 고대 문명권들 간의 교통로인 실크로드(silk road)는 육상과 해상으로 이어져 있었다. 해상 실크로드에서 아덴은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들어가는 관문(關門)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우리는 지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덴의 역사는 동서양을 잇는 중요한 위치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라비아 반도 서남단 예멘의 국제무역항. 아라비아 반도의 서남단, 아라비아해와 홍해의 접점인 아덴만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의 화구(火口)에 지어진 항구도시로 서구 열강들이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다. 1513 ~ 1538년 및 1547 ~ 1548년에 포르투갈이 점령한 바 있으며, 이후 오스만 투르크를 거쳐 술탄 라헤지가 통치하였다.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이던 영국은 1839년 아덴을 할양받아 인도 총독부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1937년부터 독립식민지로 운영해왔다. 1967년 아덴 사태 이후 예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남예멘의 수도가 되었다가 남북 예멘이 통일되자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아덴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일찍부터 이곳은 유향(乳香), 몰약(沒藥), 계피(桂皮) 등 향신료의 집산지이자 중계 무역지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아덴의 중요성은 더욱더 부각되었다.(p481) <실크로드 사전> 中


 고대로부터 해상 무역항으로서 번성했던 아덴이었지만, 19세기에 들어 강대국간의 대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간의 대립은 역사에서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 1813 ~ 1907)으로 불리운다. 지리적으로는 서쪽으로는 크림반도로부터 동쪽으로는 조선에까지,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 ~ 1910)로 유명한 크림전쟁(Guerre de Crimee, 1853 ~ 1856)과 영국에 의한 조선의 거문도 점령(1885 ~ 1887)이 이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러시아가 동쪽으로만 확장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 남쪽으로도 내려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예카데리나 대제의 군대는 흑해 연안을 차지하고 튀르크족을 유럽에서 몰아내기 위해 오스만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수세기 동안 힌두쿠시 산맥과 페르시아 고원은 인도를 정복하려면 거쳐가는 중간 대기 구역 노릇을 해왔다. 영국의 지도자들은 이 전선을 따라 모든 지역에서 러시아의 전진을 막아야만 한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됐다. '그레이트 게임'은 북쪽의 러시아 제국과 남쪽의 대영 제국 사이 지역을 지배하고자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분쟁에 영국 소설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이 붙인 이름이다.(p378)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中



[지도] 그레이트 게임(출처 :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p251)) 中


 이러한 일련의 역사 흐름 속에서 아덴은 영국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으나, 1960년대에는 다시 소련의 영향력에 놓이는 등 예멘은 냉전(cold war) 대립의 중심에 있었던 분단(分斷)국이었다는 면에서 우리와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아덴을 점령한 영국과 오스만 투르크의 협정 속에서 예멘은 1904년 남북으로 분할되었고, 우리 역시 해방 이후 미국과 소련의 이익에 따라 남북이 분할 점령된 아픈 역사를 경험한 바 있다. 

 

 1948년에 남과 북에 두 개의 공화국이 수립되기 훨씬 전에, 한국인들은 양쪽 편으로 갈렸고 워싱턴과 모스끄바가 그런 양자택일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은 해방 후 몇개월 만에 사실상 분당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인 정당성도 없었다. 만약 어떤 동아시아 나라를 분단했어야 했다면 그것은 일본이었다. 그 대신 한국과 중국과 베트남이 모두 2차 대전의 여파로 분단되었다... 38선이 한국인들에게 유일하게 중요한 선, 필요한 모든 수단을 다해 제거해야 할 경계가 되었다. 우리가 냉전에서 연상하는 모든 정체적, 이데올로기적 분단들이야말로 한국분단의 이유였다.(p262)...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소련 군함들은 1960년대 말에 인도양에 배치되어 수단, 예멘, 소말리아에서 새로 정권을 잡은 혁명 정부들을 지원했다. 소련이 여러 해 동안 세심하게 관계를 구축해 온 세력들이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아덴, 모가디슈, 바르바라 등에 부러워할 만한 발판을 확보했다. 따라서 소련은 수에즈 운하 접근을 옥죌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정책 입안자들이 오랫동안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p727) <실크로드 세계사 : 고대 제국에서 G2 시대까지> 中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의 영향으로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소련의 2차 세계대전 후 생겨난 여러 분단국들 중 한국을 제외한 베트남(1975), 독일(1990), 예멘(1990) 모두 통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의 분단에서 오는 갈등과 석유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으로 인한 난민 발생은 예멘의 현재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2018년) 제주도에 온 500여면의 예멘 난민과 관련한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난민을 받아들여야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해야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고려요인이 있고, 사회적 합의도 이끌어야 하는 풀기 어려운 우리 사회의 과제라 여겨진다. 그렇지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대국의 이익에 의해 희생되어왔던 약소국의 아품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의 출발을 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에는 유엔난민기구(UNHCR)의 출발이대한민국의 구호와 재건을 목적으로 유엔한국재건단(UNKRA)설립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도 추가된다.


관련기사 : https://www.unhcr.or.kr/unhcr/html/001/001004001001001.html


[사진] 한국과 난민(출처 : https://www.unhcr.or.kr/unhcr/mobile/contents/activity04.jsp)


 이러한 논란의 중간과정에서 이슬람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확산된다는 점은 걱정스러운 지점이다. 이슬람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려면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기에 다음 기회로 넘기겠지만 적어도 이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는 다음의 이야기 속에서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10 : 28 ~ 37)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He replied to him, "You have answered correctly ; do this and you will live." But because he wished to justify himself, he said to Jesus, "And who is my neighbor?"... Which of these three, in your opinion, was neighbor to the robbers' victim?" He answered, "The one who treated him with mercy." Jesus said to him, "Go and do likewise."(Lk 10 : 28 ~ 37)


PS. 만약 사마리아인에게 치료 받은 청년이 후에 강도를 만난 다른 이를 못 본 척 외면한다면, 그는 다른 이들로부터 몇 배로 비난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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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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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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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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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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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2: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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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3 15: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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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15: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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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2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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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2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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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천(司馬遷, BC 145 ? ~ BC 86 ?)의 <사기 史記>는 중국 24史 정사 중 으뜸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 중 <본기 本紀>는 중국 고대부터 한 무제(漢 武帝)까지 시기 동안 제왕(帝王)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으로 역자인 김원중 교수는 <사기 본기>의 의의를 '형식'보다 '실질'을 중시한 사마천의 역사관에서 찾는다. 

 

 본기의 서술 체계를 보면, 반드시 제왕의 역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던 사람을 실권자로 보아 선정의 기준을 삼았다고 볼 수 있다... <항우 본기>를 설정하고는 오히려 서초 西楚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한나라 원년' 혹은 '한나라 2년'의 형태로 기록하였는데, 이로써 '항우 열전'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며 <항우 본기>라 한 것은 정명 定名의 원칙에 위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역사가 유지기 (劉知幾, AD 661 ~ 721)가 <사통 史通>의 곳곳에서 반고를 기리고 사마천을 깎아내리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된다.(p30) <사기본기 史記本紀> 역자 해제 中


 반면, <사통>의 저자 유지기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사기> <항우 본기>에 대해 비판한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기 본기>의 역자 는 제왕의 위치보다 권력의 실질에 초점을 맞춰 사마천의 역사관을 옹호하는 반면, <사통>의 저자는 <본기>와 <세가>의 모호한 분류 기준을 비판하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 천자를 본기로, 제후를 세가로 한 것은 참 합당한 일이다. 다만 본기/세가/표/지/열전과 같이 분류의 범주는 정해졌음에도 그 구분의 실제 내용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후대의 학자들이 그 의미를 상세히 알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p107)... 항우 項羽는 군웅의 한 사람으로 과분한 자리를 차지했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더욱이 군주였던 적도 없으므로, 옛날의 사례로 비춰본다면 제나라 무지 無知나 위나라 주우 州吁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 이름자를 피하고 왕이라 부른단 말인가?(p108) <사통 史通> 내편 中 


 <사통>의 <사기>비판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유지기는 <사기>의 사마천 기록에 간략하게 기록되거나, 생략된 내용이 많기 때문에 다른 자료를 참고하지 않는다면, 내용 평가가 어렵다고 비판한다. 


 <사기>에는 이들 역사서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일 가운데 생략되고 누락된 것이 매우 많았다. 만일 옛 기록을 가지고 현재의 기록과 비교하고...... 그러므로 태사공(사마천)도 당연히 같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마천의 기록은 매우 부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반고가 사마천에 대해 부지런했다고 칭찬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p806) <사통 史通> 외편 中 


 또한, 유지기는 <사기>의 기록에서 역사의 흐름을 '천명(天命)'에 의존한 서술 또한 비판하고 있다. 역사(歷史)가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기록한 자료라면 그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게 한정되어야 함에도, '하늘의 뜻'을 여기에 끌어들이는 것은 역사가로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유지기의 입장이다.


 (사마천은) 하늘이 바야흐로 진 秦나라에게 천하를 평정하도록 했으니, 아직 그 사업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도 위나라가 이윤 伊尹같은 인물을 얻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성패를 논할 경우에 사람들이 한 일을 중심으로 생각해야지, 굳이 천명에 미루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 이치가 어긋나게 되어 있다.(p813) <사통 史通> 외편 中 

 

 역사가인 사마천이 '천명'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사기 본기> 의 시작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사기 본기>는 <오제 본기 五帝 本紀>부터 시작된다. 신화(神話)의 시대로부터 역사가 기록된 이유를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일찍이 서쪽으로는 공동 空桐에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탁록을 지나왔으며, 동쪽으로는 바닷가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바닷가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강수와 회수 淮水를 건넌 적이 있는데, 때때로 장로 長老들이 황제, 요, 순을 칭송하는 곳에 가 보면 풍속과 교화가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달라, 이것들을 총괄해 보면 옛 글의 내용에 어긋남이 없고 사실에 가깝다.(p70) <사기본기 史記本紀> 中


 사마천은 위와 같이 사료(史料)를 확보하기 위해 곳곳을 직접 방문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신화 역시 인간의 이야기라는 사실과 역사의 흐름에는 개별적인 인과 관계 뿐 아니라 보편적인 흐름이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천명'이라 부른 것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이와 같은 점을 살펴봤을 때 <사기 본기> 역사 서술의 특징은 '실질' 권력 위주의 역사 서술과 신화의 시대를 역사의 시대로 기술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독창적인 사마천의 <사기>의 내용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과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이 기록물 자체는 한 인간이 궁형(宮刑)의 치욕을 딛고 기록을 남기고자 노력한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겨준다고 생각된다.


PS. <사기 본기> 중 <오제 본기>는 중국 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화는 과연 얼마만큼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중국신화전설> 속 고대 동방의 어느 나라와 관련된 기록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사진] 무궁화(출처 : 위키백과)

 

 동방의 군자국(君子國)은 장수국 중의 하나인데 이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수명이  매우 길었다. 그들은 가축과 들짐승을 잡아 먹었으며 그 나라에서 많이 생산되는 무궁화(木槿花)를 쪄서 일상 식품으로 먹기도 했다 무궁화는 관목(灌木)에 속하는 나무에 피는 꽃인데 붉은색과 보라색, 그리고 흰색의 여러 가지가 있었다.(p391)... 수명이 짧은 꽃(무궁화)을 먹는 그들이 장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장수는 어쩌면 꽃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군자로서의 품덕이나 자애로운 마음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인자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오래 살았다고 하니까... 군자국 사람들은 옷과 모자를 모두 격식에 맞추어 차려입었고 허리에는 보검을 찼으며 모든 사람들이 각자 호랑이 두 마리를 하인으로 부렸다.(p392) <중국신화전설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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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5-17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 두 마리가 하인이고, 무궁화를 일상적으로 먹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요즘 차로 마시는 히비스커스가 무궁화속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맛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8-05-17 22:25   좋아요 1 | URL
^^:) 무궁화 차가 있군요. 아마 호랑이를 하인으로 둔 조상님들 입맛이 요즘 우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 모두 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봅니다. 서니데이 군자님 편한 밤 되세요!^^:)

2018-05-18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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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2 09: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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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1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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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5-22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은 어떤 하인 역할을....(노...농담요;)
지금은 환생해서 연의 하인 아빠 역.

겨울호랑이 2018-05-22 22:51   좋아요 1 | URL
ㅋㅋ 세상의 모든 아빠가 딸아이의 하인이겠지요. 아내의 머슴이기도 하구요..ㅋㅋ 물론, 누군가는 마님의 마당쇠일 것 같다는 19금 상상도 해봅니다 ㅋㅋ
 

< 해방의 비극 : 중국혁명의 역사 1945 ~ 1957 The tragedy of liberation :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 ~ 1957>은 프랑크 디쾨터(Frank Dikotter, 1961 ~ )가 바라본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장졔스(蔣介石, 1887 ~ 1975)의 국민당 정부를 물리치고,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로 서기 위한 사회 변혁이 이 시기의 중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혁의 모습은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국가 Politeia>, 토머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 ~ 1535)의 <유토피아 Utopia> 속의 이상국가를 지향하고 있기에, 이번 페이퍼에서는 중국 혁명의 유토피아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산=선(善), 소비 =악(惡)

 

'진정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를 지은 자들은 귀와 손가락에 금반지를 달고, 목에 금 목걸이를 차고, 머리에 금관을 강제로 쓰고 다녀야 합니다. 그들은 사실상 금과 은, 두 귀금속을 경멸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금은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갑자기 생기더라도 누구든 단 한마디도 애석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p145)' - <유토피아 > 中 -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서 주체는 도시의 노동자, 농촌의 농민이었다. 이들 중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근검절약'이 강조되었고, 생산은 '선(善)'인 반면, 소비는 '악(惡)'이었기에, 최소한의 소비만이 인정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금.은 등의 사치품 소비가 억제되는 사회 분위기는 <유토피아>의 현실적 구현이었다.


 '사람들은 근검절약하라는 말을 들었다. 생산은 찬양되고 소비는 지탄을 받았다. 이념적 순수성은 경제적 쇠락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한때는 번잡했던 대도시들을 생기 없는 칙칙한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 혁명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쾌락을 쫓는 행위는 부르주아적 경박함의 상징이 되어 눈쌀을 찌부리게 만드는 어떤 것이 되었다.(p106)' - <해방의 비극> 中 -


2. 같은 색깔의 평등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성별이나 결혼 여부에 따라 약간만 차이가 날 뿐 똑같은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행 또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이 옷은 보기에 매우 좋고, 입은 상태에서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편리합니다. 그리고 더운 날씨에 입든 추운 날씨에 입든 똑같이 편리하며, 무엇보다도 모든 옷이 집에서 손수 만들어집니다. (p123)' - <유토피아 > 中 - 


 제국주의(帝國主義)를 나타내는 모든 것은 적으로 간주되었고,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사회는 통합(統合)되어야 했다. 언어, 언론 심지어는 의류(clothing)와 헤어스타일도 단일하게 통일되어 갔다. 이제 중국은 회색의 마오스타일의 정장으로 사회 전체가 옷을 갈아 입게 되었다. 


 '영어는 더 이상 국제 비즈니스 언어가 아니었고 제국주의의 착취를 상징할 뿐이었다. 영어로 이야기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지 않았으며(p106)... 사방이 온통 망치와 원형 낫, 붉은 별이었다. 시가 전차나 건물, 현수막, 깃발 등에도 있었고 공무원들이 차고 다니는 배지에도 예외없이 이러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언론도 거의 즉각적으로 정리되었다. 1949년 2월에 이르자 베이징에서는 당의 공식 신문을 제외한 총 20여 개의 일간지 중 오직 하나만 여전히 명맥을 유지했다.(p107)' - <해방의 비극> 中 -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도 하루아침에 바뀐 듯했다. 장신구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다른 사치품도 마찬가지였다. 립스틱과 화장품이 사라졌다. 젊은 여성들은 곱슬하게 말았던 머리를 잘랐다. 남녀를 불문하고 반지도 뺐다.... 17년 만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온 리즈쑤이는  대다수 베이징 시민들이 너무 자주 빨아서 거의 완전히 색이 바랜 파란색과 회식 면직물 옷을 입은 따분한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p108)' - <해방의 비극> 中 -


3. 토지개혁을 통해 모두가 가난해지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들에게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도시에서 파산, 선망, 탐욕, 맛과 향의 즐거움을 전부 몰아낼 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도 없애려 했다." 그는 금화와 은화를 쓰지 못하게 하고 철로 만든 주화를 사용하게 했는데, 주화의 가치가 너무 낮아 "그 돈으로 10미나를 모으려면 어느 집의 창고 하나를 다 채울 정도였다.(p162)...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 정치 체제의 문제점을 낱낱이 비판한다. 그는 감독관들이 너무 가난한 경우가 흔하여 매수되기 쉬웠다고 한다.(p160)' - <서양 철학사> 中 - 

 

 농촌에서는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의 지배권은 개인이 아닌 '당(黨)'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했다. 가정별로 할당된 목표량을 정하는 것이었으며, 소작인 입장에서는 결국 토지 주인이 '지주'에서 '당'으로 주인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이 기간중 지식인과 지주 계급에 대한 숙청은 해당 '지역 인구의 몇 %'식의 목표가 주어진 마녀재판을 통해 이루어졌다.   


 '토지 개혁이 마을 주민들 간에 갈등을 유발하고 포악한 대회를 통해 서로를 비난하게 되면서 마침내 농촌의 실질적인 재산이 세간에 공개되었다. 부자들로부터 몰수된 땅은 작게 분할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소작료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제 공산당은 정확히 얼마나 많은 땅이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각각의 좁고 기다란 형태의 땅에서 생산될 수 있는 양이 결정되었고 각 가정에 지정된 양의 곡식을 납부하도록 하였다.([p119)' - <해방의 비극> 中 -


3. 수단으로서의 문화/예술


 

'"나는 선법들은 모르네. 하지만 이런 선법은 남겨 놓게나. 즉 전투 행위나 모든 강제적인 업무에 있어서 용감한 사람의 어조와 억양을, 그리고 또 좌절하더라도, 말하자면 부상이나 죽음에 당면하게 되거나 또는 다른 어떤 불행에 떨어지더라도, 이런 모든 사태에서도 자신의 불운을 꿋꿋하게 그리고 참을성 있게 막아내는 사람의 어조와 억양을 적절하게 모방하게 될 선법을 말일세. (399 : a - b)... 자, 그러면 나머지 것들도 정화하세나. 우리의 선법에 이어지는 것은 리듬에 관한 것이겠기 때문일세. 우리는 복잡 미묘한 리듬도 온갖 종류의 운율(步格 : basis)도 추구하지 말고, 예절 바르고 용감한 삶을 나타내는 리듬이 무엇무엇인지 보도록 해야만 하네. 이를 본 다음에 그런 사람의 말(노랫말)에 시각(詩脚 :pous)과 선율(melos)이 따르도록 해야지. 말(노랫말)이 시각과 선율을 따르도록 해서는 아니 되네."(399 : e - 400 : a)' - <국가, 정체> 3권 中 - 


 문화, 예술 활동은 혁명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른바 고전(古典)이라 불리우는 음악, 책, 미술 등은 음란하거나 선정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파괴되었다. 용케 파괴에서 살아 남은 것들 중 대다수가 1966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을 통해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인민3부작 중 마지막 3권 <문화 대혁명>의 주제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북소리와 혁명가 노랫소리가 클래식 음악을 밀어냈다. 베토벤, 쇼팽, 슈베르트, 모차르트를 비롯하여 부르주아로 간주된 그 밖의 여러 작곡가들 음반이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p300)... 해방 이전의 상하이는 아시아의 음악적 수도로 여겨질 만큼 재즈 수요가 많았다.... 상하이가 함락되고 불과 몇 주 만에 나이트클럽들이 폐쇄되거나 공장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정부는 재즈를 퇴폐적이고 음란하며 부르주아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전면 금지했다.... 저우쉬안 같은 스타들의 노래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널리 방송되고 축음기에서 재생된 적도 있었지만 1949년 이후로는 음란하다는 비판을 받을 뿐이었다. 곧 사람들의 귀는 소련의 문화 사절단을 통해 도입된 새로운 음악에 적응되었다.... 부르주아의 특징적이라는 표현법이라는 이유로 용납되지 않던 독창과는 달리 합창은 안전했다. 게다가 합창은 선전을 유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p301)' - <해방의 비극> 中 -


 '공연은 또 다른 선전 수단이었다. 게다가 짧고 단순하며 매우 시사적인 까닭에 효과도 훨씬 좋았다. 인민 해방군 소속 무용단이 부른 <앙가(秧歌)>처럼 군에 소속된 배우들이 선전 활동을 도왔다. 그들은 광장이나 정원, 공원은 물론이고 그 밖의 어떤 공공 장소도 가리지 않고 보행자들이 몰려와 구경하고 박수칠 공간만 확보되면 어디에서나 대중적인 연극을 공연했다.(p304)' - <해방의 비극> 中 -


5. 대국굴기(大國崛起)의 빛과 어둠


 1950년의 한국전쟁은 중국에게도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전까지 소련 스탈린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받던 중국은 이 전쟁을 통해 미국과 비기는데 성공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전쟁에서의 성공은 스탈린 사후 마오쩌둥의 입지 강화에 도움을 주지만, 전쟁 수행을 위한 막대한 인적 손실과 식량 및 군수품 반출은 중국에게도 큰 타격을 안겨주게 되었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은 약 300만에 달하는 병력을 전선에 투입했고 그들 중 대략 40만 명이 사망했다. 끔찍한 인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은 마오쩌둥 개인의 승리였다. 당초 그는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을 강행했었다. 도박은 멋지게 성공했다. 중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멈추게 만든 것이다. 마침내 중국이 우뚝 섰다.([p218)' - <해방의 비극> 中 -


 '빈곤은 일상이 되었다. 몇몇 집안이 수대에 걸쳐 힘들게 노력해서 이룩한 상대적인 부가 하룻밤 사이에 증발했다. 자주성과 근면함, 인내심 덕분에 자주성가한 사람들이 버림을 받았다. 마을이 보유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은 조롱거리가 되었고 성공은 착취의 상징이 되었다. 대신 가난한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이 찬양되었다.(p138)' - <해방의 비극> 中 -


5. 철인(哲人) = 공산당(共産黨)에 의한 지배


 '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이 : ho philosophors)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basileus) 또는 [최고 권력자(dynastes)]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지혜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 권력(dynamis politike)]과 철학(지혜에 대한 사랑 : philophia)이 한데 합쳐지지 않는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인류에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kakon paula)은 없다네."(473 : c - d)' - <국가, 정체> 5권 中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토지개혁과 지주, 지식인 숙청 등을 통해 중국공산당은 지배권을 확장시켜 갔으며, 이 기간 터져나오는 사회 내부의 불만은 한국전쟁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강조하며 이를 억눌러왔다. 그렇지만,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는 이러한 명분도 사라지면서 중국 사회 내 긴장은 점점 고조되어 가게 되었다. 플라톤의 '철인' 지배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공산당'에 의한 지배로 구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공산당의 지배는 노예로 전락한 농민과 노동자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사회가 한층 더 엄격하게 관리되었고 이는 공산당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p169)... 한때는 우정이라 불리던 것이 사라졌다. 더 이상 손님도 찾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향적으로 변했으며 점점 더 단조로운 삶을 살았다. 외국인들의 대대적인 탈출로 중국의 고립은 더욱 심화되었다.(p171)' - <해방의 비극> 中 -


 '1956년에는 수년 전 해방에서 비롯되었던 많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어 있었다... 농민은 집산화라는 명목 아래 토지와 농기구와 가축을 잃었다... 도시의 공장과 상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정부에서 선전하듯이 노동자 계급의 영웅이 아니라 채무 노동자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유례없이 오랜 시간을 일하고 하나의 생산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강요되었으며 그럼에도 소득은 계속 줄어들었다... 모든 사람이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사회적 긴장이 정부를 향한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기 일보 직전이었다.(p419)' - <해방의 비극> 中 -


 '힘들고 더러운 온갖 식당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담당합니다.(p135)' - <유토피아 > 中 - 


6. Intro : <마오의 대기근>


 높은 사회적 불만에 직면한 마오의 선택은 '대약진 운동(大躍進運動)'이었다. 그렇지만, 1962년까지 이어진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대기근으로 참담하게 끝나게 되었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마오의 대기근>을 통해 대약진운동과 이로 인해 얻어진 참혹한 결과를 살펴본다는 예고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1845년 인구 850만명의 아일랜드에서 100만명의 아사자(餓死子)와 200만명의 이민자가 발생한 아일랜드 대기근의 비극이 이에 견줄만하다고 생각되어, 다음 페이퍼에서 같이 살펴볼 계획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통해 당시 패권국이었던 영국을 15년 안에 따라잡는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무리한 정책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4,500만명의 중국 인민들이 강제 노역, 굶주림, 폭력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었다.'


PS. 벼락치기의 끝은 거의 언제나 별로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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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1-20 1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뻘소리)
오뎅탕 대문사진 탁월한 선택이심-_-)b ... 연의 프필 사진 언제 업뎃 해주실 겁니꽈~!(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AgalmA 2018-01-20 20:06   좋아요 1 | URL
히히, 실시간 업뎃ㅋ 감사.

겨울호랑이 2018-01-20 20:08   좋아요 1 | URL
^^: AglmA님께서 말씀하시니, 서둘러.ㅋㅋ

cyrus 2018-01-20 2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은 마음과 정신이 건강해지려면 좋은 음악을 듣으라고 주장했어요. 그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이란 수학, 철학 같은 유용한 학문의 내용을 전달하는 음악입니다. 플라톤은 학문을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학문 습득을 오락하듯이 즐길 수 있는 수단으로 음악을 필요했어요. 플라톤은 시를 싫어했지만 음악은 좋아했어요. 음악의 장점을 주장한 플라톤의 생각은 특정 이념을 알리는 ‘수단으로서 예술‘의 의미와 무관합니다. ‘학습 의욕 고취‘에 중점을 둔 플라톤의 예술관과 ‘이념 고취‘에 중점을 둔 중국 공산당의 예술관을 무리하게 연결지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1-20 22:30   좋아요 0 | URL
^^: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이 우주의 질서를 수리적으로 (산술평균, 조화평균, 기하평균) 설명한 것을 보면 cyrus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플라톤은 「국가, 정체」3권과 마지막 10권에서 위의 인용에 넣은 부분에서 처럼 용감한 기상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도리아식 선율을 제외한 다른 음악을 금지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용기‘를 ‘공산주의 혁명‘사상으로 대체했을 때도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조는 보다 후대에 쓰여진 「법률 Nomoi」에서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제가 아직 읽지 못한 다른 대화편에서는 다른 내용이 나올 수 있으니 다음에 더 찾아보겠습니다. cyrus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8-01-20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새로운 연의 사진의 프로필이네요. 볼 때마다 이전 사진보다 더 많이 크고 있는 느낌입니다.^^
아이들은 정말 금방 자라고 배우는 시기 같아요.
겨울호랑이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1-20 21:56   좋아요 2 | URL
^^: 특히 아이들이 감기라든지 아프고 나면 더 빨리 크는 것 같습니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의 의미를 연의를 통해 직접 보게 되네요.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커피소년 2018-01-21 00:01   좋아요 1 | URL
아프면서 성숙해진다는 말 자체가 아프지만 공감하게 됩니다.. 어른인 저도 그랬으니까요..^^ 겨호님의 좋은 댓글에 공감하고 갑니다.. 최근 연의가 감기에 걸려서 고생했나봅니다..

겨울호랑이 2018-01-21 00:07   좋아요 2 | URL
네^^: 연의가 감기걸려 조금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뿐 아니라 아픈 아이를 보면서 부모님 마음도 느끼게 됩니다. ‘아픈 나를 지켜보시는 부모님 마음이 이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면에서 저도 조금은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2018-01-21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2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1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18-02-26 20: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방의 비극부터 시작한 중국사 3부작 짜리는 읽은만 한가요? 사실 읽어보고는 싶은데 지난번 페이스북에서 어떤수꼴이 이책을 극찬하는거 보고 약간 호감이 떨어지더라구요. 물론 마오쩌둥의 위대한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대약진 운동으로 3천만명을 아사시키고 문혁으로 수십수백만을 숙청과 죽음으로 몰아간 폭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국을 통일하는데 있어서의 공은 마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봅니다. 뭐 조만간 에드거 스노의 붉은별과 알렉산더 판초프가 쓴 마오쩌둥 평전 읽을 생각이지만 이 책의 내용이 어떤지 궁금하여 물어봤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2-26 20:58   좋아요 1 | URL
구체적인 사례와 수치 제시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내용에 대한 신빙성을 부여한다는 면은 장점이 되는 반면, 편향된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은 책의 단점이라 여겨집니다. ^^:

NamGiKim 2018-02-26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몇몇 수꼴들이 이 책을 아주 호평하길래 처음부터 의심의 눈으로 보긴 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2-26 21:11   좋아요 0 | URL
^^: 역사책이 중립적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현대 중국사의 다른 측면을 아는데 책의 의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NamGiKim님 께서 다른 책을 함께 보실 때 관점의 차이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징가 2018-05-24 0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드거 스노우 중국의 붉은별 읽고 마오에 대해 호감적이 갔었는데 중국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한국 박정희 급으로 싫어하더군요.. 제 시각이 너무 편협해 진건 아닌가 해서 함 읽어보려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5-24 08:08   좋아요 1 | URL
박정희, 나폴레옹 등 독재자들에 대한 평가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호불호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인 평가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은 그런 면에서 마오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책이라 여겨지네요. 민정식님 좋은 독서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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