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의 <자치통감> 294권을 마치며 간략하게나마 이를 정리한다. 전국시대부터 5대 10국까지의 1300여년 시기동안 역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끊임없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에는 일관되는 사람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평론가의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사가가 처한 현실이 과거와 같지 않기에 다른 인과의 끈으로 구슬을 엮고, 목걸이를 만든다는 교훈. 


 역사를 과거에 대한 현재의 재해석으로 바라보고,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유명한 E.H. 카의 저서 속에서 이미 확인한 사실이지만, 이번 <자치통감>을 읽으며 우리가 만나는 과거가 하나의 과거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독자가 살아가는 현대사가 아닌 다음에야 저자의 사관(史觀)이 과거와 현재 사이의 통역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양자는 한비자를 군자로 보고 있어서 그가 뜻을 가지고 있으면 되었지 받아들여지고 아니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마광은 한(韓)나라 사람으로 진(秦)을 위해 정책을 제시한 점을 몹시 나쁘게 보고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보았다...한비자와 몽념에 대한 평가에서 사마광은 한비자는 충성심이 없다고 비판하고, 몽념은 의롭다고 칭찬한데 대해 양자는 한비자는 능력있는 사람이고, 몽념은 능력 없는 사람이라고 평론하여 각기 보는 시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마광이 역사를 보는 시각은 도덕적 시각, 특히 유가적(儒家的)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375/957


 <자치통감>의 저술은 사마광이 역사를 좋아했다는 사실 말고도 정치적 목표와 황제를 교육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p407)...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려는 이유는 철저하게 '제왕을 위한 책'을 만들려는 것이다. 제왕은 시간이 없어 긴 책을 읽을 수가 없으니 제왕이 왕도정치(王道政治)를 하는데 필요한 부분만 선택하여 싣겠다는 것이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410/957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과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그 두 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한 그리고 아마도 얼마간 의식되지 못하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역시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며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a contin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라는 것이다.'(p50)



 여기에 더해 독자가 처한 현실 역시 유동적이기에 '역사적 현실 - 해석된 과거 - 읽는 현재'라는 3개의 역사축(軸)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또하나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자치통감> 마지막 글을 읽으며, 어제 대통령 인수위의 소상공인 손실보상 공약 파기 뉴스가 떠오른다. 이와함께, 파기된 손실보상을 조금 일찍 시작했다면, 우리는 지금의 혼란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도 함께 느낀다...


 회남에 기근이 들어서 황상이 쌀을 그들에게 대여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백성들은 가난하여 아마도 갚을 수 없을까 걱적입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백성은 나의 자식인데 어찌 아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데 아버지가 그들을 위하여 풀어주지 않겠는가? 어찌 그들에게 반드시 갚으라고 책임 지우려는데 있겠는가? _ 사마광, <자치통감 294>, 中

 관련기사 : 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040849.html


PS. 역사서를 거치지 않고 현실의 역사를 체감하는 상황이 우리가 진실을 접한다는 사실을 보장할 수 있을까. 사실의 왜곡과 편향된 사실의 조명 그리고 이를 천명(天命)으로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기제들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깝다'가 '진실과 맞닿아 있다'와는 다름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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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9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작업을 끝내신건가요^^ PS에 덧붙인 글까지 정말 공감하는 글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이전 글까지 짬짬이 읽어볼 참이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29 09:1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일단 읽긴 했는데, 읽고 나니 큰 줄기와 부족함만 남습니다... 해당 부분에 대한 기전체 역사서를 다시 들여다 보며 조금은 그 줄기에 살을 붙여볼까 싶습니다. 거리의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
 


 초평 3년(192년) 여름 4월. 청주의 황건적 100만명이 연주로 침입하여 임성국의 재상 정수 鄭遂를 죽이고 방향을 바꾸어 동평 東平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유대가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포신이 간언했다.


 "지금 적의 군사는 100만이고, 백성들은 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며, 병사들은 싸우려는 의욕이 없으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적의 군사력을 관찰하면 늙은이와 젊은이가 뒤섞여 있고, 무기와 식량 등이 구비되지 않아 완전히 약탈에만 의지하여 조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군사의 힘을 축적하여 지키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들은 싸워도 이길 수 없고 공격 또한 하지 못할 것이니, 형세는 반드시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요충지를 점거하면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유대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황건적과 싸워 결국 죽임을 당했다... 황건적을 추격하여 제북 濟北까지 쫓아가니 황건적은 항복을 요청했다.


 겨울. 조조가 항복한 30여만 명과 남녀 100여만을 받아들였으며, 그 중에서 정예들만을 거두어 '청주병 靑州兵'이라 불렀다. _  진수, <삼국지> <위서> <무제기> , p54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三國志> <위서 魏書>에서는 무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220)과 청주병(靑州兵)의 만남을 위와 같이 서술한다. 청주병을 만나기 전 이름은 높았으나, 여러 군웅(軍雄)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조조는 이후 원술(袁術, 155년 ~ 199), 도겸(陶謙, 132~194) 마침내 관도대전(官渡大戰)에서 원소(袁紹, ?~ 202)까지 격파하며 천하의 3분의 2를 얻을 수 있었다.


 조조가 청주병을 얻은 것이 그의 이후 행보에 큰 전환점이 되었듯,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이 2030여성(개혁의 딸)들의 지지를 얻은 것도 향후 그의 정치 여정에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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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진왕(秦王) 부견이 그를 예로 대하여 연인(燕人)들의 희망을 거둬들이고, 그를 가까이하여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다하게 하였으며, 그를 총애하여 연의 무리들을 기울게 하고, 그를 믿어서 연인(燕人)들의 마음을 맺도록 하였으니 아직은 허물을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왕맹이 어찌하여 모용수를 죽이는데 급급하여 마침내 시장에서 죽 파는 사람의 행동을 하여 마치 그의 총애를 질투하여 그를 참소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덕을 지닌 군자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었겠습니까?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9/92


 조금씩 읽던 사마광(司馬光, 1019 ~ 1086)의 <자치통감 資治通鑑>도 100권을 넘어섰다. 매권이 얇긴 해도 100권이면 적지 않은 분량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전체 책이 294권이니 전체 분량의 30% 정도에 불과하여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 읽고 있는 시대는 오호 십육국시기로(五胡 十六國時代, 304 ~ 439)의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7 ~ 385)의 치세로,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 ~ 384) 때 불교를 전파한 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기도 하다. 부견은 재상 왕맹(王猛, 325 ~ 375)의 보좌를 받아 전진을 강국으로 만들었는데 독자들은 후한말부터 이어지던 극심한 혼란기에 태평성세의 빛을 잠시나마 느끼게 된다. 이 시기를 읽던 중 저자 사마광의 논평에 시선을 멈추게 된다. 그의 말에 끌려서가 아니라 그의 논지에 반(反)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평이 나온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왕맹은 자신이 멸망시킨 전연의 잔당인 모용수(慕容垂, 326 ~ 396) 일족을 강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지만, 부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왕맹은 모용수의 숨겨진 실력과 야심을 알아보고 진언을 하지만, 부견은 천자란 모든 이들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를 거절한다.


 관중(關中)의 병사와 백성들은 평소 모용수 부자(父子)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모두가 그를 흠모하였다. 왕맹이 부견에게 말하였다.  "모용수 부자는 비유하자면 용과 호랑이 같은데,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 만약에 바람과 구름이 끼는 기회를 빌게 된다면 장차 다시는 제압할 수 없을 것이어서 일찍 그를 제거함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영웅을 거둬들여서 사해를 깨끗이 하고자 하는데 어찌 그를 죽인단 말이오? 또한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가 이미 정성으로 그를 받아들였으니, 필부(匹夫)라도 오히려 자기가 한 말을 버리는 것이 아닌데, 마물며 만승(萬乘)의 경우에야?" _사마광, <자치통감 102>, p30/92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왕맹의 조언이 뛰어난 모용수에 대한 질투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깎아내리면서, 부견의 행동이야말로 군주(君主)의 도(道)에 맞는다며 그를 두둔한다. 그렇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흘러갔는가? 전진(前秦)과 동진(東晉)의 전투였던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전진이 패배한 후 모용수는 자신의 일족을 거느리고 멀리 떠나 후연(後燕)을 건국하며 왕맹의 통찰이 옳았음을 입증한다. 결국, 역사는 사마광이나 부견이 강조한 인(仁)이 송양지인(宋襄之仁)임에 불과했음을 말없이 보여준다.


  모용수는 은밀히 연(燕)의 옛 신하들과 더불어 연의 복록(福祿)을 회복시키려는 모의를 하는데, 때마침 정령(丁零)족 적빈(翟斌)이 병사를 일으켜 진(秦)을 배반하여 예주목(豫州牧)인 평원공(平原公) 부휘(符暉)가 있는 낙양(落陽)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진왕(秦王) 부견이 역참을 통하여 편지를 보내 모용수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p29)... 모용수가 형양에 이르자 많은 부하들이 굳게 존호에 오를 것을 청하자 모용수는 마침내 진(晉)의 중종(中宗) 고사에 의거하여 대장군, 대도독, 연왕(燕王)이라고 칭하고 승제(承制)하여 업무를 시행하고 이를 통부(統府)라고 하였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34/103


 이해 11월 겨울, 송양공이 초성왕과 홍수에서 교전했다. 초나라 군사가 미처 강을 다 건너지 못했을 때 목이가 건의했다. "초나라는 병사가 많고 우리는 병사가 적으니 이들이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한 기회를 이용해 먼저 공격을 해야만 합니다." 송양공이 듣지 않았다... 송나라 군사가 대패했다. 송나라 백성 모두 송양공을 원망했다. 송양공이 변명했다. "군자는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그를 곤궁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 공격을 하지 않는 법이다." 목이가 말했다. "전쟁을 하면 승리를 얻는 것이 공적입니다. 어찌 실제와 동떨어진 말만 늘어놓는 것입니까? 군주의 말씀대로라면 노비가 되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낫지, 어찌 전쟁을 치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_ 사마천, <사기 세가> <송미자세가>, p234


 진(秦)의 군사가 비수(肥水)에 가까이 가서 진을 치자 진(晉)나라 군사는 건널 수가 없었다... 진(秦)의 제장들이 모두 말하였다. "우리들은 많고 저들은 적어서 그들을 막아 그들이 올라올 수 없게 하여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다만 군사를 이끌고 조금 물러나게 해서 그들에게 절반 쯤 건너게 한 다음 우리들의 철기(鐵驥)로 그들을 쫓아 죽이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1/103


 잠시 이야기가 엇나가지만, 전진의 부견을 보면서 송양공의 모습을 계속 연상하게 된다. 송양공이 자신의 신하 목이의 조언을 거절하며 분수에 넘치는 자비를 베풀다가 결국은 무너지게 되는 것이나, 부견이 왕맹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나라가 분열하게 되는 모습은 기시감(旣視感)을 안긴다. 여기에 곁들여, 두 군주 모두 강을 두고 벌일 싸움에서 패배한 점, 각각 인(仁)과 신(信)을 강조하다 실리를 놓친 점도 그러하다. 다만, 이에 대해서 사마광은 별다른 평을 하지 않는다. 사실, 송나라 시대를 살았던 사마광이 부견이 모용수를 놓아준 일이 어떤 보답으로 돌아왔는가를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런 평을 <자치통감>에 남겼을까.


 권익(權翼)이 간하였다. "모용수의 용맹과 지략이 보통사람을 능가하고 대대로 동하(東夏)의 호족으로 잠시 화를 피해 왔으나 그 마음이 어찌 관군(冠軍)의 장군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는 굶주리면 사람에 의지하지만, 매양 폭풍이 일어날 때면 항상 하늘을 능멸할 만한 뜻을 품고 있으니, 바로 의당 그를 새장에 가두어야 하는데 어찌 풀어서 멋대로 내버려두어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맡겨 두십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그러나 짐이 이미 그에게 허락하였으니 필부도 식언(食言)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만승(萬乘)인 경우에야! 만약 천명(天命)이 폐하고 흥함을 갖고 있다면 진실로 지혜와 힘으로써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폐하는 사소한 신용을 중히 여기시고 사직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이 보건대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관동의 혼란은 이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_ 사마광, <자치통감 105> , p26/103


 그것은 <자치통감>이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서를 통해 정치 라이벌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을 경계하려는 사마광의 의중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법(新法)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왕안석과 이를 막으려는(捍) 사마광.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사마광은 <대학 大學>에서 '격물(格物)'을 '막는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사마광은 왕맹의 모습 속에서 라이벌 왕안석의 모습을 발견하고 왕맹에 대한 직접 비판을 통해 왕안석을 우회하여 비판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자치통감>의 사마광 평을 보면서 <자치통감>에 자리한 역사관을 깊이 느끼게 된다...


 왕안석이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사마광이 자기의 의견을 말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신종은 사마광에게 <자치통감>의 편찬 작업을 하게 하고, 한 시대가 끝나면 바로 올리게 하고, 또 경연에서 이를 진강하게 했으며, 이를 통해 사마광은 자기의 정치철학을 신종에게 말할 수 있었다.(p89)...  사마광이 왕안석의 정책을 '장사꾼이 마지막 이익을 강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유서는 왕안석이 새로 만든 기구인 삼사조례사로 와서 근무할 것을 요구하자 돈과 곡식에 관해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양했다. 그러한 점에서 사마광과 유서의 생각이 유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눈앞의 이익보다는 도(道)를 추구하여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_ 권중달, <자치통감전> , p162/ 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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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8-03 23: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진심으로 겨울호랑이님의 읽기가 부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8-03 23:39   좋아요 5 | URL
아닙니다... 진득한 면이 부족해서 마음가는대로 읽는 제 멋대로 독서인걸요... ㅜㅜ
 

 

 이 책은 철저히 서양 중심적인 시각으로 쓰인 책이다. 오시만 제국의 몰락과정을 설명하다 보니 당연히 가장 큰 대외 요인이었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중점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자 참고한 여러 문헌들과 본문 곳곳에 인용된 당대 정치인들의 일기 및 서신들에서는 이 책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인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보니 오스만 제국의 초상은 마치 유럽 열강들의 선심 덕에 간간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환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56, 역자후가 中 


 앨런 파머(Alan Palmer)의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는 옮긴이의 말처럼 철저하게 유럽의 시각에서 바라본 제국의 몰락사다.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공식적으로 해제된 오스만 제국. 제국이 이와 같이 붕괴하게 된 원인을 저자는 성(聖)과 속(俗)의 대립으로 바라본다. 

 

 많은 도전들을 극복하며 살아남았던 오스만 제국이 종국에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술탄제와 이슬람교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한 논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스만 제국의 근저에 깔려 있던 종교적인 성격은 제국의 장점이자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 서유럽의 혁명기 동안 중앙집권정부라는 새로운 개념이 오스만 제국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 후 세속 정치가들은 종교 성직자들이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던 특권들을 점점 잠식해 갔고 징병제나 의회와 같은 서구적인 제도들이 오스만 제국에서도 실행가능한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술탄들은, 유럽과 아시아 영토 모두를 보존하고 싶어 했던 것처럼, 속세와 종교계 모두의 수장이기를 원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449


  종교계와 세속계의 대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서 16세기 대항해시대와 함께 밀려드는 신대륙에서의 은 유입이 제국의 경제구조를 흔들었고, 이미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는 제국은 붕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20세기 초반 대한제국의 강제병합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저자의 이러한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현대 학계에서 하렘 정치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역사가들일지라도 17세기 중반 제국이 쇠퇴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이 당시 적어도 여섯 가지의 만성적인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제노바와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상인들이 페루에서 가져온 싸구려 은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 결과 기초 식량가는 3배로 인상되었다. 피라미드식 구조의 티마르 조세 징수제도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으며 아나톨리아에서는 인구폭발로 인해 산적이 횡행하였고 초만원이 된 여러 도시들에서는 파괴적인 화재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 수행 방법과 정복지 통치 방식을 옛 것 그대로 고수하려는 완고함과 1536년부터 유럽 국가들과 체결하기 시작한 '특권협정 Capitulations'도 위의 현상들과 함께 당시의 문제점들로 지적된다....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제국의 이러한 징조들을 당대의 술탄의 신민들이나 외국의 관찰자들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_ 앨런 파머, <오스만 제국은 왜 몰락했는가>, p21 


 성(聖)과 속(俗)이라는 서양 중세의 정치 구도 형태를 그대로 대입해서 분석하는 관점은 이슬람 문화만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역사의 도식에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강제로 끼워 넣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은폐된 제국주의 시대의 중동을 향한 유럽 열강들의 침탈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 책은 역사의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그 뜻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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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제학부터 도시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써왔다. 나의 글은 복합적응체계(Complex Adaptive System) 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세상을 다양한 사건들이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흘러가는 곳으로 보는 입장이다. 여기서는 어떤 사건의 원인과 개별 행위자 사이의 관계가 예측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복합적응체계의 예로는 생태계, 금융시장, 경제, 영어권, 도시, 기상 시스템, 관습법 체계, 그리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힌두교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는 인도를 중심으로 인근 동남아시아사, 아라비아 해 인근, , 오세아니아 대륙과 북동아프리카 해안을 중심의 세계사를 서술한다. 저자 산지브 산얄 (Sanjeev Sanyal)은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인도양(印度洋, Indian Ocean) 문화권을 연속성 관점에서 구분하고, 주요한 기준은 힌두교의 영향과 모계사회 여부다. 이런 관점에서 인도양을 바라보기에, 자연스럽게 책의 중심은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회가 주가 된다.  


 인도양 연안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몇 가지 연속성이 발견된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이주부터 수백 년동안 구전된 전설에 이르기까지, 연속성의 사례는 다양하다... 연속성의 두 번째 주제는 모계사회다. 즉 인도양의 역사에서 모계 관습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모계(matrilineal)"는 개념적으로 "모권(matriarchal, 가모장제)'과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모권사회는 관습적으로 여성이 통치자/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회를 말한다. 이와는 달리 모계사회란, 계보가 어머니를 거쳐 여성 조상들로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p35)... 인도 서해안을 제외하면 모든 모계사회가 동남아시아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 일단 주목해보자... 왜 어떤 사회는 모계 시스템을 선택하고 다른 사회는 그렇지 않은지를 비교해보면 자못 흥미롭다. 인도 남서부 해안 지역의 사례를 보면, 이러한 관습은 아마도 원거리 해상 무역의 결과로 진화했던 것 같다._ 산지브 산얄,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 p32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상호관계를 말하지만, 저자 자신이 인도인이어서 갖는 인도 중심주의라는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책에서는 인도양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책 내용은 '인도를 갖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에 가깝다는 점에서 대국(大國)중심의 교양 역사서라 하겠다. 다만, 인도와 동남아시아사에 대한 역사책 자체가 드문 현실을 생각한다면 크게 흠이 될 정도는 아니라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인도양에서 본 세계사>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모계사회'라는 기준을 갖는 저자의 문화권 분류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탐라국(耽羅國)으로 알려져 한반도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한 것으로 알려진 제주도. 내륙 지방과는 언어, 문화 면에서 차이가 있는 제주도 지역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체는 여자라는 점에서 모계 중심의 동남아 국가들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삼국유사 三國遺事>  속의 김 수로왕(首露王, 42 ~ 199)의 이야기 속의 부인 허황옥(許黃玉, 32 ~ 189) 이야기를 통해 동남아시아 문화권과의 연계성을 찾으려 한다면 지나치게 나간 것일까.


 갑자기 완하국(玩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했는데, 달이 차자 알을 낳았다. 알이 화해서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은 탈해(脫解)였다. 그가 바닷길을 따라 (가야에) 왔는데, 키가 석자에다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그가 흔연히 대궐로 가서 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러 왔소." "그렇다면, 술법으로써 겨뤄보는 것이 좋겠소." 왕이 "좋다"고 했다... 탈해가 마침내 엎드려 항복했다.(p209)... 건무 24년 무신(48) 7월 27일 , 왕이 왕후와 더불어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蹂陁國)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인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인 올해 5월에 바다에 떠서 멀리 증조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를 좇으며, 진수로써 외람되게도 왕을 모시고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212 


 <삼국유사> 속에서는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 이야기와 함께 석탈해(昔脫解, BC 19 ~ AD 80)이야기도 나온다. 석탈해가 가야(伽倻)를 빼앗으려 했으나, 수로왕과의 술법 대결에서 패배한 후 떠나갔다는 이야기는 <삼국유사> 속의 다른 전승과도 연결된다. 비록 두 이야기가 내용 상 충돌하는 면이 있으나, 그가 왜(倭)의 동북쪽 천리되는 곳(캄차캬 반도 ?)에서 왔다는 이야기 속에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이 가야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를 고대 '초원의 길' 세력과 '바다의 길' 세력 간의 충돌로 보면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양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수수께끼인 고대사를 상상해 보는 것도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가 아닐까 한다.


 탈해잇금(脫解齒叱今)은 남해왕 때 가락국 바다 가운데 배를 타고 와서 닿았다. 그나라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함께 북 치고 시끌벅적하게 맞이해 머물게 하려 했지만 배가 나는 듯이 달려서 계름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배를 끌어내어 찾아가보았더니 어떤 배 위에 까치들이 모여 있었다. 배 안에 하나 궤가 있었는데 길이가 20자에다 너비는 13자쯤 되었다. 하늘을 향해 아뢴 뒤에 조금 있다 열어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있었고, 일곱 가지의 보물과 노비가 그 속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대접하자 그가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_ 일연, <삼국유사>, p93


 과거에 대한 상상은 이 정도로 하고,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동남아시아 역사를 마저 정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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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0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도 점점 모계사회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자 자매들 중심으로 많이 모여요.
사어머니보단 장모님을 모시고 여행 가는 가족도 많고요. 우리 시댁도 그렇답니다.

겨울호랑이 2020-09-10 13:55   좋아요 1 | URL
친가보다 외가 친척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저도 그렇습니다. 이는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자주 가다보니 더 깊은 유대감이 형성된 결과로 여겨집니다. 그런 면에서 페크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 생각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렇게 형성된 친밀감이 육아를 여성이 전담하는 사회분업의 결과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부계사회의 결과물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