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 大震) 중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 역사학계의 연구는 마무리되고, 이제는 남아있는 유적(遺蹟)마저 훼손하는 단계에 이른 듯하다.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에서는 이와 같이 사라져가는 고구려 산성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오늘 와서 보다시피 박작성(泊灼城)은 어느 날 갑자기 만리장서 동단의 기점이란 설명하에 호산장성(虎山長城)으로 화려하게 변신을 했다. 고구려 특유의 석성을 벗겨내고 그 위에 명나라의 전형인 벽돌로 쌓은 성으로 완전 탈바꿈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하북성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해왔다... 수많은 자료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2009년에 명나라 장성의 동쪽 끝단이 호산장성이라고 발표했다.(p223)... 호산장성이 들어서기 전에만 하여도 단동 관광지도를 보면 그 자리에 "고구려 성터", "고구려 옛 우물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지도에서만 없앤 것이 아니라 아예 성은 둔갑을 하였고, 우물을 메워 고구려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늘에 와서 보는 압록강변의 고구려성들은 이미 그 흔적조차 없다.(p224)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中


 이제는 다른 나라의 땅에 남아 있는 선조들의 유적들이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만, 역사자료는 건축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남아 있는 문헌은 고구려가 요동(遼東)에 위치한 나라였으며,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이들의 노력이 궁색해 보이기만 한다. 그 중에서도 최부(崔溥, 1454 ~ 1504)의 <표해록 漂海錄>에서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당신네 나라는 무슨 비결이 있어서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소?"


 "모신(謨臣)과 맹장(猛將)이 병사를 지휘하는 데 도리가 있었으며, 병졸된 자들은 모두 충성스러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고구려는 작은 나라였으나, 충분히 중국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소. 지금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고구려가 한 나라로 통일되어, 인물은 많고 국토는 광대해져 부국강병하오. 충직하고 슬기로운 인재는 수레에 싣거나 말(斗)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소."(p246) <표해록> 中


 진기 일행이 말했다. "우리 요동성 지역은 귀국과 이웃하여 의(義)가 한집안과 같습니다. 오늘 다행히 객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감히 약소한 물품로써 예를 표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대들의 땅은 고구려의 옛 도읍지다. 고구려는 지금 조선의 땅이니 땅의 연혁은 비록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그 실상은 한나라와 같소."(p351) <표해록> 中


 계면(戒勉)이라는 승려가 나에게 말했다. "소승은 본래 조선인 혈통인데 소승의 조부가 이곳으로 도망쳐 온 지 이미 3대가 되었습니다. 이 지방은 조선의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이곳에 와서 거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의 도읍으로, 중국에 빼앗겨 예속된 지 천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高麗祠)를 세워 근본으로 삼고, 제례(祭禮)를 올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근본을 잊지 않기 때문입니다."(p496) <표해록> 中


 정작 중요한 것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적 훼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저자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은 요동을 지나면서 우리의 역사 인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탄식하고 있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요동이 본시 조선의 옛 땅이고, 숙신 肅愼, 예맥 濊貊 등 동이 東彛(彛는 夷와 통해서 쓴다)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위만조선 衛滿朝鮮에 복속되었던 사실을 모르고, 오랄 烏剌, 영고탑 寧古塔, 후춘 後春 등의 땅이 본래 고구려 영토인 줄도 모른다.(p84) <열하일기 1> 中


 비록 반도 안에서 삼국을 합병했으나 그 강토와 국력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결코 미치지 못했건만, 후세의 앞뒤가 꽉 막힌 학자들은 평양의 옛 이름만 마음으로 글워하여 한갓 중국의 역사 기록에만 기대고 수나라, 당나라의 옛 자취에만 흥미를 느껴 '이곳이 패수이다, 이곳이 평양이다'라고 한다. 이미 실제 사실과 다르고 차이 나는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이곳이 안시성이 되는지 봉황성이 되는지 어찌 분변할 수 있겠는가?(p88) <열하일기 1> 中


 혼(魂)과 백(魄). 고구려의 백(魄)이 건축물, 미술품 등 유물이라면, 고구려의 혼(魂)은 문헌 속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백(魄)이 죽은 후 3년이 지나면 흩어지는 것처럼, 유물은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더라도, 문헌 속에 담긴 뜻을 새긴다면 그 혼은 우리 안에서 불멸(不滅)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는 잃어버린 땅 회복이라는 거창한 명분보다 더 절실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PS. 지금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가 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이 곳이 배출한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를 러시아 철학자로 만들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면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어하는 민족의 본성(本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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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7: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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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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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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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5: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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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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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4 16: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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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강의 1>은 역사를 중심으로 논술과 철학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책의 앞부분은 한국 현대사의 대강이 다루어지는데, 이 중에서 4.3 제주민중항쟁과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옮겨본다. 


 1. 제주  4.3


[사진] 제주 4.3 (출처 : https://www.ytn.co.kr/_ln/0103_201804031304184899)


 저자는 본문에서 제주 4.3이 일어난 배경으로 육지와 고립되었지만,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지식인들의 비중이 높았던 제주만의 특징을 언급한다. 해방 이후 여운형(呂運亨, 1886 ~ 1947)의 주도하에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곳이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던 덕분에 미군정의 지배가 직접적이질 못했고 인민위원회가 상대적으로 뿌리를 깊게 박아 1948년까지 섬을 장악하고 있었고...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해 일본 본토문명과 매우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했으며 상당한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여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했다. 일제 시대를 통하여 농민들의 자립도가 비교적 높았으며, 분화된 직업구조가 본토의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으며 적색농민조합의 조기 형성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의 성장에 이상적 환경을 제공했다.(p79)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이러한 환경에서 서북청년단이 제주도 내에 들어오면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후 초토화((焦土化; Scorched eart) 작전을 통해 제주도는 철저하게 파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제주에서의 유혈참극은 한국전쟁 종료 후인 1954년 9월까지도 계속되는데, 그 사이 기간 일어난 사건이 바로 여수,순천 사건이다.


 2. 여수, 순천 사건과 박정희


 이러한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를 뿌리뽑기 위해 전후 아시아에서 가장 잔인하고, 지속적이며, 철저한 소탕작전이 감행되었던 것이다. 그것의 직접 도화선이 된 것은 서북청년단의 학살만행이었다... 서북청년단의 이유없는 양민학살에 대항하여 제주도 인민들은 6년 6개월에 걸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p80)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제주 4.3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명령을 받은 14연대는 항명(抗命)하게 되고, 이를 통해 군대 내 남로당(南勞黨) 조직이 있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숙청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박정희(朴正熙, 1917 ~ 1979)'다. 


 여순항명사건이란 바로 제주도 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도 약 1만 명의 양민 희생자가 났고, 여수읍의 절반이 소실되었고 인근 지역의 수백 개의 마을이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p80)... 14연대의 반란은 남한의 군대 내에 엄청난 공산당 조직이 침투되었다는 사실이 청천백일 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군 내에 거대한 숙군의 회오리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p81)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3. 이어지는 폭력과 5.18 민주화 운동


 박정희 소령은 전남 광주의 여순항명토벌사령부로 갔다가,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등의 죄목으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되었다... 그의 구명 운동에 앞장 선 사람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군조직 내 좌익세포들의 상세한 명단을 제공했다. 같은 조직의 동료들의 죽음의 대가로 그는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p82)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박정희는 이 사건으로 사형에 처해질 뻔 했으나, 남로당 간부들의 명단을 제출하는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의 만주군(滿州軍) 출신 인맥이 도움이 되었던 것은 해방 이후 친일파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여겨진다.


 박정희의 생애의 최후 일단이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그 삶의 폭력성이다. 우적인 전향이 오직 이 땅의 경제도약을 위한 몸부림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면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제발전이 그의 유신치세기간의 모든 폭력성을 정당화할 길은 없다.(p93)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저자는 박정희의 비극을 그의 '폭력성'에서 찾는다. 인간 박정희의 비극은 대통령이라는 그의 위치 때문에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았다. 10.26에 의해 그가 사망한 후에 그 폭력성은 후계자 '전두환'으로 이어졌고, '광주'에서 그 폭력은 잔악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5.18 광주민주항쟁은 그 기나긴 폭력의 역사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악랄하며 가장 의도적이고 가장 조작적인 사건이었다. 그 폭력의 주체는 소위 박정희의 정군운동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신군부였으며, 신군부의 대표주자는 전두환이었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라는 역사적 개인의 모든 가치관의 역사적 화신이었던 것이다.(p94)<논술과 철학강의 1> 中


[사진] 5.18 민주화운동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22633539)


 한미연합사령관은 20사단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Your request is approved). 미국의 허락없이는 움직일수 없는 20사단을 광주코뮨분쇄작전에 사용한 것은 미국의 한국이해의 전형적 한계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그것은 해방 후 인민위원회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미군정의 행동패턴과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다.(p97)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논술과 철학강의 1>에서는 위와 같이 제주 4.3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관계를 박정희와 전두환이라는 두 인물을 통해 연결시킨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저자의 최근작인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주항쟁>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논술과 철학강의 1>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초 논술책이라는 한계로 더이상의 현대사를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책의 짧은 요약본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을 잡기에는 무리없는 내용이라 여겨져 이를 정리해서 옮겨본다. 덧붙여, 저자의 입장이 너무 편향되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는 이들에게, 같은 책에 있는 북한 비판 내용도 함께 소개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나 도올이 생각하기에, 6.25 한국전쟁이 저지른 최악의 죄악은 독립을 향한 20세기의 찬란한 거족적 항일투쟁의 모든 가치를 무화(無化)시켰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에 있다.(p58)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그토록 피눈물나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민족과 싸웠던 조선의용군과 광복군들이 관동군이 아닌, 바로 해방의 주체인 자신의 동포혈육을 찔러 죽여야만 했던 역사를 과연 어떤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김일성은 1953년 7월 28일 평양광장에서 "조선인민의 승리"를 선언했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조선인민 전체의 전면적 패배"였다.(p59)...1950년 6월 25일부터 전개된 역사에 대하여 김일성은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그는 분명 성급했다.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정확한 판단능력을 결했다.(p61) <논술과 철학강의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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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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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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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18: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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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2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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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여름에 미국측의 맥아더 장군이 그은 선을 따라 확정된 미•소의 한반도 분할은 좀더 영속적이었다. 양측은 한반도의 반쪽을 통치할 독재자를 각각 선정했다... 한반도 분할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들 간의 최후의 중대한 협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5년 만에 가장 큰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p686) 「민중의 세계사」중


제주 4.3 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엇갈린 시선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엇갈린 관점은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를 4.3의 기점으로 보는가, 아니면 1947년 3월 1일 6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3.1 사건을 기원으로 보는가로부터 시작하여 논의되어야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제주 4.3을 비롯한 한국 현대사는 단순한 국내 정치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넓은 관점에서 시간을 두고 세계사의 관점에서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 총인구 30만명 중 약 10%가 사망한 4.3사건은 그 자체로 가슴 아픈 비극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이념을 알 리 없는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약 700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가슴 아픈 4.3 71주년을 맞아 제주 4.3 평화기념관 자료 사진을 올려봅니다.

제주도가 아픈 과거의 상처를 딛고 평화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제주 4.3을 기억한 하루를 이렇게 흘려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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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04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석범작가님의 <화산도>를 언젠가는 완독해야지 하면서 감히 엄두를 못내고 있는데 또 이렇게 4.3.이 지나가버렸네요.
희생자들의 한을 풀어드리위해서라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겨울호랑이 2019-04-04 11:31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아직 4.3에 대해 많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높아진 일반의 인식 속에서 바르게 자리잡을 날이 오리라 기대해 봅니다...

2019-04-05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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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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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5 14: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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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도 역시 해석이라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때 중요한 것과 우연한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중요성에 관한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며, 그 기준은 또한 그의 객관성의 기준이기도 하다 : 따라서 역사가도 당면한 목적과의 연관 속에서만 그 기준을 찾아낼 수 있다.(p182) <역사란 무엇인가> 中


 E.H.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 ~ 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에서 역사(歷史 history)란 단순한 과거 사실의 나열이 아닌, 역사가의 해석에 의해 재구성되었음을 강조했다. 카 이후 역사가들의 주관적 해석이 역사적 사실 못지 않게 중요함을 인정받았지만, 역사가들 사이의 서로 다른 역사 해석이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부작용이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2019년 초 다시 사회 이슈가 되고 있는 '5.18 민주화 운동'과 비극적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역사책들을 통해 역사가의 해석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광주, 5월 18일 ~ 5월 26일 : 누가 먼저 폭력을 불렀는가?

 

커밍스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 이하 한국현대사 - >에서는 시위대의 계엄 철폐 요구에 대해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로 대응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바라본다. 이에 반해, 이영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전에 광주 지역에 유언비어가 퍼졌고, 시위대의 폭력시위로 인해 공수부대의 실탄 사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한다. 정리하면, 커밍스는 공수부대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석하는 반면, 이영훈은 시위대의 폭력이 먼저 였음을 강조한다. 수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은 변함없지만, 역사가들의 해석에 따라 이들은 때론 피해자가, 때론 가해자가 되버리는 것이다.


 5월 18일 광주 거리에 약 500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계엄령 철폐를 요구했다. 약물을 복용했다고 여겨지는 정예 공수부대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학생, 여성, 어린이 가릴 것 없이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p54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5월 18일 광주 시내에는 악성의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광주 시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19일, 분노한 학생과 시민의 시위대는 공수부대에 화염병, 돌, 보도블럭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 저지선으로 굴러 보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장갑차를 탈취하려 했으며, 그에 맞서 공수부대 장교가 위협사격을 하였다.(p398)... 전남도청, 조선대, 전남대를 제외한 광주시 일원이 군경의 통제를 벗어나 시위대에 점거되었으며,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소총이 시위대에 탈취되었다. 공수부대는 시위의 진압을 포기하고 전남도청과 조선대로 집결하여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경찰관과 부대원의 사망에 자극을 받은 공수부대의 장교들은 실탄 지급을 요청하여 분배 받았다.(p399) <대한민국 역사> 中


2. 5.18 민주화 운동에서의 미국 역할


 5.18 민주화 운동에 있어 논란이 많은 부분은 미국의 개입 여부다. 이에 대해 커밍스는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미국 장성이 사령관으로 있는 한미연합사에 있는 만큼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미국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반면, 이영훈은 <대한민국역사>에서 해당 부대의 작전권은 한국군에 있었다는 미국정부의 성명서를 이례적으로 상세히 소개하며, 미군은 관련 없음을 강조한다. 역사적 사건은 하나이지만,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독자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의도와는 관련없이.


 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미국대사관에 개입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위컴 장군에게는 5월 22일 한국군 20사단을 DMZ의 임무에서 면제하도록 허용하는 일이 맡겨졌을 뿐이다...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었고 전선부대 이탈을 허용함으로써 카터의 인권정책은 난자당한 꼴이었다.(p54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는 광주에서 사태가 전개된 당시부터 미국의 책임론이 제기되었다... 그에 대해 1989년 6월 미국정부는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에서 미국정부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한미연합사령부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한미연합군 사령부 설치를 위한 1978년의 협정은 미국과 대한민국은 상대방의 동의 없이 언제든지 자국의 부대에 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을 보장하였다는 사실, 그에 따라 한국군은 이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발포된 계엄 업무의 수행을 위해 20사단의 작전통제권을 회수한 적이 있다는 사실, 이후 동 사단의 3개 연대 중 1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령부에 반납되었지만 나머지 2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은 반납되지 않았다는 사실, 1980년 5월 20일 한국군은 20사단 1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을 다시 회수하였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미국 책임론을 부정하였다. 이처럼 광주 유혈참극에 대한 미국 책임론은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지만...(p402) <대한민국 역사> 中


 위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위를 논하기에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으므로, 사실에 대한 판단은 넘기도록 하자.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이처럼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함에도 불구하고 역사가에 따라 전혀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E.H카는 그것은 역사가의 해석에 따라 인과(因果) 관계, 상관(相關) 관계 설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역사가가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여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에서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사실이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 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p156) <역사란 무엇인가> 中


 많은 역사적 사실 속에서 중요한 사건을 골라내어, 이들을 대상으로 의미(意味)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가의 역할이라고 하지만, 역사가가 자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서 결과적으로 왜곡한다면 유지기(劉知幾·661∼721)로부터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여 문서를 농락하고 비행이나 과오를 미화하는 일도 있었으니, 왕은 王隱과 우예 虞預는 헐뜯고 서로 모욕했으며 배자야 裵子野와 심약 沈約은 분란을 매듭짓고 사과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판단으로만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다른 이의 화복을 자신의 붓끝으로 좌우했으니 이야말로 편찬자의 추악한 행태이며 사람이라면 함께 미워해야 할 짓이라고 하겠다.(p429)... 무릇 역사서의 곡필과 무함이 한두 가지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죄를 논하자면 잘못이 이미 크다고 할 수 있다.(p434) <사통> 中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역사가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가를 한국 현대사를 통해 깊이 느끼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PS. 다소 관련성은 떨어지나, 개인적으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인물은 로메로 대주교다. 산살바도르 대주교로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 반대파의 피습으로 세상을 떠난 로메로 대주교의 삶과 군부통치 하의 산살바도르의 배경이 80년대 한국사회를 떠올리게 해서일까.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살바도르>와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다룬 <로메로>는 로메로 대주교의 총격 장면에서 사건이 교차하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모습과 함께 우리의 가슴아픈 현대사도 함께 바라보게 된다...

 

 농지개혁과 더불어 자행된 테러의 가장 두드러진 희생자는 산살바도르의 대주교인 오스카르 아르눌포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였다. 수년간에 걸쳐 군부와 치안부대의 인권유린을 공격한 오스카르 로메로는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1980년 2월 2일의 설교에서 그는 "모든 평화적 수단이 고갈되었을 때, 교회는 봉기를 도덕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여긴다"고 선언했다. 3월 23일 토지개혁에 따른 탄압에 대응하여, 그는 병사들에게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산살바도르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군 장교로 추정되는 사람의 총격으로 사망했다.(p411) <라틴아메리카의 역사(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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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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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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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4: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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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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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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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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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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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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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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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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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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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7 2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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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0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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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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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9 15: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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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는 명이 조선 왕을 책봉하고 조선은 명에 조공하는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빈번한 사신 왕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태조대에는 대명 관계의 갈등 양상에 따라 사신 파견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p42)...  원래 조공이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주변 국가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면(진헌 進獻), 중국 황제가 그에 대한 답례로써 물품을 내려 주는 (회사 回賜) 경제 행위가 핵심이었다. 진헌과 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조공 무역은 근대적인 국제 무역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국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물자의 교역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공무역이었다.(p43)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15세기 : 조선의 때이른 절정>에서는 1392년 건국된 조선 朝鮮이 세종(世宗, 1397 ~ 1450)대에 국가의 틀을 빠르게 잡아가는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15세기에 이루어진 조선의 변화는 크게 '소중화 小中華'라는 주제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조선은 15세기에 국가 기틀을 잡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왕조정통성 王朝正統性 확보 필요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이러한 과제를 '소중화'를 통해 빠르게 풀어갈 수 있었다. 


 조선은 왕조정통성 확보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부터 정리해 나간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왕 王의 지위를 국내외적으로 결정하면서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 事大'로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과연 교린 交隣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15세기>는 의문을 제시한다. 


 흔히 조선 시대의 대외 정책을 '사대교린 事大交隣'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대'의 대상은 중국이고, '교린'의 대상은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나 부족들이다. 즉 여진, 일본, 유구 琉球 등이다. 그런데, '교린'이라는 말에는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과연 조선이 여진, 일본, 유구 등을 대등하게 인식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p44)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이의 근거로 당대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들고 있다. 고지도는 지도의 정확성보다 당시를 살아가던 이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통해 '소중화'에 대한 조선인의 생각을 찾을 수 있다.


 고지도 古地圖는 역사 지도와는 달리 현재의 지식을 과거 어떤 특정 시점의 영사막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제작될 당시의 시점에서 투사된 지도이고 그 당시 지식의 총제가 특정 공간을 지도상에 재현한 도표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념 사진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동일한 공간을 그려나가면서 공간에 대한 보다 개선된 도형을 보여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p13) <서양고지도와 한국> 中


[사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출처 : 위키백과)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한가운데 중국이 있고 그 오른쪽에 실제보다 크게 확대된 조선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아래쪽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축소된 일본이 그려져 있다. 실제보다 확대된 조선과 축소된 일본의 모습은 이 지도를 제작한 조선인의 일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즉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조선과 대등한 관계로 인정하기보다는 조선 아래에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p44)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로 대표되는 조선인의 인식을 <15세기>에서는 민족적 자존의식이라고 정리한다. 비록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소중화로서 문화국임을 자부했던 조선 선비들의 인식이 <15세기>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천문학, 예악, 문자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어져 조선은 1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15세기>는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자부심의 표현으로부터만 나온 것일까. <한국수학사>는 <15세기>보다 한층 깊이 들어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한국수학사>의 다른 관점은 천문, 예악, 문자의 관점에서 <15세기>와 비교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세조 때 양성지 梁誠之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조선이 명과 대소에 따른 국력의 차이가 있고 따라서 사대를 한다는 현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조선도 기자 箕子 이후 문물이 발달해 '군자지국', '예의지방', '소중화'라 불리며, 중국과 비교해 전혀 열등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동 大東 으로서 단군이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 堯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고, 기자조선- 신라 - 고려를 거치면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역사를 전개해온 사실을 강조했다. 조선 부분을 확대, 과장해 그려냈던 이면에는 이러한 문화적 자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p58)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1. 천문 天文


 <15세기>에서는 조선이 천명 天命을 받았음을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을 통해 보여준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의 <천상열차분야지도> 탁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1395년 천문도 제작은 이러한 조선 왕조 적통성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천문을 읽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제왕학이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지 불과 3년 만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한 까닭이 분명해진다. 조선 왕조가 천명을 받았으며, 요/순 임금처럼 모범적인 성군의 정치를 펼칠 것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p136)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한국수학사> 역시 천문학의 목적성에 주목하고 있다. 간의, 옥류 등 천체기구를 보관하던 건물(흠경각)의 건설은 실생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은 예악과 문자의 의의에서도 이어지게 된다.

 

 흠경각(欽敬閣)은 단시일에 집중적인 노력에 의해 발휘된 한국인의 창조력에 관한예증일 뿐이다. 이 업적은 전통적인 유교 문화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누각제도 역시 일반 대중에게 시각을 알린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고, 왕실의 정통성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멀리 바다 밖으로 떨어져 있으나, 모든 문물은 오로지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다만 천문 관측의 의기만 갖추어져 있지 않다. (<세종실록>, 세종 19년 4월 15일) (p245) <한국수학사> 中

 

 2 예악 禮樂


 조선 시대 예악 또한 실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질서와 조화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왕조 차원의 정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당시 <악학궤범>의 편찬과 악기 정비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고자 예악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서 예 禮와 악 樂이란 추상적 구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질서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예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형정 形政의 근본을 이루며 왕도의 필수 요건이다.(p151)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세종은 예술에서도 주체성을 강조했지만, 유교 국가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조선의 왕으로서 가장 주력한 음악은 역시 아악이었다. 그래서 거문고, 비파, 대금, 생황 등의 아악기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악기를 만드는 것보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이 먼저였다. (p256) <한국수학사> 中 


3. 문자 文字


 세종 당시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 불리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에 대해 <15세기>에서는 말과 글이 다른 필요에 의해 훈민정음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수학사>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한자를 가지고 한국어를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표기법 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차자 표기법이 발전해 사용되기는 했지만,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은 한자,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보통 백성과 여성에게 많은 불편을 불러왔다.(p165)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한국수학사>에서 훈민정음의 창제가 주체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한국수학사>에서는 훈민정음에 담긴 사상이 중국 고전 사상인 음양오행이 담겨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결국 소중화로서 정통성을 표현하고 했다는 한계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세종의 왕립 아카데미인 집혀전이 이룩한 최대 업적은 바로 한글 창제이다. 체계적인 문자를 발명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바로 독립국가로서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다... 여기에서도 주체의식과 관련해서 정통성을 지향하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민족의 주체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창조하려고 했던 것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옛 중국의 고전 사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기초 작업에 직접 동원된 학문과 사상은 중국의 음운학과 주자학(朱子學)이다... 성음학이건 송학이건 그 근본 사상은 모두 음양오행설이다. <훈민정음>에도 이 전통적 이데올리기가 반영되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오직 음양과 오행뿐이다. 곤괘와 복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고요한 후에 음양이 된다. 무릇 생명을 지닌 무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자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나. 그러니 사람의 목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에 따른다.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p264) <한국수학사> 中 


 이렇게 본다면, 결국 조선 시대 초기 의 과학, 문화 혁명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적하에서 이루어진 관제官製 혁명이라는 한계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조선 초기 과학 문화 혁명에 대한 <한국수학사>의 평가는 <15세기>에 비해 냉정하다.


 과학이 가설이라고 한다면 세종 시대의 과학을 지배한 가설은 중국의 옛 자연철학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과학 정신은 한반도의 독자적인 합리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적인 주체성은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이는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이 당시 과학 문화의 핵심적인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 의식이 각 구성원의 자율적인 과학 정신에 있지 않았고, 이 집단 또한 세종의 개성이 반영되어 재구성된 소재, 또는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된 도구의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다.(p269) <한국수학사> 中  


 이에 대비되는 변화가 서양에서 있었음을 <15세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15세기 한국사를 세계사와 비교해서 서술하는 것이 <15세기> 민음 한국사의 장점 중 하나라 여겨진다. 여기에 소개된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 1468)의 금속활자로 인해 <성경 The Holy Bible>이 보급되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宗敎改革'이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과 비교해 본다면, 조선시대 과학기술 발전의 한계점을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145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유럽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한 대량 인쇄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문화사의 돌이킬 수 없는 이정표였다. 구텐베르크는 포도즙을 짜내는 압착기에서 착안해 양면 인쇄 등 기존 목판인쇄기보다 월등한 활판인쇄기를 발명했다. 이로써 이전에는 손으로 베끼는 데 4~5개월이 걸리던 200쪽의 책을 하루면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 복제의 속도를 120 ~150배나 증대시킨 셈이다.(p19)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2018년 5월 미국 빌보드(Billboard) 차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BTS(방탄소년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앨범 발표 직후 에서 높은 인기를 끄는 방탄소년단과 K-POP을 통해 15세기 조선의 과학 문화 혁명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이들이 K-POP의 한계점 중 하나로 연예 기획사 시스템을 들고 있다. 연습생 중에서 소수의 엘리트를 데뷔시키는 연습생 제도는 K-POP의 장점이자 한계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 기획사가 끌어가는 K-POP의 모습은 15세기 조선 초기 지도층이 끌어간 과학, 문화 발전의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그렇지만, K-POP과 조선 전기 과학이 큰 차이는 일반 대중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라 여겨진다. 역사적 사실은 '최초'가 중요할 지는 모르지만, 역사적 의의는 '삶의 변화'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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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03 2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5세기 조선 지식인 그리고 사림들에게는
자주적 의식이 결여되었던 걸까요?

소중화주의에 천착해서 오로지 대국을 향
한 해바라기만 하다가 결국 명나라가 망해
가는 판에, 병자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
가적 망신을 당했으니까요.

하긴 숭정 몇백년이라는 연호를 채 버리지
못한 소중화 완완세인들의 시대착오적 유
산은 그 유구한 전통을 묵묵하게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그들이 신봉하던 중화가 아
메리카나로 바뀌었을 뿐.

겨울호랑이 2018-06-03 21:30   좋아요 2 | URL
15세기 조선이 등장했을 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권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외부와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중화 사상과 사대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네요. 국가의 하부까지 개혁할 수 없었던 조선 문화의 한계는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되네요...

2018-06-03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3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6-03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탄소년단이 등장할 줄이야ㅎㄱㅎ! 겨울호랑이님 소재 연결 파도타기 늘 재밌어요^^!

겨울호랑이 2018-06-03 22:40   좋아요 1 | URL
^^:) 제가 소재를 좀 막 던지는 편이지요... 일단 먹물을 화선지에 흩뿌리고 점을 연결해서 선을 만들고 글자라 우기는 느낌이랄까요 ㅋㅋ

AgalmA 2018-06-03 23:01   좋아요 1 | URL
소재 즉흥성이 우리 친구할 만합니다ㅎㅎ;;
아빠 겨울호랑이 & 아기 흰 호랑이, 뒤에는 엄마 호랑이 감시입니까ㅋ
겨울호랑이님 프사 구경 놓칠까봐 자주 와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18-06-03 22:48   좋아요 2 | URL
오늘 이천 아울렛에 갔었는데 도자기로 만든 호랑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ㅋㅋ 역시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제일 친근하게 느껴져요^^:)!

AgalmA 2018-06-03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다만 떨다 갈 순 없고.... 글에 대한 소감도 남겨야지;
이 글의 관점이 참 좋습니다. 최초가 아니라 문화 파급력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지적이^^👍

겨울호랑이 2018-06-03 22:58   좋아요 1 | URL
ㅋㅋ 새삼스럽게 AgalmA님의 독후감을 접하니 어색하지만... 저 역시 격을 갖춰서.. AgalmA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8-06-04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4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