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활동 정지, 언론/출판/보도/방송의 사전검열, 대학에 대한 휴교조치, '북괴'와 동일한 주장이나 용어사용 및 선동행위 금지 등을주요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 10호를 발포한 신군부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던 김대중, 김종필 등을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했다. 많은 재야인사들을 체포했으며, 신현확(申鉉碻) 내각을 사퇴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했다. 한편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반대하는 학생시위가 일어났고, 진압을 위해 파견된 계엄군이 이를 과잉진압하여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가담하고,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이 형성되어 약 10일간 광주시 전체가 무정부상태로 되었다가 계엄군이 다시 투입되어 무력으로 시민군을 섬멸한(5.27)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났다.(p310) <고쳐 쓴 한국 현대사> 中


 내일이면 신군부 쿠데타 및 계엄령 확대에 항의하며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문제들처럼 아직 진상규명이 되지 않은 사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간략하게 나마 5.18 민주화운동 중 가장 희생이 컸던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내용을 <고쳐 쓴 한국 현대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쿠데타를 완수하고자 했다. 계엄령 확대를 선포하고 대학을 폐교하고 입법부를 해산하고 모든 종류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5월 17 ~ 18일 야밤에 수천 명의 정치지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자신이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이런 비상조치와 함께 전두환은 광주항쟁을 터뜨렸다.(p54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12.12 군사반란 이후 계엄령 확대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자 신군부는 대응 수위를 높이면서 계엄령을 확대해간다. 이와 함께 신군부는 시위의 강경진압을 위해 공수부대의 훈련(충정훈련)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5월 18일 16:00를 기해 광주에 진입하면서 유혈참극은 시작되었다.


 5월 18일 광주 거리에 약 500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계엄령 철폐를 요구했다. 약물을 복용했다고 여겨지는 정예 공수부대가 이 도시에 도착하여 학생, 여성, 어린이 가릴 것 없이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지 무차별하게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 여학생은 시청광장 근처에서 공수대원의 총검에 가슴이 찔린 채 군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몇몇 학생들은 화염방사기로 얼굴이 지워져 버렸다. 5월 21일에 이르러서는 광주지역의 수십만의 시민들이 군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냈고 그후 5일간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원회가 이 도시를 통제했다.(p540)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5월 21일 전남도청 집단 발포 이후 시민군들은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시작했고, 일부는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량을 탈취하고 광주시를 장악했다. 이들 광주 시민에 의한 자치는 5월 27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이전까지 유지되었지만,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하면서, 광주민주항쟁은 처참하게 끝나게 되었다. 


 헬리콥터의 확성시에서 광주시민들에게 5월 27일 새벽에 20사단이 광주시로 진입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경고 방송이 있었다. 새벽 3시 군인들은 사격을 하며 진격하여, 인근지역의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를 내려놓기를 거부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살해했다. 하지만 이 부대들은 군율을 지켰고 신속하게 도시를 장악했다.(p54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5.18 민주항쟁은 40년이 지났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진행형이다. 대표적인 논란이 지만원 등이 주장하는 '북한군 개입설'인데, 이러한 근거 없는 주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시민군들이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행동을 위법행위이며 폭동으로 인식하는 인식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국가 내에서 '합법적으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인 군대(軍隊)가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행위이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불법행위에 대한 저항을 우리는 폭동이라고 봐야할 것인가.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어떠한 권리자든 다음과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그들이 권리를 주장해야 할지, 적대자에게 저항해야 할지, 혹은 투쟁해야 할지, 그렇지 않으면 싸움을 피하기 위하여 권리를 포기해야 할지의 문제다. 여하튼 누구도 이와 같은 결심을 그로부터 빼앗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 결심이 어떻게 내려지든 두 가지 경우 모두 희생이 따른다. 한 경우는 권리가 평화에, 다른 경우는 평화가 권리에 희생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볼 때 문제는 사람이 처해 있는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어느 것이 더 참을만한 희생인가 하는 것으로 집중된다.(p28) <권리를 위한 투쟁> 中


 루돌프 폰 예링 (Rudolf von Jhering, 1818 ~ 1892)는 <권리를 위한 투쟁 Der Kampf ums Recht>에서 권리를 침해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제시한다. 그의 주장을 요약한다면, '불법에 대한 저항은 권리자의 의무'이다.  이를 민주화 운동에 적용해 본다면, 국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저항은 주권자의 의무가 될 것이다. 평화주의자인 예닝은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법에 의한 투쟁인 소송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바로 눈 앞에서 착검을 하고 조준사격을 하는 상대를 두고 법적인 투쟁을 말하는 것은 한가로운 이야기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광주시민들의 자치 기간 동안 큰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은 이들의 투쟁이 단순한 폭동이 아님을 반증하기에 충분하다 여겨진다.


 내면의 소리는 그에게 속삭인다. "너는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치 없는 투쟁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명예, 법감정이며 자기존중이기 때문이다."고.(p31)...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인격 자체에 도전하는 비열한 불법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실행방법에서의 권리의 경시는 물론, 인격모독의 성격을 띰으로써 권리를 침해하는 불법에 대한 저항은 의무다. 그와 같은 저항은 권리자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다. 그 저항은 도덕적인 자기보존의 명령이며 사회에 대한 의무다. 왜냐하면 법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p32) <권리를 위한 투쟁> 中


 그렇지만, 아직도 5.18 민주화운동에는 밝혀져야 할 진실들이 너무도 많다.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부터 헬기 기총소사 문제, 미군과의 관련성 문제, 숨겨진 사망자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남아있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5.18 민주화운동은 진행형임을 다시금 느낀다...


  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은 미국대사관에 개입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위컴장군에게는 5월 22일 한국군 20사단을 DMZ의 임무에서 면제하도록 허용하는 일이 맡겨졌을 뿐이다. 미국이 전두환의 부대를 거부하거나 광주시민의 편을 든다면 그것은 19140년대 이후 유례가 없는 내정간섭이었을 것이므로 광주시민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것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은 면할 수 없었고 전선부대 이탈을 허용함으로써 카터의 인권정책은 난자질당한 꼴이었다.(p54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中


 PS. 1979년 10.26사건과 12.12 군사반란 그리고 1980년 5.18 민주화운동까지 약 7개월의 역사 속에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1848년 2월 혁명과 루이 보나파르트(Charles Louis Napoleon Bonaparte, 1808 ~ 1873)의 쿠데타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의 파리 코뮌(La Commune de Paris, 1871)을 떠올리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 ~ 1883)의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프랑스에서의 내전>을 통해 다른 기회에 정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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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5-17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지네요! 즐건 휴일 저녁시간 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0-05-17 20:3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께서도 일요일 저녁 잘 마무리 하시고, 행복한 한 주 시작하세요!^^:)

2020-05-18 2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18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기 빨갱이 중대장이 있다˝하는 누군가의 말에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버렸고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남편이 빨갱이가 되어버려 우리집의 젊은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신하여야 했다... 4.3 이 지난 후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산으로 피신했다 해서 산사람이 되어야 했고 마을에 남았다 해서 군인이나 경찰 가족들처럼 죽임을 당해야 했다. 4.3 이후 죽는 것은 마을 사람들뿐이었다.(p293) 「해방전후사의 인식4」중

제주 4.3 사건을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무장세력 350여명이 제주도 경찰 지서를 습격하면서 발생한 이 사건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4.3 사건 이전의 태평양전쟁 시기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치로부터 시작해서, 해방 직후 많은 재일 동포의 귀환, 인민위원회조직, 1946년 제주도(섬)의 도(행정구역)승격, 1947년 3.1운동, 1948년 남한 단독선거 반대까지의 사건과 함께, 4.3 이후에는 1948년 11월 계엄령 선포 및 초토화 작전 이후 대대적인 진압작전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의 개방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사건을 알아야 하고, 이와 더불어 4.3사건과 밀접한 관련있는 1948년 여순 사건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상처가 압축되어 있기에 해방 전후사의 제주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일부 미국 소식통들은 이 투쟁에서 15,000 ~20,000 명의 섬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대한민국 통신사는 27,719명이라는 공식적인 숫자를 인용했다. 북한측의 수치는 3만명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지사는 비공식적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6만 명이 사망했으며, 4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일본으로 달아났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 39,285채의 가옥이 파괴되었으나 지사는 ˝중산간지대의 가옥들 대다수˝가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다. 400개의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 바꿔 말하자면 섬사람들은 대여섯 명 중 한명 꼴로 죽었고, 절반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었다.(p311)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중

아직 4.3사건에 대한 연구가 채 끝나지 않았기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4.3의 역사적 평가를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지만, 1950년대 인구 30여만명의 섬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미 지금도 상당히 늦은 일이리라. 4.3사건의 모든 피해자들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하며, 2016년 8월 제주 4.3 평화공원 사진을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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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4-03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올 선생님의 책으로4•3항쟁을 읽고 있습니다! 가보지 못 한 평화공원을 보니 의미가 더 깊어지는것 같아 좋습니다!
건강한 하루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4-03 12:45   좋아요 1 | URL
막시무스님 독서에 작은 도움이 되어 기쁩니다. 화창한 날, 즐거운 독서 되세요! 감사합니다^^:)

302moon 2020-04-03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과 평화공원 사진을 보며 여러 감정이 생겨납니다.
고맙고, 죄송하고.

겨울호랑이 2020-04-03 12:50   좋아요 1 | URL
302moon님 말씀처럼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제주의 역사를 알고 나니, 저 역시 제주를 아름다운 섬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섬 곳곳의 숨겨진 아름다운 장소가 예전에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죽어갔음을 생각한다면, 관광의 섬 제주 이전에 제주의 아픔에 공감하는 우리가 먼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단발머리 2020-04-0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담지못할 고통과 아픔이겠지요. 더 늦기 전에 진상이 밝혀져서 제주 시민들의 억울함이 천에 하나라도 풀어지기 바랄 뿐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3 13:09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너무도 많아, 단발머리님 말씀처럼 수사로는 부족함이 큽니다. 하루 빨리 모든 현대사의 은폐된 진실들이 다 밝혀져야 겠지요... 4.3의 진상을 알기위해서는 4.16이전에 4.15로 밝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jelee87 2020-04-04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잘 읽엇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4-04 06:41   좋아요 0 | URL
jelee87님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4-0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화랑세기 花郞世記> 필사본이 1989년 세상에 모습을 보인 이래 책의 진위(眞僞) 논란은 진행형이다. <화랑세기 : 신라인의 신라이야기>는 필사본을 진본으로 보는 이종욱 교수가 편역한 책으로 저자는 <화랑세기> 필사본의 의의를 신라사의 생생한 복원이라는 점에서 찾는다.

 

 신라 시대에도 근친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골품제가 엄격하게 지켜진 신라의 최고 귀족들 사이에 근친혼은 신분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정치적/사회적 이유에 의한 근친혼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화랑세기>는 오히려 신라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책이  틀림없다.(p347) <화랑세기><부록1. 화랑세기의 신빙성에 대하여> 中


  <화랑세기> 안의 복잡한 혈연 관계는 소위 오늘날 막장 드라마의 관계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예를 들면 김춘추(金春秋, 604 ~ 661)와 김유신(金庾信, 595 ~ 673)의 동생 문희(文姬)가 결혼해서 낳은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은 다시 김유신의 둘째 부인이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여기 더해 미실(美室, 540 ~ 612 ?)을 중심으로 한 복잡한 가계도는 독자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에 대해 저자는 <화랑세기> 안에 나타난 근친혼(近親婚)을 도덕적 관점이 아닌 정치적 행위로 바라볼 것을 요청한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 중 마복자(磨腹子, 하위 계급의 임신한 여성이 상위계급의 남성과 성관계를 하여 태어난 아이)나 진골 정통(眞骨正統)/ 대원 신통(大元神統)과 같이 이해가 안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들이 있다고 해 이 책을 위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은 여성들로 이어져 있으며, 남자도 한 대에 한해서는 그의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계통을 인통(姻統)이라고 하고 있다. 원래 두 계통은 왕을 비롯해 왕실의 남자들에게 왕비를 비롯한 여자를 공급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두 계통에 따른 정치 세력도 형성되고 나아가 화랑들의 파맥(派脈)도 형성됐다.(p346) <화랑세기><부록1. 화랑세기의 신빙성에 대하여> 中


 마복자 풍습의 경우에는 지금의 도덕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화랑세기> 필사본 부정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화랑의 간부층인 낭도들은 풍월주의 마복자들로 구성되고, 이들이 화랑을 따르는 무리(출처: 위키백과)였다는 사실이 문헌 부정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생각된다. 일례로, 고대 그리스에는 성인 어른과 소년 애인 150쌍 300명으로  구성된  테바이 신성대(Hieros Lokhos)를 살펴보자. 동성애인 앞에서 용맹하게 싸우리라는 믿음으로 구성된 이러한 군대 편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실재했던 부대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마복자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화랑세기>안에 담긴 화랑의 정치적인 모습 또한 우리에게 알려진 화랑의 이미지와 맞지 않다는 점도 문헌 부정의 근거가 된다. 여기에서 잠시 <삼국사기 三國史記>의 화랑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진흥왕(進興王) 37년 봄에 비로소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지어 노닐도록 해서 그 행동거지를 살핀 다음에 천거해 쓰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어여쁜 여자 두 사람을 뽑으니 한 사람은 남모(南毛)요,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이었다.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는데 두 여자가 미모를 다투어 서로 질투하더니,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그녀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 이에 준정은 죽음을 당하였고, 그 무리들도 화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 다시 미모의 남자를 골라 단장하고 꾸며서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되었다.(p128)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 제4> 中


 <삼국사기>는 화랑이 원화에서 유래했고, 원화를 대신한 화랑이 국가 인재의 등용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대로 화랑의 무리가 심신 수련 단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화랑세기> 안의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 사이의 다툼을 통해 남모 - 준정의 다툼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인간이 정치적인 동물임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다툼이 화랑을 중심으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화랑세기>안에 담긴 화랑들과 미실을 비롯한 왕궁사람들은 너무도 인간적이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때문에, <화랑세기> 앞에서 관념적으로 생각했던 고대인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풍습은 낯설지만, 권력과 사랑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낯설지 않다. 


 또한, <화랑세기>는 우리에게 신라사회의 장점과 한계를 함께 알려준다. 혈연(血緣)으로 맺어진 지배계층이었기에 이들은 7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단결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테베의 신성대가 스파르타를 꺾고 그리스 패권을 차지했듯. 그렇지만, 고구려, 백제 영토 통합이후에는 이들의 폐쇄성이 독(毒)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넓어진 영토를 가슴으로 담을 수 없었기 때문에, 2세기가 흐른 후 다시 후삼국이 분할하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고대사회의 폐쇄성이 신라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폐쇄성이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폐쇄성과 관련해서 잠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포용정책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 로마인의 '포용'정책이 로마가 제국으로 이어진 계기가 되었음을 밝히고, 이는 <로마인 이야기>를 관통하는 거대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몸젠(Christian Matthias Theodor Mommsen, 1817 ~ 1903)에 따르면 로마사회는 그렇게 포용적이지도 개방적인 사회도 아니었다.

 

  공화정 시대의 인상적인 평등과 관련해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 평등이 상당 부분 형식적이었다는 점과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귀족 계층이 생겨났다는,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p92)... 정부는 여전히 귀족 통치를 유지했는바, 가난한 소농들도 부유한 완전 토지 소유자들과 외형적 차별 없이 대등하게 민회에 참여했지만, 귀족 통치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함으로써 가난한 사람은 도시의 시장은 커녕 촌의 면장도 되기 어려웠다.(p93) <몸젠의 로마사2> 中


  비시민에게는 로마 시민권 가입이 거의 완전히 막혀 버렸다. 복속된 공동체들이 로마 공동체에 편입되는 옛 절차는, 로마 시민권의 과도한 확대로 인하여 로마 시민권이 너무나 분산되지 않도록, 기원전 350년경에 소멸했고, 때문에 불완전 시민공동체가 설치되었다.(p177)... 귀족들이 평민을 상대로 귀족제의 폐쇄성으로 들어가듯, 시민은 비시민을 상대로 그렇게 했다. 제도의 관대함으로 크게 성장한 평민이 이제 귀족의 경직된 규율로 스스로를 구속하게 된 것이다.(p179) <몸젠의 로마사4> 中


 끊임없이 수혈되는 새로운 피가 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시오노 나나미는 높이 평가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로마제국의 융성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고, 고대 사회에서(사실은 오늘날까지도) 폐쇄성은 일반적인 현상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다시 <화랑세기>로 돌아오자. 여기에는 생생한 당대인의 모습과 함께 고대 사회의 폐쇄성이 담겨있다. 책에 묘사된 당대인의 모습은 책의 진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겠지만, 폐쇄 사회의 한계는 진위여부를 떠나 분명하게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에 남아있는 골품(骨品)제의 변형틀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필사본 <화랑세기>는 단순한 고문헌 이상의 의미를 갖는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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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채호를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믿는다. 코페르니쿠스가 남달랐던 것은 관점의 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관점의 전환 외에 다른 것들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 나머지는 케플러와 갈릴레오와 뉴턴이 채워넣을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진정으로 위대했다.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자그만치 1500년 동안 신의 법칙으로 통용되던 도그마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채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소한 중국 당나라 시대 이후 1000년 동안 동북아시아 주류 사학계 철칙으로 통용되던 사관을 한순간에 뒤집었다.(p10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김상태의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은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중심으로 강단사학, 진보사학, 재야사학계가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비판한 책이다. 글에 담긴 진보적인 저자의 입장과는 달리 고조선사에서는 진보사학자들 또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대신 저자는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 - 윤내현(尹乃鉉, 1939 ~ )이 강조한 고조선론을 재조명한다. 코페르니쿠스 - 갈릴레오로 비유될 수 있는 이들 책에서는 강단 사학계의 '소(小)고조선론'과 재야사학계의 <환단고기 桓檀古記>로 대표되는 '대동이 大東夷'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저자는 대고조선론을 고대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소고조선론과 대동이론의 문제점과 위험성은 무엇일까.


 "서기전 3세기 전후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공 이후 고조선은 무조건 평양 지역에 있었다."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 평양 지역에서 망했으며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특히 낙랑군은 서기 후 300년까지 남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를 400년간 지배했다. 이것이야말로 주류 고대사학계와 그들의 소고조선론이 지키고자 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다.(p16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소고선론을 요약하자면, '소고선론-평양중심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무엇일까. 저자는 일본의 식민사관을 비판없이 수용한 남한의 고대사 연구 행태를 비판하는데, 이는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학계가 스스로 입증한 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병도의 '소고선론-평양중심설'은 해방 이후 40년이 넘도록 주류 고대사학계의 확고부동한 통설이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고조선 이론을 받아들인 이병도의 학설을 모시는 것 말고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가 해방 이후 40년이 지난 1980년대 말까지 고조선 연구에 관련해서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헌 연구든 고고학 연구든 마찬가지다.(p181)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중국 역사속에  등장한 '동이'의 개념 사용에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환단고기>, <이하동서설> 등의 책은  '동이- 화하(華夏)'의 패권다툼관점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문제점은 무엇일까. 몽골족, 만주족, 일본 민족 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내용까지 포함하는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위험을 담고있다.


 동이족 東夷族은 중국 문헌에 여러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국수주의 환빠들의 개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동이족 = 중국과 만주의 전대륙에서 활동했던 민족 = 우리 한민족'이란 등식 아래서 "중국 대륙도 본래는 동이족이 장악했던 대륙이자 사실상 우리 한민족의 땅"이라는 공식을 굳혀버린 것이다. 엄격한 역사적 논증 없이 남용된 이런 식의 판타지는 문제가 크다.(p241)... 이형구는 이 상 商(은 殷)나라가 동이족의 일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이족 또한 누가 뭐래도 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형구를 따르는 한 여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상(은)나라와 같은 동이족이라는 우리 민족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는 거 아닌가?(p24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이에 대해 윤내현은 민족의 정의를 혈연이 아닌 문화(文化)를 통해 내림으로써 이들의 주장에 선을 긋는다.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 1823 ~ 1892)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une nation? >의 민족 정의와 통하는 바가 있는 윤내현의 개념 정의는 맹목적 민족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차단시킨다.


 윤내현은 종족이나 혈연적 동일성을 민족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민족이란 우연과 필연의 역사과정 속에서 언어, 문화, 경제 등의 종합이 긴 시간동안 누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내현은 아직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동이족 개념을 중시하지 않는다.(p242)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입니다. 한쪽은 과거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풍요로운 추억을 가진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거싱며, 다른 한쪽은 현재의 묵시적인 동의, 함께 살려는 욕구, 각자가 받은 유산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입니다.(p80)...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p83)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이런 점에서 저자는 윤내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때마침, <고조선 연구(상)> <고조선 연구(하)>는 다 읽었고, 다른 2권의 책도 최근 갖추었으니 윤내현 교수의 3부작을 이제는 읽고 정리할 일이 남았다... 여기에 더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의 <조선사연구>를 읽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올해안에 재독할 수 있을까...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필연성을 거대하고 완변한 한문체계로 완성했다. 불세출의 거인 신채호의 수원 水原으로부터 시작하여 폭포처럼 격렬한 리지린의 계곡을 지나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평온하고도 광할한 호수를 이루었다. 이것은 그의 대표 3부작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 연구> <한국열국사연구>로 귀결된다.(p334)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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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10월과 11월 사이에 할머니 산소가 있는 전라도 강진을 갑니다. 하루동안의 짧은 일정이지만, 산소에 들르고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강진과 해남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돌아본지도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동안 다산 유배지, 김영랑 생가, 백운동 별서정원 등을 들렀고 이번에는 병영(兵營) 성터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병영성터는 황금색 벌판과 어울어져 마치 황금성처럼 보였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도 병영이 위치한 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군사요새임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병영과 관련한 내용을 해설 <대동여지도 大東輿地圖>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병영(兵營) 조선의 전라도 육군 전체를 호령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원래 광주(光州)에 있었는데, 1417년(태종 17년) 도강고현(道康古縣)으로 옮겨온 것이다. 전라도는 물론 제주의 군대를 총괄하는 본부였기에 소속 군인들과 몰려든 상인들로 제법 큰 고을을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델란드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일행이 곳에 8년 동안 억류되기도 하였다.(p247) <해설 대동여지도> 中


 전라도 육군을 총괄하는 군사기지인만큼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성 가까이 다가가 보겠습니다.



 원래 성터만 남은 곳이었으나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제법 모습을 갖춘 읍성(邑城)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서산의 해미읍성(海美邑城)을 연상케 하는 성의 외관입니다. 복원된 성에는 성곽 일부분을 외부로 돌출시켜 적을 제압하는 옹성(甕城)도,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방어하는 해자(垓字)도 갖추어져 있어 작지만, 완벽한 요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읍성(邑城)은 고려 말에 홍건적(紅巾賊)과 왜구(倭寇)가 들끓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관아가 있어 나라를 다스리던 지역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계승된 것이다. 세종, 성종 때에 많은 읍성들을 축조하였는데, 기존의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95개소,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04개소의 읍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읍성의 모양은 방형과 원형이 많은데, 이는 산 위에 건축되기보다 평지나 구릉지에 축성되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부정형의 읍성도 있다. 성내에는 관아, 객사, 향청, 훈련원, 중영, 군기고 등을 두어 나랏일을 보고 평시나 비상시 성을 방비한다. 현재 전국에는 동래읍성 등 109개소의 읍성이 남아 있다.(p229) <한국건축사> 中


 역사 속에서 병영은 하멜(Hendrik Hamel, 1630 ~ 1692)과 그 일행이 머물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서 하멜과 일행은 1656년부터 1663년 대기근이 일어나 남원, 순천, 좌수영(여수)로 분산되기까지 약 7년간 머무르게 됩니다.


 1656년 3월 어느날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에는 태창(泰倉 큰 창고) 혹은 전라 병영(兵營)이라 불리는, 성채가 있는 어떤 큰 고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관찰사 다음으로 권위가 있는 전라도 군사령관인 절도사 節度使의 관저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제주로부터 9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고 해안과 가까운 곳이었다.(p55) <하멜표류기> 中


 <하멜 표류기> <조선왕국기>로 처음으로 서양에 조선을 소개한 하멜이기에, 그가 한동안 병영에 머물렀다는 사실때문에, 병영성 근처에는 하멜 박물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영과 조선에서의 기억은 하멜에게 그리 좋은 기억만은 아닌 듯 합니다.


 신임 좌수사가 7월에 부임해 왔는데 그도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많은 일을 시키려 했다. 우리들 각각에게 매일 일백 패덤(fathom 약180m)이나 되는 새끼를 꼬라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전임자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만약 우리가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다른 종류의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했다. 만약 그가 우리에게 일을 시키면 후임자들도 계속 똑같이 할 것이며, 일단 그런 관행이 이루어지면 쉽사리 바꾸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노예가 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배를 구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모색했다. 이 심술궂은 사람들 밑에서 매일 슬픔에 젖어 노예 상태로 사느니보다 차라리 한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p68) <하멜표류기> 中


 그렇다면, 조선에게 하멜은 좋은 방문자였을까 생각해보면 이 역시도 아닌듯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의 하멜은 밀린 급여를 받기 위해 일지를 썼으며, 조선의 풍습, 지리 등을 기록하는 것이 제국주의(帝國主義) 국가들의 초기 탐색 과정임을 생각한다면 조선에게도 하멜은 그리 달가운 손님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원전인 <하멜일지>는 헨드릭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생활 후 탈출해 네덜란드로 돌아간 다음에 쓴 기록이며 보고서였다. 그리고 이 보고서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함이었다.(서문)... 조선을 서해안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는 동해안과 남해안에는 만의 안쪽과 입구에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절벽과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조선의 수로 水路 안내인은 우리에게 서해안이 가장 접근하기 좋다고 말했다.(p141)<조선에 관한 기술> 中


 하멜과 조선과의 관계는 하멜의 말처럼 포로 - 간수의 관계 이상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원수일지도 모를 이들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필요에 의해 친한 관계로 포장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 병영성을 떠나왔습니다... 



 러나 우린 이교도의 국가에 잡혀 있는 불쌍한 포로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이 우리를 살려 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이 모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p66) <하멜표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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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6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정민 선생님과 함께 한 강진 답사
에서 하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네요.

하멜 표류기가 사실은 하멜이 소속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인가에서 보험금
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라는 이야
기도 어렴풋이나마 기억이 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06 09:27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하멜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정되어 의도치 않게 조선을 소개한 역사적인 책이 되버린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