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구체화되어 있는 모든 장소들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적 성격과 아울러 역사 및 족보 편찬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주요한 측면들이 '유산(heritage)' 이라는 기호(記號) 아래 재편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런 기억이 펼쳐지는 바로 그 시대에 그것 자체가 스스로 시대를 초월한 하나의 의례처럼 표현되는 것에 관심을 쏟으며, 시간적으로 유한한 자신의 흔적을 초시간성 또는 초자연성의 낙인으로써 확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는 아직 민족은 없지만 민족적 신성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은 이후에 나타난 민족적 기억의 온갖 형태들에 그러한 성격을 물려줄 것이며, 또 그런 신성성이 그 기억에 영속적인 정당성을 부여한다. 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2 : 민족>, p494


 <기억의 장소 Les Lieux de Memoire>는 민족적 기억(memoire nationale)과 사람들의 행동이 상호작용을 통해 특별한 표상과 뚜렷한 상징물로 남은 물질적, 비물질적 장소를 통해 프랑스 역사를 삶 속에서 발견하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억들이 현재적인 것이라면,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며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는데, <기억의 장소>에서는 장소 속에서 이들을 펼쳐낸다. 특히, <기억의 장소 1 : 공화국>에서 '전사자 기념비'는 이런 역사의 흔적이 잘 남겨진 기억의 장소로, 우리는 애국심의 전형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역사의 자취가 남겨진 장소에서 찾는 현재의 의미 또는 기억. 때로는 역사와 기억의 가치가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경우에는 충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기억의 장소>는 장소를 통해 역사와 기억의 대화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자신의 의무를 다했던 시민들을 기념하는 것은 각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공민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수행했던 사람들은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되고, 역으로 국가(la cite)를 위해 죽은 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민적 의무의 위대함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이 일은 곧 공민으로 개조하고 교육시키는 일이었다.(p226)... 교육하지 않고 기념하지 않는 공화국은 죽은 공화국, 다시 말해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더 이상 죽으려고 하지 않는 공화국이다._ 피에르 노라 외, <기억의 장소 1 : 공화국>, p227


 <기억의 장소>의 주저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 1931 ~ )는 기억은 곧 삶이고 언제나 살아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 끝없이 진화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시대의 조상묘(祖上墓) 재발견 역시 집단 기억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기억의 장소>의 기억 집단은 국가, 민족인데 반해 <조상의 눈 아래에서>는 가문(家門), 문중(門中) 이라는 정도일까.


 기억의 문화는 조상숭배의 본질적 요소였다. 추모적인 실천행위로서, 조상숭배는 주요 선조의 무덤이나 가모에서 공동의 출계에 대한 기억을 의식화했다. 직계의 재구성을 위한 문서적 증거가 없었을 때, 조상의 묘는 유력한 기억 환기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런 통찰이 주요 조상의 무덤을 찾으려는 노력의 동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옛 무덤들은 관리가 되지 않았을 경우 서서히 사라졌기 때문에, 자손들은 "산양과 소가 짓밟고 다니는" 곳이 선조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58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1935 ~ ) 교수는 <조상의 눈 아래에서>를 통해 15세기까지 조선 사회에서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조상묘가 친족 이데올로기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16세기부터 '조상 장지'를 찾아내고 보호하는  일이 중요해졌음을 지적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성묘가 과거 기억의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정해진 족보상의 관계에 따라 남계친을 가묘 앞에 모이게 하는 당내와 대조적으로, 문중은 명백하게 '결사체적 associational'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특정 조상의 모든 남계 후손을 포함했고 그들에게 동등한 혜택을 주었다. 공동자산의 혜택은 적어도 처음에는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걸출한 선조의 무덤에서 개혁된 의례를 과시적으로 봉행하는 것이나 대종을 확실하게 지원하는 것은 단지 극진한 효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상의 위세를 이용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전자가 직계라는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수직적인 친족관계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평등한 형제관계라는 토착적 전통을 떠올리는 친족의 수평적 측면을 만족시켰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56


 이러한 기억이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역사적 과정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1597)과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 ~ 1598),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으로 인해 흔들리는 사회질서에 대한 반발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나, 여기에 더해 문중의 이익이라는 경제적 문제도 관여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확인하게 된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유교 본연의 정신을 강조하고 흔들리는 사회질서를 바로 잡고자한 조선 후기 지배층의 노력 뒤에는 결국 그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한 숨은 의도가 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가문의 '직계'는 강조된 반면, 이들을 제외한 이들 - 여성, 서출 등 - 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고, 기억이 만들어 낸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평소 여러 곳에서 각자의 삶은 살던 후손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데 모이고 화합을 다지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이라면, 이러한 명절의 후유증을 겪는 이들도 있다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계로 연결된 친척들이 결국 특정 장소 한 곳에 집중적으로 매장됨에 따라, 묘지는 점차 비남계친에게는 폐쇄되었다... 남계친과 비남계친의 무덤들이 종종 섞여 있었다는 사실은 이따금 후손들 사이의 장기적인 토지 분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중요한 묘지의 발견을 지연시켰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61


 주요 조상의 장지를 보호하려면 당연히 새로운 부계 친족모델에 일치하도록 묘지를 정비해야 했다. 비남계 후손과 서출은 명시적으로 배제되었다. 정리된 묘역의 조성은 분명히 '직계'의 의미를 후손의 마음에 심어주는 추가적인 수단이었다. _ 마르티나 도이힐러, <조상의 눈 아래에서>, p363


 민족의 명절인 추석을 맞이해 성묘를 다녀왔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선조들을 생각하고, 이들의 후손들이 한데 모여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것. 이것은 분명 역사를 기억하는 작은 노력이라 여겨진다. 동시에, 시대에 따라 이제는 지키기 어려운 전통들(가문에 따라 다르겠지만)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함께 고민하고 고쳐나가야하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전통으로 내려져 온 것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심한 갈등과 본목을 가져다 준다면, 이제는 그것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전통(傳統)이란 존재한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기에.


 전통을 발명해낸다는 것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가정하듯이 과거에 준거함을 특징으로 하면서 다만 반복되는 것만으로도 공식화되고 의례화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_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p25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CH, 1917 ~ 2012)이 <만들어진 전통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말한 바처럼 오늘날 우리가 전통으로 알고 있는 것들도 끊임없이 재해석된 최근의 결과물임을 생각해본다면, 맹목적인 전통 유지가 아닌 전통 인식에 대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절을 맞아 누군가에게는 '우울한 연휴'가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조상님들이 원하시는 바는 아닐것이다. 기억은 곧 삶이고 언제나 살아있는 집단에 의해 생겨나 끝없이 진화해 가는 것이라면, 명절에 대한 인식도 꾸준히 바뀌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분명, 과거 명절보다는 나아졌지만, 명절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들(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p19)... '만들어진 전통'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통상 공인된 규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의례나 상징적 성격을 갖는 일련의 관행들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것들은 특정한 가치와 행위 규준을 반복적으로 주입함으로써 자동적으로 과거와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기실 그런 관행들은 가능하다면 언제나 역사적으로 기념하기에 알맞은 과거와의 연속성을 확립하려고 든다. _ 에릭 홉스봄, <만들어진 전통>,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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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03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제로 우리의 경우에도 전통이라는 것 중 그 기원이 오래지 않은 것들이 많지요. 장자우선의 제사 문화라는것이 자리잡는 것도 따지고보면 16세기밖에 안되면서 5천년 전통인것처럼 과시되는데 그건 그 과시를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이 권력을 잡았었기 때문이고요. 근데 이런 얘기 백날 알고 말해봤자 저의 신세는 8대 장손집 며느리입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0-10-03 08:03   좋아요 0 | URL
일단 주류로 받아들여진 전통과 도덕 등이 새롭게 바뀌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그 시간은 사람들의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시간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 다수가 바뀌는 시간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2020-10-13 0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3 0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madhi(眞我) 2020-10-13 10:44   좋아요 1 | URL
생활을 바꿔야하는데 그게 늘 어렵네요. 머리야 뭐 우리남편 말대로 ‘개념없어 보이는‘ 모양이었으니 전혀 신경쓰지 않아요.

겨울호랑이 2020-10-13 15:30   좋아요 0 | URL
^^:) 좋은 일을 하셔서 작은 일은 samadhi 님 눈에 안 들어오는 듯 합니다.

samadhi(眞我) 2020-10-13 18:09   좋아요 1 | URL
그런 건 아니고요.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안써서 그래요. 신경 좀 써야 할 때도요^^ 굳이 자랑처럼 알린 것은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라서예요.
 

 

 왕(유리 이사금)이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 10시경[乙夜]에 그치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이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모두 행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會蘇) 회소(會蘇) "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_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1>, 유리이사금, p99


九年春 ...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 績麻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小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 起舞歎曰 "會蘇 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한가위(秋夕)의 역사는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 ? ~ 57)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6부(部)를 제정한 후 무리를 나누어 길쌈을 하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사례를 했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당시 진 편에서 부른 노래가 아름다워 <회소곡 會蘇曲>이라 불렸던 것을 보면, 한가위의 가배는 승패를 떠나 아름다움으로 하나가 되었던 축제라 생각됩니다. 반면, 후대의 진흥왕(眞興王, 526 ~ 576)의 원화(源花)제도는 비극으로 끝난 경쟁이었습니다. 이들은 경쟁이라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갖지만, 후자는 인재 등용이라는 목적으로 인해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예전 같지 않은 분위기의 명절입니다. 그렇지만, 한가위를 눈 앞에 두고 명절에는 힘든 세상일을 잠시나마 내려놓는 것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이웃분들께서도 마음만은 풍성한 한가위 명절 보내시길 바랍니다...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진흥왕)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은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_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4>, 진흥왕, p151 


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 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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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0-09-29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연휴 되십시오^^

겨울호랑이 2020-09-29 21:06   좋아요 0 | URL
추풍오장원님께서도 행복한 연휴 되세요! ㅎ

bookholic 2020-09-30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도 여유롭고 즐거운 한가위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20-09-30 22:4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bookholic님께서도 풍성하고 행복한 추석 연휴 되세요! ^^:)
 

 아! 슬프다. 동아시아 한반도의 4천 3백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이 경술년(1910) 8월 29일 마지막을 고한다니, 하늘이시여. 사람들이여! 이날 이완용 등은 나라를 일본에게 양여한다는 조칙을 속여 만들어 황후의 숙부 윤덕영(尹德榮)에게 주어 옥새를 찍게 하였으니, 황제는 흐느끼면서 승낙하지 아니하였고, 황후 또한 통곡을 그치지 아니했다... 가련하도다, 제실(帝室)이여. 밖으로는 강국에 제압을 당하고, 안으로는 적신(賊臣)의 핍박을 받았으며, 또 골육에게 압박을 받았으니, 운명의 쇠퇴함이여. 어찌 이런 극한에 이르게 되었는가. _ 박은식, <한국통사>, p283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합병(合倂)되었다.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의 <한국통사 韓國痛史>에서는 데라우치가 이완용과 송병준의 권력다툼을 이용하여 국권을 팔아넘기도록 술수를 부렸고, 송병준이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것을 두려워한 이완용에 의해 조약이 서둘러 만들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윤덕영이 옥새를 가져다가 날인하면서 마침내 대한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정 교(鄭喬 , 1856 ~ 1925)의 <대한계년사 大韓季年史>는 이 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때 이완용(李完用)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와 함께 합방조약(合邦條約)을 정했다. 그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황제 페하 및 일본국의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수하게 친밀한 관계를 돌아보아, 서로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이 낫다고 확신한다. 이에 두 나라 사이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도록 결정하니 이에 한국의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摠理大臣) 이완용을, 일본국의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저마다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이어서 위의 전권위원은 한데 모여 협의하여 아래의 여러 조항을 협의하여 결정한다. 

 

 제1조, 한국의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국의 황제 폐하에게 넘겨줌.

 제2조, 일본국의 황폐 폐하는 앞 조의 실린 넘겨줌을 수락하고 또 완전힌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함<그 아래에 또 여섯 조항이 있는데, 이제 생략한다>.


 융희(隆熙) 4년(1910)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그 아래 관인(官印)을 찍었다>.

 메이지(明治) 43년(1910)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 <그 역시 아래 역시 관인을 찍었다.>


 오후 6시쯤, 이완용과 윤덕영이 두 조칙<곧 8월 22일과 29일의 조칙이다>을 내어와 옥새를 찍으라고 황제를 몰아세웠다. 황제는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김윤식이 홀로 말했다. "우리 한국은 폐하 한 분의 한국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을 가벼이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이완용과 윤덕영은 일본의 지휘를 받아, 곧바로 김윤식과 여러 사람들을 쫓아냈다. 마침내 옥새를 가져다 그 문서에 찍었다<그때 일본인들은 옥새를 가지고 통감부로 갔다.>_정교, <대한계년사 9>, p229


 이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본인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한국인으로 죽기를 원했는데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 ~ 1910) 역시 이때 아편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 梅泉野錄)>은 개화기부터 망국의 시기까지를 다룬 책으로, 여기에는 다른 이에 의해 비장한 황현의 죽음이 짧게 기록되어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순절(殉節)로 강제 병탄에 저항하였다.  


 이때 한국 인사로 순절한 사람이 많았으나 각 신문이 이미 폐간되어 천지가 캄캄하였으니 그 일도 발표될 곳이 없었다.(p285)... 대개 이 사람들 중에는 명문 집안 출신이거나 학문이 깊은 원로도 있고, 혹은 유림으로 저명한 자도 있었다. 죽을 때, 목을 매거나 할복하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기도 하며 굶어 죽기도 하였으며, 또는 독약을 먹고 죽기도 하고, 절명사(絶命詞)와 유서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진실로 모두 역사가들이 대서특필하여 전해야 할 것이다... 내가 이제 사정을 대략이나마 안 사람은 홍범식, 김도현, 황현 세 사람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후일을 기다리겠다._ 박은식, <한국통사>, p286


 한일 합방조약을 체결하다 _ 8월 22일 [기미]에 합방조약을 체결했다. [이후로는 고용주가 덧붙여 썼다. - 원주]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다 _ 8월 29일[음력 경술년 7월 25일].  한국을 왜국에 병합하고 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으며,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라고 했다. 이후로 한국의 대신 이하 모든 관리들을 귀속시켜 잔무를 정리하게 했다.

한국황제를 왕으로 책봉하다 _ 한국 황제를 왕으로 책봉하고 창덕궁 이왕 李王이라 칭했다. 황태자는 왕세자로 책봉했고, 태황제는 태왕으로 책봉한 뒤 덕수궁 이태왕 李太王이라 불렀다. 각 후 后와 비 妃는 완비, 왕태비, 세자왕비로 책봉했다.


한국이 망하자 전 진사 황현이 약을 먹고 죽었다._황현, <매천야록>, p456


 뜻있는 선조들의 죽음은 분명 후세에게 큰 울림을 전해 주지만, 그분들의 희생으로도 나라를 잃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국권을 잃어야 했었는가? <한국통사 韓國痛史>의 저자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은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망국(亡國)의 원인을 찾는다. 


 오호라! 세상에 나라가 있는 자는 외국인의 사기에 걸려들어 한국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될 것이다. 또한 스스로 누가 우리나라를 멸망시켰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홀로 말하길 "우리 선조의 교화(敎化)가 바뀌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할 것이다. 무엇으로써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보건대 대개 지구상에 여러 나라 중에 일부는 패자(覇者)가 되기도 하고 일부는 노예가 되기도 하며,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데, 그 나라 국민이 무력이 강하고 용감하여 삶을 가볍게 여기면 패자가 되고 흥하며, 그 국민이 문약(文弱)하여 겁을 먹고 죽음을 겁내면 노예가 되고 망하게 된다.(p293)... 오호라! 우리 선조의 교화가 바뀌어 상무정신이 보존되지 못했으니 지금에 이르러 누구의 허물이라 하겠는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_ 박은식, <한국통사>, p296


  그가 찾은 패망의 원인은 서양의 신문화 도입이 늦어서가 아니라, 상무(尙武)정신의 부재에 있었다. 상무의 기상이 쇠퇴했을 때 나라를 배앗긴 반면, 고구려(高句麗)가 과거 중국 수(隨), 당(唐)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상무 정신이 있어서라는 <한국통사>의 분석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1737 ~ 1794)의 로마 멸망 원인과 궤를 같이 한다. 비록, 모든 것을 정신력의 부재로만 돌리는 것은 다소 무리해 보이지만, 적어도 역사를 통해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는 필요하지 않을까... 110주년 경술국치일을 다시 생각하며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로마인의 미덕이 살아 있던 시절에 속주들은 공화국의 군사력에, 시민들은 공화국의 법률에 복종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공화국의 법률은 무너졌고, 로마와 속주들은 비굴한 폭군의 소유물로 변질되었다. 그들의 비참한 노예 상태를 어느 정도 경감시키거나 위장해 주었던 입헌 공화정의 형식도 시간과 폭력에 의해 폐지되었다... 게르마니아와 스키타이의 전사들은 처음에는 용병이나 동맹군으로 속주 군대에 편입되었다가 마침내는 로마인들의 주인이 되어 로마인들을 모욕하거나 보호해 주기도 했다. 로마의 운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힘센 이방인들의 창검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_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3>, p431


 PS <매천야록>을 통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격하시켜, 조선왕국(朝鮮王國)으로 만들어 제국에 편입시킨 저들의 악랄한 소행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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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08-28 2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오늘이 경술국치 인걸 알았네요! 올 해가 110주년 인것도요! 왠지 올해는 광복절 이슈로 생각이 많이지는 기념일 같아요! 즐건 주말되십시요!ㅎ

겨울호랑이 2020-08-28 23:3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께서도 건강하고 행복한 주말 되세요!^^:)

samadhi(眞我) 2020-08-28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학시절 큰 마음 먹고(가장 비싼 책이어서) 사두었던 매천야록을 여태 읽지 않고 있어요. 역사를 전공했다고 어디가서 말도 못하게 부끄럽게 지내고 있어요^^

겨울호랑이 2020-08-29 00:05   좋아요 1 | URL
samadhi님 잘 지내셨어요? 오랫만에 뵙습니다. 역사를 전공하셨군요. 저는 한글번역본으로 읽었지만, 원문은 선뜻 손이 안 갈듯 합니다. 건강한 주말 되세요!^^:)

samadhi(眞我) 2020-08-29 00:10   좋아요 1 | URL
제 책도 번역본이지요. 원문을 어떻게 읽어요. 수업도 잘 안들어서 스승님-전공교수님-이 신부가 불량학생이었다고 주례사로 말씀하실 정도였는데요 ㅜㅜ

겨울호랑이 2020-08-29 00:20   좋아요 1 | URL
사실, 원문이 아니어도 선뜻 손이 가지는 않는 책이긴 합니다. 다만, 구한말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필요한 책이라 저도 겨우 읽었네요 ^^:)

samadhi(眞我) 2020-08-29 00:26   좋아요 1 | URL
그 스승님이 꼭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황현이 보수성이 강한 사람이지만 매천야록은 진솔하게 써서 재미나다고 하시며.

겨울호랑이 2020-08-29 00:32   좋아요 1 | URL
진솔한 작품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게까지 재밌는 작품인지는..
. 아무래도 저와 교수님과의 내공 차이가 큰 듯 합니다...

samadhi(眞我) 2020-08-29 00:39   좋아요 1 | URL
그분이 워낙 진지한 성향이시기도 하고(순진하시고. 제가 장자크 상페, 「얼굴 빨개지는 아이」를 선물해 드릴 만큼 얼굴이 자주 빨개지셨어요. 그분 인간미 때문에 제가 자꾸 귀찮게 해드렸^^어요. )

시대상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겨울호랑이 2020-08-29 00:4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다음 번 다시 읽을 때는 교수님의 말씀에 유의해서 읽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samadhi(眞我) 2020-08-29 00:52   좋아요 1 | URL
앗, 매천야록을 읽지도 않은 제가 괜히 아는 척(?) 했네요. 저도 이 기회에 읽어봐야겠네요. 어제 하마터면 거의 사전 두께인 그 책을 모니터 받침으로 쓸 뻔했답니다. ㅋㅋ

보수성이 강하다는 말은 완고함을 돌려 말한 것 같고요. 그랬으니 나라 잃은 비통함에 자결까지 했겠지만.
그런 성향을 가진 꼿꼿한 선비가 쓴 글 치고 재미나다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8-29 09:27   좋아요 0 | URL
samadhi님 덕분에 매천야록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고 갑니다. 더운 날 건강하게 보내세요!^^:)

samadhi(眞我) 2020-08-29 09:41   좋아요 1 | URL
헉. 서울 못가본 사람이 서울 사람보다 더 잘 안다고 큰소리 친 셈이 됐네요. 하이고오 창피해라.

감은빛 2020-08-29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이었군요. 이제까지 살면서 날짜도 잘 모르고 있었네요. 일제강점기 역사에는 관심이 많아서 책도 많이 사모았는데, 구한말 역사에는 미처 관심을 둘 생각을 못 했네요. 바로 이어지는 역사임에도.

소개해주신 책들 담아 놓았습니다. 전부 다는 못 읽더라도 일부라도 읽어야 할 텐데요.

겨울호랑이 2020-08-29 09:30   좋아요 0 | URL
저 역시 매번 국치일을 챙기는 편은 못 됩니다만, 국경일 뿐 아니라 국치일도 기념일로 널리 알려져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아픈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감은빛님 편한 독서와 함께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세요! ^^:)

캐모마일 2020-08-29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경술국치일이란 걸 알고 가네요. 예전에 한국통사의 통자가 아플 통자라는 걸 듣고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했는데 지금껏 잊고 살았네요. 환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0-08-29 22:56   좋아요 1 | URL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캐모마일님 편안한 밤 되세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Korean War」를 읽었다. 커밍스는 2권의 책에서 미•소 강대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전쟁 이전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남과 북을 만들었는가를 설명한다. 1권에서는 갑작스러운 일제 패망으로 혼란스러운 정국과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무지가 드러난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에 일제가 남긴 유산 - 근대화한 철도, 중앙집권형 관료제 -를 적극 활용한 통치를 펼치지만, 이러한 강압적인 미군정은 남한 내 공산세력을 확장시키는 계기를 준다. 반면, 소련은 인민위원회를 적극 지원하고, 이로 인해 북한은 빠르게 중앙 집권화를 이루게 된다.


뒤를 이어 제2권에서는 대외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미국의 태평양 전략과 애치슨 라인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 배경과 1949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패퇴와 공산당 정부 수립 등이 1950년 한국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서술된다.

 커밍스가 바라본 한국전쟁의 기원은 이와 같이 복합적이다. 저자는 역사적으로는 일제 식민시대의 경험과 영향, 세계적으로는 새로운 패권국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중국 공산당의 승리 등 모든 요인이 한국전쟁을 만들었다고 보기에,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즉답을 피한다.

 Imagine : that the Korean War should have started in remote and isolated Ongjin, within the realms of far-off, remote Korea; that the conflict was between the Kim Il Sung and the Kim Sok-wons ; that the United States and then China should have been drawn into this black hole ; and that global war was at the doorstep six months later : it is still amazing, daunting, terrifying. It became an unmitigated tragedy for all concerned, this war that began with an incident at Ongjin.(p620)... Who caused the Korean War? No one and everyone, all who were party to the intricate tapestry of events since 1945... Who started the Korean War? This question should not be asked. Especially, Koreans should stop asking this question.(p621)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 中

 이번 독서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정리하기 위해 시작한 독서였지만, 솔직하게 여러모로 부족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방 전후사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고, 해방 전후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한국근대사 이해가 필수적인데 이에 대한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 더구나 한국근대사 부분은 ‘자본주의 맹아론‘ 등 역사전쟁의 쟁점이 담겨있음을 생각하면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러한 역사적 이해 부족에 더해 최근 볼턴의 회고록 사건을 통해 보듯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인 한국전쟁은 진행형이기에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어려움도 더해진다...

 이런 부족함을 반성하며,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한 독서는 보다 깊이있는 독서가 되어야 하기에 이에 맞춰 계획을 잡아본다. 먼저 해방 전후사를 다룬 두 관점에 대한 책들로 그 시대를 조명하고, 여기에 더해 「독도 1947」로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외교의 움직임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으로 일제 잔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보는 것으로 큰 대강을 잡아본다.. 상세한 독서 계획은 차차 세우도록 하고 일단 책들을 갖추었으니 서둘지 말고 꾸준히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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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6-25 0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가 겨울호랑이님의 서재에 놓인 소녀상을 기억합니다

친일인명사전까지 가지고 계시다니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님 멋지십니다

겨울호랑이 2020-06-25 05:27   좋아요 1 | URL
에고 쑥스럽습니다. 소녀상이 담긴 페이퍼는 꽤 오래 전에 작성했는데 기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또한, 친일인명사전을 가지고 있지만 사전이어서 많이 읽지 못해 부끄러운 마음도 함께 듭니다. 이번 계기로 의미있는 독서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기대감과 함께 나와같다면님 격려도 받으니 더 힘이 나네요. 감사합니다^^:)

2020-06-25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25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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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1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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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1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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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폭동을 지원하는 것부터 위성국을 무장침략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서 사용된 공산주의자들 방식의 대표적인 예로 1950년 한국 전쟁을 들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러시아식 훈련을 받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략했다.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느 면에서 한국 전쟁은 그 지역에 국한된 제한적인 전쟁(국지전) limited war였다... 한국 전쟁은 1953년 7월에야 끝났다.(p939) <전쟁의 역사> 中


  <전쟁의 역사 A Histoty of Warfare>의 저자 버나드 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1887 ~ 1976)가 한국전쟁에 대해 기술한 바는 적지만, 짧은 내용 안에 담긴 한국전쟁의 기원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는 한국 현대사에서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의 원인을 양측의 입장을 함께 제시한다.


 1950년 6월의 전쟁 발발 상황에 대한 설명들 대부분은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적을 향해 북한이 새벽녘에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한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전쟁은 1949년에 많은 전투가 벌어진 바로 그 외진 옹진반도에서 시작되어 몇 시간 후에 38도선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 개성, 춘천, 동해안에 이른 것이다.(p36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공식적인 미국사에 따르면, 옹진반도에서는 제17연대 병사들이 1950년 6월 24일, 25일, 조용한 여름밤에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4시 정각에 너무나 급작스럽게... (대포와 박격포의 사격이) 굉음을 울리며 대한민국의 경계선을 침입하였다.(p364)... 북한의 공영 라디오 방송은 이와 다르게 발표했다. 남한 군대가 6월 23일 오후 10시에 은파산 일대를 포격하기 시작했으며, 곡사포와 박격포를 동원한 이 포격은 6월 24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다.(p36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中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서 1950년 이전에 남북간에 이미 많은 충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공간적으로 옹진반도가 전면적인 한국전쟁 확산의 진원지라면, 시간적 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한국전쟁의 기원의 참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시간적 배경을 보다 상세하게 서술한다. 본래 2권으로 이루어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중 1권을 번역한 <한국 전쟁의 기원>에서는 해방 정국을 중심으로 그 원인을 보다 상세하게 고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 ~ )의 '동아시아 30년 전쟁'의 사관(史觀)을 통하는바를 발견한다 .



  만주에서의 항일 활약상의 인식은 한국 공산주의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것이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인이 이룩한 최소한의 성공도 항일운동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대전 후의 한국에서 영도적 지위를 확보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p71)... 이러한 만주에서의 경험에 있어서 특히 언급해야 할 다른 요소 하나가 유격대들을 살해하는 데 기꺼이 참가할 한인들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한인(韓人) 수백 명이 사병 혹은 하급장교로 토벌작전에 가담했다. 일본신문들을 이들 한인들 사이의 대결을 크게 보도한 바 있다... 1950년 6월의 실상은 일본인들이 바람의 씨앗을 뿌렸으며, 한인들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거둬들인 것이다.(p72) <한국 전쟁의 기원> 中


 미국의 정책들은 개념과 결과에 있어서 식민 잔재의 완전한 재편성을 요구하는 한인들의 염원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의도한 바가 좋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염원을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와 과오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서의 미국의 실패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후의 첫 해는 한인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하나의 시련을 제공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통치체제가 그 자체의 이익에 입각한 논리를 전개시켰다.(p541) <한국 전쟁의 기원> 中


 일단 읽던 책은 마무리하고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전쟁의 기원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는 독서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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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15 1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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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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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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