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지어의 논문에서 동등한 단체가 자유롭게 협상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법적, 경제적, 사회적 합의인 '계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 계략을 가장 먼저 드러내는 부분이다. 설사 그런 '계약'이 존재했다는 물적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도처에서 상시로 발생한 성 착취와 극도의 폭력이 그런 계약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한 일은 놀라울 따름이다. 유엔과 국제 앰네스티가 "반인륜적 범죄"(4)로 인정한 역사적 사실에 '계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 , <역사를 모독하지 마라>(http://www.ilemonde.com)>
얼마 전 하버드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인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전세계를 분노로 몰아넣었고, 이에 대한 비판의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에도 실렸다. 기사를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제국의 위안부><반일 종족주의>를 떠올리면서,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제국의 위안부>를 다시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때에도 저자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여러 편의 비판의 글이 실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는다>와 함께 비교해서 읽었다는 점일 것이다. 덕분에,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비판점을 늘릴 수 있었다.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p33
만약, <제국의 위안부>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위의 문장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저자 박유하는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의 문제를 제외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민족 요인보다 구조적, 제도적인 문제로 이 문제를 한 차원 끌어올린 후 이 차원에서 이를 강요한 강제성의 주체를 이분화한다. '현실적인 강제성'과 '구조적인 강제성'이 그것이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강제성'의 주체에 조선인 남자들이 포함되기 때문에, 조선인들 역시 이로부터 책임이 자유롭지 않음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노사이드(genocide) 측면에서의 문제를 지적한 다음 글을 살펴보자.
'위안소'를 설치한 데에는 장병들의 성병 예방이라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일본인 창기보다 조선인 소녀가 '황군 장병들을 위한 선물'로 적당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또한 대일본제국의 성인 남자가 속속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 그의 '씨' 種 야마토 민족의 아이를 최대한 재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민족 말살을 하더라도 상관없는, 아니 오히려 '민족 말살'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 "조선의 젊은 여자를 모두 긁어모아 위안부로 삼아 조선 민족의 종자를 절멸시켜야 한다"는 발언도 공공연하게 나돌았다고 한다. _ 이시카와 이쓰코,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들>, p144
'위안소' 설치를 통해 민족 말살을 생각했다는 이러한 인식이 보편적이었다면, 과연 저자가 지적한 '제국의 위안부'라는 용어가 설 자리가 있을 수 있을까. 민족 문제를 위안부 문제와 분리할 수 없다라면, 이후 전개되는 저자의 논리는 설자리가 없어지겠지만, 그 이후 논리에도 문제점이 있기에 계속 살펴보자.
일본군이 장기간 동안 전쟁이라는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병사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위안부'라는 존재를 발상하고 모집한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규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불법적인 모집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집 자체를 중지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군의 책임은 크다.(p25)...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군의 수요를 자신들의 돈벌이에 이용하고 자국의 여성들을 지배자의 요구에 호응해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다놓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안부에 대한 '강제성'을 묻는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식민지주의와 국가와 가부장제의 강제성을 무엇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26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보려면 구조적인 강제성과 현실적인 강제성의 주체가 각각 누구였는지를 보아햐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의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제국의 위안부>는 두 개의 '강제성'이라는 공을 교묘하게 돌리며 대중의 시선을 끄는 광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집요하게 '현실적인 강제성(조선인 협력자)'을 통해 '구조적인 강제성(일본제국)'을 지우려고 한다. 복권되는 것은 일본제국이고 면책되는 것은 식민주의 침략의 역사다. 심지어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에 대해서 "'가라유키상의 후예', '위안부'의 본질은 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한다. _손종업 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p34
<제국의 변호인> 저자 박유하는 얼핏 일본군의 책임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읽다보면 극히 일부임을 알게된다. 거대한 범죄자의 '가해자'가 아닌 '자살방조죄' 정도의 책임을 일본의 국가 책임으로 인정하는 대신, 그는 가해자를 민간으로 떠넘긴다. 우리는 국가 부채를 민간 부채으로 떠넘기는 그런 얄팍한 정책을 위안부 문제의 논리에서도 보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시장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민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쇼와(昭和)시대는 과연 그러한 시대였는가? 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답해준다.
사실 일본인들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전부터 한국에 많이 건너와 살았다. 그중에는 속아 팔려온 소녀들이나 살길이 막막했던 가난한 여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의 '이동'을 조장하고 묵인한 건 국가권력과 민간업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훗날의 '조선인 위안부'의 전신은 '가라유키상', 즉 일본인 여성들이었다. 그들 역시 가난한 시골처녀들이었고, 감언이설에 속거나 부모의 뜻에 따라 팔려간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일본인 위안부' 역시 가부장제와 국가의, '가난한 여성' - 사회적 역자에 대한 차별이 만들어낸 존재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30
무엇보다, 일본제국시대(1868~1945)에는 자유롭게 행동하는 '시민'이 없었다. 그러므로, '계약'이라는 용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개인(일본 국민과 식민지 백성 모두)은 천황의 '신민'이었으며, "일본 신민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은 일본 천황이 승인하고 명령한 법에 의해 결정"됐다.(5) 성별과 경제적, 인종적 요소가 그런 "조건"의 기초를 이루면서 개인의 특질에 대한 명확한 위계질서를 만들어냈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그 요지다. 여성은 말할 것도 없으며, 일본 식민지의 여성과 미성년자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_ <르몽드디플로마티크, 3월호> , <역사를 모독하지 마라>(http://www.ilemonde.com)>
1940년대 전시(戰時)체제 아래 일본은 강력한 국가 주도의 통제 사회였고, 이 안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총력전(總力戰)이라는 주장 아래 묻힐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 가족을 부양하는 내용을 담은 저자의 현대판 <심청전> 주장은 그야말로 신파의 극치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저자는 정의기억연대에 의해 왜곡된(?) 위안부에 대한 이미지를 비판한다. <제국의 위안부>에서는 눈물짓고 미칠듯한 고통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을 조명하는 대신, 일본 군과의 로맨스 등을 그리며, 위안부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동지'로서 '위안부',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위안부 상(像)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저자가 그려낸 '제국군'이자 '일본군의 동료'로서의 위안부 모습이 과연 진실이고, 이를 통해 전쟁을 여자로서 감내해야 했던 이들의 고통이 누그러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오키나와 전투를 배경으로 한 <전장의 기억>의 내용으로 대신 답하고 싶다.
소녀상이 저항하는 모습만 표현하는 이상, 일본옷을 입었던 일본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의 기억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 그들의 또 다른 생활과 기억, 일본 군인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놀며 웃었던 기억을 가진 '위안부'는 그곳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군인을 자신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가엾은 존재로 간주하고 동정했던 위안부도 물론 없다... '위안부'들은 그렇게 국가와 남성에 의한 피해자이면서 국가에 의해 '애국자'의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이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국가의 부조리한 책략이었지만, 외국에서 서러운 음지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는 그 역할은 자신에 대한 긍지가 되어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수 있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31
제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류큐는 식민지 지배를 받은 타이완이나 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1898년에 이미 징병제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타이완이나 조선과 비교할 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말했듯이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은 근대국가라는 범주를 생각할 때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p29)... 제도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일본인'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 바꿔 말해서 자기 마음속에 '일본인'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리고 거기에 자신을 동일화시켜 나가는 과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이 책에서 오키나와 전투를 거론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p29)... 대동아전쟁에 패배하고 오키나와 출신의 황군 병사는 전사함으로써, 결국 '일본인'이 되려고 하던 과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죽음도 아니며 '초(超)국가주의'의 죽음도 아니다. 무엇보다 생활의 죽음이며 부엌의 죽임인 것이다. 생활은 8월 15일로 단절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연속성은 생활의 죽음 가운데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기억 속에 전장 동원을 아로새긴 생활의 죽음은 과연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_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p30
<전장의 기억>에서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는 오키나와 사람이 된 류쿠인들이 진정한 일본인이 될 희망을 품고 참전한 태평양전쟁에서 자신들의 꿈과 함께 일상의 죽음도 함께 맞이했음을 말한다. 일본 내륙으로 직접 편입되어 직할령이 된 제1제국 신민이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차별받던 2등 신민 조선인들이 과연 제국의 동질성에 대해 얼마나 공감할 수 있었을까? 결국 박유하가 그리고자 했던 잔다르크와 같은(?) 이미지의 위안부 상은 허상임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런 세부적인 사항에 담긴 왜곡과 거짓을 둘째로 놓더라도, <제국의 위안부> 안의 논리 자체가 모순을 가지면서 주장의 거짓임을 입증한다. 저자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위안부의 일본 배상 책임과 관련해서는 '구조적 강제성'과 '현실적 강제성'의 논리를 통해 현실의 강제성 주체인 '민간(조선인을 포함한)'책임을 강조하며 일본에 면죄부를 주고 있지만, '제국주의'문제에서는 '현실의 강제성'과 '구조적 강제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문제에서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즉, 일본의 침략 문제에 있어서는 현실의 강제성 주체인 '일본'의 책임을 묻는 대신 '제국주의'라는 '구조적 강제성'의 주체인 서구 제국주의에게 책임을 돌린다는 점은 논리적 모순이라 지적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강자로서의 '제국'에 의해 상처를 입었던 우리가 구 제국(일본)의 죄를 다른 제국(네덜란드)와 연대해 또 다른 제국(미국, 영국 등 유럽)에게 물어온 방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p297)... 문제는 네덜란드 여성과 '조선인 위안부' 역시 '적'의 관계였다는 점이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선 것은 서양을 흉내낸 일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상은 아시아였고, 말하자면 아시아의 불행은 서양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그건 결과적으로 아시아의 침략이 되고 말았지만, 일본의 전쟁의 명분은 서양 제국으로부터의 '아시아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은 졌고, 전후 일본과 한국은 함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적 냉전구조 속에 안주하게 된다.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 p298
결국, <제국의 위안부> 저자는 민족 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 문제를 분리하고, 시장 경제가 성립할 수 없는 사회에서 계약의 자유를 언급하며, 구조적 강제성과 현실적 강제성의 논리를 통해 이를 일본 제국 내 문제로 물타기를 했다. 그렇지만, 한일 병합 조약(1910)이라는 제도적 강제에도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될 수 없었고, 때문에 '제국의 위안부'가 아닌 우군으로 포장된 '인종 청소 대상이자 피해자'였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제국의 위안부>, <반일종족주의>에 인용되어 혐한 서적과 램지어 교수 같은 이들의 논리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비통한 마음을 버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조의 글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싶었다는 저자의 글은 한홍구 교수의 답으로 대신하며 긴 글을 갈무리한다...
PS.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된 페이퍼 리뷰를 마무리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개념 사전의 주제는 <제국주의>와 <전쟁>으로 정해졌다...
<화해를 위해서>(2005)라는 책으로부터 8년이 지나도록, 그때 바랐던 "생산적인 논의"는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한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일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그동안 기본적으로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안의 견고한 기억들"에 "화해를 지향하는 균열"을 내보려 했던 8년 전의 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p5
제(한홍구)가 박유하씨가 말하는 '화해'를 비판하는 근거 중 하나는, 제가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일 뿐이고, 화해란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의 사죄를 받아들인 다음에 베트남 사람들이 먼저 제안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_한홍구, <자국의 가해 역사를 직시한다> <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
위안부의 불행을 만든 것은 민족 요인보다도 먼저, 가난과 남성우월주의적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였다. _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제2판 34곳 삭제판>,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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