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張俊河, 1918 ~ 1975)의 항일(抗日) 투쟁 자서전 <돌베개>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만주군인(滿州軍人)이었던 박정희(朴正熙, 1917 ~ 1979)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나게 된다. 군인 박정희는 어떻게 탄생했고, 그의 만주군 복무시절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번 페이퍼는 이에 대해 살펴보되, 군인으로서 광복군과 만주군이라는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서로 대비되는 두 인물을 직접 비교하는 방법의 효과에 대해는 이미 <영웅전>을 통해 입증된 바 있어 부족하나마 플루타르코스의 방식을 따라가 본다.
'우리에게는 <영웅전>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비교 열전>은 23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의 일생을 기술한다. 그중 19쌍은 두 사람의 성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p6)...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 AD 50(?) ~ 120)는 <비교 열전>에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들을 그리되 역사가의 시각에서 정치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 영웅들의 내면세계와 성격(ethos)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인물의 특징을 밝혀내고 있다.(p7)'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
1. 군(軍)입대 동기
가. <돌베개> : 집안의 불행을 대신한 지원
<돌베개>에서 저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본의 요시찰인물이 된 부친을 대신하여 일본군에 자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원치않은 일본군으로의 입대 후 저자는 광복군을 찾아 탈주하게 되며 <돌베개>를 통해 고난의 여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일인들이 가장 주목하고 또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아버님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宣川 신성 神聖 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 더 계속 요시찰 인물로 늘 형사들이 뒤를 따르던 형편의 집안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거기다 일본에서 피해 와 있다. 다른 신학교와 달리 정규대학 과정의 일본신학교 재학생이다. 학도병 지원의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 처지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버린 것이었다.(p13)' <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 긴 칼 차고 싶어 갔지
반면, <군인 박정희>에서 그려내고 있는 박정희의 입대(入隊)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안정된 교편생활을 하던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주군(滿州軍)에 자원하게 된다.
'박정희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어릴 때부터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칼라)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끌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지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 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을 교사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제자 이순희 증언)(p78)' <군인 박정희> 中
'한편 박정희의 만주행 배경에 대해 이견을 펴는 사람도 있다.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이자 해방 후 육사에서는 2기생으로 같이 졸업한 송석하는 97년 필자에게 "박정희가 만주로 간 것은, 교사를 하다가 일본 육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아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로 갈 계획을 하고 만주로 왔다"고 주장했다. 즉 박정희는 일본 육사 입학을 위해 만주 군관학교를 징검다리로 삼았다는 얘기다.(p81)'<군인 박정희> 中
이러한 증언을 보면 결국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은 개인의 출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하다. 물론, 다음과 같이 만주(滿州)라는 곳이 당시 조선 청년에게 주었던 황금이 넘쳐나는 엘도라도(El Dorado)의 이미지 역시 청년 박정희의 만주행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역시 개인의 영달을 넘는 수준은 아닐 듯 하다.
'박정희의 만주행에는 시대상황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계기로 대륙 병참기지화 정책을 전개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영구통치를 위해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드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폈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그 탈출구로 만주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일컬어질 만큼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다.(p80)' <군인 박정희> 中
2. 군인으로서의 활동
가. <돌베개> : OSS 훈련과 국내 진입 작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합류한 장준하는 시안 西安에서 OSS 훈련을 받으며 서울지역 침투 공작을 준비한다. 비록 이 작전은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돌베개> 속에서 죽음을 앞 둔 결연한 저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월의 태양 아래 우리는 "OSS"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약자인 "OSS"는 미국의 전략첩보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의 OSS 활동은 앞으로 있을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을 위해 눈부신 예비공작 단계에 있었다.(p281)...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공략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공략을 돕기 위해 경무기로 무장된 우리가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우선은 첩보활동, 다음 단계로 정보 송신, 그리고 최종으로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3단계 활동이 성공할 경우, 국민군을 조직하여 미군 상륙과 때를 맞추어 후방 교란을 지휘하는 책임까지 졌으며, 국내 교란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의 공중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밀한 작전의 초안자가 바로 이 장군이었으므로 그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지대장으로서는 나를 죽음의 골짜기에 집어 넣기에 고민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1944년 겨울에 이미 연합군 중국 전구 사령부를 거쳐 미 국방성 펜타곤의 찬성을 얻었으며, 전황의 추이와 병행시켜 1945년 초기에 연합군 사령부에서 검토되고 있었던 것이다.(p289)' <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 독립군 토벌설과 비밀광복군 설
일본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4년 7월 만주에서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당시 만주군으로 복무한 그에 대해 크게 2가지 설을 <군인 박정희>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할 정도로 용맹한 만주군이나, 비밀광복군으로 활약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그는 그저 평범한 행정장교로서 1년 1개월을 복무한 후 쓸쓸히 귀국한 패잔병이었으며, 자신이 광복군임을 부인한 평생을 '일본군인'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
1)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
'8단 본부에서 그와 가장 가까이서 근무했던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씨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대토벌 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습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지요.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p100)... "나는 소규모 전투를 포함, 10여 차례 (팔로군 토벌)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대 을종부관으로 있어서 전투 경험이 전연 없다.... 박정희는 (내근을 하다보니) 그럴 기회가 없어서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8단 시절 박정희는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는 비교적 편히 지냈다.(방원철 증언)(p101)' <군인 박정희> 中
2)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진상
'1967년 박영만은 <광복군> 상/하권 두 권짜리로 된 논픽션 소설을 출간했다. 하권의 골자는 박정희가 이미 해방 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하권에는 당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군 8단에 근무했던 신현준(봉천 5기)까지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신씨는 "해방 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다.(p119)... 이 책이 나온 후 청와대로 가져가 박 대통령에게 선물했더니 박 대통령이 내용을 훑어보고는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며 노발대발했다. (p120)' <군인 박정희> 中
3. 광복 후 귀국
<돌베개>의 주인공 장준하와 <군인 박정희>의 주인공 박정희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시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역사의 흐름에 실려 귀국한다. 다만, 장준하는 백범 김 구(金九, 1876 ~ 1949)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반면, 박정희는 패잔병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된다.
가. <돌베개>
'"아, 조국의 땅이 우리를 맞으러 온다. 우리를 마중하러!"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던 솜구름이 버섯처럼 돋아나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는 서해안의 섬들이 바다에서 솟아나는 듯이 옹기종기 떠올랐다... 겨울 날씨 같지 않게 기창 밖으로 보이는 조국은 아름다웠다. 옥색 하늘이 엷게 풀어지고 남색 바다가 치마처럼 퍼졌으며 섬들이 크고 작게 벌어졌다... 그렇다. 우리의 갈망이 버섯처럼 조국을 환상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눈을 비비고 또 비비었으나 섬들은 돌덩이로 솟아올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 속에 제자리에 주저않고 있었다. 저 위에 나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가 있을 것이다. 저 위헤 하늘을 우러러 울고 땅을 치며 발을 굴러 울던 나의 조국이 있고 나의 동포가 목이 아프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p343)'<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1946년 5월 초순. 중국 천진항에서 미군 상륙용 함정인 LST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동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 날 "귀국선" 갑판 위에서 한 젊은이가 무거운 시선으로 중국 땅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으로 패잔병 신세가 되어 귀국하는 "박정희 중위"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군인이 되어 당당하기만 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p96)' <군인 박정희> 中
<돌베개>에서 장준하는 집안의 불행을 막고자 일본군에 자원했으나, 자신의 뜻이 있었기에 일본군에서 벗어나 광복군으로 합류한 후 국내진입작전을 통해 자신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군인 박정희>에서는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원하는 큰 칼을 찼으나,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이러한 기록을 통해 바라볼 때, '군인(軍人)'으로서 장준하는 '제가'의 수준에서 입대하여 '치국'을 생각하며 그의 광복군 생활을 마친 반면, 박정희는 '수신'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만주군 생활을 마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후 삶은 그들의 뜻과는 다르게 풀려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다소 거친 논리의 비약일 수 이겠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悲劇)은 '수신'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한 '치국'의 수준에 이른 이들에 대한 탄압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 모습에서 살짝 장준하 선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두 인물에 공통되는 OSS 대원으로서의 경력 때문이겠지만, 두 인물이 over lap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1930년대와 40년대 만주가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미국 서부와 같은 이미지였다면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배경이 만주로 설정된 것도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박정희는 어디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