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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는 철학자 강신주(姜信珠)가 생각하는 노자(老子)사상과 장자(莊子)사상이 다름을 주장하고 있는 책이다.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  하나인 <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내용을 보다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프롤로그에 책 내용이 잘 요약되어 있어 이를 옮겨본다.

 

 '통치자는 피통치자에게 노동력이든 재화든 수탈하고, 그걸 (재)분배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이 바로 국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이 바로 국가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위대함, 아니 무서움은 이 메커니즘을 정확히 포착하여 그걸 싸늘한 눈으로 통치자의 정치에 응용하려는 데 있다. 바로 이 수탈과 재분배의 메커니즘을 노자는 "도(道)"라고 불렀던 것이다.(p13)... 나는 장자의 속내는 타자와의 소통에 있다고 생각했다...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했던 치열한 자기 수양은 타자와 소통하려는 열망에 종속된다는 것, 내 첫 책이 밝히려고 했던 건 바로 이것이다. 운 좋게도 타자와 소통했다면, 그 흔적도 남을 수밖에 없을 터. 그것이 바로 장자의 머릿속에 있던 "도(道)"였다. 바로 여기에서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그러니까 "길은 걸어가야 이루어진다"는 장자의 사자후가 포효하게 된다.(p12)'


 저자는 2004년에 펴낸 <노자 :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을 통해 노자 사상에서 파시즘, 제국주의를 끌어내고 있다.(이 책은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제의 변형>과 <노자 :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의 합본이다.) '무위(無爲)'에서 에떻게 '제국주의 帝國主義'가 나올 수 있는지 결론만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지만, 이 책은 이에 대한 논리를 서술하는 책이다. 이하 이번 페이퍼에서는 이 책에서 <노자>사상이 어떤 방식으로 제국주의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 서양철학과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보려고 한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도덕경>에 대한 다른 해석과 함께 개인 의견을 적었는데 미리 말하자면 내용이 많이 긴 편이라 지루할 수 있을 것 같다.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의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기까지 읽으셔도 읽으시는 것을 권하고 싶다.  


1. <도덕경 道德經> 42章


 가. 개별자를 통해 도(道)를 끌어냄 


'백서본 5장(왕필본 42장)에는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만큼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아니 정확히 말해 노자와 장자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대립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p51)'


 저자는 먼저 도덕경 42장을 통해 노자 사상과 장자 사상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노자는 하나, 둘, 셋의 개별자들이 서로 모순되지만, 조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편적인 질서인 도(道)를 도출한다. 이는 수학적으로 1+1=2, 2+1=3... 무한수(無限數)를 도출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연속된 수(數)의 확장을 통해 만물을 설명하는 일정한 법칙(자연법칙)을 끌어내는 방식으로 이해가 된다.(더하는 수의 동일성(同一性)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제42장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인지소악, 유고, 과, 불곡, 이왕공이위칭. 


도는 일을 내고, 일은 이를 살리며, 이는 삼을 기르고, 삼은 말물을 이룬다. 

만물은 음을 진 채 양을 품고 있는데, 두 기가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룬 것이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특히 고(孤)와 과(寡) 그리고 불곡(不穀)이지만, 

오히려 왕은 그것들도 자신의 호칭을 삼는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첫 번째 단락이 개체의 발생론을 피력하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은 군주의 수양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단락이 두 번째 단락의 근거로 제안된 것이라고 이해하면, 전체 5장의 구조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 단락에 따르면 도는 하나(一)를 낳고, 이 하나(一)는 둘(二)를 낳는다. 그리고 이 둘(二)은 셋(三)을 낳고 최종적으로 이 셋(三)이 만물을 낳는다... 난해해 보이는 하나, 둘, 셋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有名)"논리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반복하자면 노자는 이 세계를 도에 의해 설명하고자 했던 사변적 형이상학자가 아니다. 그래서 노자는 아주 재빠르게 만물의 층위로 곧바로 미끄러져 나가버리는 것이다. 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별자들은 상호모순적이고 대립적인 이중적 규정의 존재이며 또한 이런 이중적 규정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p53)


'노자의 발생론은 역으로 읽어야 한다. 즉 만물은 상호모순적인 두 계기로 규정되지만 아울러 이런 모순적인 규정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부터 노자는 셋, 둘, 하나라는 추상적인 계기를 발견해낸다. 그리고 결국 만물들을 규정하는 모든 대립과 조화의 계기는 오직 내재적 원인(causa immanens)으로서의 "도(道)"에 의해 조율될 수 밖에 없다고 발견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별자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층위에서 "도"를 발견한 다음에 이것을 발생론적 도식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첫번 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p54)'


나. 군주(君主), 국가(國家) 개념의 도출


이어서 저자는 군주(또는 국가)의 개념과 노자 사상을 결합시킨다. 사실, 이 지점이 노자 사상에 대한 해석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되는 지점이다. 본문에서 '而王公以爲稱'이라고 하는 부분에 있어 저자는 '왕=군주'로 해석을 하고, 이를 통해 "짐이 곧 국가다(L'Etat, c'est moi)"라는 말과 유사하게 이로부터 '국가' 개념을 끌어낸다. 이제 논의는 '국가'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상의 자연법칙과 사회법칙과의 연결고리는 다음 주장의 주요한 논거가 된다.

 

 '노자는 아주 재빠르게 "군주"의 논의를 도입한다. 노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개별자들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도"에 대한 논의와 "개별자(萬物)'의 규정에 대한 논의는 군주에 대한 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안된 근거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도"와 "개별자" 사이의 관계는 "국가"와 "군주" 사이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제안된 말이다.(p54)... 국가는 군주의 내재적 원인이고  따라서 군주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인식은 국가의 기능과 위상에 대한 인식으로 파생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 점에서 노자에게 "도"와 "개별자" 사이의 인과관계는 "국가"와 "군주"사이의 인과관계의 "내재적 문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p55)'


2. <도덕경 道德經> 77章


제77장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有餘者損之,

천지도, 기유장궁여, 고자억지, 하자거지,유여자손지,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부족자보지, 천지도손유여이보부족,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인지도칙불연, 손부족이봉유여, 숙능유여이봉천하, 유유도자,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견현.


자연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 같구나! 높으면 눌러주고 낮으면 들어준다.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준다. 자연의 도는 남은 것은 덜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데, 인간의 도는 그렇지 않다. 부족한 데서 덜어내어 여유 있는 쪽을 봉양한다.

누가 남는 것을 가지고 천하를 봉양할 수 있겠는가? 오직 도를 체득한 자(聖人)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이치로 성인은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거기에 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나은 점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42장에서 '국가'의 개념을 끌어냈다면, 이 국가가 어떤 기능을 하는가는 77장에서 살펴본다. 77장에서 언급된 '성인(聖人)'은  저자에게는 '재분배자'로서의 권력이 된다. 이로써, 성인은 더이상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도(道)'와 결별하고 하나의 구조(structure)가 되어버린다. 


'백서본 42장(=왕필본 77장)은 빛을 발휘하고 있다. 이 백서본 42장에서 노자는 국가의 기능에 대해 자신의 사유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자에 따르면 자연의 법칙은 높은 것을 누르고 낮은 것을 올리고 남는 것은 덜고 부족한 것은 채우는 데 있다. 그런데 노자는 이런 자연의 법칙에 비추어 인간 사회 법칙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인간 사회에서는 오히려 가난한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 부유한 사람에게 더해주는 것이 법칙인 것처럼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노자는 이상적인 통치자, 즉 성인(聖人)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노자의 이상적인 통치자(=聖人)는 기본적으로 "재분배(redistribution)"가 국가의 핵심 기능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p117)'


'노자 철학의 탁월한 점은 그가 국가를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일어나는 교환의 관계, 즉 수탈과 재분배의 논리에 입각해서 파악했다는 있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그는 국가를 어떤 신비한 무엇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경제적인 기구(economical mechnism)로 파악했다는 것이다.(p125)'


저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 노자와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을 결부시킨다. 이제, 노자사상은 자본주의 경제사상으로 변화되었다. '자본주의 사상'으로 변신한 이상 '제국주의'로의 이행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이 지닌 중요성은 그가 국가를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교환 관계로 통찰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진에 따르면 국가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통한 우월성 확보, 이어서 약탈의 연속성과 지속성을 위해서 수행되는 재분배의 과정을 통해 작동한다. 결국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가 옳다면, 국가의 교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는 여러 모로 구별할 수 있지만, 자본의 논리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p126)'


3. <도덕경 道德經> 80章 : 국가의 발전(by 겨울호랑이)


 책에는 소쉬르, 하이데거, 레비나스 등 많은 학자들이 등장하면서 파시즘과 제국주의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그래서, 책과는 다른 방법으로 발전단계를 설명해본다. 이하 체제의 변화는 <도덕경>, <국가>, <정치학>,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백성들이 국가를 이루고, 제국을 이뤄서 붕괴되는 것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구성해봤다. 논의의 서두는 도덕경 80장을 먼저 서두로 잡았다. <도덕경 80장>이 백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하지만, 이는 노자 사상과 제국주의가 결합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의문의 제기이기도 하다. 나라를 적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하라는 것(小國寡民)은 <도덕경>의 문장 그대로다. 지극히 반(反)제국주의 적인 내용을 본문으로 확인하면서도, <도덕경>을 현대 사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규모를 팽창시켜가는 제국주의 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도 생각해볼 과제라 여겨진다.


<도덕경 제80장>


小國寡民, 使有什佰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소국과민, 사유십백지기이불용, 사민중사이불원사,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수유주여, 무소승지, 수유갑병, 무소진지,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사인부결승이용지, 감기식, 미기복, 안기거, 낙기속,


나라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라. 많은 도구가 있더라도 쓸 일이 없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생각하여 멀리 가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탈 일이 없고 군대가 있더라도 펼칠 일이 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결승 문자를 회복하여 쓰게 한다. 그 음식을 맛있어 하고

그 옷을 곱다고 여기며 그 거처를 편안해 하고 그 풍속에 기꺼워한다.


 이와 같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부족함이 생겨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점차 나라는 커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 많은 사람이 생겨남에 따라 부족함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그 결과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전쟁을 통해 나라와 나라가 병합되고 제국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플라톤(Platon, BC 427 ~ 347) 이전 세대에서 '아테네 제국'과 이를 낳은 '페리클레스(Pericles, BC 495 ~ 429)'를 통해 역사 속에서 소국(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의 발전양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로는 나라가 생기는 것은 우리 각자가 자족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것이 필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또 다른 필요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는 식으로 하는데, 사람들에겐 많은 것이 필요하니까, 많은 사람이 동반자 및 협력자들로서 한 거주지에 모이게 되었고, 이 "생활공동체(synoikia)"에다 우리가 "나라(polis)"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네..."최소 한도의 나라(he anankaiotate polis)"는 넷 또는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지겠네.(2권 369b ~ 369d)'


 '다시금 이 나라를 한층 더 크게 만들어야만 되네. 앞의 그 건강한 나라는 더 이상 적합지 못한데, 이는 이미 그 규모에서 확장을, 수에서 충만을 보아야만 하겠기 때문일세... 그런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다보면 영토 또한 그때에는 그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이젠 충분하기는커녕 아마도 작아 빠지게 될 것세. 아니면 어떻다고 말할까?... 우리가 목축하고 경작하기에 넉넉한 땅을 가지려 할 경우에는, 우리로서는 이웃 나라 사람들의 땅을 일부분 떼어내야만 되겠고, 다시 그들은 그들대로, 만약에 그들 역시 필요 불가결한 것들의 한도를 벗어나, 재화의 끝없는 소유에 자신들을 내맡겨 버리게 될 때는, 역시 우리 땅을 떼어 가져야만 되지 않겠는가? 그 다음에는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되겠지.(2권 373d ~ 373e)'



[지도]아테네 제국(출처 : http://kalnaf.egloos.com/m/3379624)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다스린 50여년의 시간동안 아테네는 황금시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멸망의 씨앗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그에 대해 언급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페리클레스 편을 살펴보자.


 '제 10권인 이 책에서 나는 페리클레스와, 한니발과 처절하게 싸운 파비우스 막시무스(Fabius Maximus)의 생애를 기술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탁월함은 서로 비슷하다. 특히 온유함과 올바름, 백성들과 동료 관리의 어리석음을 참는 능력에 힘입어 두 사람은 그들의 조국에 크게 이바지했다.(p186)... 그가 죽은 뒤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아테나이인들은 곧 그의 가치를 알게 되어 그를 몹시 아쉬워했다... 남들의 시샘을 사 독재정치니 참주정치니 하고 비난받던 그의 권력이 국가를 지켜주는 보루였음이 밝혀진 셈이다. 왜냐하면 치유할 수 없는 화근으로 자라나지 못하도록 그가 늘 억제하고 눈에 띄지 않게 했던 온갖 부패와 해악이 이제는 국가를 덮쳤기 때문이다.(p241)'


 페리클레스 치세(治世) 동안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지만, 그의 치세는 '참주정치'라는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러한 정체의 한계는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미 대내적으로는 정적(政適)과 민중들의 견제, 대외적으로는 외국과의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며 결국, 아테네 제국은 펠로폰네소스 전쟁(Peloponnesian War,BC 431 ~ 404)'을 통해 무너지는 결과를 맞게 된다.

 

'참주정체도 다른 정체와 마찬가지로 참주정체에 반대하는 더 강력한 국가가 있을 경우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무너질 수도 있다. 이념이 상반된 까닭에 그 국가는 참주정체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럴 힘만 있으면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마련이다... 왕정과 귀족정체는 정체(政體)가 다르기 때문에 참주정체를 적대시한다. 그런 이유에서 라케다이몬인들은 수많은 참주정체를 해체했고, 쉬라쿠사이인들도 좋은 정체를 갖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게 했다.(1312a39)' 


4. 노자 사상 = 제국주의 사상(?)


 기본적으로 이 논의의 시작은 '왕=군주'라고 해석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앞서 책의 내용으로 볼때 왕을 군주로 해석하고 이로부터 국가가 도출된 것으로부터 '제국주의' 개념이 나왔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여기에서 출발점을 달리해서 <노자>를 살펴보자.


<도덕경 제3장>


爲無爲 위무위

 

則無不治 즉무불치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노자 사상을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서처럼 경제학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해석은 '무위= 보이지 않는 손'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장의 질서에 맡기도록 하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내용은 '무위'사상과 의미면에서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이 최선을 다해 자기 자본을 본국 노동의 유지에 사용하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동을 이끈다면, 각 개인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연간수입이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된다. 사실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공공의 이익(public interest)을 증진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고, 공공의 이익을 그가 얼마나 촉진하는지도 모른다. 외국 노동보다 본국 노동의 유지를 선호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안전(security)을 위해서고, 노동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그 노동을 이끈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gain)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an invisible hand)에 이끌려서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p552)'


 추가적으로, 최근 신자유주의자들이 규제철폐를 외치며 '보이지 않는 손'을 강조하는데, 이는 <국부론>의 전제가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임을 외면하는 논리다. <도덕감정론>에서 애담 스미스 Adam Smith, 1723 ~ 1790)는 타인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는 인간을 전제하고, 이러한 인간의 감정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경제행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이 남용되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利己的  : selfish)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天性 :nature)에는 분명히 행동원리(principles)가 존재한다. 이 행동원리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행운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기 그 행운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행운을 얻은 타인의 행복이 자기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연민(憐憫 : pity)이나 동정심(同情心 : compassion)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드는 종류의 감정이다.(p3)


이렇게 본다면 '도(道)'를 통해 체제와 권위를 부여하기 보다는, 선(善)하다(또는 동점심이 있다)는 인간의 본성(本性)믿고, 일체의 간섭을 배격하자는 주장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다시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로 돌아와서 '노자 사상'에서 '제국주의'를 끌어낸 관점은 충분히 의미있고 즐거운 지적 과정이었지만, 전체적인 흐름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도덕경> 42장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자연질서에서 국가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되는 이 부문에 대한 설명은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 ~ 1981)의 <老子 : 빛으로 쓴 얼의 노래>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자> 42장에 해당되는 한 구절의 설명을 보자.

 

'萬物負陰而抱陽 만물부음이포양. 거의 모든 생물들은 향일성(向一性)을 지니고 있다. 짐승은 암놈이 숫놈을 지고 숫놈이 암놈을 안는다. 이 세상은 거의 모든 것이 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리초프 카프라는 서양 문화는 양(陽)의 특성이 음의 특성을 월등히 능가하는 문화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에는 양이 극에 이르면 음으로 전환되고 음이 극에 이르면 양으로 전환한다고 하였다. 스티븐 호킹이 말한 특이점(特異點)도 양이 음으로 변하고 음이 양으로 변하는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의 법칙이 인연(因緣)의 법칙이다. 토인비의 도전 응전의 법칙이나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도 같은 상대성의 법칙을 말한 것이다.(p222)' : 페이지수는 전판(前版)


 류영모의 <노자>에서도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종합적인 관점에서 <도덕경>을 조망하고 있기에,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 비해 종합적인 해석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책에서 설명된 42장의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해당 장의 구조를 살펴보자. 요약하면 편집오류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은 의미상으로는 연결이 안된다. 이것은 이곳만이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거나 장(章)의 나뉨이 잘못된 곳이 여러 곳 있다. <노자>는 몇번인가 개정증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p223)'


 이처럼, 연결고리가 끊어진다고 한다면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의 논리는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타격을 받게 된다고 생각된다. 이제 마무리를 해보자.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서 노자편은 이처럼 노자 사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저자의 또다른 저작 <철학 VS 철학>에서 나오는 많은 철학자들이 거의 한 번이상은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노자 사상을 음미하는 맛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는 이처럼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논리전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혹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라 생각된다는 견해를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끝낸다.


PS. 쓰다 보니 리뷰 페이퍼가 아니라 단편소설을 써버렸네요. ㅜㅜ 귀한 시간내서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남은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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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23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글은 알라딘에서 상 줘야 됩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알라딘.

겨울호랑이 2017-09-23 16:32   좋아요 0 | URL
^^: syo님 끝까지 읽어주시고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yo 2017-09-23 17:39   좋아요 1 | URL
감사할 사람과 감사받을 사람이 바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09-23 17:44   좋아요 0 | URL
^^: 이웃분들이 읽어주셔야 저도 글을 올리지요 ㅋ 그래서 이웃분들께 감사하게 되네요^^:

북다이제스터 2017-09-23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철학자의 말씀인지 퍼뜩 기억나지 않지만, 세상은 ‘해석된 것의 해석’이란 말이 문뜩 떠오릅니다. ^^

겨울호랑이 2017-09-23 20:03   좋아요 0 | URL
북다이제스터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끊임없이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보다 보편적인/ 타당한 지식의 DNA‘가 축적, 계승,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7-09-24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자를 읽으려고 했는데, 마침 참고할 수 있는 글이 나왔군요. ^^

겨울호랑이 2017-09-24 10:24   좋아요 0 | URL
^^: cyrus 님께 참고가 되어 좋네요. 다만 는강신주의 저서의독창적 시각에 대한 글의 내용이 많아서 이점 역시 같이 고려하셔야할 것 같습니다.
 

허(虛)라는 개념은 '비움', '상상'의 뜻으로 사용된다. 동서양 문화에서는 '허'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이번 페이퍼에서 살펴보자.


1. 도덕경(道德經)의 허(虛)


<노자와 21세기>에서 강조되는 개념 중 하나는 '허(虛)'다. 이와 관련된 '허'의 개념은<도덕경> 4장에 나타난다. 여기서 '허'는 비움이며, 가능성의 형태로 구현된다. 저자인 김용옥 교수는 이러한 면에서 노자(老子, BC 604 ~ BC 537)가 '채우기'보다는 '비움'을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道沖, 而用之或不盈' <道德經> 第 四 章


도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어 써도 고갈되지 않는다.'(p181)


'노자는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를 유위(有爲)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虛)의 상실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방향의 행위, 즉 빔을 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無爲)라고 부르는 것이다.(p189)... (虛 Emptiness)라는 것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는 기본적 기능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가능성이며, 실현되기 이전의 잠능(潛能)이며, 잠재태이다. 그것은 존재의 모든 가능태(Potentiality)인 것이다.'(p192)


[그림]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2. 수학(數學)에서의 허(虛) : 허수(虛數)


<노자와 21세기>에서 저자는 '허(虛'의 개념을 시간, 공간의 개념으로 한정짓지 않고, 시공간(時空間)을 넘어선 '가능성'의 개념으로 이를 해석하고 있다. 반면, 서양철학의 영향에 놓여있는 수학에서도 '허(虛)'의 개념은 '허수(Imaginary Numbers)' 라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허수(Imaginary Numbers)도 수(數)인가? 이는 쓸데없는 질문들이다. 과학에서 기술적 용어(technical terms)는 마치 영아에게 붙여지는 세례명처럼 임의롭게 부과된 명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명칭 자체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의미를 만들어 임의의 단어에 따로 그것을 부과하면 된다."... 허수 개념의 기원은 여러 측면에서 양수, 음수 개념의 경우와 흡사하다. 특히 세 가지의 심대한 수학 개념인 변수, 대수적 형식/일반화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정확하게 일치한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 ~ 1947)의 <화이트헤드의 수학이란 무엇인가>(p85)


 실재 존재하지 않는 수인 허수(虛數)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허수의 '역할'에 대해서는 실수의 기하학적 증명을 통해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수학명제에서 어떤 사항을 증명하고자 할 때, 임의의 점, 선 등을 확장시켜 이미 약속한 정의, 공리 등을 사용하여 증명하는 과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 유클리드(Euclid, BC 365 ? ~ BC 275?)의 <기하학 원론> 속의 명제를 통해 해당 내용을 살펴보자.


[그림] 직선, 각, 삼각형 [법칙9]


'법칙9] 어떤 직선각을 주었을 때, 그것을 이등분 하시오. 

보임] 주어진 직선각을 BAC로 나타내자. 이것을 같은 크기로 둘로 쪼개야 한다. AB에서 아무 점이라도 좋으니까 점 D를 잡아라. AD와 같은 길이가 되도록 AE를 AC에서 잡아라. 그 다음, 직선 DE를 긋고, DE를 가지고 정삼각형 DEF를 만들어라. 이제 직선 AF를 그어라. 그러면 직선 AF가 각 BAC를 같은 크기로 둘로 쪼갬을 보이겠다. AD는 AE와 길이가 같고, 변 AF는 공통이니, 두 변 DA, AF는 두 변 EA, AF와 각각 길이가 같다. 그리고 밑변 DF는 밑변 EF와 길이가 같다. 그러므로 각 DAF는 각 EAF와 크기가 같다. 그러므로 직선 AF는 각 BAC를 이등분한다.' <기하학 원론 (가)>(p16)


3. 물리학(物理學)에서의 허(虛) : 허시간(虛時間)


 '허수'의 이러한 속성의 활용은 물리학(Physics)에서도 활용된다. 물리학에서는 시간(time)을 실시간과 허시간으로 구분하여 M-이론(M- theory)를 설명하고 있다.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 ~ )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 The Universe in a Nutshell>에서 허수의 구체적 활용을 살펴보자.


'양자이론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기술하기 위해서는 허시간(虛時間, imaginary time)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허시간은 훌륭하게 정의된 수학적 개념이다. 이것은 허수(虛數)라고 불리는 것으로 측정되는 시간이다... 허수가 실세계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수학적 게임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증주의 철학의 관점에 의하면, 어느 쪽이 실재(實在)인지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수학적 모형이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우주를 기술(記述)하는지 발견하는 것이다. 허수를 포함하는 수학적 모형이 우리가 이미 관찰한 효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측정할 수는 없었지만, 그밖의 여러 가지 이유로 믿고 있던 효과들까지도 예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가상일까? 그러한 구분은 단지 우리들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p59)



[그림] 실시간(實時間)과 허시간(虛時間)


4. 동양의 허(虛)와 서양의 Imagination


 이상에서 살펴보면, 동양의 허(虛)는 가능성이며 도(道)의 근원인 반면, 서양의 허(虛, imagination)은 실재를 증명하기 위한 한 방편(方便)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허'의 개념은 동양과 서양에서 다소 다르게 사용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서양의 '허(虛)'를 '실재의 증명을 위한 여유(餘裕)'라고 본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통(通)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도덕경>의 해석은 학자에 따라 다르기에, 이러한 해석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비움' 또는 '상상' 이 가진 가능성의 이미지는 인류 공통된 원형(原形)이 아닐까. 비록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世界觀)은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동양 사상에서는 유난히도 "무(無)', '허(虛)', '공(空)'이라는 단어가 중요하게 취급된다. 동양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보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세계를 더 인정해왔다. 동양 회화의 가장 중요한 조형 요소로 여백(餘白)'을 들 수 있다. 여백의 정의는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백의 정의는 비단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문학, 음악, 서예에서도 폭넓게 찾아볼 수 있다.'(p25)


'예로부터 서양인들은 이 우주 공간이 텅 빈 허공이라고 믿어왔다. 텅 빈 공간에 별들이 떠 있는 모습이 서양인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이다. 이렇게 텅 빈 공간에 놓여져 있는 사물은 주변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사물이 독립된 하나의 개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우주가 텅 빈 허공이 아니라 "기(氣)"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다.'(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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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7-10 2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모든 가능태‘..이건 하이데거식 표현이라 봅니다. 개인적으로 서양철학의 개념을 갖고 노자 도덕경을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1인이에요. 노자는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그러니까 현존재요. 노자는 인간을 유무상생으로 파악했다고 봅니다. ‘가능태‘라는 표현으로 노자를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어떤 의도로 썼는지도 알겠지만, 좀 위험한 표현인 거 같습니다. 최직선 교수의 노자 도덕경 해석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도올의 해석보다 개인적으로 더 낫다고 생각하는 1인 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서양은 존재를 말했지, 허에 중점을 둔 경우는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아예 취급을 안 한 거 같아요. 물론 서양철학자 중 중국철학을 공부한 일부는 허에 대해 논한 학자들이 있겠지만 제가 본 책들에는 ‘허‘에 대해 비중을 두고 고찰한 학자가 없는 거 같아, 호랑이 님이 쓰신 허와 미미지네이션의 관계가 무척 신선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7-10 21:17   좋아요 1 | URL
^^: 그렇군요. 노자 「도덕경」관련한 저술이 여러 편인데 제가 아직 다른 분의 저서는 아직 읽지 못했습니다. yamoo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유념해서 최진석 교수의 책을 조만간 찾아 읽어야겠습니다. 하이데거는 그 후에 읽어야겠군요^^: yamoo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7-10 21: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허를 가능성의 잠재태로 보는 군요. 맘에 들지 않습니다. ㅠ. 자연스런 비어있음을 그냥 그대로 비어있음으로 놔두고 바라보면 안될까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7-07-10 21:26   좋아요 1 | URL
^^: 북다이제스터님의 해석 역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되면 다른 저자의 「도덕경」해석도 비교해 보겠습니다.^^:

cyrus 2017-07-10 21: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양인들은 ‘텅 빈 공간‘을 유독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지구 내부도 텅 비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거든요. ^^

겨울호랑이 2017-07-10 22:29   좋아요 1 | URL
^^: 지구 공동설인가요? 저도 들은 적 있는 것 같습니다. 서양인들은 ‘텅 빈 공간‘과 ‘임자없는 땅‘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점령하려구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07-10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존중한 것은 동양이었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존중한 것은 서양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말씀하신 것과 같이.. )

그래서 우리는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부터 이미 1살 나이를 먹는 반면에
서양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날 그 후 1년이 지나면 1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겨호 님 글 읽을 때마다 참 정성들여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하면 겨울호랑이 님과 사이러스 님이죠..

겨울호랑이 2017-07-10 22:33   좋아요 0 | URL
^^: 네 곰곰발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를 아는 것이 비판적 수용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곰곰발님처럼 일필휘지, 전광석화같은 순발력이 부족하다보니 글을 좀 미련하게 쓰게 됩니다 ㅋㅋ

2017-07-10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10 2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oren 2017-07-10 2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로 비슷한 개념 같아도 동양과 서양은 ‘언어 자체‘가 달라서 서로 비교하기가 매우 어려운 개념들이 많다는 생각도 듭니다. 베르그송이 말한 ‘incommensurable(통약불가능한)‘ 측면이 있는 셈이지요. 쇼펜하우어도 이런 점을 재미있게 지적한 적이 있었고요. ‘우주의 비밀‘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쇼펜하우어는 ‘물질‘을 아무리 쪼개더라도 그 속에 ‘또다른 우주‘가 나타날 거라고 ‘이미 오래 전에‘ 훤히 내다볼 정도였지요. 『호두껍질 속의 우주』에서 인용해 주신 한 대목(‘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가상일까‘)을 보니 쇼펜하우어가 유난히 강조했던 ‘마야의 베일‘도 떠오릅니다. 겨울호랑이 님의 글 덕분에 제가 방금까지 찾아 읽었던 몇 대목들을 (댓글창을 도배하는 듯해서 죄송하지만, 염치불구하고) 덧붙여 봅니다.

* * *

˝중국에서는 마호메트 교도도 기독교도도 신성의 이론적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중국어 낱말도 찾지 못했다. ······ 물질로부터 독립적이고 물질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 영혼, 정신이라는 단어들은 중국어에는 전혀 없다. ······ 이런 사유 과정은 언어 자체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창세기의 첫 구절을 광범위하게 고쳐 쓰지 않는다면 실제로 중국어가 되도록 중국어로 번역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스톤턴 경은 1848년에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서 신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출판했다.

- 쇼펜하우어,『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 * *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 *

그 이상 ‘왜‘ 하고 물을 수 없는 관계

과학 일반의 ‘내용‘을 말한다면, 그것은 본래 언제나 충족 이유율에 따라, 또 이 원리에 의해 비로소 타당하고 의미를 갖는 이유 탐구를 길잡이로 한, 세계의 현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다. 이를 표시하는 것이 ‘설명‘이다. 따라서 설명은 두 개의 표상을 이 표상들이 속해 있는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충족 이유율 형태의 상호 관계에서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보여 줄 수는 없다. 설명이 여기까지 진행되면 그 이상은 ‘왜‘라고 질문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 표시된 관계는 오직 그것뿐이며, 그 밖에는 표상할 수 없는 것, 즉 그 관계는 모든 인식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왜 2 2=4인가 하고 질문하지 않으며, 왜 삼각형의 각이 같으면 변도 같은가 하고 묻지 않고, 또 왜 전제가 옳으면 결론도 옳은가 하고 묻지도 않는다. 그 이상 ‘왜‘ 하고 물을 수 없는 관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설명은 모두 어떤 숨겨진 성질을 상정하여 거기에 머무른다. 그런데 근원적인 자연의 힘은 모두 이런 종류의 숨겨진 성질이다. 어떠한 자연과학적인 설명도 결국은 이러한 자연의 힘, 즉 어떤 컴컴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자연과학적 설명은 한 인간의 내적 본질과 마찬가지로 돌의 내적 본질에까지도 설명을 가하지 말고 방치해 두어야 한다. 돌이 나타내는 중력, 응집력, 화학적 성질 등을 해명할 수도 없고 또 인간의 인식이나 행동을 해명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중력은 하나의 숨겨진 성질이다. 왜냐하면 중력은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며, 인식의 형식에서 하나의 필연적인 것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겨울호랑이 2017-07-10 22:59   좋아요 1 | URL
^^: 언어적 차이 또는 문화 차이는 서로 다른 문명이 교류할 때 변화될 수 밖에 없는듯합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 그 예라 생각되네요. oren님께서 일전에 쇼펜하우어와 충족이유율에 대해 알려주셨는데, 이렇게 연결되기도 하는군요! 후에 쇼펜하우어를 깊이있게 읽을 때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07-10 23:01   좋아요 2 | URL
쇼펜하우어의 충족이유율에 반대합니다.
세상은 목적론이 아닌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

oren 2017-07-10 23: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다이제스터 님께서 무슨 뜻으로 말씀하시는지 저로선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군요. 쇼펜하우어가 쓴『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해서』에서는 도리어 ‘철학이 신학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다른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증명‘에 잘못 사용했던 ‘충족이유율‘을 바로잡고 있기도 하고요. ‘알라딘 책소개 글 일부‘만 덧붙이겠습니다.
* * *
‘충족이유율’은 인식이나 사고, 사물 등에는 언제나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법칙을 뜻하는 것으로, 모든 판단이나 현상에 대해 “왜”라고 물을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철학사에서 ‘인식이유’와 ‘원인’이 혼동되어 왔으며, 특히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에게 이 혼동은 의도적인 면이 있다고 비판한다. 즉 데카르트는 ‘원인’을 제시해야 할 곳에 ‘인식이유’를 밀어 넣음으로써 신의 현존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길을 닦았고, 스피노자는 이 혼동을 범신론의 기초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진 것은 칸트가 “모든 명제는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인식의 논리적 원칙과 “모든 사물은 그것의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선험적 원칙을 구별하면서였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충족이유율을 생성, 인식, 존재, 행위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북다이제스터 2017-07-18 20:15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답글을 넘 늦게 보고 답변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쇼펜하우어의 충족이유율이 인류사에 큰 공헌을 한 점을 인정합니다. 충족이유율이 최선 아니지만, 그것 없었다면 과학 발전이 극히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경도되면 모든 것이 지향점과 취지, 목적을 가질 때만 원인을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제게 해석되어 그의 충족이유율에 반대합니다. 한마디로 끼워맞추기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야상곡(夜想曲) 2017-07-10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자병법이라는 책을 강추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7-11 06:30   좋아요 0 | URL
야상곡님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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