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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행복(幸福) :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만족함. 또는 그러한 상태. [출처 : 네이버 사전]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 ~ 1970)의 <행복의 정복 The Conquest of Happiness>는 행복(幸福)에 관한 에세이다. 러셀은 이 책에서 불행(不幸)과 행복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서 행복한 사람에 대해 정의한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는 사람이자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통해,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사랑과 관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사람이다.(p234)'


  러셀이 말한 불행의 원인은 경쟁, 권태와 자극,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다. 반면, 행복의 원인은 행복의 원인인 열의,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등이 제시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독자적으로 개인의 불행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우리의 감정을 구성한다. 예를 들면, 지나친 경쟁은 개인의 피로를 유발하고, 다른 이들의 성공을 질투하면서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고 자극을 추구하게 만드는 등 서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너무나 유명한 톨스토이(Lev Tolstoy, 1828 ~ 1910)의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의 첫 문장처럼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나름나름의 문제는 무엇이 있을까를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철학자인 러셀은 서두에서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의 범위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행복으로 한정한다. 일생 한두 번 정도 발생하는 극단적인 경우에 행복과 불행을 말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말일 것이다. 

 

 '이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나는 극단적인 외부적 불행의 요인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한정시키고자 한다. 일용할 양식이나 주택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수입이 있고, 일상적인 활동에 지장이 없을 만큼 충분히 건강한 사람들을 전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식을 모두 잃었다든가 사회적 위신을 잃었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불행을 고려하지 않기로 하겠다... 나의 목적은 문명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다(p14)'


1. 경쟁 Competition

 '고통의 뿌리는 경쟁에서의 성공을 행복의 주요한 원천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는데서 돋아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성공은 행복의 한 요소에 불과하며, 따라서 성공하기 위해서 다른 요소들을 모두 희생한다면 그 성공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이다.(p50)... 인생의 주요한 목표로 간주되는 경쟁은 너무 잔인하고도 집요하며, 몸과 마음을 지나치게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삶의 기반으로 삼기 힘들다.(p56)'


2. 권태와 자극 Boredom and Excitement

 '권태의 본질 중 하나는 현재의 상태와 보다 더 유쾌한 다른 상태를 비교하는데 있다... 권태는 본질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욕망이 좌절된 것을 뜻한다. 그것은 권태의 희생자로 하여금 그 날을 다른 날로부터 구별하게 하는 사건이면 충분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권태의 반대는 쾌락이 아니라 자극이다.(p58)'


 3. 피로 Fatigue

 '오늘날처럼 발달된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피로는 신경의 피로이다.(p7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걱정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때에도 그들은 걱정거리에 매달려 끊임없이 고민한다.(p72)... 대부분의 걱정은 그 문제가 대단치 않은 것임을 깨달으면 감소될 수 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며, 우리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것 또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p74)'


 4. 질투 Envy

 '평범한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 질투는 가장 불행할 것이다. 질투가 심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불행하게 되기를 바라고, 또 처벌을 받을 염려가 없을 때에는 언제나 그렇게 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자기 자신에게마저 불행을 초래한다.(p85)'


5. 죄의식 The sense of sin

 '인간이 자신의 합리적인 도덕률을 어겼을 때라 할지라도, 과연 죄의식이 보다 나은 생활 방식에 도달하는 최선의 방법일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나는 회의를 느낀다. 죄의식은 비천한 것, 자존심이 결여된 것이다.(p104)... 사실상 죄의식은 바람직한 생활이 되기는 커녕 그 반대이다. 죄의식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준다.(p105)


6. 피해망상 Persecution Mania

 '피해망상은 아주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공인된 형태의 정신이상이다. 상상적인 박해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각 때문에 그들은 종종 폭력을 행사하게 되고, 그 결과 자유를 속박당하게 된다.(p109)'


7. 여론에 대한 공포 Fear of Public Opinion

'대부분의 경우 불필요한 체면이 필요 이상으로 문제를 악화시킨다. 여론은 여론에 무관심한 사람들보다는 여론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난폭하다.(p128)... 여론을 경멸한다는 것은 비록 전도된 방식이기는 할지라도 아직 여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러나 정말로 여론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힘이며 행복의 원천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사회적 자유의 원천을 상실하고 있으며, 획일적인 것만이 바람직한 것이 되었다.(p133)'


 <행복의 정복>은 불행과 행복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우리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유익한 책이다. 다른 한 편으로 철학자인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 속에서 우리가 깨닫지 못한 일상의 의미를 찾아가면서 우리 삶의 방향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다만, 저자와는 생각을 달리 하는 지점이 생기는데 다음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행복'은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림] 대상화된 행복과 우리 마음의 상태(by 겨울호랑이) 


 행복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가치, 정복의 대상이라면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불행한 상태에 놓여 영원히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영원한 갈증과 배고픔으로 저승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 신화의 탄탈로스(Tantalos)와 같은 존재의 모습을 <행복의 정복>이라는 짧은 문장에서 느끼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은 타자(他者)화되는 대상이 아닌 우리 자신의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타자화 된 '행복'은 정복(conquest)의 대상이 되어 죽을 때까지 목적이 될 것이다.( the conquest of happiness) 이와는 반대로, '행복'이 단순히 상태의 표현이라면 마음의 변화만으로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I am unhappy에서 I am happy가 되는 것처럼. 행복은 우리 밖 어딘가에 쫓아가야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상태임을 다시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그림] 탄탈로스 (출처 : http://www.arkeorehberim.com/2015/09/tantalosun-cezasn-kime-vermek-isterdiniz.html?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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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8-02-03 15: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고 싶은 책들은 겨울호랑이님께서 죄다 읽으셨더군요.흐흐~러셀도 좋아하는 철학자이고 탄탈로스 이야기도 요즘 빈번히 접하고 있어요.
안나까레리나의 문장으로 리뷰를 구성하시는 글~ 총균쇠가 떠오르네요~^^

겨울호랑이 2018-02-03 15:19   좋아요 2 | URL
^^: 저 역시 북프리쿠키님께서 읽으신 책 목록 속에서 제가 읽어야할 책들을 발견하게 되니 서로 돕고 사는 좋은 이웃이 되겠군요. (아직 괴테까지 게을러 손이 못가고 있어요.ㅋ) 아는 문장이 몇 문장 없어서 최대한 재활용하고 있습니다. <총, 균, 쇠>는 오래 전 글인데, 북프리쿠키님, 제 오랜 글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18-02-03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의 수치는 계속 고정인가요?
겨울호랑이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2-03 15:52   좋아요 2 | URL
^^: 주관적인 행복의 상태를 수직선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변화로 표현하기는 애매한 구석이 있어서요 ㅋ 바람이 세차게 부네요. 서니데이님도 여유로운 주말 보내세요!^^:

2018-02-03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3 2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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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2-03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이 정복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 된다는 말 정말 공감가네요. 한때 삶의 목적이 행복일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있었어요. 주관적인 영역이다보니 내가 행복해도 타자가 그로인해 불행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목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그러니 행복엔 윤리적인 전제가 항상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8-02-03 20:05   좋아요 1 | URL
조그만 메모수첩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살다보니 ‘행복하더라‘는 말은 가능해도 행복이 삶의 목적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구나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고 행복감을 느낀다면 정말 잘못된 일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행복의 의미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18-02-03 2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3 2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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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3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4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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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4 0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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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노의 원인 : 전쟁의 시작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제1권 1 ~ 5)'


<일리아스>를 관통하는 전체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했는가? 아가멤논에게 아킬레우스가 '브리세이스'를 빼았겼기 때문이었으며,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브리세이스'를 빼았은 이유는 아폴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아폴론은 왜 분노했는가? 이는 헬라스 연합군들이 아폴론의 사제(司祭)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헬라스 연합군들은 왜 모였는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트로이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그것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아내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의 분노로 수많은 아카이이오이 족이 뭉쳤기 때문이며, 이들과 함께 한 것은 '황금 사과'를 빼앗겨 분노에 불타는 두 여신 헤라와 아테네였다. 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원인인 황금 사과는 인간 펠레우스와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不和)의 여신 에리스의 분노 때문이었고, 펠레우스와 테티스가 아킬레우스의 부모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결국 <일리아스>와 트로이 전쟁을 관통하는 주제가 '분노'라는 사실과 함께 아킬레우스 자신이 트로이 전쟁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2. 분노의 결과 : 파멸


 브리세이스를 잃었다는 분노로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나가지 않게 되고, 그를 대신하여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춰 입고 전장에 나간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의 손에 죽음을 맞이 한다. 브리세이스 상실로 인한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의 결과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결과를 맺는다. 파르토클로스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킬레우스는 다시 한 번 깊게 상심에 빠진다.


'이렇게 말하자 슬픔의 먹구름이 아킬레우스를 덮어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은 먼지를 움켜쥐더니 머리에 뿌려 고운 얼굴을 더렵혔고 그의 향기로운 옷에도 검은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신은 먼지 속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제18권 22 ~ 25)'


 <일리아스> 제 22권에서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헥토르의 목숨을 가져오지만, 나중에 그 역시 파리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두 번째 분노의 결과를 우리는 <오뒷세우스>에서 확인하게 된다. 


'"나(오뒤세우스)는 아직도 아카이오이족의 땅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내 나라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고통만 당하고 있소. 하나 그대로 말하면 아킬레우스여, 어느 누구도 예전 그대처럼 행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러니 아킬레우스여,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는 지체없이 이런 말로 대답했소.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런 오뒷세우스여!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제11권 481 ~ 491)'


3. 분노(화)를 다루는 효과적인 방법


'분노'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러한 분노(화)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분노에 대해서는 여러 글들이 있지만,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4 ~ AD 65)의 <화에 대하여 On Anger>의 글을 옮겨본다.


'우리는 이 악덕(惡德)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의 사고를 깨끗이 정화하고 이 악덕의 뿌리를 철저히 뽑아버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흔적이라도 남겨두면 어디든지 들러 붙을 곳이 있을 때 다시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는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옪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적과의 반목을 선언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허비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고결한 기쁨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날들을 다른 이들을 괴롭히는 데 바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가?" 네가 진정으로 관심을 두는 일들을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네겐 헛되이 낭비할 시간이 없다.(p245)'


세네카는 '화'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악을 일상 생활로부터  제거할 것은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과연 '제거'만이 화를 다루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을까? 화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독일의 가톨릭 수도자 안셀름 그륀(Anselm Grun, 1945 ~ )신부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눈을 감는 행동입니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잘못이라는 더러움을 희생양에게 덮어씌우고, 자신은 더러움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도 결코 더러움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이의 잘못을 진지하게 살펴보면서, 자신 안에도 비슷한 경향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실을 고백하고,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 약함을 인정하며, 다른이 들을 판단하지 않는 겸손과 용기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p44)


개인적으로 효과적으로 분노를 조절하는 것은 이를 제거하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거울'로 생각하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 아닐까. 더 나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리아스>의 파멸적 결과를 통해 지금의 작은 분노가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음을 마음에 담아두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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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1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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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1 13: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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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31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철학이 분노를 당장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분노를 하고 난 후에 철학을 생각하면서 ‘왜 내가 화를 냈을까?’, ‘화를 낼만한 상황일까?’ 정도로 성찰할 수 있어요. ^^

겨울호랑이 2018-01-31 13:38   좋아요 2 | URL
^^: cyrus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노의 원인을 안다해서 화를 안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노의 원인과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분노의 정도와 빈도를 조절하는 것 은 우리가 평생해야할 일일 것 같네요^^:

깐도리 2018-01-3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요.. 그리스어 원전을 그대로 가져왔다니...

겨울호랑이 2018-01-31 14:21   좋아요 0 | URL
^^: 천병희 교수님 번역본은 편하게 읽히고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어 많은 분들이 읽고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2018-01-3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1 14: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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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05: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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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2 10: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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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2-02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참 신기해요. 같은 사람인데 그리스 사람은 그렇게 독특한 생각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게... 다른 곳도 뛰어났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거나 그곳에 포커스가 맞춰졌기 때문만은 아닌 거 같고...

어릴 땐 분뇨로 웃고 장난하다가 커서는 분노로 분뇨로 세상 더 어지럽히지 말고 곱게 살다 가고 싶어요^^;

겨울호랑이 2018-02-02 15:27   좋아요 1 | URL
^^: 우리와 다른 그리스 문명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다른 그리스 문명에 기원을 둔 현대 서구 문명과 동양 전통 문화와의 충돌을 우리가 겪고 있기에 우리 사회의 혼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네요. AgalmA님의 언어 유희에 감탄하면서, 저는 그냥 분노하지 않을래요.ㅋ

서니데이 2018-02-02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다시 읽으면 느낌이 새로울 것 같은데, 다시 읽기에는 분량이 미리 부담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따뜻한 금요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2-02 15:28   좋아요 1 | URL
^^: 분량에 비해 재미도 없고, 양도 많은 것에 동감합니다. 저 역시 이 책들을 수십 번씩 읽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네요.ㅋ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금요일 오후 되세요!

배워가기 2018-02-03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명 두 책에서 분노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묘사되고, 실제로 파멸이라는 결론을 맺게 되지만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는 다 이유가 있고 그것을 어느정도 표현했을 때의 순기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ㅎㅎ 아킬레우스가 적당한 선을 지키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더라면 글의 전개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궁금해 지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2-03 16:49   좋아요 1 | URL
^^: 배워가기님 말씀처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보다 배출했을 때 긍정적인 면도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적정한 분노 역시 우리 삶에 필요하겠지요. 다만, 자신마저 태워버릴 정도의 격렬한 분노는 자신과 주변마저 태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일리아스>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배워가기님 말씀처럼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힘과 용기에 어울리는 감정표현 능력이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작품으로 <일리아스>의 매력은 떨어지지 않았을까도 상상해 봅니다.
 

1. 칼레츠키의 법칙: 노동자는 번 만큼 쓰고, 자본가는 쓴 만큼 번다

칼레츠키 법칙의 전반부는 가계가 모든 소득을 지출하며 저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제의 후반부는 기업의 투자 지출이 기업의 이윤을 창출한다는 말과 같으며, 이러한 원리는 개별 기업이 아닌 전체 기업 차원에서 적용된다. 이에 따라 한 기업의 투자 지출은 다른 기업의 수익을 형성한다... 칼레츠키의 법칙은 임금 비용 감축 전략이 필연적으로 기업에 유익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실제 임금 하락으로 인한 가계소비의 감소는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 제고가 낳은 무역수지의 잠재적 개선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p85)

최저임금 인상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칼레츠키 법칙은 분명 의미있는 관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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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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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9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30 0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페이퍼는 얼마전 작성한 <도덕감정론> 리뷰에 중 이웃분이신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답(答)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입니다. 


1. <도덕감정론>의 원리와 <국부론>의 원리는 상호 모순적인가? 


역자에 따르면 <도덕감정론>에서 제기한 동감의 원리와 <국부론>의 원리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도덕감정론>에서는 상호동감하는 개인과 이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의 질서 원리를 말하고 있는데, 타인을 억압하거나 강제하려는 인간의 감정은 자신과 타인(他人)의 동감에 의해 조절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인과 교환할 때 이익(interest)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국부론 國富論>을 통해 답이 이루어진다. 


 '<도덕감정론>에서 전개한 그의 "동감(同感)의 원리"와 <국부론>에서 전개한 그의 "교환(交換)의 원리"= "경쟁(競爭)의 원리" = "시장(市場)의 원리"가 실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두 원리가 모두 중세적 속박에서 인간의 이성(理性)뿐 아니라 본능(本能)까지 해방된 사회에서 이기심(利己心)이 사회적 선(즉 公益)이 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 내지 조건임을 밝힌 것이라는 사실이다. 두 원리가 동일한 논리구조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양자가 공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하는 자연적 성향에서 출발함을 의미한다. 동감의 원리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간은 상호동감(mutual sympathy) 속에서 큰 희열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교환의 원리는 인간의 본성 속에는 거래, 교역(交易), 교환하려는 성향 내지 충동이 내재하고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스미스는 교환성향은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발견되는 성향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원인 모두 인간의 이기적 충동을 사회적 선(善)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p690)' 


그렇다면, 인간과 사회는 동감의 원리로 작동하는데 왜 시장(市場)의 원리는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가? 그것은 상대에게 이익을 제시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구절이라 영어로도 써본다.


'인간은 항상 다른 동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단지 그들의 선심에만 기대해서는 그 도움을 얻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그들 자신의 자애심(自愛心 : self-love)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휘도록 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가 그들에게 해주기를 요구하는 일을 그들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들의 도움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주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게 될 것이오." 이것이 이러한 거래에 담겨진 의미다. (p18)...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비심에 호소하지 않고, 그들의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유리함을 말한다.(p19)


 'But man has almost constant occasion for the help of his brethren, and it is in vain for him to expect it from their benevolence only. He will be more likely to prevail if he can interest their self-love in his favour, and shew them that it is for their own advantage to do for him what he requires of them. Whoever offers to another a bargain of any kind, proposes to do this. Give me that which I want, and you shall have this which you want, is the meaning of every such offer ; and it is in this manner that we obtain from one another the far greater part of those good offices which we stand in need of.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We address ourselves, not to their  humanity but to their self-love, and never talk to them of our own necessities but of  their advantages.(p22)'


 바로 이 구절을 통해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연결점을 가지면서, 아담 스미스의 철학체계에서 전자(前者)는 법학의 원리로, 후자는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정리된다. 


'이상과 같이 인간의 이기심, 자애심(自愛心)은 동감(同感)의 원리에 의해 인간 내부에서 견제를 받으며, 동시에 교환의 원리, 특히 경쟁적 교환의 원리에 의해 외부적으로도 공익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되도록 인도되는 것이다.(p691)' -역자 해제 中 -


2.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도덕감정론>


진화생물학자인 매트 리들리(Matt Ridley, 1958 ~ )은 그의 저서 <이타적 유전자 The Origins of Virtue>에서 <도덕감정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애덤 스미스는 첫 저작(<도덕감정론>)에서 개인들이 집단의 이익에 관해 어떤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갖고 있다면 그들은 집단의 이익에 역행해 행동하는 구성원들의 활동을 억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경꾼들이 반사회적인 행동을 응징하기 위해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번째 저작(<국부론>)에서 사회란 개인들에 의해 신중하게 보호되는 공공재가 아니라 개인들 각자의 사리 추구에 따른 부작용에 가깝다는 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전의 주장을 번복한 것처럼 보인다.(p208)... 덕이 있다는 것은 덕이 있는 다른 사람과 힘을 합쳐 상호 이익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협동가들이 일단 사회의 나머지 부분들로부터 분리되어 응집하기 시작하면 전혀 새로운 진화의 동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동력은 개인들이 아니라 집단들을 서로 투쟁하게 한다.(p209)'


 <이타적 유전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책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하고 넘어가자. 원서 제목과 전혀 동떨어진 책 제목은 아마도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 )의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를 의식한 것 같다. 제목만 놓고 보면 <이기적 유전자>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그런것도 아니다. 오히려, 같은 전제에서 출발하는데 그 전제는 '이기적 유전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력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전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30주년 기념판 서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에 또 하나의 훌륭한 대안은 "협력적 유전자 The cooperative Gene"일 것이다. 이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정반대 의미로 들리지만, 이책은 이기적인 유전자들 사이의 협동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한다. 오히려 각각의 유전자는 유전자 풀(Pool 한 종 내에서 유성 생식으로 서로 섞이게 될 유전자 세트들) 내에 있는 다른 유전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그 자신의 이기적인 계획을 이행하는 것이다.(p11)'


 <이기적 유전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유전자들의 협력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면에서 영어 제목인 'The Origins of Virtue'가 책 내용과 잘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유전자>로 제목을 지은 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명성에 기대려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굳이 번역한다면, '인간 덕목의 기원', 또는 '도덕성의 기원' 정도가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생물학의 탈을 쓴 인간 본성(本性)에 대한 내용을 다룬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회 질서의 뿌리는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완전한 조화와 미덕의 사회를 실현할 본능적인 능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실현할 능력은 존재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도는 이 같은 본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제도이다. 우리는 평등한 개인 간의 사회적, 물질적 거래를 조장해야 한다. 신뢰는 거래를 통해 획득되고, 또한 신뢰는 미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p366)'


3. 이기(利己)적 유전자 -> 이타(利他)적 행동 -> 이타적 개체(인간) -> (경제적으로) 이기적 행동 ->이기적 사회(?)


 이상에서처럼 <도덕감정론>에서는 인간 본성의 전제와 사회 법칙을 전제하고, <국부론>에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켜준다는 면에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내용은 모순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기에 추가로 언급한 생물학 서적의 내용도 추가하여 논의를 유전자(Gene) 단계로까지 확대 시켜 네 권의 책의 내용을 조합하면 다음과 같은 거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유전형질(形質)을 보존하려는 유전자들의 성향은 이타적인 협동을 유발하게 된다. 개별 개체가 유전자들의 조합이라고 했을 때, 개체는 유전자들의 협동으로 인해 이타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다만, 경제적인 부문에서는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의 이기심을 자극하게 되고, 이러한 이기심이 강조됨에 따라 물질과 경제가 강조되는 21세기의 우리 사회는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다...


다소 프랑켄슈타인같은 결론에 다다랐지만, 추가적으로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성이 높은 개인의 행동이,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사회를 '도덕적인 사회'로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고 이번 페이퍼를 마치도록 하자.


ps. 북다이제스터님께서 제기해주신 물음에 잘 답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추가적인 내용은 말씀드린 대로 <국부론>을 읽은 후 정리할 계획입니다. 할 일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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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겨울호랑이님 페이퍼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연결고리...] 참고 자료) 사회와 생물에 대해서
    from 공음미문 2018-01-22 20:36 
    상상하기 어려운 진기한 생물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괴로운 인간 동물 얘기가 더 많아서 아쉽기도 유익하기도^^;;
 
 
AgalmA 2018-01-22 17: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환성향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동물 세계에도 충분히 있으며 그들도 생각과 감정을 바탕으로 그러하니까요.

동감과 이익심리를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끼워맞추는 도식성이 되는 거 아닌가 좀 우려스럽네요.
극단적인 예로 일베나 태극기 집회 같은 사회적 무리가 국정원 지원이나 자기 세를 늘리려는 이익 심리로만 모이는 게 아니니까요. 선함을 추구하는 본성 반대되는 성질도 충분히 동감을 바탕으로 해서 모입니다.
즉 동감과 이익심리라는 게 그렇게 칼로 나누듯이 갈라지는 게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이가 죽게 됐을 때 자신은 죽으면서까지 구하는 게 과연 이타적이기만 할까요. 종을 지키려는 유전적 본능, 학습으로 인해 가지게 된 도덕심, 공명심 등등 저는 아주 많은 것들이 혼합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 얘기 나올 때마다 누차 나오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소수의 가치를 위해 다수를 희생할 것인가. 소수의 가치보다 다수를 더 우선할 것인가에서 이기심과 이타심에 대한 견해가 사람에 따라 혼재 양상이죠.
유전자론을 언급하셔서 그나마 중재가 되는 것 같긴 한데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바탕으로 한 동감의 원리-교환의 이익 심리 구분은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분법성, 개념의 독단에서 철학의 문제성을 늘 느끼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8-01-22 21:49   좋아요 2 | URL
^^: 교환성향과 관련해서 ‘동물도 교환성향이 있다‘는 AgalmA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일례로 ‘상어-빨판상어‘, ‘악어-악어새‘의 공생관계등이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지요. 그런 동물들의 행동을 심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아보입니다. 이 경우 유전자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라 생각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잘 모르는 아이를 죽음을 무릅쓰고 구하는 이의 행동을 유전자의 작용으로만 설명하려는 것처럼 모든 것을 ‘유전자의 작용‘으로만 단일하게 바라보는 것 또한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나와 다른 이의 유전적 형질이 얼마나 유사한지 모르는 상태에서, ‘나‘라는 개체 내 주도권을 행사하는 유전자가 ‘나의 죽음‘보다 ‘아이의 삶‘이 주도적 유전자에게 유리한 상황인지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도 제기될 수 있구요. 그런 면에서 인간의 행동은 문화적, 생물학적 여러 특질이 복합적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이번 페이퍼에서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언급한 것은 이 부분이 절대진리라 생각되어서가 아니라, 아담 스미스의 철학체계인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사이의 ‘약한 연결 고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거의 200여년 전에 씌여진 책이니만큼 현대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비판할 부분 이 많겠지요...

2018-01-23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3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4 0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4 0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18-01-25 12:20   좋아요 1 | URL
네.. 극과 극은 통한다.. 정치적으로는 극좌에서 극우로 이어지는 섬세한 독재가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날씨가 아주 춥네요.. 살이 없는 신체 부위들은 극단적인 고통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은 무슨 죄인지 겨울만 되면..ㅎㅎ

2018-01-23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1-24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딴 데 정신 팔려 있느라 책과 북플 멀리하여 이제야 먼 댓글 봤습니다. ㅠ
공감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과 공감을 배제한 개인의 이기주의와 합리성이 공존할 수 있는지 제겐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긴 글로 화답해 주셔서 넘넘 감사합니다. ^^
하여튼, 요즘 넘 먹고살기 힘든 것 같습니다. ㅠㅠ

겨울호랑이 2018-01-24 22:59   좋아요 1 | URL
많이 바쁘셨군요.. 추운 날 건강 조심하시며 하루 잘 마무리 하세요^^:. 북다이제스터님 감사합니다.

2018-01-26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26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금모자 2018-02-02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의 두 주저가 모순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을 산업혁명 이후의 자본주의의 틀에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에 대해 말할 때는 ‘공감‘이라는 큰 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이기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식입니다. 이런 이해의 틀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본주의에서의 소외나 착취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가 예를 들 때도 공장주와 노동자가 아니라 소상인이나 소공업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지요.

겨울호랑이 2018-02-02 20:2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황금모자님 말씀처럼 현대 자본주의의 구조가 아닌 산업혁명 이전 시기의 사회구조를 먼저 염두에 두지 않으면 ‘공감‘에 기반한 아담 스미스 사상이 오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상이 시대의 산물임을 항상 기억해야할 것 같네요. 황금모자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8-04-20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0 1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Visual Intelligence : Sharpen Your Perception, Change Your Life>는 미술사가인 에이미 E. 허먼(Amy E. Herman)이 쓴 '시각'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평소 우리가 시각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고 있지 못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통해 우리는 '보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저자는 책에서 평소 우리가 '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보지 않고 있는' 상태에 자주 놓여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무주의 맹시'라고 불리우는 이러한 현상은 개인마다 관심정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1999년에 하버드의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 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 Christopher Chabris는 우리가 두 눈을 뜨고 시야에 들어온 대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것은 "무주의 맹시 inattentional blindness"라는 현상이다.(p56)'


 [사진] 고릴라 실험(출처 : http://egloos.zum.com/kusomiso/v/2505303)


 사람마다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더라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결국, 본다는 것은 '시각화된 정보를 해석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경험'의 요소가 개입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주관적인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객관적인 관찰'을 강조한다.


 '사람마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러나 이 점을 자주 잊고 오직 하나의 진실한 방법만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p71)...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향부터 학습된 편향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소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지각은 우리가 관찰하고 수집한 정보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내면의 필터라고 볼 수 있다. 지각은 실재하는 대상을 채색하거나 흐리게 만들거나 변형해서 우리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의 지각 필터는 우리가 세상에서 접한 고유한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p72)'


 결국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강조하는 것은 편견이 개입되지 않은 객관적인 정보의 수용(객관적 관찰)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성공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성공법칙으로 결론을 맺는다.


 '사실을 수집할 때는 관찰한 내용이 주관적이 아니라 객관적이 되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 차이가 작을 수 있어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말 그대로 사실과 허구의 차이다. 객관적 관찰은 경험이나 수학적 사실에 기초한다. 주관적 관찰은 가정이나 의견, 감정이나 가치관에 기초한다.(p117)'


'모든 것을 관찰하고 흡수하며 주변과 내면의 가능성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우리 자신의 삶에서 성공의 가능성을 찾을 것이다. 관찰이란 단순히 대상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정신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하면 이미 여정은 시작된 것이다.(p47)'


 <우아한 관찰주의자>는 그 과정에서 여러 미술 작품을 제시하면서, 작품을 감상할 기회도 제공한다. 미술사가인 작가의 시선을 통해 우리 일반인들이 미술작품을 볼 때 놓치기 쉬운 몇 가지 지점을 확인하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Rene Francois Ghislain Magritte, 1898 ~ 1967),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 ~ 1564),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등 여러 예술가의 작품이 제시되며 내용이 전개되기에 매우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책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책의 결론(객관적인 관찰이 중요하고, 객관적 관찰이 너의 인생을 바꿀 것이고, 너는 성공확률을 높일 수 있다)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반론을 위해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의 내용을 살펴보자.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 ~ 1753)는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을 통해 시각 능력의 제약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83. 시각 능력의 두 가지 결함


 시각 능력의 직접적인 대상을 고려하면 이 능력은 두 가지 결함 때문에 어려움에 직면하는 것으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첫째, 시각적 능력은 한정된 수의 시각적 최소량만을 한눈에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너머로 전망을 확장할 수 없다. 둘째, 우리 시각은 그 시야가 좁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혼란스럽다는 결함이 있다.(p128)'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인간의 수정체를 통해 외부 자극을 인지하는 행위다. 때문에, 육제적 제약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정보 자체가 이미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록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는 수학적으로 정량화(定量化)할 수 있는 '객관적 관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정량화 이전에 시각정보가 왜곡된다면, 객관적 관찰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설사 객관적 관찰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해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49. 엄격히 말해서 우리는 결코 동일한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물을 면민하고 정확하게 본다면 우리는 결코 동일한 대상을 보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별개이다. 보이는 것과 느껴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해도, 우리는 동일한 사물이 다양한 연장을 갖는다고 추론할 수는 없다. 참된 결과는 시각 대상과 촉각 대상이 별개의 두 사물이라는 것이다... 시각 관념의 결합은 언제나 그것과 연관되는 촉각 관념의 결합과 동일한 이름을 가지므로 그 난점이 적지 않게 증가한 것처럼 보인다. 이 난점은 필연적으로 언어 사용과 목적에서 발생한다.(p95)'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가 동일한 것을 보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정보를 인식할 때 복합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시각, 청각, 촉각으로 인지될 수 있는 대상이 다름에도 우리는 이를 혼동하게 된다. 특히, 시각과 촉각은 혼동하기 쉬우며 버클리는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원인을 '언어(言語)'에서 찾고 있다. 논리의 비약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자극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는 수집된 정보를 '언어'를 통해 풀어간다는 면에서 시각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버클리의 주장 역시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요약하면, 우리의 '본다'라는 인식 행위에서 일차적으로 신체적 제약으로 인해 제한된 정보가 수집되며, 수집된 정보를 해석하고 재생하는 과정에서도 언어 등 여러 요인에 의해서 차이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객관적 관찰은 처음부터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여기에 해석 자체가 시각, 청각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어려움은 더 커질 것이다. 결국, 객관적 관찰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주관적인 관찰'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아닐런지.


 이러한 이유로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통해 객관적 관찰에 힘쓰기보다는 내용 전개를 위해 제시된 예술 작품(회화, 조각, 사진)을 보고 작품의 감상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이 보다 뜻깊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PS. 요즘 이웃분들께서 책선물을 많이 보내주셔서 많이 행복하게 페이퍼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우아한 관찰주의자> 역시 가까이 지내는 이웃분께서 보내주셔서 기쁘게 읽었습니다. 이웃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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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20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7-12-20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 고릴라 실험 동영상 봤는데, 그때 전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7-12-20 22:37   좋아요 1 | URL
^^: 저 역시 깨닫지 못 했었습니다. 나름 집중력이 좋다고 위안을 삼았습니다만 ㅋㅋ

AgalmA 2017-12-21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관찰주의자> 역시 재밌죠^^? 생물학적으로도 우리 눈은 맹점이라는 치명적 허점이 있죠. 이걸 생각한다면 우린 늘 자신의 시각에 대해 자신하기보다 의심하고 겸손할 필요가 있죠.

겨울호랑이 2017-12-21 21:41   좋아요 1 | URL
^^: 그렇습니다. AgalmA님 말씀처럼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자신하기보다 잘못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야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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