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겨울호랑이 > 기독교(基督敎) 안의 두 교리(敎理) 이야기

얼마 전 정리한 「도올의 로마서 강해」를 읽기 2년 전 읽은 책이라고 하네요. 부족하지만, 페이퍼에 언급된 책 리뷰라 나누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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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투명성은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다. 오늘날 부정성의 사회는 소멸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새로운 사회는 긍정성을 위해 부정성을 해체해가는 중이다. 그리하여 투명사회의 일차적 모습은 긍정사회 Positivgesellschaft로 나타난다.(p13) <투명사회>中

 

 한병철(Han Byung-Chul)은 <투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규정되는 현대 사회를 투명사회, 긍정사회로 규정한다. 저자에 따르면 정보화를 통해 모든 것이 시각화되면서 우리 삶의 공간은 개인적 공간이 아닌 공공 영역으로 탈바꿈하게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은 개인 정보가 아닌 공공 정보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정보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개인의 속박, 억압과 감시로 이어지게 된다.

 

 투명성은 2차 계몽주의의 구호다. 데이터는 투명한 매체다. 2차 계몽주의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데이터와 정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데이터 전체주의, 데이터 물신주의가 2 계몽주의의 영혼을 이룬다.(p81) <심리정치>

 

 완전 조명 Ausleuchtung은 곧 착취 Ausbeutung. 한 개인에 대한 과다 조명은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투명한 고객은 오늘날의 새로운 수감자, 디지털 파놉티콘의 호모 사케르 Homo Sacer이다.(p100) <투명사회>

 

자유는 결국 에피소드로 끝날 것이다. 자유의 감정은 일정한 삶의 형태에서 다른 삶의 형태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나타나 이 새로운 삶의 형태 자체가 강제의 형식임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하여 해방 뒤에 새로운 예속이 온다. 그것이 주체의 운명이다. 주체, 서브젝트 subjerkt는 문자 그대로 예속되어 있는 자인 것이다.(p9) <심리정치>

 

 그렇다면, 정보화 시대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가 될 것인가? 저자는 정보의 자유는 결국 '자본의 자유'로 귀결된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 수단이 신자유주의임을 <심리정치>를 통해 보여준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 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p13) <심리정치>

 

 자본주의의 변이체인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를 경영자로 만든다. 오늘날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기업에 고용되어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모두가 주인인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 역시 자기 자신과의 내적 투쟁으로 탈바꿈한다.(p15)... 신자유주의는 시민을 소비자로 만든다. 시민의 자유는 소비자의 수동성으로 대체된다.(p22) <심리정치>

 

 모티베이션, 프로젝트, 경쟁, 최적화, 자발성은 모두 신자유주의 체제의 심리정치적 통치술에 속한다. 뱀은 무엇보다도 죄,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 수단으로 사용하는 채무를 상징한다.(p34) <심리정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노동자, 경영자, 소비자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모습을 통해 체제를 뒷받침한다. 노동자로서 개인은 저임금으로 착취당하고, 소비자로서 개인은 마케팅에 의해 끊임없이 신상품을 소비하게 되며, 경영자로서 개인은 계속적인 개선과 높은 목표 달성을 강요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디지털 정보화 사회다. 저자에 따르면 디지털 정보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실상(實像)과 결별하고 허상(虛像)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매트릭스(Matrix)안에서의 삶을 강요받게 된다.

 

 오늘의 세계는 행위와 감정이 재현되고 읽히는 극장이 아니라 내밀함이 전시되고 판매되고 소비되는 시장이다. 극장이 재현의 장소라면, 시장은 전시의 장소다. 그리하여 오늘날 연극적 재현은 포르노적 전시에 밀려난다.(p73) <투명사회>

 

 이미지와 정보의 빠른 교체는 눈 감기를, 사색적 결론을 불가능하게 한다. 모든 이성적인 것이 결론이라면, 빅데이터의 시대는 이성이 없는 시대인 셈이다.(p101) <심리정치>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디지털 매체는 실재를 저항으로 받아들인다... 디지털은 실재계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상계로 만든다.(p146) <무리속에서>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저자는 정량(定量), 빅데이터(Big Data)로 정의되는 현대 정보화 사회가 데이터 분석을 통해 추세(trend)와 상관관계(Corelation)를 유추할 수 있어도 이것이 미래를 결정짓는 변수가 될 수는 없음을 지적한다. 높은 확률은 결코 미래를 결정지을 수 없다. 대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철학(哲學, phlilosophy)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철학이 바보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p107) <심리정치> 中

 

 철학의 기능은 바보 노릇하기에 달려있다. 새로운 표현 방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유를 창조하는 모든 철학자는 본래 바보였음에 틀림없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백치 상태 속에서 사유는 모든 예속화와 심리화에서 이탈하는 사건과 유일무이한 것으로 이루어진 내재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p111) <심리정치> 中

 

 5G, AI(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자동차 등 IT기술의 발전에 따라 <투명사회>와 <피로사회>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는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의 말처럼 '바보 노릇'이 우리 삶의 구원자(Messiah)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한층 공감하게 된다. 거창한 철학이 아니어도, 바보처럼 가던 길을 가는 우직함, 항상 웃을 수 있는 천진함이 다른 어떤 덕목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며,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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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16: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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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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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집트인은 인간의 생이 현세에 국한되지 않고 사후세계에서도 현세 이상의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내세관은 이집트가 갖고 있는 건조한 사막의 풍토 속에서 잉태되었다. 사막의 열사 위에서 죽은 사람들의 몸이 건조한 기후로 인해 자연적으로 미라화되어 생전의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본 후손들은 사자가 현세와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사후생활을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p87) <이집트 사자의 서> 中


 부활을 얻기 위해서는 영혼과 육신이 결합해야만 한다. 마치 오시리스가 세트에 의해 살해된 후 이시스에 의해 부활한 것처럼,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육신과 영혼이 파괴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고대 이집트인들이 믿었던 내세관이다. 이집트인들이 말하는 영혼은 카(Ka)와 쿠(Khu)로 이루어진다. 우리식 개념으로 보자면 카는 영(靈)에 해당하고, 쿠는 혼(魂)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기에 제3의 개념으로 영혼의 새인 바(Ba)가 있다.(p88) <이집트 사자의 서> 中 


 <이집트 사자의 서 the Egyptian Book of the Dead>는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을 믿었던 그들의 내세관(來世觀)이 담긴 책이다.  이집트인들은 사자(死者)는 죽음을 통해 오시리스(Asar, Aser, Ausar, Ausir, Wesir, Usir, Usire, Ausare)의 심판을 받은 후 정화되고 태양신 라(Ra)가 지배하는 저편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카는 개인의 운명을 내세로 인도하고 내세에 거주한다. 즉 사자를 도와서 신 앞에서 그를 변호하거나 태양신 라 앞에 인도하며 사자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모든 악으로부터 보호한다... 반면, 우리의 관념상 혼에 해당하는 개념이 '쿠'이다. 쿠는 인간의 육체 내에 있지만 인간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체내를 빠져나와 여기저기를 오가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믿어졌다.(p89)... 사람의 머리에 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바'가 있다. 생전에는 육체에 있지만 사후에는 체외로 빠져나와 비상(飛上)하여 사자의 미라 주위를 선회하거나 미라 위에 앉아 있다가 다시 체내로 들어간다... 신관들이 장례일에 행하는 장의의 목적은 바가 갇히거나 파괴당해 내세로 못가게 되지 않도록 기원하는데 있다.(p90) <이집트 사자의 서> 中


 인간의 영혼은 '카'와 '쿠' 그리고 '바'로 구분된다. '카'는 웹툰만화 <신과 함께>에서 변호사 진기한(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이고, '바'는 사후 오시리스를 만나는 여행을 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쿠'는 유체이탈을 하는 '혼(魂)'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집트 사자의 서>는 죽은 후 '바'가 몸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자의 서>에 수록된 각 장은 사실상 전체가 주문으로 되어 있다. 이를 이해하는 열쇠는 "주문을 낭송하기 위해서는 라 앞에서 손을 씻고, 정화하고, 향을 피우고, 빵과 맥주를 바쳐야 한다. 그러면 영혼이 파괴당하지 않고 백만 년의 수명이 주어질 것이다" "이 주문을 아는 자는 내세에서 영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류(類)의 주문에 있다. 이것이 부활의 조건이 된다. 주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자의 영혼이 부활하여 영원을 얻는데 있다. 모든 장들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p151) <이집트 사자의 서>中 


 심판관인 오시리스를 만나기 전 사자의 '바'는 적들로부터 위협을 받는다. 이를 물리치기 위해 죽은 자는 끊임없이 오시리스와 라를 향해 기도를 하면서 오시리스에게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심장의 무게 달기' 의식을 통해 심판을 받는다. 의식을 통해 정화된 영혼은 오시리스를 만나고 부활을 통해 영원한 세상에서 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 고대 이집트인들의 죽음과 삶에 대한 생각이다.


[사진] 심장의 무게 달기(출처 : 위키백과)



 이집트의 전수 및 죽음의 의식 가운데 절정을 이루는 것은 '심장의 무게 달기'의식이다.(p181)... 충실한 보호자 아누비스와 죽은 자 후네페르 앞에는 진실의 저울이 놓여 있으며 접시 위에는 마트의 흰색 깃털이 꽂혀 있다. 무릎을 꿇은 아누비스가 저울의 균형을 살피고 있으며, 굶주린 괴물 아미트는 불순한 심장의 찌꺼기를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후네페르의 심장이 왼쪽 접시에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진실의 깃털이 놓여 있다. 저울이 균형을 유지하면 후네페르는 '정의로운 것'으로 선언된다. 그러나 저울이 심장 쪽으로 기울면 심장의 불순한 조각을 제거해서 후네페르가 저주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즉 괴물 아미트가 심장의 불순물을 먹어치워 영혼을 순수하게 하고 카르마, 즉 업보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심판을 마치고 환하게 미소짓는 전수자는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에게 인도되어 심판관 오시리스를 만나게 된다.(p183)  <벽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 中


 오시리스가 동생 세트(Seth)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아내 이시스(Isis)에 의해 부활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다른 삶으로의 연결인 탄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죽음 이후의 삶'은 생전의 육신과 사후 영혼인 '바'의 결합이 필요한만큼, 티벳 불교의 윤회와는 다르다.  죽음에 대한 두 문명의 차이는  장례 문화의 차이에서 보다 극적으로 표현된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육체보다 정신을 강조했으며, 사후 하늘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천장(天葬)을 지냈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은 '바'의 귀환을 기다리며 사막 위에 부활의 공간인 피라미드(pyrramid)를 만들어냈다.


 죽음은 냉혹하게도 탄생과 연결된다. 이 둘은 밤과 낮, 음과 양,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렇듯 신은 종종 이중적 역할을 수행한다. 오시리스는 원래 죽음과 관련이 있지만 재생과 부활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랑과 탄생의 신인 하토르는 죽음을 상징하거나 매일 저녁 해가 지고 '죽는' 서쪽과 연관되기도 한다.(p177) <벽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 中


 이집트의 전생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인과응보적인 윤회사상과는 다르다. 이집트인들은 생전에 악행과 악업을 저지른 삶이 오시리스의 법정에서 혼을 파괴당하면 그의 바는 전생(轉生)하여 살아갈 수 없다고 믿었다. 때문에 동양적 사고에서 말하는 윤회와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p90) <이집트 사자의 서> 中

 

 무엇보다도 이 책의 뛰어난 점은, 우리가 사후에 보게 되는 그 모든 빛들과 신들의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 투명된 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 세계가 펼쳐 보이는 환상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삶도 죽음도 우리의 환영이고, 모습도 색깔도 마음까지도 실체 없는 환영의 세계이다. 삶도 내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세계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p12) <티벳 사자의 서> 서문中


 <이집트 사자의 서>는 이처럼 이집트인들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지만, 우리는 또한 책 안에서 유럽 문명의 여러 철학과 사상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점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라 여겨진다. 그중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카 사상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399년, 스승 소크라테스가 죽자 정신적 지주를 상실한 플라톤은 고독감을 견디지 못해 이집트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그는 카 사상으로부터 지적 충격을 받고 이것을 '이데아'로 받아들여 그의 저작에서 발전시켰다.(p89)<이집트 사자의 서> 中


 저녁에 태양이 지면 그것은 종종 지하 세계나 지옥의 영역으로 잘못 알려진 어둡고 굴 같은 두아트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믿었다... 두아트는 12개의 구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밤의 12시간과 일치한다... 이 어둡고 불안한 통로를 성공적으로 항해하게 되면 그 결과로 태양이 떠오르고 낮이라는 밝은 세상이 나타나는 것이다.(p162) <벽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 中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이 이집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위의 글을 읽은 후 <국가> 제 7권을 읽어보면,  '동굴의 비유'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속세의 굴레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중 하나가 죽음을 맞은 후 두아트를 지나 태양신 라를 만나,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후 다시 동굴로 돌아와 부활한다는 이집트 신화에 기반한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플라톤은 <국가>에서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동굴의 비유' 이면에 이집트의 영향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이집트 사자의 서> 속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와 기독교 신화 원형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예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 다만, 이처럼 <이집트 사자의 서>는 우리에게 고대 이집트에 관한 새로운 사실과 생각할 거리를 준다는 면에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사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출처 : https://www.pinterest.co.uk/pin/454159943648399992/)


 여기 지하 동굴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보게. 동굴의 입구는 길고 동굴 자체만큼 넓으며 빛을 향해 열려 있네. 그들은 어릴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었기에 언제나 같은 곳에 머물러 있으며, 쇠사슬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쪽 밖에 볼 수 없네. 그들의 뒤편 저 멀리 위쪽으로부터는 불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으며, 불과 수감자들 사이에는 위쪽으로 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서는 나지막한 담이 쌓여 있네.(514 a-b)... 그들 가운데 누가 쇠사슬에서 풀려나 갑자기 일어서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움직이며 불빛을 쳐다보도록 강요받는다면, 그는 고통받을 것이며 광채에 눈이 부셔서 여태까지 보아온 그림자들의 실물들을 바라볼 수 가 없을 것일세.(515 c-d)... 마지막에는 태양을 보게 될 텐데, 본래 있어야할 장소에서 태양 자체를 직접 보며 관찰하게 될 것이네. 그 다음 그는 벌써 계절과 해(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태양이며, 또한 태양이 가시적인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관장할 뿐만 아니라...(516 b) <국가 Politeia> 中


 PS. 이집트 문명 또는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 문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음의 책들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래 책들의 상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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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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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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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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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4 15: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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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1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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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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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0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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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7-10 23:34   좋아요 1 | URL
미드를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곧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종말론적 세계관은 저 역시 공감하기 어렵네요^^:)
 


 누가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이탈리아를 떠나 황량하고 일기불순하며 살기에도 보기에도 음울한 게르마니아를 찾겠는가? 그곳이 고향이라면 몰라도.(p26)... 싸움터에서 시종들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은 주군에게 치욕이고, 주군만큼 용감하지 못한 것은 시종들에게 치욕이다. 그리고 주군이 전사했는데 살아서 싸움터를 떠난다는 것은 평생의 치욕이자 수치이다... 게르마니족은 평온이 싫고, 위험 속에서 더 쉽게 명성을 얻는 데다 폭력과 전쟁이 아니고서는 시종들의 대집단을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p50) <게르마니아> 中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AD 55 ? ~ 117 ?)는 <게르마니아 Germania> 속에서 당시 야만족의 땅이라 불렸던 게르마니아의 땅과 게르만 족의 용맹함에 대해 위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농경민족인 라틴족의 시각에서 바라본 게르만족은 용맹스럽지만 야만스러운 종족이었다. 게르만족은 오랜 기간 로마의 골칫거리였고, 중국 흉노(匈奴)의 일파로 추정되는 훈 족의 침입으로 게르만 민족이 이동하면서 결국 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 해마다 가을이면 강한 기병을 활용한 흉노의 침입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고사성어다. 고사성어의 주인공인 흉노 역시 농경국가인 한(漢)과 오랜기간 대립해왔다. 사실, 중국의 역사는 흉노, 선비, 거란, 몽골과 같은 북부 유목(遊牧)민족과 한(漢)족의 다툼으로 요약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지도] 한 제국의 확장( 출처 : https://www.quora.com/Why-did-the-Huns-led-by-Attila-invade-Europe-and-not-China)

 

  진나라가 망한 뒤 혼란을 수습하고 이제 막 등장한 중원의 통일제국 한나라와, 북방 유목민을 모두 통합하고 동아시아 역사상 최초의 유목국가로 탄생한 흉노의 대결은 불가피해졌다... 이제 흉노는 장성 이북의 유목민들을 모두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초원 세계에서는 부족한 식량, 비단, 의복, 금은, 각종 사치품을 전쟁이나 약탈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고도 안정적으로 입수할 수 있게 되었다... 흉노는 서로는 알타이에서 동으로는 싱안링, 북으로는 바이칼에서 남으로는 장성 지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p37)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이러한 다툼의 양상은 중앙아시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대 이란인으로 추정되는 스키타이인(Scythian)들과 농경 제국 페르시아(Persian)의 전쟁 역시 거대한 '유목 - 농경' 민족의 전쟁의 흐름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제국 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리우스 대제(BC 550 ~ 486)는  BC 514년 대규모 스키타이 원정을 계획하지만,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역시 '유목 - 농경' 민족 간의 대립이 오랜 기간 있어왔고, 스키타이 원정 이후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입(BC 492)으로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것 역시 이러한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도] 제1차 페르시아 전쟁(출처 : https://www.shorthistory.org/ancient-civilizations/ancient-greece/the-greco-persian-wars-first-persian-invasion-of-greece/)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 군과 직접 대결을 피하고 계속 초원 깊숙이 들어갔고, 다리우스는 그들의 종적을 좇아 초원을 헤매야만 했다... 상황은 역전되어 스키타이가 추격하고 다리우스는 쫓기는 입장이 되었으나, 그는 운 좋게 추격을 피해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다리우스의 대군을 물리친 사건이 스키타이의 명성을 크게 높여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스키타이는 외적의 위협이 사라진 뒤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여러 도시와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번영까지 누릴 수 있게 되었다.(p29)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中


 이처럼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공간적으로는 동에서는 한(漢)으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서쪽 로마에 이르기까지 유목 민족과 농경민족의 대립은 존재해 왔다. 따뜻한 남쪽에 위치한 나라들이 '경제력'을 갖췄다면, 추운 북방 민족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경제력- 군사력'의 상호 우위를 통해 세계는 균형을 유지해왔다.  독일의 역사학자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 ~ 1936)는 <인간과 기술 Der Mensch und Die Technik>에서 북방 민족이 강인할 수 있었던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북방은 생활 조건의 어려움과 추위, 상존하는 생존의 곤경에 의해서 그 안에 있는 인종을 최고도로 첨예화된 정신과 전투, 모험, 진보에 있어서 엄청난 열정의 차디찬 정열을 갖춘 강한 인종으로 단련시킨다.(p62) <인간과 기술> 中


  오랜 기간 유지되온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균형은 서구사회에서 과학(科學)과 기술(技術)이 결합된 과학기술(science and technology)면서부터 깨지게 되었다. 슈펭글러에 의하면 본래  '기술'의 의미는 '삶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문명이나 생존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유럽 문명은 여기에 과학을 결합시키면서 이야기는 달라지게 되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의 삶이란 싸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삶의 전략 및 "타자"에 대한 그들의 우열성(ihre Uberoder Unterlegenheit) - 이 타자가 유기적 자연이든 무기적 자연 - 은 이 삶의 역사, 말하자면 이 삶이 타자의 역사에 해를 끼치느냐 또는 반대로 타자의 역사로부터 해를 입은 운명이냐를 결정짓는다. 기술이란 전체적 삶의 전략이다. 기술이란 삶 그 자체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싸움에서의 수법이 가지는 내면적 형식이다.(p14) <인간과 기술> 中


 슈펭글러가 '동역학(Dynamics)' 이라고 표현한 서구과학기술의 발달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결국 문명의 성격도 바뀌었다. 서구 문명이 발달된 과학기술이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만나, 기독교라는 사상을 가지고 제국을 추구했음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 할 수 있다.(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를 참고) 슈펭글러는 서구 문명을  '파우스트적 욕망'으로 정의한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꽃피워낸 문명으로 규정하고, 이 문명은 인간이 속하는 자연(自然)을 점거하고 오염시키면서 결국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결론 짓는데, 이는 주저 <서구의 몰락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1918)의 결론이기도 하다.


  같은 맥락에서 정신적 힘과 전리품에 대한 굶주림과 모험심을 가지고 13~14세기의 북부 승려들이 기술적-물리적 물제의 세계로 밀고 들어온다. 여기에는 중국, 인도, 고대 아랍의 학자들이 갖는, 실행에서 동떨어진 한가한 호기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여기에는 어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간단한 "이론"이나 어떤 모습을 담아 내려고 사변력을 발휘하는 일이 없다... 파우스트적 자연 과학, 오직 이것만이 그리스의 정역학과 아랍의 연금술과는 대조적으로 동역학인 것이다.(p64) <인간과 기술> 中

 

  정신적인 바이킹의 이동은 물밀듯이 이어진다. 화약과 인쇄술이 발명된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술적 절차 방법들이 잇따른다. 이것들은 전체적으로 환경 세계로부터 비유기적 힘을 분리시켜서 동물과 인간 대신에 작업을 수행하도록 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p67) <인간과 기술> 中


 요즘 2018 러시아 월드컵이 한창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세계 축구계는 '기술의 남미 축구'와 '힘과 높이의 유럽 축구'로 양분(兩分)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균형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유럽으로 완전히 힘의 균형이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독일이 브라질을 7:1로 대파한 경기)라 생각된다. 


[사진] 2018 러시아 월드컵 프랑스 vs 아르헨티나(출처 : 더팩트)


 어제 벌어진 프랑스 VS 아르헨티나 경기는 4 : 3 프랑스 승리로 끝났다. 비록 프랑스의  한 점 차 승리 였지만, 게임 내용상으로는 프랑스가 압도적이었던 경기였고, 아르헨티나는 더이상 과거와 같은 강팀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메시의 모습에서 이제는 몰락한 몽골 기마병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오랜 대립이 서구의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경제력 = 군사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최근의 월드컵을 통해 '자본력 = 스포츠 파워'라는 냉정한 현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 가난한 남미의 여러 국가들이 축구를 통해 자신들의 식민 종주국들을 누르면서 쾌감을 느꼈다면, 이러한 한(恨)풀이가 더 이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개천에서 용(龍)이 나는' 그런 인생 역전 드라마를 보기가 예전보다 어려워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 여겨져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장마전선과 태풍의 북상(北上)으로 많은 비가 내린다. 우리의 현재 날씨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의 기상도를 봐야하는 것처럼, 한국사(韓國史) 역시 세계사(世界史)의 흐름 속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사진] 2018년 7월 1일 현재 기상도(출처 : 기상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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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1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1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7-02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일이 브라질을 크게 이긴 경기는 결승전이 아니라 4강전이에요.. ^^;;

겨울호랑이 2018-07-02 12:28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cyrus님 말씀 듣고 수정했습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07-02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20: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_^

겨울호랑이 2018-07-02 20:40   좋아요 2 | URL
혠님 감사합니다^^:)
 

  파스칼(Blaise Pascal, 1623 ~ 1662)의 <팡세 Pensees>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아마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문장일 것이다. 많은 경우 위의 문장은 인간을 '이성(理性)을 가진 약한 존재'로 표현할 때 이 문장을 인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파스칼이 <팡세>를 통해 목적했던 바는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간다. 이번 페이퍼에서는 <팡세>를 통해 파스칼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찾아보려 한다.

 

인간의 본성(本性) : 본능(本能)과 이성(理性)

 

 파스칼은 본능과 이성이 인간의 두 본성이며, 이는 자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연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자연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 또는 사유(思惟)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스칼의 사유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사유와는 조금 다르다.

 

 216-(344) 본능과 이성, 두 본성의 표시. (p115)

 

 162-(94)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연이다. omne animal. 인간이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없애지 못하는 자연적인 것도 없다. (p93) <팡세> 中 

 

데카르트 비판 : 사유의 한계

 

 232-(365) 사유(思惟). 인간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에 있다. 그러나 이 사유란 무엇인가.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므로 사유는 그 본성으로는 경탄할 만하고 비길 데가 없다. 그것이 멸시받을 만하다면 무엇인가 야릇한 결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실 사유는 그보다 더 가소로운 것이 없을 만큼 결함을 가지고 있다. 본성으로서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 결함으로서는 얼마나 저속한가! (p119) <팡세> 中

 

 데카르트에게 사유는 '철학의 제일원리'로서 명제의 출발점에 놓여 있고, 사유의 끝에는 자기 자신이 인식된다. 반면, 파스칼에 있어 사유는 인간이 가진 한계에 불과할 뿐이며, 파스칼의 사유 끝에는 데카르트와는 달리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p18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이 진리는 아주 확고하고 확실한 것이고, 이것을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p185)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ethode> 中 

 

 268-(469)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느낀다. 나의 자아는 나의 사유(思惟)로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래서 생각하는 이 자아는 만약 내가 생명을 얻기 전에 어머니가 죽었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필연적인 존재는 아니다. 나는 영원하지도 또 무한하지도 않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원하고 무한한 필연적 존재가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p137) <팡세> 中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 ~ 1592) 비판 : 회의(懷疑)주의 비판

 

 이와 동시에, 파스칼은 몽테뉴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역시 비판한다. 회의주의를 통해 진리를 얻는 것은 자연에 의해 견제되기 때문에 회의주의를 통해서는 우리는 결코 사물의 본모습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246-(434) 그렇다면 이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것을 회의할 것인가. 깨어 있는지, 꼬집히는지, 불태워지는지도 회의할 것인가. 회의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자기가 존재하는 것도 회의할 것인가. 우리는 거기까지는 갈 수 없다. 실로 완벽한 회의론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이 무력한 이성을 지탱하여 그렇게까지 극단을 달리지 못하게 견제한다.(p126) <팡세> 中 

 

 파스칼의 몽테뉴 비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습관'에 대한 관점이다.  몽테뉴는 기존의 습관을 벗어났을 때 우리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파스칼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 속에 머무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습관이 가지는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습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이성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일이라고 믿게 된다. 대개의 경우 이것은 얼마나 이치에 벗어나는 일인가!(p128)... 습관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습관이라는 맹렬한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는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는 여러 가지 사물들을 발견할 것이다.(p129) <수상록 Les Essais> 中

 

 241-(93) 사라질지도 모를 이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습관은 제2의 본성이다. 그것은 제1의 본성을 파괴한다. 그러나 본성이란 무엇인가. 습관은 왜 본성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가. 나는 이 본성도, 마치 습관이 제2의 본성인 것 같이, 단지 제1의 습관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몹시 두렵다.(p123) <팡세> 中


  245-(97)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직업의 선택이다. 우연(偶然)이 그것을 좌우한다. 습관이 석공, 군인, 기와장이를 만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덕을 사랑하고 어리석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말들이 마음을 정하게 할 것이다. 단지 적용에 있어서 사람들은 실수를 저지른다. 습관의 힘이 이다지도 큰 것이어서 자연이 단순히 인간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지고 인간은 모든 신분을 만들었다... 습관이 자연을 속박하기 때문에, 그러나 자연은 종종 습관을 이기기도 하며, 좋고 나쁜 모든 습관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자신의 본능 속에 머물게 한다.(p132) <팡세> 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인간은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는 달리 생각(또는 사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인 갈대와 같지만, 동시에 생각할 수 있기에,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의 길이다.

 

 217-(348)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많은 땅을 소유한다고 해서 내가 더 많이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간으로써 우주는 한 점처럼 나를 감싸고 삼켜버린다. 사유로써 나는 우주를 감싼다. (p115) <팡세> 中

 

 391-(347) H.3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한 줄기 갈대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박살내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번 뿜은 즐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박살낸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것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그리고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사유(思惟)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이다.(p213) <팡세>

 

 중용(中庸) 그리고 신앙(信仰)


 인간이 올바르게 생각하기를 힘쓴다고 했을 때, '올바르다'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바로 '중간에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중용(moderation)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의 위치는 '한 점'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이 안에서 두 본성인 본능과 이성이 결합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이 점은 바로 기독교(基督敎) 신앙이며 유일한 진리이다.

 

 58-(381) 사람은 너무 젊으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고 너무 늙어도 마찬가지이다. 충분히 생각하지 않거나 지나치게 생각하면 고집을 피우고 또 열중한다. 작품을 쓰고 난 직후에 그것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작품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다. 너무 오랜 후가 되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림을 너무 멀리서 또는 너무 가까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적절한 자리는 오직 불가분의 한 점이 있을 뿐이다. (p51) <팡세> 中

 

 289-(378)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중간에 머물 줄 아는 데 있다. 위대한은 중간에서 벗어나는 데 있기는 커녕 거기서 벗어나지 않은 데 있다.(p153) <팡세> 中

 

 462-(862)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는 여러 진리들을 포용한다. 웃을 때, 울 때 등등. Responde. Ne respondeas. 그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이 결합한 데 있다.(p241) <팡세> 中

 

 409-(433) 인간의 모든 본성을 이해한 다음, 한 종교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 위대와 비속을 알고 또 이것들의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종교가 이것을 알았는가.(p222) <팡세> 中

 

 <팡세>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절대 진리임을 끌어내고 있다. 큰 줄기만 요약하면, 뛰어난 수학자인 파스칼의 '신 존재 증명'이 <팡세>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은 읽기에 불편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근대 유럽인들이 신(神)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는가를 알려준다는 점이 <팡세>를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몽테뉴 사망한 해인 1592년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는 것이 그냥 생각나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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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4-21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기분좋은 토요일 보내세요.^^

2018-04-2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8-04-21 2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으면서 신. 인간. 존재. 사유. 습관. 본성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바가바드 기타 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신다.‘
참 신기하죠? 강철 쇠사슬도 아니고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 이라니..

겨울호랑이 2018-04-21 22:29   좋아요 1 | URL
쉽게 끊어지는 명주실로 이어진 관계라면 조심스럽고 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곧 끊어지겠군요. 끊임없는 성찰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바가바드 기타에서도 말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8-04-22 0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2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4-22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교의 근간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큰 줄기가 ‘믿음‘이기 때문에 종교주의자 파스칼이 ‘회의주의‘를 비판한 건 그런 연장선이라고 봐야할 거 같아요.
사실 ‘이성‘의 본질적 특징도 ‘믿음‘이잖아요^^;

겨울호랑이 2018-04-22 12:35   좋아요 1 | URL
그렇겠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못해봤네요. 그런 면에서도 과학과 신학은 함께 가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AgalmA님 덕분에 더 많이 배워갑니다. ^^:)

AgalmA 2018-04-22 12: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과학은 반증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게 기본규칙이잖습니까^^; 주류과학이 되어서 뻗댈 때가 있지만 이건 분야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입장을 취하는 인간이 문제인 걸 테고요ㅎ;;

겨울호랑이 2018-04-22 12:40   좋아요 1 | URL
또한, 정치에서 ‘프레임‘으로 규정되는 것들과 과학에서 ‘패러다임‘으로 규정되는 것 모두가 AgalmA님께서 말씀하신 인간 또는 사회의 문제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oren 2018-04-29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몽테뉴와 파스칼을 두고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아주 재치있는 말을 남겼더군요.

˝몽테뉴는 인간의 슬픈 존재 조건을 흥미, 유머, 관용을 가지고 살폈고, 재치는 번뜩이지만 유머는 없는 파스칼은 전율과 절망 속에서 인생을 쳐다보았다. 그리하여 계시 종교의 품안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그런 절망에서 가까스로 구제되었다.˝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작을 쓰기 위해 준비한 노트가 <파스칼>이라고 하는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니체가 파스칼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님의 페이퍼 덕분에 니체의『선악의 저편』에 등장하는 ‘파스칼‘과 ‘데카르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됩니다.^^

* * *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 * *

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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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

˝그러므로 솔직하게 말해 종교란 정상적인 인간이 만든 산물이며, 인간이 더욱 종교적일수록, 무한한 운명을 확신할수록, 더욱 더 진실해진다.······ 인간은 선할 때, 미덕이 영원한 질서와 조응되기를 바란다. 사심 없는 태도로 사물을 관조할 때, 인간은 죽음이 불쾌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가장 잘 보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라고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내 귀와 습관에 매우 반대되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문장 옆에 ‘한마디로 종교적인 어리석음!‘이라는 내 최초의 분노를 적어넣었다. ㅡ 마지막 분노에 이르러 나는 거꾸로 뒤집힌 진리를 담은 이 문장이 심지어는 좋아지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에게 대척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정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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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도대체 현대 철학 전체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데카르트 이래 ㅡ 사실은 그의 선례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에 대한 반항에서 ㅡ 사람들은 모든 철학자의 입장에서 주어 개념과 술어 개념의 비판이라는 외형적인 모습 아래 낡은 영혼 개념을 암살하고 있다. ㅡ 다시 말해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전제를 암살하는 것이다. 인식론적인 회의에서 출발한 현대 철학은 숨겨져 있든 드러나 있든, 반(反)그리스도교적이다 :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예민한 귀를 가진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이는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문법과 문법적인 주어를 믿었듯이,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것을 믿었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제약하는 것이요, ‘생각한다‘는 술어이자 제약되는 것이다. ㅡ 사유는 하나의 활동이며, 그것에는 반드시 원인으로 하나의 주어가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이제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의 집요함과 간계로 이러한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가를 시도하고 있다. ㅡ 아니면 아마도 그 반대의 경우가 참은 아닐까, 즉 ‘생각한다‘는 것이 제약하는 것이요, ‘나‘는 제약되는 것이 아닐까, 즉 ‘나‘란 사유 자체에 의해 만들어진 종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를 시험해본다. 칸트는 근본적으로 주체에게서 주체가 증명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ㅡ 또한 객체도 증명될 수 없다 : 주체라고 하는 가상적 존재의 가능성, 즉 ‘영혼‘이 그에게 항상 낯선 것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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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

그리하여 교회의 가치평가를 위해 마침내 ‘탈세속화‘, ‘탈관능화‘와 ‘보다 높은 인간‘이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하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의 신 같은, 비웃는 듯하고 무관심한 눈으로 유럽 그리스도교의 기이하게 고통스럽고 조야하기도 하며 또한 섬세하기도 한 희극을 조망할 수 있다면, 끝없이 놀라워하며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결국 인간에게서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를 만들려는 의지가 18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해왔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누군가가 정반대의 욕구, 즉 더 이상 에피쿠로스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해머를 가지고, 그리스도교적인 유럽인(예를 들어 파스칼)이 그런 것처럼 이렇게 거의 자의적으로 인간을 퇴화시키고 위축하게 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 한다면, 그는 여기에서 분노와 동정, 놀라움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오, 그대 바보들이여, 그대 오만하고 불쌍한 바보들이여, 그대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손에 맞는 작업이었던가! 그대들은 그대들에게서 무엇을 끄집어 냈던가!˝ ㅡ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 그리스도교는 지금까지 가장 숙명적인 방식의 자기불손이었다. 인간을 예술가로 조형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고귀하지도 준엄하지도 않다. 숭고한 자기 극복으로 천태만상의 실패와 몰락의 중요한 법칙을 지배할 수 있기에는, 인간은 충분히 강하지도 멀리 내다보는 시야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위계 질서와 위계의 간극을 보기에는 인간에게 충분한 품위가 없다 : ㅡ그러한 인간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의 평등‘으로 지금까지 유럽의 운명을 지배해왔다. 즉 마침내 왜소해지고 거의 어처구니없는 종족, 무리 동물, 선량하고 병들고 평범한 존재가 육성될 때까지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그들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62절


겨울호랑이 2018-04-30 07:45   좋아요 0 | URL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종교와 관련한 위의 내용이 있었군요!^^:) oren님 덕분에 유명하지만,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위와 연결하여 읽으면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니체와 ‘노예-주인‘의 내용이 파스칼과 연결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oren님 항상 좋은 내용과 과제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