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권리와 권력(jus et potestas imperii)을 매우 큰 것으로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의 권리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충분히 분명하게 밝혔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경험은 국가의 보존은 무엇보다도 먼저 신민의 충성과 덕 그리고 명령 수행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에 가장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충성과 덕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게 방법은 쉽게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인간들이며 그들은 노동(labor)보다 욕망(libido)을 추구하기 때문이다.(p360)...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어떤 기만도 남지 않게 국가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들 각자의 기질이 어떻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사적권리보다 공적 권리를 우선시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할 과제이며 여기에서 해야할 일이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1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Benedictus de Spinoza,1632 ~ 1677)의 <신학-정치론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를 읽던 중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공동체 모두 소중한 존재이고, 자유를 비롯한 이들의 이익과 권리가 상호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까. 잠시 이야기를 돌려 칸토어(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1845~1918)의 집합론을 살펴보자. 칸토어는 집합론에서 일대일 대응을 통해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집합론을 처음 연구한 사람은 칸토어로, 1874년에 그는 대수적 수(algebraic number)보다 실수가 더 많음을 보였다. 이는 두 무한 집합의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고, 더 나아가 초월수의 존재를 새롭게 보인 것이었다... 대수적 수와 실수가 모두 무한히 많은데도 실수가 대수적 수보다 '많다'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칸토어는 두 집합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bijection)가 존재하면 그들의 크기, 즉 "기수(cardinality)가 같다"라고 정의했다. 이는 A의 원소와 B의 원소 사이에 일대일대응(one-to-one correspondence)이 있다는 뜻이다. 만일 A와 B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존재하지 않고 A와 B의 부분집합 사이에 전단사함수가 있으면 A는 B보다 기수가 작다라고 한다. 결국 칸토어가 보인 것은 모든 대수적 수의 집합의 기수가 모든 실수의 집합의 기수보다 작다는 것이다._ 티모시 가워드 외, <Mathematics 1>, p1013


 칸토어의 설명이 다소 와닿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해 보다 대중적으로 친숙한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의 설명을 빌려보자. <수리철학의 기초 Introduction to Mathematical Philosophy>에서 러셀은 수열의 순서를 바꾸고, 수열수 비교를 통해 크기가 다른 무한 집합의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먼저 보기를 들어 설명하자. 다음의 수열로부터 출발해 보자.   1,2,3,4, ..., n, ... 

 이 수열은 가장 작은 무한수열수, 즉 칸토어가 w라고 부른 수열수를 가지고 있다. 지금 최초라 나타나는 짝수를 맨 마지막으로 옮기는 조작을 순차적으로 되풀이 해 이 수열을 띄엄띄엄 드물게 했다고 하자. 그러면 다음과 같은 수열을 얻을 수 있다. 1,3,5,7,...2n+1... 2,4,6,8... 2n . 이 수열의 수열수는 2w다. 


 여기에서 두 수열 1,2,3,4.... , n과 1,3,4,5,..., n+1,..., 2을 비교해 보면 첫째 수열은 둘째 수열에서 최후의 항, 즉 2를 제외한 부분부열과 대등하지만, 둘째 수열은 첫째 수열의 어떠한 부분수열과도 대등하지 않다. 이는 첫째 수열의 수열수가 w라고 했을 때, 둘째 수열의 수열수는 w+1로서 정의에 의해 둘째 수열이 첫째 수열보다 크다. 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3


 두 무한 집합이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잘 설명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러셀의 설명 방식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가 충돌했을 때의 가치 판단의 기준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책에서 무한 집합에서 교환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1+w와 w+1은 다르다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이익과 권리가 충돌할 때 이는 종합적인 판단이 아닌, 사안별 접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하나의 항을 수열의 마지막이 아닌 최초에 더하면 그것 또한 수열이므로 1+w=w이다. 따라서 1+w=w이다. 따라서 1+w는 w+1과 같지 않다. 이는 관계에 대한 산술 전체에 통용되는 성질이다._러셀, <수리철학의 기초>,p104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어떨 때는 시장 경제의 자유를, 다른 때는 국민 정서를 언급하면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비판을 일삼는 일부의 행태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사안 별로 개인과 이익의 상충점을 소거해가면서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수 없는 남는 부분수열이 어느 집합에 속하는지를 보다 납득할 기준(이 기준은 사회 전체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에서 판단되면 좋을 것이다. 다만, 숫자로 표현되는 수학의 세계와 사회과학의 세계는 다르기에 쉽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장황했지만, 이러한 생각이 시작된 시작점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3월호에 실린 "분열을 팔아야 먹고 사는 언론"의 기사를 읽고서였다. 이와 연관해서 배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의 <공포의 문화 The Culture of Fear: Why Americans Are Afraid of the Wrong Things>를 읽으며, 언론이 어떻게 공포를 조장했는가를 살폈고 여기에서 다시 스피노자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공포의 문화>에서 <신학-정치론>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실로 대중의 변덕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중에 대해서 거의 절망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이성이 아니라 오직 감정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며, 대중은 모든 것에 달려들고 탐욕이나 사치로 인해서 쉽게 타락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자기의 기질에 따라서 이끌어 가고자 한다._B.스피노자, <신학-정치론>,p360


 <공포의 문화>는 조만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신학-정치론>은 스피노자 철학을 쉽게 설명한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페이퍼에서 다루는 것으로 하며, 글을 마무리하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철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된다는 것이다.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 monde diplomatique> 3월호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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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3-20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맘에 크게 와닿는 글이 넘 많습니다. ^^
손실은 사회화되고 이윤은 사유화 된다는 말은 넘 절감되고 멋입니다. ^^

개인과 공동체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종합적 판단이 아닌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씀도 크게 맘에 와닿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큰 방향에서 어긋나면 각 개별 사항을 흔히 다르게 대우하는 상황이 넘 많아 좀 아쉽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1-03-20 18:35   좋아요 1 | URL
이번 페이퍼에서 많은 내용을 퍼와서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더 공감되셨으리라 생각해 봅니다.ㅋ 감사합니다. 사실, 물리의 법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사람 심리가 추가 변수가 들어간 사회과학은 예외 사항이 많음을 느낍니다. 그게 사회과학의 매력이기도 하겠지만요.. ^^:)

초란공 2021-03-20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잘 읽었습니다. 디플로마티크의 마지막 인용문이 한번 더 머리를 치네요^^;;

겨울호랑이 2021-03-20 22:26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그냥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썼네요.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20 2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에서 자신의 세를 불리는 방법이 분열이지요. 실제로 불리했던 후보나 정당이 케케묵은 이슈를 들고 나와도 그 아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흔히 볼수 있습니다.
양분된 의견중 하나를 자신의 진영을 대표하는것처럼 주장하는 쪽에 이용당하지 않고 사안별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1-03-20 23:35   좋아요 1 | URL
동감입니다.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분열을 많이 보게됩니다. 특히, 자신이 일정 집단을 대표한다는 생각이 믿음으로 나타났을 때, 갈등은 파국으로 이끌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퍼지는 악순환이 이루어지는 둣합니다...
 

 

 푸코에 의하면 광기의 경험에는 '거대한 분리선'이 있다.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없는  어두운 미지 세계의 영역이라면, 다른 한편에서 광기는 설명될 수 있는 오류의 한 조건이다. 이러한 분리선에 따라 동일자와 타자, 초월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공포와 통제의 구분이 이뤄진다._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p26, 해제 中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 ~ 1984)는 <광기의 역사 Histoire de la folie l' ge classique>에서 광기(狂氣)의 경험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설명될 수 없는 광기'와 '설명될 수 있는 광기'. 이들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늘 두려움과 공포에 잠겨 있고 자신이 결코 좋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늘 영혼이나 몸이 위험에 처해 있거나 둘 다 위험에 처해 있어서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므로, 안전하게 가둬두지 않으면 어디에 있을지를 알 수 없다." 이들의 마음이 어둡고 혼탁한 원인은 대부분 시커먼 체액에 있었다. 흑답즙, 또는 구워지고 태워진 자극적 황담즙의 찌꺼기가 몸을 부패시킨 탓이었다.(p128)... 이와 동시에, 우울증은 한편으로 교양 있는 계층 사이에서 뭔가 멋져 보이는 이상, 학자와 천재가 특히 잘 걸리는 것처럼 보이는 고통이 되었다._앤드루 스컬, <문명과 광기>,p130

 

 이에 대해서는 앤드루 스컬(Andrew Scull)의 <광기와 문명 Madness in Civilization>이 실마리를 제시한다. 안좋은 체액에서 비롯된 몸과 마음의 질병, 또는 신(神)에 의한 형벌이 '설명될 수 없는 광기'라면,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처럼 하나에 마니아 성향을 보이는 천재들의 광기는 설명될 수 있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종류의 광기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념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의 정신과 의들이 저마다, 그리고 분명 독립적으로, 강력한 전류를 사용해 환자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했다. 이들의 증상을 강제로 포기시키려는 카우프만 치유법이 환자들에게 행해졌다. 카우프만 치유법이란 마비된 것으로 보이는 사지에 몹시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한 번에 몇 시간 동안 가하면서, 군사훈련을 수행하기 위한 구령들을 외치는 것이었다. 목표는 환자가 굴복해 자신의 증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인간 도살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도록 하는 것이었다._앤드루 스컬, <문명과 광기>,p420


 사회적으로 득(得)이 있기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 ~ 1890),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광기는 인간의 극한까지 밀어붙인 아름다운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이들의 광기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명에 이바지하는 광기는 숭배까지 받지만, 전쟁에서 포탄 쇼크로 상처받은 광인들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도록 명령받는다. 정상화(正常化)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본다면, 푸코가 말한 '거대한 분리선'이라는 개념 역시 사회 공동체의 입장에서 바라본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데올로기 - 그것은 사악한 일에 그럴듯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악인에게 필요한 장기간에 걸친 강인함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그 사회적인 이론은 자기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악행을 은폐하게끔 도와주고, 비난과 저주를 듣는 대신 칭찬과 존경을 듣도록 도와준다._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수용소 군도1>


 또한, '광기'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만이 '설명될 수 있는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설명될 수 없는 광기'를 합법적 권력을 사용하여 '감시와 처벌'을 행한다라는 현실이 설명된다. '정의'의 이름으로 광기어린 악(惡)의 무리에 대항하는 반대편의 광기어린 집단을 우리는 '정의의 사도'라고 부르며, 선(善)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고들의 근원은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 동네마다 한 명씩은 있었던 '사람 좋은 바보 형'들이 오늘날 보이지 않게 된 이유와 함께 '광기 Madness'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함을 느낀다... 

광기의 고전적 인식과 원시적 치료법은 근대적 치료법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계보학적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푸코는 설명한다. 광인이 감시와 심판을 받고, 유폐의 대상이 되고 있는 19세기의 과학적 정신의학은 고전주의 시대의 수용소를 대체한 정신병원의 구조를 통해 결국 광인에 대한 새로운 억압형태를 나타낼 뿐이다._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p30, 해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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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1930 ~ 2004와 질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를 '차이'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데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데리다의 철학을 말할 때 해체주의라는 수식어를 빼고 말할 수 없고, 해체주의는 '차이'의 데리다식 버전인 '차연 差延'이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하기 힘들다. 들뢰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들뢰즈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단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차이'가 될 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8


  데리다와 들뢰즈 철학 입문서인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는 두 철학자들의 공통된 주제인 '차이'로부터 이들 철학의 전반을 살피는 방향으로 나간다. 두 철학자 모두 '차이'를 다루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데리다는 보다 '기호 - 대상' 이라는 언어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들뢰즈는 '전체 -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체계 측면에 중점을 둔다는 면에서는 이들 사상에 차이가 있다.

 

 데리다는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표상 체계인 '언어'가 이러한 목소리를 어떻게 억압해왔는가를 밝힘으로써 지금까지 왜곡된 서구의 사상을 거침없이 비판한다. 한편 들뢰즈는 표상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표상주의에 의해 억압된 존재들의 다양하고 차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31 


 들뢰즈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실상은 존재의 모든 것을 담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개념 이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진 도식에 맞는 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으로, 아직까지 설명되지 못한 부분 또한 분명 있기에 기존 개념은 한계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개별 존재는 각자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인 '차이 자체'가 있다고 바라본다. 


 들뢰즈는 이렇듯 개념으로 드러날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개념적으로 드러나는 차이와 달리 '차이 자체 la difference en elle-meme'라고 표현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차이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p48)... 들뢰즈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드러난다. 그때야 비로소 세상은 개념이 만들어낸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동일성의 틀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9


 들뢰즈가 칸트의 도식으로부터 착안한 것은 상상력은 인식 활동에 종속될 경우에는 그저 개념을 위한 도식을 만들 뿐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경우 거꾸로 기존의 인식 활동이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 개념으로부터 새로운 개념이 나올 수는 없다.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이 파괴되어야 한다. 기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인식 활동이 아니라 개념의 밑바닥에 있는 도식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43

 

 들뢰즈는 베르그송 Henri Bergson, 1859 ~ 1941의 물질 개념의 설명을 수용하고, 개념으로 표상되는 물(物)이 단일한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의 총합이라고 해석한다. 그렇지만, 개념은 이러한 물의 다양성 중 일부만을 선택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으로 들뢰즈는 '기계'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이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한 걸음 나아가 들뢰즈는 세상에 모든 것들을 '기계'의 관점에서 파악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 mecanique'인 것과 '기계적 machinique'인 것을 구분한다. 기계론적인 것이 미리 설계된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라면, 기계적인 것은 그러한 엄밀한 체계를 벗어난다. 들뢰즈에게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 언제나 변형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우연적인 배치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p112)...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기계로 간주했다. 그 이유는 어떠한 존재이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13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절단 coupure'과 '연결'이 의미로 해석된다. 이는  정신분석학의 의식과 무의식, 욕망과 충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다만, 들뢰즈는 이러한 분석을 인간 심리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정치철학의 체계와도 연결시키며 분석대상을 넓혀간다. <안티 오이디푸스 L’Anti-Œdipe: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 <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은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를 바라볼 수 있는 책으로 생각된다. 


 들뢰즈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 樹木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 rhizome적인 것'이라고 부른다.(p125)...  수목은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상징하며 통일성과 동질성을 특성으로 한다. 반면, 땅속에서 수없이 줄기와 뿌리가 무한 증식하는 땅속줄기 식물들을 보자. 리좀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무한한 생산성과 다양성, 개방성이 특징이다.(p126)...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구분을 파시즘과 전체주의는 구분에도 적용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파시즘은 리좀적인 데 반해 전체주의는 수목적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29


 들뢰즈가 개념이라는 동일성의 원리에 억압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내세웠다면, 데리다는 차이라는 말 대신에 '차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p50)... 데리다는 굳이 차이가 아닌 '차연 differance'이라는 말을 고집한다. 세간에 너무 굳어져버린 차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차이의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51


 들뢰즈가 '개념'의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면, 데리다는 언어가 담지 못하는 한계성에 보다 더 주목한다. 음성 언어인 말과 문자 언어인 글이 가지는 서로 다른 특징은 온전하게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고 이 과정에서 소실되는 의미가 생겨나게 된다.


 difference와 differance은 프랑스어에서 둘 다 '디페랑스'로 발음된다. 3음절의 모음 e와 a에 의해 표기로는 구분되지만 말로 구현될 때 두 단어의 차이는 소멸되고 만다. 분명히 문자로는 차이가 나지만 말소리로 따지면 차이가 없는 것이다. 데리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한 철학적 맥락을 지닌다.(p52)... 한마디로 a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존재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즉 , "알파벳의 차이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글로 쓰일 수도 있지만, 발음이 같기 때문에 그 차이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a는 죽음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음성 언어'라는 폭군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다. 데리다가 e가 아닌 a를 붙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차이가 어떠한 경우에도 고정되고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진행되는 과정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61


 그렇다면, 과연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존재의 의미가 명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 자체이다. 의식 - 무의식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텍스트라는 체계이며, 의미이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 이러한 부분은 들뢰즈의 다양체가 가진 '다양성'과도 통할 수 있다. 들뢰즈의 '다양성' 개념은 모든 물질이 무한한 이미지의 총합이라는 면에서 데리다의 이중인상과도 연결되지만, 이로부터 이들 사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예술작품의 의미가 텍스트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그것들이 얽히는 중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자체는 텍스트의 안과 밖의 구분 자체가 허물어진 경계 자체일 뿐이다. 이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라도 쉽사리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본 예술작품의 의미란 바로 이것이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96


 무의미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가 삼지 않는가의 문제가 헤겔과 데리다의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낸다.(p147)... 데리다에게 의미란 무의미와 대립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미란 항상 그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의미와 무의미가 서로 중첩되어 의미가 무의미이기도 하며 무의미가 의미이기도 한 사태를 데리다는 이중인상 surimpression이라고 부른다.(p148) ... 데리다는 무의미와 의미의 얽힘 혹은 이중인상으로 이루어진 차연의 논리를 주장한다. 데리다의 텍스트 개념은 바로 이러한 차연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잠정적인 체계에 불과하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150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들뢰즈가 '차이 자체'를 인정하며 개념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연결관계 형성에 대해 분석한다면, 데리다는 존재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에 집중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리마톨로지 Grammatologie>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법의 힘 Force de Loi> 등을 보면 그의 사상 자체가 여러 주제의 중첩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개별 리뷰로 정리하도록 하고,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라는 입문서 수준에서는 이 정도로 거칠게나마 윤곽을 잡도록 하자...


 데리다와 들뢰즈가 개념을 폄하하는 것은 세상을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 세상의 다양성이 사라져버린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철학이 개념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현실의 풍부함을 되찾겠다는 노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철학에는 개념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면서 이 세상을 개념과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려는 기존 철학자들의 사상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_ 박영욱,  <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p24 


PS. 들뢰즈의 책이 데리다의 책보다 더 접하기 쉬운데, 이는 들뢰즈 철학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들뢰즈의 창' 시리즈도 한 몫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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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27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들을 보니 열공하고 싶은 마음이 팍팍 드네요.
독서 계획표를 짜야겠어요. 스피노자, 칸트, 들뢰즈, 니체 등
책을 읽다 보면 많이 거론되는 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0-09-27 21:41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창‘ 시리즈는 들뢰즈의 시각에서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철학자들의 사상을 잘 정리한 책들이라 여겨집니다. 페크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바람돌이 2020-09-27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설을 읽으면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힐것 같은데 막상 저들의 오리지널 책을 들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구요. ㅎㅎ 무슨 새로운 개념들이 그리 많은지..... 전 겨울호랑이님 해설로 만족하겠습니다. 페크님도 겨울호랑이님도 화이팅하셔서 무지한 저에게 기쁨을주세요. ^^

겨울호랑이 2020-09-27 21:45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님 뿐 아니라 저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대강의 의미를 이해하고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다면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로서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는 낯설어도 자주 접하다보면 글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책을 펼쳐 봅니다...^^:)
 


 후설이 철학을 연구하며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것은 철학을 모든 개별 학문의 이론적인 토대가 될 수 있도록 개혁하는 일이었다. 그는 이 과제를 '철학은 그 본래의 목적상 가장 엄밀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했다. 이때의 엄밀성은 다름 아니라 불분명한 가정이나 미심쩍은 가설은 어떠한 것이든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28 


 하이데거가 보기에 종래의 철학은 존재를 늘 존재자처럼 다루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은 다 존재자, 즉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 존재자들이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존재', 즉 '있음'이 어떤 식으로든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존재'를 '존재자를 존재자이게 해 주는 어떤 것'으로 이해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존재'를 '어떤 것'으로 보면, 그것은 다시 존재를 존재자처럼 보는 것은 결국 존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접근 방식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그는 '은폐'라는 이름으로 표현했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31


 현상학의 두 거장 에드문트 후설( Edmund Husserl, 1859 ~ 1938)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사상을 다룬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는 이성(理性, reason)으로 대표되는 근대 유럽 문명과 과학 기술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서로 다른 방법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엄밀한 학문'으로 대표되는 후설의 사상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후설이 생각하는 바는 매우 명료하다. 즉, 토대가 되는 학문이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토대가 되는 학문이 언제든 거짓으로 판명날 수 있는 판단들로 이루어진 체계라면, 그 학문을 기초로 해 세워진 또 다른 학문들의 체계 역시 위태로워지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학문이 토대의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후설은 철학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후설의 학문적 꿈이기도 한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56


 후설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명확하게 드러난 이성의 한계, 근대성의 한계를 절감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학문 체계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고, 그 중심에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객관성 위에 세워진 새로운 철학. 이것이 후설이 생각한 새로운 철학이며, 현상학이다. 

 

 철학의 새로운 방법과 관련해서 후설은 먼저 '무전제성'이라는 이념을 내세운다... 후설이 말하고자 했던 '무전제성'은 어떤 전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가정은 결코 전제로 삼지는 않겠다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p64)... 후설은 대상이 어떤 왜곡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주어진 모습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현상'이라고 부른다. 후설의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67

 

 다만, 후설이 생각하는 객관성은 기존의 객관성과는 조금 다르다. 의식과 대상을 분리하는 기존의 객관성이 아닌, 의식과 대상을 인정하고 이들간의 지향적 상관관계를 체계적으로 해명한다는 점이 후설 현상학의 특징이다. 후설에 의하면 의식과 대상간의 유동적이며 중첩되는 관계가 저마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순수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환원'이라는 방법을 통해 수많은 현상들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 마치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말한 '영원의 상 sub specie aelernitatis' 아래서 전체를 조망하는 것 같이 순수한 관점에 이르는 것을 후설은 목표한다.


 후설은 학문의 객관성을 확보하고자 되도록이면 주관적인 요소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다양한 관심들과 대상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식들 중에 무엇이 가장 근본적이겠는가? 가장 근본적인 방식은 바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현상의 의미는 늘 다를 수 있음을 자각하는 태도, 즉 하나의 대상이 각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의미 현상'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설은 이러한 태도야말로 참된 의미의 객관성이라고 말한다.(p71)... 후설은 의식과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의식과 대상은 언제나 함께하는 동반자다.. 의식은 언제나 '~에 대한 의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는 대상의 방향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상 역시 의식 없이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을 의식의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74


 그렇지만, 과연 인간이 신(神)과 같이 전체를 조망해서 현상으로부터 본질을 추출해 낼 수 있을까. 쿠르드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이 불완전성 정리(Godel's incompleteness theorems)를 통해 증명한 바와 같이 가장 이성적인 학문으로 알려진 수학마저도 그 체계 내에서 증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 또한 불가능하지 않을까. 괴델의 논증처럼 하이데거는 인간(현존재)가 결코 자신이 속한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후설과 대립한다.


 후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이른바 '순수한 현상'을 아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그와 같은 관점을 유지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후설의 현상학이 부딪치는 일종의 한계가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순수한' 관점에 도달하기 어렵다면, 후설 현상학의 목표와 이념 역시 좌초되기 쉽기 때문이다. 후설은 그와 같은 관점에  '선험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선험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세계를 마주해서 겪는 경험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지를 묻는 '태도'를 말한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92


 하이데거는 존재(sein, be)와 존재자(seiendes, , is-ness)를 구별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앴을 때 인식하는 것은 존재자이지 존재가 아니다. 존재가 '0'과 '1', '삶'과 '죽음' 처럼 디지털(digital)적인 것이라면, 존재자는 아날로그(analogue)적이다. 그중에서 인간은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현존재(Dasein)'가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세계 속에서 그 무엇 또는 누군가와 함께 하며 존재(있음)의 의미를 찾는데, 만약, 현존재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면 불안이 생긴다. 존재와 비존재는 삶과 죽음과 연결되고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 ~ 1980)의 실존철학과 접점을 이룬다.


 모든 학문의 탐구 대상은 존재자들이다. 학문은 존재자들을 분석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존재'가 '존재자'와 다르다면,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의 방식으로 존재를 말할 수는 없다. 하이데거가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라고 평한 것은 존재를 존재자처럼 다루는 방식이 결국 존재 자체를 은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p100)..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여타의 존재자들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구별되는 존재자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101


 인간이 특별한 존재자인 까닭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유일한 존재자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p104)... 현존재는 자신에게서 존재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는 존재자다. 인간, 즉 현존재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자도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존재의 특성을 실존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106

 

 인간은 그저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그 한계는 인간을 그저 좌절하게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과 그 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솔직하게 자신의 삶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는 순간일 것이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112


 이처럼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는 근대 유럽 문명의 한계라는 공통된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후설과 하이데거의 답을 비교 설명한다. 인식 - 대상의 상관관계로부터 순수한 현상을 보려고 한 후설과 세계와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의 문제를 말한 하이데거. 이들의 관계속에서 공자(孔子, BC 551 ~ BC 479)와 맹자(孟子, BC 372 ? ~ BC 289 ?)의 '예 (禮)'가 떠오른다면 너무 무리한 연장일까. 춘추(春秋)시대의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제시한 공자의 주례(周禮)와 사단(四端)인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서의 맹자의 예. 공자의 예는 보편질서라는 의미에서 후설의 선험적 관점과 통한다면, 맹자의 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는 점에서 세계 내에 현존재를 강조한 하이데거 철학과 통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후설과 하이데거 모두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철학을 발견하게 되는데 후설의 선험적 관점은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의 초월성을 이어받은 반면, 하이데거는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사물을 발전시켰다는 인상을 받는다. 결국 또 칸트를 만난 것을 보면, 근대 이후 철학에서 칸트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후설은 환원이라는 방법을 통해 우리의 이성이 특정한 관점이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상정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후설의 이른바 선험적인 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상황속에 존재할 뿐이다. 그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직면한 냉정한 사실이다. 그는 인간 실존의 이러한 상황을 '세계 - 내 - 존재'라는 말로 표현한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106


 후설이 하이데거는 세속적인 주관과 선험적인 주관을 철저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하고 그의 철학을 경계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후설이 보기에 하이데거는 '상황'이라는 사실에 인간을 가두어버림으로써, 모든 상황적 조건을 뛰어넘는 보편타당한 학문의 세계로 진입하는 통로에 바리케이트를 쳐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후설이 의식을 절대적인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가려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근원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 즉 현존재를 가장 생생한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가장 근원적인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_ 박승억,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p120


 <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에 담긴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의 큰 줄기를 잡고, 현상학에 도전한다면 어려움은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점에서 좋은 입문서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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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스가 생각한 공리주의의 이론적인 약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의 증가와 그 사회의 정의로움이 반드시 연결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왜 한 사회의 부의 증가가 곧 그 사회의 정의로움으로 나갈 수 없을까?(p65)... 공리주의는 일단 사회 재화를 키우는 데는 일익을 담당했지만, 그로부터 발생한 사회 재화의 정의로운 분배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이것이 바로 롤스가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요지다. 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66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은 '정의'에 대한 롤스(John Rawls, 1921 ~ 2002)의 의견과 이에 대한  매킨타이어(Alasdair Chalmers MacIntyre, 1929 ~ )의 비판을 간략하게 정리한 입문서다. 책은 '정의 Justice'에 대한 롤스의 논리를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비판하는 매킨타이어의 입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중심이 롤스에 다소 치우친 감이 있지만 (그래서 '불편부당'하지 않게 느껴지지만,)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의 내용을 잘 요약정리한 입문서라는 점에 좋은 평가를 하고 싶다. 먼저 롤스의 이론을 살펴보자. 롤스의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은 '원초적 입장'과 '무지의 베일'인데, 본문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롤스는 수많은 정의관을 대조, 평가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원초적 입장'이다... 원초적 입장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공정한 조건에서 정의원칙을 선택하는 상황이다. 원초적 입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실에서 실제로 선택하는 상황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 가상적으로 심사숙고하여 정의원칙을 선택하는 상황이다. 둘째, 이러한 선택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정의관들에서 그 도덕적 우열을 따져보는 데서 선택이 이루어진다. 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77


 '무지의 베일'은 원초적 입장의 공정성을 최종적으로 확보하는 계기다... '무지의 베일' 아래서 원초적 입장의 공정성은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선택이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상태를 '불편부당함(impartiality)'이라 한다.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이 불편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의 선택이 당사자들이 이해관계에서 철저히 분리되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83


마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 ~ 1955)가 사고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을 고안해낸 것처럼, 로스는 사고실험을 통해 이상적인 낙원인 엘리시움(Elysium)과 같은 이상 사회를 생각해 낸다. 사익(私益)을 추구하지 않고 절대적인 사회법칙에 따라 운영되는 그런 이상사회를 꿈꾸는 롤스의 이론안에서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이데아 Idea'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데아를 통해 보편타당한 법칙을 도출해낸다는 점에서 롤스와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 사이에 공통점을 찾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는 빛을 찾기 위해 죄수 자신이 보고 있던 흐릿한 모습을 버리고 동굴 밖으로 나갔다면, 롤스의 이론에서는 정의의 이데아를 위해 흐릿한 베일이 필요하다는 점은 다소 차이가 느껴진다.


 롤스의 정의관은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근본원칙에 기초한다. 1) 모두와 조화롭게 살 수 있는 평등권과 자유권이 구비된 최상의 체제에서 동등한 자격을 갖는다. 2) 사회, 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범위 내에서 받아들여진다. 첫째는 모두에게 직무와 직위가 열려 있는 공정한 기회 균등이 조건 하에서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사회의 최소 수혜자에게 혜택이 가장 높은 쪽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p98)... 제1 정의원칙은 정치적 자유를 규정, 규제하는 원칙이다.... 제2 정의원칙은 정의로운 체제 내에서 원활한 사회/경제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원칙이다.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99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에서는 롤스의 정의관을 '자유'와 '평등'의 조화에서 찾는다. 다만, 롤스에게 '평등'은 절대적인 평등이 아니라, 차등원칙에 따른 평등으로 이를 통해 '양 量'에 치우친 공리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롤스 정의관의 특색은 자유와 평등 문제를 결부시키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 선택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오직 '자유'를 강조할 뿐 평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의' 문제의 독특성을 보지 못한다.(p118)... 차등원칙은 사회적 약자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사회협동을 진작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모두가 상호 호혜할 수 있도록 모든 활동을 장려한다.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125


 이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비판은 무엇일까.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상적인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제시한 롤스의 사상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이상만 강조하고 있다는 매킨타이어의 비판 속에서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라는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 ~ 1804)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공동체주의자들로 일컬어지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현실에서 도덕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으로 바라보았다.(p132)... 롤스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주된 논지는 지나치게 인간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p133)... 그들은 현실의 관심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동떨어져 있다. 오로지 개인의 진정한 관심에서만 정의원칙을 선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상은 서구 전통과 동떨어질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전통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매킨타이어는 생각했다. 이렇게 볼 때, 원초적 입장은 결코 인간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134


 매킨타이어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초적 입장은 근대인의 이상에 바탕을 둔 이성적인 절차일 뿐이다. 원초적 입장이 표방하고 있는 도덕적 관점은 서구 근대사상에서 나타난 이성의 합리성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신뢰에는 서구 역사상에 나타난 도덕적 이념이 다르다는 사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145


 정리하면, 롤스가 '무지의 베일'로  '원초적 입장'의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선택을 '정의'의 이데아로 삼는다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선택이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문화적 전통을 강조한다. 이러한 이들의 관계 속에서 각각 이상과 현실을 강조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문화(文化)'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의 철학을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와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 심리학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개별 리뷰를 통해 별도 정리하도록 하고, '정의'를 둘러싼 롤스의 매킨타이어의 내용 요약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롤스는 정의개념을 결국 개인과 사회제도를 연결시켜주는 핵심 개념으로 본 반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매우 추상적인 인간을 전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그 강조가 서구 근대철학의 전통을 전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p148)... 롤스의 가정은 옳음의 관점이 각 개인의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고, 매킨타이어의 가정은 그 울음의 관점이 보편타당한 영원의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체적인 가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 속에서 정당화된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_ 이양수,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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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9-15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리시움>이란 영화가 생각나는데요, 그 영화에서도 자유와 평등이 균일하게 추구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유와 평등이 모순되지 않은 사회가 진정 가능한지 궁금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0-09-15 23:11   좋아요 1 | URL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영화 <엘리시움> 속의 사회는 공중에 떠있다는 점에서만 유토피아일 뿐 극단적인 자유와 불평등이 적용되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이상향이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어쩌면, 선택받은 엘리시움 시민들 사이에서는 평등이 적용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 경우에는 조금 이상하지만 자유와 평등이 그 사회 내에서는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9-15 22:55   좋아요 1 | URL
자유와 평등이 동시에 균일하게 추구될 수 있다는 공허하고 근거나 구체적 방법 없이 그냥 주장하는 책은 많이 봤습니다. 그렇지 않은 책, 혹시 아시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꼭 읽어보고 싶어드리는 청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9-15 23:15   좋아요 1 | URL
제가 읽은 책은 대부분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읽으셨을 거라 생각되기에 선뜻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이 상세하게 이들간의 관계를 다룬 책으로 생각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9-16 05:35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
꼭 읽어보겠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0-09-16 07: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하루 되세요!^^:)

페크pek0501 2020-09-16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니 정의롭다는 것도, 최선이라는 것도 헷갈리더군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현명한 판단이란 건 아예 없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겨울호랑이 2020-09-16 15:27   좋아요 1 | URL
페크님 말씀처럼 사람의 가치란 상대적이라 어느 것이 최선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