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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유라시아 견문 2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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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세와 시류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서세동점의 말기이다. 서구적 근대의 말세이며, 미국적 세계화의 끝물이다. 그러나 탈근대도 아니요, 반세계화도 아니다. 구미적 근대에서 지구적 근대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적 세계화에서 세계적 세계화로 진입하고 있다. 지구적 근대화와 세계적 세계화의 최전선에 유라시아가 자리한다. 구 舊 제국들은 귀환하고, 옛 문명들은 복원된다. 동서고금이 사통팔달 회통한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338

<유라시아 견문> 시리즈 전체 주제를 요약한다면, 아마도 위 문단으로 정리될 것이다. <유라시아 견문 2>에서는 미얀마의 양곤부터 그리스의 아테네까지 여정을 다루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 동부 유럽에 이르는 이 여정에서 저자는 제국주의 시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이들의 모습을 제시한다.

아웅산과 수치 사이에 네읜 Ne Win(1911 ~ 2002)이 있었다. 아버지의 옛 동료이자, 딸의 정적이었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접수한 것이 1962년이다. 1988년까지 장장 26년을 집권했다. 유별난 일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박정희가 등장한 것이 1961년이다.(p30)... ‘아웅산 수치‘라는 이름, 혈통이야말로 최대의 정치 자산이었다.(p59)... 다시 출발하는 미얀마 또한 ‘다른 백 년‘의 든든한 동반자이기를 바란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그녀의 삶과 사상은 영국산이다. 새 시대를 여는 맏딸이기보다는 구시대의 막내이지 십상이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67

제국주의 시대를 마치고 독립을 쟁취했지만, 지배계급은 새시대를 준비하는 이들이 아니라, 지난 세대를 마무리하는 이들이었다. 미얀마의 수치 가문, 인도의 간디 - 네루 가문 모두 제국주의 모국에서 교육받은 최후의 지배세력이었고, 최근까지도 제국주의 지배의 연장선상에서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다. 저자는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세력 교체라는 변화의 움직임을 발견했다. 2016년 당시는 우리에게도 역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던 시기였기에, 유라시아 대륙에 부는 변화의 바람을 지적한 저자의 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독립인도의 주역은 단연 네루였다. 펀자브주의 브라만 출신인 그의 사회주의 또한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네루 본인도 말년에 스스로를 ‘인도를 다스린 마지막 영국인‘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p99)... 영국 독립 이후 인도에서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실시할 수 있었던 것도 식민지 제도를 크게 변경치 않고 계승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급진적 개혁 또한 실행하지 않았다. 국민회의의 주요 구성원들이 식민지 시대부터 대두한 중앙의 중간층 또는 지방의 농총 지주 및 부농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에는 의회제 민주주의가 안성맞춤이었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102

이와 함께, 저자는 우리가 유라시아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한다. 우리가 동남아시아와 무슬림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서구에 의해 번역되고, 왜곡된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기억의 왜곡이 과거 역사에만 한정되지 미디어에 의해 진행중에 있기에, 현실과 인식의 괴리는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도 함께 알려준다.

1988년부터 카슈미르의 무장투쟁도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총력전으로 응징했다. 1989년 한 해에만 8만 명이 학살되었다. 700만 카슈미르 인구의 1 퍼센트가 죽은 것이다. 같은 해 텐안먼 사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폭압이었다. 실제로 북쪽으로 이웃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견주어도 억압의 강도가 훨씬 높고 가혹하다. 국가폭력도 만연하다. 무슬림에 대한 고문과 강간이 숱하게 자행된다. 그럼에도 잘 부각되지 않는다. 프레임 탓이다. ‘민주주의 인도‘와 ‘이슬람 파키스탄‘ 구도로 접근한다. 카슈미르에 내재하지 못하고 대분할체제의 균열을 투영하는 것이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232

여론조사의 신빙성 또한 갈수록 의심받고 있습니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도, 미국의 대선 결과도 주류 언론의 여론조사는 줄곧 잘못된 정보를 발신해왔습니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573

대표적인 왜곡된 인식 사례로 저자는 무슬림의 ‘히잡‘ 문화를 든다. 흔히 여성 억압의 도구로 알고 있는 히잡이지만, 무슬림들에게 히잡은 여성들의 적극적 투쟁 문화의 소산임을 저자는 밝힌다. ‘자신의 몸을 보여주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며, 외부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무슬림 문화를 우리는 제대로 보고 있는가를 비판하는 저자의 지적이 자못 날카롭게 느껴진다.

무슬림 문화에 대한 오만과 편견이 켜켜이 쌓여 있다. 히잡도 그 가운데 하나다. 흔히 여성 억압의 상징처럼 간주된다. 그러나 사정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 20세기 내내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썼던 것이 아니다. 이란과 터키 같은 개발독재형 우파 국가에서도,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나 나세르의 이집트 같은 좌파 독재국가에서도 히잡 착용은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국가가 국책으로 히잡을 벗겨냈던 것이다. 그 독재권력에 맞서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열혈 여성들로부터 히잡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억압은 커녕 저항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의상을 통한 인정투쟁은 민주주의가 착근하면서 남성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갈수록 남성들도 전통적 복장으로 갈아입고 있다._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2>, p559

<유라시아 견문 2>에서 저자는 궁극적으로 유라시아가 새로운 시대의 무대가 될 것임을 말하면서도,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한다. 유라시아 각국들이 과거 암울한 제국주의 시대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거나, 힘겹게 빠져 나왔기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부터 먼저 이웃을 바르게 보자는 저자의 울림이 간절하게 느껴진다.

PS. 이제서야 겨우 눈치챘지만, 지금 저자의 <유라시아 견문> 3권은 그냥 씌여진 것이 아니다. 각각 ‘비단길‘(1권) , ‘바닷길‘(2권), ‘초원의 길(3권)‘에 대응하는 것임을 책을 다 읽은 후에야 간신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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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 견문 3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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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비아의 감각으로, 유라시아의 시각으로 서구사를 다시 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변방사를 보편사로 추켰던 ‘가짜 사관 Fake History‘을 거두고, 서양사와 유라비아사의 지평으로 서구사를 재조망해야 할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고 비정상을 정상화하는, 적폐 청산의 일환이다.(p38)

「유라시아 견문 3」은 포르투갈의 리스본부터 중국 심양까지 아우르는 「유라시아 견문」시리즈의 마지막이다. 저자는 유라시아 대륙을 다룬 이번 시리즈 중 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가능성 발견, 유럽에 대해서는 지난 시대에 반성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길을 주문한다. 그래서, 주로 유럽을 배경으로 한 이 책에서는 새로운 역사 해석과 새로운 사상이 유난히 강조된다.

교황은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엘리트 프로젝트라고 여겼다. 한쪽은 ‘깨어 있는 시민‘을 양성하고, 다른 쪽은 ‘각성된 노동계급‘을 배양코자 한다. 어느 쪽도 민초들의 삶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오래된 지혜를 신뢰하지 않는다. 유물론에 바탕하고 있음도 공통적이다. 그래서 인간을 물질적으로만 이해한다.(p67)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진단에 확증을 갖게 된 것이 EU 활동을 통해서 입니다. 만약 유럽의회가 자유민주주의가 도달한 현시점 최고의 기구라고 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바람직한 이념도 아니고 아름다운 체제도 아닙니다. 불행히도, 그리고 매우 불쾌하게도 공산주의와 너무너무 닮아 있습니다.(p291)

저자는 교황 프란치시코와 크로아티아의 스레츠코 호르바트의 입을 빌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에둘러 비판한다. 서로 대립하는 두 사상의 근본에는 물질주의가 자리잡기에 현대의 문제를 타파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을까. 저자는 독일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당의 보수주의 속에서 일단의 가능성을 본다.

(독일의 자부심) 근저에는 기독교 민주주의가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의 독일을 일군 정당,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은 기독교민주연합이다. 기민당은 그저 보수정당이 아니다. 20세기의 잣대, 좌/우로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결합, 고전 문명과 현대 정치의 융합이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저자가 말하는 바는 한 문명 내에서의 개혁이 아니다. 제약된 공간에서 시간의 융합이 아닌 ‘유라시아‘와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공간의 융합을 통해서만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 태어남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미 유라시아는 이런 공동작업의 역사가 있다.

유럽의 계몽주의 또한 자가발전, 내재적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니다. 동/서 문물 교류, 융복합과 통섭의 소산이었다. 마치 뉴턴이 이슬람 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근대 과학의 법칙을 세운 것처럼, 칸트와 헤겔은 중화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근대 철학의 원칙을 이룬 것이다. 유라비아와 유라시아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의 빛나는 결정체였다.(p102)

그러나, 저자가 말한 융합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양 극단에서 배척받는 제3의 길은 과거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길을 가야하는가. 가야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물음은 저자를 통해 던져졌으니,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 찾아야할 것이다. 저자의 주장이 생소하기는 하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알지못했던 신세계를 믿고 싶다. 그렇지만, ‘확신‘ 전에 ‘확인‘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공부하려는 노력이 따라야할 것이고, 이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 될 것이다...

‘유고 공습‘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애초 질문에 답이 담겨 있었다. 세르비아는 방편이었을 뿐이다. 밀로셰비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목적은 ‘유고‘에 있었다. 서구식 자본주의도 아니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실험을 추진했던 유고를 지워버리려고 했다.(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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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유라시아 견문 1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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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중국으로, 서구에서 동방으로, 북에서 남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가 않다. 물론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아시아가 구미를 능가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다만 중국이 미국을 흉내 내고, 동방이 서방을 복제하고, 남이 북을 답습하면 진정한 변화라고 하기가 힘들다.(p106)

「유라시아 견문 1」에서 저자는 태국 치앙라이에서 말레이시아의 할랄 스트리트에 이르는 길을 여행하면서 변화하는 세계를 체감하고 해석한다. 이를 통해 저자가 바라본 변화의 핵심은 중국에 의한 새로운 세계 권력 구도 재편이다.

지난 200년 세계를 지배했던 영국과 미국은 국가들과 세력들간의 대립을 부추겨 어부지리를 얻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았다... 한반도의 분단 또한 그 일환이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립하고 재생산하는 핵심 기제였다. 이러한 패권 전략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것이 소위 ‘지정학 Geo-Politics‘다. 그리고 이 지정학은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유명한 비유처럼, 유라시아를 분할하고 분단하는 것을 핵심 교리로 삼는다.(p234)

저자는 책에서 중국 주도의 새질서에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중국은 이전의 패권국이 아니라, 과거 9세기 ‘성당‘시대를 재현할 실력과 신유학 사상을 갖춘 대국이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중국과 인도가 손잡고 유라시아를 선도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책임대국‘을 표방하는 중국은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20세기형 ‘강대국‘을 추구하지 않는다. 무력에 의존하여 패도를 행사하는 패권국이 아니라, ‘왕도의 근대화‘를 도모한다. 20세기의 대장정이 21세기의 일대일로와 접속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p407)

작금의 길항은 미 - 중간의 패권 경쟁이 아니다. 패도를 부리는 세력과 왕도를 소망하는 세력 간의 일합이 있을 뿐이다. 반동파와 반전파의 길항이다. 구체제와 신상태의 대결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충돌이다.(p128)

나는 친디아(China + India)의 시너지 효과에 낙관적인 편이다. 모자란 것은 보태고, 남는 것은 나눌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중국은 자본이 넘쳐나지만 노동력이 줄고 있다. 인도는 자본은 부족한데 인력은 넉넉하다. 상호보완할 수 있다.(p90)

「유라시아 견문 1」은 우리에게 생소한 유라시아의 구석구석을 소개한다. 책에 소개된 내용 중 많은 부분이 생소하여, 그동안 이들 지역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성과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저자는 중국이 21세기를 이끌어갈 책임있는 대국이라고 확신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저하게 된다. 그들 문화에 뿌리깊은 ‘중화주의‘가 영화, 노래 등에 표현되는 것을 보면, 이들 역시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힘이 예전같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중국의 부상이 위기를 맞은 21세기 문명에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유라시아 견문」에서는 이를 기정사실화하지만, 우리의 고민은 다른 것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미- 중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 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라시아 - 태평양‘ 사이의 균형자가 되어 국익을 극대화하는가에 집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위치에 섰을 때 중국문명의 잘못된 선택에도 우리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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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 -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 인문과 지혜 4
마르크 오제, 이윤영 외 옮김 / 아카넷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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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가 정체성과 관련되며 관계적이고 역사적인 것으로서 규정될 수 있다면, 정체성과 관련되지 않고 관계적이지도 않으며 역사적인 것으로 정의될 수 없는 공간은 비장소로 규정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주장하는 가설은 초근대성이 비장소들을 생산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인류학적인 장소가 아니며 보들레르식 근대성과는 대조적으로 예전의 장소들을 통합하지 않는 공간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기억의 장소'로 목록화되고 분류되고 승격된 이 예전의 장소들은 초근대성 속에서 제한적이고 특수한 자리를 차지한다(p98)... 비장소의 공간은 독자적 정체성도 관계도 아닌, 고독과 유사성을 창조한다. 비장소의 공간은 역사에도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성과 긴급성이 비장소의 공간을 지배한다.(p125)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Marc Auge, 1935 ~ )의 <비장소 Non-Lieux>에서 초근대성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비(非)장소'로 말하고 근대의 시간, 공간과는 다른 또다른 세계를 규정한다. 주변과 통합되지 않으며, 과거와 연관되지 않는 시공간(Space-Time)인 비장소. 비장소의 세계는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의 세계처럼 기존 민족학의 틀로는 해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근대시대의 시공간의 왜곡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이를 '과잉 surabondance' 또는 '과도함'에서 찾는다.


 초근대성의 관점에서 시간을 사유하기 어려운 이유는, 동시대의 세계의 사건의 과잉 때문이지 오래전부터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진보의 이념이 몰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임박한 역사라는 테마, 바로 발뒤꿈치에서 우리를 따라오는 역사라는 테마는, 역사가 의미를 갖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테마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현재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요구로 인해 우리가 가까운 과거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p44) <비장소> 中


 초근대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과도함의 두 번째 형상은 모두 공간과 관련된다. 공간의 과도함은 우선, 여기서 약간은 역설적으로, 지구가 축소되었다는 사실의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주 공간에 내딛은 인류의 첫 걸음 때문에 우리의 공간은 극도로 작은 점으로 축소되었고, 위성 사진은 우리의 공간에 정확한 척도를 제공해준다. 이와 동시에 세계가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p44) <비장소> 中


 강력한 중력이 블랙홀(black hole)을 만들듯이, 지나친 과잉으로 우리의 시공간은 극도로 압축되었다. 강력한 중력이 시공간의 왜곡을 불러오듯, 초근대사회에서 표준화된 인간을 가정한 연구 방법으로는 더이상 분석할 수 없는 한계를 갖는다. 초근대 시대의 개인은 모두가 특수한 개인이다.


 민족학은 오랫동안 의미 있는 공간들, 스스로를 온전한 전체로 생각하는 문화에 동일시된 사회들, 즉 의미의 세계를, 세계 속에서 분리시켜 파악하려고 전념해 왔다. 이 의미의 세계 안에서 그 표현에 불과한 개인과 집단들은 동일한 기준, 동일한 가치, 동일한 해석과정에 의해 규정된다.(p47)... 마르셀 모스 Marcel Mausss는 심리학과 사회학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족학적 연구에 정당화될 수 있는 개인성의 정의에 중대한 한계를 설정했다. 그는 사실상 사회학자들이 연구한 인간이 근대의 엘리트처럼 분할되고 억제되고 통제된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총체로 규정될 수 있는 평범한 인간 또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개인성은 한 문화를 대표하는 개인성, 전형적 개인성이다.(p31) <비장소> 中


 마르크 오제에게 비장소는 과잉의 공간이며, 단절의 공간이다. 근대의 공간이 과거의 역사인 시간이 녹아져 있는 곳이라면, 비장소는 '장소'와 '장소'를 연결시키는 선(線)이다. 수많은 선들이 우리 공간을 갈라놓으며 개인은 고독을 느낀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이용하며 다른 장소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비장소에서 개인은 디지털(digital) 정보로 취급되며, 익명의 존재로 전락된다. 이러한 사실은 디지털 정보 자체가 2진법 체계의 단속적 정보라는 사실과 함께 불연속의 연장으로 다가온다.


[사진] Non-Places(출처 : http://www.sarahpetersphotography.com/non-places)


 공간적 과잉은 규모의 변화로, 이미지화된 가상적인 준거 reference의 증가로, 이동수단의 괄목할 만한 가속화로 표현된다. 이 과잉은 구체적으로는 엄청난 물리적 변화로 귀결된다. 도시 집중, 주민의 집단 이주, 우리가 '비장소'라고 부르게 될 것의 증가가 그것이다. 비장소는, 마르셀 모스 및 온갖 민족학적 전통이 시공간 속에 구체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문화 개념에 결부시킨 '장소'라는 사회학적 개념과 대립한다. 비장소는 승객 및 재화의 가속화된 순환에 필요한 설비일 뿐만 아니라 교통수단 그 자체, 또는 거대한 쇼핑센터, 그리고 지구상의 난민을 몰아넣은 임시 난민 수용소이기도 하다.(p48)...앙드레 말로 이후 우리가 사는 도시는 박물관으로 바뀌고 있지만, 우회로, 고속도로, 고속철도, 초고속철도는 이로부터 우리를 갈라놓는다.(p93) <비장소> 中 <비장소> 中


 그렇지만, 비장소와 장소의 관계는 단절로 그치지 않는다. 비장소는 장소를 나누지만 또한 장소를 만들어낸다. 비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은 장소에서도 이루어지며, 장소에서 만들어진 시간이 우리에게 역사(歷史)로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가 큰 틀에서 익명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장소의 세계는 비장소의 개인의 방향을 정한다. 이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이루는 서로 다른 부분인 것이다. 마치 태극(太極)을 음(陰)과 양(陽)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장소와 공간, 장소와 비장소는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에게 침투한다. 비장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다.(p129)... 말의 씀씀이는 핵심적인데,그것이 습관들의 씨실을 짜고 시선을 가르치며 경관에 관한 정보를 주기에 그렇다.(p130)... 비장소를 경유하는 말과 이미지들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상생활의 일부를 구축해가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장소들에 다시 뿌리 내린다.(p131)...  장소와 비장소는 명확히 잡히지 않는 양극성에 가깝다. 전자는 결코 완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후자는 결코 전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이들은 정체성과 관계의 뒤얽힌 게임이 끊임없이 다시 기입되는 양피지들이다.(p98) <비장소> 中


 우리는 마르크 오제의 <비장소>에서 외롭고 단절된 개인과 단절된 사회 공간인 비장소를 만나게 된다. 현대사회의 과잉이 가져온 시간과 공간의 과잉.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지금 이순간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 그리고 이로부터 오는 단절된 시간과 비장소. 우리는 <비장소>를 통해 우리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동시에, 외로움을 넘어선 연결(connection)의 희망도 발견하게 된다. 현대 사회의 과잉과 이로부터 생겨나는 고독.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결. 이것이 <비장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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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면 - 레비-스트로스, 일본을 말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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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빙하기 동안, 그러니까 약 12만 년 에서 18만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아시아 대륙에 붙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바다 위에 떠오른 육지처럼 아시아와 아메리카는 현재의 베링해협을 육지처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습니다. 대륙 가장자리를 따라 일종의 육교가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인간과 물건과 사상들이 중국 연안지대와 한국, 만주, 시베리아 등을 거쳐 인도네시아에서 알래스카까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신화는 공통의 문화유산이며 우리는 그 파편들을 여기저기서 모으는 것일 뿐입니다.(p27)

「고사기」안의 일본 문화 특성을 두 측면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선, 그 먼 옛날에 그렇게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민족적 유형과 언어, 문화를 형성한 것을 보면, 일본은 만남과 혼합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반면, 구세계의 극동이라는 지리적 위치 및 간헐적 고립으로 인해 일본은 아주 희귀하고 섬세한 정수들만 증류하는 일종의 여과 장치 혹은 증류기 기능을 했습니다.(p31)

일본 문화는 다른 동양이나 서양에 비해 독특합니다. 일본은 먼 과거에는 아시아로부터, 가까운 과거에는 유럽으로부터, 최근에는 미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차용한 것들을 자신과 잘 동화되도록 아주 정성스럽게 걸러내 최대한 미세하게 만들어 그 정수만을 받아들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일본 문화는 그 특수성을 잃지 않았습니다.(p54)

보이는 달 표면, 즉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의 구유럽 세계의 역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달의 이면, 즉 일본학 연구자들과 아메리카 원주민학 연구자들이 다루는 역사를 통해 보면, 일본 역사는 더욱더 중요해집니다. 고대 일본이 유럽과 태평양 사이에서 일종의 다리 역할을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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