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중앙아시아는 동유럽 및 아프리카에 이어 세 번째로 중요한, 이슬람권으로 유입되는 노예 공급지였다. 1000년의 세계에서 중요한, 강제 이주를 유발한 요인이 바로 이 중앙아시아의 노예 판매였다.

사만 왕조는 기량 좋은 군인 노예가 미숙한 노예보다 가격이 비싸다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군인 노예 양성소를 설치했다.313 그리하여 노예 거래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되자 순도 높은 은화를 계속 만들어 냈다. 이 현상은 1000년 이후의 어느 무렵 유럽 대륙에 은 부족 사태가 야기되어 은 공급이 끊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상인 길드는 일찍부터 인도에 존재했으며, 촐라 왕조의 치세 때 번영을 구가했다. 게다가 상인 길드는 인도인과 비非인도인 모두를 회원으로 받아들여 구성원이 다양했다. 파는 물건의 종류는 달랐지만, 상인들은 군주의 특혜를 받기 위해 단합함으로써 낮은 세율을 적용받기도 하고 왕을 대리해 세금을 징수하는 일도 했다.

이 상인 길드가 촐라 왕조 팽창의 열쇠였다. 타밀어를 쓰는 상인 집단들이 동남아시아 및 중국과 무역하기 위해 조합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 후추,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각종 향료, 날염된 고급 면직물 등 고수익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사람들은 더위에는 비단보다 면이 쾌적하다는 이유로 면직물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상인들도 목화 재배부터 염색, 직조,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블록 날염에 이르기까지 목면 생산의 전 과정에 길드를 조직했다.

우리가 선조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생소함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 배우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 중에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위험성 여부를 따지지도 않고 카누 아래에서 자던 토착민들을 죽인 바이킹도 있었고, 이방인과 마주치자 시간을 갖고 참을성 있게 서서히 그들과 안면을 터 낯을 익힌 뒤에야 그들이 제시하는 물건과 자신들이 가진 물건을 주고받는 거래를 한 다른 대륙의 토착민들도 있었다.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원거리 무역 관계를 수립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세계화를 경험한 사람 모두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소함에 개방적인 사람들이 새것에는 무조건 손사래를 친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1000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면 노르드인들이 빈란드를 버리고 떠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두 사가는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원인으로 꼽는다. 또한 노르드인들이 목재 말고는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넌지시 운을 띄웠다.

1000년 무렵에 일어난 다른 만남들과 비교할 때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의 조우가 장기적으로 끼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약간의 대화, 이따금 진행된 물물교환, 아마도 사고로 일어났을 몇 차례의 육탄전. 노르드인과 아메리카 원주민 간에 일어난 접촉은 이 정도였다.

노르드인의 아메리카 탐험은 세계화와 관련된 그 밖의 다른 정보도 제공해 준다. 아메리카 대륙의 교역이 그들의 탐험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말하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은 노르드인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장거리 교역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르드인의 탐험이 가장 중요했다. 이미 존재했던 대서양 양쪽의 교역망이 그 탐험으로 연결되어 세계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노르드인들이 만일 유카탄반도에 닿았다면 그 경로는 해상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가능성은 훨씬 낮지만, 다른 곳에서 포로가 되어 유카탄반도에 도보로 끌려왔을 수도 있다. 그럼 이제부터는 바이킹 페니가 발견된 메인주의 고다드 포인트에서 육로를 통해 치첸이트사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자. 메인주에서 멕시코로 가는 데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경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북남으로 흐르는 미시시피 계곡을 통과하는 길이다. 물론 그것은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유골이든 물건이든, 그 여정을 끝까지 마쳤음을 보여 주는 증거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아메리카를 종으로 가로지르는 확장된 경로 네트워크가 1000년 무렵에 형성되었고 세계화가 시작되면서 물건과 사람, 정보가 그 경로들을 따라 이동했다고 확신한다.

콜럼버스는 카누의 중요성을 즉각 파악했다. 배 안에 "그 고장의 모든 산물이 실려 있다는 것을 (……) 한 순간에" 알아차린 것이다. 콜럼버스는 수놓아지고 채색된 면 의류, 목검, (아마도 흑요석이었을) "강철처럼 절개된 부싯돌" 칼, 구리 방울 등 "더할 나위 없이 호화롭고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물건들"을 마야인들에게서 빼앗았다.

아메리카 대륙 사람들은 스페인인들이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치첸이트사가 중심이 되었던 그 교역망은 1000년에는 북쪽의 차코 캐니언과 카호키아로 뻗어 나가고, 남쪽의 콜롬비아까지 도달했다. 그 교역망은 유연하기도 했다. 1000년 이후의 치첸이트사나 1050년 이후의 카호키아처럼,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들이 생겨나면 주민들이 새로운 통로를 개통하거나 새로운 중심지와 연결되는 해로를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블라디미르 1세의 개종은 기독교계를 형성한 핵심적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영역에는 프랑스의 두 배 크기인 40만 제곱마일(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인구 5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1세가 기독교로 개종했으니, 동유럽은 예루살렘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고 메카도 아닌, 비잔티움 쪽에 서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도 이제 더는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보유하지 않았다. 고향에 머물러 지내는 사람까지도 포함해, 그들은 이제 그들의 출생지를 종교 블록의 일부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규모가 큰 집단 사람들과 자기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핵심 단계로 진입한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인류의 대항해 -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들은 초호에서 고기를 잡고 텃밭을 일구며 고향에 머물렀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심지어 더 넓은 섬에서도 사회적 삶의 근간이었다. 농경과 연관된 사회 구조는 상속과 토지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생 순서가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오세아니아 원해의 식민화를 추진한 원동력은 땅과 상속권에 대한 추구일지도 모른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50/188

브라이언 페이건(Brian M. Fagan, 1936 ~ )의 <인류의 대항해- 뗏목과 카누로 바다를 정복한 최초의 항해자들 Beyond The Blue Horizon>에서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바다로 연결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두 발로 대지를 딛을 수 없는 변화무쌍한 바다로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경작 가능한 토지'의 제약 때문이었다. 중세 봉건 귀족들의 봉토(封土)가 제한적이어서 장자에게만 상속되고, 둘째 이하의 자녀들은 성직자 등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처럼, 고대 지중해, 인도양, 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바다로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고대 항해자들이 마음속 깊이 새겼던 것 중 하나는 인명 피해의 불가피성, 결코 귀환하지 못한 카누들, 현대의 유럽과 미국 어부들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침몰과 좌초에 대한 거친 숙명론이었다. 모든 대양을 해독하는 작업은 오랜 경험과 냉정한 현실주의, 조심스러운 항해 그리고 깊은 바다 풍경과 얼마나 친숙한가의 문제였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9/188

항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도, 축적되지도 않은 시기 항해자들은 자신들이 바다에 갖는 지식의 깊이 이상의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었다. 하나의 섬이 사라지면 다음 섬이 보이는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연안 항해을 통해 그들은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거래하면서 보다 멀리까지 나아가며 교류할 수 있었다.

끊임없는 가르침, 온갖 종류의 날씨 속에서 힘겹게 쌓은 경험, 하루하루 힘들게 암기한 각종 항해 지침은 글로 쓰이지 않은 전문 지식을 대대로 전달하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연안 항해는 짧았다. 모든 여정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여정, 순풍이 불기를 기다리거나 수지맞는 교역로 근처에 잠복해 있는 해적들을 피해 피난처에 몸을 숨기고 몇 주 씩 기다리는 항해였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화물은 끊임없이 사고파는 과정을 거치며 여정의 끝에 가서 완전히 바뀌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1/188

이렇게 바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길(道)이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 두 채의 민가가 있고, 과거 나그네들이 호텔과 같은 커다란 숙박업소와 식당 없이도 시골집의 후한 인심에 의지해 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바다는 원주민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인류의 대항해>는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했기에 이들의 관계는 상호평등적이었고, 우호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서 말리노프스키(Bronislaw Malinowski, 1884~1942)가 말한 '쿨라의 교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 않았을까.

바다의 영토는 상상의 영역까지 이어진다. 육지 부족들 사이에 꿈 Dreaming이 있는 것처럼 여기에도 바다의 영역과 물길을 아우르는 바다 꿈 Sea Dreaming이라는 것이 있다. 하루하루의 실제 세계와 정신적 영역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 원주민의 삶 속에, 창의적이고 적응력이 매우 뛰어나며 육지나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과 연계를 유지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속에 하나로 얽혀 있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26/188

이와 같은 교환 관계가 파괴된 것은 바다와의 협력관계가 깨지고, 바다를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로 인식된 근대 이후 부터다. '바다로 연결된 세계'가 아닌 '바다로 단절된 세계'로 바다를 타자화하는 관점이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이후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 ~ 1950)를 비롯한 많은 인류학자들의 연구가 오늘날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에는 '단절에서 연결'이라는 공통된 인식 때문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날 컨테이너선과 초대형 유조선의 세계에서 공식 항해 지침서는 훨씬 짧아졌고 레이더 목표물과 항만 규정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하다. 저자들은 이제 작은 정박지와 포구에는 거의 눈길을 주지 않는데 유람선을 타고 다니는 선원들에게는 이제 그들만의 안내서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바다가 다시 우리로부터 멀어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느낌은 원양 여객선이나 유람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널 때 가장 분명해진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175/188

지중해와 마찬가지로 인도양에서도 그러한 연안 항해는 전쟁중인 지배자들과 국제 외교의 그늘에 가려 역사적 각광을 받지 않은 채 번성했다. 근해 운항은 수천은 아닐지라도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채 오로지 예측 가능한 바람의 리듬으로만 이어진 여러 민족과 국가들 간의 연결을 촉진했다. 긴밀하게 상호 연관된 몬순 세계는 그렇게 생겨나 동아프리카 해안과 홍해에서부터 인도와 스리랑카, 그리고 멀리 동남아시아와 중국까지 뻗어 갔다. _ 브라이언 페이건, <인류의 대항해>, p78/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체스가 유럽에 보급되면서 몇몇 기물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기도 했다. 기물을 만드는 기공들이 코끼리의 두 엄니를 주교 모자의 두 꼭지로 오해해 코끼리가 비숍(주교)으로 바뀐 것이 좋은 예다.

바이킹들도 폴리네시아인 탐험가들과 마찬가지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이 1000년에 굳이 새로운 지역들을 탐험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의 탐험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사회구조였다. 특히 전사 집단의 역동성이었다. 야심 찬 지도자들이 새로운 영토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세계 여행을 1492년 이전에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에 일어난 특정한 접촉의 한 순간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바이킹이 뉴펀들랜드에 도착한 1000년이 바로 특정한 접촉의 순간이다. 그곳을 기점으로 사료에 묘사된 길들을 따라가며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다른 길들을 재구성해 보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00년의 세계는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를 시작한 1492년의 세계와 달랐다. 첫 번째로 다른 점은, 1492년의 유럽인들이 화기와 대포를 소지해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 거의 모두를 무력화할 수 있었던 반면에, 1000년의 여행자들은 과학기술적 수준이 비슷해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다. 1000년에는 교역의 주체도 1492년과 달랐다. 호황을 누린 곳은 중국이나 중동과 같은 세계의 일부 지역이었을 뿐 다른 지역, 특히 유럽은 뒤처져 있었다.

1000년 무렵에 각지의 사람들은 서로 간의 관계망을 수립했고 그것이 세계화의 다음 단계에 필요한 무대가 되어, 1500년대에 유럽인들은 기존의 네트워크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개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계화는 유럽인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기존에 있던 것을 바꾸고 증대시킨 것뿐이었다. 세계화는 그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고,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유럽인들은 그 많은 지역에 그토록 빨리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 인구가 2억 5000만 명에 달한 것은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본국을 떠나 이웃 나라 영토로 간 탐험가들이 인구가 적었던 이전 시기보다는 아무래도 사람들과 마주칠 개연성이 높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