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의 신격화와 동시에, 신은 갈수록 통치자의 형상을 닮아갔다. 이 시대 예술 작품에서 비슈누는 왕국의 상징물을 들고 있는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4세기 로마 성상에서 신과 그리스도가 갈수록 권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380년 1월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관한 칙령을 발표했다. 후대에 익숙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등한 위엄과 삼위일체 개념 아래" 하나의 신성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공식 노선을 따르지 않는 자는 ‘미치광이’로 규정되어 신과 황제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와 이단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기독교와 교회, 그리고 황제의 관계에도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을 제국과 교회 계급 구조의 정점이자, 주교들의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경의 선포를 주관하고 통합을 위협하는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열세 번째 제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기독교 사상과 전례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충돌은 로마제국에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같은 기간에 매우 다른 형태의 기독교가 발달한 아르메니아에서는 세속적 통치와 종교적 통치의 분열이 더욱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촉발했다.

결정적으로, 타론 공의회는 기원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아르메니아 남부에서 해오던 역할을 전 국가로 확장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교회가 보다 복잡하고 완전한 위계 체제하에 필요한 이에게 도움과 구제를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 무대에서 전개된 종교적·정치적 변화로 이후 20년간 아르메니아 내부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다.

4세기에 일어난 기독교, 힌두교, 불교의 역동적인 변화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고대 세계가 연결되면서 그 토대가 마련되었다. 각 종교는 전파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변형을 거쳤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간다. 고대 힌두교와 불교가 특히 그런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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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로서 티리다테스 3세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첫째는 로마제국과 사산제국 사이에 끼여 두 나라의 정책과 야망에 휘둘린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였다. 티리다테스 3세의 목표는 로마의 지원을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이 사산제국의 간섭을 받지 않고 계속 아르메니아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특히 312년 이후 기독교?남쪽과 에데사로부터 아르메니아로 서서히 침투하고 있던 기독교가 아니라, 로마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양성되고 인정된 기독교?의 수용은 당연한 결과다.

기독교는 티리다테스 3세가 통치자로서 직면한 두 번째 딜레마도 해결해줄 수 있는 묘안이었다. 그는 집권 후 지방 토착 귀족들의 관할권을 조정하고 보다 효율적인 조세를 위한 대규모 토지조사를 실시하는 등 정치체제를 중앙집권화하고자 노력했다.

『푸라나』는 위대한 가문과 신의 계보를 기록한 책이다. 이 모든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다르마’ 개념이다. 다르마는 계속 진화하면서 갖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질서이자, 우주와 사회의 근원이다. 다르마를 추구하는 방법(당연히 각 바르나마다 그 방법이 달랐다) 중 하나는 계급 구분에 도전하지 않는 것으로, 도전은 우주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행위로 경계되었다.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인기는 힌두교 바르나 체제를 위협했다. 특히 평등 이념에 따라 수행에 전념한 초기 불교는 오직 하나의 계급(브라만)만이 공동체를 위한 제식을 수행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는 기존 체제에 의문을 제기했다. 전통은 사회 전체 구성원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자로서 브라만 계급의 전문 지식, 훈련, 활동에 의존하고, 그들을 ’인간의 모습을 한 신’으로 대우하도록 강제했다.

불교의 중국 유입이 어느 한 시기에 한 곳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2세기와 3세기 중국에는 18개의 외국인 포교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인도인 포교단이 넷, 인도-스키타이인 포교단 넷, 파르티아인 포교단 셋, 소그디아나인 포교단 넷, 그리고 호탄인 포교단이 셋이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 종파가 중국에 동시에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진화한 힌두교나 중국의 유교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로마 세계에서 기독교의 형태가 변화했듯이) 고정된 교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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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나 아테네에서 실제로 구현된 정치체제는 처음 그들이 지향했던 목표가 현실화된 것이라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반면 중국에서 공자는 군주에게 정치적·법적·도덕적 지침 일체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자신만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주나라에서도 신적 존재가 군주 권력의 근거로 작동했다. 그리스나 로마에서처럼 중국에도 삶의 각 부분을 책임지는 신들이 무수히 존재했지만, 정치적·군사적 권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존재는 단 하나, 바로 천天이었다. 중국 사상에 따르면 ‘천’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신으로, 인간의 행위에 기뻐하거나 분노하고 천명을 내리거나 회수할 수 있으며 희생물을 바쳐서 달래야 하는 존재였다.

주나라의 군사적·행정적 변화는 보다 광범위한 경제 변화를 수반했다(그리고 그것을 유발했음이 틀림없다). 농업 생산성이 증가하고 상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농업 분야는 국가가 소유한 땅에서 공동 생산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토지의 개인 소유와 상품의 매매가 이루어지는 자유시장으로 이행했다. 화폐의 도입도 변화를 촉진했다.

로마 사회에서 중시했던 미덕과 공자가 꼽은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예를 들어 ‘인’은 후마니타스humanitas, ‘덕’은 디그니타스dignitas, ‘의’는 아욱토리타스auctoritas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로마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는 끊임없는 금욕적 수양이 강조되지 않았다.

후대의 기록들은 노자와 공자가 서로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며 치열하게 경쟁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회 운영에 대한 두 사상의 견해차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는 사람이 도, 즉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던 반면 도교는 사람이 도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에 탄생한 정치혁명과 정치철학이 고대 사회가 직면했던 문제에 대응하고 한발 앞서 나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테네, 로마, 그리고 중국 노나라는 몇 차례의 대내적 사회 변혁과 대외적 전쟁을 경험하면서 몇몇 인물의 주도하에 국가 구성원들의 요구를 조율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를 방어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을 모색했다. 그 결과 세 나라에서 각각 새로운 정치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폴리비오스는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혼합된 로마의 균형 잡힌 정체와는 달리, 카르타고의 민회 투표권은 민중에게 과도한 권력을 주어 결국 카르타고가 로마에 패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이들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가 속한 공동체 관계를 재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고대 세계를 더욱 가까이, 주로 폭력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그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확장하고 동맹을 구축하면서 전쟁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단일 통치자의 지배하에 거대하고 통합된 공동체가 탄생했다. 이런 움직임의 결과 특히 동쪽에서 외견상 무질서하게 시작된 대이주로 인해 세계는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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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주주의 탄생의 역사에 내재된 취약성과 불확실성 안에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고대 기록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일단 그 안에 포함된 모순과 은폐, 재해석을 간파하고 나면 민주주의는 그 착상과 발전이 확실히 보장되었던 적도, 개인적 욕망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도 없으며, 주요 인물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폴리비오스는 기원전 160년대에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명망 높은 스키피오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파란만장한 당대의 역사를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가 압도적인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하면서, 그 주요 요인으로 로마의 군사조직과 공화정체를 꼽았다.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인이었지만 처음부터 아테네의 (이제 기울어가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더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로마가 새로운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계속해서 아테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갔다는 점이다. 공화국 수립 직후 로마 대중과 리더들이 다수의 권리와 소수의 권력 간의 균형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격동의 반세기 동안, 로마의 입법자들은 아테네에 체류하며 그곳의 법률 제도와 헌법?특히 로마인 자신들과 비슷한 딜레마를 겪었다고 여겼던 솔론의 개혁?을 연구하여 로마에 도입했다.

폴리비오스에게 12표법 도입은 반세기 전 왕정 타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 로마 역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28 그 이유는 무엇일까? 12표법은 폴리비오스가 통치 모델의 전형이라 여긴 기틀을 제공했다. 즉 12표법은 군주(집정관), 귀족(원로원), 민주주의(켄투리아회와 평민회)적 측면을 모두 가지면서, 동시에 사회 각 집단의 권리와 책임을 법으로 규정했다.

로마를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리고 기원전 449년 이후 수세기 동안 강력한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 전 계층이 체제를 비판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쪽이 더 혜택이 크다고 믿게 만든 정교한 견제와 균형 체제였다. 폴리비오스의 눈에 로마는 "수많은 투쟁과 소요를 극복"하고 마침내 콩코르디아 오르디눔(계급의 화합)을 이루었다. 폴리비오스가 글을 쓸 무렵에는 지중해 세계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로마가 더 이상 아테네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리비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가 투표권을 가진 듯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권력은 국가 지도층이 보유하도록 계급 차별이 도입되었다." 이 체제는 정치적·사회적 현실만큼이나 군사적 현실도 반영했다. 전투에서의 승리, 곧 로마의 성공적인 방어는 기병대인 에퀴테스 계급과 그들이 보유한 말과 무기가 제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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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스테네스가 제시한 행정 개혁은 데모스를 아테네의 정치조직뿐만 아니라 군사조직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만일 이 개혁안이 시행된다면 아테네인들은 보다 효율적인 도시 방어군을 보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개혁안이 아테네 시민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그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안은 스파르타의 입김을 제거하고 아테네의 군사력을 재조직할 기회, 그리고 시민들이 더 큰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할 기회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는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솔론의 조치는 극적이었다. 그는 모든 부채를 일시에 탕감하고, 인신 담보 행위를 금지하여 차후 아테네 시민이 노예로 전락할 가능성을 차단했다. 아테네의 각 사회·경제 계급이 갖는 정치적 권리도 재조정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통칭 ‘세이삭테이아seisachteia’라 불리는 솔론의 개혁 프로그램이 권리와 책임은 재분배하지만 ‘동등한’ 분배를 추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솔론의 체제는 공동체 내부의 각 계층을 같은 선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솔론이 적당하다고 판단한 권리를 각 계급에게 부여한 보수주의 체제였다. 솔론은 스스로 ‘에우노미아eunomia(질서)’라고 부른 이 ‘중도’를 통해 아테네가 한 마음으로 단결하기를 바랐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데메스’라는 촌락 공동체를 정치의 기본 단위로 삼고 거기에서 정치적·군사적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데메스의 구성원들은 지역 의회에 모여 자신들의 문제를 논의하고, 의원을 선출하고, 공동체 운영 방식을 결정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전통적인 4부족 체제를 해체하고 10부족제로 재편하여 그것을 군대와 정치 참여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솔론은 ‘디스노미아dysnomia(무질서)’와 대조되는 ‘에우노미아(질서)’에 대해 얘기했다. 기원전 510년과 508년의 아크로폴리스 포위 사태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이소노미아isonomia(법 앞의 평등)’가 논의되었다.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시민에 의한 통치)’가 최초로 개념화되고 언급되는 것은 기원전 490년과 480년 페르시아의 침략을 겪고 난 후의 일이다.

나는 민주주의 탄생의 역사에 내재된 취약성과 불확실성 안에 오히려 더 큰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고대 기록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일단 그 안에 포함된 모순과 은폐, 재해석을 간파하고 나면?민주주의는 그 착상과 발전이 확실히 보장되었던 적도, 개인적 욕망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도 없으며, 주요 인물들과 역사가들, 그리고 후대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인물들과 일반 대중은 자신들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창조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이 새로운 정치체제의 발전 과정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고 기려질 수 있었다. 이 점은 인간 문명의 우연성을 상기시킨다. 우리 사회의 어떤 측면도 필연적으로 살아남을 것이라 가정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우리 세계의 일부로 남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싸워서 수호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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