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우리가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부른 시기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시기가 인류의 정신적 발전에서 중심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세계의 네 지역에서 이후 계속해서 인류의 정신에 자양분이 될 위대한 전통이 탄생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 인도의 힌두교와 불교, 이스라엘의 유일신교, 그리스의 철학적합리주의가 그것이다. 이 뜨거운 창조의 시기에 영적/철학적 천재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 경험을 개척해 나아갔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머리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 1944 ~ )은 BCE 900년경부터 BCE 200년에 이르는 이른바 '축의 시대 Axial Age'에서 새로운 시대의 통찰을 발견한다. 이 시기에 세계는 철기 혁명을 거치며, 이전 사회와는 근원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이러한 변혁기에 여러 문명들에서는 새로운 사상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서 일어난 고민의 결과가 바로 새로운 영성의 시작으로 해석한다.

경제 호황은 불평등을 심화하고 심각한 사회적 분열을 일으켰다. 농민은 정기적으로 군대에 끌려가 가정과 경작지로부터 멀어졌다. 일부는 농부로서 성공을 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빚을 지고 자기 땅에서 쫓겨났다. 통치자들은 농민이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땔감을 모으던 많은 늪지와 숲을 가로챘다. 마을 공동체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p495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바꾸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축의 시대 이전에는 제의와 동물 희생이 종교적 탐구의 중심이었다. 종교가 곧 자비(compassion)이었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머리말

철기시대는 청동기보다 광범위하게 보급되었고, 보다 많은 노동력의 동원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각 문명은 공동체 의식 강화를 위해 제례(祭禮)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약 7세기에 이르는 시간동안 제례가 한 방향으로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긍정되고 때로는 부정되고 낡은 제례를 대신할 새로운 사회이념이 등장하면서 개혁(改革)과 새로운 길이 모색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끊임없이 재해석되었음을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교한 제의는 참여자들이 자신을 초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축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이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단순한 방종보다 더 깊은 만족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중국의 축의 시대에 일부 철학자들은 제의의 정교한 꾸밈을 거부한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전례 의식을 바탕으로 심오한 영성을 구축한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p136

문명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제례의 재해석의 방향은 내면을 향한 성찰로 흐른다. 소수 엘리트 전사들에 의해 수행되던 청동기 시대 전쟁과는 달리, 철기 시대 이후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면서 공동체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집단의 힘을 녹여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한 시점에서 개인의 성찰을 강조한 유교, 불교 등이 이 시기에 뿌리를 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외부로의 끊임없는 팽창과 하늘(天)에 있는 존재에 대한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서, 축의 시대는 인문학적인 통찰과 지식의 시대도 함께 열게 되었다.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 세계의 발견이었다. 제의 전문가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여 그의 관심을 내부로 이끌었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신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자의식적인 반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제의 개혁가들은 선구자들이었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p148

이들 종교들은 황금률(黃金律, Golden Rule)에 근거하여 개인의 윤리(倫理)가 확대시켰다.. 그렇지만, 현실과 이상간의 차이 때문일까, 아니면 이들이 추구한 안정돠된 상태(아타락시아, 평화 등)의 특성 때문일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들은 모두 제국의 이데올로기와 결합되었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현실의 제도로 정착된 모습이 초기 사상과 차이가 있다는 것도 축의 시대 공통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축의 시대>에서 우리는 현대 종교의 시원(始原)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종교의 형성이 치열한 시대정신의 결과물임도 함께 알아가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순으로 비춰지는 종교의 충돌하는 교리들이, 각기 다른 시대 속에서 나름의 이유로 형성되어 전승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의 교리 역시 현대 관점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필요성에 우리가 눈을 뜨고 교리에 매몰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종교에서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저자의 본심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된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했다. "축의 시대는 큰 두 제국 사이의 공백기, 자유를 위한 휴식, 가장 명료한 의식을 가져다 주는 깊은 숨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이르자 세계는 안정되었다. 축의 시대 후에 확립된 제국에서는 새로운 정치적 통일을 긍정하는 정신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_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 p624

댓글(7)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2-09-12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벽돌책을 읽으셨군요! ㅎㅎ 전 짬짬이 아무 데나 펴서 읽고 있는데 1년도 넘었네요~~

겨울호랑이 2022-09-13 06:46   좋아요 1 | URL
저도 여러차례 미루다가 이번 추석 연휴를 이용해서 겨우 읽었네요. 공자, 소크라테스, 붓다의 시대를 각자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해석한 저자의 관점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책이었습니다. 젤소민아님 감사합니다! ^^:)

hnine 2022-09-13 0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셨네요. <황금가지>와 함께 제게 숙제 같은 책이고, 수년째 째려보기만 하고 있는 책인데요.

겨울호랑이 2022-09-13 06:50   좋아요 2 | URL
hnine님 말씀처럼 <축의 시대>는 유명도에 비해 쉽게 손이 가질 않는 책 중 하나라 여겨집니다. 저 경우에는 ‘종교‘에 대한 마음의 부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해야 한다‘는 당위가 이러한 진입장벽을 높혔던 듯 합니다... 그럼에도 막상 책을 읽다보니,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류문명의 보편점을 찾아내는 저자의 통찰에 빠르게 읽게 되는 명저라 여겨집니다. hnine님 감사합니다! ^^:)

그레이스 2022-09-13 09:29   좋아요 2 | URL
빌렸다가 반납한 책이예요 ^^

초란공 2022-09-13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민하는 책인데 마침 올려주셨어요^^ 책을 읽으라는 계시! ㅋ BC500년 즈음 전후로 석가모니, 공자 등의 인물이 나타난 것이 흥미롭기도 했는데 이것도 당시 시대적인 영향(고민)의 결과라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어요. (뒤늦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주목하던 책이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9-13 10:09   좋아요 2 | URL
<축의 시대>는 과거에 새로운 시대 정신의 산물이었던 종교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데, 저는 여러 면에서 교조화된 현대 종교의 모습과 비교하며 읽었습니다. 이제는 안정화, 정형화된 예식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불안한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담아낼 수 있는 초기 축의 시대 모습이 재현되길 바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만... 독자마다 자신에 맞는 새로움을 맛볼 수 있는 좋은 책이라 여겨집니다. 초란공님 즐거운 독서되세요! ^^:)
 

저승으로 가는 자는 절대로 화려한 복장을 하면 안 되었고, 이승에서 맺은 귀한 인연에 연연해서도 안 되었으며,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가는 순간만큼은 지극히 겸손해야 했다.

어렵사리 획득한 하늘과 땅의 기득권을 다 버리고 선택한 모험이었다. 어느 누구도 다시 목숨 붙여 돌아오지 못하는 사지를 향한 지나친 욕망이었다. 인안나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하늘과 땅에서는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이자 전쟁의 여신으로 맹위를 떨쳤지만, 저승에 내려가자마자 송장이 되었다. 마지막 들숨과 날숨도 떨어졌다. 죽은 것이다.

죽은 자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 산 채로 저승 원정길에 오른 일도 최초의 사건이고, 그곳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최초의 사건이었다. 아니, 최초의 기적이었다.

우루크 왕 길가메쉬는 대홍수로 영생을 얻은 지우쑤드라를 만나 대홍수 이전에 신들이 벌인 비밀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고 알아내지 못한 천기였다. 우루크의 왕권과 왕좌를 버리고, 스스로 거지 신세가 되어 광야에서 방황하고, 죽음의 강을 건너 얻은 귀중한 정보였다. 길가메쉬의 삶은 기록으로 남겨졌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최초의 영웅이고, 최고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필멸의 인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권능을 걸고 말하노라. 내 신성한 성전을 걸고 말하노라. 네가 가지고 간 ‘메’는 네 도시의 거룩한 성소에 남아 있을 것이다. 사제장이 그 거룩한 성소에서 찬송하며 일생을 보내도록 하겠다. 네 도시 사람들은 번영을 누릴 것이다. 우루크 아이들은 기쁨이 넘치리라. 우루크 사람들은 에리두 사람들과 동지로다. 우루크는 위대한 곳으로 부활하리라!"

그러나 인안나는 자신이 저승에 내려가자마자 이내 곤경에 처할 것이며, 그 곤경은 죽음일 것이며, 그것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웃어른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며, 그 역할을 할 존재는 오직 닌슈부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승이었다.
죽은 자들의 땅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땅이었다.
한번 강을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형벌의 땅이었다.
저승의 음산한 기운이 서서히 인안나에게 닥치고 있었다.

인안나가 저승으로 내려온 이유로 구갈안나의 장례식 참석을 댄 것은 그럴듯했다. 그렇지만 정작 그의 죽음을 몰고 온 장본인이 누구였던가.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그를 죽였지만, 에레쉬키갈의 남편을 죽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인안나의 기질 때문이었다. 멋진 남성을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랑의 병 때문이었다. 저승으로 내려온 변명은 그럴싸했지만, 여신의 앞날은 여전히 어두운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안나는 신성한 권능을 갖고 있었고, 삼라만상의 총체적인 질서를 잡고 있었으며, 지혜의 정수를 누리고 있었다. 인간의 창조주이자 구세주인 엔키에게서 넘겨받은 권위와 권능이었고, ‘신물(神物)’이었다. 그랬음에도 여신은 하늘과 땅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더 큰 운명결정권을 손에 쥐기 위해 현실의 권세와 욕망을 버리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여신은 저승에서 죽었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신이 되었다.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고 있던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유대인 예수를 새로운 태양신으로 옹립하여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되었다. 곧이어 로마교회는 수메르의 신년 축제와 제의로부터 시작된 고대 태양신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제전을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로 바꾸어놓았다.

세상천지의 기운을 몽땅 손아귀에 넣고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것이 인안나였다. 권세와 부귀를 모조리 누려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것이 인안나의 심보였다. 사랑을 차지하고 야망을 이루기 위해 남신과 남성 들을 한껏 농락했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인안나의 삶이었다. 수메르의 운명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그래도 속이 근질거렸고, 그래도 오금이 쑤셨으며, 그래도 안달이 났다. 그것이 인안나의 기질이었다.

‘메’의 본질은 신성한 권능이고, 삼라만상의 총체적인 질서이며, 지혜의 정수였다. ‘메’를 통해서 문명이 일어났고, 문화가 형성되었으며, 미개와 무질서가 사라졌다. 도시가 생겼고, 신전과 가옥이 높고 튼튼하게 올라갔으며, 길이 넓혀졌고, 재물이 쌓였고, 직업이 늘어났고, 강의 물줄기가 잡혔으며, 단단한 그릇을 빚어냈고, 멋진 옷을 지어 입었고,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메’로부터 얻은 혜택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들 부흥집회의 초점은 병 치료에 있었어요. 사람들은 자기를 괴롭히는 질병에서 벗어나고 싶은 필요가 충천해 있는데, 그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정상적인 시스템은 부재하니 대중신비가들이 그 자리를 채운 거죠. 대개 개신교 계통의 대중신비가들이 집회에서 성공했던 것 같아요.

부흥집회의 성격이 대단히 혼합주의적이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서북지역에서 시작했던 근본주의 신앙은 토착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는데,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맹위를 떨친 대중신비주의 신앙은 근본주의적 신앙 요소를 지닌 동시에 혼합주의적인 성향도 내포하고 있었어요.

교회를 만들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이끌었던 나운몽과는 달리 조용기는 자기 부흥운동의 센터를 구축했고, 그곳을 거점 삼아 팽창을 거듭함으로써 권력화된 종교성을 발전시켰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결합한 혼합주의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운몽의 계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죠. 영혼의 구원에, 몸의 구원(건강)과 물질의 구원(풍요)을 결합한 ‘1+2’의 복음. 그것이 조용기의 저 유명한 ‘3박자 구원론’이에요.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동시에 결합한 기복적 신앙 양식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은 1970~80년대 한국 개신교 신앙의 한 전형으로 발전했어요.

서북주의자들이 ‘파괴적 증오의 정치’를 통해 부상했다면, 조용기로 표상되는 부흥사들은 ‘생산적 증오의 전략’을 구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적에 대한 증오를 성공에 대한 욕구의 자양분으로 전환한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생산적 증오의 전략에서 유용한 도구가 혼합주의였어요. 사람들이 가진 모든 종교심을 활용하고 그것을 기독교적 종교성으로 덮어버리는 거죠.

실패한 사람들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성패와도 관련된 거예요. 이 사람들도 똑같이 한표를 행사하는 유권자들이거든요. 1920년대 말에 나치즘과 파시즘이 등장한 게 이 사람들의 선택이었던 거죠.

박정희정권의 새마을운동이란 일종의 간증의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정을 홍보하거나 국가 이데올로기를 전달하는 일을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했는데, 카리스마적 1인 통치자를 중심으로 농촌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이었죠.

최태민은 기독교를 가지고 설명하기보다는 권력을 가지고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최태민은 1970년대 초부터 유사 종교인 영세교를 이끌다가, 그 유사 종교로는 박근혜를 세우고 자원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싶어서 1975년 목사로 옷을 갈아입어요. 그러면서 십자군 논리를 차용하죠. 최태민은 구국십자군을 만들었을 때 자기 스스로 총장을 맡았고, 단장을 강신명(姜信明) 목사가 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