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자여, 세계는 항상 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맑고 깨끗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세계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가졌다고 해서, 맑고 깨끗한 수행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는 한상 있다. 혹은 항상 있지 않다는 견해를 가졌다고 해도, 삶과 늙음과 죽음과 격정과 슬픔과 고통과 번민은 닥쳐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이 현재에서 없애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다. - P200

설명해야 할 것이란, 괴로움과 그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을 없애야 할 것과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익이 되고, 맑고 깨끗한 수행을 위해서나, 번뇌를 없애고 뛰어난 지혜를 얻는다든가, 깨달음을 얻어 열반으로들어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 P201

비구들이여, 이 사람은 저쪽 언덕에 이르러 이렇게 생각한다. 곧‘이 떼배 덕분에 나는 안전하게 이쪽 언덕에 이르렀다. 나는 이 떼배를 언덕에 올려놓거나 또는 물에 띄워 보내 버리고, 나는 내가 가야 할데로 가자고 이래서 이 사람은 그 떼배에 대해서 자기 할 일을 다 하게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떼배를 비유로 들어, 법은 버려야 할 것으로서,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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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1 : 삼매
배철현 지음 / 김영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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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는 인간을 신적인 인간으로 승화시키는 신제, 정신, 영적인 훈련이다. 요즘 사람들은 요가를 유연체조 혹은 피트니스 훈련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요가는 마음을 개간하여 인간의 심연에 존재하는 원래 자신을 발견하는 훈련이자, 그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모시는 혁명적인 운동이다. 다시 말해 요가는 삶의 주인을 교체하는 쿠데타 coup d'Etat인 셈이다. 요가는 미래에서 온 듯한 멋진 나의 모습이 주인이 되어 현재의 나를 일깨우는 정신적, 육체적 운동인 것이다. 즉, 영적인 유전자를 교체하는 마음 혁명이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32/588

배철현(裵哲炫, 1962 ~ )은 자신이 쓴 요가수트라 강독에서 요가를 참자아(眞我)를 발견하는 훈련으로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 이 때까지 인간은 자신이 만들고, 주위의 영향을 받은 생각으로 성장한다. 끊임없이 생겨난 생각들로 진정한 나자신을 덮으며. 그렇게 생각으로 덮인 자신이 지금의 나라면,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있는가. 만약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생각에 덮여 드러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내 깊은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요가수트라> 강독을 통해 진정한 나 자신과의 만남을 말한다.

요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무엇인가. 인도의 베단타 철학은 요가를 합일이라고 가르친다. 이 정의는 분명 요가의 다양한 정의 중 하나지만 파탄잘리의 정의와는 정반대다. 그에 따르면 요가는 오히려 분리다. 즉, 요가는 인간의 원래 모습인 참자아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다. 파탄잘리의 정의에는 합일이 없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80/588

요가 수련자는 자신이 되어야만 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매일 정진하는 자다. 그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군더더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제거가 '이욕 離慾', 즉 '욕심 떨어뜨리기'다. 그 후 해탈을 위해 용맹정진하는 '연습 練習'을 경주해야 한다. '이욕'과 '연습'은 요가 수련의 두 기둥이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182/588

저자는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에서 자신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용맹정진하는 요가 수련자의 자세를 말한다. 그가 욕심을 떨어뜨리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것은 합일(合一)과 분리(分離)를 위해서다. 참자아와 지금의 내가 하나되고, 잡념의 근원인 세상으로부터의 떨어짐. 이를 위해 수련자는 덜어내고 깎아내면서 자신의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요가 수련자는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단계인 사트바를 넘어서, 외부 자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우주를 탄생시킨 원칙이 존재하는 단계, 그 우주에서 소우주로 사는 인간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222/588

그 수련은 고독하고 알 수 없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것처럼 수련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가야 한다. 그는 그 길을 찾고자 하지만, 그것을 강렬히 열망하여 또다른 잡념과 욕망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저 평안한 마음으로 보여지는 매순간 무심한 듯 가지를 쳐내려가며 밑으로 밑으로 가야한다. 과연 이 길이 맞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심을 낳고 또 다른 잡념이 될 수도 있다면, 그는 그저 뚜벅뚜벅 삼매(三昧)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가야 할 것이다. 자신을 믿고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가지고.

삼매경 三昧境은 산스크리트 어 사마디 samadhi의 음역이다. 사마디는 마을을 하나로 묶어 sam 매 순간 적절한 지점에 몰입하려는 dhi 간절한 경지다. 삼매경에 진입하기 위해 잡념의 소멸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마디의 '- 디 dhi'에는 인류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삼라만상의 운행 원칙과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추구해야 할 고귀한 가지가 숨어 있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234/588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제1편 삼매경에 대한 내용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부로 내려가 얻을 수 있는 무종삼매의 경지에 대해 말한다. 합일과 분리가 다르지 않고, 자신과 세상이 다르지 않은 경지. 그렇지만, 신(神)과 합일된 이 경지에 대해 이성의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도 부족할 것이다. 이욕, 연습, 분리, 합일 등의 용어가 더 이상 무의미해지고, 하고자 하는 바가 없어도 순응하는 상태. 비록 본문에서는 이 단계에 대한 소개가 있지만, 언어의 지평 너머에 있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온전히 '깨달은 이'들만 알 수 있으리라.

<요가수트라 Yoga Sutras of Patanjali>는 요가 경전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요가 수련자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적인 것임을 생각하게 된다. 서로 다른 길의 종점이 같다면 바로 종교의 길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그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지점은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부다. 그곳에 심오한 자기 자신이 있다. 이 시점에는 명상의 대상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명상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비야사에 따르면 무종삼매의 경지에서는 요가 수련자가 유종삼매에서 얻은 통찰력과 분별력,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진리를 머금은 지혜까지 활동하지 않는다. 이 대상과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수련자는 요가 수련의 최고단계인 무종삼매에 도달한다. _ 배철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 , p559/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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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25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삼매경은 당연히 한자라고 생각했는데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었군요. 요가를 자신의 가장 깊은 내부로까지 내려갈 정도로 하려면 얼마나 해야하지부터 생각하는 저는 요가 맛만 몇번 본 사람입니다. 자신에 도달하기 전에 몸이 먼저 끝장나지 않을까부터 걱정..... ㅎㅎ

겨울호랑이 2023-02-25 19:39   좋아요 1 | URL
저도 수련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릅니다만, 그저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을 정도로 쉬임없이 가는 것이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인 것 같습니다... ㅜㅜ
 

특정 종교를 믿을 때, 경전에 등장하는 신에 관한 이야기와 가르침을 이해하려 노력할 수도, 혹은 절대적으로 신봉할 수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신은 마치 아무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정글과 같다. 내가 처음 그 안으로 들어가 타인의 눈이 아니라 나의 두 눈으로 관찰한 실감實感이 나의 유일하고 정결한 지식이 된다. 이 실감을 통한 깊은 깨달음이 ‘니르비차라’다.

천국은 사후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지금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어린아이들은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면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 물건을 신기해하며 탐색하다가 그 물건에 몰입한다.

프라즈냐는 사물의 핵심을 순간적으로 꿰뚫어 보는 통찰을 말한다. 인간은 이것을 통해 아량, 자제, 열심 그리고 명상을 수련할 수 있다. 통찰이 없다면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적인 것, 개인적인 것이 가장 공적인 것이며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가장 은밀한 것이 가장 대중적인 것이며, 가장 고독한 것이 가장 공동체적인 것이다.

삼매경은 종교 지도자의 설명이나 경전의 교리를 통해 진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삼매경은 마치 구도자가 혼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어두운 숲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가 도달해야 할 궁극의 지점은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내부다. 그곳에 심오한 자기 자신이 있다. 이 시점에는 명상의 대상이 사라진다. 왜냐하면 명상의 주체와 객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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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마음속 생각, 말, 행동을 관찰하고 제어하는 ‘또 다른 나’가 있는 자다. 그런 나는 나의 행동과 감각과는 구별되는 독립적인 자아다. 나의 행동과 감각은 ‘또 다른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요가는 외부를 향한 눈을 감고 ‘또 다른 나’를 향해 눈을 떠서 발견하는 과정이며, ‘또 다른 나’의 탁월한 시선으로 외부 자극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자리를 잡아가는 수련 과정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외부 자극, 특히 슬픔이란 마음의 불길을 잠재울 수 있는 더 큰 불길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내면의 빛’이다. 내면의 빛은 외부의 자극으로 조절되는 인위적인 슬픔을 극복하게 한다. 유일한 선의 모습은 바로 이 내면의 빛이다. 우리는 이 빛을 통해 만물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내면의 빛을 찾는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요가 수련자는 자신의 삶을 주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을 자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여겨야 한다. 모든 나무나 식물은 자신의 조그만 땅에서 자양분을 흡수한다. 자신의 환경이 자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다.
나의 최선이 내면의 빛으로 존재하는데,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요가 수련자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온전한 몰입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식사를 할 때나, 걸을 때나, 대화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최선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신독愼獨하는 자다. 온전한 몰입이란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한 뒤 약점은 버리고 강점은 살리는 자기 정복의 과정을 말한다.

‘삼매’는 요가 수련의 궁극적인 단계다. 삼매는 요가 수련자가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좌정하여 하나의 대상에 깊이 몰입하는 두 가지 명상 수련을 통해 진입한다. 하나는 의도된 수련인 ‘응념凝念’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몰입수련을 수행하는 사실도 모르게 물처럼 자연스럽게 진입하는 ‘정려靜慮’다.

진정으로 파악할 때, 그 혜안을 넘어서는 생각의 도구가 등장한다. 바로 ‘상상’이다. 상상은, 그 대상을 통해 무한한 지점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길목 같은 것이다. 명상의 대상이 그 대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개체를 떠올린 뒤 구체적인 모습으로 상상하도록 ‘등지’ 안에서 훈련시킨다.

"만일 마음이 한 대상에 몰입해 삼매경 안으로 들어갔고, 그것이 그 대상의 이름, 존재 의미, 지식, 상상과 섞이지 않고, 자신 본연의 자기 모습조차 비워진다면, 그것은 그 목적만 홀로 빛난다. 이를 초분별등지超分別等至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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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경은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dhi’의 음역이다. 사마디는 마음을 하나로 묶어sa? 매 순간 적절한 지점에 몰입하려는dhi 간절한 경지’다. 삼매경에 진입하기 위해 잡념의 소멸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삼매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마디의 ‘디dhi’에는 인류가 오랜 세월 추구해온 삼라만상의 운행 원칙과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고귀한 가치가 숨어 있다.

수련의 결과로 요가 수련자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나아가 수련자는 그 방식을 삶에 적용하는 열린 마음 상태가 된다. 이 상태를 삼매경三昧境이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 리타는 하르의 과거분사로 ‘우주의 원칙에 맞게 조합된 것’이란 뜻이다. 리타는 ‘진리’, ‘법’, ‘질서’, ‘운명’ 등으로 번역된다. 리타가 사회에 적용되면 ‘다르마dharma’가 되고 개인에게 적용되면 ‘카르마’가 된다. 다르마와 카르마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각각 ‘법法’과 ‘업業’으로 번역되었다.

파탄잘리는 마음속 잡념을 잠재우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 후, 삼매경의 두 층위를 소개한다. 이것이 요가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목표 지점이다. 하나는 인식 대상에 대한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인 ‘상프라즈냐타 사마디sa?prajn?ta sam?dhi’, 즉 유상삼매有想三昧이다. 다른 하나는 인식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앎인 ‘아상프라즈냐타 사마디asa?prajn?ta sam?dhi’, 즉 무상삼매無想三昧이다.

파탄잘리에 따르면 무상삼매는 모든 개념이나 표현을 초월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는 ‘아상프라즈냐타’라는 용어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무상삼매는 ‘무상’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고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파탄잘리는 오히려 불특정 대상을 의미하는 부정대명사 안야를 이용하여 무상삼매의 오묘한 신비를 설명한다.

모든 것이 정지된 태고의 정적 상태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요가 수련자는 우주적 자아와 마주치기 위해 인내하며 수련해야 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수련이 아니라 그런 대상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는 씨앗을 찾는 수련을 해야 한다.

유상삼매는 물질세계의 본질인 프라크리티와 육체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비데하videha’가 하나 되는 과정인 ‘바바bhava’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프라크리티는 마음과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원리이자 내용이다. 인도인들은 우주가 끝없이 창조와 파괴를 반복한다고 믿었다. 우주라는 질서가 창조되기 전, 분리되지 않은 잠재력 덩어리가 바로 프라크리티다. 프라크리티는 잠재력을 지닌 씨앗이다.

우리는 늙음과 그 늙음의 종착 지점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 사회는 올바로 죽기 위한 연습의 장인 삶에서 오히려 죽음을 몰아내기도 하고, 마치 젊음이 죽음을 회피하고 망각할 수 있는 장치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승리한 자와 패배한 자, 이들은 모두 하나다.

파탄잘리는 요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마디’와는 다른, 요가 수련에서 얻는 일상의 ‘사마디’를 언급한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 가운데 특별한 상태로 자신이 목표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마음이다

그가 자신이 드디어 삼매경 안으로 들어갔다고 자만하는 순간, 삼매경은 그를 내쫓는다. 삼매경에 진입한 그는 그 삼매경이 더 심오한 삼매경의 가장자리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신적인 자기 자신은 1인칭이면서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인 3인칭이기도 하다.

요가 수련자에게 신이란 최선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 과정에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신에게 헌신한다는 것은 수련자의 자아를 유기하고, 신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최선을 바치겠다는 의미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조종하면서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고 믿었고, 이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런 신은 인간의 이성적인 사고 밖에 존재한다.

불교 철학은 부정신학의 정수다. 아트만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진아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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