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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 자연 위대한 생각 시리즈 3
랄프 왈도 에머슨 지음, 서동석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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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요소, 즉 힘과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을 달콤하고 건강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이 둘 사이의 균형이 변함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한 요소가 과도해지면 그것이 부족한 것만큼이나 해악을 끼친다. 모든 것은 극단으로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좋은 성질의 것도 나쁜 요소와 섞이지 않으면 해로워진다.(p195)...  우리는 두 가지, 즉 환경과 생명을 갖고 있다. 예전에 우리는 긍정적인 힘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부정적인 힘, 즉 환경이 그 반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은 압제적인 환경이다... 자연의 책자는 운명의 책자이다.(p231) <자연> 中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 ~ 1882)의 <자연 Nature>에서 자연(自然)은 긍정적인 존재가 아닌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존재인 자연이 인간에게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번 리뷰에서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에머슨의 답(答)을 찾아보려 한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감각적이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세계,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는 부정적인 세계다.


  자연은 인간의 보다 고상한 욕구, 즉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채워 준다.(p23)... 

 모든 만물은 도덕적이다. 그 무한한 변화 속에서 영적인 본성과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있다. 따라서 자연은 형태와 색깔과 움직임으로 찬란해진다... 자연은 언제나 종교의 동맹자이며, 자연의 모든 화려함과 풍부함을 종교적 감정에 부여한다.(p49) <자연> 中


 만물의 주변과 변경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모든 왕국을 통해 자연은 그 근원이 되는 원인에 충실하다. 자연은 언제나 정신을 말한다. 자연은 절대적인 것을 암시한다. 자연은 영원한 결과이다. 자연은 우리 뒤의 태양을 언제나 가리키는 위대한 그림자이다.(p69) <자연> 中


 이에 반해, 인간은 이성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존재이며, 원인을 탐구하는 존재다. 에머슨에게 인간이 '빛의 자녀'라면, 자연은 이의 그림자에 해당한다. 빛의 밝은 면이 긍정적인 인간이라면, 어두운 그림자는 부정적인 자연에 속한다. 에머슨은 이처럼 부정적인 자연이 인간에게 의미있는 이유는 긍정과 부정의 조합을 통해 인간의 완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인간은 세상의 주인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영민한 거주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머리이자 가슴이며 크고 작은 모든 것에서, 모든 산의 지층에서, 관찰과 분석에 의해 드러나는 색깔의 모든 새로운 법칙과 천문학적 사실 또는 대기의 영향 속에서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기 때문이다.(p77) <자연> 中


 지적으로 고려하여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연과의 관계에서 고려할 때, 그것을 우리는 정신이라 부른다. 정신은 창조자이다. 정신은 그 자체에 생명을 지니고 있다.(p35)... 생각과 그 적절한 상징을 연결하여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은 그 성격의 단순함, 즉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온전히 그것을 전하고자 하는 욕망에 달려 있다.(p37) <자연> 中


 보다 세부적으로 인간 삶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 진리와 덕의 조화(harmony)로 완성되며. 에머슨은 부정적인 면의 제거가 아닌 부정적인 것과의 혼합을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에머슨은 이러한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것이 예술(藝術)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에머슨은 예술의 아름다움(美)이 단순한 자연의 모방이나 인간 정신의 구현이 아닌 자연과 인간 정신의 혼합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 진리와 덕을 사랑하는 마음은 눈을 정화시켜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게 만들 것이다. 점차 우리는 영원한 자연 만물의 원초적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세계는 우리에게 한 권의 펼쳐진 책이 될 것이며, 모든 형상은 감추어진 생명과 궁극의 원인을 드러낼 것이다.(p43) <자연> 中


 자연의 아름다움은 마음속에서 재현되는데, 이것은 메마른 관찰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이다. 예술 작품의 생산은 인간성의 신비에 한 줄기 빛을 던진다. 예술 작품은 세계의 추상이거나 요약이다. 그것은 축소화된 자연의 결과이거나 표현이다... 예술은 인간이라는 증류기를 통과한 또 다른 자연이다. 세상은 이처럼 영혼이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이 요소를 나는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부른다.(p31) <자연> 中


 '미 美'로서 보이고 느껴지는 자연의 이러한 아름다움은 최소한의 부분일 뿐이다... 미를 완성하려면 보다 높은, 말하자면 정신적인 요소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약한 성질을 배제하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높고 신성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의지가 결합될 때 발견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신이 미덕에 새긴 표시다.(p27) <자연> 中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과 하나된 궁극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에머슨은 이에 대해 순응과 일관성을 피하고, 자신 내면의 소리(神聲)에 귀를 기울이며 현재를 살아갈 것을 권유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살펴본다면 에머슨의 자연사상은 중용(中庸) 또는 적도(適度) 사상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진한 포도주를 희석시키기 위해 사용한 물처럼, 에머슨에게 자연은 그런 존재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사진] The Symposium in Ancient Greece(출처 : https://www.metmuseum.org/toah/hd/symp/hd_symp.htm)


 그대 자신을 믿어라. 신의 섭리가 그대를 위해 마련한 그 위치, 그대의 동시대인들이 있는 사회, 세상사의 관계를 받아들여라.(p92)...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누구나 비순응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불멸의 영예를 얻고자 하는 자는 선이라는 이름에 방해받지 말고, 그것이 과연 선한 것인지 탐구해야 한다. 결국 자신의 마음의 고결함 이외에 신성한 것은 없다.(p95) <자연> 中


 삶 자체는 힘과 형식의 혼합물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조금이라도 과도해지는 걸 견딜 수 없는 법이다. 이 순간을 완성하고, 인생행로의 모든 걸음마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며, 가능한 한 좋은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순간에 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자.(p190) <자연> 中


 이처럼 <자연>에 나타난 에머슨의 자연관(自然觀)은 순수한 자연주의자 또는 환경주의자(Environmentalism)의 사상으로 보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에머슨의 자연 사상은 <주역(周易) 계사전> 의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또는 노자(老子, BC 601 ? ~ ?) <도덕경 道德經>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는다.  에머슨의 <자연> 안에서도 우리는 '허(虛)'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에머슨의 '허'를 통해서 수학에서 '허수(imaginary number)'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머슨에게 자연은 이성을 통해서 인식되었을 때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에 수학의 '허'가 이에 해당한다 여겨진다. 또한, 허수가 '실수(real number)'로 표현할 수 없는 해를 구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것처럼, 에머슨에게 자연은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인간에게 봉사하는 데 있어서 자연은 재료일 뿐만 아니라 과정이며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모든 부분들이 인간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서로의 일손이 되어 일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의 자비는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인간을 양육한다. 유용한 예술이란 바로 그 자연의 혜택들을 인간의 재치로 재생산하거나 새로이 조합한 것들이다.(p20)... 모든 보조물들의 도움으로, 노아의 시대로부터 나폴레옹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표면은 얼마나 변했던가!... 인간이 먹는 것은, 단지 먹기 위함이 아니라 일하기 위함이다.(p21) <자연> 中


 이러한 면에서 에머슨의 자연은 수동적 존재다. 그의 사상에서 독립 변수(independent variable)는 신의 뜻과 인간의 의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개발주의자의 사상에 가깝지 않을까.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의 사상 속에서 말보로 맨(Marlboro Man)으로 대표되는 서부개척가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 또는 대상화한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상은 21세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상으로서는 한계를 느낀다.  에머슨의 <자연>을 통해 자연을 좋아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는 못했던 한 사상가의 모습과 함께 20세기 미국의 정신을 확인하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그림] Marlboro Man(출처 :  https://www.compulsivecontents.com/detail-event/remembering-the-marlboro-man/)


  인간은 기대어 선 버드나무가 아니고, 스스로를 독립시킬 수 있고 독립시켜야만 하며, 자기 신뢰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힘이 생겨날 것이다. 인간은 신의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고, 여러 민족들을 치유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인간은 동정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p120) <자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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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컴북스 이론총서
김운찬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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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나타난 것이 백과사전‘ 개념이다. 『일반기호학 논고』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기호학과 언어철학』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체계화한 백과사전 개념은 문화적단위로서 의미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에코의 이론에서 가장 특징적인 개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백과사전은 언어의 내적 구조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서 모든 언어 외적 요소까지 총체적으로 포괄하는 내용으로서 의미의 우주를 상정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백과사전 개념은 코드 또는 의미하기 체계의 의 미론 개념을 화용론적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 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전적 의미 영역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무한하게 열려 있는 의미들의 우주를 지향한다.

  아울러 의미는 동일성의 원리를 토대로 하지 않는다는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 기호의 의미는 삼원적 관계를통해 형성된다. 학자마다 사용하는 용어나 뉘앙스는 다르지만, 의미는 기호와 지시물과 함께 삼원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호는 추론을 요구한다. 추론의 대상으로서 기호는 여러 개별적 사실과 연결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최소한 외연적으로는 언제든지 새로운 의미 특성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에코의 백과사전은 바로 이러한 것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비록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으로는 열려 있는 사실들의 총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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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없어, 냥냥이
해든아침 편집부 엮음, 하니동물병원 감수 / 작은책방(해든아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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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우선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시선으로 고양이를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영리하지만 단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교육이 힘들다는 것아 정설이다. 그런데 호기심 많은 성격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교육이 가능하다. 사실 당신이 고양이를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당신을 교육시키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p25)

여름을 맞이해서 고양이 귀요미 미용을 했습니다. (사실은 털이 많이 날아다녀서...) 다소 불안해하던 녀석이지만, 끝내고 나니 제법 예뻐졌네요. 스트레스를 좀 받았지만 시원하게 여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동시에, 털을 깎아 예뻐보이는 것은 사람만의 생각은 아닌가도 생각해 봅니다. 여름털 나름의 기능이 있음에도 사람의 기준으로 밀어버린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왕 짧게 털을 쳤으니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이웃분들 모두 평안한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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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08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요즘 냥이 돌보시느라 냥이 관련 책 많이 읽으시나 봅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19-06-08 13:26   좋아요 1 | URL
^^:) 오늘 여름 맞이 미용을 하느라 고양이 미용실에 있는 동안 훑어 보았습니다. 잠자냥님 즐거운 오후 되세요^^:)

2019-06-0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9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9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9 1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이 걸어가는 범위만큼 세상을 볼 수 있으며, 걸어가는 속도 정도로 세상 이치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음을 느낀다. 반면, 내가 속한 사회는 비행기로 갈 수 있는 범위만큼 보여주고, 인터넷 속도로 정보를 뱉어내니 내가 느끼는 한계와 무기력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걷기 예찬」에서 말하는 도시의 사회성을 경험하게 하는 대표 수단인 ‘시각‘을 통해 나는 ‘책을 읽는다‘를 경험하기에, 내 삶 그리고 도시인의 삶은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걷기 예찬」을 통해 ‘걷기‘와 함께 내가 마주한 현실의 한계를 같이 생각하게 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 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p9)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p98)

길을 걷는 사람이 자신의 도시, 혹은 가로나 동네와는 관계는 무엇보다 먼저 어떤 정서적 관계인 동시에 전체적 경험이다... 여러 가지 감각들이 올실과 날실처럼 짜여진 이 조직은 그가 가로를 통해 걸어가는 동안 상황에 따라 도시에 유해하거나 불쾌한 톤을 부여한다. 도시를 걷는 경험은 우리의 몸 전체의 반응을 촉발한다. 매순간 몸의 센스의 감각들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도시는 이리하여 인간의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p187)

 도시 안에서 각종 예배의 장소들, 공원, 묘지 등은 소음으로 포위된 침묵의 영토를 형성하여 주변의 소란을 벗어난 짧은 휴식과 묵상의 순간을 얻게 해준다. 우리는그런 곳에서 가쁜 숨을 돌려 마음을 가다듬고 장소의 혼이 마련해주는 품안에 안겨본다. 침묵은 세계 속에 그 고유한 차원을 마련하고 사물들을 어떤 밀도로 감싸서 그 사물들을 바라볼 때 각 개인의 시선이 갖는  몫을 망각하지 않도록 해준다.  흐르는 시간은 서두름을 모른다.(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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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0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0 1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4-20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세먼지가 오는 날이 많아진다면 걷기가 구식 행위로 여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은 되도록 걸어가는 편인데요, 걸어간다고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해요. ^^;;

겨울호랑이 2019-04-20 10:34   좋아요 1 | URL
예전에 cyrus님께서 맨발로 걸으시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생각납니다. 다소 마르신듯한데, 독서를 많이 하심에도 몸매관리(?)가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cyrus님은 걷기의 건강 전도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cyrus 2019-04-20 10:37   좋아요 1 | URL
제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꾸준히 하는 운동이 ‘걷기‘입니다. 그것마저 안 하면 몸이 약해졌을 거예요... ㅎㅎㅎ 나이 들면 허벅지 근육이 줄어든다고 하던데, 안 줄어들려면 많이 움직여야죠.. ^^;;

겨울호랑이 2019-04-20 10:41   좋아요 0 | URL
^^:) 정말 멋진 생각입니다!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도 좋겠지만, 현실에서 많이 사용하는 근육을단련 단련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북프리쿠키 2019-04-2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걷는다는 것과 독서는 참 많이 닮았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9-04-20 10:42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책 읽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ㅋ

페크pek0501 2019-04-20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걷는 것 좋아해요. 걸으면서 여러 풍경을 보면 상상력이 발전한다고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0 21:26   좋아요 0 | URL
그러시군요. 저 역시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일에 치이다 보면 그럴 여유를 내지 못할 때가 있어 아쉽습니다.^^:)

2019-04-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1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홀로 와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다시 홀로 돌아가는 우리 삶. 우리 모두는 홀로 있으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 후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정리하는 여정을 하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끝을 알 수 없는 여정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살아갈 수 있다면, 그런 지금이 모여 ‘영원‘이 되는 것은 아닐런지... 읽을 때마다 마치 가톨릭에서 피정을 온 듯한 느낌을 받는 스님의 책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 왔고 살 만큼 살다가 떠날 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p55)

사람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 그리고 나무와 새와 짐승 등 수많은 생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커다란 흐름이 곧 이 세상이다. 산업사회 이래 탐욕스런 인간들이 이러한 생명의 흐름, 즉 공생 공존의 원리를 무너뜨려 생명의 위기를 불러들였다. 부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전체를 보지 못한 현대인들의 맹목이 자초한 함정이다.(p197)

행복의 기준이라니,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단 말인가... 내 식대로 표현한다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로 물어야 한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며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 에서 꽃향기처럼 들려오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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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3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3 1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23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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