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우리가 사랑에서 특히 주관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에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이 사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이에 이르게 되면 가장 육체적인 사랑은 그 바탕에 욕망이 없어도 생겨날 수 있다.

오데트 드 크레시의 이미지가 그의 모든 몽상을 흡수해서는, 그 몽상이 그녀의 추억과 더 이상 분리되지만 않는다면 그때 그녀의 육체적인 결함이나 그녀 육체가 다른 여인보다 스완의 취향에 더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육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육체이므로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 육체만이 그에게 기쁨과 고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영역이 좁은,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대중이란 서서히 동화된 진부한 예술 작품으로부터 길어 올린 것만이 매력과 우아함과 자연의 형태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독창적인 예술가란 바로 이런 진부함을 벗어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언어에서라면 그런 논리적 관계의 왜곡이 금방 광기를 드러내겠지만, 순수한 음악 작품이란 어떤 논리적인 관계도 그 속에 두지 않기 때문에, 소나타에서 인지되는 광기란 실제로 관찰되는 암캐의 광기나 말의 광기만큼 스완에게는 뭔가 신비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까지 미학적인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여겨 오던 것을 한 살아 있는 여인에게 적용해 육체적인 장점으로 변형했고, 그리하여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와 결합된 것을 보고는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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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란 우리 믿음이 존재하는 세계로는 들어오지 못하며, 사실은 믿음을 낳게 한 적이 없지만 파괴하지도 않는다. 사실은 믿음을 끊임없이 거부할 수는 있어도, 믿음을 약화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옮긴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번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불분명한 형태로 그 느낌을 빠져나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해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내게는 그런 욕망이 순전히 내 성격이 만들어 낸 주관적이고 무기력하고 환상적인 창조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 욕망은 자연이나 현실과 무관했고, 그리하여 현실도 모든 매력이나 의미를 상실한 채 내 삶에서 하나의 관례적인 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마치 여행자가 기차 좌석에 앉아 시간을 보내려고 책을 읽을 때 그가 탄 기차가 소설의 허구 세계에 대해 그러하듯이.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게 여러 다른 인상들을 동시에 느끼게 했으므로, 아마도 그 인상들은 결코 따로 떼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가 되어 훗날 내게 많은 환멸을 맛보게 했고, 또 많은 과오를 범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추억들이 서로 겹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지만, 그렇다고 그 추억들 사이에서 ? 가장 오래된 것과 ‘향기’로 인해 생긴 최근 추억, 그리고 내가 알게 된 다른 사람에 대한 추억 사이에서 ? 진정한 균열이나 단층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어떤 암석이나 어떤 대리석에서처럼 기원과 나이와 ‘형성’의 차이를 나타내는 돌의 결이나 색채의 다양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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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꽃의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풍기는 향기는 그 강렬한 생명력의 속삭임인 듯했고, 제단은 살아 있는 곤충의 더듬이들이 방문하는 어느 시골 울타리인 듯 진동했다. 거의 붉은 빛이 도는 몇몇 꽃 수술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은 꽃으로 변신했으나, 곤충이 지닌 봄의 독기와 자극적인 기운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 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는 메제글리즈라비뇌즈였는데, 그 길로 가려면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은 게르망트 쪽이었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에 대해서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과, 일요일이면 이상한 사람들이 콩브레에 와서 산책한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란 이번에는 아주머니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메제글리즈에서 왔을 것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르그랑댕 씨와 함께 그의 집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밝은 달이 비추었다. "고요함에는 좋은 점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나처럼 상처 받은 마음에는, 그대가 나중에 읽을 소설가가 말했듯이, 그늘과 고요만이 적합하다네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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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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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카스테 :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도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허튼소리에요.

오이디푸스 : 이런 단서를 잡고도 내 출생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지 않소.

이오카스테 : 당신 목숨이 소중하시다면, 제발 이 일은

따지지 마세요. 나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

오이디푸스 : 염려 마시오,. 내 어머니가 노예이고 내가 삼대 째 노예로

밝혀지더라도, 당신이 천민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이오카스테 : 제발 내 말 들으세요. 부탁이에요. 더는 따지지 마세요.

오이디푸스 : 진실을 분명히 밝히지 말라는 당신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이오카스테 : 나는 좋은 뜻에서, 당신에게 최선의 조언을 하는 거에요.

오이디푸스 : 당신의 '최선의 조언'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소.

이오카스테 : 오오, 불운하신 분.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지 않기를! _ 소포클레스, <오이푸스 왕>, 1056~1068, p71 


 인간의 휘브리스(hybris)가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가 그리스 비극(悲劇)의 주제라면, 오이디푸스에게 닥친 비극의 탄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神託)이 오이디푸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의 잘못으로 봐야할 것인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는 유명하지만, 정작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된 불행한 인물 정도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희생자인가? 해설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죄를 지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이 대물림하여 벌을 받기 마련이고,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좋든 싫든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우스의 은총이라는 죄와 벌의 변증법이 아이스퀼로스 작품들에 담긴 중심 주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결코 인간사의 뒤안길에 숨은 궁극적 의미를 파고들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신의 섭리를 알아내려는 주제넘는 행동도, 인간에게 가해지는 운명의 타격에 반항하는 것도 옳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아는 인간의 지혜롭고 건강한 마음만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_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옮긴이 해설 , p524


 사자 : 예언자의 말인즉,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는 과도한 생각을 품게 되면, 

 너무 웃자라 못 쓰게 된 그런 자들은 필시

 하늘이 보낸 재앙에 쓰러진다고 했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758~761 , p265


 자신의 무고함을 지나치게 믿고 실현된 예언을 끌어내어 세상에 드러내면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예언의 도구로 희생된 아들/남편 오이디푸스와 도덕을 수호해야 하는 심판자 오이디푸스의 구도 속에 밀어넣게 된다. 어머니/아내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예언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과도한 자신감.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닐까. <아이아스>에서 사자의 말은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 아아, 내 딸들이자 내 누이들이여!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29, p169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모계 중심의 가계도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누이들이자, 부계 중심에서는 그의 딸들인 뒤틀린 관계.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니었다면 풀지 않아도 될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기 어려운 도덕적 과제가 주어졌기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이 먼 테이레시아스가 되는 선택을 내린 것이 아니었을까.


테이레시아스 : 내 아들이여!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고칠 줄 알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오.

다름 아닌 고집이 어리석음의 죄를 짓게 하는 것이오.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1024~1027, p136


 테이레시아스는 소포클레스(Sophokles, BCE 497 ~ BCE 406) 대신 휘브리스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복수의 여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복수의 여신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륜(人倫)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로 테바이를 질병으로 몰아넣고, 오만한 오이디푸스를 불행으로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자신의 행동과 오만함(휘브리스)에 고난으로 속죄하는 오이디푸스 곁에 여신은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죽음 후에 복수의 여신은 크레온에게 가서 그의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뤼디케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소포클레스에게 복수와 휘브리스는 아이스퀼로스의 그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아이스퀼로스(Aeschylus, BCE 525 ~ BCE 455)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복수의 여신(에리니에스)은 탄탈로스와 그의 후손들 곁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3부작에서도 에리니에스의 분노는 오이디푸스 혈통을 절멸시키지만,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처럼 아테나의 한 표로 분노가 억압되기 전에 옮겨갔다는 것은 복수와 휘브리스에 대한 두 작가의 인식 차이에서 온 것은 아닐런지.


 데이아네이라 :  만일 그대가 내 상처 주위에, 그 중에서도 레르나의 

 괴사(怪蛇) 휘드라의 담즙에 화살이 까맣게 물들었던

 곳 주위에 엉겨 붙은 피를 손으로 모은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의 약이 되어, 그가 그대보다 더 사랑하려고 

 다른 여인을 쳐다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73~577 , p320


 테우크로스 : 그렇다면 당신을 구해주신 신들을 모독하지 마시오.

 메넬라오스 : 내가 신들의 법을 어기고 있단 말인가?

 테우크로스 : 당신이 여기 서서 죽은 자를 묻어주지 못하게 한다면

 메넬라오스 : 공공의 적을 묻어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129~1132 , p280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휘브리스가 등장한다.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임을 과신한 <아이아스>의 아이아스, 남편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확고히 붙들고자 넷소스에게 받은 휘드라의 독을 사용한 <트라키스 여인들>의 데이아네이라. 그들은 모두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 죽음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미치지 않는다. 대신, 신들의 법(天倫)을 어긴 또 다른 이에게 복수의 여신은 옮겨간다.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과 함께 탄탈로스의 후손임을 생각해본다면, 탄탙로스 가문의 비극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아이스퀼로스는 탄탈로스의 업보로, 소포클레스는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으킨 아가멤논과 아이아스에 대한 메넬라오스 형제의 업보가 분노의 여신의 방문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을까.

 

 테우크로스 : 헥토르는 여기 이분에게서 선물로 받은 혁대로

 전차 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소. 한편 이분은 헥토르한테서 

 이 칼을 선물로 받았다가 이 칼 위에 엎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소. 쇠를 불려 이 칼을 만든 것은

 복수의 여신이고, 그 혁대를 만든 것은

 잔혹한 장인인 하데스가 아니었을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029~1035 , p276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실린 여러 단편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안티고네> 해석과 함께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오이디푸스 왕>에서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1967 ~ )의 <그을린 사랑 Incendies>을,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왕>이 연상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할 것이다. 후대 명작의 원형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에서 연좌제에 대한 구원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코로스 :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418~1420 , p292


 데이아네이라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헤라클레스가 이름만 

 내 남편이지, 실은 더 젊은 여인의 남자가 되는 거요.

 하지만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화를 낸다는 것은

 분별 있는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이여, 그 구원 수단을 그대들에게 말하려는 거요.

 나는 오래전에 옜날의 괴수(怪獸)한테 받은 선물을

 청동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다오. 그것은 내가

 아직 처녀였을 때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털복숭이 가슴의 넷소스한테 받은 것이라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52~558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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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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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게도 희망은 있었다. 눈치챈다면 난 당장 죽을 목숨이지만. 그가 방수포를 헤치고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웠다. 그 대답을 놓고 두려움과 이성이 다투었다. 두려움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다. 발톱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성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방수포는 화선지가 아니라 튼튼한 캔버스천이라고. 내가 높은 곳에서 그 위로 뛰어내려도 끄떡없었다고.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175/498


 얀 마텔 (Yann Martel, 1963 ~ )의 <파이 이야기 Life of Pi>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호랑이와 함께 보낸 소년의 이야기가 큰 틀이자 하나의 골격이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는 갇힌 공간에서 호랑이와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위협이며 공포로 소년에게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소년은 생명을 내려놓지 않는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의 응원을 덕택이기도 하다. 소설 속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그에게 공포와 평온함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내 얼굴에 단호하고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29/498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48/498


 사실, 개인적으로 <파이 이야기> 전체 글 중에서 시선이 머무른 것은 생(生)에 대한 의지, 공포 등보다 아래의 문단이다. 좀처럼 넘어갈 수 없었던 이 구절은 소설의 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구명보트라는 갇힌 공간. 소년과 호랑이의 일정한 거리.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도, 넓혀질 수도 없는 반지름이다. 소년의 이름은 파이(Pi). 원주율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는 영원(永遠)에 대한 열망의 상징일까.


 원주율(圓周率), 파이(pi) =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원둘레)의 비율. 3.141592....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322/498


 원(圓, circle) =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다. 소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원과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원. 이들은 서로 다른 중심점을 갖기에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개의 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갈등이며 공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도형을 그려보자. 소년의 중심점과 호랑이의 중심점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도형을 그릴 수 있다. 타원이다. 이들은 각각의 원을 가지고 겹치는 공간으로 인해 갈등하지만, 각각의 중심점으로부터 다른 사건(배고픔, 갈증, 폭우 등등)을 바라볼 때는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가지며 이번에는 서로를 의존하게 된다. 


  타원(楕圓, ecllopse)= 두 초점 사이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렇게 본다면, 소년 파이 위의 두 원은 호랑이 원과 둘의 타원이 아닐까. 호랑이 원이 주는 공포와 위협과 소년-호랑이 타원이 주는 위로와 평안이 소년 파이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상반된 힘은 아니었을까를 도형의 정의를 통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반전은 언어와 비유를 통해 나중에 드러나는 호랑이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소년과 호랑이의 거리는 추상과 현실을 매개하는 언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44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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