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꽃의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태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풍기는 향기는 그 강렬한 생명력의 속삭임인 듯했고, 제단은 살아 있는 곤충의 더듬이들이 방문하는 어느 시골 울타리인 듯 진동했다. 거의 붉은 빛이 도는 몇몇 꽃 수술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은 꽃으로 변신했으나, 곤충이 지닌 봄의 독기와 자극적인 기운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욕망이나 고통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권리를 아주 어렵게 획득한 의지는, 비록 아주 잔혹한 사건이라고 해도 그런 급박한 사건들의 손아귀에 고삐를 맡기고 싶어 한다

콩브레 주변에서 산책을 하려면 ‘길’이 두 개 있었는데, 이 두 ‘길’은 아주 반대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집을 나갈 때면 결코 같은 문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는 메제글리즈라비뇌즈였는데, 그 길로 가려면 스완 씨네 소유지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에 스완네 집 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길은 게르망트 쪽이었다. 메제글리즈라비뇌즈에 대해서는 그런 ‘길’이 있다는 것과, 일요일이면 이상한 사람들이 콩브레에 와서 산책한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이상한 사람들이란 이번에는 아주머니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그들은 ‘메제글리즈에서 왔을 것 같은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나는 르그랑댕 씨와 함께 그의 집 테라스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밝은 달이 비추었다. "고요함에는 좋은 점이 있다네, 그렇지 않은가?"라고 그는 말했다. "나처럼 상처 받은 마음에는, 그대가 나중에 읽을 소설가가 말했듯이, 그늘과 고요만이 적합하다네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정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오로지 정신만이 실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자신의 빛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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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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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카스테 : 이 사람이 말하는 자가 누구면 어때요? 조금도 신경 쓰실 것

없어요. 그따위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다 허튼소리에요.

오이디푸스 : 이런 단서를 잡고도 내 출생의 비밀을 

밝히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지 않소.

이오카스테 : 당신 목숨이 소중하시다면, 제발 이 일은

따지지 마세요. 나는 괴로워 못 견디겠어요.

오이디푸스 : 염려 마시오,. 내 어머니가 노예이고 내가 삼대 째 노예로

밝혀지더라도, 당신이 천민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오.

이오카스테 : 제발 내 말 들으세요. 부탁이에요. 더는 따지지 마세요.

오이디푸스 : 진실을 분명히 밝히지 말라는 당신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이오카스테 : 나는 좋은 뜻에서, 당신에게 최선의 조언을 하는 거에요.

오이디푸스 : 당신의 '최선의 조언'이 아까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소.

이오카스테 : 오오, 불운하신 분. 당신은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지 않기를! _ 소포클레스, <오이푸스 왕>, 1056~1068, p71 


 인간의 휘브리스(hybris)가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가 그리스 비극(悲劇)의 주제라면, 오이디푸스에게 닥친 비극의 탄생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신탁(神託)이 오이디푸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면,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의 잘못으로 봐야할 것인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라는 단어는 유명하지만, 정작 오이디푸스에 대해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근친상간을 저지르게 된 불행한 인물 정도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희생자인가? 해설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일단 죄를 지으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이 대물림하여 벌을 받기 마련이고,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통해 좋든 싫든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우스의 은총이라는 죄와 벌의 변증법이 아이스퀼로스 작품들에 담긴 중심 주제다. 반면 소포클레스는 결코 인간사의 뒤안길에 숨은 궁극적 의미를 파고들지 않는다. 소포클레스에 따르면, 신의 섭리를 알아내려는 주제넘는 행동도, 인간에게 가해지는 운명의 타격에 반항하는 것도 옳지 않고, 자신의 한계와 분수를 아는 인간의 지혜롭고 건강한 마음만이 신들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_ 소포클레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옮긴이 해설 , p524


 사자 : 예언자의 말인즉,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는 과도한 생각을 품게 되면, 

 너무 웃자라 못 쓰게 된 그런 자들은 필시

 하늘이 보낸 재앙에 쓰러진다고 했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758~761 , p265


 자신의 무고함을 지나치게 믿고 실현된 예언을 끌어내어 세상에 드러내면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를 예언의 도구로 희생된 아들/남편 오이디푸스와 도덕을 수호해야 하는 심판자 오이디푸스의 구도 속에 밀어넣게 된다. 어머니/아내 이오카스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神)의 예언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과도한 자신감.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닐까. <아이아스>에서 사자의 말은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듯하다.

 

오이디푸스 : 아아, 내 딸들이자 내 누이들이여! _ 소포클레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329, p169


 안티고네와 이스메네. 모계 중심의 가계도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누이들이자, 부계 중심에서는 그의 딸들인 뒤틀린 관계.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아니었다면 풀지 않아도 될 뫼비우스의 띠처럼 풀기 어려운 도덕적 과제가 주어졌기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이 먼 테이레시아스가 되는 선택을 내린 것이 아니었을까.


테이레시아스 : 내 아들이여!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실수를 하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고칠 줄 알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자는 더 이상

행복으로부터 버림받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오.

다름 아닌 고집이 어리석음의 죄를 짓게 하는 것이오. _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1024~1027, p136


 테이레시아스는 소포클레스(Sophokles, BCE 497 ~ BCE 406) 대신 휘브리스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복수의 여신으로부터의 해방을. 복수의 여신은 <오이디푸스 왕>에서 인륜(人倫)을 어긴 것에 대한 분노로 테바이를 질병으로 몰아넣고, 오만한 오이디푸스를 불행으로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자신의 행동과 오만함(휘브리스)에 고난으로 속죄하는 오이디푸스 곁에 여신은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죽음 후에 복수의 여신은 크레온에게 가서 그의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아들 하이몬과 아내 에우뤼디케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소포클레스에게 복수와 휘브리스는 아이스퀼로스의 그것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아이스퀼로스(Aeschylus, BCE 525 ~ BCE 455)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복수의 여신(에리니에스)은 탄탈로스와 그의 후손들 곁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혈통이 끊어질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3부작에서도 에리니에스의 분노는 오이디푸스 혈통을 절멸시키지만,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에서처럼 아테나의 한 표로 분노가 억압되기 전에 옮겨갔다는 것은 복수와 휘브리스에 대한 두 작가의 인식 차이에서 온 것은 아닐런지.


 데이아네이라 :  만일 그대가 내 상처 주위에, 그 중에서도 레르나의 

 괴사(怪蛇) 휘드라의 담즙에 화살이 까맣게 물들었던

 곳 주위에 엉겨 붙은 피를 손으로 모은다면, 

 그것은 그대에게 헤라클레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법의 약이 되어, 그가 그대보다 더 사랑하려고 

 다른 여인을 쳐다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73~577 , p320


 테우크로스 : 그렇다면 당신을 구해주신 신들을 모독하지 마시오.

 메넬라오스 : 내가 신들의 법을 어기고 있단 말인가?

 테우크로스 : 당신이 여기 서서 죽은 자를 묻어주지 못하게 한다면

 메넬라오스 : 공공의 적을 묻어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니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129~1132 , p280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는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휘브리스가 등장한다.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장수임을 과신한 <아이아스>의 아이아스, 남편 헤라클레스의 사랑을 확고히 붙들고자 넷소스에게 받은 휘드라의 독을 사용한 <트라키스 여인들>의 데이아네이라. 그들은 모두 휘브리스에 대한 대가로 죽음을 선택하지만, 그 죽음이 그들의 자식들에게 미치지 않는다. 대신, 신들의 법(天倫)을 어긴 또 다른 이에게 복수의 여신은 옮겨간다. 


 메넬라오스가 아가멤논과 함께 탄탈로스의 후손임을 생각해본다면, 탄탙로스 가문의 비극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아이스퀼로스는 탄탈로스의 업보로, 소포클레스는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으킨 아가멤논과 아이아스에 대한 메넬라오스 형제의 업보가 분노의 여신의 방문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했을까.

 

 테우크로스 : 헥토르는 여기 이분에게서 선물로 받은 혁대로

 전차 난간에 묶여 질질 끌려가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었소. 한편 이분은 헥토르한테서 

 이 칼을 선물로 받았다가 이 칼 위에 엎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소. 쇠를 불려 이 칼을 만든 것은

 복수의 여신이고, 그 혁대를 만든 것은

 잔혹한 장인인 하데스가 아니었을까?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029~1035 , p276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에 실린 여러 단편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안티고네> 해석과 함께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례로, <오이디푸스 왕>에서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 1967 ~ )의 <그을린 사랑 Incendies>을,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왕>에서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왕>이 연상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할 것이다. 후대 명작의 원형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에서 연좌제에 대한 구원 가능성을 발견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코로스 : 사람들은 일단 보고 나면 많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나, 보기 전에는 아무도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을 예언할 수 없지요. _ 소포클레스, <아이아스>, 1418~1420 , p292


 데이아네이라 :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헤라클레스가 이름만 

 내 남편이지, 실은 더 젊은 여인의 남자가 되는 거요.

 하지만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화를 낸다는 것은

 분별 있는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친구들이여, 그 구원 수단을 그대들에게 말하려는 거요.

 나는 오래전에 옜날의 괴수(怪獸)한테 받은 선물을

 청동 항아리에 보관하고 있다오. 그것은 내가

 아직 처녀였을 때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털복숭이 가슴의 넷소스한테 받은 것이라오. _ 소포클레스, <트라키스 여인들>, 552~558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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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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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내게도 희망은 있었다. 눈치챈다면 난 당장 죽을 목숨이지만. 그가 방수포를 헤치고 튀어나올까? 걱정스러웠다. 그 대답을 놓고 두려움과 이성이 다투었다. 두려움은 ‘그렇다’라고 말했다. 리처드 파커는 몸무게가 250킬로그램이나 되는 사나운 맹수였다. 발톱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성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방수포는 화선지가 아니라 튼튼한 캔버스천이라고. 내가 높은 곳에서 그 위로 뛰어내려도 끄떡없었다고.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175/498


 얀 마텔 (Yann Martel, 1963 ~ )의 <파이 이야기 Life of Pi>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당한 호랑이와 함께 보낸 소년의 이야기가 큰 틀이자 하나의 골격이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 없는 갇힌 공간에서 호랑이와 함께 산다는 것. 그 자체로 하나의 위협이며 공포로 소년에게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면서도 소년은 생명을 내려놓지 않는다.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공포의 응원을 덕택이기도 하다. 소설 속 '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는 그에게 공포와 평온함을 동시에 주는 존재다.


 내 얼굴에 단호하고 굳은 표정이 떠올랐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그 순간 살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경험으로 보면 누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한숨지으며 생명을 포기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간 싸우다가 희망을 놓아버린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 나도 거기 속한다 -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29/498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248/498


 사실, 개인적으로 <파이 이야기> 전체 글 중에서 시선이 머무른 것은 생(生)에 대한 의지, 공포 등보다 아래의 문단이다. 좀처럼 넘어갈 수 없었던 이 구절은 소설의 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라 여겨진다. 구명보트라는 갇힌 공간. 소년과 호랑이의 일정한 거리.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는 그 거리는 좀처럼 좁혀질 수도, 넓혀질 수도 없는 반지름이다. 소년의 이름은 파이(Pi). 원주율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소수는 영원(永遠)에 대한 열망의 상징일까.


 원주율(圓周率), 파이(pi) =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원둘레)의 비율. 3.141592....


 조난객이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 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상큼한 하늘이 앞이 보이지 않는 흰색이 되었다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 원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사실 원들이 겹쳐 있다. 조난객이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322/498


 원(圓, circle) = 평면 위의 한 점에 이르는 거리가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다. 소년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원과 호랑이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원. 이들은 서로 다른 중심점을 갖기에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두 개의 원에서 생겨나는 것이 갈등이며 공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도형을 그려보자. 소년의 중심점과 호랑이의 중심점으로부터 우리는 다른 도형을 그릴 수 있다. 타원이다. 이들은 각각의 원을 가지고 겹치는 공간으로 인해 갈등하지만, 각각의 중심점으로부터 다른 사건(배고픔, 갈증, 폭우 등등)을 바라볼 때는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가지며 이번에는 서로를 의존하게 된다. 


  타원(楕圓, ecllopse)= 두 초점 사이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평면 위의 점들의 집합


 이렇게 본다면, 소년 파이 위의 두 원은 호랑이 원과 둘의 타원이 아닐까. 호랑이 원이 주는 공포와 위협과 소년-호랑이 타원이 주는 위로와 평안이 소년 파이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상반된 힘은 아니었을까를 도형의 정의를 통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반전은 언어와 비유를 통해 나중에 드러나는 호랑이의 정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소년과 호랑이의 거리는 추상과 현실을 매개하는 언어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영어든 일본어든 언어를 사용해서?이미 창작의 요소가 들어 있지 않나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도 이미 창작의 요소가 있지 않나요?" ... "현실을 반영하는 언어를 원하나요?" _ 얀 마텔, <파이 이야기>, p447/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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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따 4 - 3장 숲: 버리지 못하고 떠나는 자들 마하바라따 4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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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인내와 힘 중 어느 것이 우선하는 것입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물음에 사실대로 답해주십시오."(p132)... 쁘라흘라다가 말했다. '힘이 늘 우선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인내가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란다. 손자여, 이 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늘 참기만 한다면 좋지 않은 일을 무수히 당하게 될 게다(p133)... 언제나 힘을 과시하는 것도 피해야 하지만 항상 유순하기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부드러울 때 부드럽고 거칠 때는 거칠게 행동하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4


 위야사의 <마하바라따 4 - 3장 숲 : 버리지 못하고 떠나는 자들>에서 제기되는 물음 중 하나. '인내와 힘 어느 것이 더 앞서는 것인가'라는 손자의 물음과 할아버지의 대답은 마치 <中庸> 10장의 강함에 대해 묻는 자로(子路問强)와 이에 대해 남방의 강함인가, 아니면 북방의 강함인가를 되물으며 진행되는 논의(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를 떠올리게 한다. <중용>에서 결론은 군자는 조화를 이루며 휩쓸리지 않아 매우 강하다(故君子和而不流, 强哉矯)는 것으로 진행되듯, <마하바라따>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서로 다른 경우를 말하며 경우에 맞는 처신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마하바라따>에서 인내와 힘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브라만과 크샤뜨리야의 다르마(dharma) 문제로 한 단계 넘어가며 한층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인내를 강조하는 우디슈티라 왕에게 드라우빠디는 힘을 강조하며 그에게 맞선다. 개인 덕성으로 힘과 인내는 자신의 내부에서 조화를 이루도록 힘쓰면 그만이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이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인 공동체에서 조화는 과연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는 개인철학의 문제가 정치철학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드라우빠디여, 이런 식으로 분노는 모든 생명을 파멸로 이끌고 그들은 곧 사멸하고 말 것이오. 이 세상에 대지처럼 인내하는 자가 있기에 생명이 태어나고 존재하기를 거듭하는 것이오. 아름다운 이여, 그래서 사람은 어떤 고난에도 참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바로 이 인내로 인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지요. 강한 사람에게서 수모를 당하거나 억압을 받거나 화를 당해도 성내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며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에게 세상의 이치가 보일 것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9


 당신의 의식을 이토록 흐려놓으신 조물주와 창조주 두 분께 엎드려 절하옵니다.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가셨던 길을 따라가야 하거늘 당신의 뜻은 다른 곳에 있군요. 사람은 다르마와 자비로, 또는 인내나 곧은 마음만으로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관대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p141)... 바라따의 후손이시여, 신은 마치 드넓은 창공처럼 중생들의 마음을 차지하며 좋고 나쁜 것을 조절합니다. 우리는 끈에 묶인 새와 같아 주인의 손에 조종당할 뿐 우리 자신도 우리 주인이 아니랍니다(p143)... 이뤄놓은 결과만 보고 행위자를 보지 않는 것은 조물주의 잘못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저지른 일의 대가가 행위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힘만이 행위를 하게 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힘없는 자들을 안타까이 여기는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44


 인내를 강조하는 우디슈티라는 브라만의 다르마를, 힘을 강조하는 드라우빠디는 크샤뜨리야의 다르마를 말한다. 우디슈티라는 보편진리로서 다르마를 강조하는 반면, 드라우빠디는 전사(戰士)의 다르마를 역설한다. 당신은 크샤뜨리야인데 왜 브라만의 다르마를 따르느냐고. 이는 드라우빠디의 말에 동의하는 비마세나의 주장에 잘 드러난다. 최고의 산물인 까마를 얻기 위해 다르마 뿐 아니라 물질을 모으는 아르타에도 충실하는 것. 이것을 못했기에 우디슈티라는 눈 뜬 채 나라를 빼앗겼다고 직접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쁘르타의 아들이여, 때가 되어도 자기 힘을 보여주지 않는 크샤뜨리야는 언제고 만물이 가벼이 여기는 법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적에게 인내하는 것을 보이지 마십시오. 의심의 여지없이 적은 힘으로 눌러야 합니다. 물론 참아야 할 때 참지 못하는 크샤뜨리야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지는 못하지요. 만 생명이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겐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파멸만이 있을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32 


 왕이시여, 아르타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다르마를 필요로 합니다. 또 까마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막대한 아르타를 필요로 하지요. 그러나 까마로는 까마 이외의 다른 것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그 자체가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재는 나무에서 얻지만 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p158)... 왕이시여, 물질을 모으는 것이 아르타라는 것을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다섯 감각 기관과 마음 그리고 가슴으로 얻어진 즐거움을 까마라고 하지요. 나는 그런 까마야말로 우리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 모두를 하나하나 곱씹어본다면 다르마에 지나치게 집중해서도 안 되고, 아르타에만 기운다거나 까마에만 빠져서도 안 되며, 이 모든 것을 다 적절히 따라야 함을 알 수 있지요.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159


 다르마는 단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서로 다른 계급과 시대 속에서 다양한 덕목으로 나타나 전체로서 완성되는 것일까. <마하바라따 4>에서는 개인 덕목의 조화와 중용, 정치철학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전체와 부분의 지향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형제여, 어디든 다르마가 함께하는 유가를 끄르따 유가라고 한다네. 최상의 유가인 그때는 할 일이 모두 마무리되어 있어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지. 그때는 다르마가 쇠하지도, 살아 있는 것들이 죽지도 않는다네. 그때는 다르마가 쇠하지도, 살아 있는 것들이 죽지도 않는다네. 그렇게 덕이 충만한 유가를 일러 끄르따라고 하지(p607)... 끄르따 유가에는 또 브라만과 크샤뜨리야, 와이야, 슈드라의 뚜렷한 특징들이 있으며 모든 계급은 자기 본분에 충실하지. 인생의 단계, 행동 규범, 지식, 지혜 그리고 힘도 모두 그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네. 모든 계급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며 다르마를 얻지. 그들은 하나의 베다를 따르고 하나의 진언을 따르고 모두 같은 의례를 따른다네. 일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따르는 베다는 같은 것이며 그래서 따르는 다르마도 하나지. _ 위야사, <마하바라따 4>, p608



전장에서 몰이 막대 없이 코끼리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듯이 브라만이 없으면 크샤뜨리야는 힘이 줄어들지요. 비견할 데 없는 브라만의 시각과 크샤뜨리야의 견줄 데 없는 힘이 함께하면 이 세상은 평화로워질 것이오. 큰불이 바람의 도움으로 숲을 태우듯 브라만의 도움으로 크샤뜨리야는 적을 태우지요. 갖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얻은 것은 더욱 늘리기 위해 현명한 사람은 브라만의 지혜로운 조언대로 행해야 한다오. - P127

덕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실을 브라만과 자기 아들, 동지 그리고 제자와 시종의 귀에 전해주어야 한다오. 이것은 범답고 성스러우며 희생제와 같고 순수하며 즐거운 것이오. 이것은 천상의 것과 같고 기쁨 넘치며 더없이 순결한 것이오. 이것은 대선인들의 신묘함이며 모든 악을 없애주는 것이라오. 이것을 브라만들 가운데서 들었다면 그는 흠 없는 경지를 이를 것이고, 영원한 성지의 성스러움에 대해서 들은 사람은 영원히 순결할 것이오. 그런 사람은 여러 생을 기억하고 천상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오. - P378

백발이라 해서 어른인 것은 아니지요. 신들은 나이는 어려도 "아는 자"를 나이 든 자라고 여긴다오. 살아온 햇수로도, 하얗게 센 머리로도, 많은 재물로도, 숱한 친지들로도, 선인들은 인간의 자질을 정하지 않았다오. "배움 있는 자가 우리에겐 위대한 자"라고 했지요. - P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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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0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0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3-07-21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참기만 한다면 좋지 않은 일을 무수히 당하게 될 게다(p133) : 인내심도 언제 멈춰야 하는지 그 적당한 지점을 모를 때가 많아요. 늘 참으면 무시당할 수 있으니 잘 처신하기란 늘 어려운 문제입니다.^^

겨울호랑이 2023-07-22 09:42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감정을 다스리기도 쉬운 문제가 아닌데, 이로부터 발생하는 외부 문제까지 고려한다는 것은 마치 외줄타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살아있다는 반증이겠지만요... 페크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
 
마하바라따 3 - 2장 회당: 세상을 건 노름 : 명예와 혼을 팔아 천하를 얻은 자, 형제와 아내와 자신을 팔아 명예를 잃은 자 마하바라따 3
위야사 지음, 박경숙 옮김 / 새물결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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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모인 사람들을 아무리 어려도 어느 누구도 빼지 않고 다 생각해봤소. 그러나 덕에서 여러 나이 든 사람들을 끄르슈나가 능가했던 것이오. 그래서 끄르슈나가 가장 공경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오. 그는 브라만의 무르익은 지식과 끄샤뜨리야의 뛰어난 용맹을 겸비했소. 이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은 끄르슈나뿐이었소... 보시, 재치, 학식, 용기, 겸양, 명예, 명료한 생각, 겸손함, 영예로움, 당당함, 자족함, 위풍당당함, 한결같은 마음, 그는 이 모든 자질을 갖춘 스승이며 어버이며 어른이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49

브라만의 지식과 끄샤뜨리야의 용맹을 모두 갖춘 끄르슈나. 세상의 기원이자 끝인 끄르슈나에 대한 찬미가 <마하바라따 3 : 회당>에 나온다. <바가바드 기타>에서 골육상쟁의 비극에 괴로워하는 아르주나에게 격려를 하는 비슈누의 화신 끄르슈나. 그는 모든 것을 생성하는 창조신이자 절대신이다.

끄르슈나는 세상의 근원이며 끝이오. 세상 만물이 끄르슈나로 인해 생겨난 것이오. 그는 드러나지 않은 근원이며, 창조주이며 영원한 분이오. 그는 만 생명 너머에 존재하는 가장 큰 어른이시오. 명료한 생각, 마음, 세상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즉, 바람, 빛, 물, 땅 그리고 공간이 그분 안에서 생성되고 존재하며 네 가지 생명도 모두 끄루슈나에게서 삶을 찾는다오. 해와 달과 별과 행성들, 사방과 팔방도 모두 끄르슈나 속에 있지요.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50

끄르슈나를 찬미하는 이들도, 그에 적대하는 이들도 모두 끄르슈나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찰나의 모습으로만 인식한다. 브라만의 지식을 통해 끄르슈나가 만들어낸 세상을 차츰 알아갈 수도, 끄샤뜨리야의 용맹을 통해 그의 덕에 조금은 다가설 수 있을것이다. 그렇지만, 공간 상에서 다르마(dharma)를 깨닫고 여기에 맞게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넘어설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속절없이 깨지고, 이러한 깨어짐을 통해 운명(運命)을 절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 혼자서는 그런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를 도와줄 동지도 찾지 못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죽음뿐입니다. 꾼띠의 아들에게 굴러 온 막대한 재물을 보니 운명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라는 것이 아무 쓸모도 없는 것 같습니다. 수발라의 아들이여, 옛날에 나는 그를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연꽃이 물속에서 자라나듯 그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합니다. 이 때문에 운명이 인간의 힘을 압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180

아르주나여, 사람에게는 자손과 행위와 배움, 이 세 가지 별이 있다고 데왈라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이것들로 인해 인간이 태어나기 때문이지. 생명을 떠난 텅 빈 몸뚱이는 불결하여 친지들도 이를 외면하지만 이 셋은 몸뚱이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_ 위야사, <마하바라따 3>,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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