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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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이란 적당한 거리 두기이다. 비평은 관점과 전망이 중요하고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직 가능했던 세계에 터전을 둔다. 그동안 사물들은 너무나 뜨겁게 인간사회에 밀착되어버렸다. 이제 '선입견 없는 공평함'과 '자유로운 시선'은 단순한 무능함을 드러내는 순진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 아니라면, 거짓말이 되어버렸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138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Einbahnstraße / Denkbilder>의 여러 글 안에서 문학과 벤야민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을 말하지 않는 작가. 그의 글쓰기와 실천이 일치하는 문학. 이처럼 작가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삼위 일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성공한 문학이 태어나게 된다.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Uberzeugungen)보다는 '사실'(Fakten, 事實)에 훨씬 더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 뿐이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69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238


 그렇지만, 위대한 작품은 단일한 것이 아니다. 여성성에 의해 완성되고 죽음을 맞이한 뒤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남성성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이미지. 여성과 남성의 양면적 이미지가 생성과 죽음으로 작품 내부에서 얽혀 있다. 서로 상반된 것들의 얽힘. 그것은 작품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물에 내재하는 대립적 요소들은 미묘하게 결합되어 떨림으로 우리에게 포착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다가온다.


 종종 사람들은 위대한 작품들의 생성을 탄생의 이미지 속에서 생각해왔다. 이 이미지는 변증법적 이미지다. 즉 그 이미지는 그 과정을 두 가지 면으로 포괄한다. 한 면은 창조적 수태와 관계가 있고 천재적 정신(Genius) 속의 여성적인 것에 해당한다. 이 여성적인 것은 완성과 함께 소진한다. 그 여성적인 것은 작품을 탄생시키고, 그런 뒤 사멸한다... 이 작품의 완성은 어떤 죽은 것이 아니다. 그 완성은 외부에서 도달할 수 없다. 그 완성은 작품 자체의 내부에서 일어난다. 이 창조는 완성 안에서 창조자를 새로이 잉태한다. 그 창조는 수태되었던 여성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 창조자의 남성적 요소에서 잉태한다. 축복 속에서 그 창조자는 자연을 추월한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242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습관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120


 

 재현불가능한 대립적인 양극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벤야민은 그것을 고대의 '도취'에서 발견한다. 서로 대립되는 양극을 함께 확신시킬 수 있는 경험. 도취를 통해 상반되는 요소를 함께 확인하고 상상력을 통해 이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문학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우리 삶에서 그 의미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역자는 <일방통행로> 안에 벤야민의 중/후기 사유의 모티프가 응축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넓은 사유를 리뷰 안에 담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지만 두 손에 담을 수 있을만큼만 일단 건져본다... 


 모든 인식에는 미량이나마 부조리함이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인식에서 인식으로 진행하는 일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식 자체 내에서 비약이 결정적이라는 뜻이다. 이 비약이 바로 인식이라는 것을 천편일률적으로 조제되는 모든 상품계열로부터 구별시켜주는 진정한 표지이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220


 고대 사람들이 우주와 관계 맺는 방식은 달랐다. 그들은 어떤 도취 상태에서 우주를 경험했던 것이다. 도취야말로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과 가장 멀리 있는 것은 항상 함께 확인된다. 그 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는 결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말은 취합의 상태에서 우주와 소통하는 일은 반드시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163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 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요컨대 상상력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 그 부채가 펼쳐져야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또 새로이 펼쳐진 그 폭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특성들을 내부에서 연출해 보이는 그러한 능력이다. _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p116

꿈들이 무의식적인 정신적인 것에 대한 상징들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그리고 대상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꿈의 층위가 인식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그 꿈들이 이제껏 묻혀 있던 진리의 어떤 측면을 드러내주는가 하는 점을 서술형식을 통해 포착하려고 한다는 점에서이다... 꿈은 규율 받지 않은 경험의 매개체가 되며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유의 각질 표면에 맞서는 인식의 원천이 된다. 성찰은 작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놓고, 사물들은 섬광이 비치는 순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둔다. - P53

모든 명성은 약속한 것을 이행하는데, 어떤 신탁도 명성이 갖는 노회(老獪)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불후의 명성을 가진 자는 오벨리스크처럼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불후의 명성을 가진 자는 자신 주변에 거세게 일렁이는 정신적 교통을 통제하지만,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비문은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 P108

도장이 찍힌 우표만 모으는 수집가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안다. 크게 잘못 말하는 게 아니라면 그들이야말로 비밀의 기미를 알아챈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우표의 제의적 부분, 즉 도장을 중요시 여긴다. 왜냐하면 도장은 우표의 어두운 이면이기 때문이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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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세부적인 것에는 여러 면이 있어서 서로 붙어 있는 진실의 조각들 사이에서밖에는 끼어 있지 못하는데도 그녀는 그중 하나를 제멋대로 뽑아내 자기가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 사이에 끼워 넣으려 했고, 그 꾸며 낸 세부적인 거짓말이 어떠하든, 거기에는 지나친 면과 채워지지 않는 면이 있기 마련이어서, 바로 이점이 진짜 세부적인 진실이 있을 곳이 그녀가 꾸며 낸 거짓말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했다.

스완은 오데트가 겁도 없이 그에게 맡긴, 그만큼 그의 양심에 대한 그녀 신뢰가 절대적인 봉투 앞에서 잠시 비통하고도 당혹스러우며 그렇지만 행복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봉투의 투명한 유리 너머로, 그가 알게 되리라고 결코 생각해 본 적 없던 사건의 비밀과 더불어 오데트 삶의 일부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부터 오려 낸 좁고 빛나는 단면인 듯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자 그의 질투심에는 독립적이고 이기적인 생명력이 있어 질투를 부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어 치우기라도 하듯, 비록 스완 자신을 희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질투심은 필요한 양분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음의 병이라는 화학 작용에 따라 자신의 사랑으로 질투를 만들어 낸 다음, 다시 오데트에 대한 다정함과 연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다시 귀엽고 착한 오데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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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은 이 사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대화를 채우는 숱한 몸짓이나 말, 하찮은 사건들 속에서 우리 주의를 끄는 것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우리 의혹이 무턱대고 찾는 진실을 감추고 있는 것의 곁은 그냥 지나쳐 가면서도, 반대로 아무것도 없는 것들 앞에서는 발길을 멈추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오데트가 흔히 하던 거짓말은 그렇게 결백하지 않았고, 만일 탄로나면 이런저런 친구와의 관계에서 엄청난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을 숨기는 데 활용되었다. 그래서 그녀가 거짓말을 할 때면, 겁에 질려 자신을 방어할 만큼 충분히 무장되지 않았다고 느꼈고, 또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었으므로 잠을 자지 못한 몇몇 어린애들처럼 피로해져서는 그만 울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오데트의 육체는 별로 좋지 못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는 살이 쪄 갔다. 그렇게도 풍부한 표현이며 애절한 매력이며 놀란 듯 꿈꾸는 듯하던 시선도 그녀의 첫 번째 젊음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스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말하자면 이처럼 스완이 오데트를 가장 덜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그는 예전에 느꼈던 매력을 다시 찾아내려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번데기 아래 살고 있는 것은 여전히 오데트였으며, 여전히 덧없고 포착할 수 없는 앙큼한 의지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스완이 그녀 마음을 붙잡기 위해 예전과 똑같은 열정을 기울이기에 충분했다. 그러면 그는 이 년 전에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그녀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자였는지 회상해 보았다. 그것은 그녀 때문에 겪는 그 많은 고초를 조금은 달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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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완은 오데트가 여러 면에서 그렇게 뛰어난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자기보다 열등한 존재에 대해 그가 행사해 오던 우월감에 비추어 ‘신도들의’ 면전에서 그 권리가 공표되었다 해도 그렇게 자랑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오데트가 많은 남자들 눈에 매력적인 욕망의 대상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들이 그녀 육체에 느끼는 매력 탓에 그 역시 그녀 마음 구석구석까지도 완전히 지배하고 싶다는 고통스러운 욕구를 느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질투가 소생시킨 것은 학구적이었던 젊은 시절의 또 다른 재능, 진실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러나 이 진실 역시 그와 오데트 사이에 놓여, 오로지 그녀로부터만 빛을 받는 순전히 개인적인 진실로, 그녀의 행동이나 교우 관계, 계획, 과거 따위를 그 유일한 대상으로 삼으며, 거기에 무한한 가치와 이해 관계를 거의 초월한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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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녀 마음속에 끼어들 기회만을 노렸는데, 그것도 그녀 마음에 드는 방법을 통하려고 애썼다. 가령 꽃집이나 보석상 진열장에서 마음에 드는 작은 관목이나 보석을 보면, 그는 곧바로 그것을 오데트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느끼는 기쁨을 그녀도 느낄 것이고, 그러면 그에 대한 그녀의 애정도 더 커질 것이라고 상상하며 그녀가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으므로 자기가 그녀 곁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순간을 더 이상 늦추지 않으려고, 즉시 그 선물을 라페루즈 거리로 보냈다.

자주 돈에 쪼들리는 그녀는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받으면 스완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그는 그것이 기뻤다. 오데트에게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가 그녀에 대해 품고 있는 커다란 사랑이나 단지 커다란 영향력에 대한 생각,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기뻤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녀에게 선물 세례를 하고 필요한 것을 도와줌으로써, 그녀 마음에 들기 위해 기진맥진 노력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의 인격이나 지성과는 무관한 이점에 기댈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랑에 빠져 사랑으로만 산다는 이 쾌락이, 때로는 이 쾌락의 현실성이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비물질적 감각을 즐기는 스완이 지불하는 대가가 그 쾌락의 가치를 더해 주었다.

그의 생각은 잠시 어둠 속을 더듬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알을 닦고 손으로 눈을 비비며 전혀 다른 생각 앞에서 빛을 되찾았다. 즉 다음 달에는 5000프랑 대신 6000프랑이나 7000프랑을 보내 오데트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안겨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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