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죽음으로 삶이 규정되는 것은 희랍인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brotos(인간)라는 단어도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반대로, 신들은 ambrosia(불멸)를 먹고 마시며 영원을 살아간다.

‘아버지 제우스시여, 그리고 영원을 살아가는 복된 신들이시여,
임들은 비정한 잠으로 저를 잠들게 하여 아테
(현혹)로 몰아넣으셨나이다.
남아 있던 전우들이 어마어마한 짓을 꾀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도주를 따라주고 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꾸며 말한다, ‘있지도 않은 자(Outis)’라고. 우리말과는 달리 인도유럽어에서는 ‘이다’와 ‘있다’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있지도 않은 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옮길 수도 있다. 꾀가 힘을 제압하는 패턴 자체는 민담에서 가져온 것이다.

‘내 말을 들으소서, 대지를 뒤흔드는, 검푸른 머리칼의 포세이돈이여. 진정 내가 당신의 자식이고, 당신이 내 아버지임을 자부한다면〈이타카에 집을 둔, 라에르테스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가 닿지 못하게 해주소서!
그럼에도 그가 식구들을 만나보고, 잘 지어놓은 집에, 자기 고향 땅에 가 닿는 것이 그의 운명의 몫이라면, 한참을 걸려 흉흉하게 가기만을! 전우들을 죄다 잃어버리고 남의 배를 얻어 타기를! 그리고 집에서도 재앙을 마주치기를!’

신이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며, 사람들은 돼지로 변한다. 오뒷세우스는 여신과 몸을 섞고,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일행은 신들처럼 잔치를 벌인다. 오뒷세우스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각성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저승이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도 곧바로 대답해주더군요.
‘그건 내가 쉽게 말해줄 수 있으니 헤아림 속에 새겨두오.
목숨을 잃은 망자들 중 누군가가 피에 가까이 다가오도록
그대가 허락한다면, 그는 그대에게 틀림없는 사실을 말할 것이오. 하지만 그대가 꺼린다면 그는 도로 뒤로 물러갈 것이오.’

그러니 죽음을 두고 상심하지 마오, 아킬레우스.’ 제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제게 즉시 대답하며 말하더군요.
‘죽음에 대해 날 위로하려 하진 말아요, 눈부신 오뒷세우스여. 쇠잔해진 망자들 모두에게 왕 노릇 하느니
차라리 재산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많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땅뙈기라도 부쳐먹고 살고 싶다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카이아인들 중 어느 누구도 오뒷세우스가 고생하고 참아낸 것만큼 애쓴 사람은 없지요. 괴로움이야 그이 본인에게 닥치겠지만, 그 사람이 이미 오래도록 떠나고 없고, 살아는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우리가 알 도리가 없으니, 영영 지울 수 없는 슬픔은 제게로 닥칩니다.

‘아트레우스의 아들아, 그토록 오래 진이 빠지도록 우는 것은 이제 그만하여라. 그렇게 해봐야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제우스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강인 아이귑토스로 다시 한번 들어가 배들을 세운 다음 온전한 헤카톰베를 바쳤다네. 그렇게 나는 한순간도 가신 적 없었던 신들의 진노를 멈추었고 아가멤논의 명예가 꺼지지 않도록 흙을 부어 그의 무덤을 쌓았지. 이 일들을 모두 마치고 나는 돌아왔다네. 신들은 나를 위해 순풍을 내려주셨고, 내 고향으로 나를 빠르게 보내주셨어.

식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죽는 것은 그이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닙니다. 제 고향 땅에, 지붕이 높다란 제집에 이르러 식구들을 보게 되는 것이 여전히 그의 운명의 몫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리라이팅 클래식 1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은,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던 영웅이, 바다를 떠돌며 모험을 겪은 후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구혼하면서 자기 집 재산을 먹어치우고 있는 횡포한 무리들을 처단하는 걸 주된 내용으로 한다. 간단히 줄이자면 '오뒷세우스의 모험과 복수'다. 이것이 <오뒷세이아>의 중심 주제 두 가지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43

강대진의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호메로스(Homeros, BCE 8C ? ~ ?)의 <오뒷세이아 ODYSSEIA>의 입문서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영웅 오뒷세우스가 고향 이타케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10여년 간 떠돌아다닌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다시 왕(王)으로 자리한 이야기. 많은 이들이 '모험'-'복수'라는 2개의 주제에 주목하지만,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흔히 놓치기 쉬운 다른 하나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일깨운다.

이 작품의 다른 핵심은 텔레마코스라는 젊은이의 성장이다.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아버지의 모험을 축소해서 겪고, 그것을 통해 어른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뱃사람의 모험담과 집 떠난 이의 귀향담에 더하여, 젊은이의 성장담이 함께 다뤄지고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오뒷세이아>의 세 주제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43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아들 텔레마코스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것은 텔레마키아에만 한정된 주제가 아니다. 아버지 오뒷세우스의 귀환 역시 그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일리아스>에서 꾀 많고, 다른 이들을 속이는데 익숙한 장수로부터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로 성장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오뒷세우스의 성장과 이타케의 질서 회복이라는 틀을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는 죽은 자, 아무것도 아닌 자, 표류자의 단계를 지나왔으며, 지금은 표류자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를 바닷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로 서 있다. 그가 한 나라의 왕으로 다시 서서 뒤집힌 질서를 바로잡으러면, 아직도 더 성장해야 한다.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389

<오뒷세이아>에서 눈에 띄는 '모험'과 '복수'라는 주제로 한정 짓는다면, <일리아스>의 주제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이은 '오뒷세우스의 모험'이라는 후속작품에 머무르지 않을까. 여기에 '성장(成長)'이라는 주제가 더해지면서 <오뒷세우스>는 '분노-복수'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헤시오도스(Hesiodos, BCE 776 ~ ?)가 <일과 나날>을 통해 노래한 것처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를 거치며 창조 이후 끊임없이 쇠락한 인류 문명에 '판도라의 상자'처럼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사람들끼리 맹약을 맺게 하여, 원한을 잊고서 이전처럼 서로 사랑하게끔 만들어 주자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인류의 정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상이라고 평가한다. 이전까지 끝없는 피의 보복이 잇달았는데, 여기서 그것을 단절하고 맹약으로 평화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655

<오뒷세이아>의 내용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서사시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주제의식이 작동하는가를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통해 다른 하나의 은유를 개인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오뒷세우스라는 '국가'와 텔레마코스-페넬로페라는 '가정'의 결합이라는. 12세기 도리아 인 또는 지중해 해양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붕괴된 미케네 문명의 국가 권력의 소멸이 지중해 식민 활동을 통해 다시 부활하고, 국가 권력의 부활이 가족 내 질서에 영향을 행사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부활한 국가 권력은 예전과 같이 구술 언어에만 의존한 신정(神政) 권력이 아니라, 이제는 시간을 넘어서는 문자(文字) 언어를 통해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냈고, 텔레마코스는 혈통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인임을 입증해야 했다는 이야기. 다소 거칠지만, 이러한 틀에서 <오오뒷세이아>를 다시 읽으려 한다...

시인과 그의 주인공은 도착한 땅이 얼마나 식민하기에 좋은 곳인지 보여준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런 태도에서 기원전 8세기 희랍인의 경험을 발견하고, 이것이 작품 전개에 리듬을 제공한다고 보기도 한다. 즉 지중해 곳곳에서 식민 활동을 했던 경험이 여기 반영되어, 주인공의 모험에도 그것이 보이며, 거기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주인공이 자기 고향을 '재(再)식민화'한다는 것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211

지금 이 단계에서 오뒷세우스가 젊음을 되찾는 것은 언어와 상상력이 이룬 놀라운 성취이다. 오뒷세우스는 칼륍소 못지 않게 언어라는 마술에 능한 사람이고, 페넬로페의 상상력은 시간의 위력을 이기고 과거를 복원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언어-상상-현실로 이어지는 이 단계적 성취는 우리가 <일리아스>에서도 발견하는 기술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강대진의 고전 산책 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성 원리는 바로 반복이다. 구절들, 주제들, 장면들 모두가 거듭거듭 되풀이된다. 하지만 그냥 늘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다. 매번 조금씩 변형된다. 비슷한 것이 다시 등장하면서 전과 조금 달라졌으면 사람들은 그 차이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_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p44

강대진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는 <일리아스>를 읽기 위한 입문서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을 다룬 서사시로 널리 알려진 <일리아스>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 받지 못해 발생한 황금 사과 사건도.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가 파리스의 독화살에 의해 죽는 사건도, 트로이아가 결국 오뒤세우스의 목마의 계략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10년에 걸친 사건도 모두 작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10여 년 중 극히 부분인 며칠의 이야기 안에서 작품의 주제를 찾을 수 있도록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는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전체와 부분이 서로 닮아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일리아스>라는 작품과 그 부분들 사이의 닮음으로 가장 뚜렷한 것은, 앞쪽에는 일반 주제(전쟁), 뒤쪽에는 특수 주제(분노)가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작품의 첫 부분에는 전쟁 전체가 주로 그려진다... 뒤로 가면서 아킬레우스의 복수가 주된 주제가 되어 전쟁은 배경으로 물러선다. _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p593

전체가 압축된 부분, 부분이 맞물려 만들어진 전체는 '주제-변주'의 구도 속에서 끊임없이 강조된다. 이러한 구조를 저자는 균형을 통해 설명한다. 10년 전쟁의 도중인 만큼 전쟁 양상은 '주고받는' 관계지만, 그 안의 기울어진 불균형은 이야기를 정적(靜的)이 아닌 동적(動的) 긴장감으로 독자들을 몰아넣는다는 것을 저자는 독자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죽음과 삶, 상세와 흐릿함, 실리와 명예. 트로이아군과 희랍군의 불균형적인 교환관계 속에서 거대한 전쟁의 물줄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내가 많이 강조하는 것은 균형이다. 이 균형에는 형식적인 것도 있고, 명예와 실리, 또는 동정심이 이루는 균형도 있다. 뒤의 균형을 이루는 장치는, 대체로 희생자라고 할 수 있는 트로이아군에게 주어지는 동정심이지만, 때로는 희랍 청중을 배려하여 희랍 쪽에 해를 끼친 인물이 즉각 응징되게 장면이 짜여 있는 때도 있다. _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p592

<일리아스>는 유명한 작품이지만, 유명한 만큼 기대와 다른 작품이기도 하다. 시인은 영화 <어벤져스>의 압도적인 전투신을 상상한 독자들에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 도입부에서 보여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노래하고, 전쟁의 전말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전장의 며칠을 보여준다. 때로는 무의미한 배의 목록과 이름을 나열하면서 독자들에게 지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의미해 보이는, 독자의 기대를 배신하는 서사시가 왜 고대의 청중들에게는 열광을 선사했으며, 오늘날의 고전이 되었는가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입문서라 여겨진다...

트로이아인들의 목록은 사실상 전사자 명단을 미리 제시한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 소개된 인물들이 거의 다 이 작품 내에서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배들의 목록'에 나오는 희랍 쪽 지휘관 중에 쓰러지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과는 대비되는데, 결국 이 전쟁에서 희랍 쪽이 이겼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_ 강대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