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와 파시즘은 특히 운동 단계에서 대중의 지지를 불러일으키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포퓰리즘에 추파를 던졌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와 파시즘 모두 본질적으로 포퓰리즘보다 엘리트주의에 더 가까운 이데올로기이자 정체(政體)로 보아야 한다.

특히 개발도상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포퓰리스트들은 이제 신뢰를 잃은 기존 지도자와 정책에 대한 광범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을 섞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정책과 이 정책을 실행한 자국 엘리트층을 공격했다.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와 남한의 노무현 같은 포퓰리스트 ‘아웃사이더들’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포퓰리즘은 권위주의 체제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유의미한 포퓰리스트가 없는 민주주의 국가도 많다. 그러나 세계에서 민주적 이상의 헤게모니가 강해지는 추세, 아울러 선거민주주의의 가능성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민중의 일반의지를 찬양하는 이데올로기인 포퓰리즘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포퓰리즘은 아주 기본적인 일군의 이념인 까닭에 숙주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결합은 대규모 집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정치적 맥락에 대한 더 폭넓은 해석을 제시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민중’과 ‘엘리트’에 대한 특수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은 포퓰리즘과 숙주 이데올로기의 결합이다.

포퓰리스트들이 원하는 결과는 자신들의 대표들, 즉 ‘민중’의 대표들이 정권을 잡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포퓰리즘 정당은 포퓰리즘을 활용해 기득권층에 도전하는 한편, 자신들의 대표가 없다고 느끼는 집단에게 발언권을 준다.

포퓰리즘 정치가 본질적으로 ‘순수한 민중’ 대 ‘부패한 엘리트’의 투쟁인데다 국민주권을 기필코 옹호하는 체하는 만큼, 포퓰리스트 지도자에게는 스스로를 민중의 진정한 목소리로 내세우는 것이 극히 중요한 일이다.

이 구성물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면서도 연관되는 두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하나는 엘리트와 분리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과 연결되는 과정이다. 앞의 과정은 포퓰리스트 지도자의 아웃사이더 지위와 관련이 있는 반면, 뒤의 과정은 포퓰리스트 지도자가 주장하는 진정성과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해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이면서도 현대 세계에서 지배적 모델인 자유민주주의와 충돌한다. 포퓰리즘은 그 무엇도 ‘(순수한) 민중의 의지’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다원주의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며, 따라서 소수자의 권리는 물론이고 그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보장책’에도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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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1-20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도 좋아요~~
근데 책값은 ㅎㄷㄷ

겨울호랑이 2023-11-20 13:54   좋아요 0 | URL
네, 다양한 주제에 대해 간결하게 잘 정리한 좋은 시리즈인 것 같아요... 각 권은 가격 부담이 없는데 시리즈가 많다보니... 조금 부담이 있네요 ^^:)
 

포퓰리즘이 19세기의 더 진보적인 성격에서 20세기의 더 보수적인 성격으로 변하긴 했지만, ‘민중’의 자기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직업(농민보다는 중간계급)과 종교(개신교보다는 기독교) 면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민중에 포함된다고 해석될 테지만, 민중은 여전히 대체로 심장부 출신 보통사람들이다.

거의 모든 포퓰리스트는 숙주 이데올로기라 불리는 이런저런 이데올로기와 포퓰리즘을 결합시킨다. 대강 말하면 대다수 좌파 포퓰리스트들은 사회주의의 어떤 형태와 포퓰리즘을 결합시키고,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대체로 민족주의의 어떤 유형과 포퓰리즘을 결합시킨다.

포퓰리스트 개개인은 일군의 특정한 사회적 불만 때문에 등장한다. 사회적 불만은 포퓰리스트가 숙주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주고, 숙주 이데올로기는 다시 포퓰리스트가 ‘민중’과 ‘엘리트’를 규정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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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근래의 접근법에 따르면, 포퓰리즘이란 무엇보다 추종자들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지지에 기반해 통치하려는 특정 유형의 지도자가 구사하는 정치 전략이다. 이 접근법은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비서구 사회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우리의 해석은 포퓰리즘 용어에 대한 두 가지 주요 비판을 논박한다. 하나는 포퓰리즘이 본질적으로 정적을 비난하기 위한 정치적 전투 용어(Kampfbegriff)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퓰리즘이 너무나 모호하고 따라서 어느 정계 인물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퓰리즘을 무엇보다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맥락 안에 둔다. 이는 이데올로기보다 경험과 이론에 근거하는 선택이다. 이론 측면에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자체나 다른 어떤 민주주의 모델보다도 자유민주주의와 가장 근본적으로 병존한다. 경험 측면에서, 더 유력한 포퓰리스트들은 자유민주주의 얼개 안에서, 즉 자유민주주의인 체제나 자유민주주의가 되려는 체제 안에서 민중을 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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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일관계사 - 한일 대립은 언제 끝날 것인가. 과연 관계 개선은 가능할까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기미야 다다시 지음, 이원덕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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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냉전 시기와 같이 비대칭이지만 상호보완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변용해왔다. 따라서 냉전 시기 남북 분단 체제하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 우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계는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71/105

기미야 다다시 (木宮正史, 1960~ )는 <한일관계사>를 통해 현대 한일의 역사 속에서 두 변곡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한일 수교로 성립된 '1965년 체제'로서 비대칭적 관계의 시작점이며, 다른 하나는 '1998년 체제 - 한일파트너십'으로 대칭적 관계의 출발점이다. 본문에서

저자는 양국을 바라보는 양국의 인식차이를 언급한다. '안보'를 중심의 일본과 '역사' 중심의 한국의 인식. 이러한 인식 차이는 근대 개향(開港) 이후 오늘날까지 변화한 적이 없었다. 다만, 서로의 필요에 의해 비대칭적 관계에서는 드러나지 않았고, 대칭적 관계에서는 나타났을 뿐이다.

현재 한일 양 정부, 사회의 대응을 보면 비대칭에서 대칭으로의 변화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비대칭의 관계에 기반한 한일관계하에서 형성된 한일 양 정부와 사회의 사고나 행동 양식과 대칭적인 관계에 기반한 사고와 행동 양식이 혼재하여 서로가 관계 악화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함으로써 어느 쪽도 먼저 나서서 타협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87/105

저자는 <한일관계사>에서 현재 한일 간의 관계 문제가 관계를 바라보는 인식 차이가 있어 왔으며, 이러한 차이는 수교 후 60여년 간 달라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침묵이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만, 2000년대 이전까지 양국은 서로의 이익 앞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줄여왔을 뿐이고 이를 우호증진, 관계개선이라고 착각했을 뿐이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을 단순히 갈등이라고 치부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고 인정하면서 입장을 좁혀간다면 진정한 이웃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일관계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협력이 쉬운 측면도 있었다. 1980년대까지와 같이 한국이 비민주적인 체제였기 때문에 한일 협력에 대한 저항을 상당 정도 억제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원만한 한일 협력이 가능했다. 또 한일 협력의 성과로 한일 간 국력 격차가 좁혀졌다고 일본이 그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 비대칭적이었던, 바꿔 말하면, 서로 너무도 달랐던 점이, 상호 협력에 따른 손익계산에 관해, 누릴 이익에는 민감했지만 부담할 비용에는 그다지 만감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주었다. _ 기미야 다다시, <한일관계사> , p49/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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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문제는 일본 측에서는 영토 문제이지만 한국에는 영토 문제라기보다도 역사 문제였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원래부터 일본 고유의 영토였던 것을 1905년 시마네현이 영토 편입을 선언함으로써 법적으로도 영유권이 명확해졌는데도 불구하고 1952년에 이승만 정권이 불법 점거를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에 대해 한국 정부에 따르면 원래부터 한국 고유 영토였던 것을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의 첫걸음으로 억지로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 동시에 당연히 한국의 영토로 되돌아온 것으로 본다.

한일관계는 냉전 시기와 같이 비대칭이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변용해왔다. 따라서 냉전 시기 남북 분단 체제하의 체제 경쟁에서 한국 우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일본의 안전보장, 경제에도 이익이 된다는 관계는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그 사명을 다했다.

한국과 일본은 안전보장상의 공통이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협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경우, 대립을 억제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으로 옮긴다. 양국이 함께 실행하는 경우도 있고 한쪽만인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함으로써 대립은 표면화하지 않고 억제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센티브가 실행되지 않을 경우, 바꿔 말하자면 양국의 안전보장상의 이익에 괴리가 보이거나 외교정책 방향에 갈등이 보이게 되면 한쪽 또는 양국 모두 대립을 억제하고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실행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 메커니즘을 실행시키기 위해서는 상당한 국내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대칭화가 문화의 상호 침투 현상을 촉진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는 거의 무관심이었던 한국문화에 일본 사회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해하게 된 것도 확실하다. 그것은 상당히 바람직하고 또한 한일관계의 미래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같은 ‘정의’라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일본에서는 ‘약속이나 합의를 지킨다’라는 것과 같은 ‘절차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약자, 피해자를 포함하여 관계 당사자가 납득하고 동의했다는 의미에서 정의에 부합한다’라고 보는 ‘실질적 정의’가 상대적으로 중시된다.

이렇게 한일 협력의 ‘성지’였던 경제와 안전보장에서의 한일대립이 발생한 것은 한편으로 한일 간의 역사 문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뿐만 아니라 대북 인식과 미중관계 인식을 둘러싼 한일의 괴리를 지적할 수밖에 없다. 외교나 안전보장 분야에서 한일의 괴리가 역사 문제를 풀어가려는 양측의 의욕을 저하시키며 나아가서는 역사 문제를 둘러싼 마찰을 격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외교·안전보장의 괴리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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