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의 인터넷 정책 목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검열과 통제’다. 공산당이 관리할 수 없는 국외 인터넷 사이트는 접속을 차단하고,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을 유포하는 국내 사이트는 폐쇄한다.

다른 하나는 ‘선전과 선도’다. 인터넷에 대한 검열과 통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공산당은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공산당의 노선·방침·정책을 선전하고, 공산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네티즌과 여론을 선도하는 일을 동시에 추진한다

중국은 비록 권위주의 정권이지만,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인터넷에 공개된 사건에 대해서는 매우 민첩하게 대응한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통치 정통성을 높일 수 있고, 사회안정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는 전자정부 건설의 성과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공산당의 인터넷 통제는 단순하지도 않고 일방적이지도 않다. 공산당은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인 인터넷 통제 기제를 갖추고 사이버 네트워크를 통제한다. 또한 공산당은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면서 무조건 인터넷을 봉쇄하거나 차단하지도 않는다. 이런 면에서 공산당의 인터넷 통제는 ‘이중성(二重性, duality)’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용’과 ‘통제’, ‘장려’와 ‘감독’, ‘허용’과 ‘금지’ 등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중국의 정치 자유화와 민주화는 인터넷 같은 신기술의 발전이 불러올 ‘자연사(自然事)’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실현 여부가 결정되는 ‘인간사(人間事)’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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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공산당 기층조직, 특히 당 지부 위원회에서는 당서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당서기는 당 지부 전체의 업무를 주재하고, 당 지부 위원들의 직무 수행을 지도하고 감독한다. 당 지부 설립과 발전도 당서기가 책임진다. 또한 당서기는 당원대회와 상급 당 조직에 해당 당 지부의 업무를 보고한다

공산당은 기층 당서기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인센티브(incentive) 제도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우수한 기층 당서기 가운데 상급 조직인 향·진·가도의 영도간부를 선발하거나, 기층 당서기 가운데 공무원과 공공기관의 직원을 채용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기층 당서기는 매년 상급 당 조직에 자신의 업무 수행 상황을 보고(述職)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주요 안건이 당대회에서 통과되었다는 것은 정치 엘리트의 합의와 사상통일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동시에 당대회에서 통과된 인선안은 합법성을 갖기 때문에 신임 지도자들은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공산당 발전에는 평당원의 활동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공산당의 중앙조직과 지방조직, 이를 뒷받침해주는 기층조직의 활동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평당원뿐만 아니라 간부 당원, 특히 중앙의 최고 지도자와 영도간부의 활동은 공산당의 발전 과정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사실을 담고 있다. 공산당원이 없는 공산당 조직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원 가운데 ‘관리기술직’의 비중은 계속 증가했다. 1971년 통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전문기술직’ 당원은 전체 당원 중 3.26%를 차지했고, 1980년에는 7.52%를 차지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그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 즉 2008년 ‘관리기술직’은 22.2%를 차지했고, 2021년에는 27%를 차지하여 농어민(27.1%)과 거의 비슷한 직업군이 되었다. 이는 개혁기에 들어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전문 인력, 특히 기술관료(technocrats)를 대거 입당시키면서 나타난 결과다.

1990년대 이후에 입당한 당원은 개혁·개방의 이익을 경험한 세대로, 이들에게는 이전 세대들이 가졌던 이념적 지향이 매우 약하다. 이들 눈에 공산당은 ‘혁명의 도구’가 아니라 ‘실용의 도구’일 뿐이다. 이는 2010년에 도시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 조사 결과에서도 확인되는 내용이다.6 다른 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공산당원의 수입이 높고, 승진이 빠르며, 교육 혜택이 더 큰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르다. 첫째는 정치자산 효과(political capital effect)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원이라는 정치자산을 획득하면 공산당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의 혜택을 볼 수 있고,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다. 둘째는 자기 선택 효과(self-selection effect)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원은 당원이 되기 전부터 원래 우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공산당원이라는 정치자산의 획득 여부와는 상관없이 각종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대부분 학자는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정치자산 효과를 주장하고, 소수의 학자만이 자기 선택 효과를 주장한다.13

‘시진핑 사상’은 미래 지향형 이념이다. 즉 과거에 이룩한 업적에 근거하여 정당성을 인정받은 지도이념이 아니라,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정당성을 인정받은 지도이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진핑 사상’은 앞으로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 강화된다면, 공산당-국가 관계에서 공산당만 있고 국가는 없는 문제, 궁극적으로는 마오 시대의 ‘통합형’(일원화) 영도 체제와 비슷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의법치국 원칙이 공산당 영도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계속 강조될 경우, 법원과 같은 사법체제가 공산당 통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법치 수호의 보루’ 역할을 전혀 담당하지 못하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이 정치권력을 통제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발휘할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진핑 시기의 ‘공산당 전면 영도’ 강화와 마오쩌둥 시대의 그것을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사용하는 용어는 비슷하지만, 실제 내용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오 시대의 ‘공산당 전면 영도’는 의법치국과 의법집권 원칙이나, 다른 정치 제도화 정책과 함께 추진되지 않았다. 그 결과 시간이 가면서, 특히 1958년 대약진운동의 추진과 함께 정치권력은 공산당으로 집중되고, 국가기관은 공산당의 하부 조직으로 전락하는 ‘통합형’ 혹은 ‘일원화(一元化)’ 영도 체제가 수립되었다. 또한 엘리트 정치에서는 마오가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모든 주요 문제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일인 지배 체제가 강화되었다. 결국 공산당 영도 체제는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정체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공산당의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공산당의 권력 독점이 왜 필요하고 정당한지를 설명함으로써 당내에서는 조직 응집력을 강화하고, 당 밖에서는 공산당 영도 체제에 대한 국민의 수용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공산당 통치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선전과 사상공작을 "공산당의 모든 공작의 생명선(生命線)"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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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공산당 정치국은 군사 충돌을 포함한 전쟁과 평화 문제,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조정이나 변경 등 매우 중요하고 전략적인 외교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그 외에 일상적인 외교 정책이나 긴급 돌발 사안은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결정한다. 그래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외교 정책 결정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외교 정책과 관련하여 공산당 중앙, 즉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교 정책의 기본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둘째, 외국과의 갈등(군사 충돌 포함)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군사작전을 승인한다. 셋째, 아시아와 같은 주요 지역의 정책, 미국·러시아·일본 등 중요 국가의 정책을 결정한다. 넷째, 미국과 일본 등 중요 국가의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한다. 다섯째, 중국의 외교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지역이나 국가에 대한 방침과 정책, 주요 쟁점 문제(issues)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결정한다.

공산당 총서기와 같은 최고 지도자의 역할은 없는가? 그렇지 않다. 현재 시진핑 총서기는 동시에 중앙군위 주석과 국가 주석을 겸직하고 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지위에 있다는 것이다.

외교 안보 정책의 결정 및 집행과 관련하여 인민해방군이 어떤 역할을 얼마나 수행하는가는 아직도 논쟁이 끝나지 않은 주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 공산당이 외교 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군이 근본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이고 결정적이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군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중앙군위, 영도소조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결정은 공산당 중앙이 맡는다.

외교 안보 정책에서 군의 영향력은 분야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보면, 마오쩌둥 시대와 비교할 때, 개혁·개방 시대에는 정치 영역에서 군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줄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군은 더 이상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한 군사 영역에서는 군의 자율성과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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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 근대 동아시아와 말기조선의 시대구분과 역사인식
이삼성 지음 / 한길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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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화단사태 이전까지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에 경제적으로 침투함에서 중국 정부와 개별적인 양자협정의 형태를 주로 취했다. 하지만, 의화단사태 이후 열강들은 경쟁적인 차관계약(competitive loan contracts)을 점차로 회피했다. 대신 그들 서로 간에 협력적 컨소시엄(cooperative consortiums) 형태로 중국에 대한 자본진출 방시을 변화시켰다. 중국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카르텔적 성격을 재확인해주는 것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425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는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멸망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가 이전과 구별되는 지점은 바로 중화질서의 붕괴다. '조공-책봉'체계를 중심으로 연결된 동아시아 질서는 1840년대 아편전쟁을 계기로 급격하게 흔들리며 조약 중심의 세계질서로 대체된다. '조공-책봉'체제에서 형식적인 위계질서는 '조약'으로 형성된 제국주의 국제 질서 안에서 실질적인 위계질서로 대체된다. 이 모든 것은 18세기부터 19세기 사이 극히 짧은 기간에 이뤄진 혁명의 결과였다. 


 유럽에서 정치혁명은 산업혁명과 시간적으로 맞물리면서 함께 전개되었다. 경제에서 산업혁명이 '성장의 한계'에 갇힌 전 근대적 경제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효과가 있었듯이, 정치혁명은 전 근대적 정치질서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민(臣民)은 시민(市民)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동양에서는 전 근대적 경제질서와 함께 전근대적인 정치질서가 지속되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1


 19세기에 경제면에서 산업혁명과 정치면에서 시민혁명은 유럽사회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 분업을 통한 대량생산체제는 저가의 원료공급지와 대규모 소비지로서 식민지가 필요했으며, 시민혁명을 통한 평등의식의 확산은 대외 침략의 이익을 분배하는데 기여하면서 제국주의 시대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19세기는 이와 달랐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지배세력의 유교적인 정치경제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사회안정도 경제팽창과 함께 유지되었다. 이 같은 안정 속의 시장팽창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자본주의조차 중국에서는 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광범한 원시산업화가 근대적인 공장형 산업의 발전으로 진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애덤 스미스적 성장 한계인 농업적 동학 안에 갇혀 있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10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 우리는 이와 관련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14세기 전후 유행한 페스트로 인해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 유럽에서는 일찍부터 노동력 절감을 위한 여러 방안이 강구되었고, 여기에 더해 바다 건너에 있는 식민지로의 인구 유출은 자본집약적 생산을 가속화시켰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안정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전통적인 농업에서는 잉여생산인력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기에 큰 변화가 생겨날 수 없었다. 지속적인 안정과 평화가 결과적으로 중화질서를 무너뜨리는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생겨난다.


 전통적 왕조체제는 초기에는 나름대로 생명력으로 넘쳐나기도 했다.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 관료기구의 기강을 세우는 등 국가경영에 혁신을 도입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황실과 지배층은 부유하지만 국가는 가난해진다. 국가 관료 기구는 비대한 지배층의 민중에 대한 통제 불능의 수탈기구로 전락해간다. 민중은 반란을 일으키고, 왕조는 기강이 해이해진 군사력을 긁어 모아 간신히 반란을 진압한다. 경우에 따라서 외세의 힘을 빌려야 할 때도 있게 된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155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한 결과 기득권들은 그들의 위치를 공고히하고, 밑으로의 수탈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면서 사회불만이 쌓이다가 민란이 일어나는 공식. 청나라와 조선 말기 보여진 공통적인 모습이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 1851 ~ 1864)의 난과 동학농민혁명(1894 ~ 1895)는 이같은 성격이 잘 드러난 사건이었으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동원하려 했던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혁명으로 정치혁명을 이뤄냈던 서구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동아시아의 절대왕정 편에 서서 사회적 모순을 지켜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청나라와 조선이 이같이 기득권의 논리에 의해 끌려갔다면, 이와 상반되는 사례가 개화기 일본이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변동의 핵심은 반외세의 슬로건인 존왕양이를 주창하는 세력이 일본 국가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이 동시에 개국과 개화의 추진세력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외세 자주를 추구하는 것과 개방과 개혁을 지향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 통일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지배층의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편으로 지배층과 일반 민중 사이의 일정한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게 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10


 기득권의 권리 수호와 기득권의 교체. 19세기 동아시아 질서는 여기에서 결정된 것이 아닐까.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췄던 청나라와 조선은 그 권력이 외척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 아래에서 권력이 사유화된 반면, 그보다 지방권력의 성격이 강했던 일본에서는 유사 시 막부(幕府)를 대신할 번(藩)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혁명을 이뤄냈고, 그 결과 일본은 중화질서의 변방에서 중화질서 해체의 선봉장이 되었다.


 일본이 궁극적으로는 요동반도를 포기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시모노세키 조약은 중화질서의 종언을 의미했다. 첫째, 중국의 영토인 대만과 팽호 열도가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변방이었던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둘째, 중화질서의 마지막 남은 속방이자 그 질서 건재의 상징이었던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분리시키는 것을 조약으로 공식화했다. 이를 또한 세계 열강이 다같이 공인했다는 점에서 중화질서의 종언은 최종적이었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76


 물론, 개화기 일본에서 보여진 변화의 움직임은 이후 천황을 정점으로 한 와(和)의 세계로 굳어지면서 군국화되면서 근대화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동쪽 끝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서쪽 끝이길 원했고 이러한 그들의 열망은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단어를 통해 단적으로 알게 된다. 자신들을 검은 머리 서구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를 통해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질서로부터 고립된 그네들의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이해못할 바는 아닐 것이다.


 요컨대 일본에 1890년대라는 10년간은 국가기구로서의 천황제와 가족제도로서의 가부장제를 각각 헌법과 민법에 의해 제도적으로 확립한 시기였다. 그것을 일본 국민 전체의 뇌리에 획일적으로 주입시켜 천황제 국가체제를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해내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근대적인 전 국민 의무교육제도였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27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이렇게 '조공-책봉'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약'에 근거한 새로운 국가질서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무력에 의해 강요된 세계질서가 칸트주의에 입각한 국제조약이 아님은 너무도 분명하기에 이를 굴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조약체제는 불평등 체제에 다름아니다.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조공체제는 불평등에 바탕을 둔 미개한 질서이고 서양의 국제법 체계는 주권적 평등에 기초한 말 그대로의 '만국공법'이었을지 모르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피차 일반이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서양이 만국공법의 이름 아래 중국에 부과한 질서야말로 정치군사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경제에서까지 적나라한 이익의 관점에서 침탈적인 질서를 명분으로 감싸 강요하는 것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많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307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에서는 서구세력의 중국 침탈 시 보여주었던 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인도 등지에서 벌어졌던 제국주의 세력간의 치열한 다툼 대신 중국에서는 철저한 협력과 이익분배가 행해진다. 시쳇말로 아편으로 혼미한 중국을 '다구리 치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시간이 흘러 깨어난 중국을 막기 위해 단합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의 순환과 흥망성쇠(興亡盛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비서양 세계에 대한 서양의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적 진출은 매우 경쟁적이고 갈등적이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은 해외에서 식민지쟁탈을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곤 했다. 이에 비해 서양 제국주의가 중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벌인 20년간의 전쟁의 과정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양의 중국 침탈 과정이 서양 식민주의 전개과정의 일반 패턴과는 달리 '제국주의 카르텔'의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하는 중요한 근거의 하나이다. _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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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사상 통제는 정풍운동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정풍운동은 당정간부의 업무 태도와 사업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당이 전 조직과 당원을 대상으로 학습과 자기비판을 집중적으로 전개하는 일종의 자체 정화 활동이다. 또한 정풍운동은 공산당 주석이나 총서기 등 최고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전개하는 정치운동이기도 하다.

결국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전개하는 사상 통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바로 공산당의 ‘선전 사상공작’이다.
선전(宣傳, propaganda)은 "사람의 사고와 감정, 궁극적으로는 행위에 영향에 미칠 목적으로 사회 정치적 가치를 전달하는 활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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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선전은 "중요한 상징의 조작을 통해 사회 전체의 태도를 관리하고, 여론을 통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공산당만이 간부를 관리한다는 ‘당관간부(黨管幹部)’ 원칙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원칙이다. 이것과 한 쌍을 이루는 원칙이 바로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관리(黨管意識形態)’ 원칙이다. 이는 공산당만이 국민의 이데올로기를 관리하고, 이에 도전하는 어떤 정치 세력이나 사회조직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처럼 시진핑이 강조한 ‘당성 원칙’의 견지라는 선전 원칙, ① ‘정확한 여론 선도’, ② ‘단결 안정 고무’, ③ ‘정면 선전 위주’라는 세 가지 선전 방침은 공산당이 선전공작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기본 지침 역할을 하고 있다.

공산당 중앙 선전부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공산당의 관점에서 보면, 선전부가 정권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지만, 그것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보면, 선전부는 중국에서 언론 및 사상의 자유를 저해하는 최대의 방해 요소일 뿐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이윤 창출을 위해 독자와 시청자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면 공산당의 선전 기율과 보도 지침을 어느 정도 무시해야만 한다. 당정간부의 일탈 행위에 대한 비판 보도와 사회문제의 심층 보도, 선전성이 짙은 오락 프로그램의 방송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고 선전 기율과 보도 지침을 정면으로 위반할 경우는 검열과 제재로 경영자와 언론인 모두 생존하기 어렵다.

이 모든 제도를 합한 것보다 더 중요한 공산당의 언론 통제 제도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언론 보도 지침(news guideline)’ 제도다. 이는 한국에서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 시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언론 보도 지침 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당은 이를 통해 언론매체를 일상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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