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와 피셔는 경제학 재발명의 상이한 노선을 대표했다. 케인스는 정부의 조세와 지출이라는 재정적 임무들을 강조했다. 피셔는 불황기에 가격을 올리고 그런 후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정부의 통화 관련 임무들을 강조했다. 이상적인 19세기 신념의 수호자를 자처한 하이에크는 더 오래된, 제한 정부라는 방책이 옳다고 주장했다. 어떤 재발명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어떤 재발명도 필요치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유주의는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에 대해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케인스주의는 그에 상응하는 경제 권력의 확대에 대한 분명한 인정을 요청했다. 거칠게 말해서, 고임금은 보통선거권에 대한 케인스식 등가물이었다. 케인스의 메시지는 미래 상황을 예측하는 기업가들이 이미 어렴풋이 감지한 것에 가까웠다. 즉, 고임금은 더 많은 소비자를 의미하고 더 많은 소비자는 더 큰 이윤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임금은 기업에 유리한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유권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케인스는 소비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자유주의에 촉구하고 있었는데, 노동자가 곧 소비자라는 점에서 소비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이것은 독특한 것이었다. 슘페터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기업가적 모험을 자본주의 정신으로 만들었다.

피셔의 생각은 다원적이었다. 경기 침체는 결코 똑같지 않았다. 경기 침체는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 피셔가 저리 자금을 문제시한 것은 그것이 침체를 불황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었다. 침체의 최초 원인이 요점이 아니었다. 경제는 외부 충격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 한 자연적으로 잘 굴러갔다. 외부 충격의 일부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일부는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피할 수 있는 충격의 원인은 정부였다. 불황을 야기하는 피할 수 있는 방해는 정부의 저리 자금이었다.

저리 자금은 기업들이 단기적인 소비재 투자로부터, 더 많은 대출을 요하는 장기적이고 자본 집약적인 투자로 전환하도록 장려했다. 소비에서 투자로 돈이 흘러가면 사람들은 저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매번 인위적인 저금리는 경제의 자연적 리듬을 일그러뜨렸다. 기업들은 거대 자본 프로젝트로 이동했는데, 이는 대출 이자가 일시적으로 낮아서였지 기업들이 큰 투자를 통한 큰 미래 수익을 기대해서가 아니었다. 소비자의 수요는 억제되었는데, 저금리가 돈을 투자에 쏠리게 함으로써 소비자들이 원하는 저축과 소비의 균형을 방해하기 때문이었다. 억눌린 소비자 수요가 기업들을 단기적 생산으로 내몰고 장기적 자본재에 대한 과잉 투자를 포기하게 되는 고통스러운 쟁탈전으로 내몰 때 균열이 발생했다. 하이에크의 설명은 충실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에게는 표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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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정당들을 위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대중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약속했다. 반대당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중 정치에 더 능숙한 그 정당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흡수하고 수용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양보했듯이 민주주의도 자유주의에 양보한 것이었다. 이러한 타협의 자유주의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왜냐하면 그 역사적 타협의 핵심은 타협의 다짐 그 자체이기 때문이었다.

1870년대 말경 반동의 위험에서 안전해지자 프랑스는 본질에 있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인 공적 삶의 형태를 잘 잡아놓았다. 요건은 자본주의 기업, 효율적이고 전문적인 국가, 계급 차별 없는 투표에 기초한 다당제 민주주의, 개인과 재산을 보호하는 법질서였다. 그 틀을 일컫는 프랑스어는 공화 민주주의democratie republicaine였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영어 번역어는 훗날 쓰이게 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말이다.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은 자유롭게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공정하고 공통된 사회 원칙들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정치는 다양한 용도를 가진 건물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삶의 목표에 관해 완전히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어떻게 상호 인정과 관용에 근거한 기본법들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글레의 생각은 뒤를 돌아보는 것이기도 했고 앞을 내다보는 것이기도 했다. 분명 그의 생각은 1945년 이후에 특히 미국과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고 확장시킨 일련의 원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한계주의 해명은 경제적 선택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그 선택이 일어나는 곳을 분리했고, 좋은 경제적 선택과 나쁜 경제적 선택을 분별하는 법을 제시했다. 한계주의는 경제적 선택이 대체에 의해 작동한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하나의 물건을 다른 것, 예컨대 재화, 화폐, 노동, 시간, 만족으로 교환하는 것과 관련 있었다. 모든 경제적 선택은 거래,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거래와 관련 있었다. 경제적 선택은 잃으면서 얻고 얻으면서 잃는 것인 등가 교환으로 여겨지는데, 이렇게 볼 때 경제적 선택은 욕망의 충족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욕망의 재조정에 관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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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모두 인간성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에, 그들의 논쟁은 도덕적 논쟁이 아니라, 공통된 도덕적 확신의 정치적 함의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러한 언명이 꼭 같은 생각을 담은 것은 아니었지만, 목표는 같았다. 그 언명들이 가리키는 바는, 인간 각자의 삶에는 도덕적 해를 끼치지 않고는 착취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그 자체로 귀중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1880~1945년의 자유주의자들은 부당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는 동등한 시민들 사이에서의 윤리적으로 수용 가능한 인간 진보의 질서라는 매력적인 이상을 물려받았다. 물질적 진보, 교육의 확산, 절제와 타협이라는 중간 계급 가치들의 수용은 자유주의자들에게 지배자 없는 질서라는 자신들의 꿈이 결국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국가적 통일성은 1880~1945년 내내 자유주의 질서에의 기대를 위협할 정도로 계속 지리멸렬했다. 게다가 자유주의적 제국은 다양한 신분의 뒤얽힘과 상충하는 권위들 때문에, 그리고 자유주의 원리에 대한 많은 도전 때문에 비통일성이 한층 더 심각했다.

경제적으로, 민주주의와의 타협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맞닥뜨린 대가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협상의 윤곽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만약 소수가 다수와 몫을 나누어야 한다면, 다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그런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묻어두었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한참 후퇴해 보통선거권을 인정했고, 다수에 의한 통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다수의 지배가 갖는 한계들에 대한 탐구를 결코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전략적 후퇴의 첫 번째 요소는 인민 주권에 대한 자유주의의 암묵적 합의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는 특히 대의代議 representation, 정확히 표현하기articulation, 관료화bureaucratization, 절연insulation이라는 제약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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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통치 체제 1 - 공산당 영도 체제 중국의 통치 체제 1
조영남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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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치 체제의 특징을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무어라 해야 할까? 공산당 일당 체제(one-party system)나 공산당 독재 체제(dictatorial regime)가 적절할 것이다. 중국에서 공산당은 '유일한 집권당(執政黨)'이다. 공산당은 '무장 역량(군사력)'에 대해서만은 <당장>에서 '절대영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배와 군대의 절대적인 복종을 강조한다. 절대영도의 의미는, "공산당만이 군사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다른 국가기관이나 사회 세력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군대를 지휘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14/236

조영남 교수의 <중국의 통치 체제 1 : 공산당 영도 체제>는 '중국특색사회주의(中國特色社會主義)'를 구현하는 현재 통치 체제를 분석한 책으로 저자는 중국의 정치 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구의 민주주의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국가(國家)'를 이끌어가는 '당(黨)'.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낯설게 다가오는 '국가 위에 존재하는 유일 정당'인 '공산당'의 위계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된다.

공산당 일당 체제는 학술적으로 '당-국가(parity-state) 체제'라고 부른다. 이는 공산당과 국가가 인적 및 조직적으로 결합해 있고, 실제 정치 과정에서 공산당이 국가를 영도할 뿐만 아니라 종종 대체하는 정체 체제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해, 공산당 일당 체제는 곧 '공산당 영도 체제'다(p7)... 내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공산당 영도 체제(領導體制, leadership system)라는 말은, <공산당 장정(章程)>과 당내법규(法規)에 근거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 체제'를 가리킨다. 간단하게는 '<당장(黨章)>에 근거한 정치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19/236

중국에서 '집권(執政)'은 "공산당이 국가 권력기관에 진입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국가 권력기관을 장악하여 공공사무를 관리하는 제반 활동"을 가리킨다. 즉 '집권'은 공산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영도'는 "공산당이 사회 전체 영역에서 인민의 공동이익을 실현할 가치, 노선, 정책을 제시하고, 사회와 인민을 조직하고 인도하여, 공산당이 제시한 올바른 가치, 노선,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제반 활동을 가리킨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22/236

저자는 이러한 기본 이해로부터 출발해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 원칙과 원칙이 반영되고 있는 시스템을 소개한다. 모든 조직에서(심지어 군사조직마저도) 책임자는 당과 전문가를 대표하는 2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문가들을 여러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공산당으로 영입하려는 노력을 통해 실질적으로 전국의 모든 조직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음이 보여진다.

사실 국가 공무원 중에는 80%가 공산당원이고, 영도간부(領導幹部), 즉 중앙 부서의 처급(處級) 이상과 지방의 현급(縣級) 이상의 고위급 간부 중에는 95%가 공산당이다. 따라서 국가기관은 공산당원이 국가 업무를 처리하면서 동시에 공산당의 조직 생활도 함께 전개하는 공간이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16/236

중국은 지난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유례없는 고성장을 달성하며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미국을 위협하는 G2의 위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과 번영은 중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공산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그리고 공산당 영도 체제를 강화하는 힘이 되었음을 현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공산당 영도 체제는 네 가지 영도 원칙과 현실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공산당 조직 체계와 공산당원의 활동 덕분에 제대로 유지되고 작동할 수 있다. 그 결과 개혁/개방 시대에도 공산당 일당 체제는 붕괴하지 않고 '권위주의의 끈질김'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200/236

공산당 영도 체제는 국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공산당은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여 국민이 원하는 다양한 공공재(경제발전과 생활 수준 향상 등)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새로운 통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여 공산당 영도 체제가 왜 정당한지를 국민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얻으려고 시도한다. 그 밖에도 엘리트 정치의 안정은 공산당 영도 체제가 공고하게 유지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7/236

그렇다면, 이러한 '공산당의 영도'는 계속될 수 있을까. 저자는 본문에서 현재까지 '공산당의 영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이와 동시에 영도 체제가 갖고 있는 위험성도 함께 지적한다. 시장경제에서 완정경재시장에서 과정시장으로, 과점시장에서 독점시장으로 점차 시장참여자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하나의 시장참여자만 남았을 때 그 시장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정체 체제에서는 심지어 그 출발마저 독점시장에서 시작된다. 다른 대안들이 가상으로만 상상되고, 현실적인 유일한 대안이 공산당인 상황에서 통제를 통해 상상이 억압되었다면, 그 억압을 넘어선 현실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어느 방향으로 그 물길이 흐를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공산당의 통제 장치를 다룬 2권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왜 '공산당 전면 영도'가 실현되면 문제가 될까? 이렇게 되면 공산당 영도 체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내부에서 지적하고 비판할 수 있는 사회 세력이 사라지고, 그러면 이 체제의 탄력성과 복원력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지역과 조직에서 공산당의 목소리만 들릴 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도 공산당 목소리만 들리는 '한목소리(一言堂)'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_ 조영남, <중국의 통치 체제 1>, p20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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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원전 보도를 바라지 않는 도쿄전력, 간사이?西전력, 전사련 등의 ‘의향’은 두 회사를 통해 각 언론사에 전달되고 은연중에 위력을 발휘한다. 도쿄전력과 간사이전력은 겉으로는 인심이 후한 후원자와도 같은 ‘초우량 스폰서’인 체하지만, 반원전 보도 등으로 일단 심기를 거스르면 제공하기로 결정된 광고비를 일방적으로 올리는(삭감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숨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광고비라는 탈을 쓴 협박’을 실행하는 것이 광고대행사의 일이었다.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는 원전 건설이 시작된 1960년대 후반부터 3·11까지 그 기본자세를 충실히 유지하며 거액을 투자하여 프로파간다를 추진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다. 하나는 원전이라는 시스템이 매우 불완전하여 지난 40년간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 것. 다른 하나는 일본이 세계 유수의 지진대국이라서 원전을 건설하기에 전혀 맞지 않는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왜 이런 시스템이 노출되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본래라면 경종을 울려야 할 언론(신문, TV, 잡지 등)이 완전히 원전 추진 세력(원자력 무라)의 손아귀에 들어가 그들의 협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언론은 장기간에 걸쳐 거액의 ‘광고비’를 지급받음으로써 원자력 무라를 비판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 프로파간다의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언론이 권력층과 한패가 되어 국민을 선동하는 바람에 일본을 멸망 위기에 처하게 한 사건이 태평양전쟁이다. 이것은 일본인이라면 역사적 사실로서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언론은 그 반성을 발판으로 다시 출발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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