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지음, 이종인 옮김 / 북길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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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체제든 기타 체제든 분명 붕괴한다. 혹은 경제적, 사회적 진화 과정이 그것을 탈피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불사조가 그 잿더미 속에서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다. 혼란이 있을 수도 있고, 만약 사회주의를 가리켜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비非혼란적 대안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93


 요제프 알로이스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한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렇지만, 슘페터 자신은 마르크스와 다르다고 본문에서 강변한다. 슘페터가 바라보는 마르크스는 사회과학자가 아닌 '역사의 진화를 믿는 예언자'이며, 역사는 진보(進步)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는 스스로의 모순으로 붕괴한다'는 교리(敎理)를 만든 종교인이다.


 마르크스가 볼 때 진화는 사회주의의 부모였다. 그는 사회적 구도의 내재적 논리를 너무나 확신했기 때문에 혁명이 진화 과정의 어떤 부분을 대체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혁명(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도입되었고, 완전히 다른 전제 조건들 아래에서 발행했다. 따라서 마르크스 혁명은 그 성격이나 기능에 있어서 부르주아 과격파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음모꾼의 혁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의 충만함 속에서 벌어지는 혁명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95

 

 슘페터는 본문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의 동태성과 역동성을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가 그 이전까지 자본주의의 모순 - 잉여가치와 착취라는 -이 점차 쌓이면서 드러나는 역사의 법칙에 따른필연적인 결과로 보는 반면, 슘페터는 필연적 법칙을 거부한다. 대신,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에 의한 창조적 파괴로 인한 동태적 변화를 강조한다. 자본주의의 붕괴는 동태적 변화의 우연한 결과물이다.


 사실 자본주의 경제는 정태적이지도 않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 경제는 꾸준한 방식으로 내내 확대되어 나가지도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기업에 의해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변혁을 이루어나간다. 즉 그 어느 때든 새로운 상품, 새로운 생산 방법, 새로운 상업적 기회가 기존 산업 구조로 흘러드는 것이다. 기존 구조와 사업 수행 조건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다. 어떤 상황은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뒤집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 발전은 곧 동요를 의미한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59


 마치 진화(進化, evolution)라는 주제로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사회적 진화론과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듯, 이들의 자본주의의 붕괴는 그 원인이 다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모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한 반면, 슘페터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붕괴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파악해야 할 핵심 사항은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를 다룬다는 것은 곧 진화적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그 성질상 경제적 변화의 형태 혹은 방법이 결코 정태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엔진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근본적 충동은 새로운 소비자 물품,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 방법, 새로운 시장,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산업 조직 등에서 나온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25


 이 과정은 내부로부터 경제 구조를 혁명적으로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항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모든 자본주의적 회사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26

 

자본주의의 실패와 성공이라는 정반대의 결과가 가져온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도래. 이러한 결과가 도출되는 중심에는 자본주의의 "독점(獨占, monopoly)"이 자리한다. 슘페터는 자본주의 체제가 최대한 효율을 내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return to scale)'가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독점시장이 완전경쟁시장보다 자본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시장이라고 해석한다.


 내가 정립하고자 하는 이론은 이런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실제 업적 혹은 장래 업적은 아주 훌륭하여 그 경제적 실패의 무게 때문에 붕괴한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체제의 성공 때문에 그 체제를 보호해주는 사회 제도가 훼손되고, "불가피하게" 그 체제가 망해버리는 조건들이 생겨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주의를 그 체제의 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00


 대규모 단위의 시대에서 자본주의 생산 엔진의 실제적 효율성은 그 전 시대인 중소기업 시대의 효율성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은 통계적 기록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다. 통제단위(회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그와 함께 기업 전략이 대규모화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었고, 상당 정도까지 그 통계 기록에 반영된 성과의 사전 조건들이었다. 그 회사들이 완전 경쟁에 노출되었더라면 새로운 기술적/조직적 가능성을 취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그와 유사한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269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으로 만들어진 독점기업의 거대한 힘은 시장을 통합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 힘은 자신을 독점기업으로 만든 사회적 기반마저 파괴시키며 결과적으로 부르주아지의 기득권마저 무너뜨리고, 창조적 기업가 정신마저 절멸시키면서 전체주의적 사회주의(공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한다.


 만약 자본주의 진화(발전)가 중지되거나 완전 자동화된다면, 산업 부르주아지의 경제적 기반은 현행 관리자에게 지불되는 임금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다. 자본주의 기업 정신은 그 성취로 인해 발전을 자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므로 기업 정신은 그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의 성공이 가져오는 압력으로 인해 스스로 산산 조각나버린다. 완전 관료화된 거대 산업 재벌은 중소기업들을 몰아내고 그 소유주들을 "수탈"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기업가들을 추방하고 부르주아지 계급을 수탈한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193


 농업 부문을 제외하고 비즈니스는 소수의 관료화한 대기업에 의해 통제될 것이다. 발전은 느려질 것이고 점점 기계화되고 계획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자율은 제로를 향해 수렴할 것인데, 그것은 정부 정책의 압력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투자 기회의 소멸 때문에 항구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산업 재산권과 관리는 탈脫개성화할 것이다. 소유권은 주식이나 채권의 보유권으로 변질될 것이고, 경영자는 공무원 비슷한 심리 상태를 갖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동기와 기준들은 모두 시들해질 것이다. 시기가 성숙하여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이런 추론은 너무나 명백하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312


 경제적으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하다면,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슘페터의 전망은 '그렇다'. 집단지성(集團知性 collective intelligence)이라는 민주주의의 최대 장점은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부분에 있어서 데모스(demos)들은 모나드(monad)가 되면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버리고 만다. 이러한 문제점은 대의제(代議制)에 명분을 주게되면서, 이와 함께 관료제(官僚制, bureaucracy)의 중요성도 함께 부각된다. 


 내가 볼 때 문제의 핵심은 개인적 관심사와 직접적 연결고리가 없는 전국적/국제적 영역의 문제들에서는 현실감각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중대한 정치 문제들은 일반 시민의 머릿속에서 한가한 시간의 실없는 화제이거나 무책임한 잡담의 화제일 뿐이다. 그런 정치적 문제들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감소된 현실 감각은 감소된 책임 의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효과적인 의지의 부재를 의미한다.... 감소된 책임 의식과 효과적 의지의 부재는 차례로 보통 시민의 국내외 정책에 대한 무지와 판단력 결핍을 설명해준다. 이처럼 보통 시민이 정치 분야에 발을 디디면 지적 수준의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져버린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370


 선거에 따라 바뀌는 집권세력을 보완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전문가 집단에 의한 체제 유지는 대의민주주의에 있어 필수적인 것인데, 이는 중앙집권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경제적으로 기업 독점 상태는 국가 독점 상태로, 정치적으로  대의민주주의는 중앙권력에 의한 지배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것이 슘페터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에서 펼친 미래 전망이다.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대 산업 국가들의 민주정부는 공공 행위의 모든 영역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공공 행위는 잘 훈련된 관료제의 서비스를 포함한다. 이 관료제는 좋은 전통과 명성을 갖고 있고, 투철한 사명감과 그에 못지 않은 단체정신 esprit de corps을 갖고 있어야 한다(p409)... 관료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국가가 어떤 정치적 방법을 사용하든 그것은 어디에서나 자라난다. 관료제의 확대는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가장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는 현상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411


 이처럼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하지만, 이러한 전망만으로 그를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실패가 아닌 완벽한 승리로 인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본문에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슘페터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지나친 팽창을 경고한 수정자본주의자라고 해야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방법론보다 다소 온건적인 페이비언 주의에 우호적인 논조를 보이는 다음 문장을 통해 우리는 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붕괴가 아닌 개혁에 의한 자본주의 존속을 바라는 슘페터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계급 투쟁이든 혁명이든 페이비언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정반대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페이비언이 마르크스보다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현실 정치 내에 있는 문제들만 집중하고, 사회적 여건들의 진화에 발맞추어 움직이고, 그렇게 하여 궁극적 목표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근본 교리에 더 일치하는 것이다. _ 요제프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p458

역사적 해석이라는 마르크스의 도식 속에서 발생하는 많은 다른 난점들은 생산의 영역과 사회생활의 다른 영역들 사이에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인정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이론을 둘러싼 근본적 진리의 빛은, 그 이론이 주장하는 단호하면서도 단순한 일방적 관계에서 나온다. - P34

진정한 비극은 실업 그 자체가 per se 아니다. 실업이 발생했는데도 추가 경제 발전의 조건들을 훼손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업자들에게 적절한 지원 수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비극이다. - P110

지금까지 해온 이론적 문제의 해결안을 살펴보면 독자는 중앙청 제도가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납득할 것이다... 현대의 조건 아래에서, 사회주의 경제는 거대한 관료제의 존재나 그 경제의 탄생, 혹은 작동에 우호적인 사회적 조건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 P264

생산 문제의 확정적 해결은 주어진 데이터의 관점에서 볼 때 합리적이거나 최적의 것이다. 확정적 해결로 가는 길을 단축시켜주거나 부드럽게 해주거나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것은 뭐든지 인간의 에너지와 물질 자원을 절약해주고, 또 소정의 결과에 도달하는 비용을 줄여준다. 이렇게 하여 절약된 자원이 완전히 낭비되지 않는 한, 우리가 말하는 (사회주의식) 효율성은 필연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 P276

역사적으로 볼 때,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함께 일어났고 그 사상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다. 민주적 실천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얘기를 할 수 있다. 경쟁적 리더십을 획득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적 변화를 추구했고, 그 덕분에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출세를 도와준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재편했으며, 또 그들의 관점에서 그런 구조를 합리화했다. 민주적 방법은 그런 재편을 돕는 정치적 도구였다.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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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0-26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종인 번역이네요...개인적으로 이종인 번역 별로인데...슘페트의 난삽한 문장을 번역한 걸 보니 좀 거시기 합니다. ‘중앙청 제도‘라니...ㅎㅎ 그가 전공자가 아니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문장...경제전공자에게 검수라도 받을 것이지...하~

그나마 인용해 주신 번역은 그런대로 읽을만하게 번역했네요. 처음 삼성출판사에서 이상구 번역으로 최초 한국어판이 됐죠. 그거 읽다가 열받아서 원서를 봤는데....이게 진짜 문장들이 헬이더라구요~ 한 문장이 두 페이지를 채우지를 않나...여튼 문장이 매우 깁니다. 평균 4-5줄인데, 문장이 난삽하고 어려워서 이 책을 번역하는 사람들의 고뇌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더라도 삼성출판사본은 읽을 수 없습니다. 한길사 본도 여전히 독해를 방해하는 문장들이 널려 있었는데, 북길드판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인용된 문장들만 보면 번역은 그나마 가장 나은 듯합니다~

어쨌건 호랑이님 때문에 북길드판도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책이 읽을만하면 이 책을 소장하고 나머지판본들은 모두 처분해야 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0-26 18:36   좋아요 0 | URL
저는 한길사 판과 북길드 판만 읽었는데, yamoo님께서는 원서를 비롯해서 이미 여러 판본으로 읽으셨군요. 덕분에 저 또한 슘페터의 원문의 난해함과 다른 출판사 번역본에 대한 비교를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이영훈 엮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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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경험하는 일이지만 동일한 기술 사료를 두고서 역사가의 해석은 다양하게 갈리기 마련이다.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고 때로는 비생산적이게도 소양의 차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숫자로 표시된 단면이나 시계열은 그러한 차이를 허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한다. 여기서도 해석이 갈라질 수는 있으나 실제의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심지어 거꾸로이기도 한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7


 이영훈(1951 ~ )의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목 그대로 계량경제방법론을 사용해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일부의 시기를 조망하는 책이다. 공동연구자들의 대표인 저자의 말처럼 정량적 데이터라는 객관적 자료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최대한 해석을 자제하고자 했지만,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갑작스런 주장의 비약이 일어나는 책이기도 하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요약이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해 왔듯이 한국에 있어서 근대적 경제성장은 20세기의 식민시기부터이다. 근대적 소유제도가 정비되고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발달에 의해 전국적으로 잘 통합된 상품시장이 성립하고, 나아가 노동시장 및 금융시장이 20세기 후반까지 차례로 성숙하였다. 그러한 새로운 토대 위에서 한국의 시장경제와 산업사회가 발달해 왔지만, 그 발달의 구체적 양상, 그 한국적 유형의 특질과 관련해서는 아무래도 19세기 말까지의 전통 경제체제가 전제로 또는 제약으로 작용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89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한국 경제사학적으로는 분명 의미가 있는 책이다. 정량적 데이터를 통해 역사를 조망하는 방법론이 거의 없었던 당시 실증적인 접근법은 분명 학계에 충격이었고, 방법론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저작이다. 일례로 막연하게 조선의 삼림황폐화가 일제의 무단벌채에 의한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는 달리 이미 19세기에 절정에 달하였음을 토지생산성의 계량적 분석을 통해 입증한 연구는 정량분석의 장점을 잘 활용한 분석이라 생각된다.


 19세기 농업생산성 하락을 초래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산림의 황폐화였다. 오늘날 식량위기하의 북한이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생태학적 기아현상을 볼 때, 산림황폐화가 어떻게 농업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 관계가 선명하다. 북한과 달리 조선에서 산림의 약탈을 초래한 것은 17, 18세기에 걸쳐 증가한 인구압력이었다. 조선의 18세기는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와 상업이 발전하는 조선 후기 최성기(最盛期)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번영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후 대가를 치러야 할 산림황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60


 이처럼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의 장점은 시계열 분석과 변수 간 상관관계분석에 있다. 그렇지만, 토지생산성과 산림황폐화와 같이 비교적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는 상황이 아닌 다른 상황에서도 이러한 분석방법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는 저자 스스로도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한계를 머리말에서 밝힌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의 여러 논문이 모두 수량경제사의 취지와 방법론에 적합한 것들은 아니다. 시계열 자료를 제시했다거나 두 수량변수 간의 상관계수를 따져 보았다는 정도로는 수량경제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량경제사의 방법론에 꼭 들어맞는 논문은 필자가 보기에 두 편 정도에 불과한 것 같다. 그럼에도 마치 수량경제사에 충실한 듯이 이 책의 제목을 단 것은 원자료로부터 시계열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비교 분석함에 있어서 통계학과 경제학 이론에 우리 모두가 엄격하고자 했음이 조선후기에 관한 지난 40년 간의 경제사 연구에서 전례가 드물어서 나름으로는 커다른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머리말 , p6 


 저자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를 통해 18세기, 19세기를 통해 조성경제사를 생산 측면에서 정체하거나 퇴보했다는 점을 들어 조선이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상황에 빠졌음을 전반적으로 주장한다. 그렇지만, 생산요인으로서 조선경제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산, 분배, 소비의 측면에서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림자 경제(shadow Economy) 영역은 더 크게 누락되어 본질을 왜곡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조선의 19세기가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라면 당연하게도 이 점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미가변동을 생산충격에 대해서만 회귀분석하는 모형은 1744~1881년 동안에는 높은 설명력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기에 들어서는 설명력이 사라졌다. 식민지기에는 조선의 미곡시장이 일본의 미곡시장에 통합되어 있어 이출량이 주요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어서 국내의 수요충격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325


 또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자본주의 금융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대부자금시장 균형이자율의 방법론을 통해 의미를 해석한다. 현대 중앙은행의 이자율 결정이 즉각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의 연계가 느슨한 조선 후기를 분석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방식일까. 이러한 해석이 무리하다는 것은 저자 스스로 뒷부분에서 밝히지만, 이러한 무리한 해석은 최종목적지 식민지 근대화론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과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이 그래프상으로는 동일한 하락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1810년대의 이자율의 하락은,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이 성립한다면(이러한 것을 가정할 수 있다면) 공급은 감소하고 수요는 증가하여 이자율이 상승할 시점에서 계원들의 악화된 경제 사정을 반영하여 이자율을 하향조정한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1920년대 이후의 이자율의 하락은 농촌의 미가의 계절적 변동이 감소하고 대부시장에서의 공급이 증가하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1

 

 그러나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이자율을 단순히 대부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1920년대부터 이자율이 하락하기 이전에 농촌의 계 이자율은 장기간 매우 경직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거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암의 19세기 초 이자율의 하락은 정상적인 대부시장의 균형이자율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136


 

이러한 해석의 한계 이전에 분석의 한계도 존재한다. 인구 추이 변동분석과 관련하여 두 가구(家)의 족보를 분석하여 조선 후기 인구변동을 추정하는데, 질적 연구방법인 정성분석도 아니고, 정량분석에서 지나치게 적은 표본수는 표본의 대표성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힌 '환상이나 신화의 위험성'은 오히려 데이터를 등에 업고 더 강고해졌다. 

 

 물가변동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구, 화폐량, 생산성과 물가변동간의 정합성을 각각 검토한 결과 어떤 요인도 18, 19세기를 관통하여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 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이 글에서는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을 통해 중장기 물가변동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물가의 추이를 국가적 재분배라는 제도적 요인만으로 다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가변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규정되어 있어 어느 한 요인만으로 성명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16


 예를 들어 보자. 여름에는 아이스크림이 많이 팔린다. 상관분석 수행 시 '1년 중 아이스크림 판매량'과 '계절'의 상관관계는 매우 높게 나타날 것이다. 즉,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이로부터 '아이스트림 판매가 많아지면 기온이 올라간다'와 결론을 내린다면 올바른 분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는 제한된 데이터, 분석방법의 한계가 보이는 계량경제사학의 시험적인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않는다. 아직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가 결여된 데이터 분석이 내린 식민지근대화론의 결론은 자체 내에 존재하는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18세기부터 사회적으로 실세로 등장한 경화사족과 시폐(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들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도시를 중심으로 독점화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 초기 모습을 발견한다. 이를 통해 한양을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bourgeois)계층과 신분제 사회의 붕괴, 후대의 동학농민혁명 등에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가능성도 함께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로부터의 데이터는 그에 대한 통계적 분석에 앞서 연구자들에게 데이터를 제공한 역사 자체에 대한 실체적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조건이 결여될 경우 통계적 분석이 요구하는 데이터의 조정은 자칫 허구의 역사상을 연구자에게 안길 위험성이 있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우리가 확인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19세기 중반 이후 모든 지방에 걸쳐 시장이 분열하였다는 사실이다. 분열은 내륙부보다 해강부(海江部)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며,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심각하였다.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경제가 정체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는 적신호는 켜져 있었다.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있었으며, 서울 상인의 특권이 강화되면서 유통경로가 점차 독점적으로 경직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미가 자료들이 동시에 전하는 장기에 걸친 생산성의 악화가 근본적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사회의 경제적통합을 지지한 미곡의 국가적 재분배체제가 1840년대부터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_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p273


그렇다면 이 두 족보 분석을 바탕으로 인구 전체의 변동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추론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인구 전체의 규모는 추정할 수 없으나 18세기에는 인구가 증가하고 19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혜택받은 사람들이었던 예천 맛질의 함양박씨들조차 1830~90년간 인구감소를 경험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반 농민들의 인구는 더욱 빠른 속도로 더 오랜기간에 걸쳐 감소했을 가능성이 놓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 P27

품목별 구성비는 당시의 시가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시가에 따라 화폐로 환산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시가를 항상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18~19세기 전반에 걸쳐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대전가나 가격비를 이용하여 환산하였다. 쌀과 전미 1석은 동전 4냥, 콩 1석은 동전 2냥, 마포와 면포 1필은 동전 2냥, 은자 1냥은 동전 3냥으로 환산하였다. 이 중 전미와 콩과 마포는 그 비중이 매우 작기 때문에, 전미와 콩은 쌀에 포함시켰고, 마포는 면포에 포함시켰다. - P54

우리나라의 토지수익률은 19세기에 대략 20% 정도였다고 생각되고 있는데, 리스크의 크기도 고려해야겠지만, 농촌지역에서 관행되는 높은 지대율과 함께 그에 비해서 저평가된 토지가격에 의해서 높아진 토지수익률이 이자율의 수준을 높이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자율은 대부자금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라는 아주 원론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인구변동, 토지생산성 등 기본적인 요인과 함께 대차계약에 수반되는 위험과 이자의 실질가치를 변화시키는 물가가 주요한 경정요인이 될 것이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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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배터리의 핵심 원재료인 리튬·코발트·니켈 등의 가격도 폭등세로 돌아섰다. 2021년 배터리 가격 인상분은 2022년 차량 가격에 반영된다. 최근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치솟고 있는 차량용 반도체 영향까지 겹치면서 전기차 가격 인상 압박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배터리 생산원가에서 소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63%이다. 그중에서 양극 활물질이 52%를 차지하여 가장 높고, 음극 활물질 14%, 분리막 16%, 전해액 8% 순이다. 현재 고성능 전기차에는 니켈의 비중이 높은 ‘하이니켈’ 양극 활물질인 NCM, NCA의 비중이 계속 높아지는 추세이다. 니켈 비중을 높일수록 에너지밀도가 높아져 전기차 주행거리를 늘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방관 8명이 전기차의 불을 끄는 데만 7시간이 걸렸고 2만8,000갤런의 물을 쏟아부어야 했다. 일반 내연기관차의 불을 끄는데 보통 300갤런의 물이 소요되는데, 전기차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약 100배에 달하는 물을 쓴 셈이다. 이곳 소방서 전체가 한 달에 사용하는 양과 같고 미국 평균적인 가정의 2년치 사용량이다.

지구 환경을 위한 탈탄소에는 리튬이온전지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현재까지는 그 위험성을 모두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소재의 개선, 셀 설계의 개선, 모듈 및 팩 레벨에서의 안전성 확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안전성이 점점 향상되고 있으며, 머지 않은 미래에 비록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인사 사고는 막을 수 있는 기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으나, 일반 소비자가 요구하는 전혀 불이 나지 않는 배터리로의 발전은 다른 각도로 봐야 할 수도 있다.

배터리는 모리 반도체에 버금가는 제2의 주력 먹거리 산업으로 여겨지고 있다. 불과 10년 전 중소기업 비즈니스 규모에 불과하였던 전기차 사업이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완성차 업체의 핵심과제가 되었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은 그 전기차 사업 가운데에서도 미래 핵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전기차가 대세로 떠오르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쥐고 있던 주도권이 IT 및 전자기업으로 분산되고 있다. 전동화로 엔진 대신 배터리와 모터, 인버터가 차량 원가의 절반을 넘고, 자율주행을 목표로 하는 주행 보조시스템이 고도화되면서 반도체·센서 기술과 소프트웨어·인공지능 기술이 중요해졌다.

배터리 생애 전주기에 걸쳐 있는 다양한 비즈니스 영역은 기존 소재-배터리-자동차 업체 간 사업 영역의 중첩 현상을 일으키고 새로운 계통 구조가 형성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는 다양한 협업 관계를 유도하는 기폭제가 되기도 하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내외 배터리 전후방 산업계가 모두 총망라되어 신산업을 향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국내 배터리 및 소재 업체가 수입하는 원자재의 대부분이 중국산이기 때문이다. 핵심 전극 소재의 원료인 수산화리튬(82%), 망간(99%), 흑연(88%) 등의 중국산 비율이 80% 이상인 점을 고려한다면 원재료 전반에 대한 중국 리스크 대책은 반드시 수립되어야 한다.

차세대 배터리가 자리잡으려면 이렇게 연구개발과 상용화 사이에 존재하는 ‘죽음의 계곡’을 넘어야 한다. 연구개발 분야에서 말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은 오랜 기간 이루어진 연구 성과가 논문이나 명목상의 특허로만 끝나고 상용기술로 이어지지 못하는 기초·원천기술 R&D 성과와 사업화·상용화 사이의 ‘간극’을 의미한다. 우리의 고민은 한마디로 차세대 배터리 연구개발 투자에 대한 성과를 상용화로 이끌어내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차세대 배터리 연구는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현세대 리튬이온전지를 대체할 만큼의 성능이나 가격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배터리 경쟁에서의 진정한 승리는 성능 향상뿐만 아니라 생산 및 비용 절감을 완성하는 것이다. 2027년까지 279.7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배터리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저비용 배터리 제조를 대규모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기존 제조 라인에 새로운 재료를 통합할 수 있는 ‘드롭 인Drop-in’ 솔루션과 혁신적인 생산 방법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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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반도체 산업은 평화를 이끌었다. 싱가포르에서 대만과 일본까지, 베트남을 제외한 아시아 전체를 늘어난 투자와 길고 단단해진 공급망을 통해 미국과 더욱 밀접하게 엮어 냈던 것이다. 미국이 제공하는 혁신을 기반으로 삼아 전 세계가 단단히 연결되고 있었다. 심지어 소련 같은 적국마저 미국의 반도체 및 반도체 생산 수단을 베끼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편 반도체 산업은 미군이 미래의 전쟁에서 싸우는 방법을 바꿀 새로운 무기 체계가 등장하는 촉매 역할을 해냈다. 미국의 힘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1980년대는 미국 반도체 산업 전체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실리콘밸리는 스스로가 세계 첨단 기술 산업의 정상에 올라 있다고 생각했지만, 20년간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그들은 이제 실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일본과 서로 목숨 걸고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략에는 단 하나의 약점이 있었다. 페리는 노이스를 비롯한 그의 실리콘밸리 이웃들이 반도체 산업의 꼭대기에 남아 있으리라고 전제했던 것이다. 하지만 1986년이 되자 일본은 반도체 생산량에서 미국을 추월해 버렸다. 1980년대 말 일본은 세계 리소그래피 장비 공급량의 70퍼센트를 차지했는데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반도체 산업 지원 여부는 워싱턴에서 로비를 통해 결정되었다. 우선 실리콘밸리 사람들과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안이 있었다. 바로 세금이었다. 밥 노이스는 의회에서 자본이득세capital gains tax를 49퍼센트에서 28퍼센트로 낮추고, 퇴직연금이 벤처 캐피털 회사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금융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팰로앨토의 샌드힐로드에 자리하고 있는 벤처 캐피털 회사들에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다음으로 의회는 반도체칩보호법Semiconductor Chip Protection Act을 통해 지식재산권 규제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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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론 -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소련·중국·북한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톰 오링컨 지음, 천경록 옮김 / 책갈피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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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동유럽의 자칭 '사회주의' 사회들은 그 성장에서부터 안착, 위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성들을 모두 보여 준다. 이 체제들이 전통적 자본주의 체제와 다른 점은, 국가 주도로 자국 경제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후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독점화와 국가 개입 강화 경향을 극단까지 빌어붙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체제들은 어떤 면에서는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자본주의다. _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 p45/50

톰 오링컨 (Tom O’Lincoln)는 <마르크스 주의와 국가자본주의 State Capitalism and Marxist Theory: A Survey of the Literature>를 통해 구 동구권 공산주의 경제를 '사회주의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체제이며, 동유럽 공산주의 사회가 대표적인 공산사회로 인식하는 우리의 인식에 저자는 물음을 던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 전체가 "개인적 사유재산의 부정"을 수반했다고 지적한다. 자본주의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인구 대다수는 사적으로 소유하던 생산수단을 박탈당했다. 작업실을 소유한 장인, 소박한 농기구를 가진 소농은 대공업과 대형 농장에 자리를 내줬다. 일하는 사람들이 더는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을 소유하지 않게 되는 한편, 사회의 소수인 부르주아지가 이런 도구를 독점하게 됐다. _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 p9/50

저자는 마르크스의 '노동자들의 생산 도구로부터의 소유'에 주목한다. 생산관계에 있어 노동자-노동사용자의 불평등한 교환관계의 시작은 생산도구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들이 생계수단으로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한계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생산도구의 사용자 독점은 노동 착취로 잉여를 산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에서 발생한 국유화는 혁명의 결과가 부르주아가 아닌 국가로 귀속되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1947년부터 시작된 체제 변화 사례들은 모두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비록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에는 공산당이 부르주아지를 위축시키기 위해 잠시 단역배우들을 동원해야 했지만 말이다. 더욱이 이 모든 사례에서 체제 변화는 옜 국가기구를 파괴해 달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새로운 틀로 통합됨으로써 달성됐다. _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 p23/50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저자는 소련과 동유럽의 국가자본주의를 자본주의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한다. 이같은 저자의 주장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면에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는다. 국가자본주의와 함께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사상도 간략하게나마 함께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은 또 다른 장점이다...

제3세계 부르주아지는 한편으로 제국주의적 후견인들에게 의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주계급에 의존한다. 그래서 이들은 허약하고 오락가락하며 결국에는 민중의 진보적 열망을 배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달성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몫이 되고, 노동계급은 농민을 비롯한 모든 억압받는 계층과 연합해서 그런 과제 달성을 주도해야 한다. 오직 노동자 혁명만이 제국주의와 반동적 계급들의 굴레를 떨쳐 내고 후진국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할 수 있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러시아 혁명으로 입증됐다. _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 p32/50

첫째 논점은 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한 자본주의가 제3세계 나라들의 가장 급박한 문제인 공업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둘째 논점은 오직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이끄는 노동계급만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해준다. 이 두 가지 논점은 제3세계 문제를 다룬 트로츠키의 원숙한 저작들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다. _ 톰 오링컨, <마르크스주의와 국가자본주의> , p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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