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마침내 연준이 결정을 내렸다. 5월부터 해온 준비가 마무리된 후 FOMC는 금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현행 이율로 채권 매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이후 시장을 긴장시켜온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일 연준이 조급하고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중단 없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하려 했다면 통화 부양책의 축소에 대해 채권시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찰활동과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능적 권력과 행정적 효율성만큼은 어떤 공식적인 정치적 권한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사찰과 통화스와프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위치와 미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과 정치적, 그리고 사업적으로 얽힌 국가들 안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을 미국이 생각하는 지리경제학적 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들 국가가 중국을 막아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이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 해당 지역에서의 상황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었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국경 서쪽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극빈층은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과 에너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고 여기에만 GDP의 17퍼센트가 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유럽연합 가입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국영 언론은 유럽연합 협약 참여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선전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방측 언론들은 빌뉴스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빼내와 유럽연합에 편입시키려는 6년간의 노력"의 최종 단계라고 공개적으로 보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제재위협도 여전히 큰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25퍼센트는 유럽연합으로 들어갔지만 러시아 수출 규모도 26퍼센트나 되었다.
유럽연합은 연장된 이행기를 의도했지만 사태는 혁명적 전복으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티모셴코의 조국당과 일부 혁명세력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체제 수립에 나섰다. 지난 11월 있었던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뒤집어 러시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러시아가 아닌 IMF, 그리고 유럽연합과 새로운 금융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서방측의 이해관계도 위기에 처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세계시장에서 2위에 해당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국이었다. 신흥시장국가 경제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미국은 원자재 시장에서 더는 긴장상태가 불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들은 절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결코 전면적인 경제제재라는 무기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예고되었던 서방측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인 전면 충돌은 이제 한층 더 심각한 단계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호 문제가 위기에 처하자 2014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는 도네츠크를 포함하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좀 더 고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서방측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대신 유럽에서 들어오는 농산물 수입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돈바스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려갔다. 반군은 8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월 5일 민스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휴전협정을 받아들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했던 국가들에서조차 그 지지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2 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 결과는 유럽의 정치시스템을 뒤흔들어놓았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중심 정당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럽 정치의 변방에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자체는 비록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각된 것은 좌파들의 응집력이었다
그렇지만 2015년 1월 25일의 선거에서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본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 본부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이라도 하듯 연정 상대로 중도파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타미당이 아닌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그리스인당(ANEL)을 택한 것이다. ANEL은 종교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그리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정당은 아니었지만 유럽연합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할 가능성이 있었다. 21
2012년 민간 부문 채무를 정리하는 대신 정부가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받은 대출로 민간 부채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그리스 국채에 도박을 걸었던 민간 투자자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보수적인 북유럽의 납세자들이 유럽연합에 비협조적인 그리스 좌파 정부를 위해 또다시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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