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마침내 연준이 결정을 내렸다. 5월부터 해온 준비가 마무리된 후 FOMC는 금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현행 이율로 채권 매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이후 시장을 긴장시켜온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일 연준이 조급하고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중단 없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하려 했다면 통화 부양책의 축소에 대해 채권시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찰활동과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능적 권력과 행정적 효율성만큼은 어떤 공식적인 정치적 권한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사찰과 통화스와프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위치와 미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과 정치적, 그리고 사업적으로 얽힌 국가들 안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을 미국이 생각하는 지리경제학적 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들 국가가 중국을 막아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이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 해당 지역에서의 상황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었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국경 서쪽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극빈층은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과 에너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고 여기에만 GDP의 17퍼센트가 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유럽연합 가입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국영 언론은 유럽연합 협약 참여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선전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방측 언론들은 빌뉴스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빼내와 유럽연합에 편입시키려는 6년간의 노력"의 최종 단계라고 공개적으로 보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제재위협도 여전히 큰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25퍼센트는 유럽연합으로 들어갔지만 러시아 수출 규모도 26퍼센트나 되었다.

유럽연합은 연장된 이행기를 의도했지만 사태는 혁명적 전복으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티모셴코의 조국당과 일부 혁명세력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체제 수립에 나섰다. 지난 11월 있었던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뒤집어 러시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러시아가 아닌 IMF, 그리고 유럽연합과 새로운 금융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서방측의 이해관계도 위기에 처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세계시장에서 2위에 해당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국이었다. 신흥시장국가 경제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미국은 원자재 시장에서 더는 긴장상태가 불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들은 절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결코 전면적인 경제제재라는 무기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예고되었던 서방측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인 전면 충돌은 이제 한층 더 심각한 단계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호 문제가 위기에 처하자 2014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는 도네츠크를 포함하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좀 더 고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서방측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대신 유럽에서 들어오는 농산물 수입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돈바스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려갔다. 반군은 8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월 5일 민스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휴전협정을 받아들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했던 국가들에서조차 그 지지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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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 결과는 유럽의 정치시스템을 뒤흔들어놓았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중심 정당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럽 정치의 변방에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자체는 비록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각된 것은 좌파들의 응집력이었다

그렇지만 2015년 1월 25일의 선거에서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본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 본부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이라도 하듯 연정 상대로 중도파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타미당이 아닌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그리스인당(ANEL)을 택한 것이다. ANEL은 종교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그리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정당은 아니었지만 유럽연합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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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민간 부문 채무를 정리하는 대신 정부가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받은 대출로 민간 부채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그리스 국채에 도박을 걸었던 민간 투자자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보수적인 북유럽의 납세자들이 유럽연합에 비협조적인 그리스 좌파 정부를 위해 또다시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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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과 스탠더드앤드푸어스의 결론은 같았다. 유럽은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유럽은 국채시장과 은행 자본재구성과 관련된 기본적인 불안정성을 정면에서 다루지 않았고 2010년과 마찬가지로 다시 유럽 문제에 IMF를 끌어들였다. 그리스의 채무불이행 사태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채무 재조정을 시작했다. 꼭 필요한 일이긴 했으나 그리스 채권자들에 대한 헤어컷 적용은 채권시장에 대한 압박의 수위만 높여주었을 따름이다.

재무부 장관들과 중앙은행 총재들의 회담에 대한 IMF 보고서 내용은 자못 충격적이었다. 세계 경제에 대한 "중대한 위험"은 세계적으로 심화된 "절약의 역설"이라는 것이었다. 전 세계의 가계와 기업과 정부가 한꺼번에 재정 적자를 줄이겠다고 나섰고 그 때문에 경기침체의 위험이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보고서의 내용은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위험은 취약한 금융시스템, 높은 공공 부문 적자와 채무, 그리고 이미 낮아진 금리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고 이로 인해 특히 유로존 지역에서는 낙관주의나 비관주의가 낳은 결과물들이 계속해서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마리오 드라기가 "어떤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가 유로존 위기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발언 이후 시장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취약한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 대부분은 시장금리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로존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깊은 호소력을 지닌 설명이었다

연준은 우선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기관 채권을 매달 400억 달러어치씩 매입하기로 약속했다. 이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연준이 "노동시장 전망에 실질적인 개선"을 확인할 때까지 매입을 계속한다는 점이었다. 또한 거기에 덧붙여 FOMC는 실업률이 6.5퍼센트 이하로 내려가고 연준의 물가상승률 전망이 2.5퍼센트 미만이 될 때까지 연방기금금리를 0퍼센트에 가깝게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2년 12월 12일 FOMC는 다시 매달 채권 매입 규모를 400억 달러에서 850억 달러로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제3차 양적완화 조치는 이렇게 상황에 따라 변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무한 양적완화"라는 유명한 별칭이 붙기도 했다.

유로존 위기는 유럽 정부들이 막대한 규모의 정치적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멈출 수 있었다. 즉, 그리스 채무 재조정, 재정 협약, 유럽 은행연합, ESM, 그리고 유럽중앙은행의 OMT 같은 새로운 조치들이 큰 역할을 했다. 유로존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예측한 사람들은 유럽 정부들이 할 수 있는 이런 투자 규모를 잘못 판단한 셈이다. 그리고 마리오 드라기가 강조하고 싶었던 내용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다시 한번 주장한다. 그리고 유럽은 1947년 이후 미국의 지도 아래 시작했던 유럽의 미국화를 다시 한번 추진한다.

국제 경제 정책에 관한 한, 2012년 11월의 오바마의 승리와 벤 버냉키의 제3차 양적완화, 마리오 드라기의 연설이 하나로 합쳐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종결지었다고 볼 수 있다. 중도 진보진영의 위기관리 능력이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21세기와 다양성, 개방성, 전문가 위주의 실용주의가 이제 함께 나아갔다.

유럽에서는 결국 유로존이 살아남았고 마리오 드라기의 선택이 옳았다. 위기를 바탕으로 유럽통합의 과정은 더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역시 거기에는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대가가 필요했다.

독일 재무부 장관 볼프강 쇼이블레는 아예 총선을 치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고 늘 그렇듯 직설적으로 제안했다.8 그리스의 민주주의 절차를 잠시 연기함으로써 유권자들이 뭐라고 자기 목소리를 내기 전에 핵심 조치들을 취하도록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제안은 그리스 국민들의 분노만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미처 예상치 못했지만 어떤 징조가 되었던 것이 래리 서머스가 2013년 11월 IMF에서 했던 연설이다.8 연설의 주제는 경기회복과 엄청나게 실망스러운 회복 속도였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아마도 유럽을 불황에서 구해내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며 자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10년 이후 유럽의 경제사정은 오히려 더 나빠졌으며 미국은 역사상 가장 느린 회복세를 보였다.

돌이켜보면 2008년 이전에는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완화적"이라는 데 사람들이 다 동의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출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가계를 꾸려나가면서 경험했던 것처럼 돈이 실제보다 더 많다고 믿었다. 너무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너무 쉽게 썼으며 그만큼 돈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로 그랬다면 미국 경제는 엄청난 호황이 이어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부동산 시장이 위험할 정도로 과열되었지만 2008년 무렵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수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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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로 들어온 자금의 일부는 그리스나 스페인의 부유한 기업체들의 자금이기도 하지만 사실 대부분은 독일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다시 자국으로 회수해 온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환율 차이로 인한 손실이나 독일 수출업체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자국 통화가치 상승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단은 대부분이 통일된 유로화로 거래되었고 또 유럽중앙은행 보증으로 대규모 거래에 대해서는 복잡한 절차 없이 지급결제를 진행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 채무를 전면적으로 재조정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유럽중앙은행은 그리스 국채를 적격담보물로 인정해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유로존 채권시장에는 다시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리스와 아일랜드 같은 작은 국가들에서 문제가 시작되었다가 이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같은 규모가 큰 국가들을 포함한 남부 유럽 전체의 위기로 번져가고 있었다. 2007년에 유로존 채권 투자자들은 그리스 국채를 독일 국채 분트와 같은 등급으로 취급했지만 2011년 9월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CDS 스프레드는 혁명으로 홍역을 앓는 이집트보다도 더 높았다.

만일 유럽에서 자금이 빠져나간다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금융위기가 시작된 이후에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가 악화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달러화 매각 공황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투자자들은 세계 통화 피라미드의 정점에 올라 있는 미국 재무부 채권 쪽으로 몰려들었다.

오랜 세월 지속되어온 중국의 미국 채권 보유 시대는 끝이 났다. 그렇지만 중국의 보유 규모는 1조 2000억 달러에서 1조 3000억 달러 사이로 안정세를 보였다.

중국의 비판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만 놀라웠던 건 그 비판이 미국 국내에 미친 영향이었다. 8월 5일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신용등급 평가기관들 중에서 스탠더드앤드푸어스가 미국의 등급을 AAA에서 AA+로 끌어내렸다.

미국 정치제도의 약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스탠더드앤드푸어스는 신용등급 평가기관들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보여준 셈이었다. 평가기관들이 수천억 달러 규모의 서브프라임 MBS에 내린 AAA등급은 2008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유로존 위기의 속도를 좌우한 것도 이들의 연속적인 등급 조정이었다. 그런데 이제 미국 예산안에 대해서조차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유럽중앙은행의 의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시장에서는 많은 은행들과 중개인들이 그저 유럽연합에 안정을 위한 노력만을 호소하지 않았고 수십억에 달하는 자금을 투입해 승부를 걸었다. 안정화를 가로막고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건 미래의 유로존 통치와 관련한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유럽중앙은행 사이의 갈등이었다. 문제는 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얽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과 프랑스 측에서는 IMF가 발행하는 특별인출권을 활용해 기금의 상한선을 끌어올리고 그런 다음 차입을 통해 규모를 확장하는 임시방편을 제안했던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그 속셈은 뻔히 들여다보였다. 분데스방크는 직접 관련이 없는 IMF를 이용해 EFSF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이 계획에 동의할 수 없었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가세했지만 독일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르켈 총리는 만일 이탈리아가 IMF의 지시에 따르는 것에 동의한다면 독일로 돌아가 유로존 지원을 위한 기금의 규모를 늘리는 문제에 대해 의회의 공식 승인을 받아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메르켈 총리는 특별인출권을 통한 기금의 규모 확대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가 서로 엇갈리고 있었다. 최소한 영국 보수파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대한 결정이 곧 내려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유로존에서 갈등이 불거진 건 앞서 소개한 2011년 12월 초 유럽연합 본부에서 언급된 두 가지 계획안에 공통적인 부분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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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리스에 필요한 건 분명 구조조정과 재정규율, 그리고 경제성장이었다. 그렇지만 현재 위기에 처한 건 바로 유로존의 금융안정성이었다. 그리스의 공공 부문 채무는 유럽 전체의 금융시스템 안에서 보면 일부분에 불과했다.

당시 그리스 위기에 대한 처리를 놓고 이어졌던 미국과 유럽간의 팽팽한 입장 차이, 이것이 바로 그리스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을 최초로 선택하게 된 상황이다. 유럽이 비상사태 체제로 빠져든 것은 단일한 주권 창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할 당국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위기감을 느끼고 그리스 문제를 논의하면서도 유로존 전체를 위한 포괄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일에는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유럽중앙은행 쪽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유럽 국가들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는 지금 어떻게 유럽의 중앙은행이 저렇게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있는가?

그리스의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재조정하는 대신에 모든 공공 부문과 비틀거리는 경제 분야 전체를 구조조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 개선이라는 대담한 제안은 IMF가 실제로 그리스에 도움을 주기 위해 지원계획에 포함한 내용들이다.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금융위기가 과도한 채무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경기회복을 위해 세계가 독일에 기대하는 역할은 자금을 푸는 것이 아니라 긴축경제의 모범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글로벌 경쟁력 측면에서 각국 정부는 지출과 채무를 반드시 적절하게 통제해야 했다. 유럽의 인구 문제는 상황을 더 급박하게 만들었다. 노동시장과 실업 문제에 대해서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독일의 하르츠 IV 개혁 정책의 교훈을 배워야 했다. 케인스학파가 국내수요를 염려하고 있을 때 독일이 내놓은 해답은 바로 수출이었다. 노령인구가 늘고 있는 유럽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수출을 늘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시장국가들에 대해 채권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해야 했다.

201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유럽 은행들에 대한 CDS 스프레드, 즉 은행 채권의 부도 위험에 대한 보험금이 두 차례 뛰어올라 미국 은행들에 대한 보험비용을 웃돌았다. 그 첫 번째 시발점은 그리스였고 두 번째는 아일랜드였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너무나 규모가 크고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해당 국가들이 각자 해결할 수 없었다.

양적완화의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금융시장을 통해서 전해진다. 중앙은행이 채권을 다량 매입하면 채권 시장금리가 떨어지고 자산관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수익률 높은 다른 자산을 찾는다. 그렇게 채권에서 주식으로 관심을 돌리면 주식시장이 호황을 누리며 포트폴리오의 자산가치가 증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와 소비에 나선다. 최소한 이렇게 하면 경제를 자극하는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방법은 되는 것이다.

양적완화는 의회에서 재정정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미연준이 채택하는 긴급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지만 연준 자체 역시 미국 정계의 갈등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정치가들은 결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금융위기는 정치위기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2011년 봄에 터져 나왔던 국민들의 저항은 현 정부를 바꿔놓지 못했다. 정부의 정책을 바꾼 건 열정과 상상력만 있는 저항이 아니라 2010년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이라는 전략, 그리고 대충 꿰맞춘 "해결책"이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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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테스트는 미국 금융의 전망에 대한 해석을 민간인이나 시장이 아닌 정부가 선택한 감독관들이 강제로 실시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또한 스트레스 테스트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사업의 영역에 대해 정부의 공식적 승인이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스트레스 테스트는 종합적이고 선행적인 감독이라는 새로운 제도일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기관과 거대 은행들 사이의 복잡하게 뒤엉킨 모형을 제시한 것이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과 일반 중산층 사이의 빈부격차가 터무니없을 만큼 벌어지기 시작했다. 거대 은행들은 구제자금을 지원받았다. 일부 가장 악랄하고 파렴치한 경영자들은 법정에 서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 자체가 파멸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곧 일선에서 물러나 편안하고 안락한 은퇴생활을 즐겼다.

골드만삭스가 주주들에게 벌어다준 배당금은 134억 달러였지만 경영진이 받아간 급여와 수당은 162억 달러에 달했다. 놀랍게도 2009년 160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정부 지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던 씨티그룹조차 50억 달러를 수당으로 지급했다. 은행가들은 과거를 그렇게 흘려보내는 것이 행복했겠지만 일반 국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종합해보면 도드-프랭크 법안은 금융 분야와 관련된 398개의 새로운 규정들을 만들어 지키도록 규제감독 기관들에게 요구한 셈이다. 각각의 규정들은 관련 이익단체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로비활동의 목표가 되었다. 이 단체들은 이제 의회 바깥쪽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은행 위기는 계속해서 발생했고 그때마다 은행은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전략을 통해 정부와 국민을 설득했다. 결국 정부와 납세자들은 은행의 "만기연장이 곧 경기회복" 선전에 넘어가 한낮 자금줄 신세로 전락했다.

사실 한 국가의 채무 재조정은 바라고 안 바라고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조차 어려운 문제다. 혼란스럽고 그러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이런 과정을 어떻게든 늦추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건 신용을 유지하는 것이다. 채무 재조정 가능성을 입 밖에 내는 일만으로도 공황상태를 불러일으키고 단기자금조달 중단과 즉각적인 국가부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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