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1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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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유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전략상의 우위를 지키려면 석유가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p237)... "석유는 석탄과 달리 품질이 저하되는 일이 없습니다. 막대한 양을 지하 창고에 저장할 수 있어 화재, 폭격, 방화로 인한파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또한 수에즈 동부의 석유는 석탄보다 저렴합니다... 화물 증기선은 내연 추진 방식에 의해 연료를 78% 절감할 수 있고 화물 적재공간을 30% 늘릴 수 있소. 또한 화부 火夫와 기술자를 줄일 수 있소. 석유를 이용하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이 분명하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238


 대니얼 예긴(Daniel Yergin, 1947 ~ )의 <황금의 샘 The Prize>은 19세기 말 영국, 석탄, 산업혁명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패권이 20세기 미국, 석유, 에너지 혁명으로 대체되는 역사를 다룬다. 그 중에서도 1권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다루면서 대체에너지로서의 석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석유와 등유 램프는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바꿔놓았다. 동부의 도시에 살든, 중서부의 농촌에 살든 사람들은 잡화상이나 약국에서 등유를 구입했다. 도매업자들은 소매상에 등유를 공급했고, 대부분의 도매업자들은 스탠더드오일에서 등유를 공급받았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74


 <황금의 샘>의 시작은 오늘날 대표적인 유종인 휘발유(揮發油)가 아닌 등유(燈油)이며, 슈퍼메이저(Supermajor)라 불리우는 대기업 대신 이들의 부모에 해당하는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로 시작된다.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용도로 활용된 석유(등유)는 전기에 밀려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지만, 진정으로 석유를 20세기의 상품으로 만든 것은 휘발유였다. 새로운 운송수단으로서 자동차의 등장은 휘발유의 수요를 촉진시키면서 정유산업의 판도는 완전히 새롭게 바뀌게 된다.


 사람들에게 전기는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석유산업을 위협했고 특히 '올드 하우스'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조명 시장이 석유 수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갈 무렵, 서유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났다. 일명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 불린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20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기 전, 휘발유는 석유제품 중 가장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용제와 난로의 연료로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1892년 석유산업계는 휘발유를 갤런당 2센트에라도 팔 수 있는 것을 자축할 정도였다. 휘발유 가격을 이 정도 받게 된 것도 자동차의 출현 덕분이었다. 석유산업은 휘발유 시장뿐 아니라 공장, 기차, 선박 등에서 사용되는 보일러용 연료 소비 증가로 또 하나의 시장을 갖게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21


 이와 함께, <황금의 샘1>에서는 정유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다툼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한다. 존 D.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 ~ 1937)가 설립한 스탠더드 오일은 반트러스트법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석유 메이저의 상당수가 스탠더드 오일의 후신임을 확인하게 된다. 지난 1999년 이루어진 엑슨-모빌의 합병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스탠더드 오일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한편으로, 과거 스탠더드 오일을 해체할 정도로 강력했던 미국의 반트러스트법(반독점법)이 현재의 마이크로소프트사, 구글 등 이른바 빅테크 기업의 정보독점에 대해 유달리 관대해진 부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봄직하다.


 1911년 7월 말, 드디어 스탠더드오일은 회사 해체를 위한 계획을 발표했다. 스탠더드오일은 몇 개의 사업 주체로 분할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지주회사였던 뉴저지 스탠더드오일로, 총 순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엑슨 Exxon이 되어 계속 주도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로 큰 것이 순자산의 9%를 보유한 뉴욕 스탠더드오일로, 나중에 모빌 Mobile이 되었다. 캘리프니아 스탠더드올인은 쉐브론 Chevron이 되었고, 오하이오 스탠더드오일은 소하이오 Sohio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영국 석유 British Petroleum,BP의 미국 판매회사가 되었다. 또한 인디애나 스탠더드는 아모코 Amoco가 되었고, 콘티넨털오일은 코노코 Conoco가 되었으며, 애틀랜틱은 아르코 ARCO의 일부가 되었다가 훗날 선 Sun사에 흡수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167


 마지막으로 우리는 <황금의 샘 1>을 통해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우는 중동문제를 기원을 찾을 수 있다. 20세기 초반 영국-독일 간 군함 건조 경쟁이 단순한 대형함 건조가 아닌 석유를 원료로 하는 함정 건조에 있었고, 때문에 석유 산지를 점령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세계 도처에서 이뤄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철도에 의한 전장으로의 병력운송이 승패의 관건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전차, 항공기, 군함 등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거점 확보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자원 거점 확보를 위한 지정학적인 다툼이 그레이트 게임으로부터 시작된  오늘날 중동 문제 임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남방지대에 풍부한 석유, 기타 천연자원, 식료품들로 본토의 자원 부족을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활용함으로써 '태평양의 벽'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미국과 영국의 단호한 의지를 꺾고, 전쟁에 지친 그들과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대일본 제국의 수중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전략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563


 영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발발은 필요한 석유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뿐이었다. 영국 정부와 쉘-멕스 하우스에 있는 석유 관계자들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외환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영국에 지불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워싱턴에 있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583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석유사를 다룬 <황금의 샘 1>에서는 이처럼 주력 석유제품의 변천, 메이저의 역사, 지정학적 문제 등이 눈에 띈다. 이러한 문제들이 <황금의 샘 2>에서는 보다 강력한 상품으로서의 석유의 위상과 함께 보다 복잡하게 얽혀나갈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수개월 전에 영국 외무부의 지도를 가지고 경계를 확정지었던 것이다. 누가 경계를 결정했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석유 협상의 타결은 이후 '적선협정 赤線協定'이라 불리게 되었다. 페르시아와 쿠웨이트를 제외하면, 중동의 모든 주요 유전이 이 적선 안에 있었다. 합의에 따라, 터키 석유회사의 동업자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고서는 이 방대한 지역 내에서 어떤 석유사업도 할 수 없었다. 1914년 외무부 협정에서 만들어진 '자제 조항'이 14년 후 적선 협정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는 미래의 중동 지역 석유 개발을 위한 틀이 되었고, 동시에 향후 수십 년 동안 격심한 갈등의 초점이 되었다. _ 대니얼 예긴, <황금의 샘 1> , p316

스탠더드오일은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 마케팅 분야의 지배를 강화했다. 1880년 중반, 마케팅 분야의 점유율은 정유 부문에 대한 점유율과 거의 일치하는 80%수준이었다... 스탠더드오일은 마케팅의 효율성을 높이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련의 혁신을 거듭했다. 부피가 크고, 기름이 잘 샐뿐만 아니라, 다루기 힘들고 비싼 석유통(배럴)을 없애려 노력한 것이다. - P75

베랑제 상원의원은 더욱 달변이었다. 그는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석유는 ‘대지의 피‘이며 결국 ‘승리의 피‘가 되어주었습니다. 독일은 철강과 석탄에 대한 우월성을 과신했고, 상대가 석유에 대해 가진 우월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석유는 피와 같았으며, 평화를 위해서도 이런 역할을 할 것입니다. - P281

자동차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미국 사회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석유산업의 기본체제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1919년 하루 103만 배럴이었던 미국의 석유 수요는 1929년 258만 배럴로 2.5배 증가했고, 총에너지 소비 중 석유의 비중은 같은 기간 10%에서 25%로 늘어났다. 석유 소비 중에서도 휘발유의 소비 증가가 가장 컸고, 1929년 휘발유와 연료유의 소비는 전체 석유 소비의 85%를 차지했다. 등유의 소비나 생산량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새로운 불빛‘에서 ‘새로운 연료‘로 주용도가 바뀐 것이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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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 - 금융위기 10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애덤 투즈 지음, 우진하 옮김 / 아카넷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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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국의 국내 문제가 어떻게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뒤흔들고 전 세계적인 위기를 불로올 수 있었을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동산은 대단히 현실적인 문제이며 중산층을 위한 일반 주택들은 그다지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의 시장성 높은 재산 중에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부동산이 전 세계 부의 2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고 한다. 이 현상이 공황상태를 불러온 은행 파산, 그리고 전 세계의 신용경색과 함께 어덯게 금융위기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는지 설명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덧붙여야 한다. 부동산은 단순히 재산을 구성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융자를 위한 가장 중요한 형태의 담보물이라는 사실이다. 경기순환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하는 동시에 주택 가격 동향을 금융위기와 결부한 건 다름 아닌 모기지 관련 채무였다. _ 애덤 투즈, <붕괴> , p42/522

애덤 투즈(Adam Tooze, 1967 ~ )의 <붕괴 Crashed: How a Decade of Financial Crises Changed the World >는 미국의 주택금융회사인 파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의 부실화로부터 시작된 사건이 미국을 넘어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를 강타하고, 이의 여파로 유럽연합(EU)의 흔들림과 브렉시트(Brexit), 트럼프(Trump)의 등장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국의 부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분석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계화(globalization)가 자리한다.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BIS)의 수석 경제학자이자 "거시금융론(macrofinance)"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인 한국 출신의 신현송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세계 경제를 국가경제 대 국가경제, 즉 국제경제의 상호작용이라는 "섬 모형(island model)"의 관점이 아니라 은행 대 은행, 즉 기업의 대차대조표들 간의 "서로 맞물리는 매트릭스(interlocking matris)"를 통해서 이해해야만 한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0/522

"민간의 신용창조(private credit creation)" 시의 절대 다수는 견고하게 엮인 일부 거대 기업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들이 바로 신현송이 이야기하는 "서로 맞물리는 구조" 안의 핵심 구성 요소이며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20~30여 개의 은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각 국가의 주요 은행들까지 포함한다면 이런 거대 금융기관이나 업체의 수는 전 세계적으로 대략 100여 개에 이를 것이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9/522


미국에서 최초의 위기는 모기지 상품의 증권화와 이에 대한 적절한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주택금융회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들 증권을 인수한 대형은행들에게로 불꽃이 튀었고, 자산부실화로 인해 자금순환이 막히면서 미국경제는 하루 아침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축은행 사태 이후 모기지 차입자들에게 직접 돈을 빌려주는 채권자들로부터 위험을 바깥으로 분산하고 모기지 상품을 다양한 단계의 이익과 위험을 제공할 수 있는 증권으로 바꿔 투자자들을 끌어모으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실제로도 효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저축과 대출의 사업 모델과 비교하면 이런 증권화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위험이 분산되었다는 이유로 제일 처음 진행되는 대출 업무를 주의 깊게 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자칫 망각하게 한 것은 아닐까? _ 애덤 투즈, <붕괴> , p48/522

2007년 회계연도 말에 리먼브라더스의 6,910억 달러에 달하는 대차대초표 중 40퍼센트는 Repo를 통해 조달된 자금이었으며 골드만삭스와 메릴린치, 그리고 모건스탠리의 경우 약 40퍼센트였다. 만일 이런 투자은행 중 한 곳이라도 Repo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면 사업모델은 단번에 무너질 것이며 단지 MBS 사업뿐만 아니라 파생상품과 금리 및 통화 스와프를 포함한 대차대초표 전체가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_ 애덤 투즈, <붕괴> , p42/522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미 연준은 과감하게 개입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한다. 1971년 미 달러의 금태환정지 조치 이후 본격화된 자유주의 시대에 거의 잊혀졌던 케인즈주의는 금융위기상황에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고, 연준의 벤 버냉키(Ben Shalom Bernanke, 1953 ~ )는 마치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듯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미국의 위기를 막아섰다.

국가와 정부가 개입한 주요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1) 은행에 대출 형태로 자금 지원 (2) 자본재 구성(recapitalization) (3) 자산매입 (4) 은행예금, 채무 혹은 심지어 은행의 대차대조표 전체에 대한 정보의 보증. 위기가 발생한 모든 곳에 대해 각국 정부는 이 네 가지 방식을 몇 가지로 결합해 적용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관계된 기관은 중앙은행과 재무부, 그리고 금융 규제 감독청 등이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33/522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었고, NO1. 채권인 미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미국은 이렇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른 국가들은 미국처럼 할 수 없었다. 이제 다음 위기의 파도는 유럽을 강타한다.

무역수지 흑자와 1994~1998년에 발생한 경제위기가 반복되는 것을 스스로 막아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이런 신흥시장국가들은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로 정리해 사용할 수 있는 준비 자산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적합한 자산이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장단기 채권이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53/522

금융위기로 국제금융에 대한 달러화의 영향력이 약해지기는 커녕 실제로는 더 강해졌던 것이다. 통화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서의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요 덕분에 달러화의 가치는 더욱 올라갔다. 연준은 통화스와프 협정을 통해 모든 글로벌 은행시스템의 유동성 공급을 뒷받침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206/522


런던의 시티는 유로달러를 활용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를 연결시키고 있었고, 서로 다른 체력의 국가들이 유럽은행과 유럽연합(EU)의 울타리에서 동일한 재정정책/금융정책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의 입장 차이 속에서 적절한 조치는 미뤄졌고 그 과저에서 이른바 PIGS(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유럽연합은 붕괴의 위기에 처하고 결과적으로 브렉시트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유럽연합의 흔들림은 동유럽에 파멸적인 결과를 가져갔다.

달러 헤게모니는 일종의 연결망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며 바로 런던을 통해 달러는 세계의 통화가 되었다(p70)... 금융업과 관련하여 전 세계적인 대격변 중 상당수가 월스트리트가 아닌 런던에서 일어났고 그건 지역의 선택과 관련한 문제였다. 2007년, 전 세계 외환거래 총액의 35퍼센트, 규모로 치면 하루에 1조 달러라는 천문학적 금액이 시티의 전산망을 통해 거래되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71/522

유럽의 금융 중심지들은 아시아와 아라비아반도에서 흘러 들어오는 자금이 미국의 투기성 강한 투자 상품으로 몰려가는 데 안전한 경로를 제공했다. 또한 중국에서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 자금 중 상당수가 벨기에를 경유했다는 사실 역시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금융시스템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연준 분석가의 말을 빌리면 단기로 자금을 빌려와 장기로 빌려주는 "글로벌 헤지펀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_ 애덤 투즈, <붕괴> , p64/522


1990년대 냉전 이후 서유럽에 의한 경제의존도가 높아진 상태에서 서유럽의 위기와 이로 인한 자본회수는 동유럽에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자신이 보유한 막대한 규모의 외환보유고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만, 다른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다. 유럽연합(EU)과 러시아의 틈사이에서 경제위기는 정치위기로 옮아가게 되고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2014년 크림전쟁의 형태로 폭발하고 만다.

1989년에서 1994년 사이 평균 생산량은 30퍼센트 이상 떨어졌고 물가와 실업률,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이 급등했으며 실질임금은 폭락했고 공산주의 시절의 사회복지제도는 붕괴했다. 발트 3국의 경우 임금에 대한 타격은 그야말로 엄청나서 에스토니아는 60퍼센트, 리투아니아는 70퍼센트나 임금이 줄어들었다. 수백만 국민이 이민을 택했고 필요한 경우 불법 이민도 마다하지 않았다. NATO와 유럽연합이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고 눈앞의 위기를 우선 진정시키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 지정학적 지도를 영구히 다시 그리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바로 이런 사정들이 있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00/522

냉전 이후 유일한 대안으로 보였던 자유주의체제가 금융위기 속에서 무참하게 좌절되는 상황에서 중국은 거의 유일한 승자처럼 보였다. 막대한 양적완화와 재정정책이라는 양날의 칼을 효과적으로 휘두르면서 중국이 새롭게 G2의 한 축으로 떠오르고, 러시아가 경제제재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나가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는 외부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분명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엄청난 규모의 정책들을 추진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문제는 이를 위한 예산이 어떻게 조달되었나 하는 것이다. 예산 조달은 모든 "경기부양책"의 핵심이다. 만일 세금을 올려 필요한 재원을 조달했다면 일반 국민들의 구매력은 전혀 올라가지 않는다. 채권 발행을 했다면 민간 부문의 저축을 흡수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일반 국민들이 다른 투자를 멀리할 우려가 있다. 만일 경기부양의 목적이 침체된 경제를 빠르게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면 신용창조야말로 경기 부양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중국 당국의 경기부양책이 특별히 효과가 있었던 건 엄청난 규모의 정부 지출과 대규모 통화완화 정책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92/522

러시아는 축적해놓은 외환보유고 덕분에 서방측 제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극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과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어떠면 중국은 미국의 연준과 중국인민은행사이의 밀접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한 건 결국 서방측이 그토록 오랜 세월 비판을 가해온 금융 규제와 외환관리 시스템의 결과였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133/1312


그리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내부적인 도전은 트럼프의 대통령당선이라는 사건을 만들어낸다. 막대한 구제금융이 소수의 기업들에 집중되면서 기득권에 대한 일반의 분노는 극우집단의 부상이라는 부정적인 정치결과를 낳고 말았음을 <붕괴>는 보여준다.

유럽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훗날 있었던 유로존 파산 사태가 아닌 2008년의 위기가 바로 투자와 소비의 심각한 위축과 실업 사태를 만들어냈다. 2007년 하반기부터 독일과 프랑스, 영국, 스위스, 그리고 베네룩스 3국의 크고 작은 은행은 자신이 입은 손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깨닫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대출 부문이 주저앉았다. 금융 분야가 맨 먼저 타격을 받은 건 그들이 매일 일어나는 방대한 규모의 신용 거래에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융업과 관련이 없는 일반 기업과 가계로 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124/522

애덤 투즈의 <붕괴>는 세계경제의 동기화라는 연환계(連環計)로 미국에 불붙은 불이 세계로 옮겨붙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나라가 러시아와 더불어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한 국가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에서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에서 키코(KIKO)사태로 수많은 기업들이 연쇄부도를 맞았던 사례는 한국의 취약한 금융구조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실례였다.

2008년에 가장 위기에 몰린 나라는 한국이다. 지금의 한국을 일으켜 세운 유명한 수출전문 기업집단, 즉 대우나 현대, 삼성 같은 "재벌"들과 거대한 규모의 제철소, 조선소, 자동차 공장들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만 유별나게 동유럽이나 러시아처럼 취약한 모습을 보였던 건 한국의 금융시스템이 전세계와 하나로 엮어 있었기 때문이다(p198)... 2000년대 초반 이후 한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금융 중심지로 발돋움하려 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통화와 자본의 흐름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한국 금융업의 상당 부분을 해외 투자자들이 소유했으며 한국의 은행들은 도매금융 자금조달 방식이라는 새롭지만 불안정한 방식으로 전 세계 달러시장에서 단기로 자금을 빌려와 한국 내에서 고금리로 장기간 투자를 했다._ 애덤 투즈, <붕괴> , p199/522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14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제2의 금융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무역수지, 경상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서 외화의 유입이 줄어드는 반면,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환율방어를 위해 막대한 외화가 소모되는 안 좋은 상황에 부족한 대통령의 리더십까지. 만약 이러한 위기 상황이 재현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리뷰의 마지막은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 1947 ~ ) 전(前) 유럽은행 총재의 일화를 옮기는 것으로 마친다. '슈퍼 마리오'로 불렸던 그는 말 한마디로 유럽의 위기를 극복했건만, 우리의 강원도지사는 말 한마디로 '레고랜드'로 채권시장의 위기를 불러오고 말았다는 점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와 우리나라 금융책임자들에게 일독을 권하며, 보다 진중한 대처를 희망한다...

마리오 드라기는 투자자들이 들어주었으면 하는 또 다른 내용이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의 지원 아래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를 존속시키기 위한 어떤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말을 멈춘 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를 믿어달라. 오직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마리오 드라기가 "어떤 노력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을 때가 유로존 위기의 전환점이었다. 그의 발언 이후 시장은 급속도로 안정되었고 취약한 국가들이 발행한 국채 대부분은 시장금리가 정상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로존 붕괴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깊은 호소력을 지닌 설명이었다. _ 애덤 투즈, <붕괴> , p33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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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11-17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붕괴」 이 책 제가 기억하는 책이 맞다면 엄청난 벽돌책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완독하시고 정리까지 쓰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겨울호랑이님 말씀대로 제2의 금융위기가 걱정되는 이 시기에 필요한 책이네요... 저는 우리나라 금융책임자도 아닌 일개 개미이지만 겨울에호랑이님의 리뷰를 표지판 삼아 읽고싶어집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8 09: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파이버님. 현재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발생 원인은 10년 전의 위기 때와는 분명 다르지만, 과거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그때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들이 코로나19위기가 조금 잦아들면서 재발되었다는 면에서 많은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붕괴>에서 금융위기로 가장 힘들었던 나라로 지목된 우리가 교훈을 얻어내 이번 위기를 현명하게 넘어섰으면 하는 바랍을 가져봅니다... 파이버님, 좋은 주말 그리고 유익한 독서 되세요! ^^:)

서니데이 2022-12-08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12-09 04:51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미국 측 입장에서 보면 WTO는 주요 무역 세력 사이에서 중재의 장을 마련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미국은 불공정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국가에 대해 언제든 필요한 만큼 보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WTO의 역할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긍정적인 방향에서 제안하기보다는 공화당이 미국 의회에서 효과를 거두었던 방법을 사용했다. 미국은 WTO 위원단이 새로운 중재자들을 선임하는 것을 거부했고 대신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을 가하면서 WTO가 점점 더 제 기능을 못하고 불법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굳이 중국의 이른바 국가자본주의를 언급하지 않아도 조세 감면과 보조금, 그리고 수출 지원 시스템 등을 통해 세계 무역은 점점 더 기업의 가치사슬뿐만 아니라 국가 개입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이 감당하고 있는 막대한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의 대부분은 중국이 실시하는 차별적 조치뿐만 아니라 역외 조세피난처를 통해 사라지고 있는 수출 수익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었고 이런 조세피난처는 비단 카리브해 연안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안에도 있었다.

지난 2008년 위기의 진앙지는 바로 미국이었다.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기능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했다. 미국과 나머지 G20 국가들은 전대미문의 노력을 기울여 "미국의 자유로운 정치와 경제 시스템" 그리고 세계 경제 모두를 안정화시켰다.

2017년에 미국의 경제성장은 꾸준하게 진행되었고 실업률은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장은 호황으로 돌아섰고 유럽 경제는 마침내 반등을 시작했다. 당장 어떤 위기가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대서양 양안 세계화의 오랜 중심지인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세계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중국과 신흥시장으로 관심을 돌린다면 질문이 갖는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중국과 신흥시장국가에서는 2017년 이전 몇 년이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부가 자본을 통제하면서 상당 부분이 각 지역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먼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소형 자동차에 대한 판매세는 반으로 줄었다. 어쨌든 이런 정부의 개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지난 2008년에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풀어 미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주제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중국 당국은 자국의 주식시장을 안정화하고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푸는 것과 상관없이 미연준이 위안화를 안정시키려는 중국의 노력에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 안정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 재무부와 연준이 공동으로 실시한 대응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목표는 은행들의 생존능력 회복이었고 이를 위해 유럽과 신흥시장국가들까지 포함한 모든 달러화 기반 금융시스템에 엄청난 유동성과 통화부양 조치가 동시에 제공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건 이런 노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던 민주당의 무능이었다.

유럽중앙은행과 독일, 프랑스가 효과적인 위기 탈출 전략을 함께 수립하는 데 실패하면서 2010년과 2015년 사이에 유로화는 오히려 세계 경제의 위험과 불안정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 대륙의 관계는 물론 경제 문제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으며 문화와 정치, 외교와 군사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런 관계가 적어도 유럽연합과 NATO 가입을 간절히 바라는 동유럽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아시아의 경우 미국과의 동맹 체제는 언제나 그보다는 좀 더 느슨한 관계였다. 그리고 냉전에서 서방측의 승리는 결코 완벽하게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축적해놓은 외환보유고 덕분에 서방측 제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국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과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어쩌면 중국은 미국의 연준과 중국인민은행 사이의 밀접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한 건 결국 서방측이 그토록 오랜 세월 비판을 가해온 금융 규제와 외환관리 시스템의 결과였다. 중국에서 외화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던 힘 뒤에는 더 새롭게 강화된 그런 통제정책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 국내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세력과 국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알력도 문제가 되며 또한 엄청난 금융 위험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정치라는 존재를 의미 없게 만들어버리는 이런 시스템들의 작동방식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된 역사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하면 결국 그런 설명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선택과 이념, 매개체 등은 대단히 결정적인 결과들과 함께 이런 설명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단지 복잡한 요소로서가 아니라 금융공학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작동장치", 그리고 기구의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엄청난 변수와 우발적 사태들에 대한 실질적인 반응으로서 말이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여러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21세기 초반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100주년이 되는 시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해야 할 시점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이 되는 2014년이다. 지난 2014년에는 전 세계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많은 기념식은 물론 토론도 진행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20세기 최대의 사건이자 충격으로 기억한다. 우크라이나와 동아시아의 갈등 상황을 통해 1914년의 교훈을 특별히 더 중요하게 떠올린 이유도 그에 한몫한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하면 1914년은 2008년 금융위기가 제시한 역사적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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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의 위기 동안 동유럽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정부에도 해주지 않았던 양보를 그리스 극좌파 정부에 해준다면 그 결과로 돌아올 건 재앙뿐이었다. 그리스 국민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은 유로존의 더 광범위한 경제적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 싸움은 독일 정부의 보수적 글로벌리스트들이 생각하는 대로 더 광범위한 정치적 원칙과 권위에 대한 문제이며 장기적인 경제적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리스가 이 채권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지급불이행을 선언한다면 유럽중앙은행은 심각한 손실을 입을 것이며 채권 매입에 대한 위험성이 강조되고 또 어떤 식으로든 독일 우파들이 양적완화 조치의 적법성에 대한 의문을 다시 재기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한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제적인 합의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유로그룹 입장에서 그리스 채무 관련 협약은 하나의 기준점이었고 그리스 정부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협약은 지켜져야만 했다. 협약 자체는 변동이 없었지만 신경전이 시작되었고 야니스 바루파키스와 네덜란드의 예룬 데이셀블룸이 거의 주먹다짐까지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와 같은 문제에는 IMF도 좀 더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오랜 관습을 고수했다.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스는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고 사업 인허가 제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세하고 철저한 "공급자 중심의 개혁"이 필요했다. 또한 그리스 정부는 민영화 과정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이런 조치들을 실행하는 건 어느 정부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시리자 같은 좌파들의 연합체로서는 정치적인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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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마침내 연준이 결정을 내렸다. 5월부터 해온 준비가 마무리된 후 FOMC는 금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현행 이율로 채권 매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이후 시장을 긴장시켜온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일 연준이 조급하고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중단 없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하려 했다면 통화 부양책의 축소에 대해 채권시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찰활동과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능적 권력과 행정적 효율성만큼은 어떤 공식적인 정치적 권한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사찰과 통화스와프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위치와 미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과 정치적, 그리고 사업적으로 얽힌 국가들 안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을 미국이 생각하는 지리경제학적 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들 국가가 중국을 막아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이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 해당 지역에서의 상황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었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국경 서쪽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극빈층은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과 에너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고 여기에만 GDP의 17퍼센트가 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유럽연합 가입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국영 언론은 유럽연합 협약 참여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선전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방측 언론들은 빌뉴스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빼내와 유럽연합에 편입시키려는 6년간의 노력"의 최종 단계라고 공개적으로 보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제재위협도 여전히 큰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25퍼센트는 유럽연합으로 들어갔지만 러시아 수출 규모도 26퍼센트나 되었다.

유럽연합은 연장된 이행기를 의도했지만 사태는 혁명적 전복으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티모셴코의 조국당과 일부 혁명세력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체제 수립에 나섰다. 지난 11월 있었던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뒤집어 러시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러시아가 아닌 IMF, 그리고 유럽연합과 새로운 금융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서방측의 이해관계도 위기에 처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세계시장에서 2위에 해당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국이었다. 신흥시장국가 경제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미국은 원자재 시장에서 더는 긴장상태가 불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들은 절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결코 전면적인 경제제재라는 무기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예고되었던 서방측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인 전면 충돌은 이제 한층 더 심각한 단계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호 문제가 위기에 처하자 2014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는 도네츠크를 포함하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좀 더 고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서방측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대신 유럽에서 들어오는 농산물 수입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돈바스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려갔다. 반군은 8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월 5일 민스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휴전협정을 받아들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했던 국가들에서조차 그 지지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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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 결과는 유럽의 정치시스템을 뒤흔들어놓았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중심 정당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럽 정치의 변방에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자체는 비록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각된 것은 좌파들의 응집력이었다

그렇지만 2015년 1월 25일의 선거에서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본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 본부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이라도 하듯 연정 상대로 중도파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타미당이 아닌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그리스인당(ANEL)을 택한 것이다. ANEL은 종교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그리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정당은 아니었지만 유럽연합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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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민간 부문 채무를 정리하는 대신 정부가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받은 대출로 민간 부채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그리스 국채에 도박을 걸었던 민간 투자자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보수적인 북유럽의 납세자들이 유럽연합에 비협조적인 그리스 좌파 정부를 위해 또다시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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