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한 가지 포인트를 덧붙였다. "역사를 통해 자원의 흐름에 대한통제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졌다. 중동 국가들은 중요한 에너지원에 대한통제권을 주장함으로써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서방에 대한 발언권을 되찾게 될 것이다." 플랙은 자신이 현 상황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가장 큰 죄악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 P330

세계 전역의 수요가 한정된 공급량을 놓고 경합했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공식가격을 상회했다. 이는 20년간에 걸친 과잉생산 시대의 종언을고하는 결정적인 변화였다. 오랫동안 시장가격은 만성적인 과잉 생산을반영해 공식가격을 하회했고, 이것은 기업과 정부 간의 관계를 불편하게만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되었다. 수출국들도 이 새로운 파도에 편승하고자 했다. 공식가격과 시장가격의놓고 보지는 않았다.
- P336

석유 금수조치가 절정에 달했던 12월에는 일일 1,580만 배럴만 생산함으로써,
시장 공급 물량은 일일 500만 배럴이 감소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이에 대처할 여유 능력이 전혀 없었다. 6년 전인 1967년의 6일전쟁 때 여실하게증명되었던 석유와 정치의 중대한 역학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미국의 석유 여유 능력은 전후 에너지 위기 때뿐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서구의 에너지 여유분 확보에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제 미국은 세계 석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중요한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란을 필두로 한 산유국들은 생산량을 일일 총 60만 배럴까지 증산할 수 있었다.  - P372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만큼의 부를 축적한 수출국들은 어지러울 만큼 엄청난 지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산업화, 사회간접자본, 서비스, 생필품, 사치재, 무기, 낭비, 매수 등온갖 종류의 지출이 난무했다. 눈덩이 같은 지출과 함께 모든 항만에서는 선박들이 하역하기 위해 몇 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온갖 물건과 서비스를 팔려는 장사꾼들이 서방 공업국에서 석유 수출국으로 몰려들었다.
호텔에서는 방을 구하려고 아우성이었고, 정부 관료들을 만나려고 그들의 사무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석유 수출국에 팔 수 없는 물건이란 없었다. 무기 거래는 그중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 P404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다른 중요한 형태가 있었다. 이윤은 상류 부문인 원유와 천연가스의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이나 북해 지역에서 한 회사가 보유한 매장량의 가치는 석유 가격과 함께 상승했다. 정유업, 수송업, 주유소 등 하류 부문의 경우, 1973년 이전에는 연평균 7~8%의 소비 증가를 기대하며 투자되었다. 그러나 실제 소비 증가는 이에 따르지 못했으므로 하류 부문의 능력은 필요를 넘어섰다. 예를 들면 유조선단의 3분의 1이 과잉 상태였다. 중동원유에 대한 지분 손실과 함께, 이러한 상황은 국제 석유회사들이 유럽에 건설했던 대규모하류 부문 투자에 대한 적정성과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 P442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동기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다.
- P453

이란 국왕은 1968년 이라크의 실권을 장악한 비종교적인 바스당 체제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 양국의 최대 현안은 샤트 알 아랍,
이라크 영내를 흐르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이란 영내의 하천 몇개가 만들어낸 삼각주 지대를 둘러싼 문제였다. 샤트 알 아랍 수로는 120마일에 걸친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샤트 알 아랍의 삼각주지대에 건설된 아바단 정유소를 보유한 이란으로서는 페르시아 만으로나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일한 출구는 아니었다. - P516

호메이니와 측근은 세속적인 사회주의자 집단인 바스당 자신들의 증교적 신념에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바스당 운동을 ‘인종을 차별하는 아랍주의 사상‘이라고 공격했다. 호메이니는 여기서 더 나아가 ‘난쟁이 파라오‘라는 신랄한 용어를 구사하며 후세인을 비난했다.
사담 후세인에게는 호메이니의 비난을 두려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라크인의 절반 이상이 시아파 교도인 데 반해 바스당은 비종교적인 체제로 소수인 수니파 교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가장 신성시하는 성지인데, 이란에서 오는 시아파 교도들 사이에 동요가 심해지고 있었다. 1980년 4월에 발생한 부수상 암살미수 사건을 빌미로 후세인은 이라크 국내에서 가장 이름 높은 시아파의지도자를 처형하라고 명령했고 더불어 그의 누이까지 처형했다.  - P520

OPEC의 최전성기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OPEC 회원국도, 산업계도, 서방측의 석유 소비국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카터 정권도 함께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미 카터는 이란에 의해 대통령 재임 중 마지막 굴욕을 맛보고 있었다. 테헤란의미국 대사관에 감금되어 있던 인질은 그가 대통령직을 물러날 때까지 석방되지 않았다. 뒤를 이어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의 넘쳐흐르는 자신감과미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신뢰감은 카터에게 붙어다니던 ‘심기 불편 보다 유권자의 마음을 훨씬 강하게 사로잡았다. - P528

세계 석유시장과 석유 가격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악성 인플레이션이 서방 세계의 경제뿐 아니라 전체 사회 구조를 위협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방준비국은 과도한 긴축금융 정책으로 대응했고, 이에 따라 이자율이 급등해 최고 21.5%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긴축금융과 석유가격 상승으로 산업계의 자금이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1980년과 1982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불황이 두 번 닥쳤고, 그중 1982년이 더 심각했다. 경제 활동이 수렁에 빠져들자 선진 공업국에서의 석유 수요는 계속감소했다. 개발도상국들이 유가를 상승시킬 중요한 신규 수요원이 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 역시 선진국의 경제 침체에 따른타격으로 동반 침체에 빠져들었고, 따라서 석유 수요는 늘지 않았다. - P533

게다가 에너지 경제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초반과 1940년대 중반에 그랬던 것처럼 에너지 부족에 대한 공포는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유전의 개발이 촉진되었고 그 결과 공급 과잉이 초래되었다. 이런 패턴은 석유 가격이 배럴당 34 달러가 되고, 더 높은 가격 인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대규모 신규 개발은 OPEC 외부에서 일어났다. 멕시코, 알래스카, 북해의 생산 시설 증강은 제2차 석유 파동 와중에 이루어졌다. 이집트 역시 주요 석유수출국이 되었고 말레이시아, 앙골라,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국가들이 생산국과 수출국의 작은 부분으로 참여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이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기술 혁신 역시 개발과 생산, 운송 능력을 증진했다.  - P533

석유산업 구조 개편의 핵심은 ‘가치의 공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가치의 공백‘이란 회사의 주가가 회사 소유의 석유 및 가스 매장량의 시장 가치를 정당하게 반영하지 못함을 가리키는 용어다. 주식 가격과 자산 가치의 차이가 크다는 것은 기업에게 치명적이다. 새로운 경영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영이 하지 못했던 ‘주주들의 가치‘ 증대를 도모할 수있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탐사에 의해 석유를 1배럴 추가하려면.
기존에 운영되는 자산을 구입하는 것에 비해 2~3배 이상의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멕시코 만이나 텍사스에서 탐사를 하는 것보다 뉴욕의 증권거래소에서 석유를 구하는 것, 즉 평가절하된 회사를 매입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여기에서도 ‘주주들의 가치‘가 추진력이 되었다. - P547

자국에서 소비하는 석유의 99%를 수입하는 일본은 가능한 한 최저가격을 선호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가격이 너무낮을 경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대체에너지 부문의 투자를 줄여서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결국 새로운 취약성을 노출해 또 다른 위기를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석유는 일본의 수입품 중 상당부분을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낮은 가격은 막대한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더욱 확대할 것으로 보였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와의 심각한 갈등을야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본의 석유업계와 정부는 대체로 8달러가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했다. - P600

이라크는 폐쇄적인 경찰국가였으나 후세인이 목표하는 바는 명확했다.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아랍 세계를 지배하고,
이라크를 석유 대국으로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세계적인 군사 대국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라크는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세인이 일으킨 이란-이라크 전쟁이 5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교착 상태에서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1,800만 명의 국민 중 100만명이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고유가 정책을 지지했고, 그것도 즉시 시행되기를 바랐다.  - P618

이 위기가 1990년대와 21세기에 미치게 될 영향은 엄청날 것으로 보였다. 만약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수중에 넣는다면 OPEC 생산량의20%와 전 세계 석유매장량의 20%를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주요 석유수출국들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위치를 점하게 될것이다. 페르시아만의 패권을 장악한 후세인이 이란과의 전쟁을 재개할가능성도 높았다. 그가 또 다른 행동을 취해 경제적 이득을 확보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 P621

 석유의 역사는 승리의 파노라마와 비극적이고 값비싼 희생을 치른 오류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성의 고귀한면과 비열한 면을 모두 보여준 하나의 무대였다. 창조성 ·헌신 · 기업가정신 · 독창성 · 기술 혁신이 탐욕 · 부패 · 맹목적인 정치적 야심 • 폭력 등과 함께 존재했다. 석유는 물질세계를 지배할 힘을 부여했다. 석유는 농약이나 연료로 형태를 바꾸어 인류의 의식수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또한세계 정치와 경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류는 많은 피를 흘렸다. 석유를 손에 넣어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치열한싸움은 석유가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는 한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21세기 문명의 모든 측면은 석유의 현대적이고 매혹적인 연금술의해 변화되어왔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석유의 시대다. - P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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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독일 경제가 회복되는 데는 이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훨씬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의 1948년 불변가격 자본 스톡은 전시의 파괴를 제하고도 1936년보다 10퍼센트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독일 내에서 1930년대 말 이래 있은 투자 덕분이었다.

서독의 공공 부문은 대부분 나치 정권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중 독일 합자회사 자본의 거의 절반이 직, 간접적으로 공기업 자본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물론 기민당까지도 이를 추진했다.

서방세계의 복지국가는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 가난한 자에게 이를 재분배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돼지저금통을 적절히 관리하는 기능을 했다. 즉 보험, 연금, 교육 제도 운영 방식을 통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인의 일생 동안의 소득을 적절히 조정한 것이다

합스부르그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자극받아 행정 근대화를 추구했다. 인스부르그에 재무성을 창설하고 오스트리아 내 최초의 정부 자문 회의를 설치하는가 하면 대외 정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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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내셔널리즘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유럽의 신생국가 통합에 기여했다. 1914년 전야까지 유럽 국민국가들 내에서 보수 귀족과 중산층 그룹 간에 국민적 일체감이 다져졌다. 반면에 이들과 혁명적 사회주의 집단 간에는 갈등이 증폭되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소위 국가를 초월한다고 하는 사회주의가 독일의, 그리고 나머지 다른 국민국가들의 존립을 저해했던가?

이처럼 1914년 이전에 독일의 사회당은 입으로는 혁명을 말했지만 이 같은 거대한 독일 노조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개혁을 추구했다. 제1, 제2 인터내셔널처럼 사회주의 자체가 국제적으로 통합되는 듯 보이는 이면에서 나라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히틀러가 초래하지 않은 대공황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은 경제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나치 정권하에서 공식적으로 실업은 해결되고 노동력 부족 사태까지 낳았다.

파시스트 우파와 비非파시스트 우파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즉 파시즘은 밑으로부터 대중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대표적 파시즘 정권이라 할 나치 정권 역시 비파시스트 우파 세력과 달리, 일반 대중에게서 확산된 민심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그런 다음 모든 정적을 물리력으로 제거했다.

왜 1차 대전 후에 급진 우파가 급격히 부상했는가? 그것은 1차 대전으로 사회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그 붕괴된 사회의 일원이던 중간 계층과 소시민층 출신 민족주의 청년들이 파시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상 현실로 받아들여졌던 사회혁명과 노동계급의 위력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파시즘은 독점자본(혹은 대기업)의 표현도 아니다. 파시즘은 결과적으로 비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주의경제를 운영하는 체제였다.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은 인정하되 이를 국가가 대대적으로 통제했다. 이들은 대공황을 효과적으로 이겨내고(독일), 마피아를 제거하면서(이탈리아) 노동운동을 파괴했다.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맞은 위기의 산물로 등장한 정치체제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확실히 발달시켜본 경험이 없는 나라의 정권에게는 파시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케인스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 유럽 번영의 대부분은 독일의 경제성장에 의존한 것이었으므로 독일을 경제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독일에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한 조항이 경제 대국인 독일 경제를 몰락시키고 결국 주변 나라를 모두 가난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약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핫머니’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급격히 이동하도록 자극한 요인으로는 1930~1931년의 금융 위기, 여러 나라 경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 상실과 통화가치 상실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산 보유자는 단순히 자기네 투자가치를 보호할 목적에서 엄청난 금액을 인출했다. 그러자 많은 나라가 금과 외환 준비금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 통제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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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대한민국 주식투자 산업.업종 종합분석 대한민국 주식투자 성공시리즈 3
류종현.최순현.조기영 지음 / 한국주식가치평가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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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주요 산업의 현황과 업종별 주요 이슈와 업종별 히스토리 등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주식시장에서 산업 섹터별 ETF에 투자하는 경우는 물론, 개별기업에 투자하는 투자자의 경우 데이트레이더가 아니라면 산업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New 대한민국 주식투자 산업, 업종 종합분석>은 이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책이라 여겨진다.

다만, 넓은 분야의 산업을 다루다보니 산업에 할당된 정보는 제한될 수밖에 없고 투자에 필요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아 아쉽게 느껴진다. FSS의 전자공시시스템에서 제공되는 개별기업의 산업 소개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단순한 업종현황과 히스토리, 업계순위 등의 정보는 앞서 말한 개별 기업의 전자공시시스템과 협회 등에서 어렵지 않게 최신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만큼 다른 부분에서 접근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예를 들면, 전방산업과 후방산업간의 관계(철강산업-자동차산업 등) 또는 소비재 산업과 자본재 산업 투자 시 유의할 부분 등 투자에 있어 유의할 부분을 정리했다면 보다 유익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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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최고봉은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통해 알려진 모르는 것과 알려지지 않은 모르는 것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래를 아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이 AI의 최대 성과다.

이렇게 공식적인 ‘선제적 조치’의 도입이 군사전략과 외교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와 시민사회의 활동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가 공공의 안녕과 사회정책에 영향을 미칠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변화까지 의미했다.

선제는 다른 사람들의 미래를 확장된 잠금 상태로 유지하고 특정 인구가 자기 나름의 의제에 따라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아 궁극적으로 권한 강탈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표준화한 제품 라인의 대량생산에 의존하는 회사는 비용 절감을 위해 최대 역량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 기계에 막대한 돈이 들기 때문에 상각을 최적화하기 위해 기계의 가동이 중지되는 것을 막으려고 항상 노력한다. 지속적인 운영 체제를 확보하려는 경영진은 투입량이 부족해지거나 생산 흐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추가 인력과 재고의 형태로 ‘대비책’을 갖춘다.

전통적인 테일러주의와 게임화의 연결 고리는 둘 다 노동력을 훈련하는 데 합리화한 과정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다만 전통적인 테일러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경계하고 저항하거나 적어도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이면서 그럭저럭 빠져나갈 수 있지만, 게임화는 합리화한 조작을 은폐하기 때문에 참여자가 게임을 그리고 나중에는 작업 과정을 완전히 익히기 위해 자신의 주체성을 동원했다고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비난의 대상을 지목하자면 서양 신학일 것이다. 적어도 ‘인류’가 지구에 행한 지배와 착취의 선봉에 서서 그것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허락된, 전지하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주장한 것이 사실 아닌가?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복잡한 일부이며 문명의 작용은 모든 종이 기대어 살아가는 지구 및 그 위에 존재하는 무수한 주체와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는 동양의 종교와 철학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며 강한 포용의 정신을 유지한다. 하지만 실상은 위대한 아시아 문명도 길을 잃은 적이 많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여타 주체에 대한 영향력이 역사의 후기까지 비교적 가볍긴 했지만, 지구 권역에 대한 찬탈과 착취는 아시아의 두 번째 부상과 함께 지난 반세기 동안 급증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우리 몸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자율적 주체라기보다는 개방적인 소산 시스템이다. 인체는 생물권 전반에서 오는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칼슘, 인,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등) 화학원소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반투막으로 싸여 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지구 원소를 수용하는 수많은 매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은 분명히 눈에 띄지만 오랫동안 무시된 사실은, 모든 인간과 동료 생물체들의 내부가 이 행성에 생명이 가득할 수 있게 하는 생물군계·생태계·지구 권역의 연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각 생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세포는 지구 시스템의 요소들이 통과하고 생명의 패턴을 지속할 수 있게 반투막으로 둘러싸인 개방적 시스템이다.

화이트헤드는 전자기장 이론이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고 제시하는 측면에서 "순전한 위치가 사물이 시공과 연관되는 기본 방식이라는 개념을 모조리 포기한다는 뜻"이 담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1926년에 펴낸 『과학과 현대 세계(Science and the Modern World)』에 쓰인 글이다. 1934년 무렵 맥스웰의 전자기장 이론의 존재론적 중요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이 완전히 계발된 철학으로 무르익었고, 이 철학이 오늘날 우리가 생명을 시간적 패턴으로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160년에 걸친 다윈주의 세계관의 군림이 모든 면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확장된 서사로 수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명백해지는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윈의 모든 통찰력과 그의 이론을 수정하고 부가하고 증폭시키며 등장한 다양한 주장들이 다 폐기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부는 거짓으로 판명되고, 일부는 계속 통용되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훨씬 더 복잡한 이해가 새로운 발견과 함께 표면화되며 생체전기 암호의 해독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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