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공포정으로 가는 길 - 구국위원회와 헌정의 유보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9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월이 되어서 프랑스가 더욱 불안해진 이유는 벨기에 지방의 전황이 나빠졌다는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국에 이어 에스파냐에도 선전포고를 한 뒤, 덴마크와 스위스를 제외하고 유럽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월 24일 '30만 징집법'을 통과시켜 전방으로 병력을 보내는 가운데 만만치 않은 반발을 부딪쳤다. "하나이며 나눌 수 없는 공화국"을 굳건히 세워야 하는 시기에 국내외에서 분열을 조장하는 적들과 싸워야 했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113/414

사실상 파리에 밀가루가 부족하지 않으며, 국민공회가 수도의 생필품을 확보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음을 누구나 안다. 국민공회는 이 문제에만 800만~900만 리브르를 쏟아부었다. 이 돈을 원래 목적대로 썼다면 생필품이 부족할 리 없다. 그런데도 파리의 모든 구역에서 새벽 3시부터 시민들이 빵집 문으로 몰려드는가? 대부분의 시민이 동요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는데도 악의에 찬 사람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소요사태를 조장하기 때문에 품귀현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240/41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 - 구국위원회와 헌정의 유보 Liberte>는 만만치 않은 과제로 험난한 출발을 하는 국민공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국외적으로는 루이 카페의 처형 뒤 제1차 대프랑스 동맹(First Coalition - Seventh Coalition)이 결성되면서 전쟁 상태로 치닫게 되고, 국내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된 식량난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아 민중의 불만이 임계점을 향해 치달으면서 신생 공화국 프랑스는 험난한 출발을 해야 했다.

국민공회는 첫 회의를 시작한 뒤부터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날까지 왕정을 청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매진했다. 1793년 1월 말부터 국민공회는 국내외의 긴급현안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공화국을 설립하는 일이 시급했다. 정부를 조직하고 행정관리와 군대도 정비하며, 국가안보가 걸린 전쟁을 치르는 동안 생필품과 개인의 안전을 책임져야 했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25/414

보급 물자, 무기, 병력 등 모든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서 훈련과 무장이 잘된 다수의 적들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국민공회는 시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자발적인 참전을 독려하는 한편, 투기세력이 상품과 화폐를 독점하면서 생겨난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가격통제정책을 통해 대처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점차 가중되는 문제의 심각성으로 공화정의 위기는 심각해져갔다.

도르도뉴의 라마르크 Francois Lamarque가 다른 의원 두 명과 함께 아르덴의 중부군을 시찰한 결과를 보고했다. 1만 5,000명이 9만 명 이상의 적을 막아야 하는데, 탄약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헐벗은 상태로 궤멸 직전이었다. 그래서 파견의원들은 그 사실을 국민공회에 즉시 알렸지만, 국방위원회는 그런 중대한 사실을 경솔하게 공표했다고 파견의원들을 질책했다. 파견의원들은 국민 2.700만 명 가운데 시민 300만 명을 무장상태에 둔 현실에서 위험을 숨겨서는 안 된다고 국방위원회에 회답했고, 그 뒤에 파견의원들이 바라던 대로 10만 명이 적을 무찌르겠다고 전방으로 달려갔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77/414

모든 생필품의 품귀현상은 아시냐의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졌기 때문에 나타났다. 투기와 매점매석이 횡행했다. 국민공회/파리 코뮌/정치클럽에서 '악당 malveillants'이라 부르기 시작한 국내의 반혁명분자들, 그중에서 투기꾼들이 온갖 나쁜 소식을 이용해서 혁명의 성과를 부인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정화 正貨를 빼돌리고, 혁명의 산물인 지폐의 가치를 하락시켰다. 정부의 신용을 떨어뜨릴수록 이익을 얻는 세력은 언제나 존재한다. 혁명기에도 그들은 증권거래소와 시장을 오가면서 사재기를 한 뒤 막대한 시세차익을 보고 되팔았다. 늘 '개미들'만 피해자가 되게 마련이었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357/414

이러한 프랑스의 위기는 국외 전제군주정과 국내 왕당파의 범(凡)반혁명세력 때문이었을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공포정으로 가는 길>에서는 이러한 위기상황에서도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위한 지롱드파와 몽타뉴파의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그려진다. 공화국이 직면했던 어려운 상황은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이전 시대의 부채로 인한 것이었지만, 위기에 대한 대처보다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국민공회 의원들 역시 위기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단결이냐, 분열이냐? 국민공회의 지롱드파와 몽타뉴파는 모두 통일성/일체성/동질성을 뜻하는 '위니테 unite'라는 말을 썼다. 여러 요소가 하나로 뭉치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국민공회 밖에서도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모두 이 말을 쓰면서 상대방이 분열을 부추긴다고 공격했다. 그러므로 통일성이라는 말에 상반된 뜻이 생겼다. 말에는 고유한 의미가 있지만,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261/414

자코뱅협회에서는 지도자들이 날마다 지롱드파를 규탄하면서 혁명을 이끌어갈 집단을 급진적으로 정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혁명이 폐지한 특권계급 출신에게는 민간이건 군인이건 공직을 맡기지 말자는 제안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론상 절대적 평등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p82)... 2월과 3월 초의 위기를 겪으면서 국민공회는 기존의 모든 법원이 너그럽기 때문에 위험에 처한 공화국을 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특별형사법원'을 빨리 조직해서 혁명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했고, 결국 혁명의 산물인 배심원단을 두는 법을 통과시켰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97/414

결국 1793년 7월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의 사망과 8월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 1794)가 국민공회 의장직에 오른 후에야 정쟁(政爭)은 마무리되었고, 그동안 쌓인 자신들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를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 ~ 1793)를 처형하면서 공포정으로 선회하게 된다.

당초 주명철 교수는 우리나라의 2016년 촛불혁명을 염두에 두고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했음을 밝히고 있다. 혁명을 통해 겪는 여러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역사속의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발견하고 이를 교훈삼아 실패한 프랑스 혁명 대신 성공하는 촛불 혁명이 되길 기원하는 저자의 절절한 마음이 10부작 전반에 묻어나온다.

저자는 9권의 머리말에서 성공하는 촛불혁명의 결과가 이어지는 마음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새로운 길을 말하지만, 이 책을 읽는 2022년 시점에서 독자들은 이어지는 혁명의 어려움을 지켜보게 된다. 이전 정부를 부정하고, 외교 정책은 방향을 못잡고, 가속화되는 경제위기 속에서도 시행하는 정책은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의 심정은 18세기 말 프랑스 민중들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 혁명사 9권 <공포정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은 오늘날의 공안정국(公安政局)과 같은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를 느낀 급진 상퀼로트 계층에 의한 공포정 요구로 마무리된다. 이로부터 몽타뉴파는 반대편인 지롱드파를 제거와 함께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처형하면서 혁명은 '혁명체제'를 지키기 위해 보수적인 '반혁명'정책을 펼쳐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혁명세력이 개혁을 하지 않고 스스로 보수화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를 깊이 체감하는 현실에서 마지막 10권 <반동의 시대>로 향해가면서 기시감(旣視感)이 드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혁명기에 서민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말이 삶의 질을 높여주리라고 기대하면서 전보다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현실을 견뎠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을 실현함에 따라 상대적인 박탈감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급기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믿었던 국미공회와 시 정부에 불만을 표출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들고일어났다. 그것이 처음이 아니었듯이 마지막도 아니었다. 그들도 경험으로 배우고 행동방침을 세울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더욱 효과적인 방식으로 권력이건 재물이건 가진 자들을 압박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69/414

수감자 수가 늘어나면서 국민공회가 하는 일이 신속하게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도왔다. 그렇지 않으면 반혁명혐의자가 될 뿐이었으니 달리 외면할 길도 없었다. 예전에는 공무원을 자주 바꾸면 혼란이 발생하고 행정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이제는 사람만 바뀔 뿐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공포의 힘이다. 혁명/반혁명 모두 자신의 자유와 목숨을 걸고 싸웠다. _ 주명철, <공포정으로 가는 길> , p401/4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로 세운 공화국 -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8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이는 재판을 받았다. 왕권은 죽었다. 공화국이 태어났다 자유는 이 세계에 은혜를 베푸는 요소가 되었다. 인류의 원대한 희망은 완성의 길로 나아갔다. 모든 나라가 프랑스를 관찰하려고 본받으려고 경쟁했다. 모든 것이 이 세계를 해방시키려고 바삐 움직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류의 친구에게는 고통이요, 절망이다. 도덕은 오랫동안 후퇴했고, 인민의 해방은 반세기나 늦어지고, 인간의 행복은 가엾은 왕을 재판한 사실 때문에 유럽에 몰아닥친 끔찍한 폭풍우를 모두 몰아낼 때까지 뒷전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329/342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8권 <피로 세운 공화국 -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Liberte>는 공화정의 수립 후 루이 16세의 처형까지를 다룬다. 전제군주정을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정을 정착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6세는 도주 사건 후 불과 1여년 만에 기요틴의 제물로 사라지게 되었다. 루이 16세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나빠진 것은 물론 도주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죄가 있음'을 인정한 항목 - 프랑스 국민을 반도로 규정한 일,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일 등 - 등에 대한 죄로 인해 그는 왕에서 일개 시민의 자리로 내려와야 했다. 이제 시민의 자리에 서게 된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시킬 수 있었다면, 어떤 근거에 기대서일까.

어느 나라나 조국을 배반하면 중형을 내린다. 루이가 가족을 데리고 국경 쪽으로 도망치다 잡혔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당시로서는 죽을죄였다. 그때는 제헌의회가 어떻게든 도주가 아니라 납치라고 사건을 무마해주었고, 헌법을 지키겠다고 멩세한 뒤 자격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1년 뒤에는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공화국이 섰으니 이제 왕좌를 되찾을 희망은 프랑스가 대외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있었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161/342

<피로 세운 공화국>에서는 루이의 사형을 둘러싼 치열한 논의가 일어난다. 자신이 지은 죄로 폐위당한 왕을 재판할 권리가 없다는 의견과 프랑스 국민으로서 국민들에게 피를 강요한 잔혹한 죄는 피로써 갚아야 한다는 반대 의견. 지롱드파와 몽타뉴파의 치열한 대립은 '파리 코뮌'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민중의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기도 했다.

오늘날 국민만큼 권한을 가진 존재는 없다. 그러나 국민이 모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해도, 정당하지 않은 권한만은 가질 수 없다. 루이에게 적용할 법이 없음에도 국민이 루이를 처벌하기 바란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루소의 말로써 대답한다. " 우리가 따를 만한 법이 없을 때, 또 판결을 내릴 재판관이 없을 때, 일반의지를 따를 수 없다. 일반의지는 보편적인 의지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 또는 어떤 사실에 대해 판결을 할 수 없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221/342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파리 코뮌은 8월 11일에는 과거의 상급기관인 파리 도 지도부의 권한을 정지시켰다. 구의 위원회, 치안판사, 치안관들과 법원 서기들의 권한도 정지시키고, 구 의회에 그 권한을 맡겼다. 이제부터 모든 구는 상시활동 체제로 들어갔다(p55)... 이처럼 '혁명코뮌'은 8월 10일 이후의 실세임을 국회가 인정했다. 국회는 파리 코뮌의 활동비로 10만 리브르를 책정해주었다. 파리 코뮌은 위원들이 3일에 하루씩 숙직을 하면서 중요 현안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췄다. 그들은 파리에 남아 있는 봉건적 잔재를 모두 없애기로 결정했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56/342

파리 코뮌이 처한 어려움은 민중들의 실망감에 근거한다. 파리 코뮌이 들어선 직후 실시된 인민재판과 '9월 학살'은 민중들의 삶을 조금도 개선시키지 못했고, '빵'을 요구하며 혁명에 참여했던 이들의 기대는 실망감으로, 실망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이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참이었다. 희생양으로서 앙시앵 레짐의 상징, 폐위된 왕 루이 카페(루이 16세)는 매우 상징적이었고, 적절했다. 국민을 향해 발포를 명령하고, 조국을 등진 최고책임자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는 '반혁명의 수괴'지만, 그를 사형시키는 과정에서 형식적 하자는 없었는가?

종합해서 보면, 9월 2일부터 6일까지 '인민재판'을 실시한 감옥에는 모두 2,500여 명이 갇혀 있었다. 그들 가운데 모두 1,090~1.395명이 학살당했다. 파리에서는 학살이 끝났지만, 인근의 베르사유/오를레앙/모/랭스에서도 학살사건이 일어나 모두 15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그 후 9월의 학살자를 뜻하는 명사 '세탕브리죄르 septembriseur', 동사형 '세탕브리제 septembriser'라는 새로운 낱말이 등장했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112/342

의원들이 위기의식을 부추기면서 민중을 속이려 해도, 민중은 바보가 아니다. 농산물을 풍부하게 수확했음에도, 아직까지 외국에서 밀을 수입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할 것인가? 언제까지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민중을 우습게 보지 말라! 생필품이 부족한 것은 투기꾼 때문이다. 그들은 노르망디에 가까운 영국의 저지 Jersey 섬이나 다른 곳에 창고를 두고 공급을 조절한다. 국내의 창고에도 곡식을 쌓아놓고 풀지 않는 재산가, 대농장주들에게 밀을 시장에 내놓으라고 명령해야 한다. 감시를 강화하고 최고 가격제를 실기하고. 물론 그것은 자유주의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유와 평등을 고양시키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 있는가?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173/342

상퀼로트는 국민공회가 모인 지 두 달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따졌다. 물론 그동안 왕의 자격을 정지시켰고, 군주정을 공화정으로 바꾸면서 민중의 염원에 보답했다. 그래서 민중은 평화와 질서를 기대했고, 올바른 선택을 했음을 확신하고 감사했지만, 행복한 시간을 더는 누리지 못했다. 모든 프랑스인이 루이를 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심판하지 않았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173/342

불과 다섯 표의 차이로 갈린 생(生)과 사(死)의 결정. 적은 표 차이도 문제지만, 국민공회 의원들의 대표성에 대해서도 의문들이 제기된다. 프랑스의 일부인 파리 시민들의 의견이, 그 중에서도 상당수의 결원이 발생한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 프랑스 공화국의 향후 방향을 결정짓는다면, 이에 대한 정당성에 물음이 내려질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차적 하자를 보완하기에 국민공회 의원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국민공회 의원을 뽑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와 평등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한 사람만 투표할 수 있었으며, 파리는 그 어느 곳보다 이 기준을 엄격하게 지켰다. 왕당파를 억압하는 도 departement가 많았고, 이렇게 해서 투표율은 아주 낮았다. 전국에서 유권자 700만 명 가운데 60만 명만 투표에 참여했고, 파리에서는 자코뱅파 5,000여 명이 파리 주민 60만 명의 의견을 지배했다. 아직 민주주의를 정착시키지 못한 시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뽑힌 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 파리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의가 열렸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129/342

비록 투표 결과가 내 생각과 다르게 나왔습니다만, 나는 그 결과를 존중합니다. 그리고 어떤 벌을 내려야할 지 결정하는 투표를 할 때, 나는 그가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집행유예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집행유예 문제를 투표하기에 앞서,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내 이익만 생각한다면, 나는 반대에 투표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는 살해당할지 모르지만 집행유예를 찬성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집행유예에 찬성하는 이유는 이처럼 중대한 재판에서 형식적인 결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재판은 단지 다섯 표 차이로 갈렸습니다. 이처럼 큰 차이도 없이 난 결정을 24시간 안에 집행한다니, 말도 안 됩니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285/342

<피로 세운 공화국>에서는 국민공회의 왕정(王政) 지우기와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민심 이반과 외부와의 전쟁으로 어려움에 빠진 공화정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 결과 국민공회는 루이 카페를 사형시킴으로써 9월 학살은 정점에 이르게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자신들의 나라에 미칠 영향을 두려워한 외국과의 대립은 더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1791년 10월 1일 입법의회가 활동하기 시작한 뒤, 의회를 지배하는 세력이 바뀌었으며, 외국 군대의 침략과 파리 코뮌의 정치적 간섭이 심해지고, 여전히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빵과 생활필수품의 값이 치솟는 현실은 왕에게 느끼던 친밀감이나 존경심을 실망, 좌절, 배신감, 증오로 바꾸어놓았다. 이처럼 앞날을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 가지만은 더욱 분명해졌다. 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불리한 상황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227/342

그는 만일 루이를 처형하면, 곧바로 영국, 네덜란드/에스파냐, 그리고 유럽의 모든 폭군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의 폭군들은 루이의 죽음을 개인의 죽음으로 보기 때문에 거기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기 나라에 자유의 바람이 불까봐 두려워서 프랑스 공화국의 자유를 짓밟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피로 세운 공화국> , p297/342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26 12: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
벌써 8권
며칠 못본사이에 이렇게나 진도를 나가셨군요.

겨울호랑이 2022-08-26 12:21   좋아요 3 | URL
네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이 우리의 현실과 생각하도록 만든 책이라 외국 역사임에도 참 가깝게 느끼고 읽게 되네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북다이제스터 2022-08-26 1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본 책에선 혹시 ‘프랑스 혁명은 가난한 시민들의 혁명이 아닌 부자들인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란 취지의 설명이 있는지요?

겨울호랑이 2022-08-26 14:05   좋아요 3 | URL
사실, 직접적으로 저자가 직접 언급했는가는 잘 기억이... ㅜㅜ 다만,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프랑스 혁명사>는 수치로 보여준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1권에서 삼부회의 구성에서 대표가 되는 이들이 제3신분 중에서도 일부 계층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들의 거주지가 파리에 국한되었다는 사실 등이 구체적 수치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과 특징이 제헌의회, 국민공회 등에서도 이어졌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본문 전체에 걸쳐 담겨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와 함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특정계층의 남성에 대해 주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기에 저자의 논조를 생각해본다면, 간단하게나마 (본문 어딘가에서는, 그렇지만 제가 기억못하는 지점...) 해당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

노란가방 2022-08-27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책이 있었군요.. 역시 책 잘 읽으시는 주변분들이 있어야 시야가 넓어지나 봅니다. 꽤 흥미로운 책일 듯하니 챙겨놔야겠습니다. 우선 지금 읽고 있는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끝내고....ㅠㅠ

겨울호랑이 2022-08-27 14:35   좋아요 0 | URL
앙시앵 레짐의 대가인 저자가 일반인들을 위해 프랑스 혁명사를 알기 쉽게 잘 정리한 시리즈라 생각합니다. 노란가방님 좋은 독서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
 

프랑스 혁명이라는 연극을 지켜보던 관객이 교육을 받고, 주역이나 도우미가 되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베르사유에서 전국신분회가 국민의회로 바뀌는 과정부터 관객이 지켜보았다. 이제 정치는 관객 앞에서 주인공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고 관객을 감동시키는 연극이 되었다. 루이의 편에서 볼 때 그는 주역이었지만, 점점 비중이 커지는 조여들에게 밀려나다가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죽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렇게해서 천년 이상 발달한 왕정의 연극은 막을 내렸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의 시대가 끝났다.

프랑스에서 왕조의 연극을 끝낸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중요한 연극이었다. 그것은 왕이 주인공이던연극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들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서로 주인공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하는 연극이었다. 그 무대는 파리나 주요 도시의 거리, 정치 클럽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곳은 국회의사당이었다. 처음에는 베르사유 궁에서 시작해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왕이 옮겨갈 때 의원들도 따라가고, 국회가 따라가자 정치 클럽도 함께 따라갔다. 파리의 정치 클럽도 그 나름의 무대였으며, 거기서 주역으로 떠오른 사람이 국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만큼 파리가 모든 연극의 중심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에서는 화가의 붓만 사용하고 철학자 성찰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풍자를 위주로 했더라면 이 '풍경'이 쉬웠을 테지만, 나는 풍자를 철저하게 삼갔다. 전형화된 풍자는 자극적이고 무감각하게 만들 뿐,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제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나는 전체적인 그림만을 그렸고, 이것을 넘어서는 일은 공익을 위해서 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 있는 인물들을 보고 이 '풍경'을 그렸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머리말 中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이대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함이 생긴다. 물론, 이 부족함은 저자의 부족함이 아닌 내 자신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2016년 촛불항쟁의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혁명의 의미에 대해 잘 전달한다. 프랑스 혁명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 대작(大作)은 분명 큰 의의가 있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이 혁명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책들이 필요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Louis-Sebastien Mercier)의 <파리의 풍경 Tableau de Paris>은 당대의 시대상을 앵글에 담아 보여줄 것이며, 그런 사료에 대한 현대 프랑스인들의 인식은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기억의 장소 Les Lieux de Memoire>가 알려줄 것이다. <파리의 풍경>를 둘러싼 프랑스 혁명의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기억의 장소>와 이를 바라보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통해 혁명을 바라보는 인식의 삼각형을 뚜렷하게 그려보기를 바라본다...


 이러한 삼각형의 윤곽을 잡은 후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철학으로 안을 색칠하고, 성공한 파리코뮌이었던 프랑스 혁명과 대척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파리코뮌을 주제로 한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외접원을 그린다면, 이제 다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독서주제를 선회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계획은 그렇다... 














 기억으로부터 역사로의 이행은 각 사회집단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역사를 활성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것을 의무로 삼게 만든다. 기억의 의무는 각자를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가로 만든다. 역사의 절대적 필요성은 이렇게 해서 제한된 전문 역사가 서클의 범위를 크게 넘어선다(p48)... 기억의 역사적 변환(metamorphose)은 개인심리로의 결정적인 전환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두 현상이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발생한 시점이 일치한다는 것조차 지적하기 어려운 그런 현상들이 있다... 기억의 전이(轉移)는 역사적인 것에서 심리학적인 것으로,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전달가능한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되풀이되는 것에서 회상하게 만드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이동이다. 기억의 구속이 집요하고 미분화된 방식으로 힘을 가하는 대상은 결국은 개인이고 오직 개인일 뿐이다. _ 피에르 노라, <기억의 장소 1>, p49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2-08-25 1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리에 꼬리를 잇는 독서법” 넘 좋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8-25 12:32   좋아요 2 | URL
좋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 독서법은 ‘그때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독서법‘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ㅋㅋ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오후 되세요! ^^:)

거리의화가 2022-08-25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겠네요. 관심이 갑니다!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프랑스 혁명을 훓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명철 교수의 책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 좋겠는데 언젠간~!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8-25 14:0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제가 <프랑스 혁명사>10부작은 전체 내용 중 극히 일부만을 인용한 것이라 거리의화가님께서 직접 읽으신다면 훨씬 많은 내용을 담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리의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2-08-25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 관심가는 책이네요. 담아갑니다.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다시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구 있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8-25 14: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꼬마요정 2022-08-25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 책 표지가 참 이쁘네요. 흑흑 전 이제 <프랑스혁명사> 1권 시작하는데 뭔가 훅 하고 거대한 밀물이 들어오지만 책이 예뻐서 장바구니에 담아봅니다. ㅎㅎㅎ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북플에는 마약 성분이 분비되고 막 그러나요?? 지름신이랑 계약이 되어 있다거나….

겨울호랑이 2022-08-26 00:09   좋아요 1 | URL
^^:) 설마요 . <파리의 풍경>을 지금 읽고 있습니다만 18세기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6권에 달하는 방대함이 부담스러울수도 있을 것같아요. 목차 중 관심내용을 선택하여 우선 읽으시면 지루함을 덜수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꼬마요정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왕의 폐위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7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맹세를 하고서도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0/4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7권 <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Liberte>의 배경인 1791년과 1792년의 2년 시기는 2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기 프랑스의 어려움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변곡점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제군주정으로부터 입헌군주제로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입헌군주국 프랑스를 둘러싼 내/외부 환경은 결코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제1공무원으로 국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국왕 루이 16세와 귀족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최대한 혁명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행정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그렇지 않아도 국왕의 도주 사건으로 떨어진 그에 대한 인식을 더욱 나쁘게 했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라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기 쉽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지 않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반혁명세력이다. 루이 16세는 변화에 마지못해 따라가면서도 헌법이 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펵명의 앞길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464

그렇다면 인민의 대표 일부를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왕실비다. 행정부는 왕실비를 써서 대신들을 임명한다. 따라서 행정부가 합리적인 봉급을 주고, 또 어떠한 공직도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다면 입법부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입법부가 부패하지 않으면 건전하고 정의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행정부가 이러한 법을 집행하면 정치는 올바르다. 만일 행정부가 법을 올바르게 집행할 의사가 없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왕의 권리는 신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무관심이나 행동을 제약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은 무용지물이 된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06/464

이런 국왕과 왕당파의 노골적인 태업(怠業)행위에 대해 견제해야 할 온건파 혁명세력이 주도하는 국회에 대한 실망감도 적지 않았다. 라파예트로 대표되는 이들 세력의 굼뜬 움직임 역시 혁명에 대한 민중의 실망을 자아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모두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그대로 일반 시민들의 몫이었고, 행정상의 태업과 입법상의 공백 사이에서 민중들의 삶은 매우 불안해져갔다. 이처럼 정치/ 경제적 불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로부터 선전포고라는 선물을 받으며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불매운동을 벌여야 설탕 값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투기꾼들을 비난했다. 설탕이 귀해진 이유는 생산지에서 생산량이 줄고 수출관세는 높게 매기는 데서 출발해 프랑스의 투기꾼들이 매점매석하기 때문인데, 서민은 품귀현상의 모든 책임을 투기꾼에게 물었고, 국회에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기 바랐다(p154)...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은값이 치솟았다. 2월 초, 은은 53퍼센트나 비싸졌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56/464

혁명이 시작된 후 프랑스는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왕의 군대에서 프랑스 수비대는 1789년 6월부터 민간인들과 형제애를 나누면서 상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해 도시와 외곽의 질서를 바로잡았지만, 해가 바뀌고 혁명이 더욱 급진화하면서 국민방위군은 귀족이나 민중의 희망을 저버리고, 더욱이 국민방위군 안에서도 틈이 발생했다.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는 초기에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누렸으나 점점 정치적 암투에서 인기를 잃었다. 정규군도 혁명의 바람에 휩쓸렸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71/464

황제 레오폴트 2세는 끊임없이 유럽 열강들을 프랑스와 대립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공모해 폴란드와 터키를 나눠 가질 궁리를 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을 이간질했다. 그는 3월 1일에 죽고, 구스타브3세도 3월 29일에 살해당했다. 레오폴트 2세의 뜻을 담아 카우니츠 공이 지난 2월 18일에 보낸 공식 서한은 진정한 뜻의 선전포고였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64/464

안으로는 반혁명세력, 밖으로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회는 어떠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달라는 호소를, 샹퀼로트(Sans-culotte)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세력들은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가면서 루이 16세의 폐위가 결정된다. 이제 프랑스는 혁명전쟁을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정으로 치를 것이었다. 그리고, 튈르리 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를 통해 피맛을 알게 된 상퀼로트들의 등장은 바로 공포정의 서곡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병력을 증강하자는 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루이 16세가 패배하기 바랐던 전쟁을 장기전으로 가져가거나 결국 승리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설마. 그럼에도 우리는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네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을 깨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27/464

8월 10일, 왕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은 1791년 헌법을 부정하는 혁명이었다. 그 헌법에는 왕이 입법부를 해산할 수 있으며, 왕은 몇 가지 경우에 '사임 abdication'한다고 정했다. 다시 말해 국회는 왕을 정직 suspension시키거나 폐위 decheance할 권한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헌법을 부정했던가? 지난 1년 동안 귀족주의자들은 양원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원제 헌법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민이 왕의 정직과 폐위를 요구했고, 마침내 무장투쟁을 통해 국회를 움직였다. 그래서 1792년 8월 10일은 한 달 뒤에 있을 '공화국 선포'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1/464

<제2의 혁명>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전제군주의 구심점이었던 루이16세는 입헌군주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가. 앞에서는 입헌군주로의 개헌을 승인하고, 뒤에서는 끊임없이 반혁명 세력의 준동을 지원한 루이 16세의 모습에서 일본 '천황제'를 생각하게 된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을 폐지하지 않고 상징적인 존재로나마 남아있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본 극우의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고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라파예트 장군의 정치행적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잘 조절하여 중도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미국독립전쟁 영웅 라파예트의 몰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여겨진다. 그리고, 중도적 개혁이 실패했을 때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극좌세력이 대두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프랑스 혁명은 '기요틴'과 함께 공포정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며, '우애'를 상징하는 빨강색은 이제부터 기요틴의 피로써 '우애 없음'을 보여주면서 프랑스를 물들이게 될 것이다...

1792년 6월 20일, 상퀼로트는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나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씌우고 자신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왕과 형제애를 나눴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기를 들고 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다. 평소 경멸하고 욕하던 권력자를 막상 마주하게 될 때, 연습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면 점점 거친 말까지 내뱉게 된다. 결과적으로 6월 20일은 앞으로 한 달 반쯤 뒤에 헌정을 중단시킬 사건을 향한 서막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60/464

'기요틴'은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계였다. 오늘날까지도 손재주 havilete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지만, 산업화 이후의 과학기술 technologie은 규격화한 결과를 낳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작하는 방법만 제대로 따르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요틴'은 사형의 대량화요, 기계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88/4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 9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