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역사학자들은 독일이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 국민 국가로 통일되지 못한 이유를 심사숙고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거대한 땅덩어리가 주권자가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점을 한 가지 확실한 이유로 들 수 있다.

막시밀리안은 3편의 자서전적 우화를, 개별 지식 분과의 정수를 뽑아내서 여러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기 위한 대규모 편찬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다. 백과사전의 각 부에는 요리, 승마술, 매 훈련법, 원예학, 포술砲術, 펜싱, 도덕률, 성채와 도시, 마술(흑마술도 포함된다), 연애 기술 등과 관계있는 모든 지식이 요약될 예정이었다.

막시밀리안의 미래상은 현실과 동떨어졌고, 그럴듯하지도 않았다. 그는 치세 내내 야심에 비해서 수입이 부족했다. 프랑스의 왕들이 매년 수백만 두카트의 수입을 올리던 시절, 막시밀리안은 그의 중앙 유럽 영지에서 겨우 약 60만 두카트를 거둬들였다.

개혁가들은 대부분 신화적 과거를 되돌아보았고, 통치자와 제후들의 공동 지휘 아래에 정의가 지배하는, 신이 정해놓은 상태가 재확립되기를 꿈꾸었다. 반면 막시밀리안은 군대 양성과 자금 확보라는 관점에 입각한 조율에 관심이 있었고, 개혁가들이 꿈꾸는 방식의 권력 분점을 꺼렸다.

카를은 재정적 절박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고, 카스티야의 군주로서 의회의 동의 없이 다양한 세금을 징수할 권리가 있었다. 그렇게 거둬들이는 세금은 그의 모험을 뒷받침하는 데에 할당되거나 대출의 담보로 제공될 첫 번째 수입원이었다. 세금 다음으로 그가 기댄 것은 카스티야 의회가 특별히 통과시키는 자금이었는데, 그 돈을 이용하려면 일단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카를은 정치적 기반도 미리 준비해두었다. 종교 전쟁을 선포하는 대신, 차지할 자격이 없는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며 개신교 제후들을 압박한 것이다. 그러자 적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덕분에 카를은 1547년에 뮐베르크 전투에서 주요 개신교 제후들을 상대로 놀라운 승리를 거둘 발판을 마련했다.

카를은 일단 아들인 펠리페가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의 군주 자리에 오른 뒤에 나중에 페르디난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훗날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재위 1564-1576)이 그 자리를 이어받는 방식을 고집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최고로 커졌을 때조차 가문의 판도는 양분되었고, 스페인 쪽은 카를의 아들인 펠리페가, 중앙 유럽 쪽은 카를의 동생인 페르디난트가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끊임없이 신화를 수집하고, 영묘를 만들고, 옛 로마인의 방식으로 승리를 과시했지만, 그런 활동은 더 이상 무의미한 자기 선전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에는 카를이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말한 바와 동일한 목적(왕가 차원에서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 점점 더 많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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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거에 왕을 선출하는 과정에 몇 번 참가했었지만, 새로 정해진 선거인단에서 빠지면서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헌정 문서에서 누락되었다. 카를 4세는 의회의 향후 회합에 대비하여 직접 마련한 좌석 배치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을 선제후들과 고위 성직자들, 제국의 고관대작들 다음인 두 번째 열에 배치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알브레히트가 오스트리아에 장기간 머문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당시의 어느 연대기 작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인들"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인들이라는 용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가리키는 데에 쓰인 첫 번째 사례였다. 과거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섭정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슈바벤의 영지 덕분에 총독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의 업적은 한층 더 미묘한 것이었다.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내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이 각인되었다. 다른 가문 사람들은 당대의 황제 덕택에 선제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힘입어, 그리고 역대 황제들이 몇 세기에 걸쳐 인정해준 특권에 힘입어 높은 지위에 올랐다.

영주의 통치권은 정치적 공동체 의식을 유발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각 영지에서 피지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출현했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들은 14세기 말엽부터 의회를 열어서 통치자와 정책을 토론했고, 증세를 둘러싼 권리를 증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상속권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면 의회는 합의를 종용했고, 당사자들의 주장을 중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했다.

AEIOU라는 두문자어와 성 게오르크 예배당 서쪽 벽의 문장, 그리고 급성장세의 연대기 문학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리켰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상속,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 브란덴부르크나 작센처럼 다른 통치자들이 속한 가문의 이름은 주요 영토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일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15세기 초엽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의 옥좌에 도전할 가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493년에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5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실처럼 보였다. 그들은 역사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과 신화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위대함을 향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1437년, 프리드리히가 세계 제패의 뜻을 담아 비망록에 남긴 AEIOU는 허영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490년대에 이르러 그것은 믿을 만했고,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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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문예학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은 영감과 지침을 얻고자 고대 로마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황제가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위계질서를 둘러싼 믿음을 고대 로마의 유산으로부터 차용했다. 그들이 보기에 황제의 임무는 여러 통치자들을 중재하고 평화의 치세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가장 위대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뮈스는 그 터무니없는 학술적 행위에 가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왕들과 바보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평하며 보편 군주는 보편 폭군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만인의 적이고, 만인이 그의 적들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은 에라스뮈스가 두려워한 "세계 군주국"을 실현할 뻔했다.

그럼에도 항목별로 배열되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19세기와 20세기까지 지속된 합스부르크 가문 치세의 특징이 엿보인다. 제국의 각 부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정부, 법률, 귀족, 명문가, 의회 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부분은 통치자 개인에 의해서만 한데 모인, 거의 독립적인 나라들이었다. 각 부분 간의 거리를 감안하면 이러한 부조화 현상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지만, 서로 큰 차이점이 있는 여러 민족들이 부재하는 주권자에 의한 지배를 감수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적 정책의 소산이기도 했다.

몇 개의 왕국을 바탕으로 세워진 국가들조차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구성 요소들의 특이성이 차츰 희박해져 원래의 독자적 성격과 제도가 사라지면서 지방보다 중앙으로 저울추가 기울기 마련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 목표를 결코 이루지 못했다. 사실, 짧은 막간을 제외하면,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 행정 및 법률 기관을 일부 통합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는 주권자가 무한한 권력을 지닌 초超군주가 아니라 각 영토의 영주에 불과한 듯이 통치되었다.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에 각 영토 및 도시의 권리와 자유를 지켜줄 정부가 없다는 점이었다. 제국에는 중앙 행정 기관이 없었고, 정기적인 세입도 없었으며, 수도도, 통치자가 위임한 법을 집행하는 법원의 위계 구조도 없었다. 권력의 향방은 대영주들과 대제후들에게 달려 있었는데, "로마인의 왕"을 군주로 선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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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풍경 4 파리의 풍경 4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지음, 송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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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원은 심판을 받았다. 지나친 호기심, 편협함과 위선, 수사(修士)연한 어리석음, 수녀연한 정숙한 티가 그곳을 지배한다. 옛 미신의 이 개탄할 만한 유물이 철학이 빛을 전파하는 도시 가운데 존재한다. 그러나 이 신성한 감옥의 담장은 그 희생자들을 모든 지배적인 이념으로부터 분리시킨다. 판편에 가장 묵시적인 복종이, 다른 한편에 편협한 명령권이 존재한다. 이에 덧붙여 대다수의 절망, 일부의 평온한 체념, 더 영적인 이들의 정신적인 우둔화가 나타난다. 여기서 의무란 관행일 뿐이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64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Louis-Sebastien Mercier, 1740 ~ 1814)의 <파리의 풍경 4 Tableau de Paris>에서 주제를 찾는다면, '제1계급 이야기'로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대혁명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습관적으로 '앙시앵 레짐의 모순이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 이라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앙시앵 레짐의 모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구체제의 모순으로 구체적으로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들의 부패'라고 답하지 않을까. 그리고, 대부분 우리는 이를 “Qu’ils mangent de la brioche!”, 영어로 "Let them eat cake"로 번역되는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1793)의 말로 상징화해서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이렇게기억한다는 단정은 아니다. 다만, 속(俗)의 지배계급의 학정은 우리에게도 쉽게 다가오지만, 성(聖)의 지배계급인 성직자 계층의 부정에 대해 쉽게 공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남북국 시대의 신라말 또는 고려시대 말을 살았다면, 성직자 계층의 부패에 대해서 쉽게 이해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부분도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날 대형교회처럼 꼭 그런것만은 아닐듯 싶다). 서두가 길었지만, <파리의 풍경 4>는 가톨릭 국가에서 제1계급의 권력과 이에 대한 비판이 소개된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가톨릭(catholic)과 라틴어가 갖는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필 필요가 있다. 


 가톨릭 국가에서 축제일은 1년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사반세기 전에 이에 대한 비판이 있은 후로 그것은 13~14일이 줄었다. 5일 연휴가 여러 번 있으며, 3일의 연휴도 꽤 자주 있다. 그러고도 일요일에는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 미신이 공격받고 있지만, 절반밖에 개선이 되질 않았다. 축일이란 교회가 선술집에 가라고 신호를 주는 셈이며, 그날 온통 술꾼들이 거기서 일주일의 벌이를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게가 문을 닫지 않는 날을 '평일(jours ouvrables)'이라고 부른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78


 천년제국 로마제국 말기 기독교가 공인된 후 육(肉)의 제국은 붕괴했지만, 영(靈)의 제국은 다음 천년의 유럽을 지배한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가톨릭 국가에서 성(聖)은 속(俗)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소비(C)는 미덕이라는 말그대로 '고전케인즈주의'의 경제를 실천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 이에 반발한 개신교는 이러한 축제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신교도 국가에서의 경제발전 양태는 사뭇 달라지게 되는데, 이로부터 막스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1920)가 자본주의 정신의 기원을 찾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톨릭 세계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부분 모태신앙( 母胎信仰)으로 이어져왔기에, 별다른 의심없이 세계의 일원이 되고 어울려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성직자와 신자들은 교회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의 연결은 주일 미사(Missa)를 통해 강화되는데, 미사전례는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각국 언어로 미사전례가 허용되기 전까지 라틴어로만 진행되었다. 사제에게도, 신자들에게도 라틴어는 큰 부담이었지만, 덕분에 '감시받지 않은 권력'은 일단 손에 넣기만 하면 독점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세례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존재, 지위, 운명을 결정하는 호적을 탄생시킨다. 그의 생애의 모든 상황에서 이 세계증명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소한 전치(轉置), 사소한 실수도 심대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이같은 증명서에 실수를 교정하려면 많은 절차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39


 신부는 촛불을 들고 의자 위로 올라간다. 그는 필사본 더미 속에서 필요한 것을 고르고, 거의 값을 깎지 않고 수단 속에 그 경건한 원고 뭉치를 숨겨 황급히 가져와, 방 안에 틀어박혀 좌우에 널린 문장들을 베끼고 훔친 글귀들로 '표적 작품'을 만드는데,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항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의 설교와 찬사를 신부는 버젓이 교회 설교단에 판매한다. 그리하여 큰 수집장을 가진 양피지 제조인에게 그가 준 20에퀴는 100배의 이익을 낳는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151


 귀족사회가 혈연이라는 붉은 피로 연결되었다면, 성직자 사회는 라틴어를 매개로 푸른 피로 연결되었다. 라틴어를 통한 정보의 배타적 독점(獨占). 수도원이라는 깊은 은둔 안에서 라틴어제국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문제점을 드러냈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이러한 독점을 깬 파격적인 혁명이었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대개 '종교개혁=면죄부판매 반대'라는 공식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역사는 이면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움직인다. K-POP의 아이돌 스타 이면에 기획사가 있듯이. 


 모든 것이 라틴어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이 터무니없는 관습을 보급하는 이유인가? 현학자여, 가까이 오라. 그대에게 심지어 공공기념물에까지 국어의 사용을 금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내게 말하라....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 p32


 이것이 깊은 은둔이 하는 일이다. 여기서 모든 열정은 부패한다. 오만은 여기서 훨씬 더 무자비한 성격을 갖춘다. 이 고독한 벽 속에서 중간은 없다. 바로 여기서 영혼은 절멸하든지, 아니면 가장 높은 정도의 사악함으로 상승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69


 성숙기에 접어들어 마음속에 가장 강렬한 불꽃이 튀는 시기에, 칩거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 신학생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신학적인 문제들밖에 없다. 금서 몇 권이 들어오면 유명한 신학적 명제들의 토대가 흔들리고, 신학생들은 그들을 적시고 있는 진리들에 대해 더 이상 확신을 갖지 못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127


 그런 면에서 프랑스 대혁명 이전 몰리에르(Jean-Baptiste Poquelin, 1622~1673), 라신(Jean Baptiste Racine, 1639~1699), 코르네유((Pierre Corneille 1606~1684)에 의한 프랑스극(劇)의 발전이 미친 영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도구가 생긴다는 것, 이들 작품을 통해 민중들은 시대를 읽을 수 있었고,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라틴어의 독점권 소멸은 속(俗)에서 절대권력이 붕괴하는 전조라 할 수 있겠다.


 작가가 불안과 경계심, 전율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공연되는 것을 볼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 작품을 판단하는 무서운 군중과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영감을 일으키는 이 순간으로 인해 그에게는 독특한 착상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작가는 그 착상들을 외부로 알리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당사자 역시 마음속으로 성찰을 하며 여러 차례 은밀히 미소 짓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이건간에 인간의 무리를 지배하면 그 무리를 비웃고 싶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움직임이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1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의 부르주아 혁명으로서 한계 또한 발견하게 된다. 노예정신을 가진 이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할 것인가. '자유, 평둥, 형제애'의 프랑스 대혁명 3대 이념에서 '형제애'는 앞의 두 이념에 따라 규정된다. '누가 나의 형제인가?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인가, 아니면 모든 사람인가'. 로베스피에르(Augustin Bon Joseph de Robespierre, 1763~1789)와 몽테뉴파(La Montagne)의 몰락과 함께 대혁명의 한계는 규정지어졌고, 언어의 이중 견해를 이겨내기 위한 혁명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혁명의 한계는 교회의 부패에는 비판적이었음에도, 무신론을 거부하는 대중들의 관용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니체의 <도덕의 계보>로 눈이 가지만,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다시 번역된 김에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자꾸 예정없는 옆길로 빠지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기한에 쫓기지 않는 독서가 갖는 장점이라 생각하며 일정에 추가하자...


 '이중 견해 - 개방적인 측면은 민중을 위한 것이고, 비의(秘義)적 측면은 교양인과 학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견해 - '의 목표는 학문의 명성, 그리고 학문에 힘쓰는 사람들의 명성을 보존하기 위한 책략이 아니라, 노예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진실에 손을 대는 것을 막기 위한 사려 깊은 대비였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143


 무신론은 인간 정신의 모든 잔악함의 총합이다. 오만, 광신, 무지, 뻔뻔함이 그 안에 포함된다. 그것은 세상의 찬란한 정경을 사막으로 만드는, 정신착란과 매우 유사한 파괴적인 광기이다(p194)... 융통성없는 무신론자는 위험한 존재이다. 가장 계몽된 사람이라도 평범한 백성들처럼 생각해야 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195


 글의 마지막은 18세기 프랑스의 풍경 중 재밌는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예나 지금이나 고급 세단이나 스포츠카에 열광하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사치'는 앙시앵레짐으로 볼 수 없는 인간본성의 일부로 봐야할까...


 마차는 출세의 험난한 길에 들어선 모든 사람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이다. 행운이 따르는 첫걸음에 그는 자신이 직접 모는 이륜마차를 구비한다. 두 번째 단계로 사륜마차 쿠페가 온다. 세 번째 단계는 신사용 사륜마차이다. 마지막이 숙녀용 사륜마차이다. 재산이 늘어나게 되면 아들이 자신의 '이륜마차'를 갖는다. 집사가 자신의 '이륜마차'를 갖는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4>, p376

신문들은 엄격하게 등급이 매겨져 있다. 보조금을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지루하고 형편없는 신문이 된다 해도 신문의 특권은 유지된다. 그런데 다른 데 관심을 쏟는 것은 허락하면서 각각의 신문에 제작 능력을 키울 자유는 왜 남겨주지 않는 것인가? 2~3년이 지나면 좋은 신문들은 승리를 구가하고, 나쁜 신문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적어도 동일한 금액의 돈은 다시 찾을 것이고, 잉크, 종이 및 활자의 거래는 3배나 더 빨라질 것이다. 굶주림을 호소하는 인쇄업자, 가제본업자, 제본업자, 행상인 등의 라틴어 제국은 이러한 것들로써 먹고 살게 될 것이다. - P291

신문은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고 가장 뻔뻔스러운 소문의 나팔수들이다... 기자들의 말을 반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가장 악의적인 비평가들을 쓰러뜨리는 데에도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된다. 훌륭한 상대이든 형편없는 상대이든, 경멸이 담긴 침묵이야말로 그 상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무기이다. - P323

오늘날 계몽철학의 횃불을 끄려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등대는 불이 밝혀졌고 유럽을 지배하고 있다. 절대 권력의 바람이 그 불꽃을 굽히려 하지만, 그저 그 불길을 일으키고 더 강렬하고 찬란한 광채를 부여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를 억누르면, 이미 준비하고 있는 20명의 다른 목소리들이 더 크게 인간의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국가 통치자들로서는 공정하고 온건해지는 것 외에 더 이상 달리 취할 방도가 없다. 인간은 자신들의 권리들을 알았다. 거짓이 지배하는 시기는 지나갔다. - P346

진리는 국민의 중심부로부터 나온다. 사지(四枝)가 정신의 뜻에 따르듯이, 진리는 국민의 의지에 따른다. 머리가 둔하거나 확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피신처인 모호함, 애매한 암흑의 상태는 전혀 없다. 편파적인 외침, 과장, 매문(賣文)과 풍자적인 글들이 때로는 진실을 흐리게 하지만, 진실 역시 의견대립의 결과일 뿐이다. 진실은 짙은 구름 같은 것들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성은 그 절정에서 하층민 작가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또 한편으로는 국민정신이 일관성을 갖고, 변화를 읽고 예측하게 되는 모습을 갖는다. 그러한 것이 정치에서는 성공의 담보가 된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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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풍경 3 파리의 풍경 3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지음, 송기형 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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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악덕은 바보같은 짓에서 나온다"는 말이 옛말인 줄 알았는데, 오늘날에도 결코 틀리지 않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 순간 이처럼 슬픈 사실을 읽는다. 가엾은 인간 정신이여, 아직도 계몽의 빛이 필요하구나! 그대는 매순간 가장 비천한 미신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마법, 마술, 점성술을 받아들인 그대, 그대는 정치적 잘못까지 저질렀다. 그 추악한 잘못을 저지른 그대 눈뜬 장님이여, 그를 슬퍼하노라.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72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Louis-Sebastien Mercier, 1740 ~ 1814)의 <파리의 풍경 3 Tableau de Paris> 또한 이전 권들과 같이 파리의 풍경과 이를 바라보는 저자의 날카로운 해석과 비판이 잘 드러나지만, 이번 <파리의 풍경 3>은 앙시앵 레짐의 모순을 넘어선 저자의 대안, 계몽주의적인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질세계는 모든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뭇잎은 하나의 조직이고 원자에는 특성이 있으며 곤충은 먼지가 되어도 경이롭다. 정신세계 역시 무시무시한 혼돈과는 거리가 멀다. 하늘을 우러러보면 우리의 생각은 고양되고 대담해진다. 신이 손을 내밀어 내려주는 그 많은 기적 앞에서 환희와 감탄으로 타오르는 우리의 영혼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조물주와 인간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379


 메르시에는 과학 아카데미를 보며 메르시에는 과학(科學, science)의 뜻에 대해 말한다. 과학을 통해 인간은 물질세계의 원리와 자연법칙을 파악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빛의 시대(계몽시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메르시에는 과학으로 밝혀진 인간 이성(理性)의 빛이 고대 시대 야만의 어둠마저 밝혔기에, 고전시대에 대한 향수마저도 단호히 거부한다. 대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그리고 예술을 통합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과학이 없다면 짐승보다 나을 바가 없으리라. 광물학이 없으면 양식의 기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인간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인육을 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냄비에 넣고 삶아 먹는 사람과 똑같은 짓을 하면서 살 것이다. 정의, 감사, 자비는 쟁기, 낫도끼, 낫을 만들 철을 발견한 덕에 생겼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121


 감성이 있는 영혼의 비약이 없이는 우주는 춥고 죽었으며 불모이다. 인간이 사고를 전개하여 자연에 혼을 불어넣음으로써 자연을 만든 노동자와 그 작품 사이의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기원을 당당하게 여겨야 한다. 세상은 진정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인간의 사고는 항성들의 빛이 미치는 한계를 뛰어넘으며, 빛보다 활동영역이 더 넓다. 인간의 사고는 창조된 모든 것이 다다를 수 있는 곳까지 도달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381


 다만,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은 개인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自由)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갖고 있는 계몽군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계몽군주가 통치하는 국가에서 포괄적 지원을 통해 인간 이성이 최대한 역량을 발휘하고 신(神)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낸 자연(自然)의 숨겨진 법칙을 발견하고, 이러한 노력이  더이상 팽창할 수 없는 영역까지의 확대될 때까지 지속되기를 메르시에는 강렬하게 요구한다.


 오직 자유주의를 믿는 군주만이 학문과 예술을 밀접하게 연결하여 상응하게 만들 수 있다. 개인이 제아무리 재산과 지식이 많고 공을 들인다 할지라도, 모든 자료를 모으거나 모든 실험 결과를 종합하거나 수많은 정신을 녹여 단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123


 모든 관념은 저장고로 들어가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운동하고 발효하여 새로운 발견을 준비한다. 그리고 국민의 모든 지식은 개인의 지식이 서로 보태고 도와줄 때야 비로소 빛난다. 그 지식은 기초를 세우고 뒤섞여 그렇게 해서 모든 제국과 시대를 구별해 주는 빛을 만든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과 예술을 연결하는 일이 불가능한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이해력의 한계를 설정하거나, 인생이 짧다고 생각하지 말하야 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122


 계몽주의자로서 메르시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보인다. 메르시에는 신이 인간을 위해 창조한 자연을 잘 이용하고, 신의 뜻에 가까이 가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시앵 레짐(ancient Regime)의 굴레에 있는 프랑스는 자신이 갖추고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메르시에는 비록 프랑스 혁명기를 살았던 인물이지만 민주정(民主政)보다는 패도(覇道)에 반대하는 계몽군주정(啓蒙君主政)을 이상으로 삼았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비록 자신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예언했다고 했지만, 자신에게는 프랑스 대혁명이 패도에 대한 절대자의 심판으로 비춰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의 풍경 3>에 실린 새롭게 탄생하는 왕자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는 철학자 알레토필의 글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숨쉬는 자는 모두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며, 인간의 규약보다 앞서 존재했던 법칙이기 때문이다. 만일 백성의 대다수가 가난하다면 왕관은 치욕스러운 것이 되며, 이름은 불명예스러워져 친구들조차 기억하려 들지 않게 된다. 산업은 결코 필요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은 가난 때문에 쓰러지거나 무력해지거나 희망을 잃고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사람은 모두 재산에 목마르기보다 극단적인 결핍 상태에서 그 지경으로 내몰렸다. 왕자여, 이러한 잘못을 최소로 줄이고 싶은가? 생활필수품을 늘려주고, 각자 생업에 매달리도록 하고, 자기 일을 남에게 팔거나 떠맡기지 않게 하라. 그 결과 부자들에게도 이익이 생긴다. 왜냐하면 부자가 모든 것을 탐욕스러운 손으로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하면, 가난한 사람은 막다른 길로 내몰려 부자의 손아귀에 든 것을 강제로 빼앗으려 들기 때문이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143


ps. 18세기 철학자가 오늘날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가 대대적인 자선사업을 하는 이유와 낙수효과의 유무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서, 고전이 지혜의 보고(寶庫)인 것인지, 인류가 역사 속의 기출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계속하고 있는 둘 중 어느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둘 다 일수도 있겠지만. 밑줄긋기 내용은 리뷰와는 별개로 오늘날 우리에도 참 유용한 글이라 옮겨본다.


 고대를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찬양할 의식이란 없다. 이들은 자기 시대를 찬양하기는커녕 오히려 슬퍼한다. 이들은 테렌티우스나 플라톤의 평판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찬양거리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결점을 찾기 바쁘다(p125)... 이들은 야만의 시대보다 빛의 시대에 더욱 치명적인 잘못을 없애려고 무척 노력한다. _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3> , p126



고관대작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한다. 단지 가끔 특정인에게 눈길을 보내느라고 말을 끊었을 뿐이다. 이렇게 반 시간 정도 대화한다. 그동안 그는 한 바퀴 돌았고, 마지막으로 자기 서재 쪽을 본다. 이것은 연극이 끝났다는 신호이다. 그를 에워싼 사람들은 공손히 길을 터준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문 앞자리를 차지하는 알 만큼 꾀바르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관대작은 구석에 있는 사람에게 좀 더 다정한 말로써 마지막으로 말을 건넨다. 이로써 그가 거기 온 모든 이에게 골고루 호의를 베푼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것은 진정한 구경거리이다. - P31

독점은 또 다른 독점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막대한 이익을 보장한다. 튀르고는 독점체제를 없앤다고 하였지만, 뿌리까지 자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공직에서 물러나자 곧바로 그것이 다시 생겨났다(p93)... 정치에서 선은 악의 소산이다.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적용되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윤리주의자의 성찰은 나날의 정치와 경험으로 언제나 혼란을 겪는다...더 무거운 세금이 있다. 그것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다. - P94

파리 시민은 항상 속으면서도 이튿날 또 속으리라. 그는 남이 건네주는 그릇된 정보에 속으려고 태어난 사람인가보다. 그는 매번 똑같이 그릇된 정보를 주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가 확실하다고 믿는 사실은 모두 며칠 뒤면 불명확해지지만, 그는 그 점도 깨닫지 못한다. 그가 믿는 진실이란 사실상 약간의 진실을 교묘한 거짓의 현란한 색으로 칠해서 아주 생소한 차원으로 제시한 것일뿐임에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 P224

높으신 분들에 대한 이런 복수(벽보)는 이제는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런 오점도 남기지 않고 평온하게 경력을 마칠 것이다.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역사가 과오를 밝혀낼 것이다. 그들은 생존 시에는 진실을 방종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고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감추어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p321)... 풍자가 가슴 속에 갇혀서 부글부글 끓고 신랄해지는 것보다는, 조각상의 입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말로 불만을 충분히 토로하면 민심이 가라앉아 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 P323

대중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대중은 이해하기도 전에 심판을 내리려고 설치는 대중이 아니다. 모든 견해들이 서로 부딪힌 다음에는 진실을 대변하는 어떤 결론이 내려지는데, 이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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