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3 -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몸젠의 로마사 3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가재정 측면에서 카르타고는 고대 세계 국가들 중 단연 으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이 페니키아 도시는, 희랍 최초 역사가의 증언에 따르면, 모든 희랍 국가를 재정 측면에서 압도했으며 페르시아와 재정수입 측면에서 맞먹었다. 폴뤼비오스는 카르타고를 세계 최고의 부국이라고 불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3>는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로마 앞을 가로막은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다룬다.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BCE 70 ~ 19)의 <아이네이스 Aeneis>에서 서술되는 카르타고 여왕 디도와 로마의 선조 아이네이아스와의 악연처럼, 이들은 서(西)지중해 패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 끝에 결국 카르타고의 복속으로 마무리되는 역사가 <몸젠의 로마사 3>의 배경이다.


 카르타고는 농업 경제보다 자본 경제를 중요시했으며, 당시 로마에서는 자본 경제보다 농업 경제를 우선시했다. 카르타고 농민들은 대개 대농장 및 노예 소유자였는데, 당시 로마에서는 대다수 시민이 자영농이었다. 로마의 인구 대부분이 토지 소유자였고 보수적이었던 반면, 카르타고의 인구 대부분은 무산자였기에 부자들의 돈은 물론 민중 선동가들의 개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8


 몸젠은 본격적으로 카르타고 전쟁(포에니 전쟁)을 다루기 전에 이들 두 열강을 비교한다. 이들은 여러 면에서 거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다. 육군, 자영농 중심의 로마와 해군, 지주 중심의 카르타고. 전력은 비등하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상반된 두 나라의 승패가 갈린 것은 자신의 약점이자 상대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가하는 부분에서였다.


 두 열강의 자원을 비교한 바를 결론적으로 종합하자면,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카르타고와 로마가 대체로 대등했다고 판단한 희랍인의 통찰은 객관적이고 정확했다. 하지만 이에 부연되어야 할 것이 있다. 공수를 위해 인력으로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고자 모든 지식과 재물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는 자국 보병을 확보하지 못한 약점과 자립적 토대가 단단한 동맹 세력을 얻지 못한 약점을 끝내 극복할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36


 로마 인은 카르타고에 맞설 전함을 건조했다. 이것은 놀라운 개가로 이해되어야 한다. 로마의 전함 건조는 민족의 위대한 역사(役事)나 마찬가지였는바 로마 인은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통찰력, 천재적 창의력, 결단과 실행의 추진력으로써 심각한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던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53


 제1차 카르타고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전쟁 마무리 단계에 이르기까지 용병을 대체할 병역제도 개혁을 하지 못한 반면, 로마는 자신의 약점인 해군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한 혁신을 수행하면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로마 역시 전쟁을 통해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했고, 몸젠은 본문에서 로마의 승리가 '단지 적들이 더 많은 실수를 했기 때문'이라고 혹평을 가한다. 그렇다면, 카르타고가 보다 많은 실수를 한 원인은 무엇일까. 몸젠은 그것을 '의지(意志)'에서 찾는다.


 이 전쟁(제1차 카르타고 전쟁)은 다른 무엇일 수 없었는바 그것은, 불만족스러운 이탈리아 정책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국 정책으로 이행하는 정체 변화의 핵심 사건이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일순간 바뀐다. 이제 전장은 아득히 먼 곳으로 확장되는데, 다른 대륙에 있는 미지의 땅과 광대한 바다를 건너서까지 이어졌다. 모든 바다로 적이 쳐들어올 수 있었고, 모든 항구에 적이 출현할 수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83


 새로운 전쟁 체제에서는 군사학의 전문적 식견을 갖춘 군사학교 출신의 야전 사령관이 필요했다. 당연히 시민 대표가 전부 이렇게 될 수 없었다. 함대의 최고 명령권을 보병 최고 명령권의 부속물로 취급해, 최고최선의 시민대표가 야전 사령관뿐만 아니라 제독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은 더욱 뼈아픈 점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86


 개별적으로 상업에 종사하며 무력충돌을 회피했던 페니키아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국가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으로 결집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전쟁을 통해 드러난 자신들의 한계를 변화시키는 혁신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제1차 카르타고 전쟁에서는 변신에 성공한 로마 해군에게 패배하며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제2차 카르타고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칸나에 전투라는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 원정군을 고립시킨 채 방관하고 있었고, 히스파니아으로부터의 보급에만 의지하던 한니발은 점차 쇠약해지다가,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E 235 ~ 183)에 의해 결국 자마에서 굴복하면서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페니키아인이 갖지 못했던 것은 바로 국가 건설의 의지, 자주 독립의 자유를 향한 본능이었다. 시돈과 튀로스를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페니키아 땅은 유프라테스 강과 나일 강 유역을 지배한는 열강들에게 영원한 '황금 사과'였고, 따라서 한번은 아쉬리아에, 다음에는 이집트에 복속되곤 했다(p5)... 페니키아 인은 제 땅에서 열강들의 억압을 조용히 감수한 것은 물론 해외에서는 정복 정책 대신 상업 정책이라는 평화 노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식민지는 무역 거점일 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6


 정리하자면, 몸젠은 <몸젠의 로마사 3>에서 다루는 두 차례의 카르타고 전쟁의 분수령을 '국가 건설의 의지' 유무로 파악한다. 몸젠의 서술대로라면 보다 강한 국가를 희망하는 의지가 있었던 로마의 사회발전정도가 카르타고에 앞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상위단계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욕구가 사회를 단합시켰고, 이로부터 로마가 카르타고보다 유연하게 위기에 대처하면서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는.


 그렇지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로마의 승리는 로마가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고, 단순한 승리에의 열망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라는. 대지주/농장주 중심의 자본중심의 카르타고 경제와 자영농 중심의 로마 경제는 오늘날 대기업 중심의 경제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자본주의제도 성격이 강한 카르타고의 경제 체제를 생각해본다면, 카르타고의 경제가 보다 근대화된 체제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닌, 오히려 사회의 발전 정도가 앞서, 보다 많은 사회문제가 표출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국내파의 한노(Hanno)가 한니발의 원정에 부정적이었던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의 승리는 보다 열악한 체제에서 앞으로 닥칠 사회문제를 미처 예상치 못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단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카르타고의 패배는 자본주의 체제와 양극화 문제로 사회 갈등을 겪은 낡은 체제의 종말로, 로마의 승리는 신생국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카르타고 전쟁의 승리를 로마체제의 우수성, 민족의 우수성에서 찾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실제로 카르타고 전쟁 이후 로마는 마치 멸망한 카르타고의 저주에 걸린 듯 심화된 양극화 문제로 극심한 내전 상화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은 이러한 판단에 근거가 되지 않을까. 


 사실상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무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달성했다. 저돌적인 적이건 신중한 적이건 그 누구도 그의 주된 작전을 전혀 막지 못했다. 그리고 식량을 획득하는데 어려움도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고 게루니움 부근 숙영지에서 그의 군대는 겨울을 큰 어려움 없이 보냈다. 로마를 구한 것은 소심한 노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연맹의 확고한 결속력과 카르타고 사내에 대한 서방인의 민족적 증오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181


 발발 자체는 확실하지만 시기는 불확실한 전쟁을 목전에 둔 약소국의 경우, 똑똑하고 결단력 있고 헌신적인 사람들은 최대한 유리한 시점에 전쟁을 시작하려 할 것이고 정치적 수세를 전략적 공세로 만회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태하고 겁 많은 돈의 노예들, 노회한 자들,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오로지 평화 속에 살다가 죽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것, 그리하여 최후의 결전은 될 수 있는 한 뒤로 미룰 생각뿐인 자들 때문에 사방에서 생기는 온갖 장애물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카르타고에도 주화파와 주전파가 있었다. 물론 두 당파의 대립은 이미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에 존재하던 정치적 대립과 맥을 같이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120


 두 차례에 걸친 카르타고 전쟁 끝에 로마는 이제 서지중해 패권을 장악한다. 그렇지만, 한니발에게 수십 년간 이탈리아 본토를 짓밟힌 로마의 복수는 강화조약에 독소조항을 남기면서, 카르타고는 디도 여왕의 길을 따라 멸망의 길로 떠밀리고 있었고, 이는 4권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아프리카에 대한 로마 정책은 본질적으로 로마의 옹졸하고 근시안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카르타고 국력의 회복을 저지하고 패전국을 로마의 선전포고라는 다모클레스의 칼 아래 묶어두려는 데 있었다. 강화조약은 카르타고 인에게 예전 영토를 그대로 보장하는 한편, 이웃 부족인 마니시사 인에게도 과거 그들이나 그 선조들이 카르타고 영토 내에 가지고 있던 소유권을 보장하도록 규정했는바 이는 사실 분쟁을 막기위해서라기보다 조장하기위해 삽입된 듯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3>, p293

여러 개별 사항을 종합해 보면 카르타고의 국가체제는 시민 공동체 내에 살림이 넉넉한 중간 계층은 전혀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도시 무산자들과, 다른 한편 대상인 및 대규모 농장 소유주와 상류층 중간 관리인들로 양분된 자본가 정체였다. 예속민을 희생물로 삼아 부패한 귀족들이 재산을 축적하며, 예속 공동체에 세금 징수자나 감시자로 중간관리인들을 파견하는 등 부패한 과두정의 명백한 징표들이 카르타고에도 없지 않았다. - P24

카르타고는 승리의 열매를 독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특권을 가진 도시들에게조차 통상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로마는 원칙적으로 피정복 공동체로부터 자치권을 완전히 몰수하지 않았으며, 세금을 무기한으로 징수하지도 않았다. 반면 카르타고는 모든 곳에 총독을 파견해 옛 페니키아 도시 전부에 세금을 부과했으며 피정복 부족들을 사실상 국유노예로 취급했다 - P31

한니발은 로마의 굴복이라는 최종적 목표가 공포심이나 기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만한 도시를 실제적으로 정복함으로써만 성취된다고 믿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은 고향으로부터 불확실하고 불규칙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탈리아에서는 변덕스러운 켈트족에 일단 의존해야 하는 데 반해, 이탈리아 연방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군사 지원에 있어 무한할 정도로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67

귀족정체를 취하고 있던 국가체제의 기본 틀을 비판하는 정치적 선동이 이미 이탈리아의 전쟁 수행을 좌우하고 있었다. 귀족이 외적과 음모를 꾸민다는 비이성적인 비난이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정치적 맹신에 의하여 구원자로 불린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가이우스 바로는 둘 다 ‘신인‘이자 순진한 민중의 친구로, 자신들의 게획 실행에 대한 동의를 시장에 모인 군중의 갈채 하에 얻었다. 그 결과가 트라시메누스 전투와 칸나이 전투였다.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같은 로마 시대의 토지 생산 조직 형태 가운데 자유민적 요소는 후퇴하고 조세 납부 요소만 남아 이것이 게르만적 인적 지배 형태인 문트권權과 아이겐권權에 합해져 그룬트헤어샤프트(장원 영주제)가 만들어졌다.

고대 로마 시대의 라티푼디움은 노예 경작과 자유민 경작, 두 형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분상 자유민kolonatus이 지대 납부를 전제로 토지를 경작하는 프레카리움Precarium 제도의 성격이 더 강했다.

게르만 사회에서 ‘소유’를 뜻하는 아이겐Eigen은 오늘날의 소유 개념과는 좀 다르다. 오늘날 소유는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다. 반면 게르만의 아이겐 개념은 소유를 이용하고 지배하며 외부로부터 방어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지키지 못하면 잃는 권리였다.

14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부 지역 농민은 곡물 생산과 판매에 참여할 재량이 있었다. 그러나 서방으로 수출하는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경지 단위가 큰 땅일수록 위기 대처에 유리했다. 즉 기사령과 대지주는 경쟁력이 있었지만 자유농민은 토지를 처분하고 이들에게 예속되어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젠의 로마사 2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 몸젠의 로마사 2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로운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일을 이루었다... 로마 인들이 민족적 통일을 이미 이때부터 분명한 목표로 삼았다는 것은 모든 병역의무를 가진 이탈리아 동맹들에 라티움이라는 명칭을 거리낌 없이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위대한 정치적 구조물이 보여주는 것은 이를 설계한 이름 없는 건축가의 대단한 정치적 안목이다. 이 덕분에 그렇게 많고 그렇게 다양한 건축요소들은 하나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이후 커다란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한 견고함을 갖추게 되었고, 이러한 위대한 작품에 성공이라는 인장이 찍히게 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8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2 >는 왕정 철폐로부터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까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시기의 로마는 라티움 동맹을 활용하여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 내의 주변 민족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며 신흥 강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항상 승리만 뒤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갈리아(켈트)인에게 카피톨리움 언덕을 제외한 로마 전역을 빼앗기고 눈 앞에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때도 있었으며, 삼니움 전쟁과 뒤이은 에페이로스왕 퓌로스(Pyrros, BCE 319 ~ 272)와의 전쟁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칠 뻔하는 등 오히려 멸망의 위기를 해마다 치뤄진 전쟁 속에서 느껴야 했던 불안의 시기이기도 했다.


 알리아 전투 이후 3일째 되는 날, 승자들은 로마의 성문을 지나 도시로 들어왔다. 승자들이 첫날 했던 것처럼 최선을 다했다면 도시는 물론 로마 자체가 망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짧은 틈이 주어졌는 바, 로마 인들은 요새에 성물을 숨기거나 땅에 파묻고 훨씬 더 중요한 일인 농성을 채비하고 생필품을 준비할 수 있었다(p135)... 켈트족은 철수의 대가로 몸값을 요구했다. 켈트족이 칼을 조롱하듯 던지며 칼의 무게만큼 황금을 바치도록 했다는 이야기는 이런 사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야만족의 무력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내 승리를 팔아버렸고, 팔아버렸기 때문에 결국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36


 로마에 확고한 중심 도시를 둔 라티움 종족은 그들의 지배권을 이곳으로부터 사방으로 천천히 확장했으며, 물론 상대적으로 협소한 지역에서이긴 하지만 그들이 발을 내디딘 곳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겼는바, 부분적으로 로마화된 복속 도시를 건설하는가 하면 정복 지역을 완전히 로마화했다. 그러나 삼니움은 전혀 달랐다. 삼니움에는 구심점이 되어 전체를 이끌만한 공동체가 없었으며, 그렇기에 정복과 관련한 어떤 정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68


 로마군은 불패(不敗)를 자랑하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 대왕의 군의 용맹함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매우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대응을 보여주고, 거듭된 패배에서 오히려 단단해지는 모습을, 상대는 이길수록 약해지면서 결국 로마의 승리로 끝나는 일종의 공식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이 이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켰고, 이어지는 치명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최종 승자로 만들었을까.  


 로마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승리를 완벽하게 이용했다. 삼니움 종족이나 타렌툼 인들, 그밖에 멀리 떨어져 사는 종족들에게 너그러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정복자의 관용이 아니라 영리하고 분명한 계산 때문이었다. 로마의 최우선 목표는 최근 전쟁 기간 동안 캄파니아와 아풀리아에 군사도로와 요새를 설치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기 위한 토대가 마련되었는바, 이제 이를 보강하고 완성함으로써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를 군사적으로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02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로마 체제가 가진 구조적 불안정성때문라 여겨진다. 구시민층을 위한 공공토지정책과 거듭된 전쟁 등은 로마 중산층을 파멸의 길로 내몰고 있었고, 이들의 쌓이는 분노는 계속된 제도 개선의 요구로 이어졌다. 그 결과 12표법과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 등의 과정을 통해 혈통귀족의 기득권의 많은 부분이 소멸되기에 이른다. 일부 역사가들(그리고 소설가들)은 귀족-평민의 극적 화해가 초창기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해석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귀족-평민의 화해와  개선의 성과가 과연 평민(상민)의 삶에 실질적인 개선이 되었다면, 훗날 그라쿠스(Gracchi) 형제의 개혁이 그토록 큰 파장을 가져올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라쿠스 실패 이전에 오히려 개혁의 실패가 있었고, 앙시앵 레짐의 문제는 후대로 넘겨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중간 또는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삼중의 불이익을 당하게 되었는데, 시민이 가지는 공동 사용권을 갖지 못했고 공유지에서 발생하는 사용료가 제대로 징수되지 않음으로써 세금 부담이 가중되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무산자들에게 제도적 탈출구였던 토지 분배의 기회조차 봉쇄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아마도 이때 이미 초기 형태의 거대 농장 경영이 도입되어 의존 농민들이 쫓겨나고 노예들이 토지를 경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든 정치적 착취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었다. 더 나아가 목숨마저 앗아가는 힘겨운 전쟁의 발발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과도한 전쟁세 및 그 외 부역들은 그들의 최후 숨통을 조이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자기 농지에서 쫓겨나 과도한 부채로 인해 사실상 변제할 때까지 채권자의 예속 농민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38


 로마 혈통귀족과 상민의 투쟁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귀족들은 광범위한 특권 가운데 집정관직 한 자리와 호구감찰관직 한 자리만을 사실적으로 유지했던 반면, 호민관과 상민안찰관에서, 집정관과 호구감찰관 각각 한 자리에서 법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법적으로 민회 의결에 준하는 상민회 의결에 참여할 길 또한 법적으로 차단되었다. 왜곡되고 고집스러운 저항이 법적으로 처벌됨으로써 과거의 귀족 특권은 그만큼 귀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로마의 혈통귀족들은 당연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공허한 이름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84


 몸젠의 <로마사>에서는 혈통 귀족에 대항한 상민귀족-상민의 연합 세력이 승리를 거두면서 로마 지배층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훗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갖는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한계처럼, 대중과 유리된 상민귀족들만을 위한 개혁은 기껏해야 불만의 폭발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로마 건국 387년(기원전 367년) 상민귀족과 농민 두 부류의 연합은 귀족을 타도한다는 목표를 완전히 성취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러한 성취가 과연 두 부류에게 동일하게 이로운 것이었는가와 새로운 질서로써 실로 사회 위기가 관리되고 정치적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85


 혈통귀족이 아닌 유복한 상민 집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대중과는 멀어진 채, 원로원 의원들과 대등한 권리를 누려왔고 매우 빈번하게 대중에 반하는 정책을 따르면서 혈통귀족을 편들었다. 리키니우스 법은 귀족 내의 법률적 차별을 해소하여 상민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던 영원불멸의 법적 장벽을, 사실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닌 장애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이러저런 경로로 로마의 지배계급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93


 몸젠은 <로마사>에서 로마 공화정을 인류가 갖는 가장 이상적인 정체(政體)로 극찬한다. 진정한 철인(哲人)들에 의해 주도되는, 형식상 행정기관인 집정관과 형식상 의결기관인 민회를 뛰어넘는 집단지도체제를 빠른 성장의 근원으로 몸젠은 해석하지만, 여기에 토지를 갖지 못한 평민들의 자리는 없었다. 혈통귀족들은 계속된 개혁 요구에 끊임없이 양보하는 듯 했지만, 양보는 형식일 뿐 실질권력은 원로원에 집중되는 모습을 통해 지배권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당대의 평민과 귀족들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새로운 원로원 통치는 기존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옛 공동체에 대한 완전한 변화를 담고 있었음은 명백하다. 시민의 자유로운 활동이 저지되고 경직되었다는 점, 정무관들은 회합의 주재자와 집행위원회로 전락했다는 점, 심의 기능만 있던 원로원이 두 헌법 기관들의 지위를 승계했다는 점, 원로원이 미미한 형태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중앙정부가 되었다는 점 등은 가히 혁명적 권력 찬탈이라 할 수 있다(p111)... 로마 원로원은 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고귀한 존재로서 일관성과 현명함, 통일성과 조국애, 견고한 권력과 전제정의 기운을 공화정의 헌신으로 연결시킬 줄 알았던 '왕들의 회합'이었다. 원로원으로 대표되던 전성기의 로마는 대외적으로 역사상 어떤 나라보다 확고한 위엄을 갖춘 모습을 보여주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12


 아마도 귀족들은 통치 권한은 내줄지언정 이에 따르는 명예, 다시 말해 세습적 명예는 내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상민들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었을 때는 사실상의 공동체 최고 관직을 법적으로는 최고의석에 앉을 권한이 아닌 단순히 지휘봉을 잡는 사령관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이런 명예가 단순히 한 개인에서 끝나게 했을 것이다... 귀족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것은 상민들에게 집정관의 권한은 주되 집정관직 자체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70


  많은 이들이 정치적 문제에는 무관심하더라도, 먹고사는 경제 문제에 민감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평민들의 불만사항은 조금도 해결되지 못했다. 농사지을 토지에 대한 수요는 많지만, 공급은 부족한 상황. 무주택자와 다주택자가 공존하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처럼 당대 로마 원로원이 마주한 문제는 결국 부동산(토지)문제라 하겠다. 한정된 재화인 토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공급확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결국 정복전쟁의 형태로 구현되는 것이 이 시기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전쟁이었다.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로마의 패권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아이퀴 인들과 헤르니키 인들의 정복이 제1차 삼니움 전쟁의 결과였던 것처럼 제2차 삼니움 전쟁의 결과는 삼니움의 정복이었다. 삼니움 종족을 최종적으로 정복했던 지휘관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같은 해(로마 건국 464년 , 기원전 290년)에 삼니움의 짧은 저항을 무너뜨리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정복된 영토의 대부분은 바로 승리자의 소유가 되었고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쿠레스, 레아테, 아미테르눔, 누르시아와 같은 공동체에는 투표권 없는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212


 그렇지만, 로마는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한다. 도시 국가 로마 내부의 귀족-평민의 싸움을 이탈리아 반도 전쟁으로 무마시켰고, 라티움 연맹과의 불화를 이어지는 삼니움 전쟁, 퓌로스 전쟁으로 덮고 지나가지만 로마 체제가 가진 불평등 - 내부적으로는 평민, 외부적으로는 라티움 동맹 - 문제는 만기일만 연장되었을 뿐 전혀 상환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역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마 건국 370년(기원전 384년)부터 라티움 연맹은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의 법에 따르면 로마와 라티움이 건설한 모든 주권 도시는 연맹 축제와 연맹 의회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 공동체로 받아들여졌으며, 이와 반대로 다른 도시에 병합된 모든 도시 및 국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공동체들은 연맹회원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라티움 관습에 따라 30개 공동체의 숫자는 언젠가 한 번 확정된 이래 그대로 유지되었고, 참여 도시들은 의결권을 30개로 유지하여 이보다 더 늘리지도 줄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오는 공동체들과 미미한 역할 혹은 저지른 비행 때문에 자격이 박탈된 공동체들은 의결권을 갖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160


 우리는 <몸젠의 로마사 2>로부터 갈리아인, 삼니움 족과의 전쟁 등으로 위기에 빠져서도 극복해 나가는 로마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싸울수록 강해지는 마치 전쟁기계와도 같은 모습은 당대인들에게는 공포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승리가 로마 체제가 갖는 불안정 속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승리의 대가임을 강조하는 혈통귀족 중심의 원로원 의원들과 영화 <Far and Away>에서 달리는 거리만큼 자신의 땅이 된다는 생각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을 농민들을 부추긴 결과임을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연민의 감정으로 이들의 역사를 볼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로마의 넘볼 수 없는 정치적 우위는 우선 군사제도의 탁월함 때문으로, 그 탁월함은 본질적으로 제3진 예비부대 제도, 근접전과 원거리 공격의 결합, 공격과 방어의 결합이라는 세 가지 커다란 군사적 원칙에 기인한다. 예비부대 제도는 이미 일찌감치 투입되었던 기병대에서도 엿볼 수있는데, 군단을 세 개의 진으로 나누고 노련한 병사들로 구성된 제3진 예비부대를 최후의 결정적 공격을 위해 유보해 둠으로써 완성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 p301 


공동체의 수장은 어떠한 권력이 그에게 부여되는지 불문하고 일정 기간 이상 최고위직에 머물지 못하면 결코 정치적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지배의 필수 조건은 지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신직인 원로원이, 특히 주로 정무관을 모든 측면에서 자문할 권한을 가진 좁은 범위의 구시민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상민들을 포함한 원로원이 1년 임기의 통치자에 대하여 실제로는 역전된 권력관계를 갖게 되었는바, 원로원은 본래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통치자는 원로원의 의장이자 사무총장으로 강등되었다. - P28

사람들은 하나의 기이한 관직을 창설했고, 그 관직의 역할은 하층민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에 필요한 경제 개혁은 추진할 수 없었다. 호민관은 정치적 지혜의 증거가 아니라 부유한 귀족과 지도자 없는 민중의 어정쩡한 타협이었다. 사람들은 호민관이 로마를 독재정으로부터 지켜냈다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독재정으로의 국체 변화 자체가 민중에게 재앙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로마 시민들에게는 독재정이 너무 늦게, 국가의 물리적, 정신적 여력을 모두 소진한 뒤에 왔다는 것이 재앙이었다. - P51

원로원이 매년 직무 영역을 확정하여 곧바로 경합하는 관리들에게 분배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문과 요청을 통해 인사 문제에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가 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원로원이 직무 문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민회 의결에 간여하기도 했는데, 물론 정부가 이런 식의 문제 해결을 택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였다. 더 나아가 예컨대 강화조약 체결과 같은 아주 중요한 사안의 처리는 집정관의 권한에서 배제되었고, 집정관은 다만 원로원에 조회하고 원로원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도록 강제되었다. - P101

희랍인들의 놀랍고 강력한 전쟁 수행력과 사령관의 천재성만 놓고 보면, 그들은 헤라클레이아와 아우스쿨룸의 승전과 같은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이어질 전쟁에 소요될 왕의 자원은 줄어든 반면, 로마 인들은 점차 자신들이 더 강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끼면서 인내하며 최종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 P2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의 역사는 크게 둘로 나뉜다. 우선 이탈리아 어계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가 통일되기까지의 내부 역사가 그 하나이고,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기까지의 역사가 또 다른 하나다. 따라서 우리는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 어계 민족이 정착하는 과정, 희랍인과 에트루리아 인 등 다른 계통 민족이나 선주 문명이 이탈리아 어계의 민족적/정치적 존재를 위협하고 부분적으로 복속시킨 과정, 이탈리아 어계가 다른 계통 민족에 저항하며 그들을 물리치거나 정복한 과정, 마지막으로 같은 이탈리아 어계인 라티움 사람들과 삼니움 사람들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갈등과 라티움 사람들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혹은 로마인들이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과정들을 기술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첫 번째 책의 두 권에서 다루어질 내용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8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은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관점이 로마의 역사가 아닌, 이탈리아 역사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몸젠의 관점에 따르면 이탈리아 반도 정복이라는 사건은 로마제국 팽창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으로 결국 로마 제국은 도시 국가 로마의 팽창이 아닌 이탈리아의 팽창으로 해석된다. 즉, 이탈리아 반도 내 여러 민족 - 이아퓌기아, 에트루리아, 라티움, 움브리아, 마르시, 삼니움 등 - 들의 역량이 로마에 의해 결집되었던 이탈리아 여러 민족들의 융합과 확산으로 몸젠은 로마사를 바라본다. 이는 마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BCE 323)이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제국 원정에 나갔고, 이후 헬레니즘(Hellenism) 문명을 연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체계의 형태를 갖추고 난 이후 로마라는 도시 공동체가 이탈리아 반도를,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게 주장될 수 없다. 흔히 로마 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로마 인들이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긴 했으나, 아무튼 그들도 이들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8


 <몸젠의 로마사 1>에서는 희랍(헬레네, 그리스)문명의 영향을 짙게 받은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문명이 서술된다. 초기 이탈리아인들은 희랍 문명의 틀을 받아들이되, 그 내용은 자신들의 고유의 것으로 채우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성을 만들어갔다.이러한 노력이 이탈리아 내에 고대 희랍 식민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이들의 독창성은 특히 종교에서 잘 드러난다. 신들의 이름과 역할에 의미가 부여된 고대 희랍 신들과는 달리 고대 로마의 신들은 생활밀착형이며 구체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희랍 종교와 로마 종교의 본질은 추상화와 의인화다. 희랍의 신도 자연현상이나 추상개념에서 나왔다... 하지만 종교의 기반이 되는 추상화는 점점 더 넓게 개념을 확장하려 하고 점점 더 깊이 본질에 이르려고 할 때, 반대로 놀라울 정도로 낮은 수준의 직관과 이해에 머물고 있었다. 희랍의 경우 모든 중요한 동기가 일련의 인격신들로, 신화 세계와 이념 세계로 급속하게 확장되었다. 반면 로마의 경우 근본 생각은 본래적 모습 그대로 경직되어버렸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236


 제한된 추상화는 로마 종교의 실제적/실용적 경향과 일치한다. 농경과 목축과 해상 교역을 통한 재산 증대와 번영은 로마 인이 신들에게 간구했던 것인데, 그렇게 신의의 신(deus fidius), 행운의 여신(fors fortuna), 교역의 신(mercurius) 등이 모두 일상생활로부터 생겨나, 매우 일찍부터 로마 인들에 의해 여기저기서 숭배되었다. 엄격한 경제관과 상인적 기질이 로마의 본질에 닿아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이를 신적 형상으로 매우 심오한 경지까지 발전시켰던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238


 고대 희랍신은 여러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아폴론(Apollon)의 예술, 궁술, 의술, 음악, 예언 등의 신이며 다른 주신(主神)도 여러 주관 분야가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신 : 주관 분야 = 1 : 多' 대응은 희랍 철학에서 보여주는 유비와 추상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물론, 로마시대에서도 희랍에서 건너온 신들과 그들의 주관 분야는 거의 그대로 수용되지만, 로마 전래의 신들은 대체로 '1 :1대응'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제한된 추상성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희랍 민족의 특징은 개체를 위해 전체를, 시민을 위해 공동체를, 공동체를 위해 민족을 희생시키는 것이며, 삶의 목표는 미(美)와 선(善), 그리고 종종 학문적 여가에 있다는 것이다. 각 도시국가의 지역 분권주의를 근본적으로 강화하고, 이후 소위 자치 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정치발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반면에 로마 민족의 특성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도록 하고, 시민이 통치자를 섬기도록 하고, 인간이 신들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유용성을 추구하고 존경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한시도 쉬지 않고 짧은 인생의 매 순간을 노동으로 채우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33


 이러한 로마문명의 독창성은 로마 사회의 기본인 '가부장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가정(노예를 포함한)의 정점인 가장과 씨족, 씨족의 원로들이 모여 원로원을 구성하고, 이들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시스템 체계는 개인과 개인이 연결되는 희랍사회 구조와는 분명 다른 특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보다 엄격하고 명확한 질서가 요구되었기에 그들에게 허용된 것은 제한된 추상성과 계약이었을 것이다.


 법률적으로 가족은 무조건적으로 가부장(pater familias)의 절대적 의지에 따라 통제되고 조정되었다. 가부장을 거역하고서는 어떤 것도 정당할 수 없었으며, 가족에 속한 모든 것은 황소와 노예는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도 그러했다. 여인이 남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그의 부인이 되는 것처럼, 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을 키우느냐 마느냐는 가부장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었다. 이런 규율은 가족에 대한 냉정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가족을 꾸리고 자식을 두는 것이 도덕적 필연이며 시민의 의무라는 확신에 따른 것으로, 이는 로마 민족의 의식 속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85


 가부장권은 본질적으로 무제약적이며 세상 누구도 이를 제한할 수 없는, 가부장이 살아 있는 동안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 권리였다. 희랍 법에서는 물론 독일 법에서도 장성하여 실제로 독립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법률적으로 독립된 존재다. 하지만 로마의 가부장권은 가부장이 바뀌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멸될 수 없었다... 로마 인들이 가부장 및 남편의 권한을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이에 따라 가부장 및 남편의 권한은 재산권으로 변모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87


 씨족들과 그 가족들은 그대로 국가를 형성하며, 가족과 씨족의 영역은 국가 안에서 그대로 유지된다. 다만 국가에 대한 개인의 지위만이 변동되어 개인은 가족 내에서는 가부장 아래에 있지만, 국가적 의무와 권리에서는 가부장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국가는 가족과 마찬가지로 내부인과 의탁인으로, 다시 말해 시민과 영주민으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91


 개인이 아닌 가정을 사회의 출발점으로 하는 로마 사회의 특성은 구성원들간의 안정적인 결합이 전제되어야 했을 것이며, 그런 로마의 문화가 희랍문화와 다른 특성을  갖게 되었음을 <몸젠의 로마사 1>에서는 잘 보여준다. 어쩌면 이러한 로마 사회의 특성이 있었기에 유일신교인 기독교가 훗날 제국의 종교로 보다 빠르게 공인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와 함께, 가부장의 권한이 재산권으로 확장되고, 재산권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은 로마 문명이 남긴 그림자라 생각된다.


 <몸젠의 로마사>에서는 다루어지지는 않지만, 서술된 로마 사회와 희랍 사회의 차이는 전투 대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같은 신분인 시민들이 서로 밀집해서 대열을 이루는 팔랑크스(Phalanx)가 희랍 보병의 기본 대형이라면, 로마군은 재산과 신분에 따라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등으로 역할이 구분된다. 전자가 동등한 원자들의 결합이라면, 후자는 핵(核)을 중심으로 한 세포의 구조를 가지는데 이 역시 두 문명의 차이를 나타낸다.


 궁극적 법률 토대는 언제나 국가다. 자유는 다만 가장 넓은 의미에서 시민권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모든 사유재산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공동체가 각 개인에게 양도한 것이다. 계약은 오로지 공동체가 그 대리자를 통해 계약에 증인으로 참석할 때만 유효하다. 유언은 오로지 공동체가 이를 승인할 때만 유효하다. 공법의 영역과 사법의 영역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나뉘어 있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226


 <몸젠의 로마사 1>에서는 이처럼 로마제국의 실질인 이탈리아에 대해 상세히 서술된다. 본문에서 '로마'라는 도시 대신 '이탈리아'라는 국가가 보이는 것은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제국을 저자인 몸젠이 의식한 것 때문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몸젠의 로마사>를 신생제국 독일 제2제국의 <용비어천가>로 읽을 것까지는 없겠지만, 이는 분명 다른 로마사와 다른 지점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시리즈를 통해 차차 확인해보도록 하자...

 

 라티움 젊은이들의 신체 단련은 거칠고 강한 것으로, 희랍 체육교육이 목표로 삼고 있는 신체의 아름다운 발달이라는 생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희랍의 공적인 경기는 이탈리아에서 제도들은 아니지만 본질은 변화되었다. 경기는 시민들의 시합이었고 분명 로마에서도 처음에는 그러했지만, 이후 전문적인 기수, 전문 권투 선수의 시합이 되었다. 경기 출전자는 곧 공적인 관람객으로 변하게 되었고, 진정한 희랍의 상징인 승리자의 화관은 이후 라티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 p326

희랍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구체적/구상적인 반면, 로마 인들에게는 순수하고 투명한 추상성만이 필요했다. 희랍인들이 태고의 신화를 대부분 버린 것은 형상에 개념이 너무도 분명히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 인들이 이를 거의 남겨두지 않은 것은 종교적 개념이 우의적 표상으로 인해 희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도와 이란이 동일한 유산으로부터 전자는 형상으로 가득한 종교 서사시를, 후자는 젠드아베스타라는 추상성을 발전시킨 것처럼, 희랍 신화는 인물 중심이고 로마 신화는 개념 중심이며, 전자에서는 자유가, 후자에서는 필연성이 주도적이다. - P39

이런 최고 연장자들의 회의는 씨족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통치권이 법적으로 전체 씨족의 최고 연장자들에게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미 로마 인들의 가족 단위에서 뚜렷이 각인된 일인 지배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국가의 통치권 또한 항상 원로원들 중 한 명, 다시 말해 왕에 의해 행사되었던 것이다. 원로원의 모든 구성원은 그 자격에서는 공동체의 왕과 대등했다. - P110

초기에는 토지와 가옥이 아닌 ‘노예와 가축‘(familia pecuniaque)만이 소유권의 대상이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 인의 경작지는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개간되다가 나중에야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강자의 권리가 소유권의 법적 근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소유권은 공동체가 개별 시민에게 독점적 소유와 용익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여겼기에 재산 소유는 시민에게만, 그리고 공동체 시민과 동일하다고 간주된 사람에게만 가능했다. 모든 재산은 자유롭게 양도되었다. 부동산에도 소유권이 인정된 이래로 로마법에서는 동산과 부동산의 실제적 구별이 없었다. - P215

항상 토지 소유자 전체가 공동체의 핵심이 될 수 있도록 정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세르비우스의 개혁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농지의 상당 부분이 비(非)시민권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으며, 그 결과 시민의 의무와 권리는 더 이상 토지 소유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이런 불일치와 이에 따른 국가 위기를 일회적이 아니라 영구히 제거하기 위해 국가 체제를 개혁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치적 신분을 무시한 채 모든 토지 소유자가 수용되었으며,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는 국방의 의무가 동일하게 부과되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토지 소유자 일반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법이 만들어졌다 - P261

희랍에서는 음악 예술이 점차 개인과 희랍 전체가 공유하는 공동 자산으로 자리 잡으며 이로부터 보편적 교양으로 성장했다. 반면 라티움에서 음악 예술은 점차 보편적 민족의식에서 멀어졌으며, 이후 전반적으로 저급한 잔재주로 취급되어 젊은이들이 익혀야 하는 보편적 민족 교양에 들지 못했다. - P32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3-01-06 2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1-07 10:4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밤사이 눈/비가 내려 미끄러운 주말이 된 것 같아요. 서니데이님, 안전하고 여유로운 2023년 첫 주말 보내세요! ^^:)
 

시가는 고통의 언어이며, 그 표현 방식은 선율이다. - P3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