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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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여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추구하는 세 가지 대상 곧 토지, 돈, 출세가 동시에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0/63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2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6~1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BCE 389 ~ 293에 해당하는 이 시기 로마 역사는 일정한 공식 안에서 움직인다.


 집정관 선출을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분열 상태, 이러한 분열을 틈타 침략하는 외적들 또는 원로원의 전쟁 결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독재관 선출과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이라는 권력 공백기, 전쟁 이후 내전에 준하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 <리비우스 로마사 2>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시기는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로 급격하게 팽창하면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로마 공화정의 해묵은 과제가 되버렸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민과 귀족들은 무엇 때문에 대립했을까?


 처음에 도시는 그것을 일으켜 세운 똑같은 기둥 되는 인물에 의존했다. 즉 도시의 지도자급 시민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한 해가 끝나는 때에 독재관 직에서 사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관직에 있었던 집정관급 정무관들은 다음 해의 선거를 주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리하여 국가는 인테르레그눔(집정관 궐위 기간) 체제로 돌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634


 평민들의 요구사항은 BCE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eges Liciniae Sextiae)에 잘 표현된다. 법안의 내용인 부채 상환과 공유지 면적 제한, 집정관 선출 등에 대한 평민들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귀족들은 평민들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안을 잘 지키지 않는다. 또한, 실제 전장에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연이어 패전하면서 귀족들에게 리키니우스 법안을 따르지 않을 좋은 명분을 얻었고, 내분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대해 매번 로마는  독재관 선출이라는 임기응변을 통해 극복한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3가지 법안을 주장하고 나섰다. 세 법안 모두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고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법안은 부채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었는데, 빌려온 원금에서 지금껏 지불한 이자의 액수를 공제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3년에 걸쳐 3회에 균등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법안은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부과하여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번째 법안은 집정관급 정무관 제도를 철폐하고 예전처럼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되 그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법안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지 않는 한 성취하기 어려웠다. 이것을 가리켜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이라고 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89/634


 귀족들은 그 참담한 실패에 경악하기보다는 평민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불행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분노했고, 온 도시에는 그들의 성난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봐라, 평민들 중에서 집정관을 뽑아서,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는 자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더니 이런 참담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았느냐! 평민들은 민회의 투표로 귀족들을 관직에서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정당하지 못한 법률은 영원불멸의 신들을 설득하지는 못하지 않았느냐. 신들은 그들의 신성과 조점권에 대한 모욕을 그런 식으로 복수한 것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법률에 의해 이런 것들을 관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자가 감히 조점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로마 군과 그 사령관이 몰살당한 것이다. 앞으로는 귀족 가문의 권리를 짓밟는 선거를 절대로 개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29/634


 로마 지도부는 1세기 동안 분열을 위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전쟁을 택한다. 그들은 때마침(?) 3차례에 걸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 BCE 343 ~ 290)과 라티움 전쟁(Latin Wars, BCE 340 ~ 338)을 통해 내부의 불만을 일단 잠재우고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평민과 귀족들로 갈라져 싸우던 이들은, 로마군(軍)이라는 하나의 조직아래에서는 '지휘관-병사'로 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수많은 역사가와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진정한 로마인과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우선시 한 로마인 정신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라고 하지만, 과연 이 시대가 진정으로 위대한 로마정신이 발현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까?


 데키우스는 계속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이 무거운 짐으로 고생할 것이 우려되어 그들은 불러 모아 놓고 이런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고 이 정도의 전리품으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의 기대가 여러분의 용기에 걸맞은 그런 높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니움 족의 모든 도시들과 그 안에 내버려진 모든 물건들이 여러분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힘든 일은 별로 없고 더 많은 전리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전리품은 매각되었고 병사들은 어서 행군하자고 사령관을 재촉하면서 로물레아로 갔다. 그곳에서도 공성 작업이나 공성기 동원은 필요가 없었다. 로마 군이 일단 성벽에 접근하자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486/634


 삼니움 전쟁에서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설은 로마 공화국의 위기탈출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귀족(그리고 원로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체제의 약한 부분을 개혁하는 대신 거대한 외부의 적(敵)을 통해 현재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정책을 선택한다. 거대한 적은 막대한 전리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여기에 평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쟁에 뛰어들고, 귀족들은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평민들에게 배분하면서 그들의 양(量)적인 불만을 채우고, 적들은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로마의 몸집을 불리는 정책의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의 병사 자격으로 복무합니다. 우리는 유배를 떠나온 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투 신호를 내린다면 우리는 남자답게 또 로마인답게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가 필요 없다면 우리는 군 진영이 아니라 로마로 돌아가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44/634 


 이러한 로마 귀족들의 정책에 대해 평민들은 종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삼니움과 라티움 주변 민족들 또한 동맹의 대가를 적절하게 받는 편으로 절충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전쟁을 통한 막대한 전리품이 보장된다면, 원로원 중심의 정체(政體)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긍하는 로마의 평민들과 라티움 동맹국들의 행동에서 과연 로마의 정신이라 할 부분이 있는가. 여기에 위대한 로마인의 정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대신 계산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들만이 있을 뿐이라 생각된다. 그들이 로마 공화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부분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쟁은 자신의 몫을 조금 더 받기 위한 쟁의 행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그들은 로마 공화정의 이름 아래 정복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부르투스가 지키려 했던 공화정의 가치란, 제정이라는 '독점(獨占)'에 반대하는 '과점(寡占)'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과점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회피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로마인의 정신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된다...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내 문제를 덮고 손잡은 평민-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이어지는 시기에서 이들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이라는 더 강대한 위협에 대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력으로도 라티움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으나, 그래도 로마와의 지난 관계를 생각하여 이런 양보안을 내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양국에 똑같이 공정한 평화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영원불멸한 신들은 우리가 힘에서 로마와 똑같은 나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집정관 두 명 중 한 사람은 로마에서 뽑고, 다른 한 사람은 라티움에서 뽑아야 합니다. 원로원 의원 구성도 두 민족에게서 동수로 선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민족 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권위의 자리가 마련되고 모든 것이 명실상부해집니다. 한쪽이 필요한 양보를 하면 양쪽이 모두 혜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를 우리의 어머니 도시로 만들고 우리 모두 로마인이 됩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232/634


그해(기원전 352년) 말에,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 때문에 집정관 선거가 열리지 못했다. 호민관들은 선거가 리키니우스 법에 의해 거행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독재관은 집정관 자리를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개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정부 제도에서 아예 제거해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따라서 선거는 독재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인테르레그눔 체제가 들어섰다. 인테르렉스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열한 번째 인테르렉스까지 들어섰다.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62/634

조약이나 동맹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에 부끄럽게 여겼던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려 합니다. 로마는 ‘동맹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의 군대를 로마의 군대에 추가하여 그들의 병력을 두 배로 늘리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가 로마의 허가 없이는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독립된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공정이고 동맹입니까? 왜 모든 것이 이처럼 공정하지 못합니까? 왜 라틴 인 출신의 집정관은 없는 겁니까? 힘을 공유할 수 있어야 권위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는 동맹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 반란의 진압에 조력해줄 동맹을 구하고 또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시의 인구를 계속 늘려나갔다. 그 결과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을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동맹국들을 만들었고, 그런 동맹국들은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와 유사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제국의 권좌를 틀어쥐고 군사적 지휘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동맹국들이 부지불식간에 로마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작품 해설 , p60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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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 경제사 - 서양 문명의 변경에서 떠오르는 경제의 심장으로
양동휴.김영완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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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시대의 라티푼디움은 노예 경작과 자유민 경작, 두 형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분상 자유민kolonatus이 지대 납부를 전제로 토지를 경작하는 프레카리움 Precarium 제도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 같은 로마 시대의 토지 생산 조직 형태 가운데 자유민적 요소는 후퇴하고 조세 납부 요소만 남아 이것이 게르만적 인적 지배 형태인 문트권權과 아이겐권權에 합해져 그룬트헤어샤프트(장원 영주제)가 만들어졌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4/228 


[지도] 라인강과 엘베강 (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Map-showing-the-German-stretches-of-the-international-waterways-the-Rhine-Danube-and_fig1_321840509)


 <중부 유럽 경제사>에서는 고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라인강 서안 지역과는 다른 엘베강 동쪽의 게르만-슬라브 경제 체제를 보여준다. 라인강 서안에서는 군단병이 정착하고 퇴역 후 인근에서 자리를 잡는 형태인 프레카리움으로부터 시작하여 게르만 전통이 결합된 봉건제(feudalism)/장원제(莊園制)가 발달했다면, 엘베강 동쪽에서는 농노(農奴)에 의해 운영되는 농장제(農莊制)로 발전했다는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독일 농민이 이주하고 이들이 이민족과 동화됨으로써 엘베 강 동쪽 지역에는 서유럽의 그룬트헤어샤프트 지역과는 다른 게르만-슬라브적 요소의 독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부 지역 농민은 곡물 생산과 판매에 참여할 재량이 있었다. 그러나 서방으로 수출하는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경지 단위가 큰 땅일수록 위기 대처에 유리했다. 즉 기사령과 대지주는 경쟁력이 있었지만 자유농민은 토지를 처분하고 이들에게 예속되어야 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9/228


 16세기부터 농업 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봉건 영주들은 주인 없는 땅을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소유 토지를 확대했다. 영주가 농민이 보유한 토지를 회수하거나 합병하는 일도 일어났다(16세기 후반). 생산과정 특화와 집약화가 발생하고 농업이 발생했다... 기사 영주들이 농업 기업가(구츠헤어)로 성장하면서 그룬트헤어샤프트와는 다른 형태의 구츠헤어샤프트Gutssherrschaft(농장 영주제)가 성립되었다. 이 영주들의 후예가 바로 프로이센의 융커 계층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0/228


 서유럽에서는 이후 '상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유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이들이 자유를 얻는 대가로 국왕과 결탁하면서,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계층이 몰락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는 반면, 동유럽에서는 농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이들의 세력이 강대했던 결과로 서유럽과 같은 상업혁명 -> 자본축적 ->산업혁명의 경로를 밟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양상은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대규모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주원인이 되었으나, 중앙집권화로 나가는 과정 - 지방권력인 토지귀족과 국가권력인 관료제 -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동부 독일(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 구츠헤어샤프트가 잔존했다. 대토지 경영은 19세기 농노해방 이후에도 융커 체제로 유지된다. 16~18세기에 독일 지역의 농업 제도는 크게 두 형태였다. 남서 독일에서는 일부 남은 그룬트헤어샤프트를 기반으로 경영 형태가 변화했다. 농민 보유지는 장원 영주가 정하는 일정한 조건하에 분할 또는 상속이 가능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1/228


 농장 영주제Gutsherrschaft는 16세기 이후 엘베강 동쪽 지방에서 행해지던 후기 봉건제적인 농업 제도의 유형이다. 농장 영주제 지역에서는 수출용 곡물 생산을 위해 노동 부역(봉건 지대)과 인신적 종속이 강화되고(재판 농노제), 영주(구츠헤어, 즉 토지 귀족)는 농노에 대한 재판권을 보유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76/228


  독일은 융커(Junker) 세력을 중앙권력으로 포섭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관료제를 발전시켜나가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토지 귀족의 세력을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이 반목하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중앙집권에 실패하면서, 소(小)독일주의를 주창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서 19세기의 민족주의 열풍 아래 여러 국가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후 신생 독립국들이 난립하게 되는 동유럽 슬라브 지역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산업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되었음이 본문에서 간략하게 서술된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58/228 


 정리하자면, 중부-동유럽의 '농장영주제'는 엘베강 동부 지역의 경제적 공통점으로 서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받은 프로이센에서 융커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의 도입으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편입한 반면, 상대적으로 토지귀족의 세력이 강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국가들은 산업화에 실패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공산화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 <중부 유럽 경제사>의 전체 구조다.


 <중부 유럽 경제사>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중부 지역의 경제사를 기술한 책이지만,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는 독일 역사에, 나머지의 절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사에 할당되며 체코, 폴란드, 러시아의 역사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된 책이다. 독일은 중부 유럽에 속하지만, 사실상 서유럽 경제의 중심임을 감안한다면 중부 유럽사의 분량은 매우 부족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월러스틴(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2019)이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말한 서유럽의 주변부로서 동유럽의 경제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요약한 내용으로 큰 얼개만 정리하는 것으로 독서의 의의를 찾는다...


 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75/228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89/228

한자동맹 상인들은 부채, 계약 사항 등을 기재한 사업 장부를 공개하여 동맹의 보증을 확보하는 영업 기법도 개발했다(13세기 말). 이 제도는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인 자본, 위험 감수, 공격적인 사업 추진을 촉진하면서 북유럽 일대에서 신용과 상업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바 ‘상업혁명‘이자 중세 말 유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들이 창출한 엄청난 부 덕분에 징세도 가능해졌다. 이를 기반으로 이제 왕들은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에 의존하는 간접적인 왕국 지배가 아니라, 관료제를 창출하여 점차 근대적인 정치권력을 창출해갈 참이었다.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29/228

명확히 12세기에 서유럽의 변형이 시작되었다. 인간과 토지 관계에만 의존해오던 사회가 상업과 제조업이 농업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로 변해간 것이다. 농산물은 자급자족을 넘어 교환의 대상과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경제활동을 억제하던 장원제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5/228

보헤미아 지역에서 토지 재산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영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하급 귀족은 거의 사라졌다. 농노의 노동 부역 부담은 늘었다. 30년전쟁 이전에 보헤미아에서는 영주도 농노와 함께 조세를 부담했었다. 그런데 1648년 이후에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면세권을 획득했다. 모든 조세 부담이 농노에게 전가되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9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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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30 2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댓글 달기엔 너무 세부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읽고만 갑니다.
항상 겨울호랑이님 글은 배울게 많네요

겨울호랑이 2022-12-30 23:45   좋아요 2 | URL
항상 그레이스님의 좋은 말씀과 격려로 지난 한 해 부족한 글이나마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레이스님의 글을 통해 많이 배워가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내년 한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차 대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은 이미 7장에서 다 얘기했다. 하지만 다민족국가 오스만제국이 결국 내셔널리즘 때문에 유럽 지역에서 밀려난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붕괴될 것을 우려하여 자포자기 심정에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전쟁 발발을 자초한 면이 있다는 지적은 여기에서 다시 해도 좋으리라.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혁 지향적인 국가였다. 1956년 사건 이후 모스크바의 간섭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노력과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카다르의 충성심을 신뢰하며 헝가리 국내 개혁을 용인했다. 카다르 정권은 시장 지향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소련식 계획경제를 폐지했다.

슬라브 농업은 쟁기와 윤작을 도입하여 생산성이 향상되었다(500년 무렵). 이에 따라 제조업(특히 은세공)이 가능해지고 더 부유한 인근 지역과 교역하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무슬림 칼리프들과의 노예무역이 슬라브족이 쌓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8세기, 중부 유럽에서 아랍 은화가 많이 발굴됨).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동유럽의 곡물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곡물 무역이 시작되고(13세기 중엽), 독일의 팽창 등으로 인해 동유럽은 서유럽 문명에 더욱 긴밀히 연계되었다.

13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란 인구 정체, 기후변화, 흉작, 대기근, 흑사병 창궐 등을 말한다. 동유럽은 자유로운 상업도시 같은 위기 충격 완화 장치가 별로 없어 서유럽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14세기). 자치권이 확보된 자유도시도 없고, 별로 잘 발달하지 못했지만 명목상의 도시 생활도 거의 사라졌다.

흔히 나치가 반유대주의의 온상인 줄 알지만, 사실 반유대주의는 그 이전에 이미 중, 동부 유럽 농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녔다. 이들에게 유대인은 자본가, 교육받은 전문직의 상징이었다.

크림전쟁(1854~1856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러시아제국 내에서도 근대화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재판 절차의 자유화, 젬스트보(농촌 귀족의 자치 기구)와 도시 자치회, 개병제 등이 도입되었다. 국가가 군대를 재조직하려면 농민을 귀족이 아닌 국가가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1861년)을 선포하여 모든 농노는 인신적으로 해방되었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1890년쯤 정점을 이루며 직물업, 주로 군사력과 관련된 중공업, 운송 부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에는 예로부터 공업화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농업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분분하기도 했으나, 재무장관 비테Witte(재임 1892~1903년)는 공업화 수준이 낮으면 결국 국가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의 기술,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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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5 - 혁명 :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 몸젠의 로마사 5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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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와 희랍, 아시아이 국가들은 공식적인 독립과 사실적인 종속의 중간이라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쉬리아 등과 벌인 전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로마 패권의 영역 안으로 귀속되었다. 독립국가라면 그래야만 할 때 전쟁의 수고를 부담할 것이고 독립 유지의 이런 대가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또 독립을 잃은 국가라면 상실의 보상으로 적어도 주변국들로부터의 안전을 보호국에게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피호국가들은 독립도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8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5>에서 우리는 제국(帝國)의 길로 가는 로마를 확인할 수 있다. 카르타고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를 겨우 넘겼던 이들은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일까.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등 한때 번영했던 도시와 국가들은 모두 잿더미로 만들면서, 지중해연안을 로마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로마시대가 새롭게 열린다.


 원로원은 사령관에게 카르타고 도시와 도시 외곽의 마갈리아를 철저히 파괴할 것과, 마지막까지 카르타고에 협력한 모든 지역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땅을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이는 이후로 법적 형태의 도시가 존립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바, 카르타고 땅을 영원히 황무지로 만들어 주거와 경작이 일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17일 동안 카르타고는 불탔고 폐허를 남겼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55


 희랍의 첫째가는 무역도시인 번영의 코린토스를 아무 동기 없이 파괴한 것은 로마 연보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원로원의 확고한 명령에 따라 코린토스 시민들은 구금되었고 목숨은 부지했지만 노예로 팔려갔다. 도시 성벽과 성채는 파괴되었다. 장기간 도시에 주둔할 의사가 없었을 때 불가피한 일이지만,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황폐한 폐허 위에 모든 재건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일반적 저주가 내려졌다. 도시의 일부는 시퀴온이 코린토스를 대신하여 이스트미아 축제의 비용을 떠맡는다는 조건으로 시퀴온의 영토가 되었고, 도시의 대부분은 로마 공동체의 소유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한때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가득했던 희랍 땅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보물, '희랍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74


 로마에게 패권을 안겨준 카르타고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이었지만, 두 전쟁의 성격은 달랐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이 전장이었던 카르타고 전쟁과는 달리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 아시아 일대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군은 빠르게 명성을 잃으며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상층부인 원로원의 폐쇄성과 하층부 자영농의 몰락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체제 개혁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안은 이들 피호 국가들을 로마의 속주로 변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방안은, 로마의 속주 정책을 크게 나누어 속주 총독은 오로지 군사 영역을 관장하고 주요 행정과 재판은 속주 공동체에 맡기거나 맡겨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서 과거 정치적 독립을 누리던 것들 가운데 계속해저 존립하는 것은 공동체 자유의 형식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런 행정 개혁의 필연성을 모를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31


 만약 통치를 현안의 처리를 넘어서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로마에 통치는 전무했다. 통치집단의 유일한 주요 이념은 오로지 그들 특권의 유지, 가능하다면 확대에 있었다. 국가는 최고 관직에 최선의 올바른 인물을 천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통치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최고 국가관직의 출마 권리를 태생적으로 가졌다. 이 권리가 내부자들의 부당한 경쟁이나 국외자들의 합류로 결코 위축되지 않아야 했기에, 이들 당파는 집정관의 재선을 제한하거나 '신인'의 배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롤 삼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04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이 유명한 그라쿠스(Gracchus) 형제들이다.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해 호민관에 재직하며 개혁을 주도하다가 몰락한 애석한 인물들.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지만, 몸젠은 이들에 대해 다소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토지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자유민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고용했는데,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군복무를 하지 않기 때무니었다. 그리하여 자유민 무산계급은 노예와 비슷한 수준의 가난으로 내몰렸다.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품삯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렴한 시킬리아 노예 곡물을 들여와 수도 로마의 시장에서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을 밀어냈고,  결국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은 이탈리아반도 전체에서 가격 하락을 겪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21


 몸젠은 그라쿠스의 개혁을 '토지 개혁이라는 이슈를 통한 대중의 지지로 호민관 지위를 활용한 독재정'의 시도로 바라본다. 농지개혁법 시행을 위해 호민관 재선을 추진하다가 죽음을 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E 163 ~ 132)와 형이 추진한 정책과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현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Sempronius Gracchus, BCE 154 ~ 121) 모두 폐쇄적 엘리트 통치를 대신한 새로운 체제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개혁을 자신들의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몸젠의 평가는 신선하면서도 다소 박하게 느껴진다.


 그락쿠스 혁명의 본질적 오류는 한 가지, 다시 말해 당시 민회의 성격을 지나치게 빈번히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로마는 함께 모여서 함께 토론할 수 있던 도시국가 공동체였지만, 현재의 로마는 그 구성원을 하나의 민회에 모으고 그 민회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할 경우 통탄스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에 도달하게 될 거대 국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1


 민회라는 녹슨 장치를 선거와 입법에 활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중, 그러니까 민회, 사실적으로 대중 집회가 정부를 공격하도록 허용되고 이런 공격의 방어장치를 원로원은 빼앗겼을 때, 이런 소위 시민체가 자신을 위해 모든 부속물을 포함한 농지를 국고에서 빼내 처결하게 되었을 때, 무산자들에 대한 관계와 영향력을 얻은 어떤 자가 골목길을 몇 시간 지배하게 허락되어, 그의 계획에 주권적 인민의 의지라는 법적 직인을 찍을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민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는 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에 이르렀다. 때문에 앞선 시대에 카토와 그의 동지들은 이런 문제를 결코 민회에 회부하지 않았고 오로지 원로원에서만 다루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3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선량한 사람이 믿었던 것과 달리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민중적 토대 위에 재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철폐하고, 지속적인 재선의 종신 관직으로, 형식적 주권체인 민회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관직으로, 그러니까 무제한적 권한의 종신 호민관직으로 공화정 대신 독재정을 이룩하고자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73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왕 유구르타(Jugurtha, BCE 160 ~ 104) 전쟁은 공화정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원로원에 의한 통치가 결코 철인(哲人)통치가 아닌 수많은 로비의 결과물임이 드러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병농일치(兵農一致) 체제가 무너지면서 전문 전투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개혁을 통한 과저 체제에 대한 연착륙이 불가능해진 이후 등장한 두 인물,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은 다음 시대를 이끌게 된다.


 아프리카 피호국의 순치보다 중요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의, 혹은 유구르타 반란의 정치적 결과들이다. 물론 흔히 너무 크게 부각되곤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제 공공연해졌고 소위 최종 판결된 바, 로마의 모든 통치귀족들에게 평화조약은 물론 거부권, 주둔 요새, 병사들의 목숨까지, 모든 것이 매매 가능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7


 일시적인 위기 동안 유일하게 등장한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군사적 능력자들과 군사적 권력이 정치혁명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마리우스의 등장이 직접적으로 과두정을 몰아내고 독재정을 세우려는 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혹은 여러 유사한 사례들처럼 그저 권력의 특권을 향한 개별적 공격이었으며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지나가버린 사건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독재정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독재정의 수장은 가이우스 그락쿠스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9


 공화정 국제는 무엇보다 시민이 병사요, 병사가 시민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 군사제도의 혁명과 함께 사라졌고, 이제 병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군사훈련 교본이 직업적 검투사 교본에서 빌려온 군사훈련과 함께 도입되었다. 전쟁 복무가 점차 전쟁 직업으로 바뀌었다.(p297)... 만약 좀 더 중요한 문제에서 군대와 사령관의 이해관계가 반(反)국헌적 욕망에서 서로 일치할 경우, 어떤 법률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상비군이 생겨났고, 병사 신분이, 경호부대가 만들어졌다. 사회제도에서처럼 이제 군사제도에서도 미래의 독재정을 위한 기둥들이 이미 세워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98


 개인적으로 <몸젠의 로마사 5>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라쿠스 형제 개혁에 대한 몸젠의 평가다. 실패한 개혁가로서 후대에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이들이지만, 몸젠은 그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로 규정한다. 물론 그들의 개혁 조치가 후대의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E 100 ~ 44)에 의해 상당부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그들의 개혁조치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로마의 제정이 더 일찍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한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패자로 남겨진 그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냉혹한 것은 아닐까. 못다 이룬 첫사랑이 생각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좌절시킨 정치경험 안에서 그라쿠스와 같은 이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허용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호 국가들은 우선 모든 국가와 전쟁을 할 능력이 안 되는 국가는 누구와도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피호 국가의 소유관계와 권력관계가 사실상 로마의 보장으로 존립하기 때문에 모든 갈등에 있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웃 국가들과 호의적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판결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 P29

국가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하며 이탈리아 밖은 다만 피호 관계를 통해 지배한다는 카토 시대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정확하게 이해했고, 또 이들은 이런 피호 관계가 아니라, 독립 공동체를 보장하면서도 로마 직접 통치의 관철이 필연적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신 질서를 확고하게, 신속하게 , 일관되게 도입하지 않았다. - P98

칸나이 패자와 자마 승자의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원로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고한 부와 물려받은 정치적 지위를 가진 소수의 폐쇄적 가문들이 정부를 이끄는 곳에서, 이들은 위기의 시대에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끈질긴 일관성과 영웅적 희생정신을 발휘했고, 평화의 시기에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고 느슨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세습과 동료제에 있었다 - P103

이제까지는 국가를 구성하던 두 권력, 통치하고 조정하는 권력인 정부와 입법 권력인 민회가 법정을 나누어 지배했다면, 이제부터는 물질적 이해관계의 굳건한 토대 위에 단단히 결합된 특권계급을 형성한 자본귀족이 재판하고 조정하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통치하는 귀족계급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 P169

로마의 군사제도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수정하는 일을 마리우스는 5년 동안 내리 집정관직을 맡은 동안 - 그가 임명 조건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였던 무제한적 최고 명령권을 쥐고 있을 때에 - 착수하여 완성했는데, 이는 민중당파의 장군이 가진 비(非)국헌적 최고 명령권이 남긴 깊은 상흔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 P276

민중당파의 개혁가들을 쓸어버렸던 똑같은 폭력적인 처참한 최후가 이제 귀족계급의 그락쿠스에게도 찾아왔다. 여기에 깊고 슬픈 교훈이 놓였다. 귀족계급의 저항이든 유약함이든, 개혁의 시도가 같은 계급에서 시작되었는데도 개혁은 실패했다.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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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독일의 공업 발전은 주로 1850년대 이후 루르 지방 발전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1855년 무렵 루르 지방과 슐레지엔에 코크스 고로가 존재했다. 목탄 고로가 코크스 고로보다 많긴 했지만 코크스 고로에서 독일 선철의 50퍼센트가 생산되었다.

독일에서 강철 생산이 급속히 증가했다. 1865년 50만 톤 이하이던 연간 강철 생산량이 1913년에 5,000만 톤으로 증가했다. 1870~1913년에 독일의 강철 생산은 연평균 6퍼센트 이상 비율로 증가했고 1880년 이후 더욱 급속해졌으며, 1900년대에 영국의 강철 생산을 앞질러 1914년경에 영국의 2배, 프랑스의 3배 이상에 달했다.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사이에 협조 체제가 강화되었다. 독일은 이러한 신산업 주도국이자 중심지였다. 이미 1870년대 초에 주식회사 자본금이 4년 만에 2배로 성장했다. 구산업(방직업)이 독일에서는 부차적이었다. 석탄, 제철, 철강이 독일 공업의 성장 동력 역할을 하면서 1890~1913년 사이에 철과 강철 생산량이 3~4배 성장했다.

근대적 화학공업이야말로 독일이 가장 성공한 분야다. 1870년대에 독일은 세계 화학제품 시장의 절반을 차지했다. 1차 대전 이전 약 25년간 독일 화학공업은 연평균 6.2퍼센트씩 성장했고 생산량은 10배 증가했다.

20세기 초의 독일 은행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었다. 제국이 통일된 후, 프로이센 국립은행이 모태가 되어 라이히스방크가 만들어졌다(1876년). 라이히스방크는 은행의 재원과 권한을 대폭 확대하여 은행권 발행을 거의 독점했다. 또한 통화 금융을 감독하면서 신용은행이 어려울 때 지원하기도 하고 독일의 금융 구조를 총괄하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했다.

독일의 기업은 급속한 수직적 결합의 전략을 채택했다. 예컨대 철공업에서 독자적인 석탄, 금속광산, 코크스 공장, 송풍로, 주물 및 압연공장, 기계공장 등을 확보했다. 독일의 공업은 총생산량에서만이 아니라 개별 생산 단위 면에서도 규모가 컸다. 20세기 초에 각 기업의 평균 생산량은 영국의 2배에 달했다. 기업 대형화와 업종 다변화로 기업 경영이 복잡해지자 경영 업무가 전문화, 조직화될 필요가 생겼다. 또한 독일은 영국과 달리 산업교육에 충실하여 과학, 경영 기술이 발달했고, 기업에 필요한 전문 기술과 경영 인력 공급도 잘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중간 경영조직을 착실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내셔널리즘이야말로 1848년 독일 중산층을 움직이는 가장 결정적 사안이었다. 독일인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은 독일 통일에서 제외한다는 원칙이 이때 세워졌다. 즉 대독일주의Grossdeutschtum(다민족 나라인 오스트리아 중심의 독일 통일 추구)가 아닌 소독일주의Kleindeutschtum(프로이센 중심의 통일 추구)가 채택되었다. 이로써 새 통일 헌법에서 오스트리아,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은 제외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보수층이 자유주의 중산층이나 독일 통일 운동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또한 내셔널리즘이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프로이센 정부와 반드시 상충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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