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6 - 혁명 : 술피키우스의 혁명부터 술라의 통치까지 몸젠의 로마사 6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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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동맹들의 상태는 감당할 만한 종속관계에서 매우 고통스러운 노예 상태로 전락했으며, 동시에 이들에게는 좀 더 나은 권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사라졌다. 이탈리아의 복속과 함께 로마시민권은 폐쇄되었으며 공동체 전체를 상대로 한 시민권의 참여는 완전히 폐지되었고, 개인들에게만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5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6>는 희랍제국 복속 후 사실상 지중해의 패자(覇者) 로마의 내부 분열을 다룬다. 삼니움 전쟁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들은 동맹에 충실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안정을 바탕으로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전쟁을 연달아 승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전연승할 때도 대다수 동맹시들은 등 돌리지 않았고(카푸아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덕분에 로마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자연히 이탈리아 동맹시들도 자신들이 승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탈리아 공동체의 상당수를 로마 시민체에 수용하였지만, 그들이 수용한 것은 명예 훼손의 딱지를 붙이는 방식이었는바, 자유민 옆에 해방 노예를 세우듯이 구시민 옆에 신시민을 세웠다. 파두스강과 알프스 사이의 공동체들에 부여된 라티움 시민권에 주민들은 만족하기보다 격앙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최악의 세력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이탈리아인들에게, 다시 제압된 반란세력의 공동체들 전체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반란으로 무효가 된 과거의 조약들을 법적 문서로 재확인하지 않고, 다만 자비와 임의 취소의 방식으로 갱신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47


 자신의 필요에 따라 거의 동등한 조건에서 동맹을 갱신했던 로마의 태도는 더 이상 문명 세계에서 상대할 적수가 없어지자 돌변하기 시작했고,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2등 시민으로의 강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점차 고조되는 로마 주변 지역의 긴장. 로마 내부에서는 술키피우스(Publius Sulpicius Rufus, BCE 121 ~ 88)가 새로 시민권을 얻는 이들의 권리 강화를 위한 혁명을 일으키고, 여기에 더해 소아시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6세(Mithridates VI, BCE 135 ~ 63)의 반란까지 일어나며 로마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 시기에 해결사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다.


  집정관 술라는 술키피우스 혁명 시도에 의해 야기된, 보수당파의 창과 방패로 등장한 사내였다... 어떤 민주주의자도 이 보수적 개혁가처럼 이렇게 독재적인 형식으로 사법을 행사한 적도 없고, 국헌의 토대를 이렇게 무분별하고 무모한 방식으로 흔들고 바꾼 적오 없었다. 하지만 형식이 아니라 실질을 보면 매우 상이한 결과들에 이른다. 혁명은 한 번도 최소한 로마에서는 상당수의 희생자를 요구하지 않고 끝난 적이 없었고, 희생자들은 어떻게든 사법의 형식으로 갚아야 할 빚을 마치 범죄인 양 갚아야 했다. 승리한 당파가 그락쿠스의 몰락이나 사투르니누스의 몰락 이후 집행한 것과 같은 재판 결과를 기억하는 사람은 에스퀼리누스 광장의 승리자가 오히려 공명정대하고 비교적 절제된 조치를 했다고 칭송하고픈 생각이 들 것이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66 


 미트리다테스가 취한 혁명적인 조치들, 그러니까 노예 해방, 부채 탕감 등의 취소는 당연한 일이었다. 복고 조치를 단행하는 데 물론 여러 곳에서 무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는 승자가 생각한 것보다 진전된 방식으로 행사되었다. 미트라타데스의 추종자들 가운데 이름 높은 이들과, 이탈리아인들의 학살을 이끈 주동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납세 의무자들은 지난 5년의 십일조와 관세 총액을 평가하여 즉시 완납해야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35


 '민주당-동맹시-마리우스-혁명'이 과두정 로마에서 하나의 흐름이었다면, 여기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귀족당파-로마-술라-반혁명'이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 전장에서 뛰어난 지휘관들이었던 이들이 차례로 정권을 잡으면서 처형과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술라는 마리우스의 죽음 이후 임시적으로나마 원로원 중심의 체제로 돌려놓았다는 점에서 그를 '반혁명의 기수'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귀족당파의 공포정치는 혁명당파의 공포정치와는 다른 성격을 나타냈다. 마리우스가 개인적 복수심을 적들의 피로 채운 것이라면, 술라는 폭력을 말하자면 냉정하게, 새로운 독재정치의 도입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고, 무심하게 살육을 행하거나 방치하였다. 하지만 공포정치는 그것을 보수파가 전혀 감정 없이 행했을 때 더 무서워 보였고, 양 진영의 광기와 만용이 균형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구제는 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201


 그렇지만, 술라가 추구했던 원로원 중심의 체제는 이미 술라 자신이 일으켰던 쿠데타로 인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술라 자신은 귀족들의 편에 서서 복고정을 꿈꿨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귀족들 자신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마리우스-킨나 편의 인재들이 술라의 편에 서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보자면,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뉴라이트 운동에 가담한 것에 비길 수 있을까.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 BCE 106 ~ 48)다. 


 술라 체제는 예를 들어 그락쿠스 정치체제나 카이사르 정치체제처럼 정치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성과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정치체제에는 정치적으로 새로운 사상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흔히 복고정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조치가 그러했다... 이 시대의 로마 과두정을 판단해보자면 오직 무자비하고 냉혹한 엄단이 전부였다. 로마 과두정이 관련된 다른 모든 것처럼 술라 체제는 그저 이런 엄단 조치의 완수였을 뿐이다. 악한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그를 칭송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경건함을 침해하는 일이다. 술라 복고정치의 책임은 술라가 아니라, 지난 수백 년 당파적으로 정부를 지배한, 매년 점점 더 늙어가며 고약해진 쇠약과 고집 때문에 무너져간 로마 귀족당파 전체에게 물어야 한다. 모든 흉악한 것, 모든 극악무도한 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귀족당파에게 그 책임이 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246


 귀족당파 대부분은 귀족 망명자 신분으로 달려왔지만, 요구는 많고 전투의 의지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구하고자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들의 노예들을 무장시키는 일조차 하지 않던 귀족 주인들이라는 혹독한 소리를 술라에게서 들어야 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파의 진영으로부터 변절자들이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하고 고귀한 루키우스 필립푸스가 넘어왓는데, 그는 무능하기로 이름난 사람들과 어울린 유일한 집정관 역임자로 혁명정부에 관여하였고 혁명정부 아래서 관직을 역임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5


 폼페이우스는 술라의 이탈리아 상륙을 도우며 화려하게 로마 정계에 등장한다. 사상적으로는 마리우스와 공감을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진영을 바꾼 그의 모습에서, 그리고 자신의 부귀를 위해 지휘관에게 투자하는 병사들의 모습에서 다가올 로마제국과 군인황제시대의 전조를 느낀다면 너무 결과적인 이야기일까. 이미 로마는 각각 시민의 권리와 공화정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 제국으로 가는 길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길은 로마 군제(軍制) 개혁을 통해 마리우스가 설계하고, 술라의 쿠데타로 인해 포장된 길이었다. 이제 누가 그 길로 로마를 운전해 갈 것인가. 현재까지는 폼페이우스가 유력해보인다. 그가 등장하기전까지는...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애초부터 과두정 지지자가 아니었고, 혁명정부를 인정하였고 심지어 킨나의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의 선친이 혁명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사방의 적들에게 위협을 느꼈는데, 특히 그의 선친이 아스클룸 점령 직후 착복한 전리품을 반납하라는 고발 때문에 그의 가산이 크게 손실을 볼 지경이었다... 술라의 상륙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피케눔으로 갔다. 폼페이우스는 그곳에 막대한 재산이 있었고, 그는 아욱시뭄(오늘날의 오시모)에 귀족당파의 깃발을 꽂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6


 자발적으로 술라의 병사들은 로마의 전통에 따라 서로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고, 자발적으로 그들은 모두 사령관에게 전쟁 비용에 보태라며 저축한 돈을 가져다 바쳤다(p163)... 술라의 병사들은 사령관으로부터 넉넉히 돈을 받았기에 전쟁에 전혀 관심이 없는 병사들에게 술을 사면서, 너무나 쉽게 적이 아니라 동료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6>,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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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2-1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마를 위해서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술라는 굉장히 반동적인 인물인데 그럼에도 굉장히 개인적인 매력이 있었던거 같아요. 로마사를 제가 소설로 봐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3-02-16 01:59   좋아요 1 | URL
몸젠은 <로마사>에서 술라의 죽음에 ˝일 년 내내 로마의 여인들은 눈물로 그를 애도했다.˝는 말로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지만, 제가 읽은 다른 역사책에서는 그가 생전에 저지른 과업으로 인해 온 몸에 벌레가 끓는 질병으로 죽었다고 설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이처럼 술라가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그만큼 공도 과도 큰 인물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 술라는 매력적으로 묘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여러 사료를 바탕으로 묘사되었기에단순히 허구라고 볼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리비우스 로마사 4 - 로마와 지중해 세계 리비우스 로마사 4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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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와의 강화 조약 이후에 마케도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마케도니아와의 충돌은 상황의 위험성, 적군 지휘관의 자질, 교전 부대들의 전력 등에서 포에니 전쟁과는 비교될 수 없는 소규모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포에니 전쟁 못지않게 유명해졌는데, 마케도니아의 옛 명성과 마케도니아 제국의 광대한 영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정복 사업을 통해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얻었고 아시아에서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던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12/96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4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31~45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2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통해 강력한 해운국 카르타고를 꺾고 서지중해 패권을 장악한 로마는 이제 그 시선을 동지중해 알렉산드로스(Alexander III Magnus, BCE 356 ~ 323)의 후손들에게로 돌린다. 그렇지만, 한때 인도변경에까지 이르렀던 마케도니아의 위세는 이제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할되고 약해졌다.


 <리비우스 로마사>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3차례에 걸친 마케도니아 전쟁은 포에니 전쟁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포에니 전쟁 때와 같이 한 번도 이탈리아 반도에 마케도니아 군이 발을 들여다 놓은 적도 없었으며,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BCE 216)와 같이 로마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가하지도 못한 채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무릎을 꿇고 만다. 이에 반해,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당시 카르타고에게 사용한 절차대로 마케도니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한니발 전쟁 때 에스파냐의 사군툼을 통해 한니발을 자극했던 로마는, 이제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Philippos V of Macedonia, BCE 221~179)에게 카르타고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181) 지원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전쟁을 시작한다. 


 로마 군이 승리를 거두게 된 가장 분명한 원인은 다수의 소규모 전투를 유도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런 소전투들이 중장보병 밀집 대형(Phalanx)을 무질서 속으로 빠뜨렸고 이어 완전 해체시켰다. 중장보병 부대는 밀집 대형을 유지하고 장창을 밖으로 내밀 때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여러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오면 그 대열은 장창의 길이와 무게 때문에 날렵하게 상황에 맞춰가며 전선을 재정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중장보병 부대는 하나의 거대하고 무질서한 덩어리로 해체되고 말았다. 전열의 측면과 후면에서 계속 소음이 발생하여 그들을 혼란 속으로 빠트렸고 이어 전체 대열이 완전 궤멸하고 말았다. 이것이 이 전투의 핵심사항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842/964


 로마군은 한니발 전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처절한 절망을 안겨주었던 칸나에 전투에서 얻은 전술적 교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를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E 202)에서 입증한다. 그리고 '망치와 모루 전술 Hammer and Anvil military tactic'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마케도니아 군의 팔랑크스(phalanx)를 포위 섬멸하면서 전술적인 우위를 확인한다. 


 그렇지만, 로마 군의 우위는 전술적인 측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개인 병기(兵器)에 있어서 차이 또한 현저했기에 마케도니아는 각개 전투에서도 전술 단위의 집단전투에서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후대에 마케도니아 동쪽 지역 시리아 일대에서 다마스쿠스 강(鋼) 제조법을 통해 강력한 검(劍)이 만들어지며 명성을 떨치지만, 이 시기 글라디우스(Gladius)는 최강의 양산화된 개인병기였다. 요약하자면, 오랜 전투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은 한니발이라는 최강의 적으로부터 규화보전(葵花寶典)을 전수받아 진정한 지중해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투척 무기로 싸웠지만, 로마 군인들은 소지하고 있는 커다란 방패 덕분에 그런 무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 이외에도 던져진 많은 창이 목표를 맞추지 못했고, 맞았다고 하더라도 영향이 미미했다. 공간이 제한적이고 병력이 한가득 모여 있어 스파르타 인들은 창을 던지기 전에 달려올 공간이 없었고, 그래서 던지는 창엔 속력이 붙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견고하게 투척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할 공간도 찾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던진 창은 그 어떤 것도 로마 인들의 몸을 정확히 맞추지 못했고, 그나마 명중한 몇 안 되는 창도 방패에 가로막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241/964


 그들은 창, 화살, 드물게 긴 창으로 부상당한 병사들의 시신들을 보아 왔지만 그것은 그리스 인과 일리리아 인의 싸움에선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스페인' 칼로 예리하게 잘린 주검을 보게 되었다. 양팔은 어깨가 붙은 채로 잘렸고, 머리는 목이 완전히 잘린 채로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장이 그대로 드러났고, 다른 끔찍한 상처도 보였다. 장병들은 이런 부류의 무기, 그리고 그들이 대적해야 할 상대를 깨닫고 심한 두려움을 느끼면서 전반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필리포스 왕 자신도 두려움에 휩싸였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60/964


 <리비우스 로마사 4>에서 로마는 이러한 압도적인 무력만을 선보이지 않는다. 이를 바탕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고립시켜 결국 굴복시키는 외교술을 통해 마케도니아 뿐 아니라 아테네, 스파르타, 로도스 등 그리스 제국들과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조 등이 차례로 로마의 속주로 전락하게 되는 역사가 소개된다.


 로마 인들은 선왕을 상대로 싸울 때 그리스를 해방시킨다는 기만적인 구실을 내세웠다. 이제 저들은 노골적으로 마케도니아를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 로마 제국 주위에 왕국이 아예 없게 만들고 또 전쟁에서 용맹함을 떨친 국가가 아예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759/964


 이런 논쟁을 다 들은 뒤에 로마의 조사위원들은 그들의 결정사항을 발표했다. 마케도니아 주둔군은 거론된 도시들에서 물러나야 하며, 필리포스의 영토는 마케도니아의 과거 국경으로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쪽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고 불평하는 잘못들에 관해서 조사위원들은 그 문제에 적용될 법적 원칙을 확립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원칙이 마련되면 관련된 민족들과 마케도니아 인들 사이의 분쟁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83/964


 지중해 패권을 둘러싸고 강대국인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제국을 무너뜨린 로마는 이제 유일한 강대국이 되었다. 로마가 한때 자신보다 강력했던 이들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자신보다 강력한 상대의 장점을 흡수하는 로마인들의 학습 능력이 그들을 '진화하는 전투민족'으로 만들었지만, 그 근간에는 신(神)의 뜻을 넘어선 인간 의지(意志)가 자리한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본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 자리한 고대 헬라 문명(그리스 문명)의 영향력이 의식에서의 인문혁명(人文革命)을 가능케 했고, 그 결과 칸나에 패전의 절망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은 인간과 바알, 제우스와 12 올림푸스 주신(主神)들과의 이데올로기 전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기저에는 리비우스가 강조한 '근검과 절약'과 소박한 '로마인 정신' 대신 부(富)를 향한 개인의 욕망과 내부 체제의 문제를 외부로 돌리려는 체제의 욕망이 자리하겠지만...


 "불멸의 신들께서 부여하실 수 있는 여러 물건들 중에, 우리 로마 인들은 신들께서 직접 주신 것들만 지니고 있소.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오. 우리는 온갖 흥망성쇠 속에서도 그런 정신을 바꾼 적이 없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채로 지니고 있소. 성공했다고 그런 정신이 칭송된 적도 없고, 역경을 겪었다고 그런 정신이 저하된 적도 없소. 이런 로마 인의 강건한 정신을 목격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증인들을 모두 건너뛰고, 나 역시 그런 증인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대들의 친우인 한니발을 내세울 수 있소. 이젠 그대들도 증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말이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443/964


 카르타고에선 지휘관들이 성공적으로 전쟁을 끝냈더라도 전술이 나쁘면 십자가형에 처해지지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일의 시작과 수행에 신들을 관여시키는데, 이는 신들이 승인한 이런 행동들이 누구에게도 비판을 받을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공공 감사제나 개선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의례 방식엔 '그가 공무를 훌륭하고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28/964


 동료 시민 여러분, 저는 여러분 중 그 누구도 이런 파멸적인 잘못에 휘말려 인생이 파탄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종교 문제에서 드러나는 변태적 집착만큼 사람을 잘 속여 넘기는 것도 없습니다. 저들이 신들의 뜻을 범죄 행위의 구실로 삼는 곳에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이런 두려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의 비행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혹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저들의 범죄에 신의 뜻이 가미되어 있다고 주장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로마의 사제단이 내린 무수한 결정, 원로원 결의, 그리고 추가로 예언자들의 반응을 통해 선례가 정립되어 있으니까요.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71/964


 현존하는 리비우스(Titus Livius Patavinus, BCE 59 ~ 17)의 <로마사>는 45권이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한때 동경했던 그리스마저 발밑에 둔 로마인들이 주변 민족을 대하는 시선은 경멸을 넘어서지 못한다. 자신들의 제국(帝國)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민족을 야만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로마의 해방 정복 전쟁은 이후 역사에서 가속화될 것이고, 리비우스는 여태까지와 같은 논조로 이를 서술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리비우스가 CE 9년 아르미니우스(Harminius, BCE 17 ~ CE 21)에게 당한 토이토부르크 전투(Schlacht im Teutoburger Wald)의 패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궁금해지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다소의 아쉬움이 남지만, 로마인이 바라본 로마 역사서인 <리비우스 로마서>에 대한 정리는 이것으로 마무리하자. 


 이제 <리비우스 로마사>를 바라본 다른 시선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 ~ 1527)의 <로마사논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을 꺼낼 차례가 되었다. '분할하여 통치'(divide and rule)할 수 있었던 제정 시대를 살았던 리비우스와는 달리 중앙집권국가들인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에스파냐 제국들로부터 '분할되어 통치'되었던 15세기 말을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이 예나에서 시대정신을 발견하기 이전, 시대정신에 근접했던 'the prince'의 모델을 로마에서 발견한 것과 <로마사 논고>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다음 리뷰에서 보다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테네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성급하고 자신의 능력 이상으로 모험에 나선다는 평판이 있습니다. 반면에 스파르타 사람들은 성공을 확신하는 일에서조차 첫 걸음을 떼는 것이 어렵고 망설인다고 합니다. 나는 아시아 전역이 이런 무책임한 성격을 만들어냈고, 우리가 허세를 부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881/964


 온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상대로 한 것보다 갈리아 인들을 상대로 치른 개선식이 더 많다. 우리는 경험으로 아는 바가 있다. 그들이 불처럼 타오르는 격정과 맹목적인 분노로 몸을 던져 가하는 첫 공격을 우리가 버텨내면 그들의 사지는 곧 땀과 피로로 늘어지고, 손에 쥔 무기는 흔들리게 된다. 격정이 사그라지면 그들의 몸은 축 늘어지고, 그들의 결의도 마찬가지로 축 늘어진다. 그들은 태양, 먼지, 목마름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해 제군이 그들을 상대할 때 무기조차 필요 없을 정도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483/964


PS. 동방불패(東方不敗)가 익힌 것으로 알려진 '규화보전'은 최강의 무공이지만, 그 대신 고자가 되어야 하는 반대급부가 따른다. 최강의 무력을 얻은 로마는 대신 동방으로부터 들어오는 막대한 재물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면서 다른 의미에서 대가를 치룬다...


 여자 류트 연주자와 하프 연주자, 그리고 다른 유쾌한 여흥 제공자들이 만찬에 따라오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연회 그 자체에 엄청난 공과 더욱 큰 비용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고대 로마 인들이 노예 중에서 가장 가치가 없다고 여겨 몸값과 대우도 그에 맞추어 낮았던 요리사들이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단순한 서비스가 예술로서 대우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이롭게 여겼던 것들은 앞으로 다가올 사치의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4> , p557/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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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3 - 한니발 전쟁기 리비우스 로마사 3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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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카르가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패배하고, 이후 에릭스에서 패배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24년의 전쟁 동안 육지와 바다 양면으로 겪었던 고통을 상기하십시오. 당시 우리의 지휘관은 이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하밀카르였지요.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제2의 마르스(軍神)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로마와의 협정 조건에 따라 우리는 이탈리아에 개입하면 안 되는데도, 이탈리아의 땅 타렌툼에 간섭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지금 그 역사가 바로 사군툼에서 반복되는 중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6/1226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3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21~3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리비우스 로마사> 전체 시리즈 4권 중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3권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 Bellum Hannibalcum, BCE 218 ~ 202)의 시기를 다룬다.  유명한 한니발 전쟁을 배경으로 하기에 <리비우스 로마사 3>의 서술은 마치 <삼국지연의>를 읽는 듯 긴박하게 그려진다. 한니발의 탄생으로 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전쟁 전반부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1)이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 BCE 216)에서 대승을 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시점을 돌아, 전쟁 후반부에서는 로마의  스키피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BCE 235 ~ 183)는 자마 전투(Battle of Zama, BCE 202)에서 압승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짓고, 리비우스의 30권 내용도 함께 끝난다.


 한니발 전쟁을 다룬 책이나 리뷰는 매우 많기에, 굳이 여기에 전쟁의 내용을 다룬 리뷰 하나를 추가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대신, 한니발 전쟁을 바라보는 리비우스 그리고 그가 속한 로마인들의 관점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한니발은 아주 위험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오히려 전보다 더 탁월한 전술 능력을 선보이며 돌파했다.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지칠 줄 몰랐고, 무더위나 혹한이나 똑같이 쉽게 견뎌냈다... 그의 미덕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기로 하자. 그가 보인 여러 미덕들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결점 역시 그에 못지않게 대단했다. 그는 비인간적이라고 할 정도로 잔혹했고, 일반적인 카르타고 인보다 더 신의가 없었고, 진실, 명예, 종교, 맹세의 신성함, 다른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이런 미덕과 악덕의 특징을 갖춘 채, 그는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3년을 복무하면서, 장차 위대한 사령관 후보로서 반드시 보아야 하고 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학습하며 실천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5/1226


 우리는 한니발에 대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그를 바라보는 로마인의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뛰어난 능력과 부하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리더쉽 등. 리비우스는 지휘관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덕목을 갖춘 한니발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가해지는 그의 인간적인 성품에 대한 비판에 대해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한니발의 뛰어난 자질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인간적인 결점을 드러내며 험담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리비우스의 서술은 로마인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 그 자체가 아닐까. 마치, 중국인들이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 ~ 649)을 죽음 가까이까지 몰아넣은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 594 ~ 666)을 악의 화신으로 기억하듯.


 전하는 말에 따르면 총 45,500명의 보병과 2,700명의 기병이 전사했고, 로마 인과 동맹 시민의 전사자 비율은 거의 같았다고 했다. 전사자 중엔 집정관 직속의 두 재무관 루키우스 아틸리우스와 루키우스 푸리우스 비바쿨루스, 29명의 천인대장, 다수의 전직 집정관, 다수의 전직 법무관이나 토목건축관이 있었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이전 해 사마관이자 몇 년 전에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도 전사했다. 원로원 의원이나 원로원 의원 자격이 부여되는 공직을 지낸 사람들 80명도 군단 복무를 자원했는데, 이들도 전투 중에 사망했다. 3천 명의 보병과 1천 5백 명의 기병은 포로로 붙잡혔다. 이상이 칸나이 전투의 개요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230/1226


  로마 역사상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칸나이 전투를 넘어선 패배는 없었기에, 이러한 좌절을 안긴 한니발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리비우스 또한 역사가 이전에 로마인이었기에 이런 주관적인 서술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렇지만, 한니발이 수세(守勢)로 몰리면서 전장이 이탈리아를 벗어나 에스파냐, 아프리카로 옮겨졌을 때 로마군들이 한 행동을 서술한 리비우스라면 과연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의 잔학함을 악(惡)으로 몰아 비판할 수 있을까. 로마군이 한니발 전쟁에서 그리고 제국 팽창 과정에서 벌어질 수많은 참상의 원흉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더더욱 그런 자격은 없어보인다. 인용부분에서는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로마인의 약탈 또한 정도가 결코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이런 유혈극은 전쟁에서 벌어지는 통상적인 과정이었다. 격분한 로마 인들은 저항 가능한 무장한 적들과 싸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백 명의 힘없고 무방비 상태인 여자들과 아이들이 동포들의 손에 학살당한 것이었다. 시장엔 커다란 화톳불이 붙었고, 종종 아직도 숨을 쉬는 사람들이 그 불에 던져졌다. 화톳불은 피의 강으로 거의 꺼졌다. 마침내 도살을 맡은 자들이 그 끔찍한 일을 끝냈고,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손에 칼을 든 채로 불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학살이 끝나자 로마 인들이 도시에 나타났다. 이 광경에 로마 인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며 멈춰 섰다. 잠시 그들은 입을 벌린 채 서서 그 참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시신과 잡다한 물건이 싸인 곳에서 금과 은이 반짝거리는 걸 보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탐욕에 휩싸여 화톳불 속에서 그 보물들을 낚아채고자 했다. 화톳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은 뒤에서 물건을 빼내려고 밀려오는 무리 때문에 불길에서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고, 몇몇은 불속으로 밀려들어가 타죽었고, 다른 일부는 맹렬한 열기에 온 몸을 그을렸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66/1226


 리비우스의 한니발에 대한 평가는 후반부에 다시 이루어진다. 한니발 몰락기에 리비우스 자신이 직접 역사서의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이루어진 재평가는 앞서와 사뭇 결이 다르다. 


 실제로 나는 한니발이 성공을 누릴 때보다 운이 기울었을 때 더욱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고국에서 머나먼 적의 영토에서 13년 동안 싸우면서 많은 흥망성쇠를 겪은 그의 군대는 카르타고 인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라 온갖 국적의 천민들이 뒤범벅된 그런 군대였고, 병사들은 법, 관습, 언어가 모두 달랐으며, 예절, 의복, 장비는 물론 섬기는 신과 종교 의식의 형태도 어느 것 하나 같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이 잡다한 무리를 굳게 결속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자기들끼리 단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으며, 한니발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적도 없었다. 놀라운 건 급료를 지급할 자금이 빈번히 부족하고 식량도 자주 떨어졌음에도 일절 반항의 기미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는 그런 일로 장교와 병사 모두가 형언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승전의 희망이 전부 사라진 데다 하스드루발이 전사함과 동시에 휘하 병력이 괴멸하고, 이탈리아의 작은 구석인 브루티움 하나를 제외하고 이탈리아 전역을 포기한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진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1/1226


 로마의 반격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연이어 세력을 잃어가고,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에스파냐를 포기하고 넘어온 동생 하스드루발마저 죽음을 당한 절박한 상황. 이러한 상황에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선 한니발에게 리비우스는 경의를 표한다. 그는 포르투나(fortuna)에 맞선 비르투(virtu)의 고귀함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이러한 리비우스의 서술에서 앞선 한니발에 대한 악의적인 서술만큼 진실성을 느끼기 어렵다. 이제 승기를 잡은 자의 어설픈 관용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리비우스의 경의에도 불구하고 <리비우스 로마사 3>을 통해 한니발은 사악한 전쟁신(神)에서 거센 운명에 맞서는 인간(人間)으로 격하된 느낌이다. 이렇게 리비우스가 악(惡)으로 규정한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일까? 


 한니발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사군툼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 도시를 직접 공격하면 로마가 행동에 나설 것이 확실했으므로 그는 먼저 올카데스 부족 영토를 침공했다. 이 부족은 에브로 강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카르타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6/1226


 하지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배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그들이 동정을 얻기는 힘든 일이었다. 전략 회의가 열렸고, 모두가 정당한 분노를 느끼며 카르타고 파괴를 촉구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저런 방어 시설과 자원을 갖춘 도시를 포위하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은 어마어마할 것이었다. 게다가 스키피오는 자신이 노력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실상 끝낸 전쟁의 영광을 자신의 후임자가 가져가고, 승리의 보상도 그가 챙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이에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평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098/1226


 리비우스는 한니발 전쟁의 발단을 한니발의 사군툼 공격에서 찾는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평화를 위한 협약이 카르타고의 친로마 중립 도시 사군툼 공략으로 깨지면서 평화를 위한 로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로마는 평화를 지키기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었음을 강조한다. 21권의 시작이 한니발의 맹세와 성장, 사군툼 공략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숨겨진 진실은 없는 것일까? 우리는 리비우스가 서술하지 않은 부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후 해외 진출 방향을 에스파냐 방면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카르타고의 속사정과 이마저도 에브로 강 이남으로 제한하려는 로마의 압력과 중립 도시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카르타고를 자극했던 로마의 술수는 과연 한니발 전쟁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리비우스 로마사 3>의 내용은 매우 흥미진지하다.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 1937~ ) 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2권 <한니발 전쟁>에서 전쟁 관련한 대부분의 내용이 리비우스의 저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몰입도가 높은 역사서다. 다만, 카르타고와 로마가 벌이는 검투 경기에 열광한 독자들의 시선이 피끊는 전장에 머무는 동안, 그들에게 씌워진 선(善)-악(惡)의 프레임은 승자(勝者)가 정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스페인의 로마 동맹시인 사군툼을 포위 공격한 것이었다. 그 전에 그러니까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 로마 인들은 동부 스페인의 공동체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곳에 진출한 카르타고의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는 기원전 226년 에브로 강 이남의 지역(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지역)은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나 곧 그것을 위반했다. 당연히 카르타고는 로마의 이런 움직임에 반발했다. 카르타고 인들은 스페인의 광업과 농업 자원에 투자한 자국의 중요한 상업적 이해사항들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크게 우려했다. 로마 원로원은 그 전의 맹세는 무시해 버리고 카르타고를 물리쳐 달라는 사군툼의 호소에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맹세 위반이라는 국제적 신의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카르타고는 어차피 인간적 도덕성이 결여된 야만인이므로 그런 맹세는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게 로마의 일방적 판단이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142/1226


스페인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들을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두는 능력이 탁월했던 하스드루발 덕분에 로마 인들은 평화 협정을 갱신하여 에브로 강을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영토 구분선으로 삼아, 사군툼의 중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일종의 완충국 역할을 그 도시에 맡겼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12/1226

스페인의 전반적인 상황은 어떤 측면으로는 이탈리아와 무척 비슷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무척 달랐다.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령관을 잃은 카르타고 인들이 대서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점은 이탈리아의 상황과 유사했다. 하지만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다른 것은 지역의 특성이나 그곳 주민들의 기질이 세상 다른 어떤 곳보다 패배를 태연하게 여기며 새로운 적대 행위에 나서는 일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이 로마 인들의 첫 번째 속주가 되고,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야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리더십과 지원 아래 완전히 정복된 마지막 지역이 된 이유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842/1226

로마 인들과 카르타고 인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았고, 둘 다 똑같이 끔찍하게 시달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자는 병으로 고통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 공급마저 부족했다. 한니발은 유노 라키니아 신전 근처에서 여름을 보냈고, 그곳에 제단을 세웠고 제단 밑에는 자신의 업적을 장황하게 기록한 기명(記銘) 판을 설치했다. 기명 속의 문장은 카르타고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졌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3> , p92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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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로마사 2 - 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 2
티투스 리비우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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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하여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추구하는 세 가지 대상 곧 토지, 돈, 출세가 동시에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0/634


  티투스 리비우스 (Titus Livius Patavinus, BCE 59/64 ~ ACE 17)의 <리비우스 로마사 2 Ab Urbe Condita Libri>은 <리비우스 로마사> 6~10권까지 내용을 담고 있다.  BCE 389 ~ 293에 해당하는 이 시기 로마 역사는 일정한 공식 안에서 움직인다.


 집정관 선출을 둘러싼 귀족과 평민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분열 상태, 이러한 분열을 틈타 침략하는 외적들 또는 원로원의 전쟁 결의, 전쟁 수행을 위한 독재관 선출과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이라는 권력 공백기, 전쟁 이후 내전에 준하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 <리비우스 로마사 2>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시기는 이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흘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로 급격하게 팽창하면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로마 공화정의 해묵은 과제가 되버렸음을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평민과 귀족들은 무엇 때문에 대립했을까?


 처음에 도시는 그것을 일으켜 세운 똑같은 기둥 되는 인물에 의존했다. 즉 도시의 지도자급 시민인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한 해가 끝나는 때에 독재관 직에서 사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관직에 있었던 집정관급 정무관들은 다음 해의 선거를 주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리하여 국가는 인테르레그눔(집정관 궐위 기간) 체제로 돌아갔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9/634


 평민들의 요구사항은 BCE 367년에 제정된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 법(leges Liciniae Sextiae)에 잘 표현된다. 법안의 내용인 부채 상환과 공유지 면적 제한, 집정관 선출 등에 대한 평민들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 귀족들은 평민들의 통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며 법안을 잘 지키지 않는다. 또한, 실제 전장에서 평민 출신 집정관들이 연이어 패전하면서 귀족들에게 리키니우스 법안을 따르지 않을 좋은 명분을 얻었고, 내분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대해 매번 로마는  독재관 선출이라는 임기응변을 통해 극복한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어 3가지 법안을 주장하고 나섰다. 세 법안 모두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고 평민들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법안은 부채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었는데, 빌려온 원금에서 지금껏 지불한 이자의 액수를 공제하고 그 나머지 금액을 3년에 걸쳐 3회에 균등 상환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법안은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부과하여 개인이 5백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세 번째 법안은 집정관급 정무관 제도를 철폐하고 예전처럼 두 명의 집정관을 선출하되 그 중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법안으로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지 않는 한 성취하기 어려웠다. 이것을 가리켜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이라고 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89/634


 귀족들은 그 참담한 실패에 경악하기보다는 평민에게 군대 지휘권을 부여하여 불행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분노했고, 온 도시에는 그들의 성난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봐라, 평민들 중에서 집정관을 뽑아서, 그런 권리를 누릴 자격도 없는 자에게 군대 지휘권을 주었더니 이런 참담한 결과가 빚어지지 않았느냐! 평민들은 민회의 투표로 귀족들을 관직에서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정당하지 못한 법률은 영원불멸의 신들을 설득하지는 못하지 않았느냐. 신들은 그들의 신성과 조점권에 대한 모욕을 그런 식으로 복수한 것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법률에 의해 이런 것들을 관장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자가 감히 조점권을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로마 군과 그 사령관이 몰살당한 것이다. 앞으로는 귀족 가문의 권리를 짓밟는 선거를 절대로 개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인 것이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29/634


 로마 지도부는 1세기 동안 분열을 위한 적극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전쟁을 택한다. 그들은 때마침(?) 3차례에 걸친 삼니움 전쟁(Samnite Wars, BCE 343 ~ 290)과 라티움 전쟁(Latin Wars, BCE 340 ~ 338)을 통해 내부의 불만을 일단 잠재우고 시선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평민과 귀족들로 갈라져 싸우던 이들은, 로마군(軍)이라는 하나의 조직아래에서는 '지휘관-병사'로 일체가 되어 국난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수많은 역사가와 작가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진정한 로마인과 로마 공화정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익(私益)보다 공익(公益)을 우선시 한 로마인 정신이 위기 극복의 동력이라고 하지만, 과연 이 시대가 진정으로 위대한 로마정신이 발현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까?


 데키우스는 계속 행군해야 하는 병사들이 무거운 짐으로 고생할 것이 우려되어 그들은 불러 모아 놓고 이런 연설을 했다. "병사들이여, 여러분은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하고 이 정도의 전리품으로 흡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의 기대가 여러분의 용기에 걸맞은 그런 높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삼니움 족의 모든 도시들과 그 안에 내버려진 모든 물건들이 여러분의 것이다... 그곳에서는 힘든 일은 별로 없고 더 많은 전리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전리품은 매각되었고 병사들은 어서 행군하자고 사령관을 재촉하면서 로물레아로 갔다. 그곳에서도 공성 작업이나 공성기 동원은 필요가 없었다. 로마 군이 일단 성벽에 접근하자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486/634


 삼니움 전쟁에서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설은 로마 공화국의 위기탈출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귀족(그리고 원로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체제의 약한 부분을 개혁하는 대신 거대한 외부의 적(敵)을 통해 현재의 불만을 가라앉히고 내부 단결을 도모하는 정책을 선택한다. 거대한 적은 막대한 전리품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여기에 평민들 또한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쟁에 뛰어들고, 귀족들은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을 평민들에게 배분하면서 그들의 양(量)적인 불만을 채우고, 적들은 동맹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로마의 몸집을 불리는 정책의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우리는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의 병사 자격으로 복무합니다. 우리는 유배를 떠나온 게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왔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전투 신호를 내린다면 우리는 남자답게 또 로마인답게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가 필요 없다면 우리는 군 진영이 아니라 로마로 돌아가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귀족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44/634 


 이러한 로마 귀족들의 정책에 대해 평민들은 종군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얻었으며, 삼니움과 라티움 주변 민족들 또한 동맹의 대가를 적절하게 받는 편으로 절충하는 방안을 선택한다. 전쟁을 통한 막대한 전리품이 보장된다면, 원로원 중심의 정체(政體)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관계에 별다른 이의없이 수긍하는 로마의 평민들과 라티움 동맹국들의 행동에서 과연 로마의 정신이라 할 부분이 있는가. 여기에 위대한 로마인의 정신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대신 계산빠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들만이 있을 뿐이라 생각된다. 그들이 로마 공화정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부분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투쟁은 자신의 몫을 조금 더 받기 위한 쟁의 행위에 불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그들은 로마 공화정의 이름 아래 정복전쟁에 함께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 본다면, 부르투스가 지키려 했던 공화정의 가치란, 제정이라는 '독점(獨占)'에 반대하는 '과점(寡占)'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과점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회피하고 다음 세대로 넘기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로마인의 정신에 대해 회의(懷疑)를 갖게 된다...


 <리비우스 로마사 2>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내 문제를 덮고 손잡은 평민-귀족의 모습이 그려진다면, 이어지는 시기에서 이들은 한니발(Hannibal Barca, BCE 247 ~ 183)이라는 더 강대한 위협에 대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다음 리뷰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력으로도 라티움을 자유롭게 해방시킬 수 있으나, 그래도 로마와의 지난 관계를 생각하여 이런 양보안을 내놓으려 합니다. 우리는 양국에 똑같이 공정한 평화 조건을 내놓겠습니다. 영원불멸한 신들은 우리가 힘에서 로마와 똑같은 나라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집정관 두 명 중 한 사람은 로마에서 뽑고, 다른 한 사람은 라티움에서 뽑아야 합니다. 원로원 의원 구성도 두 민족에게서 동수로 선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민족 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동일한 권위의 자리가 마련되고 모든 것이 명실상부해집니다. 한쪽이 필요한 양보를 하면 양쪽이 모두 혜택을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로마를 우리의 어머니 도시로 만들고 우리 모두 로마인이 됩시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232/634


그해(기원전 352년) 말에,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 때문에 집정관 선거가 열리지 못했다. 호민관들은 선거가 리키니우스 법에 의해 거행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독재관은 집정관 자리를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공개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를 정부 제도에서 아예 제거해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했다. 따라서 선거는 독재관 임기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못했고, 다시 한 번 인테르레그눔 체제가 들어섰다. 인테르렉스들은 평민들이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정치적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열한 번째 인테르렉스까지 들어섰다.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 p162/634

조약이나 동맹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전에 부끄럽게 여겼던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하려 합니다. 로마는 ‘동맹군‘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우리의 군대를 로마의 군대에 추가하여 그들의 병력을 두 배로 늘리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군대가 로마의 허가 없이는 전쟁을 시작하고 끝내는 독립된 결정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공정이고 동맹입니까? 왜 모든 것이 이처럼 공정하지 못합니까? 왜 라틴 인 출신의 집정관은 없는 겁니까? 힘을 공유할 수 있어야 권위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로마는 동맹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 반란의 진압에 조력해줄 동맹을 구하고 또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시의 인구를 계속 늘려나갔다. 그 결과 세계 최강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로마는 자국을 위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많은 동맹국들을 만들었고, 그런 동맹국들은 법률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와 유사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제국의 권좌를 틀어쥐고 군사적 지휘권을 확보했기 때문에 동맹국들이 부지불식간에 로마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_ 티투스 리비우스, <리비우스 로마사 2> 작품 해설 , p60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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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 경제사 - 서양 문명의 변경에서 떠오르는 경제의 심장으로
양동휴.김영완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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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시대의 라티푼디움은 노예 경작과 자유민 경작, 두 형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분상 자유민kolonatus이 지대 납부를 전제로 토지를 경작하는 프레카리움 Precarium 제도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 같은 로마 시대의 토지 생산 조직 형태 가운데 자유민적 요소는 후퇴하고 조세 납부 요소만 남아 이것이 게르만적 인적 지배 형태인 문트권權과 아이겐권權에 합해져 그룬트헤어샤프트(장원 영주제)가 만들어졌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4/228 


[지도] 라인강과 엘베강 (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Map-showing-the-German-stretches-of-the-international-waterways-the-Rhine-Danube-and_fig1_321840509)


 <중부 유럽 경제사>에서는 고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라인강 서안 지역과는 다른 엘베강 동쪽의 게르만-슬라브 경제 체제를 보여준다. 라인강 서안에서는 군단병이 정착하고 퇴역 후 인근에서 자리를 잡는 형태인 프레카리움으로부터 시작하여 게르만 전통이 결합된 봉건제(feudalism)/장원제(莊園制)가 발달했다면, 엘베강 동쪽에서는 농노(農奴)에 의해 운영되는 농장제(農莊制)로 발전했다는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독일 농민이 이주하고 이들이 이민족과 동화됨으로써 엘베 강 동쪽 지역에는 서유럽의 그룬트헤어샤프트 지역과는 다른 게르만-슬라브적 요소의 독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부 지역 농민은 곡물 생산과 판매에 참여할 재량이 있었다. 그러나 서방으로 수출하는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경지 단위가 큰 땅일수록 위기 대처에 유리했다. 즉 기사령과 대지주는 경쟁력이 있었지만 자유농민은 토지를 처분하고 이들에게 예속되어야 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9/228


 16세기부터 농업 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봉건 영주들은 주인 없는 땅을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소유 토지를 확대했다. 영주가 농민이 보유한 토지를 회수하거나 합병하는 일도 일어났다(16세기 후반). 생산과정 특화와 집약화가 발생하고 농업이 발생했다... 기사 영주들이 농업 기업가(구츠헤어)로 성장하면서 그룬트헤어샤프트와는 다른 형태의 구츠헤어샤프트Gutssherrschaft(농장 영주제)가 성립되었다. 이 영주들의 후예가 바로 프로이센의 융커 계층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0/228


 서유럽에서는 이후 '상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유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이들이 자유를 얻는 대가로 국왕과 결탁하면서,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계층이 몰락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는 반면, 동유럽에서는 농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이들의 세력이 강대했던 결과로 서유럽과 같은 상업혁명 -> 자본축적 ->산업혁명의 경로를 밟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양상은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대규모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주원인이 되었으나, 중앙집권화로 나가는 과정 - 지방권력인 토지귀족과 국가권력인 관료제 -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동부 독일(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 구츠헤어샤프트가 잔존했다. 대토지 경영은 19세기 농노해방 이후에도 융커 체제로 유지된다. 16~18세기에 독일 지역의 농업 제도는 크게 두 형태였다. 남서 독일에서는 일부 남은 그룬트헤어샤프트를 기반으로 경영 형태가 변화했다. 농민 보유지는 장원 영주가 정하는 일정한 조건하에 분할 또는 상속이 가능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1/228


 농장 영주제Gutsherrschaft는 16세기 이후 엘베강 동쪽 지방에서 행해지던 후기 봉건제적인 농업 제도의 유형이다. 농장 영주제 지역에서는 수출용 곡물 생산을 위해 노동 부역(봉건 지대)과 인신적 종속이 강화되고(재판 농노제), 영주(구츠헤어, 즉 토지 귀족)는 농노에 대한 재판권을 보유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76/228


  독일은 융커(Junker) 세력을 중앙권력으로 포섭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관료제를 발전시켜나가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토지 귀족의 세력을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이 반목하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중앙집권에 실패하면서, 소(小)독일주의를 주창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서 19세기의 민족주의 열풍 아래 여러 국가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후 신생 독립국들이 난립하게 되는 동유럽 슬라브 지역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산업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되었음이 본문에서 간략하게 서술된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58/228 


 정리하자면, 중부-동유럽의 '농장영주제'는 엘베강 동부 지역의 경제적 공통점으로 서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받은 프로이센에서 융커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의 도입으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편입한 반면, 상대적으로 토지귀족의 세력이 강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국가들은 산업화에 실패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공산화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 <중부 유럽 경제사>의 전체 구조다.


 <중부 유럽 경제사>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중부 지역의 경제사를 기술한 책이지만,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는 독일 역사에, 나머지의 절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사에 할당되며 체코, 폴란드, 러시아의 역사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된 책이다. 독일은 중부 유럽에 속하지만, 사실상 서유럽 경제의 중심임을 감안한다면 중부 유럽사의 분량은 매우 부족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월러스틴(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2019)이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말한 서유럽의 주변부로서 동유럽의 경제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요약한 내용으로 큰 얼개만 정리하는 것으로 독서의 의의를 찾는다...


 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75/228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89/228

한자동맹 상인들은 부채, 계약 사항 등을 기재한 사업 장부를 공개하여 동맹의 보증을 확보하는 영업 기법도 개발했다(13세기 말). 이 제도는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인 자본, 위험 감수, 공격적인 사업 추진을 촉진하면서 북유럽 일대에서 신용과 상업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바 ‘상업혁명‘이자 중세 말 유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들이 창출한 엄청난 부 덕분에 징세도 가능해졌다. 이를 기반으로 이제 왕들은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에 의존하는 간접적인 왕국 지배가 아니라, 관료제를 창출하여 점차 근대적인 정치권력을 창출해갈 참이었다.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29/228

명확히 12세기에 서유럽의 변형이 시작되었다. 인간과 토지 관계에만 의존해오던 사회가 상업과 제조업이 농업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로 변해간 것이다. 농산물은 자급자족을 넘어 교환의 대상과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경제활동을 억제하던 장원제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5/228

보헤미아 지역에서 토지 재산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영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하급 귀족은 거의 사라졌다. 농노의 노동 부역 부담은 늘었다. 30년전쟁 이전에 보헤미아에서는 영주도 농노와 함께 조세를 부담했었다. 그런데 1648년 이후에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면세권을 획득했다. 모든 조세 부담이 농노에게 전가되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9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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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30 2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댓글 달기엔 너무 세부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읽고만 갑니다.
항상 겨울호랑이님 글은 배울게 많네요

겨울호랑이 2022-12-30 23:45   좋아요 2 | URL
항상 그레이스님의 좋은 말씀과 격려로 지난 한 해 부족한 글이나마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레이스님의 글을 통해 많이 배워가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내년 한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