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3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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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이라는 존재 속에서 변화하는 것, 움직이는 것이 꼭 문명을 구성하는 전부도, 가장 좋은 면도 아니다. 결코 아니다. 문명 속에는 단기적인, 지속적인, 때로는 장기지속적인 콩종튀르와 구조가 있다. 하나의 문명이 다른 문명의 영역으로 의미 있는 침투를 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난폭한 무력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혹은 역사의 사건들이 만드는 우연이라는 변수들만을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다. 하나의 패턴이 처음부터 너무나 굳건하게 정해져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16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2>는 16세기 지중해 시대의 문명(文明 Civilisation)에 초점을 맞춘다. 앞선 2-1권에서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가져다 준 정치, 경제가 주제였다면, 2-2권에서는 그러한 정치, 경제체제의 결과물인 사회의 변화가 주제다.


 우리는 경제적 콩종튀르와 비경제적 콩종튀르를 분리해야만 한다. 후자 역시 시간의 길이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고, 위치가 정해져야 한다. 세기적인 트렌드와 유사한 것으로는 장기적인 인구 변동, 국가와 제국의 크기 변화, 한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유동성의 유무, 산업 성장의 강도가 있다. 장기적인 콩종튀르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산업화, 국가 재정, 전쟁 등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13


 결과적으로 브로델은 본문을 통해 자연의 만들어낸 구조사(構造史)의 큰 흐름이 이미 결정적인 흐름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흐름은 국면사((局面史)를 통해 사회의 모습을 만들어냈음을 말한다. 서로 다른 상황과 움직임 속에서 여러 계층, 집단은 저마다의 입장에서 각 상황에서는 최선의, 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다. 다만, 부분의 최적화가 전체적인 최적화를 달성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였고, 그에 따라 지중해의 역사 속에서 부르주아, 귀족, 왕, 유대인, 베네치아 등등의 세력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하며 당대의 시대상을 만들어왔다.


 문명은 번영의 시기 ,단기적으로 혼란을 가중시키는 창조의 시기, 경제적인 승리를 구가하는 시기, 단기적인 사회적 시련의 시기를 거치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그러나 토대는 그대로이다. 토대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적어도 천 배는 더 견고하다. 문명이 천 번을 죽는다고 해도 토대는 견뎌낸다. 수세기 동안 단조로운 이동이 계속되지만, 전체적인 토대는 변하지 않는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40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에서 브로델의 결론은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는 더이상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바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제조업에서의 주도권이 북유럽으로 넘어가고, 영국-에스파냐 전쟁(1585 ~ 16045) 이후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교역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지만, 이미 콩종튀르(Conjoncture) 관점에서 분명 지중해는 활력을 잃고 있었다. 이 시기 지중해의 번영과 쇠퇴는 다른 중심지에 의해 종속되는 변수였다는 사실은 세계 패권(hegemony)를 둘러싼 전쟁은 대서양과 북유럽 플랑드르 지역에서 치뤄지고 있었으며, 지중해 연안국들은 이러한 흐름을 되돌릴 힘을 이미 상실했음이 브로델에 의해 상세하게 논증된다.


 전쟁은 없었다. 이것은 또한 지중해가 더 이상 전쟁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는, 즉 전쟁비용을 치를 수 없었다는 증거였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이고, 만물의 자식이며, 수많은 수원을 가진 강이고, 해안이 없는 바다였다. 전쟁은 모든 것의 창조자이지만, 평화 그 자체의 창조자는 아니었다(p700)... 이제 대전쟁은 대서양을 따라 북쪽과 서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전쟁의 거점은 세계의 심장이 뛰는 그곳에서 수세기 동안 머물렀다. 이러한 이동 자체가 지중해의 후퇴를 말해주었고, 두드러지게 보여주었으며, 확고하게 만들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01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를 통해 우리는 '지중해의 황혼(黃昏)'을 보게 된다. 에스파냐의 칼레 해전 패배 이후 다시 돌아온 듯한 베네치아의 번영도, 유대인에 대해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에스파냐의 움직임도 이미 거대한 판 위에서 결정된 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구조적 움직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가정, 예를 들면 '에스파냐가 네덜란드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제국을 유지했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물음은 마치 체스(Chess)에서 폰(pawn)이 여왕(queen)처럼 움직이는 것을 가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할 것이다. 이제는 지중해에서 1권 구조사와 2권 국면사를 넘어 이제 마지막 사건사를 다룬 3권으로 넘어갈 차례다...


 문명의 첫 번째 실체가 경계를 설정하는 지리적 공간이라는 것 외에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문명은 공간이자 영역이다. 이때 공간이라는 말은 인류학자들이 양날도끼 혹은 깃이 달린 화살 지역이라고 말할 때에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한계를 부여하지만 그 인간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p536)... 변화는 분명히 일어난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그 과정을 느낄 수도 없는 속도로 변화한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537


 이베리아 반도를 강타했던 곡물 위기로 인해서 이베리아 반도는 북유럽 국가들에게 막대한 양의 정화를 지불해야 했고, 이렇게 북유럽은 또다시 에스파냐의 "적이지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 대변동은 에스파냐, 베네치아, 피렌체, 심지어는 프랑스에서까지 가격 변동을 일으켰고, 교역량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네치아에서는 티에폴로 피사니 은행이 파산했다. 단기적인 위기, 경제생활의 극심한 혼란, 혼란의 전파와 변화무쌍한 성격이 지중해의 경제 변화의 새로운 지표가 될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2>, p714


느리고 강력한 하나의 근본적인 움직임이 1550년부터 1600년까지 지중해 사회를 조금씩 뒤틀고 변화시켰다. 그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변신이었다. 점차 커져가는 사회 전반의 불안은 공공연한 반란으로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의 모습 전체를 바꾸는 사회적 성격을 가지는 격변이었음에 틀림없다... 사회는 나날이 광대해지는 토지재산을 보유한 부유하고 강력한 대귀족 가문과 점점 더 늘어나는 대다수의 비참하고 가난한 사람들로 분명히 양극화되어가고 있었다. - P512

지중해라는 혼합의 영역 속에서 많은 문명 집단들이 번성했기 때문에 그 결과는 더욱 풍성했다. 한편으로는 문명 간의 교류와 새로운 요소의 유입이 다소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각각의 집단들은 독자성을 유지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파 작가들이 오리엔트의 항구를 그릴 때와 같은 분위기의 너무나도 혼잡한 항구들에서 문명들은 서로 뒤섞였다. - P523

주는 자가 지배한다. 베풂의 이론은 개인이나 사회뿐만 아니라 문명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베풂은 장기적으로는 궁핍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풂이 계속되는 한, 그것은 우위의 표지가 된다. - P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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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 상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
페르낭 브로델 지음, 남종국.윤은주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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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에서는 장기 지속의 역사를 넘어 좀더 개별화된 리듬의 역사, 즉 집단의 역사, 집단적 운명의 역사, 전체적 움직임의 역사를 파악할 생각이다. 이것은 사회사이다. 사회사에서는 인간이 사물을 이용해서 만들었던 것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책에서는 사회구조, 따라서 느리게 변해가는 구조에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또한 구조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것은 전문용어로 구조(structure)와 콩종튀르(conjoncture)라고 부르는 것, 즉 움직임이 없는 것과 움직이는 것, 느리게 움직이는 것과 빨리 움직이는 것이 서로 섞여 있는 것을 말한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1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 집단적 운명과 전체적 움직임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2>를 통해 우리는 에스파냐 제국이라는 구조 안에서의 콩종튀르를 통해 제국이 직면한 어려움을 확인할 수 있다. 1588년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의 패전 이후에도 상당기간 유지되었던 에스파냐의 패권. 브로델은 무적함대의 소멸이 직접적인 에스파냐 제국의 몰락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에스파냐 제국은 구조적인 문제를 갖고 있었고 변화하는 콩종튀르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몰락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것이었다. 에스파냐의 문제. 이는 거대한 제국이 갖는 공간(空間)이었다. 

 

 에스파냐 거대 제국은 당시로서는 유례없이 거대한 해상과 육상 수송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끊임없는 군대의 이동 외에도 수많은 명령과 소식들이 날마다 전달되어야 했다. 펠리페 2세의 정책은 이러한 연결망, 군대의 이동과 귀금속의 수송, 환어음의 원활한 유통을 필요로 했다. 이것이 바로 펠리페 2세의 제국 경영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본질적인 요소들이며, 또한 프랑스가 에스파냐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35


 북유럽 저지대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이탈리아와 신대륙에 걸친 거대 제국을 하나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시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힘들었기에 정치면에서는 적절한 행정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제면에서는 상품과 이에 대응하는 화폐의 교환이 늦춰질 수밖에 없었고, 유통속도(Velocity) 또한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상품 순환의 지체는 이 세계의 고질적인 병폐였다. 상품, 화폐, 환어음이 사방으로 움직이고, 서로 스치고 마주치고, 서로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상거래 중심지는 상품, 화폐, 환어음이 만들어내는 다각적이고 변화무쌍한 콩종튀르를 끊임없이 경험했다. 그러나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화폐, 환어음은 오랫동안 길 위에 머물러 있었다. 16세기에 개인 은행들에게 닥친 비극이 고객의 돈을 너무 느리게 순환하는 상품 거래에 부주의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시작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기나 공황 사태가 발생하면, 며칠 안에 대금 지불이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했다. 거리라는 치명적인 지체 요인에 발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2


 화폐 순환은 인간 삶의 일부 영역만을 관통한다. 중력의 영향으로 강물의 활발한 흐름이 낮은 지대를 향하는 것과는 달리, 화폐의 순환은 경제생활의 높은 단계로 간다. 순환은 끊임없는 불평등을 낳는다. 역동적인 지역 - 도시 - 과 농촌처럼 화폐가 없는 지역 사이에, 근대적인 지역과 전통적인 지역 사이에, 개발 지역과 저개발 지역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했다. 경제 활동 분야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존재했다. 왜냐하면 수송, 산업, 무엇보다도 상업과 징세가 화폐 흐름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35


 신대륙에서 들어온 막대한 금과 은은 에스파냐 본국에서 빠르게 제국의 내외부로 흘러나갔다. 산업의 중심지였던 북유럽 저지대 국가들로의 유출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의 금, 은 유출은 불가피했다. 신대륙으로부터의 막대한 금과 은이 도착했지만, 제국의 모세혈관까지 혈액을 공급하기 위한 출혈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대륙에서의 막대한 수입 이상의 지출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1580년 이후 에스파냐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진정한 은화 분배 중심지가 이탈리아의 중요 상업도시들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핵심을 좀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는 넘쳐나는 에스파냐 은화의 일부를 레반트 지역으로 유출키시는 역할을 통해서 큰 이익을 얻었다. 그것은 수월하게 이익을 남기는 일이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은화와 환어음뿐만 아니라 금화까지도 네덜란드 구석구석에 공급하면서 이익을 얻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85


 북유럽이 필요로 하는 금과 환어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지나치게 많은 양의 은화가 북유럽으로 유출됨으로써 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었다. 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금화는 인기가 높았고, 부피가 작으므로 쉽게 송금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금화와 은화는 계속해서 교환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은 병사들의 급여 일부를 은화로 지불하거나 가능하면 직물로 지급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운 업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음을 분명하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195


 그 결과 제국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과중한 세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과중한 세금 징수는 제국 내 민심의 이반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제국이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588년 무적함대의 몰락이 가져온 대서양 패권의 소멸때문이었다. 대서양 항해의 안전성이 위협받으면서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기존 레반트 지역의 무역이 재활성화되었고, 에스파냐 제국은 이로부터 지중해 패권 또한 위협받게 되었다.


 부당하게 배분된 이 엄청난 세금은 당시의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통해서 징수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세금 중 일부만이 왕실 금고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카스티야는 확실히 제국에 가장 좋은 납세자였다... 간혹 있었던 확실하지 않았던 잉여는 제국의 전체적인 재정 적자 속에 소멸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잉여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는 나머지 유럽 지역에서처럼 카스티야에서도 적자는 관행이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국가의 재정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36


 에스파냐의 실패 이유는 무적함대가 패한 이후 대서양에서의 항해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패배는 동맹세력의 파산인 동시에 대서양 여러 지역에서의  후추 무역의 쇠퇴를 의미했다. 판매 가격의 상승으로 컨소시엄 소유의 후추는 베네치아 시장에서 레반트로부터 들어온 후추보다 더 비싸졌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274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에서 광대한 공간(space)이라는 구조를 갖추었으나, 변화하는 콩종튀르에 대응하는 충분한 속도(speed)를 갖추지 못한 에스파냐 제국의 사회사를 보여준다. 느린 속도는 제국을 동맥경화 상태로 만들어 정보, 행정, 교역면에서 효율적인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치명상은 입지 않았으나, 군사적으로 제국은 한풀 꺾인 상태였고 그 결과 높아진 대서양 항해 위협은 경쟁자인 베네치아, 오스만 투르크에게 몰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펠리페 2세이 아버지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부터 내재했으나, 강대한 제국의 위용 아래 숨겨졌던 약점들이 하나 둘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은 내외부적으로 어떤 도전을 받았는가. 이는 2-2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제 제국에는 과거의 장식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를 5세의 웅대한 정책은 펠리페 2세 치세 초기, 1559년에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이미 1557년의 재정 파탄으로 갑자기 유죄선고를 받고 청산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재출범시켜야 했다. 펠리페 2세의 통치 초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평화정책은 제국의 약화를 보여주는 신호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2-1>, p409


인구 증가 없이 그 모든 영광의 역사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인구혁명은 가격"혁명"보다 더 중요했으며, 어떻게 이 사건이 아메리카의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전에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인구 증가야말로 인간이 능력 있는 일꾼이었다가 점차 큰 부담으로 바뀌는 16세기의 승리와 재앙을 만들었다. 1600년경 인구 부담이 경제발전을 중단시키고, 범죄 같은 그동안 숨어 있었던 사회적 위기 현상을 조장했다. 이로 인해서 17세기에는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후퇴가 일어나고 곧 씁쓸한 내일을 맞게 될 것이다. - P72

문제는 16세기의 팽창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후퇴 국면을 만회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했는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상업 자본주의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난 뒤에 산업 자본주의가 그 뒤를 잇게 되었고, 산업 자본주의는 16세기 "귀금속 화폐"의 2차 등귀가 시작되면서부터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결국 산업이 경제 후퇴를 만회했다는 뜻이다. - P105

가장 많은 양의 은을 유출시킨 원인은 에스파냐 국왕 자신과 전반적인 정책 기조였다. 푸거 가문이 그들의 슈바츠 광산에서 채굴한 은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사용하여 수익을 올린 것과는 달리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은을 국내 투자에 사용하여 다양한 투자 이익을 창출하는 대신에 국외로 유출시키게 되었다. 해외 유출량은 카를 5세 시절에 이미 상당했고, 펠리페 2세 시대에는 방대한 양이 되었다 - P165

국가는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덜 겪었다. 국가 재정은 세 가지 부문, 즉 재정 수입, 지출, 부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 번째이자 결코 덜 중요하지 않았던 부채는 가격 상승의 여파로 자동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지출과 수입은 동일한 리듬으로 증가했다. 모든 국가는 수입을 증대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가격 상승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확실히 국가는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한 지출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16세기에 서서히 확대된 엄청난 수입을 확보하고 있었다. - P233

에스파냐 경제는 의심의 여지없이 대략 1580~1590년대에 큰 전환기를 맞았는데, 첫 번째로 농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펠리페 2세가 1580년에 합병할 당시 포르투갈은 안에서부터 썩은 나라였고,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영양 결핍과 질병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16세기 말 유럽 전체의 후퇴에 앞서서 에스파냐를 강타한 전염병은 이를 잘 설명한다. 이러한 위기는 근본적인 균형을 뒤흔들었다. - P312

북유럽이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제조업 제품을 체계적으로 모방했고, 이렇게 생산된 저렴한 제품을 통해서 조금씩 이탈리아의 제조업 제품을 시장에서 몰아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북유럽의 값싼 노동력 덕분이었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된 저질의 "새로운 모직물"은 가짜 상표를 붙이고 가짜 봉인을 해서 레반트 시장에서 베네치아 모직물인 것처럼 판매되었다. - P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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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 환경의 역할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페르낭 브로델 지음, 주경철.조준희 옮김 / 까치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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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펴본 지역, 이처럼 밀집되고 복합적이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 지역에 어떤 단일성(unite)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람들이 모여들고 역사들이 혼합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지중해의 중심에는 지중해를 하나로 만드는 강력한 자연의 단일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기후이다. 기후가 지중해의 풍광과 삶의 방식을 하나로 만들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99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 1902 ~ 1985)의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La Mediterranee a l'epoque de Philippe II vol.1>에서 우리는 단일한 기후 아래 묶여있는 지중해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경작지도, 목초지도 갖춰지지 않은 척박한 곳. 비가 내리면 흙의 영양분이 쓸려 내려가 오히려 강한 햇볕이 지력을 유지시켜 준다는 지중해성 기후는 이들을 교역(交易)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밀어버렸다. 


  기후학자들이 보기에 지중해는 마땅히 서로 구별되어야 할 다양한 일군의 소기후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간의 유사성 혹은 부정할 수 없는 단일성을 지우지는 못한다. 반면에,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같은 기후, 같은 계절적 변동, 같은 식생, 같은 색채, 또 지형적 구조 덕분에 같은 풍경이 거의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궁극적으로는 삶의 방식이 같다는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306


 지중해 지역의 바다는 육지보다 결코 더 생산적이지 않다. 극히 자랑하는 해산물은 그저 소박한 양만 생산될 뿐이며, 이곳의 어장은 산출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생선의 부족은 어부의 부족, 그리고 곧 선원의 부족을 초래했으며, 이는 지중해 세력의 대사업에 보이지 않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다. 정치적 야망과 실제 사이에는 언제나 이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176


  이러한 자연 환경이 지중해 인근 주민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유사한 삶의 형태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단일성을 부여했다면, 이러한 단일성은 다양성의 밀바탕이 된다. 자급자족할 수 없는 지중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구성원들은 내외부에서 긴밀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렇게 형성된 교역관계 속에서 우연과 필연이 누적되면서 지중해의 정치 패권은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베니치아, 제노바, 오스만 투르크, 에스파냐 등으로 차례로 옮겨가게 된다. 


 지중해 역사의 중심에는 항상 이중고, 곧 빈곤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어쩌면 이 이중고 때문에 지중해 사람들은 조심스럽고, 검약하고, 부지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이중고가 동기가 되어서 지중해 나라들은 특정한 방식의 제국주의를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지중해는 내재적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행동을 취해야 했고, 외국으로 나가야 했고, 먼 나라들의 협력을 구해야 했고, 그곳의 경제와 연결되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지중해의 역사는 더욱 확장되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320 


 각각의 바다는 독자적으로 살아간다. 지중해의 동서쪽 양쪽 해역 모두 자신의 선박들을 이용하여 자체적인 운항 시스템을 조직했다. 양쪽이 서로 소통하고 연결점들을 유지하긴 했지만, 자체의 폐쇄적인 회로를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p172)... 1559년 이후 프랑스 함대의 쇠퇴, 프랑스와 투르크 제국 사이의 관계 약화 이후 서부 지중해는 명백히 에스파냐의 바다가 되었다... 반대로 이오니아 해, 즉 "크레타 해"는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다. 이 두 개의 상이한 지중해 구역은 쌍둥이 제국주의의 매개체이자 창조자였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173 


 브로델은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에서 지중해의 생활에서 큰 틀인 환경에 대해 말한다. 저자가 제1부에서 보여준 이 틀은 지중해의 문화에 큰 영향을미쳤고, 역사의 큰 줄기 속에서 일종의 공식(公式)을 보여주며, 장기(長期)의 역사의 순환을 이해하게 만든다.


 바다의 삶. 그 생명력은 가장 작은 곳, 가장 무게가 덜 나가는 부분을 먼저 통제한다. 그것은 섬과 일부 연안 지역으로, 마치 북유럽의 밀물과 썰물이 조약돌을 가지고 놀 듯이 이리 던지고 저리 돌리고 하는 것이다. 점차 더 강해지고 더 강제적이 되자 이 힘은 자신의 궤도 안으로 더 큰 덩어리들인 반도들을 끌어들이는데, 이렇게 되면 바다의 역사는 한 수준 더 위로 상승한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순간은 그 힘이 매우 강력해져서 드디어 대륙 덩어리 전체를 끌어들일 때이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12


 그렇지만, 이러한 대류(大流)에 대한 이해는 펠리페 2세의 시대라는 한정적인 시기에 대한 설명을 온전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의 또다른 저작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보여준 3층 구조 - 교환,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 - 에서처럼 보다 깊은 역사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제는 2층 지중해의 사회사로 넘어갈 차례다...


 역사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리를 통제하고 발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다시 한번 설명할 수 있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291


 도시 역사의 역동성은 우리를 원래의 주제의 바깥으로 데리고 간다. 제1부의 목적은 논의의 초점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특징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상적인 통계들, 반복적인 현상들, 지중해 삶의 기반들, 지중해의 진흙 바닥과 잔잔한 물에 두는 것이었다. 도시들은 내연기관과 같아서, 회전하고, 활력을 띠고, 헐떡거리다가 다시 전진한다. 내연기관의 고장 그 자체도 우리를 변동의 세계로 이끄는데, 그것은 제2부의 주제이다. 고장은 우리에게 진화와 콩종튀르를 말해주고, 우리에게 운명선을 예감하게 한다. 16세기 말에 이미 여러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쇠퇴는 17세기 들어서서 더욱 급격해졌다. _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1- 환경의 역할>, p470



카스티야의 현저한 팽창 사례는 명백한 결론에 이른다. 이목은 내부와 외부의 복잡한 구조들 그리고 중량감 있는 제도들을 전제로 한다. 카스티야의 양모는 세고비아와 같은 도시 및 시장을 필요로 한다. 양모를 선배하고, 피렌체인과 마찬가지로 양모를 세탁할 수 있는 대형 통을 소유하고 있는 제노바 상인들, 이 대상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카스티야의 중개인들, 양모 운반인들, 빌바오에서 플랑드르로 해상운송을 책임지는 선단들, 알리칸테와 말라가를 통해서 이탈리아행의 수출을 담당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일상의 차원에서 관찰한다면 목장에서 가축들에게 먹일 소금을 구매하고 수송하는 사람 등이 모두 연관되어 있다. - P116

16세기 이후 기술적으로 그리고 산업적 진보에서 혁신을 경험하는 서방 세계와 그렇지 못한 동방 세계 사이에 생활수준의 차이가 갈수록 벌어졌다. 서방으로부터 생활비가 싼 동방 세계로 들어오는 화폐는 자동적으로 가치가 상승했고 더 큰 구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수준 차이가 어떤 면에서는 두 지역 간의 경제적 통합성을 재창조했다. 지중해 역사의 흐름을 유발하고 더 나아가서 원격 지배하는 것은 그와 같은 심층의 요구, 균형의 혼란과 회복, 필수적인 교환이기 때문이다. - P175

모든 활동이 상업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활동이 상업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매력에 의지했다. 대규모 장거리 상업의 절대적 필수 조건, 곧 자본의 축적이 상업 자본주의의 원동력이었다. 제노바, 피렌체, 베네치아 및 밀라노 등지에서 공업 활동은 상업 경제가 규정한 공간 내에서 부양되었고, 특히 새롭고 혁명적인 직물업, 곧 면직물과 견직물의 경우가 그러했다. 폴 망투의 고전적인 이론, 곧 공업은 상업에 의해서 창출되고 육성된다는 이론은 이미 16세기에도 사실이었다. - P422

지중해와 주변 사막 간의 갈등은 단순히 가축과 쟁기 간의 대립 이상의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종류의 경제, 문명, 사회, 삶의 방식의 충돌이었다. 러시아의 역사가들은 스텝으로부터의 침략은 언제나 먼저 유목 문명의 변화, 곧 원시 단계에서 "봉건적인" 사회로의 이행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슬람의 성공적인 정복 과정에서 종교적인 신비주의의 발흥이 기여한 바는 잘 알려져 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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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도시 엘리트들의 읽기·쓰기 능력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고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대 수메르어는 이미 수세기 전에 구어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나, 부유한 바빌론 주민은 여전히 이를 공부하여 시와 학문을 이해했다. 또한 신전 예식에 필요한 일부 기도문과 성가 역시 수메르어를 이용했다. 그리고 법률 문서 등에서 수메르어가 널리 통용되던 함무라비 왕조 때와는 대조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는데도 수메르어를 공부하는 것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여 주는 강력한 도구였다. 누구나 이를 위한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사다난한 시기에 마르두크의 역할은 재해석되기 시작하여 바빌론 왕과의 관계가 영구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4 마르두크는 점차 단순히 ‘주인’(벨)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세상을 지배하는 독보적인 통치자로 인식되었다. 왕권은 더 이상 타고난 권리로 여겨지지 않고, 신이 바빌론의 왕으로 인정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바빌론의 새로운 왕위 승계 원칙은 부친에게서 아들로 왕권이 전수되는 아시리아 등 주변국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정치권력이 왕가에서 마르두크 신전으로 옮겨 가며 신전공동체가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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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정치적 지형은 함무라비에 의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기존의 강대국인 엘람과 얌하드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다수의 군소 국가들이 이제 하나의 왕국이 되었다. 수사와 할라브의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바빌론 왕국의 영토는 페르시아만에서 북부 이라크까지 아우렀다.

고고학자 도미니크 샤르팽은 바빌론의 라르사 합병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바빌론의 문화적 영향력이 이후 2천 년 동안 중동에서 지속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라르사 궁정의 세련되고 교양 있는 인물들은 소박한 함무라비 궁정에 편입되면서 바빌론의 정치·종교·문화·문학·예술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바빌론’ 문화가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함무라비법전이다. 이 법전은 함무라비가 새로이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여 년 전 우르 왕국이 몰락한 뒤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던 이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그의 전략에 있어 새로운 법규범의 도입은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었다. 함무라비법전은 각 도시국가의 수용과 안정을 보장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텍스트 첫 줄의 기록에 따르면 가장 높은 두 신 즉 신들의 주인 아누와 땅의 주인 엔릴이 함무라비를 통치자로 정하고, 바빌론과 마르두크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함무라비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수도 바빌론이 새 왕국 내에서 명성을 떨치자, 바빌론의 도시 신 역시 신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 신에 불과하던 마르두크가 서서히 전 세계의 독보적인 지배 신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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