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역사 1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7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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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금속문화 시대에는 온갖 종류의 문화적 영향, 온갖 소식과 지식,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형태들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우리 땅에 침투해 들어왔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경로들은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는 아시아 및 지중해 연안지대로부터 온갖 문물이 전파되었던 흑해 연안으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서아시아, 투르케스탄과 오늘날의 페르시아로부터 흑해 북부 초원을 거쳐서 이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또한 오늘날의 헝가리에 해당하는 도나우 강 유역 지역에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지중해 연안의 영향으로 금속 기술이 발달해 있던 알프스 기슭 나라들로부터 문물이 전해지는 전파로가 있었다. 끝으로 우리 선조들은 서쪽의 독일인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받아들였다. 우크라이나 옛말 가운데 독일어로부터 차용한 명칭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 이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흑해 연안 지역으로부터, 그리스 식민도시들로부터 이 땅에 전해진 문물이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105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1>는 시간적으로 선사시대부터 16세기 리투아니아-폴란드 왕국 지배하의 시대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그리스, 로마에서 찾으면서, 친서방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의 지리적 중심을 키예프로 잡지만, 저자는 흑해 연안에 자리잡은 그리스-로마의 후계자로 민족문화의 성격을 규정지으며, '슬라브의 우크라이나'와는 선을 긋는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의 쇠퇴원인을 제공한 외적(外適) 중 하나에 불과하다.


 모노마흐의 막내아들 유리의 자손들(후일의 모스크바 왕조의 조상들)은 볼가 강 유역지방에서 뿌리를 내린 후, 그들 스스로 공들 중에서 최고 지위를 확보하려는 야심을 품게 되었고 이를 위해 키예프를 더욱 약화시키고 키예프 공을 전혀 중요치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 유리의 아들 안드레이는 우크라이나에서 공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하여 이 분쟁에 개입했고 1169년 키예프를 짓밟으려는 목적으로 일부러 키예프에 자기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이 군대는 실제로 키예프를 점령한 후 이 도시를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이미 키예프의 전면적인 쇠퇴가 시작되었다. 훗날 타타르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살육은 앞서 일어난 이 대혼란에 무엇인가를 조금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드니프로 강 유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삶은 일반적으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96


 비잔티움 제국과 새로운 로마라고도 불리던 그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이 무렵 당대 세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광채와 문화, 영광과 힘의 정점이었다. 그 당시에 생겨난 이러저러한 새로운 국가의 창시자들, 건설자들은 세계의 등불인 이 비잔티움의 광채와 영광으로 자신과 자기 권력을 치장하려고 애썼으며,  또 이를 위해 비잔티움 황제 궁정과 인척 관계를 맺고 이로부터 여러 가지 귀중품을 얻으려고 애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0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기틀이 키예프 루스 대공 볼로디미르 1세(958~1015)에 의해 마련된 것으로 파악한다. 키예프 공국 내의 여러 가문들과의 관계 설정, 정교회와의 연계 등을 통해 '루스'의 일원이라는 공동체 이념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이러한 기틀은 이어지는 이민족의 침략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결속력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민족의 근간은 키예프 루스 시대로 잡을 수 있다. 이 시기는 비잔틴 문화가 우크라이나 지방 곳곳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볼로디미르는 혈연관계가 없는 총독이나 공, 혹은 키예프 공의 가문과의 연관 관계가 약화되거나 망각되거나 한 먼 친척들 대신 키예프의 각 영지들마다 자기 친아들들을 앉혔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만 해도 이미 추후의 관계를 위해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순간부터 키예프 국가의 뭇 지방에서는 왕조적 이념이 역사를 이끌어가게 된다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26


 이제는 공통이 신앙과 교회, 키예프 수도대주교 산하에 위치하는 공통의 고위 성직자층과 성직자 집단, 서책 문화와 강력한 교회적 색채를 띤 학식, 그리고 예술도 역시 이들을 한데 연결시켜 주고 있다. 이때까지는 동방의 예술 곧 페르시아-아랍 예술이 강한 영향력을 가지면서 그리스 예술의 영향과 경쟁하고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국가종교와 결부된 비잔티움 문화와 예술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루스-비잔티움' 문화가 우크라이나 땅에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키예프 국가에 속한 동유럽 지역 전역에서 오랫동안 지배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6


 키예프 국가에 의해 그것도 주로 볼로디미르 시기에 추가된 이 모든 새로운 유대는 우크라이나 땅과 우크라이나의 종족들을 서로 통합시켜 준 것만으로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벨라루스 땅과 대러시아 땅도 역시 감싸 안았으며, 종족적, 민속지적 차이들을 지우고 약화시켰다. 이같은 차이들은 신앙과 교회 곡위 성직자층, 서책 문화, 법률의 공통성과 루스라는 공통의 이름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미 느낄 수 없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37


 볼로디미르와 아들 야로슬라프를 이은 후계자들의 계승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서유럽의 봉건제와는 다르게 주민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와 같은 우크라이나 민중만의 역량은 후대 위기상황에서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주류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주민들은 이미 기들이 자기네 현지의 세습지배가문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런 가문 출신의 공들을 옹호하고 지켜주었으며, 새로운 골육상쟁, 새로운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다른 공들이 이 공들을 해당 지배영지로부터 몰아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 루스 국가는 다만 명목상으로만 키예프 공을 수석으로 인정할 뿐 실제로는 키예프 공에게서 완전히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고 지배하는 독자적인 공의 가계, 곧 세습지배가문의 다스림을 받는 개별적 공령들로 결정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세분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65


 공의 수가 많아지고 이들이 일정한 공령에서 공고하게 지위를 굳히게 됨과 동시에 공과 공령, 즉 공령, 즉 공령 주민들 사이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발전해 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공에 대해 큰 힘을 가지게 되었고 공의 통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관계의 변화를 요구하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공을 거부하고자 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281


  키예프 루스 시대 후반부의 느슨한 영주들의 연대는 13세기 몽골인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고, 결국 키예프가 함락되면서 몽골제국에게 복속당하게 된다. 뒤이어 리투아니아 대공국, 폴란드 왕국에 차례로 지배당하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은 위기를 겪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치를 인정해 주었던 몽골제국과는 달리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던 폴란드 치하에서 폴란드 문화가 확산되면서 민족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소멸될 위기에 처한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의 희망으로 떠오른 세력이 바로 '코자크'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는 한 유목민 집단이 우크라이나 주민들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그들과 교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사나운 성격도 상실해 버리고 나면 그런 유목민들 대신 또 다시 새로운 약탈적 유목민 집단을 쉴새 없이 흑해 연안 초원지대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삶과 문화에 이미 그토록 여러 차례 심각한 타격을 입힌 바 있다. 이러한 약탈 중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할 또 하나의 침입이 1230년대에 우크라이나에 쳐들어온 몽골-타타르인들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10


 리투아니아 공들과 폴란드 사이에서 1380년까지 할리치나-볼린 공령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피비린내 나고도 끈질긴 싸움의 종말은 갑작스러웠다. 그것은 곧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리투아니아 대공의 통치권 아래 연합을 하되, 리투아니아 대공이 폴란드 왕관을 얻는 대신 리투아니아의 모든 영토를 폴란드에 합쳐 영원히 '통합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의 단순한 일개 지방으로 전환시키면서 두 나라를 통일할 의무를 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p366)... 그들 사이에 이러한 약정이 1385년 8월 15일 리투아니아의 크레보에서 맺어졌다. 이것이 이른바 '크레보 연합조약'으로, 이는 우크라이나 땅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향후 역사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할 수 있는 지극히 중요한 조약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368


 1569년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이 폴란드에 병합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사회 체제는 완전히 폴란드 방식으로 재편되었는데, 이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p468)... 우크라이나의 생활은 폴란드식으로 변하였고 폴란드화하였다. 이것은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일어난 총체적 변화였으므로 우크라이나 생활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자체의 민족성과 단절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우크라이나적 요소들은 우크라이나 생활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내던져버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69


 원래 타타르 한국에 의해 폐허가 된 키예프 지역으로 몰려든 이들을 일컫는 코자크 집단은 경계활동을 통해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었지만, 무역에 종사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가고 그들을 지배하던 집단과의 충돌을 통해 서서히 우크라이나 민족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몽골,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지배 아래에서 사라져가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기는 이들 경계인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들의 활약상은 <우크라이나의 역사 2>에서 본격화된다.


 해마다 봄만 되면 키예프 지방의 폴리시아 뿐 아니라 볼린, 벨라루스 같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키예프로 몰려와서 이곳 '출경(出境) 장소'에서 흩어져 돌아다니면서 어렵, 맹수 사냥, 꿀벌치기 등을 했다. 그들은 '바타가'라 불리는 두레(아르텔)를 만들어 모인 후 우두머리인 오타만을 뽑았고, 무기와 필요한 물자를 준비해서 이른 봄이 되면 초원 '출경 장소'로 떠났다... 노획물을 얻기 위해 한두 번 초원에 머무른 적이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이는 자기네 살림살이를 좀 더 낫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출경활동 자체에 이끌렸고 이것이 그들의 통상적인 생존수단이 되었으며, 그들은 출경활동을 할 수 있는 곳 가까이 머물렀다. 이런 활동은 코자체스트보, 즉 코자크 일이라 불렸고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은 코자크라 불렸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22


 민중 생활의 이 같은 변화에 따라 코자크 집단은 새로운 힘과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코자크 집단은 이제 단순히 동부 우크라이나인들의 생활에서 등장한 생활방식의 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폴란드 국가의 귀족지배체제 전체에 대항하여 솟아오른 큰 사회적 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민대중에게 폴란드 귀족지배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약속했고 폴란드 귀족체제 자체를 향해서도 파괴와 몰락이 닥치리라고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 생활의 변화는 한편으로는 코자크들이 인민대중과의 관계에서 비범한 흡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코자크 집단이 성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486


 폴란드 지배는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을 농노로 전락시키고 경제를 황폐화시켰으며, 도시를 몰락시키고 우크라이나 소시민들이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우크라이나인들 중에서는 토지소유자 계급만이 유일하게 국가 법률에 의해 정치생활에 참여하고 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1> , p511


 16세기 코자크의 대두까지 다룬 <우크라이나의 역사 1> 속에서 저자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 문화의 근원을 비잔틴에서 찾는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폴란드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강제통합과의 저항 속에서 우크라이나가 동방정교회의 적통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우크라이나 인만의 독창성은 저자에 의하면 키에프 루스 시기에 성립된 민중의 민족의식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코자크 집단으로 표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구 소련 지역의 일부가 아닌, 슬라브 민족이면서 그리스-로마 문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우크라이나인의 모습을 <우크라이나의 역사 1>을 통해 발견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들이 바라보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생기는데, 이는 후에 러시아사를 통해 정리하는 것으로 일단 넘기자...

확산 이주 이후에 우크라이나 땅에서 가장 큰 상업 중심지가 되어간 곳은 키예프이다. 도시의 위치가 그 같은 성장을 유리하게 도와주었다. 왜냐하면 드니프로 강을 따라, 그리고 이 강의 가장 중요한 지류로서 키예프 위쪽에서 드니프로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프리퍄트 강과 데스나 강을 따라 운반되어 온 모든 상품들이 키예프에 집결했기 때문이다. 강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상업로였다. - P157

일반적으로 말해, 공령들의 개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 공령은 각기 개별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각각의 공령에서는 현지의 관계가 각기 다양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와 동시에 체제와 생활방식의 공통적 특징들도 강화되면서 현지의 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다. 키예프의 법은 공들과 드루쥐나들에 의해 모든 공령에 보급되었고, 현지의 재핀과 행정에 도입되었다. - P283

14세기 중반에 우크라이나 땅의 정치적 자립성은 종식되었다. 할리치나는 폴란드가 점령했고 볼린은 점차 리투아니아의 일개 지방으로 전환되었다. 키예프 지방과 체르니히브 지방에 있던 다른 공령들도 역시 리투아니아 출신 공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국가생활은 종식되었다. 우크라이나는 규모와 연륜이 다양한 공령들로 이루어졌고 공의 가문 구성원들이 증가함에 따라 공령들은 점차 세분화되고 영세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p336)... 12세기 후반부터 수즈달 공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기를 쓰면서 고의적으로 키예프 공들의 권위를 깎아내렸고 12세기 말부터는 할리치나의 공이 서부 우크라이나 전체의 수석군주가 되었다. 키예프는 얼마 동안 여전히 드니프로 강 유역 지방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 후에는 차츰 이곳에서도 중요성을 잃어 버렸다. - P337

리투아니아에 대항하고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의 공들과 영주들에게 강요한 굴욕적인 상황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도움을 얻고자 하는 생각은 이 일파(一派) 사람들 사이에서 꺼지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의 힘을 믿고 정교도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정교도들이 정교 국가인 몰다비아와 특히 모스크바에 의지하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스크바는 오래전부터 옛 키예프 국가의 고토를 수합한다는 과업에서 리투아니아와 경쟁관계에 놓여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 P394

시간이 지날수록 코자크는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변경지대 적들과의 전투 외에는 어떤 의무에도 얽매지 않는 자유인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이 점점 더 강하게 발전하고 더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코자크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선출된 코자크 권력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16세기 말에는 코자크 신분, 코자크 지위가 형성되었으며 인민대중은 코자크 권리와 특혜를 누리기 위해 코자크 집단에 가입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코자크 집단은 커다란 사회 세력이자 중요한 사회적 요인이 되어갔다. - P457

16세기 마지막 4분기부터 17세기 전반 사이 동부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완전히 변했다. 얼마 전까지 타타르인들이 다녔던 도로에는 몇몇 도시가 새로 생겼고, 얼마 전까지 코자크들의 출경지점이었던 곳에는 마을들이 넓은 지역에 흩어져 형성되었다. 귀족들의 크고 작은 성이 출현했고 자주 대리인과 관리인들이 이곳으로 파견되어 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직 야생마들만이 풀을 뜯고, 초원의 나리새 풀만 바람결에 윙윙거리던 곳에 폴란드의 법제도와 질서가 물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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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5-18 2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터키가 기독교의 ‘정교’ 혹은 정통 기독교라는 것을 좀 더 마케팅 잘 하면 이태리 로마보다 터키 이스탄불을 사람들이 좀 더 많이 관심 갖고 더 많이 방문할텐데요, 현재 이슬람 국가라 홍보에 한계가 있는 거 같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19 08:26   좋아요 1 | URL
터키의 많은 지역이 과거 비잔티움 제국이었기에 많은 유적이 있지만 이슬람 시대를 거치며 모스크화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야 소피아(하기야 소피아) 성당처럼요. 이에 더해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일어난 기독교 처형 등으로 갖는 순교지로서 의미도 로마가 갖는 부분이라, 동방교회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서방교회 중심지 로마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 성지라 생각됩니다. ^^:)

종이달 2022-05-20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0 23:04   좋아요 0 | URL
종이달님 감사합니다
 

 우크라이나 엘리트층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러시아 국가의 일원으로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추종했다. 러시아 정부의 관제민족주의를 실리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든 루스인의 통합이라는 과제에 대러시아인 못지않게 진심으로 열중하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는 사실 상당히 모호했고 우크라이나 지식인 가운데 일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분리주의‘를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비판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재통일을 가능케 했으니 이를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의 동상 건립을 주도했던 유제포비치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P26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 루스의 역사》7권은  ‘코자크의 시대‘ 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 후  10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코자크 지도자들과 코자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서술로 채워지고 있다. 흐루셰브스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까지 여긴다. 1991년 독립 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와 역사학계는 코자크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여기에는 흐루셰브스키의 역사 해석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 P64

흐루셰브스키의 이러한 목적론적 사고와 밀접히 관련된 것이 동서 우크라이나의 연결성, 단일성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옛 키예프 루스의 동북부지방과 서부지방을 구분하여 서부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구성 부분으로 확신하는 반면 동북부지방은 이 구성에서 제외해 버린다. 동북지역이외부자로 여겨지는 반면 서부지역은 키예프 루스의 적통을 공유하는 우크라이나 공들의 통치영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 P68

같은 동슬라브 민족이라 할지라도 벨라루스인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상반되게, 흐루셰브스키는 러시아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
그는 키예프 루스 시기에 키예프 공령과 마찬가지로 류리코비치들이 통치하고 있던 수즈달 공령을 비롯한 동북부 지역을 키예프 루스에서 제외하고 이를 외부자로 부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에서 그는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체에는 루스 혹은 그 변형인 러시아 (루스의 땅)라는 나라 이름을 좀처럼 인정해 주고자 하지 않는다. 루스의 형용사이자 러시아의 형용사이기도 한 ‘루스키‘라는 말을 그는 오로지 우크라이나-루스를 위한 형용사로만 사용하고자 한다.  - P71

흐루셰브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성이 러시아와는 다르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보다는 서방에 더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는 할리치나에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드니프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통치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물론 비판적인 서술이 없지 않지만 이런 경우에도 오스트리아 제국이나 제국 지배자의 사정을이해해 가면서 온건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한 흐루셰브스키인지라 그가 이끄는 중앙 라다 정부가 러시아 혁명 이후  불확실성이 가득한 상황에서 독일 군을 불러들인 것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독일 세력의 지원을 받자는 의도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가 기본적으로 독일을 서방의 일원으로 보았고 러시아보다는 독일과의 정치적 동맹을 선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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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경제는 농업활동, 노점, 수공업 작업장, 상점, 증권 거래소, 은행, 정기시장(定期市場), 그리고 물론 시장에 연결된 생산과 교환의 메커니즘들을 뜻한다. 경제학은 바로 이러한 명료한, 심지어 "투명한(transparent)"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서 활발히 움직여가고 또 그렇기 때문에 파악하기 쉬운 과정들에 대해서 먼저 연구하기 시작했다. 즉 경제학은 처음부터 다른 것들을 사상한 채 이런 특권적인 분야만 골라서 보았던 것이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2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s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apitalisme>의 기본가정은 '물질문명',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로 구분된다. 경제학(Economics)가 관심을 갖는 정량화(定量化)된 경제영역이 '시장경제' 부분이라면, 그 아래로 GDP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가사노동 등이 위치한 물밀문명 영역이, 상층부에는 계급화된 '자본주의' 영역이 위치한다.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하여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다. 지표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 폭넓은 영역을 나는, 더 알맞은 이름이 없어서, "물질생활(la vie materielle)" 혹은 "물질문명(la civilisation materielle)"이라고 명명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시장이라는 광범한 층의 밑이 아니라 그 위로 활동적인 사회적 위계가 높이 발달해있다. 이러한 위계조직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교환과정을 왜곡시키며 기존 질서를 교란시킨다. 원하든, 아니면 의식적으로 원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비정상과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며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한다.... 시장경제의 투명성 위에 위치하면서 그 시장경제에 대해서 일종의 상방(上方) 한계를 이루는 이 두 번째의 불투명한 영역은 나에게는 특히 다름아닌 자본주의의 영역이었다. 시장경제 없이 자본주의는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에 자리잡고 그곳에서 번영한다. _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p13


 이러한 구조에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권의 책 <일상생활의 구조>, <교환의 세계>, <세계의 시간>이 각각 대응한다. 이하 각 권의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리뷰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하겠지만, 피라미드구조로 형성된 삼분법 구조 위에서 브로델이 끌어내려고 한 결론만 간략하게 확인하도록 하자...


 나는 다만 경제의 하층(下層)이 상당히 두텁게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지 상관없지만 중요한 것은 하여튼 그것이 존재하며 독립된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총화이며 우리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너무 성급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삼분할(tripartition)" 체제, 여러 층을 가진 경제라는 개념은 과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모델이며 타당한 관찰의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지상층을 고려하지 않은 통계는 불완전한 분석일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상층에서 하층까지 모두 아우르는 자본주의 "체제(systeme)"라고 하는 관점은 여러 면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3-2>, p867


PS. 물질문명을 다루는 1권에서는 마귈론 투생 사마의 <먹거리의 역사>와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는 3권 세계의 시간편과 함께 정리하면 좋을 듯하다. 이는 다음 페이퍼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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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11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앞으로 올려주실 글들이 기대가 되네요*^^* 항상 지적 자극이 되는 글 올려주셔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4-11 16:18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솜씨로 대작의 전체 모습을 리뷰 안에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지만 이번 기회에 정리해보려 합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 격려해주시니 미루지 말고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2-04-11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재독이신가 봅니다. ^^

겨울호랑이 2022-04-11 19:31   좋아요 1 | URL
네, 매번 정리한다 해놓고 계속 밀렸네요. 이번 기회에 리뷰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
 

결론적으로 우리는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기간 동안 세계의 차별화된 운명에 대한 일차적인 인식을 얻기 위해서 수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커다란 덩어리들로 나뉘어 있었고, 이 각각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서로 다른 장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사회 내부에서 보더라도 여러 집단의 일상생활이 서로 다른 것과 유사하다.  - P133

우리는 수천년에 걸쳐 늘 다시 출발하는, 그리고 답보하는 인간의 모험이 하나이며, 공시성과 통시성이 함께 만난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더욱 많이 살펴볼 수도 있다. "농업혁명"은 기원전 8000 -기원전 7000년 전의 오리엔트에서와 같은 몇몇  특권적인 곳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퍼져가야 했으며 그 진보는 결코 단 한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경험들은 끝없이 긴 똑같은 여로를 따라가지만, 그것은 수세기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47

우리는 이 변화의 광기가 진정으로 형성되기까지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앙리 4세의 궁정에서 한 베네치아 대사는 이렇게 말한다 : 25-30벌의 의복을 가지고 날마다 옷을 바꾸어입지 않으면 부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유행이라는 것은 단지 양이  풍부하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필요한 순간에 방향을 잘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계절, 날, 시간의 문제이다. 이런 엄격한의미에서 유행이라고 하는 제국은 1700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1700년경에 이 단어는 두번째 젊음을 되찾아서 새 뜻을 가지고 전세계를 휘저었다 : 그것은 시세(時勢)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오늘날의 의미로 유행을 쫓아갔다. 그때까지 사물들은 그렇게 빨리변화하지 않았었다.
- P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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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층 민중에게 수십년간의 종교 대립은 환멸을 불러 일으켰고 환멸은 체념을 낳았다.비록 그들은 세네카를 알지 못했지만 지상에서의 구원이 성직자로부터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내전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결과는 문화적 질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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