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실로 현대 유럽에는 엄청나게 중대한 10년이었으나, 당시 중요하게 보였던 모든 것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의복이나 생각에서 자족적인 인습 타파의 충동은 매우 일찍 시작했다. 역으로, 1960년대 말에 정치와 공무에서 시작된 진정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몇 년 더 걸린다.

유럽의 공립 중학교, 리세, 김나지움은 지배 엘리트 양성소였다. 한때 농촌과 도시의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차단되었던 고등 교과과정이 이제 증가 일로에 있는 모든 사회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개방되었다. 점점 더 많은 어린이들이 중등학교에 진학하여 과정을 마쳤고, 그 결과로 그들의 세계와 부모들이 아는 세계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60년대 주류 음악 문화가 대체로 섹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면, 적어도 마약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이 또한 대체로 스타일의 문제였다. 전보다 더 많은 젊은이들이 전보다 더 이른 나이에 부모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피임약은 과거보다 더 안전하고 편리해졌으며 합법적이었다. 영화와 문학에서 육체를 공공연히 노출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을 표현하는 일은 적어도 북서유럽에서 더욱 흔해졌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옛 세대는 성적 구속이 철저하게 무너졌다고 확신했고, 자녀들은 기꺼이 그 악몽을 키웠다. 사실 60년대의 〈성 혁명〉은 남녀노소를 떠나 압도적인 다수에게 일종의 신기루였다는 점은 거의 확실하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도를 받은 문화인류학자들은 언어학 분야의 초기 이론을 차용하여 여러 사회에 걸친 변이와 차이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새롭게 제시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관행이나 문화적 징표가 아니라 내적 본질, 다시 말해 인간사의 깊은 구조였다. 사람들이 〈구조주의〉라고 부른 이 같은 경향은 강한 매력을 지녔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경험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역사의 〈아날〉학파와 계통의 유사성을 지녔다.

제3세계 폭동의 폭력은 해방의 폭력이었다. 장폴 사르트르는 1961년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Les Damnes de la terre』에 쓴 그 유명한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식민주의 혁명의 폭력은 〈자기 자신을 재창조한다. ……유럽인을 쏴 죽이는 것은 일석이조이며 압제자와 압제당하는 자를 동시에 소멸시키는 것이다. 죽은 자와 자유로운 인간이 남게 되며, 생존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밑에서 국민의 땅을 느낀다.〉

권력과 권위의 편에서 보면, 학생들은 지식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 전통적인 프롤레타리아 세력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신좌파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한 집단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권위의 제도와 구조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강의실은 그러한 일을 시작하기에 기계 공작소만큼이나 좋은 장소였다.

60년대 동유럽에서 진행된 경제 개혁 논쟁은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였다. 일부 당 지도자들은 과거의 기술적 오류를 인정할 만큼 충분히 실용적이었다(또는 그 정도로 크게 걱정했다).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 체코 지도부조차 재앙에 가까운 제3차 5개년 계획이 절반쯤 진행된 1961년에 이르면 더는 중공업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계획이나 집단적 소유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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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서유럽 역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독과 영국의 경제적 성취였다. 독일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이나 패전을 겪었다. 도시는 박살 났고, 통화는 붕괴되었으며, 남성 노동력은 사망하거나 포로수용소에 갇혔고, 운송과 공공사업의 기반 시설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영국은 분명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유럽 국가였다. 폭격에 의한 파괴와 인적 손실을 차치하면, 도로와 철도, 조선소, 공장, 광산 등 국가 기반 시설은 전쟁을 거치면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 독일 연방 공화국은 급속하게 발전하여 유럽의 발전소로 번창한 반면, 영국은 성장률에서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한참 뒤처진 낙오자가 되어 있었다. 서독 경제의 규모는 이미 1958년에 영국 경제의 규모를 능가했다. 많은 평자들에게 영국은 유럽의 환자가 되고 있었다.

1950년대에 독일이 경제 〈기적〉을 이루게 된 배경은 1930년대의 회복이었다. 나치는 통신, 군수, 운송 수단 제조, 광학, 화학, 엔지니어링, 비철금속 등 전쟁 수행을 위한 경제에 투자했다. 그러나 그 성과는 뜻밖에도 20년 후에 찾아왔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회적 시장 경제의 뿌리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정책에 있었다.

강요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그리고 개인적 욕구의 과감한 무시는 공산당의 도시 계획이 초래한 재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서유럽의 도시 설립자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지중해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많이 이주한 탓에 도시의 재원에 대한 압박이 상당히 심했다.

엄청난 규모의 도시 파괴, 그리고 과거를 정리하고 한 세대 만에 폐허에서 초현대적 상태로 도약하려는 범유럽적 충동은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된다(고맙게도 1970년대에는 경기 후퇴의 도움을 받았다. 경기 침체로 공공 예산과 가계는 동시에 축소되었으며 광적인 재개발은 중단되었다)

전후 유럽 자본주의의 성공담에는 어디서나 공공 부문의 역할 증대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국가 개입의 성격은 상당히 다양했다. 대륙 유럽의 국가들은 대체로 산업의 직접 소유를 삼가고 간접 통제를 선택했다(대중교통과 통신은 예외였다). 종종 이론상 자율적인 기관들을 매개로 했는데, 문어발처럼 여러 곳에 관여했던 이탈리아의 산업재건공사가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사례였다.

스칸디나비아의 사회 민주당들은 해마다 전체 투표의 3분의 2 이상을 확보했으며, 그 결과로 수십 년간 중단 없이 정권을 담당했다. 때때로 고분고분한 군소 정당들이 참여하는 연립 정부를 이끌기도 했으나 대체로 단독으로 정부를 통제했다.

국가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20세기 초의 신뢰는 여러 형태를 띠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 민주당은 영국 복지 국가의 페이비언 개혁주의처럼 온갖 종류의 사회 공학에 폭넓게 매료되어 탄생했다. 그래서 소득과 지출, 고용, 정보를 조정하는 데 국가를 이용했으나, 조금만 정도가 지나치면 개개인의 삶에 어설프게 관여하려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급부금과 서비스를 정액으로 제공하는 영국식 제도는 유복한 전문직 중간 계급에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점에서 기묘할 정도로 퇴행적이었다. 하지만 비록 표면적이었을지라도 이 또한 어쨌든 평등주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군말 없이 이 제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1960년대 노동당 정부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종합 중등 교육 제도의 도입과 선택 중등학교 입학시험 폐지는 노동당의 장기적인 공약이었으나 1945년 이후 애틀리가 무시해 버렸다) 그 내재적인 장점이 아니라 〈반(反)엘리트주의〉적이어서 〈공정〉하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국가가 시민의 고용과 복지에 점점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는 동안, 시민의 도덕과 의견에 대한 국가의 권위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당시에 이러한 현상은 역설이 아니었다. 유럽의 복지 국가를 옹호했던 자유당과 사회 민주당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정부가 주민의 경제적 안녕이나 의료 복지에 면밀히 주의를 기울이고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민의 복지를 보장하면서, 종교와 섹스 또는 예술적 취향이나 판단 같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들에 관해서는 시민들의 견해와 관행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지당하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10월 11일에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이후 며칠간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톨릭 기독교의 전례와 언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말 그대로다. 소수의 전통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했지만 라틴어는 이제 교회의 일상적 의식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현대적 삶의 딜레마에 대한 교회의 반응도 바꾸었는데 이 점이 더 중요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을 보면 교회는 이제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 민주주의와 혼합 경제, 현대 과학, 합리적인 사고, 나아가 세속 정치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다른 기독교 종파와 화해하려는 첫 번째 매우 시험적인 조치들이 취해졌으며, 유대인이 예수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오래 지속된 설명을 고침으로써 교회에 반유대주의를 억제할 책임이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많이 인정한 것은 아니다). 특히 가톨릭교회는 이제 더는 권위주의 정권의 지지 기반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톨릭교회는 권위주의 정권의 반대자들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1960년대는 유럽 국가들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19세기 서유럽에서 시민과 국가의 관계는 군사적 필요와 정치적 요구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시민들의 현대적 권리는 왕국을 보호할 오래된 의무의 이행과 상계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이래로 그 관계의 특징은 국민이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이루어지는 사회 복지 혜택과 경제 전략의 조밀한 조직이었다.

세월이 더 흐르면, 모든 것을 망라하려는 서유럽 복지 국가의 야심은 매력의 일부를 상실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약속을 절반이라도 지키려 했지만 실업과 인플레이션, 노령화한 인구, 경기 침체 탓에 극복할 수 없는 제약을 안았다. 국내 경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은 국제 자본 시장과 현대 전자통신의 변화로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개입주의적 국가의 정통성 자체가 허물어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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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시학 horology이 연구 분야로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계는 모든 정밀 기계의 원형이다. 일단 시계가 섬세하고 매혹적인 장난감으로서 단순히 찬탄의 대상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정밀 기계로 여겨지는 순간, 순진무구했던 산업의 시대는 끝난다.... <시계와 문명>은 한편으로는 명백하게, 한편으로는 뜻밖의 방식으로 <대포, 범선, 제국>을 보완한다. 즉 대포와 시계의 발전을 선도한 수공업자들이 흔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183


 카를로 M. 치폴라(Carlo Maria Cipolla, 1922 ~ 2000)의 <시계와 문명 Clocks and Culture: 1300-1700>은 그의 다른 저작 <대포, 범선, 제국 Guns, Sails and Empires: Technological Innovation and the Early Phases of European Expansion 1400~1700>의 다른 축이다. 최소한 서양과 동양이 만났을 때, '시계'와 '대포'로 대표되는 서양의 대외진출의 두 상징이 보다 열렬하게 환영받은 지역이 중국과 일본으로 달랐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이후 행보가 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양의 시계와 화기가 극동에 출현했을 대 공상적인 중국인들은 시계에 매료된 반면 호전적인 일본인들은 특히 총포에 매료되었다. 일본인들은 곧 화승총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분명 대량의 화승총을 생산했다(p98)... 중국의 기술력이 일본보다 부족했으리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하지만 중국의 관료 정치 및 관료제적 구조가 중국 수공업자들의 잠재력이 꽃필 기회를 방해했다고 볼 근거는 있다(p101)...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요인은 두 나라의 크기의 차이와 대다수 중국인의 삶의 고립성이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2/183

 

  <대포, 범선, 제국>이 군사력을 활용한 서양의 대외거점 확보와 상업 독점권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서 대포로 표현되는 상업자본주의의 진출을 그린다면, <시계와 문명>은 도시의 상공업자와 장인들에 의한 산업자본주의의 대외진출을 표현한다. 여기에 중국에서 시계가 예수회의 대(對)중국 선교활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의 진출 도구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수단 외에 상품으로 제국주의를 본다면 스벤 베커트의 <면화의 제국>도 논의에 추가할 수 있겠다. 이상은 <시계와 문명>에서 제국주의의 진출과 관련해서 점검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유럽 상인들은 선교사들의 실례를 금방 본받아, 무역 허가와 상업적 특권을 얻고자 유력 인사에게 값비싼 시계를 바쳤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면 뛰어난 솜씨와 기술로 만들어진 시계가 아시아의 통치자들에게 바치는 선물 가운데 흔히 포함되었다. 특히 관료제가 권력 남용이 쉬운 여건을 제공하고 관리와 환관들이 때로 뇌물로 매수될 수 있는 중국에서 시계는 흔히 선물로 이용되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2/183


 

<시계와 문명>에서는 시계가 가지는 자체적인 의미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science'과 '기술 technology'의 결합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이후 동방으로부터 수입된 자연과학 지식은 좌표계의 원점을 신(神)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으며, 그 과정에서 신학을 대신한 과학이 등장하고, 시장 경제 발전과정에서 정기시(定期市, fair)가 열리며, 도시 중심의 상공업자들과 길드의 형성은 대량 생산 기술과 인프라 구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금속 활자 인쇄술이 대량의 독일어 성경 인쇄를 가능케 하며, 기술은 이미 가톨릭 신학과 중세에 일격을 가한 바 있었다. 이제, 기술은 과학과 결합하며 새로운 근대를 여는 입구에 서 있었는데, 이러한 과학기술 연합의 결정체가 바로 '시계'다.


 성숙한 과학자 대 단순한 수공업자란 식의 순진한 이분법으로 현상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더 미묘한 방식으로, 훨씬 더 복잡한 경로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작동한다(p29)... 결국에는 혁신자들이 승리했다. 그들의 승리는 경험주의와 실리주의에 물든 새로운 철학의 승리였고 새로운 철학은 인간 지식의 모든 분야에 침투했다. 수학은 분석의 주요 도구가 되었고 기계는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 자리 잡았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30/183


 측시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서로 맞물려 있는 기술적 변화의 더 폭넓고 복잡한 흐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햑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응용역학의 전반적 발달에서 첨단을 달리며 과학 기구의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p61)... 정밀 기기는 과학의 진보를 가져온 반면, 과학은 정밀 기기의 향상을 가능케 했다(Les instruments precis font progresser la science, tandis que la science permet l'amelioration des instruments precis)". 오랜 잉태 기간을 거친 후 우리의 근대과학이 탄생했다. 그리고 누적된 과정은 점진적으로 그 발전을 가속화했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3/183


 저자는 <시계와 문명>에서 시계의 의미를 이와 같이 발견하지만, 동시에 '왜 이러한 과학기술 문명'이 동양에서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이는 19세기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材)의 한계와도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시계의 부품이 아닌 시계침이 가리키는 움직임의 의미와 세계관에 대한 이해 없이 결과를 내려는 시도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실증된다. 그렇지만, 치폴라는 여기에서 논의를 멈추지 않는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예술과 철학은 배웠지만 과학은 배우지 않았다. 리치 신부가 언급한 대로 "학문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려는 사람 어느 누구도 수학이나 의학에서 실력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도시 생활은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주도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문인 상류층과, "분이나 시가 아니라 날과 달로 시간을 헤아리는" 다수의 농민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시계는 유용하고 실용적인 장치로 활약한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려면 사회의 전면적 변화가 일어나야, 다시 말해 사회의 구조와 필요가 싹 바뀌어야 했다. 기계는 환경과 다른 인간들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만 실천적인 의미를 얻는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91/183


 동양에서 과학기술의 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문명의 한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들이 필연적으로 결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각기 서로 다른 자연환경과 사회구조, 사회적 요구와 필요성이 문명의 다른 화학적 결합을 끌어냈기에 문명의 우열(優劣)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로빈 G. 콜링우드가 썼듯이 "두 가지 다른 삶의 방식을 두고 두 방식 모두 같은 것을 이루려 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바흐는 베토벤처럼 곡을 쓰려다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테네는 로마가 되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시도가 아니다.".. 우리는 록펠러 재단의 이사가 한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왜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 걸쳐 중국이 유럽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은 다소 예의 없을 뿐 아니라 무의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어쨌든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103/183


 <시계와 문명>은 서양의 정밀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영향에 대해 분석하며. 이를 통해 동서양 문명의 차이를 큰 틀에서 이해하게 만든다. 동시에, 과학기술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를 보여줌에도 이에 대한 확대해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책이다. 동서양 문명을 같은 선상에서 인식했을 때 오늘날 서구 문명이 처한 한계상황에 대한 처방을 동양 문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페르낭 브로델 (Fernand Braudel)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설명하는 물질문명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관계 설저에서 구조적인 움지임을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사치와 자본주의> <전쟁과 자본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과 <시계와 문명>은 미시적으로 흐름을 파악하게 한다. 때문에 이들을 서로 연결해서 읽는다면 보다 알찬 독서가 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제 다시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마지막 3권으로 넘어가야겠다...


 16세기와 17세기는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을 목도하고 대양 항해가 크게 확장된 시기였다. 천문학자와 항해자 모두 정확한 경도를 결정하고 별이 뜨는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해 정밀한 시간 측정 기기가 필요했다. 그와 동시에 고도로 정밀한 측시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과학혁명의 핵심인 역학의 기본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과학자들이 시간 측정 문제에 주목하게 된 17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측시학에 과학적 원리와 체계적인 실험이 적용되었다. 당시 과학자와 시계공들은 긴밀하게 협력했고 그 결과 일련의 혁명적 발견이 이루어져 시계 제작의 기술 진보에서 돌파구가 열렸다. _ 카를로 치폴라, <시계와 문명> , p60/183


PS.  치폴라는 '시계'가 중국에서 보다 환영받고, '대포'가 일본에서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서구화의 차이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니다. 치폴라 사후인 오늘날 정밀과학 기술에 보다 관심을 보인 '시계'의 중국이 많은 부분에서 미국의 첨단과학을 따라잡으며 G2로 우뚝 선 반면(최근에는 주춤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재무장에 열을 올리는 '대포'의 일본은 1985년 프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여년을 겪으며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직접 경험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역전된 이들의 위상을 지켜보며 근대화의 정의와 함께 역사 해석의 적정한 시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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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5-29 12: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이런 책 좋아하는데 요즘은 이런 류를 여유있게 보지를 못하네요
자극받고 갑니다.
페르낭 브로델은 번역때문인지 잘 안읽히더라구요....^^
지중해의 기억 읽다가 그냥 몇페이지 참고만 하고 말았어요

겨울호랑이 2022-05-29 10:39   좋아요 4 | URL
그레이스님 말씀처럼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는 편하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를 이루는 3층 구조를 설명하려는 브로델의 방대함과 꼼꼼함이 함께 들어가 있어 어려움을 더하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지중해의 기억>은 저자의 다른 작품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전에 먼저 읽으면 전반적으로 도움이 되는 책으로 생각됩니다. 대작이 주는 느낌도 다르지만, 다만 학술서에 가깝기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내용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는 것도 같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2-06-10 0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식 시간과는 너무나 다르군요. 묘시에 만나자는 어떻게 해석하나 궁금했던 적이 있어요. 기차와 함께 서양의 정확한 시계개념 들어왔다고 하던데 ㅠㅠ 이 리뷰를 제가 왜 놓쳤을까요. 넘 재미있어요 호랑이님 ㅎㅎ그리고 축하드립니다 *^^*

겨울호랑이 2022-06-10 10:17   좋아요 2 | URL
미니님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서양 문명의 특성은 수량화, 정량화로 요약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상품이 대포와 시계이고, 치폴라는 이들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으면서도 알기 쉽게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하라 2022-06-10 11: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즐겁고 기쁜 주말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10 13:26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2-06-10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0 22: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벌써 올해도 반이 지나갔네요. 건강한 주말 보내세요! ^^:)

thkang1001 2022-06-11 0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2-06-11 08: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께서도 행복한 초여름의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thkang1001 2022-06-11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시계에게는 모든 하루가 다 똑같고 동일한 길이이다. 사람들에게 하루하루의 의미는 각기 다르다. 이 책은 아름다운 나머지 너무도 짧았던 날들을 회상하며 쓰였다. ut hora, Ora, sic dies nostri(우리의 날은 시간과 같다).

반면 숙련공의 유출은 한 나라의 쇠퇴에 일조하면서 동시에 쇠퇴의 징후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많은 수의 유능한 수공업자를 잃은 이탈리아는 역동적이고 고도로 수용적인 사회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정체되고 보수적인 사회로 바뀌었다.

마침, 숙련 노동력을 수입하던 나라들은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신앙도 채택했는데 이 새로운 신앙에서 핵심적이라 할 수 있는 성서지상주의는 문자 해득을 장려함으로써 인적 자원의 질적 향상에 기여했다. 이것들과 다른 요인들이 결합하여 1550년부터 1650년 사이 유럽 경제력의 균형추가 이동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베사리온 추기경이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이탈리아로 가서 서방의 최신 기술을 배우라고 촉구한 지 두 세기가 지난 후, 기술 발달과 경제 발전의 지도적 위치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야금술에 한해서는 스웨덴이 차지하게 되었다.

생산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의 상당 부분은 수요 측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 즉 중간계급과 시계를 구입할 여유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비율이 꾸준하게 증대하는 상황과 엮여 있었다. 수요와 공급 양 측면에서 발전이 결합하여 시계는 더 널리 유포되었다.1

초창기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중세 수공업자들이 정확성에서 눈에 띄는 개선을 이뤄내지 못한 반면, 신기하고 매우 복잡한 운동 장치가 달린 시계를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탈진기를 제어하는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보다는 톱니바퀴에 또 다른 톱니바퀴를 추가하는 것이 더 쉬웠다. 한편으로 복잡한 운동 장치는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체의 회합會合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인간사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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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역사 2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88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지음, 한정숙.허승철 옮김 / 아카넷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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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세기의 우크라이나의 민중 운동은 어떠한 해악적 외부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었다. 형제단은 우크라이나의 종교적 삶의 연원을 순구한 사도(使徒) 시대 기독교에서 찾았고, 코자크 제도의 기원은 자유, 평등, 형제애에 바탕을 둔 고대 슬라브인들의 민주주의의 토대와 결부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국처럼 차르를 사랑하지 않고, 폴란드처럼 지주를 사랑하지 않으며 대신 코자크 제도, 즉 형제단을 만들었다고 코스토마로프는 썼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28


 17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다룬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Mykhailo Hrushevskyi, 1866~1934)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는 리투아니아-폴란드, 모스크바(러시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서 끊임없이 독립하려는 코자크를 중심으로 한 우크라이나의 민족의 의지와 열망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17세기)에 이르면 코자크 체제는 이미 충분히 정비되고 확정되었다. 이 제도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지만, 단순함과 자유로운 성격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동시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코자크 형제단의 영혼과 몸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코자크 조직에서 경이로운 조직 구성의 소질을, 다시 말해 단순한 수단과 원시적이고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재료를 가지고 이토록 탁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소질을 보여주었다. 코자크 조직의 가장 중요한 중심은 여전히 드니프로 강 하류 유역(니즈)에 자리잡고 있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5


 흐루셰브스키에게 '코자크'는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다. 코자크와 지휘자 헤트만을 선출하는 방식은 아래로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조직을 연결시켜주었고, 코자크의 군사력은 대외적으로 이들은 폴란드, 러시아 지배계급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자치권을 가진 군사집단. 훗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에 의해 헤트만 통치권이 폐지되기 전까지 코자크 제도는 우크라니아 민족을 유지하는 중추였음을 역사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코자크들의 최고 지도자는 보통 헤트만이라고 불린 선출된 장교가 맡았다. 이 직위를 맡은 지휘관들은 코자크에게 보낸 편지뿐 아니라 폴란드 정부와 심지어 국왕에게 서신을 보낸 때에도 스스로 헤트만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 반면, 폴란드 정부는 이들을 '최선임지휘관'이라 불렀다(p27)... 코자크들은 자기네 최고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권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권리는 코자크 자치의 기초였다. 코자크들은 단지 자신들이 선출한 헤트만을 인정할 권한만을 폴란드 정부에게 허용했다. 그러나 정부가 선출 결과를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의 헤트만 선출과 해임을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정부가 무엇은 원하는지 그 희망사항의 의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8


 코자크들은 폴란드와 용병계약을 체결하고 형식적인 지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실질적인 독립을 추구하였으나, 코자크들이 강성해지길 원치 않는 폴란드 지배계급은 실질적인 자치를 억누르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쳤기에, 이들은 또다른 외세인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된다. 이러한 코자크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은 이들 두 나라에 그치지 않았다. 때로는 스웨덴과 투르크에게도 손을 내민 그들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드네프르 강을 경계로 우안과 좌안이 각각 폴란드와 모스크바(러시아)에 분할되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나 독립의 추구가 가져오는 비극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보편법칙인 듯하다.


 페트로 사하이다치니는 폴란드가 전쟁 수행을 위해 또다시 코자크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올 터이니 그때까지 폴란드와 전쟁으로 치달아서는 안 되며 코자크들은 국왕에게 복종하겠다고 약속하고 실제로 표면적으로는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코자크들의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정책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6


 흐멜니츠키는 타타르 칸에게 폴란드를 공격하도록 촉구했으며, 더 나아가 투르크의 술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칸으로 하여금 술탄의 명령에 따라 폴란드 전쟁에 나서게 강요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동시에 모스크바와도 접촉해 이 나라가 폴란드와 전쟁에 나서게 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모스크바 정치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는 우크라이나를 차르의 지배권 아래 두겠다고 약속했다. 흐멜니츠키는 투르크의 종주권 아래 있는 이웃 국가들, 곧 몰다비아의 군주와 트란실바니아 공과도 교섭했다... 이러한 모든 교섭 중 우크라이나의 장래 정책과 관련해서 가장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은 흐멜니츠키와 모스크바국의 협상이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46


 스웨덴에서는 카를 10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는데, 그는 폴란드와의 옛 전쟁을 다시 시작하는 문제를 고려했다. 개신교 국가인 스웨덴과 트란실바니아는 폴란드를 완전히 패배시킬 희망을 갖게 되었고, 두 나라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정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가톨릭 귀족들과 정부의 학정에 크게 시달리고 있는 신교도 권문세가의 지원을 기대했고, 오랜 기간 동안 트란실바니아와 스웨덴을 폴란드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교섭해 온 흐멜니츠키에게도 기대를 걸었다... 그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연합해서 참여하자는 스웨덴 왕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161


 그리고, 폴란드-러시아의 분할점령기간 동안 코자크의 장교층들은 각각 폴란드 지주와 러시아 귀족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우크라이나 민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민중과 코자크의 긴밀한 연대는 이로써 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민족의 한 기둥의 힘을 사라졌다. 식민통치가 가져오는 가장 큰 폐해는 수탈이나 약탈이 아닌 계급분할, 새로운 기득권의 출현이며, 이들이 갖지 못한 정당성의 상실은 매우 오랜 기간 사회 문제로 남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흐루셰브스키 역시 이후 우크라이나 민족 정신의 근간을 동방정교회와 정교회 중심의 교육제도, 문학에서 찾는다. 


 모스크바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았기에 코자크 장교들에게 충성스러운 봉사의 대가로 관급소유지를 후하게 나누어 주었고, 헤트만의 청원도 들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모스크바 정부는 코자크 장교들에게 안단한 멍에를 덮어 씌웠다. 그러나 이 멍에는 달콤한 것이었으니, 코자크 장교단은 기꺼이 이를 받아쓰고 그 속에는 모스크바 정부가 지시하는 길을 가볍게 따라갔다. 그들은 모스크바 권력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행하면서 장교단의 이익에 봉사했다. 그들은 코자크 군단 토지를 사유화하고 주민들을 농노화하는 이 같은 과정에서 모스크바 권력에 협력했다(p246)... 헤트만 사모일로비치와 마제파의 시대는 40년간 지속되었다. 이 기간은 1648~1649년의 위대한 봉기에 의해 형성된 자유로운 체제의 운명이 결정된 시기였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불완전하게 형성된 이 자유로운 체제가 무너진 폐허 위에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새로운 예속이 형성된 시기였고, 이 예속이 그후 자유로운 정치 체제의 유산과 새싹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그것은 토지의 탈취와 주민의 농노화였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247


 18세기 후반 드니프로 좌안 지역과 자포로쟈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제도가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 드니프로 우안 지역과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고 새로운 기초가 형성되었다. 폴란드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폴란드는 우안 우크라이나 최후의 민중 운동을 진압하고 서부 우크라이나 지역에 통합교회를 도입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생활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러자마자 폴란드 자체의 국가생활이 예상치 못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471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민중어는 출판물과 학교 교육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문학에서는 결코 그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러시아 검열 기관이 우크라이나어와 고대슬라브어 혼합어인 우크라이나 문어의 사용을 금지하여 이 언어가 사멸지경과 빠져버리자, 순수 우크라이나어는 유일한 현지 언어로서 심지어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00


 흐루셰브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 2>의 마지막은 우크라이나 문학에 기반한 민족의식이 폴란드-러시아에게 분할, 폴란드의 삼국분할, 오스트리아 지배, 볼셰비키 혁명, 독일 지배 등 숨가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도 이어져왔음을 기록한다. 민족 역사의 많은 시기 동안 독립된 국가가 아닌 예속된 상황을 겪어야 했던 이들의 비극과 비극 안에서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의 언어인 우크라이나 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어를 둘러싼 우크라니아-러시아 갈등의 문제가 중요성을 이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고,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드네프르 강 좌안과 우안의 서로 다른 성향이 폴란드-러시아 지배에 있음을 독자들은 역사로부터 알게 된다. 현재 전쟁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의 모든 문제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인이 바라보는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인의 역사>는 매우 유용한 책이라 여겨진다.


 우크라이나 문학은 민중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 사항을 이해하며 농노적 예속 상태에 놓인 몽매하고 불행한 우크라이나 인민대중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사회적-정치적 방법을 깨닫는 길로 차츰 다가갔다. 상층이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토양과 만나야 했고, 우크라이나 생활의 모든 희망은 촌락 주민 대중과 그들의 해방 및 정신적 발달의 전망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 민중을 인간적인 관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문제가 우크라이나 소생의 중심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_ 미하일로 흐루셰브스키, <우크라이나의 역사 2> , p513

교육과 서책문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하이다치니는 키예프의 교회인사들 및 학계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우크라이나 생활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었다. 수백 년간 세인의 인식에서 사라져 망각 속에 있었고, 스스로도 자신의 옛 문화적, 민족적 의미를 점점 더 잊어가고 있던 키예프가 16세기에 갑자기 새로운 생명을 찾게 되었다(p53)... 키예프 인맥은 코자크 집단이 우크라이나 사회의 상류 계층과 처음으로 접촉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이제까지 코자크들은 단지 우크라이나 농민들과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을 뿐이다. 농민들은 코자크들을 통해 농노제의 멍에에서 해방될 기회를 찾고 있었다. - P60

흐멜니츠키와 코자크 장교단은 자신들의 계획이 모스크바국의 계획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았다. 그들이 원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해방과 새로운 자유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 폴란드와 싸우는 데 필요한 지원을 모스크바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국은 우크라이나를 새로 얻은 자국 영토로 간주해 여타의 행정구역이나 영토처럼 지배하려 했다. 모스크바국이 폴란드와 전쟁에 돌입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러한 행동에는 전에도 차지했던 적이 있는 벨라루스 영토를 획득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P159

테테랴와 브루호베츠키가 각각 헤트만에 선출되면서 헤트만령도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드니프로 강 우안 지역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상급권 아래 여전히 남아 있었고, 좌안 지역은 모스크바국의 상급권 아래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힘은 더욱더 약화되어 이 나라의 해방은 꿈꾸기조차 어려워졌다. 양 진영의 반목으로 인해 많은 힘이 낭비되었고 설장가상으로 혼란과 무관심, 정치적 의식의 취약성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출해내는 것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이익과 명예욕을 달성하는데 더 관심이 많은 음모자들과 야심가들이 도처에서 준동하여 수중에 권력을 틀어쥐었다. - P202

코자크 장교단은 리투아니아 기본법을 현행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법규집의 일관된 특징을 이루고 있던 신분제 원칙과 귀족적 특권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 했다. 그들은 스스로 귀족신분이라 자칭했고 ‘소러시아 귀족단‘이라는 이 용어는 18세기 중반 이후 공식용어에서 점점 더 널리 사용되었다. 코자크 장교들은 리투아니아 기본법 가운데 귀족의 권리와 특권에 대한 규정들을 자신들에게 적용함으로써 폴란드 귀족층이 누렸던 똑같은 권리를 우크라니아의 체제와 생활에서도 차지하려 했다. - P363

우크라이나의 정파들과 정당들은 원칙적으로 연방 제도가 미래를 위해 가장 유용한 삶의 형태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우크라이나 정체성에 대해 비우호적이고 한마디로 적대적인 온갖 세력들이, 러시아 국가의 통일성과 분리불가성을 옹호했던 온갖 세력들이 연방제라는 보호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연방제를 지지하고 있엇는데, 그 목적은 오직 하나, 곧 러시아 제국의 유산과 러시아 제국의 통일성이라는 노선을 내세워 (우크라이나의) 국가건설과 경제건설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P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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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22 1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513쪽을 넘어서는 두툼한 역사서, 겨울호랑이님.발췌해주신 문장으로 살짝살짝.간만보고 갑니다^^;,항상 깊게 꾸준히.읽으시는.겨울호랑이님께 감탄사를.맘 속으로 연발하고 가게됩니다. 형제단은 말그대로 brothers뉘앙스인 걸까요?^^;

겨울호랑이 2022-05-22 13:50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말씀하신 형제단은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으로 일종의 비밀결사 조직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는 18세기 폴란드-러시아 분할 점령 이후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주된 흐름으로 가톨릭-정교회의 통합교단에 대한 정교회 차원에서의 대응과 함께 교육, 출판 등을 통한 문화투쟁이 그려집니다. 한길 그레이트 문고에서 출판된 셰브첸코의 <유랑시인>이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구요. 우크라이나 역사를 잘 알기 위해서는 더 깊게 공부해야겠지만, 대략 이 정도로 큰 줄기를 잡은 독서였습니다. ^^:)

2022-05-23 0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5-23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