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전후관계를 새로 인식한 현대 역사가들은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이라고부른 것은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었던가? 그들은 이렇게 묻고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 역설적으로 죽어가면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혁명이 발명한 앙시앵레짐이 아니라 혁명을 낳은 앙시앵레짐, 혁명으로 연결되는 앙시앵레짐의 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 사실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절대왕정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왕의몸이 신성하기는커녕 창녀에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믿음은 앙시앵레짐 문화의 밑바탕이라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절정기가 끝나고 그 표상마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절대왕정의 중요한요소인 신권le droit divin을 가진 왕이 신성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처럼 루이 15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외교문제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의 힘에 좌우되었고 군대의 힘은 결국 재정문제에 의지했다. 절대왕정이존재하는 근본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인 상비군을 유지하는 방법은 효율적인 징세제도에서 찾아야 했지만 면세특권과 불평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을 찾기란 어려웠다.

네케르는 1788년 11월에 제2차 명사회를 소집했다. 명사들은 전국신분회 소집방식과 절차를 다루면서제3신분의 요구를 거절했다. 제3신분은 제1신분과 제2신분의 대표수를 합친 수만큼이라도 대표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했고, 게다가 대표자수가 늘어도 신분별 투표를 개인별 투표로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개인별 투표방식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인구의 98퍼센트인 제3신분은 인구에비례해 대표를 뽑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3신분제의 한도 안에서 제3신분이 차지하는 몫을 늘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지만, 14세기 초부터 1614년 마지막으로 열린 전국신분회의 틀에서 볼 때 그들의 요구는 혁명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미제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미제르‘의 유일한 재산은 자연이주는 선물인데 아무나 훔쳐가기 때문에 가난하며, ‘죽음‘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미제르, 즉 가난을 데려가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18세기에만 여남은 개도시에서 14개 판본에 수백만 권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민중은 무슨생각을 했을까? 민중은 남에게 자기 물건을 도둑맞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을 보호해줄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난이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다.

"제3신분은 강건한 인간(남자)이지만 한 팔이 아직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만일 특권층을 제거한다면 국민은 전보다 못한 존재이기는커녕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러나 구속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전부다. 만일 특권층이 없다면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전부가 된다.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부가 제3신분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이  없어도 무한히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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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가들은 제국이란 ‘무력’으로 얻어내고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나폴레옹의 태도가 영국의 태도와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는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도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나폴레옹이 정복전쟁 동안 탈취한 막대한 양의 예술품을 반환하라는 요구도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 사회들이 일종의 균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균형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들로 깨졌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유럽에 다시 안정을 가져오려면 "정당한" 통치자들이 왕위에 복귀해야 하며 나폴레옹이 초래한 변화들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부는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 평형 상태는 또한 서부에서 프랑스를 억제하고 동부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방지함으로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수호하려는 메테르니히의 목표에 핵심적 성격을 부여했다.

정당성 원칙의 옹호자로 스스로를 내세움으로써 탈레랑은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패전국에서 러시아의 침략적 행위를 억지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파트너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당연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정치적 전설이 자라나게 했고, 전설은 재빨리 그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후손들에 의해 기려지고 이상화된 자애로운 황제에 대한 강력한 신화로 진화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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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아대륙이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로는 급성장하는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조각조각 난 인도 토후국들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유지하고 손실을 메우고,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인도 세포이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갈수록 더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군사력은 전장에서 충분히 통했고, 더 중요하게는 유럽 정규군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그 결과 회사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는 비용은 줄곧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다.

동인도회사 총독으로 웰링턴 공작의 형 리처드 웰즐리가 임명된 것은 영국이 인도 지배를 확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5장에서 살펴본 대로 웰즐리는 유럽 대부분 나라의 발목을 잡은 혁명의 혼란을 면밀히 주시했고, 바로 지금이 인도에서 영국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입지를 다지고 나면 인도의 방대한 자원들은 영국의 이해관계를 전 세계적으로 증진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웰즐리는 프랑스 세력에 대한 공포를 자신의 제국주의적 구상에 대한 구실이자 영국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그가 인도 토후국들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종속 동맹 시스템에 대한 영국의 태도 변화가 확연히 감지되었다

중국의 관점에서 마카오 사건은 아닌 게 아니라 만만찮은 적수에 맞선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러한 결론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의 개입이라는 더 폭넓은 국제적 맥락을 간과한 것이다. 육군은 유럽에 투입되어 있고 해군은 전 대양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고, 그것이 핵심적인 세입원과 엮인 경우라면 더욱 그랬다.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모리셔스 함락은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영국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프리깃함들을 압수했을 뿐 아니라 인도양 전역에 걸친 추후의 활동을 위한 핵심 기지도 손에 넣었다. 〔프랑스식 지명 모리스에서〕 모리셔스로 재명명된 섬은 1968년까지 영제국 소속으로 남았다. 마스카렌제도의 함락 소식은 그랑포르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폴레옹이 프랑수아 로크베르 후위제독에게 소규모 전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출항하라고 재가한 뒤에야 도착했다.100 로크베르는 1811년 2월에 마스카렌제도에 도착했다가 그곳이 영국인들의 수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군 전대가 곧 그들을 추격해 1811년 5월 20일에 타마타브(마다가스카르에 있는 교역소) 근처에서 한 척을 제외하고 모두 사로잡았다. 타마타브 전투는 인도양에서 벌어진 프랑스 해군의 최종 교전이었고 영국 상선들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을 거의 다 종식시켰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20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 물론 여기에 표명된 감정은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의 여파로, 에스파냐 영토에 대한 미국의 욕망은 더욱 커졌다. 미국 정부는 영국이 플로리다를 탐낸다고 의심했는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한참 지나서까지도 지속될 의혹이었다. 더 목전의 목표는 영국의 해상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식민지 염원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제국적 권력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국가들에서 민족의식의 기운을 일깨웠고, 프랑스의 점령은 교육 받은 엘리트층과 궁극적으로는 서민들로부터 애국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족 정서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곳의 저명한 독일 작가와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선전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데 위대한 재능을 바쳤다. 앞서 겪은 군사적 패배들과 그에 따른 깊은 낭패감과 굴욕감은 독일 계몽사상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해, 이전의 세계시민주의와 합리주의 요소를 희생시켜가며 독일 계몽주의에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에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52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그의 보급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전 세계에 걸쳐 무력 분쟁에 얽혀 있고, "그중에서도 나라의 이해관계가 (…) 더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지역에서 싸움을 한층 더 열심히 수행하는 데"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다. 리버풀의 편지는 캐나다가 스스로 건사해야 하며, 캐나다에서 영국의 전략은 순전히 미국에 영토를 뺏기지 않는 수세적인 전략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영국군이 나중에 멕시코만 연안지역과 체서피크만에 공세를 감행했을 때에도 이 군사작전들의 전반적인 목적은 캐나다 전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반대편 미국의 전쟁 목표는 선원의 강제 징모와 해상에서 중립국의 권리 쟁점을 놓고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뿐 아니라 쇼니족의 테쿰세와 텐스크와타와가 수립한 대연맹 같은 친영파 원주민 부족과 캐나다를 상대로 한 영토 팽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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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폴레옹이 놓친 것은 술탄이 영국과 러시아의 군사력과 해군력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술탄은 두 나라가 프랑스보다 자신들의 위협과 야심을 무력으로 뒷받침할 능력이 더 있다고 판단했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새로운 러시아-오스만 동맹에 대한 술탄 셀림 3세의 헌신이 3차 대불동맹전쟁의 승패에 달려 있음을 이해했다.

곧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할 러시아-오스만 관계에서 커져가는 긴장은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 동안 발생한 지정학적 재배열이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3차 대불동맹전쟁 이후 프랑스는 중유럽을 지배하게 되었고 발칸 지역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전 베네치아 영토들을 획득했다. 프랑스 정부의 대리인들이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지시를 받아 발칸의 다양한 지역들로 파견된 한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프랑스 영사관은 반러시아 공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메테르니히가 이 주제를 나폴레옹한테 꺼냈을 때 그는 배제되기는커녕 실은 오스트리아가 발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레옹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시기하는 오스트리아를 이용해 그 지역에서 더 이상의 팽창을 막을 수 있길 바랐다.

1813~1815년 동안 유럽이 나폴레옹을 상대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이에 오스만 중앙정부는 잠시 결정적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유럽의 갈등에 중립을 선언했고, 이탈리아로 원정을 감행하도록 러시아 전함이 해협을 통과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영국의 제의를 거절했다. 술탄 마무드는 잠깐 열린 기회의 창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지방들에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 방어적 개발주의라는, 궁극적으로는 근대화로 나아가는 프로그램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러시아와의 전쟁 종식으로 그는 세르비아로 군사적 자원을 전환할 수 있었다.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패배와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큰 힘을 실어줬으니 이제 러시아가 오스만튀르크에 맞서 세르비아를 자유롭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술탄 마무드는 러시아의 간섭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신중히 처신했다. 그는 세르비아에 제한적인 자치를 허용하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 군주로 인정했다. 정치적인 행보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도 모르게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해체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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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유럽의 상인들 - 무법자에서 지식인으로 역사도서관 교양 18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 지음, 김위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이른바 '상업혁명'은 대부분의 서유럽 사회를 바꿔 놓은 일종의 사회혁명이기도 했다. 사회 변화와 더불어 한 계층이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특히 중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 독일 한자동맹(Hansa 同盟)에 속했던 많은 도시 그리고 카탈루냐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새로 생겨난 눈에 띄는 중요한 사회 변화는 바로 상인 계층의 등장이었다. 장원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천한 신분으로 간주되었던 상인이 이제는 상류 계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48

카를로 M. 치폴라 (Carlo Maria Cipolla,1922 ~ 2000)의 <중세 유럽의 상인들 Tre Storie Extra Vaganti >는 상인(商人, merchant)을 주제로 한 짧은 대중역사서다. 14세기 초 대상인의 등장 시기와 이후 17세기와 18세기 화폐(貨幣)경제에서 상인의 움직임이 가져온 변화를 통해 독자들은 당시 생생한 경제활동을 중계방송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도시를 주름잡은 상인은 대상인(grandi mercanti), 다시 말해 보통 상인과는 달리 대체로 국제 교역에 종사하며 상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및 금융업(환전과 은행 업무)을 겸하던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새로운 형식의 경제 조직체가 육지 무역쪽에서 형성되었는데, 이른바 '콤파니아'라고 불렸다. 콤파니아의 탄탄한 기반은 전형적인 가부장제 형태의 가족이었다.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 (vecchio)이 판단 · 결정하고, 처벌하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은 예외없이 여기에 복종해야 했고 이들에게는 '불평'(mugugno)할 권리조차 없었다. 가족은 콤파니아에서 일할 사람을 선별하고 콤파니아의 모든 자본을 관리하였다. 이것도 새로 생겨난 요소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50

세 가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상세하고도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이야기는 바로 14세기 르네상스(Renaissance) 시기 피렌체의 중심 가문의 바르디(Bardi) 가문 이야기다. 중세 말기 봉건제와 교회의 권위가 몰락하면서 이들의 공백을 대신하는 대상인들의 이야기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현대 영어 company에 해당하는 콤파니아(Compagnia)가 장원을 대신하여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왕과 귀족들에게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대여해 주고, 대신 사치품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보던 르네상스 거상(巨商)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1330년대 초에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피렌체의 경제는 말 그대로 완전히 전복되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성이 쓰러지듯이 수많은 콤파니아가 줄줄이 파산했다(p60)... 여러 콤파니아가 파산하자 그 여파를 받아 2차, 3차 산업도 일거에 붕괴되었다. 보통, 콤파니아는 상업 활동 이외에도 은행업과 수공업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콤파니아가 도산하자 신용이 삽시간에 치명적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경제와 관려된 모든 영역이 피해를 입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1

이들의 투자가 항상 성공을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전쟁에 패배한 왕에게 자금을 빌려 준 경우 그들이 가진 채권은 휴지조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푸거(Fugger)가문처럼 바르디 가문은 잉글랜드 군주에게 투자를 하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잉글랜드 군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하고 파산위기에 직면한다. 여기에 더해 피렌체 전체 경기가 수축 국면에 진입하면서 많은 콤파니아들이 무너지는 등 바르디 가문을 둘러싼 상황은 결코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바르디 가문의 처세와 그들의 생존 안에서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

세 콤파니아는 좋은 운수를 타고나지 못했다. 하필이면 앞에서 설명한 1330년대와 1340년대 같은 최악의 시기에, 그리고 바르디 가문의 일이 계속 꼬이기만 하는 그런 때에 창립되었으니 말이다. 이들은 서로 똘똘 뭉쳐 가문 특유의 방식이었던 폭력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바르디 가문 사람 몇몇이 이미 피렌체 정부의 요직에서 일했기 때문에 잘하면 입김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건만, 피에로데이 바르디의 주도로 콤파니아의 일부 회원은 피렌체의 정부 체제를 전복하려고 쿠데타를 꾀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66

교환 중심의 시장 경제라면 바르디 가문은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만,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바르디 가문의 모습은 이 시기에 이미 자본주의적 대처를 잘 보여준다. 막강한 경제력을 활용해서 '화폐위조'라는 중대범죄를 저지르고도, 정치력을 발휘해 독점권을 강화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근대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트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15~18세기 유럽 경제를 분석하며 자본주의의 근원을 찾으려 했지만, 치폴라는 넌지시 자본주의의 기원은 이보다 이전 시대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바르디 가문 사람에게 법이라는 것은 '타인'을 통제하기 위한 편리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법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고 생각하였다. 베르니오 법령을 새로 제정한 후 피에로는 극악무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즉 정성 들여 작성한 법령에 의거해 약탈을 일삼고 있던 자들을 모두 응징함으로써 '경쟁자'를 '합법적으로' 제거하였고, 그 일대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약탈권을 독점하였다. 그 이상 극악무도해지기도 힘들 것이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72

특히 바르디 가문 출신의 세 사람이 확신했던두 가지 사실은, 첫째, 경찰의 손에 잡힐 확률은 거의 없다는 점, 둘째, 혹 잡힌다 하더라도 그들이 실형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이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하지는 않았다. 바르디 가문 사람은 특권층에 속했고, 이 때문에 특별히 법에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실제로 이들은 법을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96

다른 두 편의 이야기의 중심도 역시 상인들이다. 화폐의 품질을 조악하게 만들어 유통시켜 막대한 부을 축적하고 한 나라(오스만 투르크)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해상무역을 통해 더 큰 세력으로 커나간 상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14세기 이미 자본주의 형태를 갖춘 대상인들의 현대 자본주의로의 진화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안의 담긴 이야기는 간략하지만 이야기들이 던지는 메세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현대 무기산업자본, 환율을 이용하여 경제소국에게 외환위기를 강요하는 투기자본의 모습과 국경을 넘나드는 다국적 대기업의 모습을 우리는 이미 중세와 근대 초기에 발견할 수 있다. 불과 15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경제사 관련 서적을 우리가 가볍게만 읽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와도 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 문제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세로 가야할 듯하다. 과연 중세 경제사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세 유럽의 상인들>을 읽으며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이후 다른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을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 정부의 모든 힘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조악해질 대로 조악해질 악화 루이지노의 유통을 막아 낼 길이 없었다. 오랫동안 은화 부족 현상을 감내하던 터키 경제는 위조된 대량의 은화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터키의 경제 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더 이상 현금을 가지고 거래할 수가 없었다. 생필품의 가격은 두 배로 뛰어올랐고 빵조차 사 먹기가 힘들었다. 터키 제국에는 루이지노 화폐가 넘쳐났다. 하지만 아무도 이 화폐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 모두들 이 화폐가 하루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주었으면 했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13

상인은 점차 신분이 높은 층과 낮은 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은 프랑스어 사전에도 반영되었다. 상점을 직접 운영하며 소매업을 하던 자나 신분 상승을 꿈도 꿀 수 없던 사람에게는 마르샹(marchand)이라는 이름표가 그대로 남았다. 그 외의 사람, 즉 귀족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던 특권층을 위해 네고시앙(negociant)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만들어졌다. 인간사에 흔히 일어나듯이 용어 정의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싸움, 적대감, 경쟁의식이 생기곤 한다. 어떤 네고시앙을 마르샹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자크 사바리는 다행히도 자신이 네고시앙이라 믿었고 수많은 네고시앙을 위한 경제 입문서를 저술하였다. _ 카를로 M.치폴라, <중세 유럽의 상인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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