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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의 서막 -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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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후관계를 새로 인식한 현대 역사가들은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이라고 부른 것은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인었던가? 그들은 이렇게 묻고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 역설적으로 죽어가면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혁명이 발명한 앙시앵레짐이 아니라 혁명을 낳은 앙시앵레짐, 혁명으로 연결되는 앙시앵레짐의 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32/380

주명철 교수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1권 <대서사의 서막-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Liberte> 앙시앵레짐(Ancien Regime)과 혁명(Revolution)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앙시앵레짐이라는 구체제는 과연 혁명으로 사라져야할 적폐(積弊)인가, 아니면 혁명(革命)의 부모인가?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 사실 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42/380

이 이야기는 가난(미제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미제르'의 유일한 재산은 자연이 주는 선물인데 아무나 훔쳐가기 때문에 가난하며, '죽음'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미제르, 즉 가난을 데려가지 못한다... 민중은 남에게 자기 물건을 도둑맞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을 보호해줄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난이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76/380

저자는 혁명의 근원을 경제적 원인으로부터 찾는다. 이와 함께 본문에 소개된 프랑스 혁명 직전시기 널리 유행한 민담(民譚)은 당시 민중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의 예시로 보여주지만, 사실 이것만으로 혁명으로의 흐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역사상 수많은 '민란(民亂)'이라 불리우는 사건의 가장 큰 이유가 어려운 경제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이전 시기와는 다른 18세기 말 프랑스가 처한 다른 시대 상황은 어떤 것이 있을까.

루이 16세는 계몽사상가 튀르고를 중용했지만 치세 초부터 곡물 값을 안정시키지 못해 '밀가루 전쟁'을 맞아야 했고, 튀르고의 정책에 반대한 네케르를 중용했지만 이 사람이 추진하는 '영국식 군주정(입헌군주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궁정에서 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의 질투와 음모, 그의 사촌 오를레앙 가문의 야망, 왕비의 측근들을 경계하면서 다른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루이 16세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절대주의 체졔를 더욱 거세게 뒤흔드는 위기의 시작이었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197/380

저자는 루이 14세기 절대왕정 시대와는 다른 시대 상황을 '앙시앵레짐의 변화'로 설명한다. 바로크(Baroque)의 장중함에서 로코코(Rococo)의 경박한 화려함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대중들은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던 이들은 이제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뜨면서 이전과는 다른 대처를 하게 되었다.

루이 15세 치세말의 이야기, 이를 테면 비천한 창녀 출신 뒤바리 백작부인이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이 되고 이 여인을 중심으로 파벌이 생겨 국고를 탕진하고 음모를 꾸민 이야기와 함께, 루이 16세의 성적 무능 그리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와 자유로운 생활을 헐뜯는 중상비방문이 마구 쏟아져 나와 선왕시대부터 누적된 적자와 더불어 루이 16세 치세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p126)...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절대왕정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왕의 몸이 신성하기는커녕 창녀에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믿음은 앙시앵레짐 문화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절정기가 끝나고 그 표상마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130/380

루이 16세 치하에서 14년 동안 모든 상황이 변했고 평생 정치와 직접 관련 없이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정치화하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앙시앵레짐의 문화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14/380

민중들에게 주어진 가난과 고통이 민중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특권층의 결정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큰 문제없이 사회를 작동시키던 구조가 민중들의 깨달음을 통해 문제점으로 인식되는 순간 '레짐'은 '앙시앵레짐'으로, 그리고 혁명의 대상으로 변화되었음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민중들은 아폴론의 손이 닿기전 월계수가 된 다프네처럼 정치적 인간으로 갑작스럽게 변화했다. 이제 대혁명은 예정된 사건이었고, 10부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3신분은 강건한 인간이지만 한 팔이 아직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만일 특권층을 제거한다면 국민은 전보다 못한 존재이기는커녕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러나 구속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전부다. 만일 특권층이 없다면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전부가 된다.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부가. 제3신분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이 없어도 무한히 발전할 것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82/380

앙시앵레짐과 혁명을 분리하는 문턱을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국 신분회 대표를 뽑는 유세 기간에 프랑스인들이 갑자기 정치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왕국의 모든 곳에서 오랫동안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때로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울 만큼 잊고 지냈던 불만을 구체적인 언어로 되살려내면서 프랑스인은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했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9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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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07 1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흡이 긴 프랑스사네요
10부작!

겨울호랑이 2022-08-07 20:17   좋아요 2 | URL
아마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책들 중에서는 가장 장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중계방송을 하는 듯한 저자의 친절함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바람돌이 2022-08-07 2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또 이렇게 10권의 장대한 여정을 시작하셨군요. 저는 읽지는 못하고 겨울호랑이님 글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하며 맛만 보는..... ^^;;

겨울호랑이 2022-08-07 21:35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10권의 책이긴 합니다만, 대중 교양서로 쉽게 읽히는 책이라 마치 트래킹 코스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시리즈입니다. 저도 말씀은 이렇게 드립니다만, 읽다가 중도에 딴 길로 새는 경우가 많아서 언제 끝낼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ㅜㅜ 이번에는 좀 집중해서 읽어야겠지요... 바람돌이님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초란공 2022-08-07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공권력을 가진 권력이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고, 일반 국민은 가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을 예로 들면요. 저자의 엄청난 공부와 고민 속에서 탄생한 작품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2-08-08 04:51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처럼 생생하게 당대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독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배려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깊은 내공없이는 불가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기억의집 2022-08-08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읽고 작가분에게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니 책도 많이 내셨네요. 혁명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한 깊은 사고에서 내려진 것 같아 멋진 분이시네요.

겨울호랑이 2022-08-08 11:16   좋아요 1 | URL
주명철 교수의 사촌이 <바다 인류>,<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저자 주경철 교수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서양사학자 두 분이 가까운 관계이기에, 인간적으로 더 깊게 교류하면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억의집 2022-08-08 11:18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이름이 비슷하긴 해도 사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어요.

겨울호랑이 2022-08-08 12:5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건강한 오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Le Contrat social』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공적인 신체personne publique를 옛날에는 도시국가cité라 불렀으며, 이제는 공화국république또는 정치체corps politique(국가)라 부른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국가를 세 가지로 구별해서 부른다.
수동적인 경우état, 능동적인 경우souverain(주권자), 그리고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경우puissance를 구별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와 결합한 사람associés을 집단적으로 인민peuple이라 부르며, 주권을 행사하는 경우 시민citoyens,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경우 신민sujets(국민)이라 부른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을 왕이 만든 법률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던 ‘신민‘이 국회를 만들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으로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하는 근거다.

헌법문제, 재정문제, 농업·상업·상업재판소 문제, 종교·성직자·교육·병원·풍속 문제, 입법문제,
그리고 파리에 한정된 문제를 6개 부문으로 나누어 차례로 다루었다.
"프랑스 군주정에서 입법권은 국민에게 속하며 왕과 함께 나눈다. 왕만이 법을 집행할 수 있다. 국민만이 세금을 신설할 수 있고 전국신분회는 3년마다 열리며 해산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에 모일 날짜와 장소를정한다. 신분회 대표를 선출하는 기초의회도 자동적으로 모인다. 군주는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재다. 왕위는 왕실의 장자상속법을 지켜 세습한다."

왕은 왕국의 조화와 행복을 언급하고 번영을 얘기했지만 이미 왕과 제3신분 대표 사이의 거리만큼 귀족이나 성직자의 특권층과 평민 사이의 거리도 좁힐 수 없는 것임을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예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명 정도의 참관인은 중앙홀에서 일어나는 연극 같은 장면이 앙시앵레짐의 모습을그대로 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참관인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정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앙시앙레짐 시대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프랑스의 정치는 대중에게 공개될 것이다.

시에예스 신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비록 가끔 먹구름이 낀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이끌어줄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권한을 행사하고 무슨 임무를 수행하려고 프랑스 방방곡곡에서 여기 모였는지 스스로 물어봅시다. 우리는 단지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왕의 관리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복종하고 물러나야겠지요. 그러나우리는 인민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서 자유롭게 우리의 임무를 수행합시다. (.....)우리는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맹세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인민의 권리를 되찾아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인민은 우리에게 헌법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누가 헌법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헌법을 만들겠습니까? 여러분의 선거인들을 대표할 권리를 그 어떤 힘으로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시에예스 신부의 말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고 국회는 이미 결의한 내용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수구세력은 어떠한 개혁도 싫어한다. 이 같은 사람은 기득권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개혁세력을 증오하게된다. 개혁도 바라지 않는데 하물며 혁명까지야. 그런 사람은 진정한 반혁명anti-révolution의 성향을 보여준다.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도저히 참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7월부터 보따리를 싸들고 외국으로 나갔다. 왕의 작은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대표적인 사례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수구세력은 혁명을 증오한다.
그러나 혁명세력이 ‘애국자‘라는 이름을 얻고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상태에서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혁명의 흐름에 억지로 끌려간다.

장 조레스의 말대로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 요새와 감옥을 정복했다면 농민은 그 나름의 ‘봉건적 바스티유‘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케케묵은 문서를 뒤져가면서 세금을 걷어가는 영주들의 저택이었다. 모든 농촌 지역이 들고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지역이 무질서를 경험했다. 노르망디의관목숲 지역(캉과 알랑송의 초원지대 서쪽)과 에노, 오트 알자스에서 농민은 성관(군주나 귀족의 별장)과 수도원으로 쳐들어가  문서를 불태우고 영주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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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후관계를 새로 인식한 현대 역사가들은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이라고부른 것은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었던가? 그들은 이렇게 묻고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 역설적으로 죽어가면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혁명이 발명한 앙시앵레짐이 아니라 혁명을 낳은 앙시앵레짐, 혁명으로 연결되는 앙시앵레짐의 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 사실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절대왕정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왕의몸이 신성하기는커녕 창녀에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믿음은 앙시앵레짐 문화의 밑바탕이라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절정기가 끝나고 그 표상마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절대왕정의 중요한요소인 신권le droit divin을 가진 왕이 신성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처럼 루이 15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외교문제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의 힘에 좌우되었고 군대의 힘은 결국 재정문제에 의지했다. 절대왕정이존재하는 근본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인 상비군을 유지하는 방법은 효율적인 징세제도에서 찾아야 했지만 면세특권과 불평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을 찾기란 어려웠다.

네케르는 1788년 11월에 제2차 명사회를 소집했다. 명사들은 전국신분회 소집방식과 절차를 다루면서제3신분의 요구를 거절했다. 제3신분은 제1신분과 제2신분의 대표수를 합친 수만큼이라도 대표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했고, 게다가 대표자수가 늘어도 신분별 투표를 개인별 투표로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개인별 투표방식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인구의 98퍼센트인 제3신분은 인구에비례해 대표를 뽑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3신분제의 한도 안에서 제3신분이 차지하는 몫을 늘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지만, 14세기 초부터 1614년 마지막으로 열린 전국신분회의 틀에서 볼 때 그들의 요구는 혁명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미제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미제르‘의 유일한 재산은 자연이주는 선물인데 아무나 훔쳐가기 때문에 가난하며, ‘죽음‘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미제르, 즉 가난을 데려가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18세기에만 여남은 개도시에서 14개 판본에 수백만 권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민중은 무슨생각을 했을까? 민중은 남에게 자기 물건을 도둑맞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을 보호해줄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난이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다.

"제3신분은 강건한 인간(남자)이지만 한 팔이 아직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만일 특권층을 제거한다면 국민은 전보다 못한 존재이기는커녕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러나 구속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전부다. 만일 특권층이 없다면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전부가 된다.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부가 제3신분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이  없어도 무한히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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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정치가들은 제국이란 ‘무력’으로 얻어내고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일한 수단에 의해 더 우세한 열강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나폴레옹의 태도가 영국의 태도와 조금이라도 다른 게 있는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은 세력 균형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고 프랑스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릴 기회를 알리면서 유럽 전역에 충격파를 몰고 왔다. 1812년 12월 러시아 협상가들과 프로이센 장군 요한 폰 요르크 사이에 체결된 타우로겐 협약은 나폴레옹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도 최종 조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참패를 당한 프랑스에 대해 동맹 세력이 놀랄 만큼 관대했다는 점일 것이다. 중요한 양보로서 그들은 최종 조약이 공식 비준되기도 전에 프랑스 영토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더 나아가 프랑스 군대의 향후 규모에 아무런 제한을 부과하지 않았고, 프랑스가 내야 할 배상금을 산정하거나 프랑스 군대가 점령지와 정복지에서 뜯어낸 막대한 액수를 보상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나폴레옹이 정복전쟁 동안 탈취한 막대한 양의 예술품을 반환하라는 요구도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유럽 사회들이 일종의 균형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균형이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전쟁들로 깨졌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유럽에 다시 안정을 가져오려면 "정당한" 통치자들이 왕위에 복귀해야 하며 나폴레옹이 초래한 변화들의 전부는 아니라 해도 일부는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정치적 평형 상태는 또한 서부에서 프랑스를 억제하고 동부에서 러시아의 지배를 방지함으로써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수호하려는 메테르니히의 목표에 핵심적 성격을 부여했다.

정당성 원칙의 옹호자로 스스로를 내세움으로써 탈레랑은 실질적으로 프랑스를 패전국에서 러시아의 침략적 행위를 억지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파트너로 탈바꿈시켰다. 이는 당연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폴레옹 전쟁은 19세기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쟁은 군주제, 귀족제, 노예제 같은 제도들의 정당성과 전통적 생활방식을 뒤흔들었다. 또한 해소되지 않은 여러 쟁점들을 남겼다. 그러므로 후속 세대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 공화주의와 군주정주의, 산업화와 급진주의의 유산들을 두고 씨름했다.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정치적 전설이 자라나게 했고, 전설은 재빨리 그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의 후손들에 의해 기려지고 이상화된 자애로운 황제에 대한 강력한 신화로 진화했다.

나폴레옹 전쟁은 무엇보다도 유럽 내 갈등이었지만, 유럽과 나머지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력 분쟁은 유럽 국가들이 개혁과 근대화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하도록 강요하고 촉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계 여러 지역들 간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다. 유럽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유럽은 중국과 이슬람 세계의 더 선진적이고 세련된 문명들에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막을 내릴 때쯤 군사적 문제, 산업 발달, 기술력 측면에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유럽의 우위는 확연했다. 이는 대분기의 시작이었고, 이 전환의 엄청난 의미는 19세기가 흐를수록 더 분명해진다.

빈 회의에서 도출된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평화 정착은 네 가지 원칙을 토대로 했다. 첫째, 유럽 열강은 어느 한 나라가 유럽을 지배하는 상황을 막고 평화 유지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장려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세력들 간의 국제적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정당성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은 합법적인 군주정들을 복귀시키고 그리하여 대륙에서 전통적인 제도들의 보전을 외견상으로는 꾀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그리고 나폴레옹 치하에서 많은 군사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귀족계급이 주관하는 군주제 국가들의 구질서는 살아남았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주요 관념들─개인의 자유, 법 앞에서의 평등, 자유방임 경제─은 1815년에 결코 패배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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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아대륙이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 경제로는 급성장하는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경쟁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용했다. 조각조각 난 인도 토후국들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덕분에 동인도회사는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유지하고 손실을 메우고,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인도 세포이 병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에 갈수록 더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러한 군사력은 전장에서 충분히 통했고, 더 중요하게는 유럽 정규군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그 결과 회사의 지배 영역을 확장하는 비용은 줄곧 비교적 낮게 유지되었다.

동인도회사 총독으로 웰링턴 공작의 형 리처드 웰즐리가 임명된 것은 영국이 인도 지배를 확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5장에서 살펴본 대로 웰즐리는 유럽 대부분 나라의 발목을 잡은 혁명의 혼란을 면밀히 주시했고, 바로 지금이 인도에서 영국의 입지를 단단히 다질 순간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입지를 다지고 나면 인도의 방대한 자원들은 영국의 이해관계를 전 세계적으로 증진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웰즐리는 프랑스 세력에 대한 공포를 자신의 제국주의적 구상에 대한 구실이자 영국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했다. 그가 인도 토후국들을 취급하는 방식에서 종속 동맹 시스템에 대한 영국의 태도 변화가 확연히 감지되었다

중국의 관점에서 마카오 사건은 아닌 게 아니라 만만찮은 적수에 맞선 중요한 승리였지만 이러한 결론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의 개입이라는 더 폭넓은 국제적 맥락을 간과한 것이다. 육군은 유럽에 투입되어 있고 해군은 전 대양에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영국은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릴 생각이 없었고, 그것이 핵심적인 세입원과 엮인 경우라면 더욱 그랬다. 마카오 사건은 자국 영토가 침해된다면 중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영국이 가늠해볼 기회가 되었고, 청나라 조정이 그런 일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리란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해가 향후 영국의 대중국 정책을 형성했다.

모리셔스 함락은 인도양에서 프랑스의 마지막 전초기지를 제거했다. 영국은 마지막 남은 프랑스의 프리깃함들을 압수했을 뿐 아니라 인도양 전역에 걸친 추후의 활동을 위한 핵심 기지도 손에 넣었다. 〔프랑스식 지명 모리스에서〕 모리셔스로 재명명된 섬은 1968년까지 영제국 소속으로 남았다. 마스카렌제도의 함락 소식은 그랑포르에서 프랑스의 승리에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나폴레옹이 프랑수아 로크베르 후위제독에게 소규모 전대를 이끌고 인도양으로 출항하라고 재가한 뒤에야 도착했다.100 로크베르는 1811년 2월에 마스카렌제도에 도착했다가 그곳이 영국인들의 수중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군 전대가 곧 그들을 추격해 1811년 5월 20일에 타마타브(마다가스카르에 있는 교역소) 근처에서 한 척을 제외하고 모두 사로잡았다. 타마타브 전투는 인도양에서 벌어진 프랑스 해군의 최종 교전이었고 영국 상선들에 대한 프랑스의 위협을 거의 다 종식시켰다.

결국 그들은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영토를 획득하는 미래가 차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나폴레옹이 신생 공화국을 위협할 식민 제국을 건설하는 끔찍한 그림을 그려 보이며 미국을 영국과의 동맹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1803년 애딩턴 총리는 미국인들에게 영국 정부는 루이지애나가 "프랑스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차원"20에서 미국 영토에 추가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루이지애나 매입 소식을 들었을 때 영국 외무장관은 미국 쪽 상대방[미국 국무부]에게 "폐하(조지 3세)께서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라고 알렸다. 물론 여기에 표명된 감정은 진심과 거리가 멀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의 여파로, 에스파냐 영토에 대한 미국의 욕망은 더욱 커졌다. 미국 정부는 영국이 플로리다를 탐낸다고 의심했는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한참 지나서까지도 지속될 의혹이었다. 더 목전의 목표는 영국의 해상력을 활용해 프랑스의 식민지 염원을 좌절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제국적 권력은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독일 국가들에서 민족의식의 기운을 일깨웠고, 프랑스의 점령은 교육 받은 엘리트층과 궁극적으로는 서민들로부터 애국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족 정서가 꿈틀대고 있었고 이곳의 저명한 독일 작가와 철학자들은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민족주의 선전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의식을 일깨우는 데 위대한 재능을 바쳤다. 앞서 겪은 군사적 패배들과 그에 따른 깊은 낭패감과 굴욕감은 독일 계몽사상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일조해, 이전의 세계시민주의와 합리주의 요소를 희생시켜가며 독일 계몽주의에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러시아 원정은 나폴레옹 제국에 참사에 가까운 결과를 가져왔다. 제국은 전에도 시험에 들었지만 이전의 어느 실패도 러시아에서 당한 패배의 규모에는 근접하지 않았다. 대육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침공에는 궁극적으로 60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지만─주력 침공군은 45만 명이었고 나중에 약 15만 명의 증원군이 더 불려왔다─12월에 네만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10만이 채 못 됐다. 50만 명의 병력 손실 가운데, 아마도 무려 10만 명 정도는 이탈병일 것이고 12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52 나머지는 질병이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또는 혹독한 환경에 노출되어 죽었다. 그만큼 파국적인 것은 군사 장비의 손실이었다. 나폴레옹은 약 1300문의 대포 가운데 920문을 잃었고, 기병은 사실상 일소되었다. 훈련된 말 대략 20만 마리가 러시아 벌판에 쓰러져 있었다. 포병과 기병 어느 쪽도 향후의 전역 동안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대육군은 전력의 거의 절반을 전쟁의 첫 8주 사이에 수비대 배치와 질병, 탈영, 사상자로 인해 상실했다. 또 이번 원정군에는 이전의 전역들에서 볼 수 있었던 수준 높은 규율이나 전폭적인 헌신이 없었다. 7~8개국에서 온 병사들이 원정군을 구성했고, 따라서 그들은 패배의 부침 앞에서 단결력과 규율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나폴레옹은 병참에 철저하게 대비했지만, 그의 보급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에 맞서 전 세계에 걸쳐 무력 분쟁에 얽혀 있고, "그중에서도 나라의 이해관계가 (…) 더 직접적으로 걸려 있는 지역에서 싸움을 한층 더 열심히 수행하는 데"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다. 리버풀의 편지는 캐나다가 스스로 건사해야 하며, 캐나다에서 영국의 전략은 순전히 미국에 영토를 뺏기지 않는 수세적인 전략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심지어 영국군이 나중에 멕시코만 연안지역과 체서피크만에 공세를 감행했을 때에도 이 군사작전들의 전반적인 목적은 캐나다 전선의 압력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반대편 미국의 전쟁 목표는 선원의 강제 징모와 해상에서 중립국의 권리 쟁점을 놓고 영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뿐 아니라 쇼니족의 테쿰세와 텐스크와타와가 수립한 대연맹 같은 친영파 원주민 부족과 캐나다를 상대로 한 영토 팽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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